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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16: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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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지석 형제 |
참고 : | 새길교회 2009.04.19주일설교 |
시편 16 : 11, 요한복음 6 : 35
오늘 읽은 성경말씀 요한복음 6장 35절은 예수께서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증거하신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를 생명의 떡으로 증거하는 데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요한복음 6장 전체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6장 서두에는 예수가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어리로 수천 명(남자 5천명)을 먹인 오병이어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를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이 가난하고 굶주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이 예수를 따랐던 이유는 예수가 병자를 고치는 기적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2절). 뭔가 자신들이 못하는 초능력을 가진 예수로부터 자신들의 문제 해결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배고팠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자신들의 배고픔을 또 해결해 주었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어리로 말입니다. 그들은 환호했습니다. 이제야말로 기다리던 메시야가 왔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병자를 고치고 한 사람 먹을 음식으로 수천 명을 먹이는 것을 직접 체험했으니 더 의심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하기를 ‘이 분은 참으로 세상에 오시기로 된 그 예언자이다’(14절) 했습니다. 왕으로 모시고자 했습니다. 그런 군중들을 보고 예수는 군중을 떠나 산으로 물러가셨다고 요한 기자는 적고 있습니다(15절).
배고픈 가난한 사람들이 범람하는 시대에서 먹을 것을 해결하는 일은 메시아가 되는 우선 능력입니다.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기아가 해결되었다고 하는 풍요로운 사회에서도 먹는 문제 해결은 지도자의 우선 능력으로 평가됩니다. 예수는 오병이어로 수천 명의 군중들의 굶주림을 해결했습니다. 절대 부족한 음식으로 군중의 기아를 해결하고 열두 광주리를 남겼으니 예수는 메시아였고, 군중들은 이런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고 찾아 나섰다고 예수와 만납니다. 오늘 말씀 ‘나는 생명의 떡이다’란 말씀은 이런 맥락에서 그 진의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예수는 자신을 찾는 군중들에게 꾸지람을 합니다. 군중들이 예수를 찾는 진정한 이유가 하나님 나라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먹고 사는 떡의 문제를 해결하고자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 배불렀기 때문이다.’ 예수가 진정 원한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표징을 보고 그 나라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다만 당장 배고픔을 해결하는 양식을 얻는데 그치는 것에 안타까웠던 것입니다. 군중들이 궁극적으로 찾는 것은 먹을거리였습니다. 이런 삶의 태도는 인생을 영원히 비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누가 주던지 먹을거리를 주면 군중들은 만사 오케이입니다. 그가 누구든지, 그가 무슨 짓을 해서 양식을 던져 주는 것인지를 묻지 않습니다. 배고파 죽게 되었는데 우선 먹고 살아야지 하는 것은 자연법칙상 나무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리와 정신, 즉 신앙과 믿음이 빠진 채 먹고 사는 무제 해결에 골몰한 채 살아가는 것은 노예의 인생입니다. 당장 먹고 배가 부를지라도 그 배는 다시 고프고, 또다시 먹을거리를 찾는 비극적 운명의 쳇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노예인 것입니다. 모두가 이런 가능성을 갖고 있습니다. 궁핍한 사람은 궁핍해서, 또 가진 사람들은 가진 대로 물질의 노예로 삽니다. 이런 운명의 삶을 사는 사람을 향해 예수는 ‘너희는 썩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지 말고 평생에 이르도록 남아있을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여라’라고 한 것입니다. 이란 말씀을 군중들에게 하시는 예수의 마음을 우리는 헤아릴 수 있습니다. 연민입니다. 가여운 마음입니다. 배고픔을 해결하고 싶은 가난한 사람들의 처지와 형편을 이해하지 못하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배고픔을 해결하는 일이 인생의 전 목표인 냥 살아가는 것은 영원한 노예로 살아가는 것이고, 먹을 것을 두고 치고 박고 죽이는 생존경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생입니다. 살기는 하되 영원히 두려움과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삶이요, 죄악에 사로잡힌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말씀에서 예수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에 이르도록 남아있을 양식을 위해 일하라고 합니다.
오늘 말씀은 곧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삶의 길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비록 배고픈 상태에 있다 할지라도 먹는데 급급하여 영혼과 전 인생을 팔지 말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일이 현실 삶 속에서는 쉽지 않습니다. 땅의 사람들이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생존경쟁의 삶을 사는 것은 자연법칙처럼 피할 수 없는 운명적 삶의 모습처럼 모든 사람들이 여기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행복한 삶은 아닙니다. 예수는 이런 삶에 새로운 길을 제시합니다. 그 길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예수가 바로 그 증거입니다.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삶의 길, 생명의 삶이 실현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 주신 분이 바로 예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29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 하십니다. 이 말씀은 매우 은유적인 말씀이면서 또 직설적인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곧 예수처럼 되어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스로를 가리켜 영생에 이르는 생명의 떡이라 하심은 우리로 하여금,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 자신을 먹으라는 말씀에 다름 아닙니다. 예수를 먹는다니 참 해괴한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마는,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예수를 단지 머리로 이해하고 예배의 대상으로 삼는데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먹고 그로 하여금 우리의 살과 피와 뼈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될 때 예수는 우리 안에서 다시 사시는 것이 되며, 우리도 단지 예수 신자에서 예수가 되어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를 생명의 떡으로 먹으라는 진정한 의미이며, 예수 믿음의 신비입니다. 이 말씀을 요한은 아주 직접적으로 표현합니다. 53절에 보면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또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는 생명이 없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살릴 것이다’라고 말씀합니다.
나를 먹으라는 말씀은 믿음을 가지라는 의미인데, 여기서 예수를 믿음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그것은 예수의 가르침과 삶을 진리로 믿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를 생명의 떡으로 먹는다는 것은 내 몸이 예수가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와 나와의 일체감을 갖는 것, 이것이 생명의 떡으로서 예수를 먹는 것의 참다움 의미이며, 예수 신앙의 참다운 의미입니다. 또 이것이 성만찬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성만찬에서 우리는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므로 예수와 일체감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생명의 떡으로 먹는다는 일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 세 가지 점에서 살펴봅니다.
예수님의 영적 혁명 - 원초적 욕망을 넘어서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
첫째, 예수는 영적 혁명가였습니다. 원초적 욕망을 넘어서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생명의 떡인 예수를 먹는다는 것은 예수를 알고, 믿고, 따르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먹는다는 말은 뱃속으로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매우 물질적이면서 동시에 영적인 체험을 말합니다. 우리는 머릿속(이성과 합리적 사고)로 예수를 이해하고, 가슴(감성과 열정)에서 예수를 믿습니다. 정신과 열정의 고상한 장소인 머리와 가슴에 비해 뱃속은 천한 곳입니다. 물질적인 곳입니다. 혐오스런 곳이기도 취급됩니다. 그러나 원초적 욕망과 불안과 두려움이 있는 곳인 뱃속이 편해야 만사형통합니다. 다툼이 없고, 너그러워집니다. 정작 우리 머리와 가슴을 지배하는 곳은 뱃속입니다. 머리와 가슴보다 훨씬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곳인 뱃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아야 문제를 제대로 아는 것이란 말이 있습니다.
제가 스위스 개혁교회 연맹의 초청을 받아 스위스 교회를 경험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당시 스위스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인권을 보호하기위한 인종차별금지법 제정을 두고 한창 논쟁 중이었습니다. 텔레비전의 토론 프로그램에 나온 정치인, 노동조합 대표, 사회단체 대표, 경제인, 종교인등 대다수 사람들은 그 법안 제정에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여론조사에서도 다수가 제정 찬성으로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개혁교회 연맹 본부 홍보담당자는 가결의 경우와 부결의 경우 둘 다를 대비한 성명서를 준비해 놓고 있었습니다. 가결될 것이 뻔한 상황인데 왜 부결의 경우를 준비하는지 나는 의아했습니다. 그런 나에게 홍보담당자는 참 의미심장한 대답을 해 주었습니다. 모두들 입으로는 머리로는 가슴으로는 제정의 당위성을 말하지만, 뱃속은 다르다는 겁니다. 뱃속으로는 외국인들을 내 보내고 싶다고, 깨끗하고 조용한 스위스 거리를 시끄럽게 떠들며 활보하고 돌아다니는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스위스인들의 진짜 감정은 내보내고 싶은 것이라는 겁니다. 뱃속의 이런 거부감정을 정치인들은 알고 있기에 실제 투표에선 부결될 가능성이 높다고 했고, 다음날 결과는 부결이었습니다. 그때 홍보담당자가 표현한 영어, ‘gut conservatism 뱃속(창자속) 보수성’이란 말을 저는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예수는 우리의 뱃속을 주님의 진리로 체질변화 시키고자 합니다. 즉 은밀한 원초적 욕망이자 근거지가 되는 곳에서 변화가 일어날 때에야 하나님 나라는 이뤄진다고 판단하셨다고 생각됩니다. 이것이 생명의 떡인 나를 먹으라고 하신 말씀의 진정한 의미라고 봅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당신이 떡이 되어 뱃속으로 들어가는 수밖에는. 예수의 생명의 떡 선언은 인간 본능과 원초적 욕망을 전복시키려는, 이것을 그대로 두고 인정하고는, 하나님 나라를 향해 더 이상 한발자국도 진전할 수 없겠음을 알았던 예수의 영적 혁명 선언이었다고 봅니다.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은 예수를 사회적 악의 체제를 전복하려했던 사회혁명가로 봅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는 그 혁명을 인간혁명, 즉 인간의 근원적인 영적 혁명에서 이루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예수가 개인의 내적 죄의식을 사면해주고 위로하는 심령사는 아니었습니다. 영적 혁명가라는 말은 하나님 나라를 향한 삶의 근본적인 전환을 요구함에 있어서, 사회 제도적인 외적인 환경의 전복보다는 그것의 뿌리가 되는 삶의 형태와 사고방식, 전통과 인습 등에 대한 혁명에 보다 관심을 가졌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일은 정치 사회혁명처럼 단 순간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사회에서 부단하게 이뤄가야 한다는 점에서 영구 문화혁명의 면모를 가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를 머리로 이해하고, 가슴의 열정으로 따르는 것으로 부족합니다. 동고동락했던 제자들은 예수가 끌려가서 십자가에 못 박히자 뿔뿔이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가슴 뜨거웠던 열정의 제자 베드로는 당일 밤 새벽닭이 울기 전 세 번이나 스승 예수를 부인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본래의 고향으로, 생업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머리와 가슴까지 왔다가는 중단된 것입니다. 예수가 나 자신의 몸을 이루는 동체가 되기 전에는 하나님 나라 운동은 계승되기 어렵다, 그럼 어찌 할 것인가, 예수를 생명 의 떡으로 먹는 길 뿐이다. 그래서 몸의 살과 피가 예수화 되는 길이다.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 운동의 계승을 위해 제자들을 철저하게 훈련하는 그 궁극 목표는 예수화 작업입니다. 또 제자들이 예수를 계승하는 길로 삼은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성만찬은 이런 철저한 예수화 작업의 예식인 것입니다. 예수를 내 몸으로 몸 안에 부활시키는 일은 여전히 기독교 신앙의 신비로운 일입니다.
성스러움의 회복
둘째, 예수는 생명의 떡이니 먹으라 하신 말씀은 오늘 현대 시대를 살면서 우리가 상실해 온 성스러움의 회복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예수의 몸을 먹는 것은 거룩함(성스러움)을 우리 몸 안에, 우리 삶속에 간직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세속화되면서도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는 노력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반드시 특정종교와 연관시키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런 삶의 모습들은 인간이란 물질적 풍요로만 행복할 수 없는 영적이고 정신적 존재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세속적 초월(잃어버린 초월을 찾아서)의 삶에서 진리는 계승되고, 참된 행복의 삶도 체험합니다. 굉장히 세속화된 오늘날 세파 속에서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자기 분야에서 성취를 이루고 만족감을 갖는 사람들을 보면 공통적인 것이 고귀한 이상과 가치관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돈이면 다 될 것 같은 세상이면서도, 많은 돈을 갖고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은 인격입니다. 인격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가문의 영광>이란 TV드라마를 즐겨보았습니다. 돈이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돈 만능주의 졸부 가족의 삶과 가문의 법도를 중시하면서 정신적인 가치와 도리를 중시하는 소위 명문가족을 대비하여 이야기를 전개하는 드라마입니다. 거기 보면 돈으로 할 수 없는 것, 인격과 가문의 전통, 진실과 허위에 대한 것들이 연결되어 나옵니다. 사람의 진실과 사랑은 돈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진실은 진실로, 사랑은 사랑으로만 얻을 수 있다는 교훈을 보여줍니다.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 냉혈한 금전 만능주의자들이 판을 치는 세상은 지속적인 절망뿐이지만, 그러나 이런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는 사랑과 진실의 힘이 연연히 맥을 이어오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변화무쌍한 세속사회 삶속에서 진실을 지켜나가는 힘은 어디서 나올까요. 저는 그 명문 가문 집안에 있는 조상을 모신 방을 봅니다. 유교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방입니다. 그곳은 평소에는 쓰지 않는 방이지만, 집안의 중요한 결정을 할 때면 그곳에 모여 상의합니다. 집안사람들 간의 갈등을 해결할 때도, 각 가족 개인들이 중요한 고민 사항이나 마음의 결정을 할 때면 그 방에 들어갑니다. 성서적 표현으로 한다면 일종의 지성소입니다. 거룩함이 있는 곳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생에 예기치 못한 고비를 겪게 되며 위태롭게 됩니다. 그럴 때 진실과 자신의 본래 모습을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세속사의 물결에 따라 춤을 추게 되고 그 속에 빠져버리는 일이 비일비재 합니다. 여기서 지성소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거룩함 앞에 서는 일은 중요합니다. 거룩함은 진실과 선함의 본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삶의 근본적인 위기는 이런 거룩함의 상실, 지성소를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진심으로 마음 둘 데 없는 영적인 고아로 살아간다는 것의 고독함은 삶의 진정한 위기라 할 것입니다. 돈으로도, 술과 놀이로도, 지식과 가까운 가족 친구로도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고민을 갖게 될 때 우리는 스스로 결정해야 합니다. 스스로 진실을 선택하는데 거룩함의 존재는 커다란 삶의 위안이요 든든한 버팀목이 됩니다. 예수를 생명의 떡으로 먹는다는 말씀은 우리 삶 안에, 우리 속에 거룩함을 모시고 사는 것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생명의 떡 예수의 증언은 우리 삶속에 거룩함의 지성소를 회복시키는 일입니다. 6장 56절에 예수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야 내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한다’고 합니다. 예수를 생명의 떡으로 먹는다는 일은 내 몸 안에 거룩함을 두는 것이며, 또 내가 예수 안에 거하는 일입니다(56절). 생명의 떡으로 예수의 존재를 선포함의 진정한 의미는 우리 몸 안에 지성소의 회복이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다 잃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이것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지혜
셋째, 생명의 떡으로서 예수를 믿는 신앙은 참으로 구해야 할 것을 구할 줄 아는 지혜를 의미합니다. 미문의 앉은뱅이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먹을 것을 구걸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금과 은 나 없어도 내게 있는 것 네게 주리 곧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합니다. 앉은뱅이가 구한 것은 먹을 것이지만 베드로와 요한이 준 것은 일어나 걷는 것이었습니다. 앉은뱅이가 진정 구할 것은 먹을거리에 앞서 일어서 걷는 것입니다. 그러나 앉은뱅이는 그걸 구하지 않았습니다. 한 끼 먹을 것을 구했습니다. 일어서 걷는 것이 한 끼 먹이보다 덜 소중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일어서 걷는 것은 포기한 것일 모릅니다. 그러나 구한다면 진정 구해야 할 것을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일입니다. 궁극적인 것을 구하는 일이 신앙입니다. 예수를 생명의 떡으로 먹는다는 것은 이런 궁극적인,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내 영혼이 행복하고 기쁜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하고 두드리고 원하지만 정작 궁극적으로 구할 것을 구하고 있는지를 자문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 생명의 양식이라 함은 다른 사람을 살리는 존재임을 드러낸 말씀입니다. 만물의 자연법칙은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로서 이뤄져 있습니다. 풀을 먹은 초식동물을 육식동물이 먹고 육식동물은 세균과 바이러스에 죽고 썩으면 다시 풀에 흡수됩니다. 순환의 먹이사슬입니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운명적인 사슬입니다. 예수는 운명에 매이지 않고 의지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스스로 생명의 양식이고자 합니다. 경제적 곤경으로 약육강식의 적자생존 법칙이 치열하여 약자와 능력 없는 자들은 두려움과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는 요즘입니다. 뭐든지 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하여 주는 일이 약자와 경쟁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강자들의 먹잇감이 되는 자유가 됩니다. 다함께 같이 살 수 있는 길을 찾는 노력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고, 허망한 노력처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이게 아닌데 알면서도 망하는 길인데 알면서도 돌아 나오지 못하는 마법에 걸린 것이 오늘 우리네 삶의 모습입니다.
전적인 삶의 전환이 요청되는 때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생명의 떡으로 예수를 먹으라는 말씀의 메시지입니다. 정체불명의 거대한 구조악이 짓누를 때, 우리의 생명운동은 더욱 힘차게 일어나야 합니다. 그 시작은 나의 삶의 전환입니다. 예수 생명의 떡을 먹고 새 힘을 얻어 온 세계에 드리워진 죽음의 세력을 걷어내는 생명운동에 힘차게 나갑시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오늘 읽은 성경말씀 요한복음 6장 35절은 예수께서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증거하신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를 생명의 떡으로 증거하는 데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요한복음 6장 전체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6장 서두에는 예수가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어리로 수천 명(남자 5천명)을 먹인 오병이어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를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이 가난하고 굶주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이 예수를 따랐던 이유는 예수가 병자를 고치는 기적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2절). 뭔가 자신들이 못하는 초능력을 가진 예수로부터 자신들의 문제 해결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배고팠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자신들의 배고픔을 또 해결해 주었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어리로 말입니다. 그들은 환호했습니다. 이제야말로 기다리던 메시야가 왔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병자를 고치고 한 사람 먹을 음식으로 수천 명을 먹이는 것을 직접 체험했으니 더 의심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하기를 ‘이 분은 참으로 세상에 오시기로 된 그 예언자이다’(14절) 했습니다. 왕으로 모시고자 했습니다. 그런 군중들을 보고 예수는 군중을 떠나 산으로 물러가셨다고 요한 기자는 적고 있습니다(15절).
배고픈 가난한 사람들이 범람하는 시대에서 먹을 것을 해결하는 일은 메시아가 되는 우선 능력입니다.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기아가 해결되었다고 하는 풍요로운 사회에서도 먹는 문제 해결은 지도자의 우선 능력으로 평가됩니다. 예수는 오병이어로 수천 명의 군중들의 굶주림을 해결했습니다. 절대 부족한 음식으로 군중의 기아를 해결하고 열두 광주리를 남겼으니 예수는 메시아였고, 군중들은 이런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고 찾아 나섰다고 예수와 만납니다. 오늘 말씀 ‘나는 생명의 떡이다’란 말씀은 이런 맥락에서 그 진의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예수는 자신을 찾는 군중들에게 꾸지람을 합니다. 군중들이 예수를 찾는 진정한 이유가 하나님 나라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먹고 사는 떡의 문제를 해결하고자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 배불렀기 때문이다.’ 예수가 진정 원한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표징을 보고 그 나라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다만 당장 배고픔을 해결하는 양식을 얻는데 그치는 것에 안타까웠던 것입니다. 군중들이 궁극적으로 찾는 것은 먹을거리였습니다. 이런 삶의 태도는 인생을 영원히 비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누가 주던지 먹을거리를 주면 군중들은 만사 오케이입니다. 그가 누구든지, 그가 무슨 짓을 해서 양식을 던져 주는 것인지를 묻지 않습니다. 배고파 죽게 되었는데 우선 먹고 살아야지 하는 것은 자연법칙상 나무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리와 정신, 즉 신앙과 믿음이 빠진 채 먹고 사는 무제 해결에 골몰한 채 살아가는 것은 노예의 인생입니다. 당장 먹고 배가 부를지라도 그 배는 다시 고프고, 또다시 먹을거리를 찾는 비극적 운명의 쳇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노예인 것입니다. 모두가 이런 가능성을 갖고 있습니다. 궁핍한 사람은 궁핍해서, 또 가진 사람들은 가진 대로 물질의 노예로 삽니다. 이런 운명의 삶을 사는 사람을 향해 예수는 ‘너희는 썩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지 말고 평생에 이르도록 남아있을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여라’라고 한 것입니다. 이란 말씀을 군중들에게 하시는 예수의 마음을 우리는 헤아릴 수 있습니다. 연민입니다. 가여운 마음입니다. 배고픔을 해결하고 싶은 가난한 사람들의 처지와 형편을 이해하지 못하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배고픔을 해결하는 일이 인생의 전 목표인 냥 살아가는 것은 영원한 노예로 살아가는 것이고, 먹을 것을 두고 치고 박고 죽이는 생존경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생입니다. 살기는 하되 영원히 두려움과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삶이요, 죄악에 사로잡힌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말씀에서 예수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에 이르도록 남아있을 양식을 위해 일하라고 합니다.
오늘 말씀은 곧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삶의 길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비록 배고픈 상태에 있다 할지라도 먹는데 급급하여 영혼과 전 인생을 팔지 말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일이 현실 삶 속에서는 쉽지 않습니다. 땅의 사람들이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생존경쟁의 삶을 사는 것은 자연법칙처럼 피할 수 없는 운명적 삶의 모습처럼 모든 사람들이 여기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행복한 삶은 아닙니다. 예수는 이런 삶에 새로운 길을 제시합니다. 그 길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예수가 바로 그 증거입니다.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삶의 길, 생명의 삶이 실현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 주신 분이 바로 예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29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 하십니다. 이 말씀은 매우 은유적인 말씀이면서 또 직설적인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곧 예수처럼 되어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스로를 가리켜 영생에 이르는 생명의 떡이라 하심은 우리로 하여금,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 자신을 먹으라는 말씀에 다름 아닙니다. 예수를 먹는다니 참 해괴한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마는,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예수를 단지 머리로 이해하고 예배의 대상으로 삼는데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먹고 그로 하여금 우리의 살과 피와 뼈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될 때 예수는 우리 안에서 다시 사시는 것이 되며, 우리도 단지 예수 신자에서 예수가 되어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를 생명의 떡으로 먹으라는 진정한 의미이며, 예수 믿음의 신비입니다. 이 말씀을 요한은 아주 직접적으로 표현합니다. 53절에 보면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또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는 생명이 없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살릴 것이다’라고 말씀합니다.
나를 먹으라는 말씀은 믿음을 가지라는 의미인데, 여기서 예수를 믿음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그것은 예수의 가르침과 삶을 진리로 믿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를 생명의 떡으로 먹는다는 것은 내 몸이 예수가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와 나와의 일체감을 갖는 것, 이것이 생명의 떡으로서 예수를 먹는 것의 참다움 의미이며, 예수 신앙의 참다운 의미입니다. 또 이것이 성만찬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성만찬에서 우리는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므로 예수와 일체감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생명의 떡으로 먹는다는 일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 세 가지 점에서 살펴봅니다.
예수님의 영적 혁명 - 원초적 욕망을 넘어서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
첫째, 예수는 영적 혁명가였습니다. 원초적 욕망을 넘어서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생명의 떡인 예수를 먹는다는 것은 예수를 알고, 믿고, 따르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먹는다는 말은 뱃속으로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매우 물질적이면서 동시에 영적인 체험을 말합니다. 우리는 머릿속(이성과 합리적 사고)로 예수를 이해하고, 가슴(감성과 열정)에서 예수를 믿습니다. 정신과 열정의 고상한 장소인 머리와 가슴에 비해 뱃속은 천한 곳입니다. 물질적인 곳입니다. 혐오스런 곳이기도 취급됩니다. 그러나 원초적 욕망과 불안과 두려움이 있는 곳인 뱃속이 편해야 만사형통합니다. 다툼이 없고, 너그러워집니다. 정작 우리 머리와 가슴을 지배하는 곳은 뱃속입니다. 머리와 가슴보다 훨씬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곳인 뱃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아야 문제를 제대로 아는 것이란 말이 있습니다.
제가 스위스 개혁교회 연맹의 초청을 받아 스위스 교회를 경험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당시 스위스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인권을 보호하기위한 인종차별금지법 제정을 두고 한창 논쟁 중이었습니다. 텔레비전의 토론 프로그램에 나온 정치인, 노동조합 대표, 사회단체 대표, 경제인, 종교인등 대다수 사람들은 그 법안 제정에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여론조사에서도 다수가 제정 찬성으로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개혁교회 연맹 본부 홍보담당자는 가결의 경우와 부결의 경우 둘 다를 대비한 성명서를 준비해 놓고 있었습니다. 가결될 것이 뻔한 상황인데 왜 부결의 경우를 준비하는지 나는 의아했습니다. 그런 나에게 홍보담당자는 참 의미심장한 대답을 해 주었습니다. 모두들 입으로는 머리로는 가슴으로는 제정의 당위성을 말하지만, 뱃속은 다르다는 겁니다. 뱃속으로는 외국인들을 내 보내고 싶다고, 깨끗하고 조용한 스위스 거리를 시끄럽게 떠들며 활보하고 돌아다니는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스위스인들의 진짜 감정은 내보내고 싶은 것이라는 겁니다. 뱃속의 이런 거부감정을 정치인들은 알고 있기에 실제 투표에선 부결될 가능성이 높다고 했고, 다음날 결과는 부결이었습니다. 그때 홍보담당자가 표현한 영어, ‘gut conservatism 뱃속(창자속) 보수성’이란 말을 저는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예수는 우리의 뱃속을 주님의 진리로 체질변화 시키고자 합니다. 즉 은밀한 원초적 욕망이자 근거지가 되는 곳에서 변화가 일어날 때에야 하나님 나라는 이뤄진다고 판단하셨다고 생각됩니다. 이것이 생명의 떡인 나를 먹으라고 하신 말씀의 진정한 의미라고 봅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당신이 떡이 되어 뱃속으로 들어가는 수밖에는. 예수의 생명의 떡 선언은 인간 본능과 원초적 욕망을 전복시키려는, 이것을 그대로 두고 인정하고는, 하나님 나라를 향해 더 이상 한발자국도 진전할 수 없겠음을 알았던 예수의 영적 혁명 선언이었다고 봅니다.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은 예수를 사회적 악의 체제를 전복하려했던 사회혁명가로 봅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는 그 혁명을 인간혁명, 즉 인간의 근원적인 영적 혁명에서 이루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예수가 개인의 내적 죄의식을 사면해주고 위로하는 심령사는 아니었습니다. 영적 혁명가라는 말은 하나님 나라를 향한 삶의 근본적인 전환을 요구함에 있어서, 사회 제도적인 외적인 환경의 전복보다는 그것의 뿌리가 되는 삶의 형태와 사고방식, 전통과 인습 등에 대한 혁명에 보다 관심을 가졌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일은 정치 사회혁명처럼 단 순간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사회에서 부단하게 이뤄가야 한다는 점에서 영구 문화혁명의 면모를 가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를 머리로 이해하고, 가슴의 열정으로 따르는 것으로 부족합니다. 동고동락했던 제자들은 예수가 끌려가서 십자가에 못 박히자 뿔뿔이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가슴 뜨거웠던 열정의 제자 베드로는 당일 밤 새벽닭이 울기 전 세 번이나 스승 예수를 부인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본래의 고향으로, 생업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머리와 가슴까지 왔다가는 중단된 것입니다. 예수가 나 자신의 몸을 이루는 동체가 되기 전에는 하나님 나라 운동은 계승되기 어렵다, 그럼 어찌 할 것인가, 예수를 생명 의 떡으로 먹는 길 뿐이다. 그래서 몸의 살과 피가 예수화 되는 길이다.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 운동의 계승을 위해 제자들을 철저하게 훈련하는 그 궁극 목표는 예수화 작업입니다. 또 제자들이 예수를 계승하는 길로 삼은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성만찬은 이런 철저한 예수화 작업의 예식인 것입니다. 예수를 내 몸으로 몸 안에 부활시키는 일은 여전히 기독교 신앙의 신비로운 일입니다.
성스러움의 회복
둘째, 예수는 생명의 떡이니 먹으라 하신 말씀은 오늘 현대 시대를 살면서 우리가 상실해 온 성스러움의 회복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예수의 몸을 먹는 것은 거룩함(성스러움)을 우리 몸 안에, 우리 삶속에 간직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세속화되면서도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는 노력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반드시 특정종교와 연관시키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런 삶의 모습들은 인간이란 물질적 풍요로만 행복할 수 없는 영적이고 정신적 존재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세속적 초월(잃어버린 초월을 찾아서)의 삶에서 진리는 계승되고, 참된 행복의 삶도 체험합니다. 굉장히 세속화된 오늘날 세파 속에서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자기 분야에서 성취를 이루고 만족감을 갖는 사람들을 보면 공통적인 것이 고귀한 이상과 가치관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돈이면 다 될 것 같은 세상이면서도, 많은 돈을 갖고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은 인격입니다. 인격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가문의 영광>이란 TV드라마를 즐겨보았습니다. 돈이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돈 만능주의 졸부 가족의 삶과 가문의 법도를 중시하면서 정신적인 가치와 도리를 중시하는 소위 명문가족을 대비하여 이야기를 전개하는 드라마입니다. 거기 보면 돈으로 할 수 없는 것, 인격과 가문의 전통, 진실과 허위에 대한 것들이 연결되어 나옵니다. 사람의 진실과 사랑은 돈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진실은 진실로, 사랑은 사랑으로만 얻을 수 있다는 교훈을 보여줍니다.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 냉혈한 금전 만능주의자들이 판을 치는 세상은 지속적인 절망뿐이지만, 그러나 이런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는 사랑과 진실의 힘이 연연히 맥을 이어오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변화무쌍한 세속사회 삶속에서 진실을 지켜나가는 힘은 어디서 나올까요. 저는 그 명문 가문 집안에 있는 조상을 모신 방을 봅니다. 유교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방입니다. 그곳은 평소에는 쓰지 않는 방이지만, 집안의 중요한 결정을 할 때면 그곳에 모여 상의합니다. 집안사람들 간의 갈등을 해결할 때도, 각 가족 개인들이 중요한 고민 사항이나 마음의 결정을 할 때면 그 방에 들어갑니다. 성서적 표현으로 한다면 일종의 지성소입니다. 거룩함이 있는 곳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생에 예기치 못한 고비를 겪게 되며 위태롭게 됩니다. 그럴 때 진실과 자신의 본래 모습을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세속사의 물결에 따라 춤을 추게 되고 그 속에 빠져버리는 일이 비일비재 합니다. 여기서 지성소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거룩함 앞에 서는 일은 중요합니다. 거룩함은 진실과 선함의 본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삶의 근본적인 위기는 이런 거룩함의 상실, 지성소를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진심으로 마음 둘 데 없는 영적인 고아로 살아간다는 것의 고독함은 삶의 진정한 위기라 할 것입니다. 돈으로도, 술과 놀이로도, 지식과 가까운 가족 친구로도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고민을 갖게 될 때 우리는 스스로 결정해야 합니다. 스스로 진실을 선택하는데 거룩함의 존재는 커다란 삶의 위안이요 든든한 버팀목이 됩니다. 예수를 생명의 떡으로 먹는다는 말씀은 우리 삶 안에, 우리 속에 거룩함을 모시고 사는 것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생명의 떡 예수의 증언은 우리 삶속에 거룩함의 지성소를 회복시키는 일입니다. 6장 56절에 예수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야 내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한다’고 합니다. 예수를 생명의 떡으로 먹는다는 일은 내 몸 안에 거룩함을 두는 것이며, 또 내가 예수 안에 거하는 일입니다(56절). 생명의 떡으로 예수의 존재를 선포함의 진정한 의미는 우리 몸 안에 지성소의 회복이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다 잃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이것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지혜
셋째, 생명의 떡으로서 예수를 믿는 신앙은 참으로 구해야 할 것을 구할 줄 아는 지혜를 의미합니다. 미문의 앉은뱅이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먹을 것을 구걸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금과 은 나 없어도 내게 있는 것 네게 주리 곧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합니다. 앉은뱅이가 구한 것은 먹을 것이지만 베드로와 요한이 준 것은 일어나 걷는 것이었습니다. 앉은뱅이가 진정 구할 것은 먹을거리에 앞서 일어서 걷는 것입니다. 그러나 앉은뱅이는 그걸 구하지 않았습니다. 한 끼 먹을 것을 구했습니다. 일어서 걷는 것이 한 끼 먹이보다 덜 소중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일어서 걷는 것은 포기한 것일 모릅니다. 그러나 구한다면 진정 구해야 할 것을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일입니다. 궁극적인 것을 구하는 일이 신앙입니다. 예수를 생명의 떡으로 먹는다는 것은 이런 궁극적인,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내 영혼이 행복하고 기쁜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하고 두드리고 원하지만 정작 궁극적으로 구할 것을 구하고 있는지를 자문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 생명의 양식이라 함은 다른 사람을 살리는 존재임을 드러낸 말씀입니다. 만물의 자연법칙은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로서 이뤄져 있습니다. 풀을 먹은 초식동물을 육식동물이 먹고 육식동물은 세균과 바이러스에 죽고 썩으면 다시 풀에 흡수됩니다. 순환의 먹이사슬입니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운명적인 사슬입니다. 예수는 운명에 매이지 않고 의지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스스로 생명의 양식이고자 합니다. 경제적 곤경으로 약육강식의 적자생존 법칙이 치열하여 약자와 능력 없는 자들은 두려움과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는 요즘입니다. 뭐든지 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하여 주는 일이 약자와 경쟁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강자들의 먹잇감이 되는 자유가 됩니다. 다함께 같이 살 수 있는 길을 찾는 노력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고, 허망한 노력처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이게 아닌데 알면서도 망하는 길인데 알면서도 돌아 나오지 못하는 마법에 걸린 것이 오늘 우리네 삶의 모습입니다.
전적인 삶의 전환이 요청되는 때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생명의 떡으로 예수를 먹으라는 말씀의 메시지입니다. 정체불명의 거대한 구조악이 짓누를 때, 우리의 생명운동은 더욱 힘차게 일어나야 합니다. 그 시작은 나의 삶의 전환입니다. 예수 생명의 떡을 먹고 새 힘을 얻어 온 세계에 드리워진 죽음의 세력을 걷어내는 생명운동에 힘차게 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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