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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과학기술사회와 기독교

사회역사경제 문영빈 교수............... 조회 수 2597 추천 수 0 2009.09.11 11:5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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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현대과학기술사회와 기독교

문 영 빈 (서울여자대학교 교수 / 신학과 과학)

현대과학기술사회

오늘날 우리는 놀라운 과학기술의 혁명을 목도하고 있다. 특히 컴퓨터과학의 발전으로 인한 정보화 사회의 도래, 복제와 인간 게놈프로젝트 등으로 대변되는 유전공학의 가공할 발전은 우리를 칠십 여년 전 헉슬리(Aldous Huxley)가 상상하던 “놀라운 신세계(Brave New World)”로 인도하고 있다. 이러한 혁명을 문화비평가 리프킨(Jeremy Rifkin)은 <유전공학시대(The Biotech Century)>에서 인간이 불을 발견한 것과 비견되는 정도라고 말하고 있고, 역사학자인 노블(David Noble)은 <테크놀로지의 종교(The Religion of Technology)>에서 인간이 신과 같이 되려는 시도라고 보고 있다. 이러한 혁명적 과학기술의 발전은 복잡한 신학적, 윤리학적 문제들을 파생시키고 있는데, 이는 이 시대와 교회가 당면한 가장 시급한 과제 중 하나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다음과 같은 문제들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어떤 가치가 현대과학기술사회를 주도해야 할 것인가? 또 이러한 가치판단은 누가 할 것인가? (2) 이때 기독교와 신학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이 글에서는 위에 제기한 문제들을 시스템 이론적 관점에서 접근하고자 하는데, 시스템 이론은 미국의 사회학자 탈콧 파슨즈(Talcott Parsons)가 정립하고, 최근 독일의 사회학자 니크라스 루만(Niklas Luhmann) 등에 의해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되었다. 이 이론은 막스 베버(Max Weber)의 사상을 이어받아 근대화과정을 겪은 “과학기술사회(technological society)”는 정치, 경제, 교육, 법, 과학, 기술, 종교 등 극도로 분화된 많은 사회 시스템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각 시스템은 독특한 운영체계, 논리체계, 가치체계를 가짐으로써 다른 시스템들과 구별된다. 본 주제와 관련되어 특히 중요한 것은 각 사회 시스템은 독특한 가치체계를 가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종교는 과학과 그 가치체계가 다르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스템간의 가치체계의 차이는 종종 시스템간의 갈등을 유발할 수 있고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현상을 종종 경험한다. 따라서 핵심적인 문제는 이렇게 극도로 분화된 기술사회에서 시스템과 시스템간의 가치판단의 차이를 조정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포스트모던시대에 가장 중요하고 활발한 윤리학적 담론으로 대두되고 있다. 현대과학기술사회의 심각한 분화를 고려할 때, 이러한 가능성에 대해서 루만을 포함한 많은 학자들이 회의적이라는 것은 별로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현대과학기술사회의 심각한 분화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이러한 시스템간의 가치판단의 차이에 대한 조정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아무리 기술사회가 분화되었다 하더라도, 시스템들이 공통의 생활세계(lifeworld), 합리성(rationality), 환경(environment), 운명(destiny) 등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첫째, 특정 기술사회는 특정 생활세계를 공유하고 있는데 이 생활세계란 그 사회에서의 일상의 대화를 가능케 하는 공통적 언어, 문화적 배경을 말한다. 둘째, 기술사회는 합리성의 자원들을 공유하고 있는데 이는 시스템들을 관통하는 공통된 합리구조들을 말한다. 미국의 철학자 쉬라그(Calvin O. Schrag)는 “합리성의 횡단성(transversality of rationality)”이란 개념을 통해 시스템간의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역설하면서 시스템간의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극단적 포스트모더니즘을 반박하고 있다. 최근에 프린스턴 신학교의 신학과 과학 교수인 반 호이스틴(J. Wentzel van Huyssteen)은 <합리성의 형태(The Shaping of Rationality)>에서 과학과 신학이 일정의 합리성을 공유하고 있는데, 이러한 합리성은 결국 우리가 일상에서 가치판단을 하고 생활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바로 그것이라고 설득력 있게 논증하고 있다. 즉 이러한 기본적 합리성 없이 우리는 생활할 수 없고 모든 시스템들이 이러한 기본적 합리구조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 기술사회의 모든 시스템들은 공통의 “환경”을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환경문제”는 모든 시스템들의 공통의 문제이며 어떤 시스템도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마지막으로, 기술사회는 공통의 운명을 공유하고 있는데 한 기술사회의 존망은 그 안에 속한 모든 시스템들의 존망과 당연히 직결되는 것이다. 따라서 특정 기술사회는 극도로 분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공통의 생활세계, 합리성, 환경, 운명 등을 공유하고 있으므로 가치판단의 차이를 조정할 수 있는 최소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달리 표현하면, 기술사회는 극도의 분화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가치 조정의 가능성을 상실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과학기술사회의 정의구현

그러면 어떠한 가치가 이러한 분화된 기술사회를 주도해야 할 것인가? 이를 위해 필자는 “정의의 통전적 비전(a holistic vision of justice)”과 “정의의 변수들(parameters of justice)”이라는 개념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정의의 통전적 비전”이라는 개념은 통합을, “정의의 변수들”이란 개념은 분화를 나타낸다. “정의의 변수들”이란 개념은 정의라는 개념의 다면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정의란 항상 “무엇인가와 관련된” 정의라는 것이다. 과학기술사회와 관련되어 다음과 같은 정의의 변수들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변수는 “과학기술과 관련된” 정의로 지식, 이해, 창조성 등과 같은 가치들을 강조한다. 둘째 변수는 “창조질서(created order)와 관련된” 정의로, 즉 종, 속, 생태계, 자연 등의 순전성(integrity)의 가치들을 강조한다. 셋째 변수는 “사회질서(social order)와 관련된” 정의로 평화, 조화, 사랑, 관계성, 공동체 등의 가치들을 강조한다. 넷째 변수는 “인간존재의 의미와 관련된” 정의로 의미, 자유, 개별성 등의 가치들을 강조한다. 이러한 정의의 네 변수들은 서로 긴밀히 연관되어 있지만 또한 서로 긴장관계도 유지하고 있다. “정의의 통전적 비전”은 바로 이러한 네 변수들을 확인, 관리, 조정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창세기 1-2장에 있는 창조이야기에는 이러한 정의의 네 변수들과 상응하는 심오한 이미지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첫 이미지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하신 “땅을 정복하라”(창 1:28)는 말씀에 있다. 이 “정복”이라는 이미지는 현대신학적으로 많은 논란이 되고 있지만, 인간의 자연에 대한 이해, 관리, 조작을 의미하며 이는 곧 “과학기술과 관련된 정의”와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이미지는 “선악과”(창 2:17)인데 이는 곧 창조질서에 대한 인간의 자유의 한계를 나타내므로 곧 “창조질서와 관련된 정의”와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 셋째 이미지는 첫 남녀의 결합으로 이는 곧 “사회질서와 관련된 정의”와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 넷째 이미지는 “생명나무”로 이는 “인간존재의 의미와 관련된 정의”와 상응한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인간존재의 궁극적 의미는 영생과의 관련을 통해서만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모든 이미지들의 총체적 집합인 “에덴”은 히브리적 관점에서 이러한 정의의 네 변수들이 온전하게 조화를 이룬 최적의 상태 즉 샬롬(shalom)을 제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현대과학기술사회에서 정의를 구현한다는 것은 바로 정의의 변수들이 온전하게 조화를 이룬 최적의 상태를 찾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를 필자는 “총제적 정의의 최적화(optimization of global justice)”라는 개념으로 보고자 한다. 미국의 저명한 윤리사상가인 맥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는 “전통(tradition)”을 사회적으로 구체화된, 최선을 향한 끊임없는 “논쟁(argument)”이라고 보았다. 이와 같이 현대과학기술사회는 정의의 다양한 변수들을 조정하여 총체적 정의를 최적화하기 위한 끊임없는 “논쟁”을 해야 할 것이다. 반면 합리적인 과학기술사회는 그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총체적 위험성(global danger)을 최소화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환경파괴, 원자폭탄, 생화학무기 등의 출현은 과학기술의 발전이 파생하는 총체적 위험성인 것이다. 또 이제 우리는 유전공학의 혁명적 발전으로 인해 우리의 유전인자를 조작하고 복제하는 능력까지도 갖게 되었다. 이는 자칫 창조질서를 와해시키고 나아가서 인류를 파멸시킬 수도 있는 돌이킬 수 없는 총체적 위험성까지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유전공학의 발전은 또한 많은 긍정적 가능성들(불치의 유전병 치료 등)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따라서 합리적 과학기술사회는 이러한 총체적 위험성을 최소화 하면서 총체적 정의를 최적화하는 길을 끊임없이 모색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총체적 정의의 최적화 과정은 통전적 정의에 대한 비전과 분화된 사회 시스템들 간의 긴밀한 교류와 네트워크가 없이는 불가능한데, 이러한 합리적 과학기술사회는 20세기의 손꼽히는 과학사상가 중 하나인 칼 포퍼(Karl Popper)가 <열린 사회와 그 적들(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라는 명저에서 제안한 “열린 사회(open society)”와 그 맥을 같이 한다. 비판적 합리주의자인 그는 사회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사회 시스템들 간의 끊임없는 비판을 촉진하는 사회를 “열린 사회”라고 제안하고, 플라톤, 헤겔, 맑스 등의 사회이론을 비판을 불허하는 “닫힌 사회(closed society)”라고 맹렬히 비판했다. 이러한 포퍼의 사상과 맥을 같이 하지만 이를 시스템이론적으로 재해석해서, 필자는 과학기술사회가 정의의 모든 변수들이 공적 영역에서 드러나, 사회 시스템들 간에 대화, 토론, 협상 등을 통해 총체적 정의가 최적화 될 수 있는 열린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열린 사회는 시스템사이의 차이와 다양성을 존중하고 서로 열린 자세와 배우고 견제, 비판하는 자세를 견지하여 총체적 정의의 최적화가 가능하도록 할 것이다.
이러한 총체적 정의의 최적화를 위해서는 새로운 과학기술 지식의 교육과 대중화가 매우 중요한데, 이는 기술사회가 총체적 가치판단을 올바로 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새로운 과학기술에 어떠한 혜택과 위험성이 내재되어 있는지를 제대로 알고 조심스레 저울질하는 것을 통해서만, 사회가 전체적으로 올바른 가치판단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가치판단이 어떤 일정 시스템의 몫이 아니라 사회전체의 몫이라는 것이다.

기독교와 신학의 역할

그러면 이제 기독교는 이러한 사회의 총체적 정의 구현을 위해 어떤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째, 기독교는 신학을 통해서 성경과 또 다른 여러 기독교적 자원들을 통해 정의의 통전적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과학기술사회의 공적 가치판단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우리는 성경의 창조이야기에 나타난 정의에 대한 풍부한 뉘앙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미국의 저명한 신학자 트레이시(David Tracy)는 <비유적 상상(The Analogical Imagination)>이라는 영향력 있는 저서에서 “공적신학(public theology)”을 제안하면서, 기독교적 상징들을 “종교적 고전들(religious classics)”로 보고 이를 문학적 예술적 고전들과 유사하게 공적 영역(public realm)에서 심오한 것을 드러낸다고 주장했다. 그보다 먼저 저명한 윤리학자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는 고전적 명저 <인간의 본성과 운명(The Nature and Destiny of Man)>에서 이러한 기독교적 상징들의 공적 역할을 사회윤리영역에 직접 적용했었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 나라”와 같은 기독교적 상징들은 사회를 위한 이상향(ideality)을 드러내고, 반면 “죄”와 같은 개념은 공동체 이기주의와 같은 현실상(reality)의 근본적 원인을 드러낸다고 보았다. 니버의 견해에 의하면 기독교 사회윤리는 바로 이러한 이상과 현실 사이의 긴장관계를 이해하고 현실을 이상에 어느 정도 근접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필자는 기독교적 이미지들이 정의의 통전적 비전을 제시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이는 니버가 말하는 일종의 이상향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러한 정의의 통전적 비전은 과학기술사회에서 간과되고 있는 정의의 변수들을 드러낸다. 많은 현대 사상가들이 과학기술사회가 가질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부정적 면들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예를 들면, 과학기술사회의 부정적인 면들을 베버(Weber)는 인간의 자유와 의미를 잃어버린 “쇠우리(iron cage)”로, 하버마스(Haberms)는 대화적 이성이 마비되는 “생활세계의 식민지화(colonization of the lifeworld)”로, 맑스(Marx)는 경제적 이득의 불공정한 배분으로 인한 경제적 불평등으로, 하이데거(Heidegger)는 실존적 의미의 상실로, 니체(Nietzsche)는 생명력의 상실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형태의 과학기술사회의 부정적 면들은 간과된 정의의 변수들을 말하고 있는데, 정의의 통전적 비전은 이러한 변수들을 드러낼 뿐 아니라, 총체적 정의구현의 올바른 방향을 안내하기 위해서 필수적 요소인 것이다.

둘째, 기독교는 신학을 통해서 공적 영역에서 다른 사회 시스템들(즉 과학, 기술, 정치, 경제 등)과의 끊임없는 대화와 교류에의 참여를 통해, 총체적 정의구현의 최적화를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말한 것처럼, 과학기술사회는 모든 사회 시스템들 간의 긴밀한 교류와 네트워크가 가능한 “열린 사회”여야 하며 그래야만 총체적 정의구현이 최적화될 수 있다. 이러한 교류와 네트워크가 없이는 어떤 시스템도 고유 시각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고 따라서 그 시각의 맹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혁명적으로 발전하는 과학기술에 대한 지식이 모든 사회 시스템들과 기독교에게 올바른 가치판단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즉 과학지식의 대중화와 교육이 과학기술에 대한 건전한 공적 가치판단을 위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식은 기독교 시각의 지평을 넓혀주고 기독교적 정의에 대한 구체적 이해와 재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신학적 작업을 통해서만, 기독교는 정의의 통전적 의미를 적절하게 이해하고 재해석하여 과학기술사회의 정의구현을 위한 공적 대화에 적절하고 효과적인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작업을 철학적 해석학을 정립한 가다머(Gadamer)가 말하는 “지평융합(Horizontverschmelzung)”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지평”을 “특별한 관점에서 보여지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시각의 범위”라고 정의하고, “이해”를 전통의 지평과 해석자가 처한 새로운 지평이 충돌하고 융합하는 사건이라고 보았다. 즉 “이해”는 지속적 사건이며, 한 시스템은 다른 시스템의 지평을 통해 자신의 시스템을 재해석할 수 있고, 또 한편 다른 시스템에게 자신의 고유한 시각을 제시하여 그 시스템의 재해석을 도와줄 수 있다. 즉 이러한 끊임없는 교류 혹은 상호피드백(mutual feedback)을 통해서만 과학기술사회의 총체적 가치판단의 최적화가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기독교는 신학을 통해서 정의에 대한 통전적 이해를 통해 과학기술지상주의, 물질만능주의 등 과학기술사회가 파생하는 이데올로기를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의 이데올로기 비판정신은 히브리 선지자들과 예수 그리스도로 대변되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예언적 전통은 “하나님의 형상”, “에덴”, “언약”, “하나님 나라”, “새창조” 등의 강력한 상징들을 통해 정의의 절대적 기준과 통전적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통전적 정의구현을 가로막는 이데올로기를 강하게 비판해왔다. 히브리 선지자들은 “모세언약(Mosaic Covenant)”이라는 절대적 기준을 통해 당대의 이데올로기(우상숭배 등)를 강력히 비판할 수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라는 상징을 통해 정의에 대한 절대적이고 통전적 비전을 제시하여, 당시의 이데올로기(경직화된 유대교)를 강력히 비판했다. 하버마스는 이데올로기를 “병리적 커뮤니케이션” 혹은 거짓된 합의로 이끄는 “체계적으로 왜곡된 커뮤니케이션”으로 보았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닫힌 사회”의 특징이며, 시스템간의 끊임없는 비판과 교류를 촉진하는 “열린 사회”에서는 불가능할 것이다. 정의의 통전적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기독교는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미혹을 폭로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 기독교 역시 타 사회 시스템들의 비판에 겸손히 귀 기울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중세와 같이 기독교 정신이 경직화되고 이데올로기화 된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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