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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서 영원으로

전도서 조용기 목사............... 조회 수 1628 추천 수 0 2009.09.28 21:5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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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전1:1~11 
설교자 : 조용기 목사 
참고 : 2006년 2월 26일 주일2부 설교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찌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시간에서 영원으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인간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시간이라는 거대한 강물의 흐름위에 타고 삶의 여행을 떠납니다. 인간은 어떻게 해도 시간 열차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쏜살같이 시간은 달리고 그 위에서 유아기, 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가 지나고 시간 속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과거를 돌이킬 수 없고 현재를 붙잡아 놓을 수도 없고 미래를 벗어날 수도 없습니다. 시간의 종으로 태어난 인생을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24에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진다고 말한 것입니다.
야고보서 4:14에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삶에 영원한 것은 없고 모든 것에 시작과 종말이 있고 그 위에 사라져 버리는 적막이 따를 따름인 것입니다. 그래서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인생은 절망적인 존재라고 했고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은 죽음의 병을 앓는 자라고 말했습니다.

[본론]
1. 인간의 역사 속에 영원한 것은 없다

첫째로, 인간의 역사 속에 영원한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9:27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옛날 이집트 왕조 때는 140여 개의 크고 작은 피라미드가 건설되었고, 현재 그 위치가 확인된 것만 80개가 넘습니다. 이 중에서 이집트 기자에 있는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한 변의 길이가 233미터, 높이가 148미터로 가장 큽니다. 이 피라미드는 2.5톤의 돌들을 아래에서 꼭대기까지 210단을 쌓아올려 지었기 때문에 사용한 돌의 개수만 해도 230만개나 됩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이 피라미드를 건축하기 위해 약 10만 명의 노예가 석 달씩 교대로 일해서 20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어떤 전문가는 이런 돌을 30센티미터로 잘라서 연결하면 지구의 2/3를 에워쌀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죽은 자를 미라로 보관하면 그 영혼이 돌아와 부활한다는 미신을 믿었기 때문에 이처럼 수많은 인력과 시간을 들여서 피라미드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피라미드 안에 있는 미라가 살아난 적이 없고 오직 메말라 빠진 미라로 남아있고 영원히 살겠다는 꿈은 이루어지지 아니했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영생을 얻으려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은 한 번 나서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죽고 난 다음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 속에 영원한 것이란 결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중국의 전설에 보면 삼신산(三神山)이라는 신령한 산이 나옵니다. 이 삼신산에는 주옥으로 된 나무가 있는데 그 열매를 먹으면 누구나 불로장생할 수 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많은 제왕들이 이 삼신산의 열매를 구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 중에서도 진시황은 도사 서불에게 많은 금은보화와 동남동녀(童男童女) 수백 명을 보내어 삼신산 불로초를 구해 오라고 시킨 것으로 유명합니다. 지금도 중국 천진에 가면 진시황과 그 신하들이 동남동녀 5백 명을 떠나보내는 장면을 동상으로 만들어 바닷가에 세워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비석에는 이들이 불사약을 구할 수 없어서 다시 돌아오기를 두려워해서 일본에 가서 일본에 머물러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진시황은 오래 살기 위해 온갖 애를 썼지만 결국 50세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으니 일반 사람의 나이보다 더 짧게 산 것입니다. 영생을 꿈꾸었지만 결국 보통사람보다 더 짧게 살고 만 것입니다. 인간의 역사 속에 영원이란 결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1964년 미국의 에팅거 교수는 인간을 냉동 보존 했다가 해동시키면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주장해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암이나 불치병에 걸린 사람도 냉동 보존시켰다가 과학이 발달된 이후 해동시키면 병도 고치고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많은 사람들이 그를 추종했습니다. ‘불사주의 협회’를 만들어 불치병으로 고생하는 수많은 환자들의 후원으로 냉동 보존을 위한 준비를 하고 많은 사람들이 돈을 들여 스스로를 냉동시켜서 지금도 냉동 창고에서 부활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과학자들이 에팅거 교수의 의견에 회의적입니다. 일단, 냉동을 하게 되면 물이 얼음으로 변하는 과정에서 부피가 약 10% 증가하기 때문에 세포의 구조가 파괴되고, 그 과정에서 세포는 탈수 현상으로 쭈그러듭니다. 이에 대해 냉동보존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냉동 중 세포가 손상되지 않도록 글리세롤 용액을 넣고 영하 193℃로 급 냉시키면 가능하다고 말하지만 인간의 뇌세포 문제가 또 있습니다. 뇌세포가 산소공급을 받지 못하면 즉시로 뇌신경은 죽어 버리고 치명적인 손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어찌하든지 인간의 힘으로 영원한 생명을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이 땅의 삶은 유한하기 때문에 영원한 삶은 결코 가능하지 않습니다.
시편 90:10에 “우리의 년 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 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욥기 14:10~12에도 “사람은 죽으면 소멸되나니 그 기운이 끊어진즉 그가 어디 있느뇨 물이 바다에서 줄어지고 하수가 잦아서 마름 같이 사람이 누우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하늘이 없어지기까지 눈을 뜨지 못하며 잠을 깨지 못하느니라.”고 탄식했습니다.
시간이 지나가면 모든 것이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지금 굉장한 것으로 떠들어 대어도 시간이 지나가면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의 국제연맹 창설실패와 절망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1차 대전 종전 무렵 미국이 주장을 해서 다시는 전쟁을 없게 하자고 국제연맹을 조직하고 미국 상원에 그것을 인준해 달라고 윌슨 대통령이 제의를 했지만 부결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부결되자 윌슨 대통령은 너무나 낙심하고 절망해서 그만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고 그 결과로 병상에 드러누워 죽게 된 것입니다. 그럴 때 홍보담당 비서관 철학자 나폴레옹 힐이 문병을 와서 대통령에게 말했습니다. “윌슨 대통령 각하, 백년만 지나면 국제연맹이 성공을 했든 실패를 했든 아무 흔적도 없습니다. 지금 국제연맹이 중요하지 백년만 지나면 국제연맹은 역사 속에 문자로 몇 개 남아있는 것 밖에 없으니 너무 분노하지 마시고 심려하지 마시고 평안히 눈을 감으소서.” 그렇게 권면을 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돌이켜 보십시오. 국제연맹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세월이 흘러가면 모든 것은 다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옛날에 코카콜라 회장이 뉴욕에서 잠을 자지 못하고 마음에 번뇌해서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국가가 많은 세금을 부여해서 자기의 사업을 망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 힐을 청했습니다. “내가 마음이 번뇌스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고 고통스러워 견딜 수 없는데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하겠는가. 이 국가가 세금으로 나의 회사를 다 빼앗아 가려고 한다.” 그랬더니 그 나폴레옹 힐이 그 코카콜라 회장에게 물었습니다. “회장님 올해 연세가 얼마십니까?” 그러자 회장은 “아흔입니다.” 다시 힐은 “회장님, 모든 코카콜라 회사의 정권, 모든 서류를 여기로 가지고 나오십시오.” 회장이 의아한 표정으로 “왜요?” 그러자 힐이 “저 화로에 던져서 다 태워 버리십시오. 회장님 살면 이제 얼마 살겠습니까? 그 문서와 그 재산 때문에 이렇게 번뇌하는 것보다는 다 태워 버리고 손 다 털어 버리고 허허 웃으면서 몇 년 살다가 천당 가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인생은 이 세상에 영원히 무엇을 소유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2차 대전의 그 많은 죽음과 참상도 6?25의 민족적인 비극도 다 지나간 이야기로 기억 속에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우리 민족의 거대한 참상이었던 6?25를 기억하는 사람이 요사이 세대에 누가 있습니까? 다 기억 속에 사라지고 맙니다. 그 비참함, 함성, 포성, 그 고통과 그 괴로움, 피난길 다 기억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시편 90: 4에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 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전도자 솔로몬 왕의 탄식
둘째로, 오늘 예루살렘 왕 전도자 솔로몬의 탄식을 우리가 한번 보십시다.
전도서의 전도자는 인생허무를 개탄했습니다. 그는 전도서에서 영원한 가치나 삶의 유익이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영원한 가치고 영원한 이익이냐, 세월이 지나가면 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전도서 1: 1~ 7에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그러니 모든 것이 영원한 것이 없고 헛되고 헛된 것 밖에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는 또 말하기를 영원한 새것이 없다. 오직 반복된 일과 피곤한 것뿐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이 새것이다. 저것이 새것이다. 그래도 지나고 나면은 다 헌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30년 전에는 새 교회를 지었는데 30년이 지나고 난 다음 지금은 헌 교회가 되고 만 것입니다. 영원히 새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 헐지요. 옛날에는 저를 보고 새 총각 같다고 말했는데 이제는 칠십에 늙은 총각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혼했으니 총각은 아니지요. 그러니 새것이 이 세상 어디에 있습니까?
전도서 1: 8~ 11에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찌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
여러분 이전 세대를 누가 기억합니까? 우리 불광동에 함께 제가 목회하던 사람들 대다수가 다 세상을 떴습니다. 저도 기억을 잘 못합니다. 서대문 시절을 누가 기억합니까? 서대문시절도 그때에 교회 나왔던 몇 분밖에는 지금 기억하지 못합니다. 지금 여의도에서 우리가 예배드리는 여러분 우리 세대도 한 백년이 지나고 나면 기억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전 세대들을 기억하지 않음같이 우리 세대도 후세대가 기억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인생사에 영원한 만족이 없다고 또한 전도자는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쾌락을 구하고 만족을 구하지만 인생사에 영원한 만족이란 없다는 것입니다.
전도서 2: 1~11에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적으로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본즉 이것도 헛되도다 내가 웃음을 논하여 이르기를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을 논하여 이르기를 저가 무엇을 하는가 하였노라 내 마음에 궁구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에 지혜로 다스림을 받으면서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또 어떻게 하여야 어리석음을 취하여서 천하 인생의 종신토록 생활함에 어떤 것이 쾌락인지 알까 하여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지으며 포도원을 심으며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주기 위하여 못을 팠으며 노비는 사기도 하였고 집에서 나게도 하였으며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도 소와 양떼의 소유를 많게 하였으며 은금과 왕들의 보배와 여러 도의 보배를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와 인생들의 기뻐하는 처와 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처첩을 많이 두었다 구요? 마누라만 칠백 명, 첩만 삼백 명을 두었습니다. 천명의 처첩들을 두었습니다.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 지나고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여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분복이로다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
세상이 물질적으로 아무리 창성하게 되었다 할지라도 무슨 위대한 일을 이루었다 할지라도 지나고 보면 다 헛수고인 것입니다. 중국의 만리장성이 얼마나 거대한 공사입니까? 그러나 만리장성을 지었던 진시황도 가고 그 시대의 사람들도 가고 그는 오직 무너져 가는 옛날에 역사적인 유물로써 남아있을 따름인 것입니다. 모든 것은 망각의 무덤으로 사라집니다. 있는 것은 다 잊어버림이라는 역사적인 무덤 속에 사라집니다.
전도서 1:11처럼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잘난 자, 못난 자가 다 함께 죽음으로 끝이 납니다. 영웅호걸, 열사가 무엇입니까? 그도 죽어 무덤에 들어가고 노숙자, 거지들도 죽어서 무덤에 들어가고 하나도 예외 없이 사람은 한번 나서 죽는 것은 정한 이치로 다 죽음으로 끝이 나고 마는 것입니다.
전도서 2:13~17에 보니 “내가 보건대 지혜가 우매보다 뛰어남이 빛이 어두움보다 뛰어남 같도다 지혜 자는 눈이 밝고 우매 자는 어두움에 다니거니와 이들의 당하는 일이 일반인 줄을 내가 깨닫고 심중에 이르기를 우매자의 당한 것을 나도 당하리니 내가 어찌하여 지혜가 더 하였던고 이에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이것도 헛되도다 지혜 자나 우매 자나 영원토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다 잊어버린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 이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한하였노니 이는 해 아래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임이로다”
스위스의 저명한 심리학자 칼 융은 “우리 시대에 가장 심한 노이로제는 허무다”라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니이체는 철학자로써 초인(超人)을 이야기하면서 이 허무감을 극복하려고 몸부림쳤지만 결국 이 허무주의의 늪을 벗어나지 못해서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세계적인 문학가로 이름이 났던 헤밍웨이도 그 명성과 부귀와 영화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삶이 너무 허무해서 사냥총으로 자기 머리를 쏘아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절망과 괴로움, 허무를 이기지 못해 지위와 명예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의 삶에는 영원한 가치나 삶의 유익이 없이 어디를 보아도 허무할 뿐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3. 시간에서 영원으로
셋째로, 우리가 이 부질없는 시간에서 영원으로 들어가야만 우리의 삶이 의미 있고, 가치 있고 희망차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여 우리가 시간에서 영원으로 갑니까? 시간 속에 태어나서 시간 속에 늙어서 죽어버리는 우리가 어떻게 영원으로 건너갈 수 있는 것입니까? 시간에서 영원으로 뛰어 넘어갈 수 있는 징검다리가 있습니까? 예수님이 바로 그 징검다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이 시간에서 우리가 영생으로 들어갈 수 있는 징검다리, 시간에서 영원으로 건너가는 징검다리는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어떠한 철학이나 종교가 징검다리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에서 시간으로 오신 분이신 것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서 시간 속에 들어오신 분은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시간 속에 있는 사람들의 죄와 허물, 불의와 추악, 저주와 절망을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어서 무덤에 들어갔다가 부활하심으로 영원으로 들어가신 분인 것입니다. 영원에서 시간 안으로 들어왔다가 시간 안에서 33년을 사시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심으로 시간을 극복하시고 우리를 끌어안고 영원 속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18에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에서 영원으로 가는 길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는 시간을 이긴 분인 것입니다. 그는 사망을 이기신 분이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면 우리 속에 그리스도가 들어와서 우리의 시간을 극복하게 하시고 우리의 죽음을 극복하게 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으로 들어가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함께 죽고 함께 장례지낸바 되고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원히 하나님 우편에 앉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시간에서 영원으로 들어가는 그 첩경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남녀, 노유, 빈부, 귀천 할 것 없이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시간을 극복하고 죽음을 극복하고 영원한 세계에 영생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처럼 영생 무궁토록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 요한복음 1:12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친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했습니다. 요한복음11:25~26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영원히 안 죽는다. 시간이 아무것도 아니다. 시간은 사람을 망각의 무덤으로 휘몰아쳐 가지만 우리는 시간을 향해서 손가락질 합니다. ‘시간아 네가 무슨 힘이 있느냐? 시간이 네가 무슨 능력이 있느냐? 너는 나의 젊음을 늙음으로 변화시키고 팽팽하던 살을 쭈글쭈글하게 만들 수 있지만 내 영혼을 영원한 음부로 몰고 가지는 못한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시간을 뛰어 넘어 영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안 믿는 사람과 다른 것은 우리는 시간 속에 살면서 이미 영원을 속에 품고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육체는 시간 속에 있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벌써 영원한 생명을 얻어 영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간과 영원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그 사람이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후폐하나 속은 날로 새로워지고 그 사람의 장막이 무너져도 우리 속사람이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영원한 것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전도자 솔로몬은 영원한 것이 없다고 했지만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영원한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원한 의로운 옷을 받아 입은 것입니다. 우리의 낡은 옷 아닙니다. 우리의 행위의 낡은 옷은 시간이 가면 다 찢어지고 냄새나지만 그리스도의 의로운 옷은 영원한 의로운 옷으로 우리의 부끄러움을 감춰 주시고 하나님 앞에 서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의로운 옷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21에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 옷 입어 영원한 의인들이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을 모시므로 영원한 기쁨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 부귀, 영화, 공명이 주는 기쁨은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지만 우리 속에는 가다지지 아니하는 영원한 기쁨의 샘을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16:11에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하나님 영원한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의 샘이 된 하나님을 우리가 모시고 있으므로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벌써 영원한 기쁨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영원한 평안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 평안이란 잠시 있다가 깨어집니다. 가정적인 평안, 사회적인 평안, 세계평화가 끊임없이 도전을 당하고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 속에 평강의 왕 되신 예수님을 모시고 있으면 영원한 평화가 있는 것입니다.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평화가 아닙니다. 영원 영원한 평화입니다. 왜냐, 예수님은 평강의 왕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사야 9: 6에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2:14에서도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다 행복을 추구합니다.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개인적인 행복, 가정적인 행복, 사회적인 성취의 행복을 원하지만 행복은 손에 잡힐 듯이 잡힐 듯이 하면서 자꾸만 우리를 피합니다. 산 너머 행복이 있다기에 산 너머 가보니 또 저 산 너머 행복이 있다고 하더라. 저는 어릴 때 무지개가 옹달샘에서 이렇게 하늘로 뻗쳐 있다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무지개가 선 옹달샘에 가서 그 물을 마시면 굉장히 축복을 받는다고 해서 제 친구와 함께 무지개가 선날 무지개 옹달샘을 찾으러 뛰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산을 건너고 들을 지나고 또 산을 건너고 들을 지나고 지치도록 뛰어도 무지개는 옹달샘이 앞에 있는 것 같은데 또 저기에 있고 또 저 멀리 있고 하루 종일 뛰어도 결국 무지개가 선 옹달샘을 찾지 못했습니다. 행복은 무지개와 같습니다. 분명히 있는 것 같은데 아무리 찾아가도 그 행복을 붙잡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인간의 행복인 것입니다. 그 인간의 행복이 어디에 서 있느냐.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고 예수님을 구주로 모실 때 우리 속에 행복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복을 찾으면 행복은 우리를 피하지만 행복이 우리 속에 들어오게 하면 행복은 우리 속에 둥지를 트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오면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 4~ 7에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이것은 영원한 행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그의 자녀가 되어서 생명강수를 넘치게 마시고 마음에 눈물과 근심, 탄식, 이별,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영원한 행복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늘나라를 소유로 받았습니다. 이 세상나라는 다 지나갑니다. 우리 한국의 5천년 역사에 고구려, 신라, 백제가 지나갔는가 하면 삼국통일, 신라시대가 지나가고 고려시대가 지나가고 이씨조선이 지나가고 36년 일정침략을 당하고 6?25가 지나가고 우리 정권이 들어오고 난 다음에도 수없이 정권이 바뀌었습니다. 세상과 세상나라를 끊임없이 변화되고 일어났다가는 사라지고 사라졌다가는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늘나라는 영원한 나라인 것입니다. 변함이 없는 하나님 아버지가 주권자가 되신 나라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 1~ 3에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삶의 허무와 수고로움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 살다가 후유, 한숨을 쉬고 “인생이 무엇이냐. 무엇을 위해서 이처럼 수고했느냐.”고 사람들은 탄식을 합니다. 누구든지 인생 사십 고개가 굉장히 어렵다고 했습니다. 제가 어릴 때 우리 아버님이 친구들과 모여서 이야기를 하시는데 인생 사십 고개가 참 넘기 힘들다고 말씀하기에 ‘아! 사십이 되면 죽는구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죽는 것이 아니라, 사십 고개 마루턱에 올라서게 되면 헐떡이며 뛰어온 뒤를 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십 고개에서 인간의 성취가 거의 결정이 되기 때문에 거기에서 힘든 삶을 돌아보고 인생의 고달픔과 허무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계 최고의 부자도 명예를 가진 자도 미모의 여성도 허무를 견디지 못하여 자살하는 처지에 있는 것이 바로 인생인 것입니다.

[결론]
이 세상에서의 삶에는 영원한 삶의 의미와 가치와 행복과 기쁨, 평안 등을 결코 가질 수 없습니다. 죄와 세속과 마귀와 질병과 가난과 고통과 슬픔과 갈등과 싸움이 가득한 혼돈한 삶이 우리의 현실적인 삶인 것입니다. 이 절망의 시간 속에 사는 인생을 영원한 행복으로 승화시키는 분은 예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흑암을 이기시고 사망을 이기시고 우리를 영원의 세계로 안내하시는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어떠한 학문도 어떠한 수양과 도덕도 종교적인 노력도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께로 영원한 세계로 이끌어 갈수가 없습니다. 영원한 세계는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시간 속에 살며 눈물과 고통과 괴로움을 체험하시고 이를 짊어지고 죽으셨다가 이를 극복하고 부활하신 예수님, 시간을 이기고 영원으로 부활하신 예수님 그분을 모셔 들일 때 우리는 그분과 하나 되어 시간에서 영원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시간 속 인간으로 오셔서 인간을 끌어안으시고 죽으시고 시간을 극복하시고 영원한 삶으로 우리를 이끄신 분이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너무나 귀하고 아름다우신 분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 예수 보다 더 귀하신 분이 없습니다. 우리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쏜살같이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도 시간의 흐름을 중지시킬수가 없습니다. 부귀도 권세도 영광도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아 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는 우리가 시간을 초월해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시간아 흘러라. 세월아 가라. 그러나 나는 이미 시간을 초월했고 흘러가는 세월을 초월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을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속에 나는 영원을 품고 살기 때문에 시간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세월의 흘러감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미 영원이 내 마음속에 출렁거리고 있고 우리는 이 영원 속에 앞서가니 뒤서가니 다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예비한 영원의 세계 속에 우리는 눈물, 근심, 탄식과 이별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앓는 것이 없이 영원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이 일을 기억하고 마음속에 감사와 찬양을 갖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시간 속에 태어난 우리들이 시간의 노예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시간 속에는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시간 속에는 참된 의도 평강도 기쁨도 행복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 아버지여 시간을 극복할 수 있는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시간을 초월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시간을 극복하고 역사를 초월해서 영원 속에 들어갈 수 있음을 생각할 때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오늘 영생을 가진 우리들이 모였습니다. 영원한 속에서 우리는 벌써 시간을 이긴 사람들로써 영원한 삶의 의미와 가치와 행복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 영원을 즐기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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