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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온 하나님의 나라

누가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1878 추천 수 0 2009.07.29 12:5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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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0:1-12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38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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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

복음서에 보도되고 있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는 예수님만 고립적으로 진술하는 게 아니라 대개 제자들과의 관계 속에 있는 예수님을 진술하고 있습니다. 이 제자들은 주로 예수님이 임명한 12사도를 가리키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를 비롯한 여러 여성들이 있고, 오늘 본문 등장하는 일흔 두 제자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제자'라는 말을 거의 열 두 사도로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일흔 두 사람의 제자가 예수님에게 있었다는 오늘 본문에 대해서 약간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승천하신 다음에 120명의 신도가 모였다는 사도행전(1:15)의 보도를 따른다면 일흔 두 사람의 제자가 있었다는 말에 신빙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제자들을 두 사람 씩 짝을 지어 여러 마을로 파견했습니다(1절). 이런 일들은 복음서에 그렇게 흔하게 나오지 않습니다. 9:1-6절에 열 두 제자를 파견한 일이 있고 이번은 두 번째 입니다. 아마 열 두 제자의 파견에서 일정한 전도 효과가 났는지, 아니면 반대로 아무런 효과가 없어서 인원을 늘렸는지 모르겠지만 제자들을 파견하는 일은 복음서에 드뭅니다. 왜냐하면 복음서는 제자들을 언급하는 경우에도 그들은 종속 변수이고 결국은 예수님의 활동이 핵심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자들의 활동은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이 이 세상을 떠나신 다음에 왕성하게 일어나지 예수님 생전에는 거의 없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이렇게 세상으로 파견하셨다는 것은 뜻밖의 일입니다.

아마 예수님은 제자들을 교육한다는 차원에서 이렇게 파견하신 게 아닐까요? 예수님이 전하신 하나님 나라를 그저 말씀으로 듣거나 아니면 예수님에게서 일어난 사건으로 간접 경험하는 데 머무는 것으로는 충분한 학습이 일어날 수 없기 때문에 이들에게 직접 현장에서 경험할 기회를 제공하신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지 제자들을 여러 마을로 파견한 예수님의 속내를 우리가 모두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 장면에서 제자의 원리가 무엇이지를 우선 배울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다시 세상으로 흩어진다는 것입니다. 제자는 곧 '모임'과 '흩어짐'의 변증법 안에서 유지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이는 것은 곧 모이는 것 자체에 목적이 있다기보다는 다시 세상으로 흩어지기 위한 것이며, 흩어져서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다시 모여야만 영적인 능력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런 원리는 교회에 그대로 적용됩니다.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의 변증법 말입니다. 호켄다이크가 쓴 <흩어지는 교회>라는 책은 이런 교회의 원리와 본질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흩어진다는 말이 단지 주일에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평일에 세상에 흩어진다는 의미만은 아닙니다. 이 말은 이 세계 전체가 바로 교회라는 뜻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더 넓게 보면 우주 교회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일정한 종교적 체제를 갖춘 교회가 아니라 참된 생명의 힘이 지배하는 그런 영적인 교회 말입니다.  

평화를 빌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두 명씩 파견하면서 몇 가지 지침을 일러둡니다. 우리가 모든 지침을 일일이 살필 수는 없고 중요한 대목만 간추리겠습니다. 여행을 떠나면 그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는 게 원칙인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런 준비를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닐 때 돈주머니도 식량자루도 신도 지니지 말 것이며 누구와 인사하느라고 가던 길을 멈추지도 말라."(4절). 일종의 무전여행입니다. 이런 여행이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쉽지 않습니다. 일절 준비 없이 전도하라는 말씀은 여러 의미가 있습니다. 일단은 그 전도에만 모든 마음을 집중하라는 뜻이겠지요. 만약 우리의 삶을 구도(求道)라고 한다면 오늘의 말씀이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너무나 많은 준비물 때문에 여행의 목적을 잃어버리듯이 우리가 일상적인 필요에 마음을 소진시키기 때문에 결국 삶 자체를 훼손시키는 일이 많습니다. 준비하지 말라는 말씀에는 가장 본질적인 일에 집중하면 그 이외의 일은 저절로 해결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준비해 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번 기회에 이런 일들이 가능한지 아닌지 직접 경험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들에게 준 또 하나의 지침은 어느 집에 들어갔을 때 우선 "이 댁에 평화를 빕니다!"는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5절). 워낙 팔레스틴과 중동 지역에 전쟁이 많았기 때문인지 그쪽 사람들의 인사는 늘 '평화'(샬롬)였습니다. 예수님도 그런 전통에 따라서 평화의 인사를 나누라고 말씀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런 일종의 아포리즘(경구)이 여럿 나오기 때문에 어떤 의미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전체적인 맥락을 포착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미 누가 공동체 안에 있었던 Q자료나 마가복음, 여러 전승들이 오늘 본문에 약간 복잡하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에게 확실한 것은 이 평화가 상투적인 게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과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요 14:27).

여기에 바로 기독교 선교의 사명이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도 원하고 있는 평화의 리얼리티를 확보하는 사명 말입니다. 누구나 평화를 원하고 있지만 무엇이 궁극적인 평화인지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단지 싸움이 없는 세계라거나 양심대로 살면 평화로워진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건 평화의 깊은 층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누가는 지금 중동 사람들이 입에 달고 다니는 '평화'라는 인사의 참된 의미와 실체가 바로 예수에게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의 사명도 여기에 있다고 보면 됩니다. 그렇다고 단지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가 평화를 얻는다는 단순 명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런 기독교의 도그마가 진리가 될 수 있는 토대를 끊임없이 풀어내고 변증해나가야만 합니다.

병고침

예수님의 지침은 다음과 같이 이어집니다. "어떤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환영하거든 주는 음식을 먹고 그 동네 병자들을 고쳐주며 하느님 나라가 그들에게 다가왔다고 전하여라."(8,9절). 주는 음식을 얻어먹고 병자들을 고쳐주라고 합니다. 무면허 의료행위로 처벌받을 행동인지 모르겠군요. 그러나 그 당시의 의료행위는 어떤 전문가 집단에게 속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들의 이런 행위가 큰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도 많은 병자들을 치료한 일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베드로, 요한, 바울도 그런 치료를 했습니다. 이런 전통 때문인지 지금도 의료행위를 신앙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이 많습니다. 불치병이 기도의 능력으로 치료되었다는 간증도 자주 나돌고, 이런 대중 집회도 열립니다.
이런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그게 너무 확실하게 때문에 늘 이런 식의 신앙에 매달립니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성서를 오해하는 데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질병 치료가 성서에 보도되고 있긴 합니다만 그것은 그 치유 사건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더 근원적인 것을 증명하기 위한 징표에 불과합니다. 근원적인 것은 바로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물론 지금도 역시 '신유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면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긴 합니다만 고대 시대와 지금의 차이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고대에는 지금과 같은 전문적인 의사들이 거의 없었고, 있다고 하더라도 대중들의 건강까지 챙길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기 때문에 종교의 영역에서 이 문제를 감당했지만, 지금은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의사 집단이 있으니까 이런 일은 그들에게 맡겨놓아야 합니다. 어쨌든지 여기서 성서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 가장 설득력 있는 방식인 병 치료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이 임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임박

그래서 오늘 본문 9절은 병 고침과 하나님 나라의 임박을 묶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환영하지 않는 마을 사람들에게는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것만은 알아두시오"(11)라는 말을 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서 핵심입니다. 앞서 평화의 인사라는 것도 단지 그 지역 사람들의 일반적인 인사 형식에 머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즉 하나님 나라의 임박과 연결되며, 병자 치료도 역시 그렇습니다. 이런 점에서 제자들을 각각의 마을로 파견한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가 다가왔다는 사실을 전하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이 출가하시고 첫 번으로 선포하신 말씀이 곧 하나님의 나라였으며, 그 이후로 오직 하나님 나라와 연관된 것만을 가르치시고 그런 지평에서 행동을 취하셨습니다. 과연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이르렀다는 이 메시지는 옳습니까? 도대체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이기에 예수님은 그 하나님의 나라가 다가왔다고 말씀하셨을까요? 그런데 2천년 전에 이미 가까이 이르렀다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직 우리에게 현실화하지 않았습니다. 이 딜레마를 우리가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그렇게 간단한 질문은 아닙니다.

가장 원론적인 대답은 예수님의 사건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 되신 사건, 즉 말씀이 육신을 갖게 된 사건인 예수 그리스도는 곧 하나님 나라의 시작입니다. 이런 대답에 대해서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은 '그래, 당연히 그렇지' 할 것이고, 교회 밖의 사람들은 의아해하든지 냉소를 보낼 것입니다. 이러한 기독교 신앙의 세계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사물의 관계 안에서 작동되는 인식론을 극복해야만 합니다. 월드컵이나 올림픽 같은 사건처럼 우리의 시공간 안에서 확인될 수 있는 것들만을 확실한 것으로 인식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도래라는 사실을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유대교와 기독교의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 사건으로 인해서 이 세상이 구원받았다는 명백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그를 그리스도로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옳은 말입니다. 실증적인 차원에서는 아무런 증거가 없습니다. 그러나 은폐의 방식으로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흡사 어머니 몸에 갈라져 이 세상에 나온 어린 생명체 안에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어떤 대상에 대한 인식이 자리를 잡아가듯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의 방식으로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이게 바로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

기독교의 이런 신앙을 세상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제자로서 이 세상으로 들어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으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이르렀다는 사실을 변증해야 합니다. 그 방법은 오늘 본문에 따르면 병고침과 메시지 선포입니다. 병고침과 같은 인간의 인간다운 삶의 회복은 하나님 나라의 징표이기 때문에 이런 실천과 더불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런 제자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우선 우리에게 요청되는 바는 가까이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또렷하게 경험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으로 우리에게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를 말입니다. (2004. 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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