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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가정(6) 부부의 4대 실천원리(창 2:24-25)
1. 부모를 떠나라 부부에 대한 첫 번째 권면은 “부모를 떠나라!”는 것입니다(24절). 그것은 결혼하면 책임 있는 존재로서 홀로 서는 ‘독립성’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부모를 떠나는 것은 아픈 일이지만 부모를 잘 떠나야 행복한 결혼이 됩니다. 또한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도 부모를 잘 떠나야 합니다. 갈등 때마다 수시로 친정으로 달려가면 행복도 달아납니다. 더 나아가 자녀뿐만 아니라 부모도 자녀를 사위나 며느리에게 잘 떠나보내야 합니다. 오늘날 “부모를 떠나라!”는 원리가 잘못 강조되어 효심까지 내버리는 부작용도 많습니다. 이것이 서양 결혼신학의 맹점입니다. 사실 “부모를 떠나라!”는 명령보다 더 중요한 계명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입니다. 옛날에는 부모의 명령을 하늘같이 여기고 이치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대졸 학력의 며느리가 국졸 학력의 시어머님의 말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치에 맞아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고 부모의 말이기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와서 이치를 따져 오히려 가정불화가 커지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부모를 떠나라!”는 명령은 “자녀가 책임적인 존재가 되라!”는 말이지 부모 공경을 버리고, 부모의 권고를 무시하고, 부모와 마음과 거리가 멀어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사실 어떤 부모도 자녀를 떠나보낼 수 없습니다. 부모는 아들을 위해 쉽게 죽을 수 있어도 아내는 남편을 위해 쉽게 죽지 못합니다. 사랑의 정도가 다릅니다. 부모의 사랑이 아가페의 사랑에 가깝다면 배우자의 사랑은 필레오의 사랑에 가깝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어머니가 남편을 지나치게 독점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자녀를 기쁘게 떠나보내는 것은 부모가 스스로 실천할 자세이지 상대 부모에게 요구할 자세는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날 배우자가 당당하게 그런 자세를 요구하면서 상대 부모, 특히 시어머니의 잘못을 부각시키는 경향이 있고, 그런 경향으로 생겨난 냉소적인 단어가 ‘마마보이’란 단어이고, 요즘은 효자도 ‘마마보이’라고 비하시킵니다. “부모를 떠나라!”는 말씀에 대한 잘못된 적용과 잘못된 결혼신학이 큰 잘못을 낳은 것입니다. “부모를 떠나라!”는 말씀은 자녀의 책임감과 독립심을 강조한 말씀이지 핵가족 시대의 삶을 합리화하고 부모 공경을 등한시하는 것을 합리화하는데 사용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2. 연합하라 “연합하라!”는 말씀은 다음의 3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첫째, “상호 협력해서 철저히 하나가 되라!”는 뜻입니다. 이 구절에서 ‘연합하다’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아교로 붙이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만큼 부부는 모든 면에서 틈이 생기지 않도록 단단하게 밀착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둘째, “모든 것을 함께 나누라!”는 말씀입니다. 부부는 물질뿐만 아니라 정서와 비전과 사명까지 함께 나누고,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그리고 성공과 실패까지 모두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바로 그때 온전한 연합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셋째, “일심으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다른 사랑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부부가 된다는 것은 한 대상을 위해 자기의 전 생애를 드리기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결혼에는 한 사람만 바라보는 독실함이 필요합니다. 독실한 신앙이 진짜 신앙이듯이 독실한 사랑이 진짜 사랑입니다. 사랑이 깊어지면 사랑의 대상은 하나가 됩니다. 물론 결혼 전에는 폭넓게 사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결혼하면 가정에 좀더 집중하고, 나이가 더 들어 늙어지면 배우자에게 더 집중해야 합니다. 그처럼 서로에 대한 집중도가 높아져야 성공적인 결혼이 됩니다.
3. 한 몸을 이루라 본문 24절에서 “둘이 한 몸을 이루라.”고 한 말씀은 육체적인 결합을 의미합니다. 형이상학적인 플라토닉 사랑과 정신적인 나눔만으로는 온전한 부부생활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육체적 결합은 차원 낮은 유희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전인적 인간상을 추구하기에 영혼은 좋고, 육체는 나쁘다고 하지 않습니다. 육체적 연합도 중요합니다. 오늘날 가장 많은 이혼 사유는 ‘성격(性格) 차이’입니다. 그러나 깊이 들어가면 ‘성격 차이’보다 더 큰 이혼 사유는 성격에서 ‘격’자 하나를 뺀 ‘성(性 ) 차이’입니다. 성격이 다른 것은 보완의 가능성이 있고, 성격차이로 인해 서로에게 없는 성격으로 부부생활이 더 풍성해질 수 있습니다. 사실상 이혼의 더 깊은 이유는 ‘성격 문제에 대한 불만’보다 ‘성적인 문제에 대한 불만’입니다. 부부는 결혼이란 카테고리 안에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남편 및 아내와 더불어 성적인 즐거움을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성경은 “아내의 몸은 남편이 주장하고 아내의 몸은 남편이 주장하라.”고 합니다(고전 7:4). 자신에게 필요가 느껴지지 않아도 상대가 필요를 느끼면 그 필요를 채워주라는 말입니다. 자기의 필요나 욕구를 넘어선 상대방 중심의 성생활은 성경이 강조하는 아가페 사랑의 핵심 요소입니다. 부부는 서로의 성적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유일한 합법적인 대상입니다. 그 대상으로부터 만족을 얻지 못할 때 시선이 딴 곳으로 돌려지고 부부생활이 어려워집니다. 결국 “한 몸을 이루라!”는 명령은 세속적인 명령이 아닌 거룩한 명령입니다. 4. 벌거벗으라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했습니다(25절). 벌거숭이의 솔직한 부부가 행복을 얻습니다. 불행의 길로는 한 순간이지만 행복의 길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서로 담을 쌓지 말고, 서로에 대한 존경심과 관심을 줄이지 마십시오. ‘결혼’이라는 차를 운행할 때 한시도 핸들을 놓지 말고, 바깥의 경치가 좋다고 한눈을 팔지도 마십시오. 우주와 전 세계를 소홀히 할지언정 서로에 대해서는 소홀하지 마십시오. 서로에 대한 관심이 소홀해지고 자기 자리를 이탈하는 삶은 죄와 비극이 생기는 토양입니다. 오래 전, 얼굴도 예쁘고, 옷도 잘 입고, 날씬한 여자가 교회를 잘 다녔습니다. 목사님은 그녀를 교양이 있는 여자라고 좋게 생각했는데 하루는 그녀가 교회에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목사님이 이유를 묻자 남편의 핍박이 심해서 그렇게 하면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남편이 살림이 엉망이라고 교회를 다니지 말라고 핍박해요. 이 십자가를 어떻게 져야 하나요?.” 그러면서 솔직한 사연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중동에 가서 땀 흘려 일해 한국에 송금했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미장원 자주 다니고, 좋은 옷 사 입고, 마사지 하고, 계돈 띠고 해서 그 돈을 다 날렸습니다. 결국 남편이 그 사실을 알고 바람이 들었다고 교회까지 못 다니게 했습니다. 그래서 “왜 교회를 못 다니게 해요! 부부끼리 종교에 자유도 없어요!”라고 막 저항하자 전날에는 생전 안 하던 손찌검까지 해서 핍박이 심한 남편 때문에 서러웠다는 얘기였습니다. 그 사연을 다 듣고 목사님이 기도해주었습니다. “주여! 아무래도 잘 맞은 것 같네요. 이제 성도님이 바른 신앙이 무엇인지 깨닫고 좋은 가정을 만들게 하소서." 기독교에서는 그녀의 어려움을 핍박이나 십자가라고 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란 잘못이 없는 사람이 남의 잘못을 대신해 지는 것입니다. 배우자의 땀을 자신의 땀으로 연결시키는 배우자가 바른 배우자입니다. 어디에 가든지 최고로 헌신하면 그 헌신을 사람은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은 반드시 알아주십니다. 특히 배우자에게는 더욱 관심을 주어 자기를 벌거숭이로 만드는 헌신을 보여주십시오. 그때 그 가정에 축복의 옷이 덧입혀질 것입니다. ⓒ 글 : 이한규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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