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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삼1: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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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조용기 목사 |
참고 : | 2006년 5월 14일 어버이주일 3부 설교 |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왜 삼중축복인가?’ 이 제목으로 은혜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에덴동산은 지상천국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상천국을 본 따 지상천국인 에덴동산을 만드셨습니다. 에덴동산에는 죄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죄로 인한 부끄러움과 하나님과의 교통의 단절이 전혀 없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항상 하나님과 함께 동거, 동행 했습니다. 만물의 생기발랄함과 아름다움은 형언할 수없이 영광으로 충만했습니다. 하나님조차도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보아서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에덴에는 죽음이란 그림자도 없었습니다. 아담 부부도 모든 생명체도 영원히, 영원히 살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지상천국에 상상을 초월한 재앙이 다가왔습니다. 그것은 아담 부부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범죄 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 때문에 죄와 사망의 재앙이 임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교통이 끊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망은 저주를 가져왔고 온 땅은 저주를 받아 황무하고 서로 죽이는 살벌한 세상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죄 때문에 육체도 늙고 병들고 죽어 지옥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삼대 재앙을 걸머지고 태어납니다. 어머니 탯줄이 끊어질 때부터 벌써 인생은 삼대재앙을 걸머지고 인생을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버림을 당한 죄인이요, 환경으로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헤치고 살며 육체적으로 늙고 병들며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걸머진 것입니다. 그리고 한 평생 이 재앙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다가 일생을 마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생을 보는 눈이 여러 방면으로 다릅니다.
[본론]
1. 헬라 사상과 하나님의 가르침
헬라사람들은 헬라철학을 통해서 인생을 바라볼 때 인간을 이원론적으로 바라봅니다. 다시 말하면 영혼은 선한 것이고 육체는 악한 것이므로 육체가 죽어 영원이 해방되어 신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최대의 행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만물을 이원론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플라톤의 「대화편」중 “파이돈”에서는 인간의 영혼과 육체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인간의 영혼은 이데아의 세상에 있다가 인간이 출생할 때 육체라는 감옥 속으로 들어온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인간의 영혼은 육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서 진리와 이상의 세계인 이데아의 세계로 돌아간다고 말합니다. 정신과 물질,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이원적으로 나누어서 생각하는 이러한 헬라 철학이 기독교에 들어와서 영지주의라는 이단사상을 낳았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육체는 악하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은 영혼이지 육체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우리 육체가 다시 살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혼이 육체 속에 들어있는 존재로써 만들어서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인간은 영혼만 가지고 인간이 되지 않습니다. 육체만 가지고 인간이 되지 않습니다. 영혼이 육체 속에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실 때 영혼만 구원하고 육체를 저버린 것이 아닙니다. 영혼은 구원하여 천국 낙원에 거하다가 주님 재림하실 때 육체를 부활시켜 영과 육이 합의 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헬라 철학에서 가르치는 영혼은 선하고 육체는 악하다는 것은 잘못된 사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히브리 사상 즉, 하나님의 가르치심은 하나님은 항상 인간을 영 따로 육 따로 분리해서 생각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이 일체가 된 존재인 것입니다. 그 때문에 기독교는 부활을 신앙의 근본으로 삼습니다. 우리가 지금 죽어서 우리 영혼이 육체를 벗어난다 할지라도 낙원에서 부활의 날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날에 주님 강림하실 때 함께 강림하여 부활의 영광스러운 몸을 얻게 되어 구원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육체를 벗어 버리고 영혼이 해방되신 것이 아니라 죽은 지 사흘 만에 육체 속에 돌아와서 영과 육이 일체가 되어서 부활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육체를 무덤에 버리시고 영혼만 부활하셔서 천국에서 들어가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은 비었습니다. 그 육체가 변화되어서 예수님은 영혼이 육체 속에 들어와 부활한 몸으로써 일어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이란 영혼은 선하고 육체는 악하다. 육체는 벗어 버리고 영혼만 산다는 헬라철학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영과 육체와 이 우주를 동시에 다 만드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만든 것은 모두 선한 것입니다. 죄가 들어와서 망쳐 놓았지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영도, 육체도, 세계도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와서 오늘날 부패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인간의 육체를 가리키는 히브리어는 ‘바사르’인데, 이는 원래 영과 혼을 포함해서 인간의 전 생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전인적인 인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병을 치료한다는 히브리어 ‘라파’ 역시 육체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뿐 아니라 인간을 원래의 완전한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국의 신학자인 마이클 그린은 성경이 말하는 영과 육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때때로 기독교회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영적 요소에만 관심을 두시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나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사역은 이러한 태도가 잘못된 것이며, 하나님의 구원은 전인구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로 구원이라는 용어는 복음서에서 질병의 치유에 대한 언급으로도 빈번하게 사용되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영혼만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길 원한다고 하셔서 하나님은 전 인간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완전한 구원도 영육이 하나가 되는 부활인 것입니다. 육체의 장막이 무너지면 영혼이 낙원에 가 있으나 주님 재림하실 때 부활의 몸을 얻어 구원이 완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후 5: 1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 육체를 벗어 버리면 우리는 하늘 낙원에 들어가서 부활의 그날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예비한 아름다운 낙원에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부활의 그날에 그리스도가 함께 와서 산자는 변화 받고 죽은 자는 낙원에서 주님과 함께 돌아와서 부활의 몸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그 속사람이 낙원으로 들어가서 주님 오실 날까지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육체는 더러운 것이니 벗어 버리고 영혼만 깨끗한 것이니 구원받는다는 헬라사상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육체의 장막 집을 벗어 버려서 육이 흙으로 돌아갔지만 영혼이 주님 부활의 날에 재림하시는 날에 부활한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부활의 몸을 얻어 영혼이 육체를 입어서 완전한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빌 3:21에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육체는 더러우니 벗어 버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변화에요. 영광스러운 몸이 되는 것입니다.
고전15:52에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할 몸을 얻겠고 이 더러운 몸이 영광스러운 몸으로 썩을 몸이 썩지 않을 몸으로 부활의 몸으로 변화를 받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지금 죽더라도 낙원에 가서 영광가운데 기다리고 있다가 부활의 그 아침에 아름다운 부활의 몸을 얻어 완전한 구원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은혜는 전인축복
여러분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은혜는 전인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영혼만 축복을 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전인축복을 언제나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30년 종살이 하다가 모세의 인도를 통해서 홍해수를 건너 광야에 들어왔을 때 그들이 수르광야에서 사흘 길을 걸어가나 마실 물을 얻지 못했습니다. 목이 말라 죽어갈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연못물을 발견했는데 물이 써서 마실 수 없었습니다. 그때 모세가 부르짖어 기도하니 하나님이 한 나무 가지를 지시하시는지라 그 나무 가지를 꺾어서 물에 던지니 물이 달아졌습니다. 이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깊습니다. 쓴물은 우리 영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은 쓴 연못물이 되어서 온갖 더러운 벌래가 득실거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 영혼 그 자체는 쓴 연못물이 되어서 쓸모없게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마실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나무 가지를 꺾어 던지니 달아졌습니다. 이 나뭇가지는 십자가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끌어안으면 우리 쓴 연못물 같은 영혼이 변화 되어서 달아 지고 마는 것입니다. 새롭게 중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통하게 되고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치료의 언약을 주었습니다. 내가 하나님 말씀을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 말씀을 행하면 애굽에서 내린 모든 질병도 하나도 내리지 않게 해주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출15:26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야훼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야훼임이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치료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 보여 주시고 그 다음에 그들이 간곳은 사막 가운데 있는 오아시스 엘림에게 간 것입니다. 오아시스에 사막바람 불고 물도 없고 생명체도 없는데 그 가운데 오아시스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엘림이라는 오아시스를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예비하시고 거기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출15:27)
이것은 주님께서 상징적으로 광야를 지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하나님은 같이 계시면 쓴 연못물을 달게 하시고 병은 고치시고 그들과 같이 계시면 항상 하나님이 엘림을 예비해 놓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들이 광야같은 이 세상을 지날 때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 영혼의 쓴물을 단물로 변화시켜 주시고 우리의 육체를 치료해 주시고 우리의 삶에 항상 오아시스를 예비해 줄 것은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나더라도 하나님이 같이 계시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함을 기대하고 갈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이 광야 같은 인생을 살 때에 언제나 주님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서 쓴 영혼이 달아 지고 우리의 환경에 주님이 오셔서 치료해 주시고 우리에게 사막과 같은 광야의 길을 걸어가더라도 오아시스를 예비해 주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전인축복인 것입니다. 잊지 말아야 될 하나님의 은총이 있습니다.
시103: 1~ 5에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사람들은 건망증에 잘 걸립니다. 자꾸 잊어 버려요. 하나님은 하나님이 주시는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한두 가지만 잊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모든 은택을 다 잊지 말라. 그 모든 은총이 무엇입니까?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이 은총을 잊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은총이 바로 삼중축복이 아닙니까? 죄를 사하시고 병을 고치시고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는 삼중축복의 하나님의 은총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억하고 하나님께 간구하면 하나님이 내 믿음대로 될 찌어다하고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나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도 하나님은 전인구원인 삼중축복을 약속한 것입니다.
출23:25~26에 “네 하나님 야훼를 섬기라 그리하면 야훼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서 병을 제하리니 네 나라에 낙태하는 자가 없고 임신하지 못하는 자가 없을 것이라 내가 너의 날 수를 채우리라”
여기에서 주 하나님을 섬기라는 것은 영혼이 잘되는 길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면 영혼이 잘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마귀를 이기고 세속을 극복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니 영혼이 잘될 것이고 또 물과 양식에 복을 내린다는 것은 범사에 잘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같이 계셔서 물과 양식에 복을 내려서 진실한 웰빙을 허락하여 주시고 그 다음에 병을 제하겠다는 것은 강건하게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영혼의 구원만 아닙니다. 육체와 세상은 악한 것이니 벗어 던져 버리고 배낭하나매고 천당만 향해서 가거라. 그렇게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전인구원입니다. 영혼을 구원하시고 환경을 구속하시고 육체를 치료하시는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인 것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축복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도 삼중축복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담, 하와가 가져온 삼대재앙에서 우리를 구출하사 삼중축복을 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에서 쫓겨나올 때 영원이 죄로 말미암아 죽었으니 영적인 재앙이요, 환경의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사는 가난과 저주의 생활이니 환경적인 재앙이요, 육체가 병들고 늙고 죽고 영원히 지옥에 떨어지게 되었으니 육체적인 재앙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이 땅에 삼대재앙을 가져와서 자손들에게 그것을 유산으로 남겨 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 삼대재앙을 다 짊어졌습니다. 영적인 모든 죄악을 다 담당하시고 육체의 질병을 짊어지시고 저주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몸 찢고 피 흘려서 이를 다 청산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제 삼대재앙이 제하여지고 삼중축복을 우리에게 주시게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죄악에서 대속시켜 준 것입니다.
롬 3:23~25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다고 말한 것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의롭다함을 얻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을 지킬 사람이 없어서 율법 아래서 의롭다함을 얻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새롭게 의를 얻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영원히 인간이 율법을 범한 죄를 대신 청산하시고 이제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용서받고 의롭게 되는 길을 열어 놓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죄 있는 그대로 못난 그대로 예수 앞에 나와서 예수님을 구주로 모셔 들이면 그 보혈로 말미암아 죄가 씻음을 받고 용서받고 주께서 의롭다 하는 선물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의로운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움을 선물로 받아서 구원을 얻어 영혼이 잘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미국의 레오 다르칸젤로라는 청년은 열한 살 때 한 부인의 핸드백 소매치기를 시작으로 열여섯에 절도죄로 체포된 후, 감옥에서 나가자마자 곧바로 마약 조달 일을 했습니다. 이후 그의 삶은 교도소를 들락거리는 일의 연속이 되었습니다. 1954년에는 마약 복용 및 소지혐의로, 1955년에는 소매치기로 감옥에 들어오는 생활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던 하루는 교도소 벽에 누군가가 새겨놓은 글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당신이 갈 데까지 다 가서, 이 문제가 당신의 마음을 괴롭히고, 슬피 우는 일 외에 다른 길이 없는 것같이 보일 때 예수께로 돌아오시오. 당신이 찾아야 할 분이 바로 예수님이기 때문이오.” 레오는 이 글을 읽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벽에 쓰여 진 것처럼 예수님을 부르며 기도했습니다. “예수님, 나는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나는 삶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습니다. 나는 갈 데까지 다 갔습니다. 이제 내 방황의 끝이 보입니다. 주님께 서 나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으시면 제발 그렇게 해주십시오. 나의 내일이 달라지게 해 주시옵소서.” 그렇게 그가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가운데 모시자 그 쓰디쓴 마음은 변화되기 시작하고 생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마음에 정결함과 평안함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그날 이후 레오의 삶은 변화되었습니다. 감옥에서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자신을 돌보고 주님을 더욱 의지했습니다. 형을 마치고 출옥한 이후에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웨스트 체스터 주립대학의 대학원과 필라델피아의 개혁 장로교회 신학교에 진학했습니다. 현재 레오는 교도소 선교를 활발하게 펼치며 교회와 청년 모임에 강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한때 그는 죄인이요, 극악한 강도였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그 속에 들어오자 죄가 용서받고 변화를 받아 쓴 연못물이 달아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중생하여 새사람이 되고 자기도 변화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변화의 길을 안내하는 주의 종이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은 우리 영혼이 잘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이 아무리 흉악한 죄악에 묶여있다 할지라도 보혈은 용서하지 못할 죄가 없고 해방시키지 못할 죄가 없는 것입니다. 보혈로 나오면 우리는 자유와 해방을 얻게 되고 새사람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는 병을 치료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병을 대속했습니다.
마 8:17에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벧전 2:24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펴보면 예수님이 2천 년 전에 이미 로마의 뜰에서 채찍에 맞아 우리 질병을 청산해 버린 것입니다. 질병의 부채를 다 갚아 버렸으므로 우리는 2천 년 전부터 법적으로 고침을 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가 병든 것은 마귀의 불법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마땅히 물리쳐야 될 병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형틀을 통해서 병에서 자유와 해방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육체는 악하니 병이 들든 늙든 죽어 버려라. 버려 버려라.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육체를 귀하게 보시고 병든 자는 고쳐 주시고 약한 자는 강하게 만들어 주시는 주님이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채찍에 맞아서 우리 육체의 병을 대속하시고 또 십자가에서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고 가신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이 땅에 사는 동안 이 육체를 가지고 있는 동안에 육체는 병에서 해방 되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치료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연약에서 자유를 얻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천당에 올라가서는 치료받을 필요가 없어요. 천당에는 병이 없기 때문에 치료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치료는 이 땅에 필요하면 주님께서 이 땅에 사는 우리들을 치료하기 위해서 채찍에 맞으신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저는 80년대에 시드니에서 성회를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에 다시 가보니까 성회 때 불치병에서 고침을 받았던 30여명의 성도들이 여전히 건강하다며 인사를 왔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사람은 당컨 목사님과 그의 따님이었습니다. 당컨 목사님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유명한 목사님입니다. 능력 있는 부흥사였습니다. 그는 세계 오순절 실행위원회 위원 중에 한 사람이어서 저하고 친면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제 아버지뻘 연세를 가지신 어른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시드니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을 때 당컨 목사님은 심장병으로 수술을 받고 그리고도 심장이 악화되어 죽음에 임박했습니다. 그리고 그 딸은 또 유방암으로 수술을 했는데 재발해서 소망이 없었습니다. 저의 집회에 사람들이 당컨 목사님을 엎고 나왔습니다. 그 딸도 부축해서 같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복음을 증거하고 난 다음 병자위해 기도하는데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셔서 계시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당컨 목사님 일어나십시오.” 일어났습니다. “목사님은 그 심장병에서 오늘 저녁 고침을 받았습니다.” 제가 그 말을 하면서 무릎이 덜덜덜 떨렸습니다. 왜냐하면 당컨 목사님은 오스트레일리아가 다 아는 훌륭한 목사님이십니다. 만일 내가 그 말을 하고 그 목사님이 살아나지 못하고 세상을 뜨면 나는 박살나는 겁니다. 하나님 계시가 오셔도 그 말을 한다는 것은 여간 힘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딸에게도 계시가 왔어요. “당신같이 온 따님도 유방암에서 완전히 해방되고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선언하고 집회를 마치고 제가 식은땀을 닦고 나와서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오면서 ‘주님 어떻게 하지요? 만일 당컨 목사님이 낫지 않고 그 딸이 낫지 않으면 나는 이제 박살났습니다. 나는 거짓 선지자가 되지 않습니까?’ 상당히 마음에 부담감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한 3년이 지난 후에 제가 오스트레일리아에 다시 가서 성회를 인도하는데 이 당컨 목사님과 그 딸이 나를 찾아왔어요. 이 당컨 목사님이 저에게 와서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조목사 그때 내가 나았다고 하자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내게 임하고 내 딸에게도 임하였다. 조목사가 떠나고 난 다음 나는 심장이 완전히 고침을 받고 얼마나 건강해졌는지 남아프리카에 가서 부흥회를 인도하고 왔다네. 정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내 딸을 보시오. 완전히 수술했어도 재발한 유방암에서 고침을 받아서 여기 오기 전에 나와 내 딸이 병원에 가서 다시 검진을 받았는데 나도 튼튼하고 내 딸도 건강하다는 검진결과를 받고 왔어요.” 얼마나 마음이 안심이 되는지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오늘날도 주님은 우리의 육체를 치료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병들어 천당 갈 필요가 있나요. 주님이 병을 대속했기 때문에 우리가 수명대로 살고 기운이 지나서 천당 가야지 흉악한 병에 고통을 당하고 몸부림치며 일을 갈다가 천당에 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우리는 저항해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병들어 천당 가지 않겠다. 나는 건강하게 살다가 기운이 소진하여 주님 부르심을 받아 가겠다. 아브라함도 병들어서 천당 가지 않았습니다. 기운이 소진해서 갔습니다. 모세도 120살까지 살아도 병들지 않고 산위에까지 올라가서 하나님 부르심에 기운이 진하여서 천당 간 것입니다. 여러분도 병들지 말고 건강하게 사시다가 기운이 진하여 천당 가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저주에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속량하여 주셨습니다. 성경에는 저주받은 자는 나무에 매달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왜 저주를 받았나요? 하나님의 아들이 저주받을 이유가 있나요? 여러분과 나의 저주를 대신 짊어지고 나무에 매달려 저주당한 것입니다.
성경 갈 3:13~14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셨으니 예수님이 우리 저주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청산했으므로 예수 안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법적으로 말하면 2천 년 전에 이미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복을 받은 사람이 복을 못 누리면 안 됩니다. 여러분은 복 받은 사람이므로 저주를 물리치고 복을 누리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삼대재앙을 재하시고 우리에게 삼중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몸 찢고 피 흘려주신 것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삼대재앙에서 이제 삼중축복의 생활을 하는 것이 우리 신앙입니다.
고후 5:17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전 아담의 자손으로써 상속받은 삼대재앙은 지나가 버렸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삼중축복을 받은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내 자신을 바라보고 내 자신이 새롭게 된 것을 알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사는 것은 마 6:33처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모시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나라와 주님의 의를 먼저 구하고 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통해서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는 역사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장차가서 살 천국은 오늘날 세상에서 누리는 삼중축복의 완성된 곳입니다. 지금 삼중축복이란 모형이요, 그림자인 것입니다. 완성된 곳은 천국입니다. 천국에 올라가면 우리가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믿어서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산 이 삶의 본처로 들어가는 것이요, 본부로 들어가는 것이요, 그 완성된 곳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계21: 3~ 4에 보면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은 우리가 영적인 낙원인 것입니다.
천국은 계22: 3에 있는 것처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중심으로 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며 사는데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과 영광의 근원이 되시므로 우리가 얼마나 주님 앞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겠습니까?
시16: 9에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라고 말했습니다.
11절에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천국이 왜 좋습니까? 천국은 기쁨의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쁨의 근원이 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우편은 즐거움이 넘칩니다. 여러분 항상 기쁘고 즐거우면 행복하지요. 내 마음에 기쁨이 충만하면 내 생활이 행복하고 가정에 웃음이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면 가정이 행복하고 교회가 기쁨이 충만하면 성도들이 모두다 행복한 것입니다. 기쁨이 있어야 행복한 것입니다. 천국은 기쁨이 넘치는 곳이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면 모두다 행복에 겨워하고 행복에 넘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낙원이 바로 천국인 것입니다. 천국이 멀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랫동네에 살고 천국은 윗동네에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 장막 집 무너지면 우리는 예수님의 인도로 윗동네 낙원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윗동네 지금 최자실 목사님도 와 계시고, 신현균 목사님도 며칠 전에 들어갔어요. 몇 주 전에 신현균 목사님하고 아침 식사를 같이 하는데 목사님 몸이 굉장히 너무 비대해지고 둔하더라구요. 그래서 “당신 운동 안하면 곧장 가! 운동 좀하고 몸을 잘 돌봐야지. 안 그러면 곧장 가겠어.” 그러니까 “태어날 때는 순서가 있지만 갈 때는 순서가 없어. 내가 당신보다 먼저 안 갈꺼야.” 그러더니만 먼저 가버리고 말았어요. 그러나 이곳과 저곳 멀지 않습니다. 윗동네에도 주님을 모시고 살고 아랫동네도 주님을 모시고 삽니다. 윗동네 아버지가 아랫동네 우리의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는 아랫동네도 살아있고 윗동네도 살아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는 모든 자가 살아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아랫동네에도 살아있고 윗동네에도 살아있는 것입니다. 신현균 목사님이 세상을 떴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입니다. 아랫동네에서 윗동네로 승전을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장례식을 천국입성축하예배로 드렸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랫동네에 살다가 얼마 있지 않다가 주님이 부르시면 윗동네로 가면 더 좋습니다. 바울선생이 말하기를 “내가 이 육체를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이 더 좋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도 낙원이요, 환경적으로도 낙원인 것입니다.
계 21: 2에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참 놀라운 말입니다. 저는 많은 결혼식을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결혼식 때 예쁘지 않은 신부를 본적이 없어요. 얼마나 화장을 정성들여하고 진하게 했든지 납작코도 높아 보이고, 적은 눈도 크게 보이고, 나쁜 피부도 아름답게 보이도록 화장을 한 것입니다. 신부들이 모두 다 예쁘다구요. 성경에 우리가 살 새 예루살렘이 얼마나 좋든지 도저히 설명할 말이 없기 때문에 신부가 신랑을 위해서 단장한 것 같더라. 여러분이 천국에 들어가면 좋다 좋다해도 이렇게 좋은 줄은 몰랐다. 감탄할 것입니다.
계22: 1~ 3에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 예수믿는 사람들에게는 이 땅에 사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낙원이 있고 거기에 들어가고 그 환경이 형언할 수 없기 아름다운 곳이기 때문에 죽음이 두려울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부활의 영생의 낙원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낙원에 들어가서 주님과 함께 거하다가 주님이 강림하실 때 데리고 오셔서 살아남은 자는 변화되고 우리는 부활의 몸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는 모두다 약한 몸이 강한 몸으로 추한 몸이 영화로운 몸으로 죽을 몸이 영생할 몸으로 있고 완전한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살전 4:16~17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삼중축복, 전인구원의 완성된 단계가 바로 천국인 것입니다.
13세기 이탈리아의 유명한 탐험가였던 마르코 폴로는 그 당시 미지의 세계였던 중국으로 건너와서 17년을 살았습니다. 그 뒤 조국으로 돌아가서 유명한 「동방견문록」이라는 책을 썼는데, 그의 임종 시에 친구들이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는 그 책에서 도무지 우리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만 잔뜩 기록해놓지 않았나? 이제라도 그 책의 모든 내용이 자네 상상에 의해서 꾸며졌다는 사실을 밝혀주면 좋겠네.” 그때 마르코 폴로는 “아니야, 내가 책에 쓴 것은 모두 진실일세. 사실 나는 내가 보고 겪었던 것의 절반도 채 기록하지 못 했네”라고 대답했습니다.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사도 요한은 천국에 대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으며, 문들은 진주로, 길은 정금으로” 되었다고 말했지만 실상은 천국에 그 영광을 반의, 반의, 반의, 반도 기록하지 못한 것입니다. 인간의 말로써 어떻게 형언하겠습니까? 바울선생은 셋째 하늘에 올라갔다 내려온 사실을 기록할 때 도저히 사람의 말로써 말할 수 없는 영광을 보았다고 말한 것입니다. 인간의 상상력이나 인간의 언어로써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우리가 장차갈 천국의 영광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삼대재앙으로 타락해서 비참하게 된 인생을 구출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몸 찢고 피 흘려 죽으심으로 그 보혈을 통해서 이 땅에 사는 동안 천국의 조그마한 부분을 맛보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 영혼을 구원해서 하나님 성령으로 충만하고 하나님과 교통하여 의와 평강과 희락을 체험하게 해주시고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저주를 제하시고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고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병을 고치시고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하사 장수하다가 주님 품에 안길 수 있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땅은 영원히 살 곳이 못됩니다. 주님께서 이제 때가오면 강림하시면 주님이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을 만드시고 우리가 그곳에 가서 주와 함께 영원히 살 때 그때는 진짜로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곳에 들어가서 우리가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영광스러운 고장의 지극히 적은 부분을 우리가 지금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세상에서 맛보는 주님의 구속의 은혜는 천국의 지극히 적은 맛보기에 불과합니다. 아주 적은 면에서 전인구원의 은총을 체험하나 주님 오시는 그날에 우리는 완전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거대한 은총과 약속을 우리가 갖고 있으므로 내일은 오늘보다 다음 달은 금번 달보다 명년은 금년보다 더 좋아지는 것입니다. 2부예배때 헌금 송을 우리 성가대 하는데 보니까 70이면 너무 빠르니 데리러 오지 마세요. 80은 아직 일찍이니 그만 두세요. 90은 천천히 갈 테니까 그렇게 아세요. 100세는 천천히 가십시다. 아마 이 땅에 굉장히 살고 싶은 사람이 지은 노래인 것 같아요. 그러나 우리는 70이 되든, 80이 되든, 90이 되든 주님께서 부르시면 아랫동네에서 윗동네로 옮기면 되는 것입니다. 만일 땅에 있는 장막집이 무너지면 손으로 짓지 않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바울선생은 차라리 담대하여 이 몸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이 더 좋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현재보다 내일이 더 좋은 곳에 갈 희망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나빠지면 큰일지요. 안 믿는 사람은 내일이 오늘보다 나빠지는 것입니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고통스럽고 슬프고 괴로운 지옥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나빠질 것으로 가니까 좌절과 절망이지요. 우리는 장차가 더 소망스럽고 더 영광스럽습니다. 장차가 더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곳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결론]
이 땅에서 체험한 그리스도의 은혜는 맛보기에 불과하고 영원한 본부로 들어갈 때 우리는 주님과 함께 눈물을 흘리고 기뻐 뛰며 즐거워하고 좋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는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기지 마십시오. 천국입성은 영광스러운 축하의 날인 것입니다. 우리도 다
그날에 춤추고 찬송 부르며 주님 앞에 나아가는 우리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타락한 아담의 후에 태어나서 삼대재앙을 걸머지고 몸부림치며 벌레와 같이 진토와 거름무더기에서 살았는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는 삼대재앙에서 삼중축복으로 옮겨 주시고 또 나아가서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 만들어 주셨으니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이 일을 이루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예수님을 구주로 모실 수 있도록 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 신앙을 끝까지 가지고 있다가 천국에 들어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 아멘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왜 삼중축복인가?’ 이 제목으로 은혜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에덴동산은 지상천국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상천국을 본 따 지상천국인 에덴동산을 만드셨습니다. 에덴동산에는 죄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죄로 인한 부끄러움과 하나님과의 교통의 단절이 전혀 없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항상 하나님과 함께 동거, 동행 했습니다. 만물의 생기발랄함과 아름다움은 형언할 수없이 영광으로 충만했습니다. 하나님조차도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보아서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에덴에는 죽음이란 그림자도 없었습니다. 아담 부부도 모든 생명체도 영원히, 영원히 살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지상천국에 상상을 초월한 재앙이 다가왔습니다. 그것은 아담 부부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범죄 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 때문에 죄와 사망의 재앙이 임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교통이 끊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망은 저주를 가져왔고 온 땅은 저주를 받아 황무하고 서로 죽이는 살벌한 세상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죄 때문에 육체도 늙고 병들고 죽어 지옥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삼대 재앙을 걸머지고 태어납니다. 어머니 탯줄이 끊어질 때부터 벌써 인생은 삼대재앙을 걸머지고 인생을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버림을 당한 죄인이요, 환경으로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헤치고 살며 육체적으로 늙고 병들며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걸머진 것입니다. 그리고 한 평생 이 재앙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다가 일생을 마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생을 보는 눈이 여러 방면으로 다릅니다.
[본론]
1. 헬라 사상과 하나님의 가르침
헬라사람들은 헬라철학을 통해서 인생을 바라볼 때 인간을 이원론적으로 바라봅니다. 다시 말하면 영혼은 선한 것이고 육체는 악한 것이므로 육체가 죽어 영원이 해방되어 신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최대의 행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만물을 이원론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플라톤의 「대화편」중 “파이돈”에서는 인간의 영혼과 육체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인간의 영혼은 이데아의 세상에 있다가 인간이 출생할 때 육체라는 감옥 속으로 들어온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인간의 영혼은 육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서 진리와 이상의 세계인 이데아의 세계로 돌아간다고 말합니다. 정신과 물질,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이원적으로 나누어서 생각하는 이러한 헬라 철학이 기독교에 들어와서 영지주의라는 이단사상을 낳았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육체는 악하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은 영혼이지 육체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우리 육체가 다시 살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혼이 육체 속에 들어있는 존재로써 만들어서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인간은 영혼만 가지고 인간이 되지 않습니다. 육체만 가지고 인간이 되지 않습니다. 영혼이 육체 속에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실 때 영혼만 구원하고 육체를 저버린 것이 아닙니다. 영혼은 구원하여 천국 낙원에 거하다가 주님 재림하실 때 육체를 부활시켜 영과 육이 합의 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헬라 철학에서 가르치는 영혼은 선하고 육체는 악하다는 것은 잘못된 사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히브리 사상 즉, 하나님의 가르치심은 하나님은 항상 인간을 영 따로 육 따로 분리해서 생각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이 일체가 된 존재인 것입니다. 그 때문에 기독교는 부활을 신앙의 근본으로 삼습니다. 우리가 지금 죽어서 우리 영혼이 육체를 벗어난다 할지라도 낙원에서 부활의 날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날에 주님 강림하실 때 함께 강림하여 부활의 영광스러운 몸을 얻게 되어 구원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육체를 벗어 버리고 영혼이 해방되신 것이 아니라 죽은 지 사흘 만에 육체 속에 돌아와서 영과 육이 일체가 되어서 부활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육체를 무덤에 버리시고 영혼만 부활하셔서 천국에서 들어가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은 비었습니다. 그 육체가 변화되어서 예수님은 영혼이 육체 속에 들어와 부활한 몸으로써 일어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이란 영혼은 선하고 육체는 악하다. 육체는 벗어 버리고 영혼만 산다는 헬라철학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영과 육체와 이 우주를 동시에 다 만드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만든 것은 모두 선한 것입니다. 죄가 들어와서 망쳐 놓았지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영도, 육체도, 세계도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와서 오늘날 부패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인간의 육체를 가리키는 히브리어는 ‘바사르’인데, 이는 원래 영과 혼을 포함해서 인간의 전 생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전인적인 인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병을 치료한다는 히브리어 ‘라파’ 역시 육체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뿐 아니라 인간을 원래의 완전한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국의 신학자인 마이클 그린은 성경이 말하는 영과 육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때때로 기독교회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영적 요소에만 관심을 두시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나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사역은 이러한 태도가 잘못된 것이며, 하나님의 구원은 전인구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로 구원이라는 용어는 복음서에서 질병의 치유에 대한 언급으로도 빈번하게 사용되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영혼만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길 원한다고 하셔서 하나님은 전 인간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완전한 구원도 영육이 하나가 되는 부활인 것입니다. 육체의 장막이 무너지면 영혼이 낙원에 가 있으나 주님 재림하실 때 부활의 몸을 얻어 구원이 완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후 5: 1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 육체를 벗어 버리면 우리는 하늘 낙원에 들어가서 부활의 그날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예비한 아름다운 낙원에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부활의 그날에 그리스도가 함께 와서 산자는 변화 받고 죽은 자는 낙원에서 주님과 함께 돌아와서 부활의 몸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그 속사람이 낙원으로 들어가서 주님 오실 날까지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육체는 더러운 것이니 벗어 버리고 영혼만 깨끗한 것이니 구원받는다는 헬라사상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육체의 장막 집을 벗어 버려서 육이 흙으로 돌아갔지만 영혼이 주님 부활의 날에 재림하시는 날에 부활한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부활의 몸을 얻어 영혼이 육체를 입어서 완전한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빌 3:21에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육체는 더러우니 벗어 버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변화에요. 영광스러운 몸이 되는 것입니다.
고전15:52에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할 몸을 얻겠고 이 더러운 몸이 영광스러운 몸으로 썩을 몸이 썩지 않을 몸으로 부활의 몸으로 변화를 받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지금 죽더라도 낙원에 가서 영광가운데 기다리고 있다가 부활의 그 아침에 아름다운 부활의 몸을 얻어 완전한 구원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은혜는 전인축복
여러분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은혜는 전인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영혼만 축복을 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전인축복을 언제나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30년 종살이 하다가 모세의 인도를 통해서 홍해수를 건너 광야에 들어왔을 때 그들이 수르광야에서 사흘 길을 걸어가나 마실 물을 얻지 못했습니다. 목이 말라 죽어갈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연못물을 발견했는데 물이 써서 마실 수 없었습니다. 그때 모세가 부르짖어 기도하니 하나님이 한 나무 가지를 지시하시는지라 그 나무 가지를 꺾어서 물에 던지니 물이 달아졌습니다. 이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깊습니다. 쓴물은 우리 영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은 쓴 연못물이 되어서 온갖 더러운 벌래가 득실거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 영혼 그 자체는 쓴 연못물이 되어서 쓸모없게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마실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나무 가지를 꺾어 던지니 달아졌습니다. 이 나뭇가지는 십자가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끌어안으면 우리 쓴 연못물 같은 영혼이 변화 되어서 달아 지고 마는 것입니다. 새롭게 중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통하게 되고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치료의 언약을 주었습니다. 내가 하나님 말씀을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 말씀을 행하면 애굽에서 내린 모든 질병도 하나도 내리지 않게 해주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출15:26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야훼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야훼임이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치료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 보여 주시고 그 다음에 그들이 간곳은 사막 가운데 있는 오아시스 엘림에게 간 것입니다. 오아시스에 사막바람 불고 물도 없고 생명체도 없는데 그 가운데 오아시스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엘림이라는 오아시스를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예비하시고 거기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출15:27)
이것은 주님께서 상징적으로 광야를 지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하나님은 같이 계시면 쓴 연못물을 달게 하시고 병은 고치시고 그들과 같이 계시면 항상 하나님이 엘림을 예비해 놓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들이 광야같은 이 세상을 지날 때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 영혼의 쓴물을 단물로 변화시켜 주시고 우리의 육체를 치료해 주시고 우리의 삶에 항상 오아시스를 예비해 줄 것은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나더라도 하나님이 같이 계시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함을 기대하고 갈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이 광야 같은 인생을 살 때에 언제나 주님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서 쓴 영혼이 달아 지고 우리의 환경에 주님이 오셔서 치료해 주시고 우리에게 사막과 같은 광야의 길을 걸어가더라도 오아시스를 예비해 주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전인축복인 것입니다. 잊지 말아야 될 하나님의 은총이 있습니다.
시103: 1~ 5에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사람들은 건망증에 잘 걸립니다. 자꾸 잊어 버려요. 하나님은 하나님이 주시는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한두 가지만 잊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모든 은택을 다 잊지 말라. 그 모든 은총이 무엇입니까?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이 은총을 잊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은총이 바로 삼중축복이 아닙니까? 죄를 사하시고 병을 고치시고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는 삼중축복의 하나님의 은총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억하고 하나님께 간구하면 하나님이 내 믿음대로 될 찌어다하고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나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도 하나님은 전인구원인 삼중축복을 약속한 것입니다.
출23:25~26에 “네 하나님 야훼를 섬기라 그리하면 야훼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서 병을 제하리니 네 나라에 낙태하는 자가 없고 임신하지 못하는 자가 없을 것이라 내가 너의 날 수를 채우리라”
여기에서 주 하나님을 섬기라는 것은 영혼이 잘되는 길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면 영혼이 잘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마귀를 이기고 세속을 극복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니 영혼이 잘될 것이고 또 물과 양식에 복을 내린다는 것은 범사에 잘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같이 계셔서 물과 양식에 복을 내려서 진실한 웰빙을 허락하여 주시고 그 다음에 병을 제하겠다는 것은 강건하게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영혼의 구원만 아닙니다. 육체와 세상은 악한 것이니 벗어 던져 버리고 배낭하나매고 천당만 향해서 가거라. 그렇게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전인구원입니다. 영혼을 구원하시고 환경을 구속하시고 육체를 치료하시는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인 것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축복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도 삼중축복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담, 하와가 가져온 삼대재앙에서 우리를 구출하사 삼중축복을 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에서 쫓겨나올 때 영원이 죄로 말미암아 죽었으니 영적인 재앙이요, 환경의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사는 가난과 저주의 생활이니 환경적인 재앙이요, 육체가 병들고 늙고 죽고 영원히 지옥에 떨어지게 되었으니 육체적인 재앙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이 땅에 삼대재앙을 가져와서 자손들에게 그것을 유산으로 남겨 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 삼대재앙을 다 짊어졌습니다. 영적인 모든 죄악을 다 담당하시고 육체의 질병을 짊어지시고 저주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몸 찢고 피 흘려서 이를 다 청산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제 삼대재앙이 제하여지고 삼중축복을 우리에게 주시게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죄악에서 대속시켜 준 것입니다.
롬 3:23~25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다고 말한 것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의롭다함을 얻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을 지킬 사람이 없어서 율법 아래서 의롭다함을 얻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새롭게 의를 얻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영원히 인간이 율법을 범한 죄를 대신 청산하시고 이제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용서받고 의롭게 되는 길을 열어 놓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죄 있는 그대로 못난 그대로 예수 앞에 나와서 예수님을 구주로 모셔 들이면 그 보혈로 말미암아 죄가 씻음을 받고 용서받고 주께서 의롭다 하는 선물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의로운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움을 선물로 받아서 구원을 얻어 영혼이 잘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미국의 레오 다르칸젤로라는 청년은 열한 살 때 한 부인의 핸드백 소매치기를 시작으로 열여섯에 절도죄로 체포된 후, 감옥에서 나가자마자 곧바로 마약 조달 일을 했습니다. 이후 그의 삶은 교도소를 들락거리는 일의 연속이 되었습니다. 1954년에는 마약 복용 및 소지혐의로, 1955년에는 소매치기로 감옥에 들어오는 생활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던 하루는 교도소 벽에 누군가가 새겨놓은 글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당신이 갈 데까지 다 가서, 이 문제가 당신의 마음을 괴롭히고, 슬피 우는 일 외에 다른 길이 없는 것같이 보일 때 예수께로 돌아오시오. 당신이 찾아야 할 분이 바로 예수님이기 때문이오.” 레오는 이 글을 읽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벽에 쓰여 진 것처럼 예수님을 부르며 기도했습니다. “예수님, 나는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나는 삶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습니다. 나는 갈 데까지 다 갔습니다. 이제 내 방황의 끝이 보입니다. 주님께 서 나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으시면 제발 그렇게 해주십시오. 나의 내일이 달라지게 해 주시옵소서.” 그렇게 그가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가운데 모시자 그 쓰디쓴 마음은 변화되기 시작하고 생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마음에 정결함과 평안함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그날 이후 레오의 삶은 변화되었습니다. 감옥에서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자신을 돌보고 주님을 더욱 의지했습니다. 형을 마치고 출옥한 이후에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웨스트 체스터 주립대학의 대학원과 필라델피아의 개혁 장로교회 신학교에 진학했습니다. 현재 레오는 교도소 선교를 활발하게 펼치며 교회와 청년 모임에 강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한때 그는 죄인이요, 극악한 강도였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그 속에 들어오자 죄가 용서받고 변화를 받아 쓴 연못물이 달아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중생하여 새사람이 되고 자기도 변화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변화의 길을 안내하는 주의 종이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은 우리 영혼이 잘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이 아무리 흉악한 죄악에 묶여있다 할지라도 보혈은 용서하지 못할 죄가 없고 해방시키지 못할 죄가 없는 것입니다. 보혈로 나오면 우리는 자유와 해방을 얻게 되고 새사람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는 병을 치료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병을 대속했습니다.
마 8:17에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벧전 2:24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펴보면 예수님이 2천 년 전에 이미 로마의 뜰에서 채찍에 맞아 우리 질병을 청산해 버린 것입니다. 질병의 부채를 다 갚아 버렸으므로 우리는 2천 년 전부터 법적으로 고침을 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가 병든 것은 마귀의 불법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마땅히 물리쳐야 될 병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형틀을 통해서 병에서 자유와 해방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육체는 악하니 병이 들든 늙든 죽어 버려라. 버려 버려라.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육체를 귀하게 보시고 병든 자는 고쳐 주시고 약한 자는 강하게 만들어 주시는 주님이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채찍에 맞아서 우리 육체의 병을 대속하시고 또 십자가에서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고 가신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이 땅에 사는 동안 이 육체를 가지고 있는 동안에 육체는 병에서 해방 되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치료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연약에서 자유를 얻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천당에 올라가서는 치료받을 필요가 없어요. 천당에는 병이 없기 때문에 치료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치료는 이 땅에 필요하면 주님께서 이 땅에 사는 우리들을 치료하기 위해서 채찍에 맞으신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저는 80년대에 시드니에서 성회를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에 다시 가보니까 성회 때 불치병에서 고침을 받았던 30여명의 성도들이 여전히 건강하다며 인사를 왔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사람은 당컨 목사님과 그의 따님이었습니다. 당컨 목사님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유명한 목사님입니다. 능력 있는 부흥사였습니다. 그는 세계 오순절 실행위원회 위원 중에 한 사람이어서 저하고 친면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제 아버지뻘 연세를 가지신 어른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시드니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을 때 당컨 목사님은 심장병으로 수술을 받고 그리고도 심장이 악화되어 죽음에 임박했습니다. 그리고 그 딸은 또 유방암으로 수술을 했는데 재발해서 소망이 없었습니다. 저의 집회에 사람들이 당컨 목사님을 엎고 나왔습니다. 그 딸도 부축해서 같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복음을 증거하고 난 다음 병자위해 기도하는데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셔서 계시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당컨 목사님 일어나십시오.” 일어났습니다. “목사님은 그 심장병에서 오늘 저녁 고침을 받았습니다.” 제가 그 말을 하면서 무릎이 덜덜덜 떨렸습니다. 왜냐하면 당컨 목사님은 오스트레일리아가 다 아는 훌륭한 목사님이십니다. 만일 내가 그 말을 하고 그 목사님이 살아나지 못하고 세상을 뜨면 나는 박살나는 겁니다. 하나님 계시가 오셔도 그 말을 한다는 것은 여간 힘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딸에게도 계시가 왔어요. “당신같이 온 따님도 유방암에서 완전히 해방되고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선언하고 집회를 마치고 제가 식은땀을 닦고 나와서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오면서 ‘주님 어떻게 하지요? 만일 당컨 목사님이 낫지 않고 그 딸이 낫지 않으면 나는 이제 박살났습니다. 나는 거짓 선지자가 되지 않습니까?’ 상당히 마음에 부담감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한 3년이 지난 후에 제가 오스트레일리아에 다시 가서 성회를 인도하는데 이 당컨 목사님과 그 딸이 나를 찾아왔어요. 이 당컨 목사님이 저에게 와서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조목사 그때 내가 나았다고 하자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내게 임하고 내 딸에게도 임하였다. 조목사가 떠나고 난 다음 나는 심장이 완전히 고침을 받고 얼마나 건강해졌는지 남아프리카에 가서 부흥회를 인도하고 왔다네. 정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내 딸을 보시오. 완전히 수술했어도 재발한 유방암에서 고침을 받아서 여기 오기 전에 나와 내 딸이 병원에 가서 다시 검진을 받았는데 나도 튼튼하고 내 딸도 건강하다는 검진결과를 받고 왔어요.” 얼마나 마음이 안심이 되는지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오늘날도 주님은 우리의 육체를 치료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병들어 천당 갈 필요가 있나요. 주님이 병을 대속했기 때문에 우리가 수명대로 살고 기운이 지나서 천당 가야지 흉악한 병에 고통을 당하고 몸부림치며 일을 갈다가 천당에 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우리는 저항해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병들어 천당 가지 않겠다. 나는 건강하게 살다가 기운이 소진하여 주님 부르심을 받아 가겠다. 아브라함도 병들어서 천당 가지 않았습니다. 기운이 소진해서 갔습니다. 모세도 120살까지 살아도 병들지 않고 산위에까지 올라가서 하나님 부르심에 기운이 진하여서 천당 간 것입니다. 여러분도 병들지 말고 건강하게 사시다가 기운이 진하여 천당 가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저주에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속량하여 주셨습니다. 성경에는 저주받은 자는 나무에 매달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왜 저주를 받았나요? 하나님의 아들이 저주받을 이유가 있나요? 여러분과 나의 저주를 대신 짊어지고 나무에 매달려 저주당한 것입니다.
성경 갈 3:13~14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셨으니 예수님이 우리 저주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청산했으므로 예수 안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법적으로 말하면 2천 년 전에 이미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복을 받은 사람이 복을 못 누리면 안 됩니다. 여러분은 복 받은 사람이므로 저주를 물리치고 복을 누리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삼대재앙을 재하시고 우리에게 삼중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몸 찢고 피 흘려주신 것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삼대재앙에서 이제 삼중축복의 생활을 하는 것이 우리 신앙입니다.
고후 5:17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전 아담의 자손으로써 상속받은 삼대재앙은 지나가 버렸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삼중축복을 받은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내 자신을 바라보고 내 자신이 새롭게 된 것을 알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사는 것은 마 6:33처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모시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나라와 주님의 의를 먼저 구하고 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통해서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는 역사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장차가서 살 천국은 오늘날 세상에서 누리는 삼중축복의 완성된 곳입니다. 지금 삼중축복이란 모형이요, 그림자인 것입니다. 완성된 곳은 천국입니다. 천국에 올라가면 우리가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믿어서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산 이 삶의 본처로 들어가는 것이요, 본부로 들어가는 것이요, 그 완성된 곳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계21: 3~ 4에 보면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은 우리가 영적인 낙원인 것입니다.
천국은 계22: 3에 있는 것처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중심으로 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며 사는데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과 영광의 근원이 되시므로 우리가 얼마나 주님 앞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겠습니까?
시16: 9에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라고 말했습니다.
11절에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천국이 왜 좋습니까? 천국은 기쁨의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쁨의 근원이 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우편은 즐거움이 넘칩니다. 여러분 항상 기쁘고 즐거우면 행복하지요. 내 마음에 기쁨이 충만하면 내 생활이 행복하고 가정에 웃음이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면 가정이 행복하고 교회가 기쁨이 충만하면 성도들이 모두다 행복한 것입니다. 기쁨이 있어야 행복한 것입니다. 천국은 기쁨이 넘치는 곳이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면 모두다 행복에 겨워하고 행복에 넘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낙원이 바로 천국인 것입니다. 천국이 멀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랫동네에 살고 천국은 윗동네에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 장막 집 무너지면 우리는 예수님의 인도로 윗동네 낙원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윗동네 지금 최자실 목사님도 와 계시고, 신현균 목사님도 며칠 전에 들어갔어요. 몇 주 전에 신현균 목사님하고 아침 식사를 같이 하는데 목사님 몸이 굉장히 너무 비대해지고 둔하더라구요. 그래서 “당신 운동 안하면 곧장 가! 운동 좀하고 몸을 잘 돌봐야지. 안 그러면 곧장 가겠어.” 그러니까 “태어날 때는 순서가 있지만 갈 때는 순서가 없어. 내가 당신보다 먼저 안 갈꺼야.” 그러더니만 먼저 가버리고 말았어요. 그러나 이곳과 저곳 멀지 않습니다. 윗동네에도 주님을 모시고 살고 아랫동네도 주님을 모시고 삽니다. 윗동네 아버지가 아랫동네 우리의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는 아랫동네도 살아있고 윗동네도 살아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는 모든 자가 살아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아랫동네에도 살아있고 윗동네에도 살아있는 것입니다. 신현균 목사님이 세상을 떴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입니다. 아랫동네에서 윗동네로 승전을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장례식을 천국입성축하예배로 드렸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랫동네에 살다가 얼마 있지 않다가 주님이 부르시면 윗동네로 가면 더 좋습니다. 바울선생이 말하기를 “내가 이 육체를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이 더 좋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도 낙원이요, 환경적으로도 낙원인 것입니다.
계 21: 2에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참 놀라운 말입니다. 저는 많은 결혼식을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결혼식 때 예쁘지 않은 신부를 본적이 없어요. 얼마나 화장을 정성들여하고 진하게 했든지 납작코도 높아 보이고, 적은 눈도 크게 보이고, 나쁜 피부도 아름답게 보이도록 화장을 한 것입니다. 신부들이 모두 다 예쁘다구요. 성경에 우리가 살 새 예루살렘이 얼마나 좋든지 도저히 설명할 말이 없기 때문에 신부가 신랑을 위해서 단장한 것 같더라. 여러분이 천국에 들어가면 좋다 좋다해도 이렇게 좋은 줄은 몰랐다. 감탄할 것입니다.
계22: 1~ 3에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 예수믿는 사람들에게는 이 땅에 사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낙원이 있고 거기에 들어가고 그 환경이 형언할 수 없기 아름다운 곳이기 때문에 죽음이 두려울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부활의 영생의 낙원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낙원에 들어가서 주님과 함께 거하다가 주님이 강림하실 때 데리고 오셔서 살아남은 자는 변화되고 우리는 부활의 몸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는 모두다 약한 몸이 강한 몸으로 추한 몸이 영화로운 몸으로 죽을 몸이 영생할 몸으로 있고 완전한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살전 4:16~17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삼중축복, 전인구원의 완성된 단계가 바로 천국인 것입니다.
13세기 이탈리아의 유명한 탐험가였던 마르코 폴로는 그 당시 미지의 세계였던 중국으로 건너와서 17년을 살았습니다. 그 뒤 조국으로 돌아가서 유명한 「동방견문록」이라는 책을 썼는데, 그의 임종 시에 친구들이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는 그 책에서 도무지 우리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만 잔뜩 기록해놓지 않았나? 이제라도 그 책의 모든 내용이 자네 상상에 의해서 꾸며졌다는 사실을 밝혀주면 좋겠네.” 그때 마르코 폴로는 “아니야, 내가 책에 쓴 것은 모두 진실일세. 사실 나는 내가 보고 겪었던 것의 절반도 채 기록하지 못 했네”라고 대답했습니다.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사도 요한은 천국에 대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으며, 문들은 진주로, 길은 정금으로” 되었다고 말했지만 실상은 천국에 그 영광을 반의, 반의, 반의, 반도 기록하지 못한 것입니다. 인간의 말로써 어떻게 형언하겠습니까? 바울선생은 셋째 하늘에 올라갔다 내려온 사실을 기록할 때 도저히 사람의 말로써 말할 수 없는 영광을 보았다고 말한 것입니다. 인간의 상상력이나 인간의 언어로써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우리가 장차갈 천국의 영광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삼대재앙으로 타락해서 비참하게 된 인생을 구출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몸 찢고 피 흘려 죽으심으로 그 보혈을 통해서 이 땅에 사는 동안 천국의 조그마한 부분을 맛보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 영혼을 구원해서 하나님 성령으로 충만하고 하나님과 교통하여 의와 평강과 희락을 체험하게 해주시고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저주를 제하시고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고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병을 고치시고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하사 장수하다가 주님 품에 안길 수 있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땅은 영원히 살 곳이 못됩니다. 주님께서 이제 때가오면 강림하시면 주님이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을 만드시고 우리가 그곳에 가서 주와 함께 영원히 살 때 그때는 진짜로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곳에 들어가서 우리가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영광스러운 고장의 지극히 적은 부분을 우리가 지금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세상에서 맛보는 주님의 구속의 은혜는 천국의 지극히 적은 맛보기에 불과합니다. 아주 적은 면에서 전인구원의 은총을 체험하나 주님 오시는 그날에 우리는 완전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거대한 은총과 약속을 우리가 갖고 있으므로 내일은 오늘보다 다음 달은 금번 달보다 명년은 금년보다 더 좋아지는 것입니다. 2부예배때 헌금 송을 우리 성가대 하는데 보니까 70이면 너무 빠르니 데리러 오지 마세요. 80은 아직 일찍이니 그만 두세요. 90은 천천히 갈 테니까 그렇게 아세요. 100세는 천천히 가십시다. 아마 이 땅에 굉장히 살고 싶은 사람이 지은 노래인 것 같아요. 그러나 우리는 70이 되든, 80이 되든, 90이 되든 주님께서 부르시면 아랫동네에서 윗동네로 옮기면 되는 것입니다. 만일 땅에 있는 장막집이 무너지면 손으로 짓지 않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바울선생은 차라리 담대하여 이 몸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이 더 좋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현재보다 내일이 더 좋은 곳에 갈 희망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나빠지면 큰일지요. 안 믿는 사람은 내일이 오늘보다 나빠지는 것입니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고통스럽고 슬프고 괴로운 지옥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나빠질 것으로 가니까 좌절과 절망이지요. 우리는 장차가 더 소망스럽고 더 영광스럽습니다. 장차가 더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곳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결론]
이 땅에서 체험한 그리스도의 은혜는 맛보기에 불과하고 영원한 본부로 들어갈 때 우리는 주님과 함께 눈물을 흘리고 기뻐 뛰며 즐거워하고 좋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는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기지 마십시오. 천국입성은 영광스러운 축하의 날인 것입니다. 우리도 다
그날에 춤추고 찬송 부르며 주님 앞에 나아가는 우리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타락한 아담의 후에 태어나서 삼대재앙을 걸머지고 몸부림치며 벌레와 같이 진토와 거름무더기에서 살았는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는 삼대재앙에서 삼중축복으로 옮겨 주시고 또 나아가서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 만들어 주셨으니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이 일을 이루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예수님을 구주로 모실 수 있도록 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 신앙을 끝까지 가지고 있다가 천국에 들어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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