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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워지는 길

요한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1842 추천 수 0 2009.10.06 23:5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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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8:31-38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38528 
emoticon2004. 11.7.                        

예수에 대한 질문
예수의 정체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 거의 무의미하겠지만 신약성서가 형성되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게는 매우 진지하고 시급했습니다. 이 말은 곧 예수님이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이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은 예수를 따라다니면서도 예수의 정체를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고 부활, 승천하신 다음에도 예수에 대한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가 하나님인지, 혹은 하나님의 아들인지, 그의 부활은 어떤 현상인지, 다시 오겠다는 약속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그리고 살아있는 동안에 그를 중심으로 벌어졌던 모든 사건들과 그의 가르침은 무슨 의미가 있는지 등등, 모든 사안들마다 궁금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들에게 확실한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어서 매장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자기들도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 예수님이 자신들에게 다시 나타났다는 사실 뿐입니다. 이 부활의 빛 안에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 사건을 심층적으로, 포괄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 노력의 결과가 바로 신약성서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31-38)은 예수의 정체에 대한 변증이라 할 12절부터 59절 안에 들어 있습니다. 12절에서 예수는 자신을 가리켜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합니다. 25절에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이러한 질문은 예수님이 살아있을 동안만이 아니라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대두되었습니다. 위에서 이런 질문이 우리에게 무의미하다고 말했지만 그런 언급은 우리에게 나타난 문제의 단편을 설명하는 것이지 이 질문이 함축하고 있는 본질적인 차원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만약 오늘 우리가 예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면 둘 중의 하나에 해당될 것입니다. 신앙 문제를 진지한 성찰의 차원에서 접근하지 않고 예수가 우리의 메시아라는 사실을 무조건 믿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하나이며, 이런 질문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우리가 알 수 없기 때문에 포기하는 경우가 다른 하나입니다.
우리는 이런 두 가지 태도 모두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과거의 역사적 한 시점에서 완결된 게 아니라 계속해서 심화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예수가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역사적으로 계시한다는 사실을 전제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질문을 계속 던져야만 합니다.

제자의 길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문을 여십니다.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이다.” 우리는 여기서 선생인 예수와 제자의 관계에서 무엇이 핵심적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바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는 것이야말로 예수의 제자가 되는 바른 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긴다는 것은 그 말씀이 가리키고 있는 세계 안으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예수의 말씀은 단지 착하게 살라는 윤리적 가르침이거나 세상에서 단지 행복하게 사는 요령이 아니라 훨씬 근원적인 사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근원적인 사태라는 것은 곧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 제일 처음으로 선포하신 말씀이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이르렀다.”였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장애인을 고치거나 난치병 환자를 고친 사건들도 역시 하나님 나라에서 벌어질 일들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의 죄가 용서받았다고 선포하신 일로 인해서 신성모독이라는 비난을 받은 일도 역시 예수님이 전하시려 했던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요즘 저는 자의반타의반으로 설교비평에 관계된 작업을 하다보니까 기독교 방송을 통해서, 또는 설교집을 통해서 다른 분들의 설교를 자주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많은 설교에서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대목들이 없지는 않지만 대개는 별로 본질적이지 않은 내용들이 많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간혹 상식 수준에도 미치지 목하는 내용을 설교하거나 아니면 겨우 교양강좌에 불과한 내용을 설교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예컨대 ‘웃으면 복이 온다’거나 기도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식의 설교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또는 남의 돈을 떼어먹지 말라고 열을 내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런 내용들은 단지 상식이거나 교양에 불과한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모두 지키는 것들을 설교의 중심 주제로 삼는다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설교일까요? 오늘 본문을 기초로 해서 대답한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긴다는 사실과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사실 사이의 관계를 심층적으로 들여다보고 그 관계를 해석하는 것이 곧 하나님 나라에 기준을 둔 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의 길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가 되어야 진리를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씀일까요? 그래, 예수님을 믿으라는 말씀이구나, 하고 생각하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충분한 대답은 아닙니다. 지난 주일이 종교개혁 주일이었지만, 지난 과거의 교회 역사를 뒤돌아보면 우리 기독교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오히려 진리와 어긋난 일을 많이 저질렀습니다. 이런 마당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 진리를 알게 된다는 이 예수님의 말씀에 무슨 정당성이 있는 걸까요? 이런 근본적인 문제들이 성서읽기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성서의 깊이로 들어가지 못할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고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고 단지 자신들의 종교적 목적을 위해서 도구로 사용할 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긴 제자들이야말로 진리를 알게 된다는 이 명제는 곧 요한공동체를 비롯한 초기 기독교의 가장 근원적인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이들은 무엇을 진리로 생각했을까요?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진리의 길이라고 생각했으며,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헬라철학은 ‘너 자신을 아는 것’이 곧 진리의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초기 기독교와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것이야말로 진리의 길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곧 예수님 자체이니까 예수님을 마음에 새기는 것이 곧 진리의 길인 셈입니다. 요 14:6에서도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길, 진리,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곧 초기 기독교의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은 진리 자체이며, 따라서 그를 따르는 제자가 되면 곧 진리를 알게 된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수학 공식을 많이 알거나 유전공학에 대한 깊은 지식을 보통 진리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것들은 진리에 이르기 위한 하나의 정보에 불과합니다. 음악에서도 악보대로 연주할 수 있는 기술은 음악적 정보이지 그것이 곧 음악 경험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예수를 진리라고 인식한 이유는 바로 예수에게서 궁극적인 생명 사건이 발생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정치와 경제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생존의 조건들을 통해서 생명이 결정되는 게 아니라 예수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말은 곧 우리의 생명은 우리 스스로의 능력으로 완성시켜나기는 게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일어난 것처럼 그 부활 안에서 우리가 참여하게 될 생명도 역시 하나님에 의해서만 완성될 수 있습니다. 생명이 바로 하나님의 전권에 속한다는 생각은 단지 기독교 공동체에 의해서 독창적으로 나온 것은 아닙니다. 이미 구약성서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했으며, 특히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증언하며, 따라서 생명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고 증언했습니다.
오늘의 유전공학이 거의 끝을 모를 정도로 발전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우리가 이런 생명의 본질을 완전히 파악하고, 더 나아가서 생명 창조의 영역까지 개입하게 될 날이 올지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유전공학이 훨씬 발전하는 미래가 되면 태아의 유전자를 조작함으로써 육체적으로 가장 완벽한 아름다움과 건강을 가진 아이들을, 그리고 지성적으로 거의 천재에 가까운 아이들을, 더 나아가 마음도 천사처럼 착한 아이들만 낳게 될지 모르죠. 이 세상에서 살다가 심장이 망가지면 심장을 갈아 끼우고, 시력이 떨어지면 눈을 갈아 끼우고, 뇌의 작용이 무뎌지면 자동차 엔진을 볼링 하듯이 간단히 원상으로 복귀시키면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 꿈을 갖는 거야 인간의 자유겠지만 그런 방식으로 인간이 생명을 마음대로 처리하지는 못합니다. 하이데거의 표현으로 인간은 ‘세계내존재’이며, 성서의 가르침으로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자유의 길
예수님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3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도 역시 초기 기독교의 신앙고백과 일치합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이 바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위에서 유전자 기술을 통해서 인간의 영생을 꿈꾸게 되는 미래가 올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그런 방식으로 영생을 맛본다고 해서 인간이 자유로운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런 영생은 오히려 인간에게 저주스러운 운명이 될지도 모릅니다. 인간이 죽지 않겠다는 욕망에 갇혀 있는 한 결코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렇게 반론을 제기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이고, 아무한테도 종살이를 한 적이 없는데 선생님은 우리더러 자유를 얻을 것이라고 하시니 어떻게 된 일입니까?”(33).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던 유대인들은 비록 주변의 강대국에 의해서 식민지 생활을 오래도록 하긴 했지만 스스로는 그 강한 나라의 종이라고 인정한 적은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그만큼 민족적인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진리와 자유의 지평을 자신들의 잣대로만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은 10이라는 깊이에서 말씀하시는데 그 사람들은 2라는 깊이에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결코 참된 대화가 가능하지 못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38절에 기록되었듯이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가 보여주신 것을 말하고 있으며, 유대인들은 조상들이 일러준 대로 살아간다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보는 세계에 들어가 있었지만 유대인들은 듣는 단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궁극적 생명인 하나님 나라의 지평에서 말씀하시지만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지평에서 반론을 제기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민족정기만 확고하게 지킨다면 국력이 떨어져 어쩔 수 없이 식민지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자유인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요한은 그런 방식으로 획득할 수 있는 자유의 한계를 정확하게 뚫어보고 있었습니다. 현대의 인류가 상당한 수준의 복지사회를 건설했어도 여전히 궁극적인 자유와는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방식의 자유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자유가 확보된다는 사실을 초기 기독교가 믿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곧 생명의 창조자인 하나님과 하나라고 믿었습니다. 생명을 창조한 바로 그 하나님이 예수와 일치한다면 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야말로 그 생명을 얻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그 생명을 얻은 사람은 당연히 자유롭습니다.
그런데 이 생명은 아직 우리에게 실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 우리에게 약속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도 아직 완전한 자유를 소유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 자유도 역시 약속으로 주어졌을 뿐입니다. 비록 미래에 성취될 약속이지만 그 약속이 신실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습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인격이 이 약속을 보증하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들이며, 그렇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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