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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2: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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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고명진 자매 |
참고 : | 새길교회 2009.05.10 주일설교 |
인생을 정리해야 할 나이에 와보니 어버이로서의 삶을 다시 되돌아 보게 되어 후회되는 일도 있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어버이가 된지 거의 40여 년을 살아오면서 저의 역할모델이 되신 분은 92세 되신 시어머님 이십니다. 오늘 잠깐이나마 저의 시어머님을 소개 해 드리려 합니다.전쟁 후의 혼란기에 대부분의 어머니들이 그랬던 것처럼 어머님의 시어머니와 10남매를 이끌고 이북에서 남쪽의 섬 선유도에 정착해서
가지고 온 돈 다 쓰고 난 후의 삶은 말 안 해도 짐작 하실 것 입니다. 소설의 스토리처럼, 남편은 과도한 음주로 인해 병약해져 가정경제를 책임질 형편이 못되었으니 혼자서 13명의 입을 도맡아야 하는 그 중압감은 아마 하루하루가 전투였을 것입니다. 이때 다행히 하나님을 믿게 되어 그나마 위로 받고 견디어 나가셨을 것입니다.
제가 결혼한 후의 어머님은 늘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자식들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시숙 되시는 큰아들이 부모님이 계신 군산에서 공장을 세워 살만해진 후에도 지금의 제 나이였을 때 인데도 10남매 부부와 손주 23명, 거의 40명에 이르는 식구들이 명절마다 찾아올 때 손수 음식을 장만해 먹이는 일을 참으로 기뻐하셨습니다.
믿음이 없거나 또는 약한 자식과, 며느리와 손주들을 위해 항상 손수 식탁을 마련하고 늘 기도로 시작하셨고 고생하다 가신 시어머님의 생각에 푸짐한 식탁에 앉아 늘 목이 메이셨습니다. 병약하고 권위주의적이셨던 아버님도 결국에는 장로님이 되게 하셨습니다
큰아들 사업이 번창해지자 아들 사 형제가 모두 그 사업에 합류하게 되어서 거의 20여 년을 군산에서 수출하는 공장을 하다가 1988년쯤 수출이 사양길에 접어들어 도산할 위험에 처할 때에 어머님은 4명의 며느리들과 6명의 딸들을 진두 지휘하는 장군처럼 마음을 합쳐 기도하게 했습니다. 결국 공장터를 팔아 부도는 면했지만 4형제가 뿔뿔이 흩어지는 과정에서 서로 불만에 차 의가 나게 생겼을 때 어머님은 서울과 군산에 흩어져 살고 있는 4명의 며느리와 6명의 딸들을 또 손수 식탁을 차려놓고 어느 하루 모두 불러모아 눈물로 호소하시며 기도로 간구 했습니다. 형제애가 깨지면 살 의미가 없으며 죽어도 눈을 못 감겠다고 하시는 말씀에 며느리들이 나서서 서로서로 찾아보며 격려하여 지금껏 부모님을 공경하며 잘 지내고 있습니다.
어머님은 또 고생 중에 돌아가신 시어머님을 생각하며 늘 가슴 아파하시고 12월말 추도일에는 며느리들이 오기 전에 장을 봐와 손수 음식을 준비하시며 같이 기도하며 할머님께서 잘 못 잡수시고 돌아가신 것을 우리들에게 눈물로 이야기 하셨습니다. 9년 전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혼자 계시다 큰아들 집으로 합가한 후에는 큰며느리에 짐 되신다 하여 집에서 추모예배를 본 후 식당에 나가 저녁을 먹는데 꼭 당신 돈에서 지불하십니다. 우리들이 말려도 못다한 효도를 이렇게 해서라도 하겠다고 막무가내 이셨습니다.
손주 며느리들이 어쩌다 용돈을 드리면 감사기도를 한 후 꼭 십일조를 떼어내 성경책 갈피 속에 넣었다가 헌금하곤 하셨습니다. 새벽 4시 반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두어 시간을 많은 손주들까지 이름을 넣어가며 기도하시는 그 모습을 시 아주버님을 통해 듣고 있습니다. 또한 젊은 시절 남편의 과음으로 무척 괴롭힘을 당했을 텐데도 아버님이 60넘어서 장로 되신 후 정말 극진히 보살펴 드렸습니다. 한완상 박사님께서 늘 강조하시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셨습니다.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않으셨는데도 성경을 읽고 인용하며 기도하는 그 말씀은 늘 우리들을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84세 때 저의 둘째 아들애가 혼인하여 집수리를 하고 입주하기 전에 지나가다가 모시고 들어가 예배를 부탁했는데 빈집이라 성경, 찬송이 준비가 안되어 기도하고 말씀하시며 시편구절을 줄줄이 외워서 예배를 봐주셨는데 우리는 모두 부끄러워했습니다.
몇 십 년을 따로 살다가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큰집과 합가하여 아무래도 고부간 갈등이 조금 생겼는데 속상하면 이 아들, 저 아들네로 옮겨보라고 하였더니 나 하나만 꾹 참고 살면 되는데 우리 큰아들 체면을 깎기 싫다고 거절하시고 지금껏 큰아들의 효성을 맘껏 받으시며 의지하고 사시고 계십니다. 당신이 힘들다고 남편을 함부로 하지 않고, 돌아가실 때까지 극진히 모시니 10남매 아들딸들은 자연히 아버님, 어머님께 지극한 정성을 보입니다.
당신의 욕심이나 즐거움은 제쳐두고 식구들을 위해 늘 부지런히 몸을 놀리며 살다 보니 몸은 건강했지만 노환으로 귀가 안 들리고 어지러워 하는 어머님을 보고 장난기 많은 저의 막내 시동생은 어머님을 뵐 때마다 “우리 껍데기’라는 애칭으로 부릅니다. 이런 어머니로 인해 형제들은 명절 때마다 20-30명씩 되는 식구들이 모여 어머님을 모시고 식사하며 서로 의가 날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님의 희생의 값어치가 이렇게 나타나는 것이겠지요.
하나님도 우리들의 죄를 보다 못해 귀하신 아들을 제물로 내어놓으신 후 우리가 구원받고 거듭나기를 원하셨는데 우리는 아직도 죄악이 들끓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의 그 희생의 값어치는 2000여 년 동안 구원의 횃불로 남아있어 끊임없이 용서받고 새사람 되기로 작정하는 역할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희생이라는 숭고한 행위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대들고 자기의 주장만 펼 수는 없게 됩니다. 60대 70대 80대 90대 되는 우리의 선배님들은 전후의 폐허가 된 이 땅에서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듯 열심히 일하고 공부했습니다. 바쁘게 일하면서도 부모님들을 정성껏 돌보고 희생하신 부모님들을 대신해 형제들도 도맡아 교육을 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일자리가 없다는 것이 지금의 형편과는 또 달랐습니다. 지금은 조금 더 나은 직장을 구하려고 쉽게 결정하지 않지만 그때는 아무리 공부해도 일할 곳이 없고 막노동을 하는 자리도 어려웠습니다. 서독의 4500명 광부모집에 대학 출신들이 사만 오천 명 지원 할 정도였습니다. 하루를 25시로 뛰어다니며 수출역군들을 길러낸 기업과 서독에 광부로, 간호사로, 사우디에, 베트남에.. 일할 곳은 어디든 인텔리들이 나가서 벌어오는 돈이 우리나라 산업의 원동력이 되었고 고속도로를 놓게 되고 외국에 나가면 한국이라는 이름도 낯설어하는 그 곳에서 피 땀 흘려 일한 선배들 덕에 우리는 IT강국, 몇째 가는 조선능력, 자동차 시장 등등. 손에 꼽을 정도의 실력을 갖춘 나라에서 편히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희생의 대가로 편히 살면서 보수00이라는 잣대로 폄하할 수는 없습니다. 존중하고 공경해야 합니다. 희생의 대가 앞에는 우리는 함부로 고개 들고 우리의 주장만 외칠 수는 없습니다. 내가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지 잘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지금껏 가정을 잘 돌보아 왔는지, 부모님을 공경했는지, 직업에 충실했는지, 나라에 헌신했는지, 늘 살펴보며 나의 주장을 필력으로, 촛불로, 교육으로, 토론으로 자신 있게 펼칠 수 있어야 합니다. 아직 이루어 논 것이 없다면 더 있다가 조금이라도 희생을 한 후에 강력하게 펼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희생, 부모님의 희생, 선배님들의 희생 앞에 우리는 공손히 머리 숙일 줄 알고 그 희생을 배우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저의 어머님은 제가 여 선교회 일원으로 오늘 말씀준비를 부탁 받을 때만 해도 건강하셨는데 지난달 마지막 주일 교회를 참석하신 후 기도의 끈도 놓으시고 가끔 치매 증상도 보이시며 촛불이 몸을 다 녹이고 꺼져가듯이, 하나의 밀알이 싹을 틔우기 위해 썩어가듯이 하늘나라에 가실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다행히 지난해부터 어머님의 뒤를 이어 기도의 후계자가 되겠다는 결심 하에 새벽에 기도하는 습관을 들이고 있습니다. 빈 껍데기만 남은 어머님의 모습을 뵐 때마다 그 희생과 그 신앙 앞에 숙연해 지곤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얼마나 애가 타셨으면 귀하신 아들을 희생의 제물로 내어 놓으셨습니까. 우리가 잘 될 때나 어려움에 처할 때 예수님의 고통을 기억하게 하셔서 겸손하게 하시며,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것처럼 절망의 나락에서도 희망을 보게 하소서. 젊을 때나 잘살 때 세상의 쾌락을 좆는 것이 정말 덧없는 일인 것을 일찍 깨닫게 하시고 우리 후손들에게 희생의 값어치를 느낄 수 있는 삶을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가지고 온 돈 다 쓰고 난 후의 삶은 말 안 해도 짐작 하실 것 입니다. 소설의 스토리처럼, 남편은 과도한 음주로 인해 병약해져 가정경제를 책임질 형편이 못되었으니 혼자서 13명의 입을 도맡아야 하는 그 중압감은 아마 하루하루가 전투였을 것입니다. 이때 다행히 하나님을 믿게 되어 그나마 위로 받고 견디어 나가셨을 것입니다.
제가 결혼한 후의 어머님은 늘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자식들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시숙 되시는 큰아들이 부모님이 계신 군산에서 공장을 세워 살만해진 후에도 지금의 제 나이였을 때 인데도 10남매 부부와 손주 23명, 거의 40명에 이르는 식구들이 명절마다 찾아올 때 손수 음식을 장만해 먹이는 일을 참으로 기뻐하셨습니다.
믿음이 없거나 또는 약한 자식과, 며느리와 손주들을 위해 항상 손수 식탁을 마련하고 늘 기도로 시작하셨고 고생하다 가신 시어머님의 생각에 푸짐한 식탁에 앉아 늘 목이 메이셨습니다. 병약하고 권위주의적이셨던 아버님도 결국에는 장로님이 되게 하셨습니다
큰아들 사업이 번창해지자 아들 사 형제가 모두 그 사업에 합류하게 되어서 거의 20여 년을 군산에서 수출하는 공장을 하다가 1988년쯤 수출이 사양길에 접어들어 도산할 위험에 처할 때에 어머님은 4명의 며느리들과 6명의 딸들을 진두 지휘하는 장군처럼 마음을 합쳐 기도하게 했습니다. 결국 공장터를 팔아 부도는 면했지만 4형제가 뿔뿔이 흩어지는 과정에서 서로 불만에 차 의가 나게 생겼을 때 어머님은 서울과 군산에 흩어져 살고 있는 4명의 며느리와 6명의 딸들을 또 손수 식탁을 차려놓고 어느 하루 모두 불러모아 눈물로 호소하시며 기도로 간구 했습니다. 형제애가 깨지면 살 의미가 없으며 죽어도 눈을 못 감겠다고 하시는 말씀에 며느리들이 나서서 서로서로 찾아보며 격려하여 지금껏 부모님을 공경하며 잘 지내고 있습니다.
어머님은 또 고생 중에 돌아가신 시어머님을 생각하며 늘 가슴 아파하시고 12월말 추도일에는 며느리들이 오기 전에 장을 봐와 손수 음식을 준비하시며 같이 기도하며 할머님께서 잘 못 잡수시고 돌아가신 것을 우리들에게 눈물로 이야기 하셨습니다. 9년 전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혼자 계시다 큰아들 집으로 합가한 후에는 큰며느리에 짐 되신다 하여 집에서 추모예배를 본 후 식당에 나가 저녁을 먹는데 꼭 당신 돈에서 지불하십니다. 우리들이 말려도 못다한 효도를 이렇게 해서라도 하겠다고 막무가내 이셨습니다.
손주 며느리들이 어쩌다 용돈을 드리면 감사기도를 한 후 꼭 십일조를 떼어내 성경책 갈피 속에 넣었다가 헌금하곤 하셨습니다. 새벽 4시 반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두어 시간을 많은 손주들까지 이름을 넣어가며 기도하시는 그 모습을 시 아주버님을 통해 듣고 있습니다. 또한 젊은 시절 남편의 과음으로 무척 괴롭힘을 당했을 텐데도 아버님이 60넘어서 장로 되신 후 정말 극진히 보살펴 드렸습니다. 한완상 박사님께서 늘 강조하시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셨습니다.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않으셨는데도 성경을 읽고 인용하며 기도하는 그 말씀은 늘 우리들을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84세 때 저의 둘째 아들애가 혼인하여 집수리를 하고 입주하기 전에 지나가다가 모시고 들어가 예배를 부탁했는데 빈집이라 성경, 찬송이 준비가 안되어 기도하고 말씀하시며 시편구절을 줄줄이 외워서 예배를 봐주셨는데 우리는 모두 부끄러워했습니다.
몇 십 년을 따로 살다가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큰집과 합가하여 아무래도 고부간 갈등이 조금 생겼는데 속상하면 이 아들, 저 아들네로 옮겨보라고 하였더니 나 하나만 꾹 참고 살면 되는데 우리 큰아들 체면을 깎기 싫다고 거절하시고 지금껏 큰아들의 효성을 맘껏 받으시며 의지하고 사시고 계십니다. 당신이 힘들다고 남편을 함부로 하지 않고, 돌아가실 때까지 극진히 모시니 10남매 아들딸들은 자연히 아버님, 어머님께 지극한 정성을 보입니다.
당신의 욕심이나 즐거움은 제쳐두고 식구들을 위해 늘 부지런히 몸을 놀리며 살다 보니 몸은 건강했지만 노환으로 귀가 안 들리고 어지러워 하는 어머님을 보고 장난기 많은 저의 막내 시동생은 어머님을 뵐 때마다 “우리 껍데기’라는 애칭으로 부릅니다. 이런 어머니로 인해 형제들은 명절 때마다 20-30명씩 되는 식구들이 모여 어머님을 모시고 식사하며 서로 의가 날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님의 희생의 값어치가 이렇게 나타나는 것이겠지요.
하나님도 우리들의 죄를 보다 못해 귀하신 아들을 제물로 내어놓으신 후 우리가 구원받고 거듭나기를 원하셨는데 우리는 아직도 죄악이 들끓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의 그 희생의 값어치는 2000여 년 동안 구원의 횃불로 남아있어 끊임없이 용서받고 새사람 되기로 작정하는 역할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희생이라는 숭고한 행위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대들고 자기의 주장만 펼 수는 없게 됩니다. 60대 70대 80대 90대 되는 우리의 선배님들은 전후의 폐허가 된 이 땅에서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듯 열심히 일하고 공부했습니다. 바쁘게 일하면서도 부모님들을 정성껏 돌보고 희생하신 부모님들을 대신해 형제들도 도맡아 교육을 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일자리가 없다는 것이 지금의 형편과는 또 달랐습니다. 지금은 조금 더 나은 직장을 구하려고 쉽게 결정하지 않지만 그때는 아무리 공부해도 일할 곳이 없고 막노동을 하는 자리도 어려웠습니다. 서독의 4500명 광부모집에 대학 출신들이 사만 오천 명 지원 할 정도였습니다. 하루를 25시로 뛰어다니며 수출역군들을 길러낸 기업과 서독에 광부로, 간호사로, 사우디에, 베트남에.. 일할 곳은 어디든 인텔리들이 나가서 벌어오는 돈이 우리나라 산업의 원동력이 되었고 고속도로를 놓게 되고 외국에 나가면 한국이라는 이름도 낯설어하는 그 곳에서 피 땀 흘려 일한 선배들 덕에 우리는 IT강국, 몇째 가는 조선능력, 자동차 시장 등등. 손에 꼽을 정도의 실력을 갖춘 나라에서 편히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희생의 대가로 편히 살면서 보수00이라는 잣대로 폄하할 수는 없습니다. 존중하고 공경해야 합니다. 희생의 대가 앞에는 우리는 함부로 고개 들고 우리의 주장만 외칠 수는 없습니다. 내가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지 잘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지금껏 가정을 잘 돌보아 왔는지, 부모님을 공경했는지, 직업에 충실했는지, 나라에 헌신했는지, 늘 살펴보며 나의 주장을 필력으로, 촛불로, 교육으로, 토론으로 자신 있게 펼칠 수 있어야 합니다. 아직 이루어 논 것이 없다면 더 있다가 조금이라도 희생을 한 후에 강력하게 펼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희생, 부모님의 희생, 선배님들의 희생 앞에 우리는 공손히 머리 숙일 줄 알고 그 희생을 배우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저의 어머님은 제가 여 선교회 일원으로 오늘 말씀준비를 부탁 받을 때만 해도 건강하셨는데 지난달 마지막 주일 교회를 참석하신 후 기도의 끈도 놓으시고 가끔 치매 증상도 보이시며 촛불이 몸을 다 녹이고 꺼져가듯이, 하나의 밀알이 싹을 틔우기 위해 썩어가듯이 하늘나라에 가실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다행히 지난해부터 어머님의 뒤를 이어 기도의 후계자가 되겠다는 결심 하에 새벽에 기도하는 습관을 들이고 있습니다. 빈 껍데기만 남은 어머님의 모습을 뵐 때마다 그 희생과 그 신앙 앞에 숙연해 지곤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얼마나 애가 타셨으면 귀하신 아들을 희생의 제물로 내어 놓으셨습니까. 우리가 잘 될 때나 어려움에 처할 때 예수님의 고통을 기억하게 하셔서 겸손하게 하시며,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것처럼 절망의 나락에서도 희망을 보게 하소서. 젊을 때나 잘살 때 세상의 쾌락을 좆는 것이 정말 덧없는 일인 것을 일찍 깨닫게 하시고 우리 후손들에게 희생의 값어치를 느낄 수 있는 삶을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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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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