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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를 극복하는 4대 원리 (요 21:1)
< 인생에는 실패도 필요하다 > 감동적인 찬송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을 지은 존 뉴톤(John Newton)은 82세 때 기억력을 거의 상실한 상황에서도 두 가지 사실만은 결코 잊을 수 없다고 했다. 하나는 ‘자기의 죄인 된 삶’을 잊을 수 없고, 또 하나는 ‘자기 같은 죄인을 구해주신 예수님’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존 뉴톤은 ‘과거에 실패한 자’였다. 젊은 시절, 그는 노예를 사냥해 파는 노예 사냥꾼이었다. 주님은 그런 사람도 변화시켰다. 주님은 과거의 실패를 문제 삼지 않고 언제나 새로운 기회를 주신다. 그러므로 때로 실패해도 그 실패를 딛고 일어서라. 훌륭한 삶이란 한번도 실패하지 않는 삶이 아니라 실패할 때마다 꿋꿋이 일어나는 삶이다. 누가 실패하는가? 대개 도전하는 사람이 실패한다. 도전이 없으면 실패도 없다. 사실 도전이 없는 삶이 가장 큰 실패이다. 계속 실패해도 계속 도전하라. 그런 사람이 실패를 이길 수 있는 견고한 믿음을 얻는다. 실패하는 용기를 가지라. 실패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실패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실패가 성공보다 나을 수 있다. 하나의 고상한 실패는 수많은 저속한 성공보다 낫다. 사람은 성공보다 실패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운다. 몸 관리를 위해 처음 운동하면 팔, 다리, 어깨, 옆구리 등 아프지 않는 곳이 한곳도 없지만 그 아픔이 싫지는 않다. 전신을 감싸는 고통 속에 짜릿한 상쾌함이 묻어오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실패가 하는 일이다. 실패 속에서 더 높은 신앙과 인격이 생긴다. 그래서 하나님은 실패도 허락한다. 실패 없는 성공은 없다. 넘어지지 않고 걸음마를 배우는 갓난아기는 없다. 실패를 통해 자신을 점검하고, 새로운 목표를 정해 다시 도전하면 실패는 축복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 실패를 극복하는 4대 원리 > 요한복음 21장에는 예수님이 실패한 제자들을 일으키고 다시 사명을 주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에는 실패를 극복하는 비결이 잘 나와 있다. 어떻게 해야 실패를 극복하고 성공의 길로 나아갈까? 본문 1절은 실패를 극복하는 4대 원리를 가르쳐준다. 1. 예수님과 만나라 본문 1절을 보라.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제자들을 실패에서 일으킨 첫째 원인은 ‘예수님과의 만남’이었다. 그 만남은 요한복음 21장의 주제이고, 성도의 삶의 주제가 되어야 한다. 행복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달려있다. 성공도 “누구를 만나느냐?”에 달려있다. 배우자 잘 만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과거에는 권력자 한 사람 잘 만나면 출세의 길이 활짝 열렸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문제는 그런 만남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구나 쉽게 만날 수 있다. 인맥이 없어도 예수님과 진정으로 만나면 인생은 획기적으로 변한다. 어느 날, 한 청년이 절망으로 자살하려고 했다. 그는 칼로 동맥을 자르기 전에 거울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그때 무슨 영문인지 자꾸 눈물이 쏟아졌다. 그는 곧 거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난다. 그가 대천덕 신부의 할아버지인 R.A. 토레이 박사이다. 하나님을 진실하게 만나면 그때부터 새로운 인생이 펼쳐진다. 지금 연약하고 비참한 모습이라도 상관없다. 그 상황에서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면 된다. 그때 실패는 성공을 이끄는 축복의 씨앗이 되고 인생의 디딤돌이 된다. 2. 꿈을 새롭게 하라 본문 1절을 보면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난 곳은 ‘갈릴리 디베랴 바닷가’였다. 그 장소에도 깊은 의미가 있다. 요한복음 20장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을 찾아온 장면이 있다. 처음에는 도마가 없을 때 왔고(요 20:19-23), 일주일 후에는 도마가 있을 때 왔다(요 20:24-29). 감격적인 그 만남 후에 주님은 신비하게 사라지고 한 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나지 않았다. 제자들은 나름대로 생각했다. “어떻게 다시 주님을 뵐 수 있을까?” 그때 갑자기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끝내고 감람산으로 찬미하며 갈 때 하신 예수님 말씀이 스치듯 생각났다. 그때 예수님은 “내가 부활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겠다!”고 하셨다(마 26:32). 그 말씀을 기억하고 제자들은 부리나케 예루살렘을 떠나 북쪽 갈릴리로 갔다. 왜 주님은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에서 만나겠다고 했을까? 갈릴리는 그들의 꿈이 잉태된 ‘꿈의 고향’이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처음 주님을 만나 꿈을 품었다. 그 꿈을 회복시키고 사명을 새롭게 하려고 주님은 그 먼 갈릴리 여행을 시켰다. 실패를 극복하려면 먼저 꿈을 회복하라. 아무리 어려워도 꿈을 잃지 말라. 상황은 비관적으로 생각할 때에만 비관적으로 된다. 꿈은 행복의 청사진이다. 깊은 수렁을 만나도 꿈과 희망을 잃지 않으면 어둠에 지배되지 않는다. 밝은 생각은 밝은 환경을 만들고, 어두운 생각은 어두운 환경을 만든다. 집안을 청소하는 것처럼 매일 마음을 깨끗이 청소하고, 그 마음에 꿈과 비전을 채우고 최선을 다하면 어둠은 곧 물러가고 밝은 날이 온다. 어려울수록 더욱 찬란한 꿈을 꾸라. 링컨처럼 하원의원 선거에 떨어졌으면 상원의원을 꿈꾸고, 상원의원 선거에 떨어졌으면 부통령을 꿈꾸고, 부통령 선거에 떨어졌으면 대통령을 꿈꾸라.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속담은 좋은 속담이 아니다. 오르지 못할 것 같아도 계속 쳐다보면 꿈이 생기고, 꿈이 생기면 길이 보이고, 길이 보이면 도전하고 싶고, 도전이 있으면 발전도 있다. (내일계속)
3. 다시 일어서라 본문 1절에는 평범하지만 감동적인 단어 하나가 있다. 바로 ‘또’라는 단어이다. ‘또’ 혹은 ‘다시’라는 단어는 매력적인 단어이다. 주님은 언제나 또 다시 기회를 준다. 실패 앞에서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버리라. 다시 일어설 때 기회도 다시 온다. 가끔 고위직에 있던 사람들이 검찰 조사를 받으면서 자살한다. 과거의 화려한 삶과 비교할 때 미래의 삶이 비참할 것 같고, 실추된 명예를 회복할 길이 없을 것 같으니까 자살생각이 났을 것이다. 그러나 회개하고 새롭게 살기로 다짐하면 죄인(sinner)이라는 ‘S’자의 주홍글씨를 성자(saint)로 바꿀 수 있는 기회는 반드시 온다. 진나라 혜제 때, 양흠 지방에 주처라는 괴걸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 주방은 동오와 파양 태수를 지냈지만 주처가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났다. 주처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며 타고난 힘으로 동네 사람들을 괴롭혀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하고 외면했다. 철이 들면서 주처는 새사람이 되기로 결심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결심을 믿지 않았다. 너무 답답해 하루는 주처가 사람들에게 왜 자기만 보면 얼굴을 찡그리느냐고 물었다. 그때 한 사람이 용기 있게 대답했다. “우리 동네에 3대 악이 아직 있는데 어떻게 얼굴을 펴나?” “무엇이 3대 악입니까?” “남산의 호랑이, 장교 밑의 교룡, 그리고 자네가 3대 악이네.” 주처는 자기의 진심을 보여주려고 말했다. “제가 그 3대 악을 없애겠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골칫거리 3개가 싸우면 최소한 한두 개는 없어질 것이라 생각하고 좋아하며 말했다. “그래! 한번 해봐!” 곧 주처는 칼을 차고 남산에 올라가 맹호를 잡아 죽였다. 그리고 장교아래 물에 뛰어 들어 교룡과 싸웠는데, 사흘 밤낮이 지나도 그가 돌아오질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죽은 줄 알고 좋아했지만 그는 악전고투 끝에 교룡을 죽이고 살아 돌아왔다. 그래도 마을 사람들은 그를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결국 주처는 양흠을 떠나 동오로 갔다. 동오에서 그는 대학자 육기를 만나 말했다. “선생님! 저는 과거에 나쁜 짓을 많이 했지만 이제는 착하게 살고 싶은데 너무 늦었나요?” 육기가 격려했다. “늦지 않았네. 지금부터라도 굳은 의지를 지니고 착하게 살면 앞길은 무한하네.” 그 말을 듣고 주처는 뜻을 세워 10여 년 동안 덕행과 학문을 닦아 마침내 대학자가 되는데, 거기에서 개과천선(改過遷善)이란 고사성어가 나왔다. 누구나 과거의 실패는 있다.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이다. “이제 늦었다!”고 하지 말라. “늦었다!”고 할 때가 가장 빠른 때이다. 새롭게 각오하고 일어서면 누구에게나 꿈과 같은 미래가 펼쳐질 수 있다. 고(故) 정주영 회장은 청개구리 때문에 성공했다고 한다. 청개구리가 버드나무에 오르려면 30번은 실패해서 기어코 오른다는 말을 듣고 그는 결심했다. “변덕 많은 청개구리도 포기하지 않는데 나는 사람이다. 어떤 시련에도 포기하지 않겠다.” 결국 수없는 실패와 고난을 극복하고 현대 그룹을 일으켰다. 실패를 만나도 다시 일어서라. 그래야 후회가 없다. 사람이 왜 후회하는가? 실패 때문에 후회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진짜 후회하는 이유는 “그때 왜 포기했지!”하고 포기한 것을 후회한다. 어떤 실패를 만나도 너무 쉽게 포기하지 말라. 포기가 가장 큰 실패이고 가장 큰 패착이다. 실패 속에서 포기하지 않으면 다시 일어날 수 있다. 4. 실패를 성화시키라 주님이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이유는 그들에게 실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들의 연약함을 알고 그들의 실패를 이해하셨다. 그처럼 주님은 나의 실패도 이해하신다. 주님은 그들의 실패를 너그럽게 보셨다. 그처럼 주님은 나의 실패를 너그럽게 보신다. 주님의 너그러움은 나의 넉넉함의 원천이다. 실패에 대해 넉넉한 마음을 가지라. 실패를 이해하고 껴안으라. 실패에 놀랄 필요가 없다. 실패 없는 인생은 어디에도 없다. 실패의 원인은 분석하고 반성하되 그것 때문에 자신을 실패자로 비하하지 말라. 실패를 이해하지 못하면 진짜 실패가 오고, 실패를 두려워하면 내 영혼은 마귀의 놀림감이 된다. 남의 실패에는 너그러워지고, 나의 실패에는 넉넉해지라. 어느 날, 몇몇 상처 입은 독수리들이 모였다. 그 모임에 따돌림 당한 독수리, 배신당한 독수리, 시험에 떨어진 독수리, 사업에 실패한 독수리 등이 참석했다. 그들은 모두 자기를 제일 불행하게 여기고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자!”고 의견일치를 보았다. 그리고 언덕 밑으로 다 떨어져 죽으려고 할 때 멀리서 영웅 독수리가 날아와 소리쳤다. “너희들 뭐해?” 상처 입은 독수리들이 말했다. “너무 살기 힘들어 죽기로 결정했어요.” 그때 영웅 독수리가 큰 날개를 펴 몸 곳곳의 상처를 보여주며 말했다. “이 상처를 봐! 이건 솔가지에 찢겨 생긴 것이고, 이건 다른 독수리가 할퀸 자국이다. 그리고 마음의 상처는 훨씬 많아! 상처 없는 새가 어디 있냐? 나자마자 죽은 새들만 상처가 없다. 자, 일어나 날자!” 상처는 상승의 전조가 될 수 있고, 욕은 약으로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링컨도 생전에는 엄청난 욕을 먹었다. 그런 수많은 상처와 아픔을 견뎌내야 위대한 사람이 된다. 인생에는 실패도 필요하다. 실패를 해봐야 성숙해지고, 타인의 실패에도 관대해진다. 살다 보면 실패의 위기가 사방에 널려 있다. 그 실패를 기회로 삼으면 된다. 실패를 잘 이해하고, 잘 요리하라. 실패를 성화시키라. 실패는 창조와 성숙의 기회이다. < 기독교는 사람을 좋게 만드는 종교 > 기독교는 ‘환경을 좋게 만드는 종교’가 아니라 ‘사람을 좋게 만드는 종교’이다. 사람을 더 성숙한 사람으로 개조하고자 하나님은 실패도 당하게 하고, 문제도 있게 하고, 깊은 절망을 경험하게도 한다. 하나님이 허락한 실패라면 그 다음 단계에는 반드시 성공이 있다. 실패와 성공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실패가 있는 곳에 성공도 있다. 살면서 실패했던 것들이 나를 사람답게 만들었고, 강건한 영혼으로 만들었고, 성숙한 인격체로 만들었고, 마음의 부자로 만들었다. 실패에 넉넉해지라. 실패를 성숙의 기회로 삼으라. 실패했을 때는 성공이 바로 옆방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이다. 그림자는 빛 때문에 생겨난다. 그림자가 있다면 근처의 어디엔가 빛도 있다. 이제 그림자와 어둠을 타박하지 말고 몸을 돌려 태양을 보고, 담을 넘어 하나님의 사랑의 빛에 자신을 노출시키라. 그런 마음과 믿음으로 새로운 도전에 나서면 성공의 길이 그렇게 멀고 고단하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 글 : 이한규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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