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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부활

요한복음 오강남............... 조회 수 1752 추천 수 0 2009.10.08 14:00:30
.........
성경본문 : 요11:14~16 
설교자 : 오강남 형제 
참고 : 새길교회 2009.05.17 주일설교 

요11:14-16: 이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밝혀 말씀하셨다. "나사로는 죽었다. 내가 거기에 있지 않은 것이 너희를 위해서 도리어 잘 된 일이므로, 기쁘게 생각한다. 이 일로 말미암아 너희가 믿게 될 것이다. 그에게로 가자." 그러자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동료 제자들에게 "우리도 그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고 말하였다.

인사

오늘 여러 자매형제들을 다시 뵙고 함께 말씀을 나눌 수 있게 된 것을 인해 하느님과 여러분에게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바닥에 앉아 예배를 드리니 옛날 시골 교회에서 예배드리던 생각이 나서 더욱 정답게 느껴집니다. 그래도 앉아 계시는 것이 불편하실 것 같아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오늘 드릴 말씀은 그야말로 새길교회이니까 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몇몇 분들에게는 귀에 거슬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제 말을 들으시고 참고가 될 것이 있다면 참고로 삼아 주시고, 그렇지 않으시면 그냥 지나치시기 바란다는 것입니다. 남이 쓴 글을 보고, 그 말의 진위를 떠나 그 글이 던지는 문제에 대해 우리 나름대로 생각해보고 우리 속에 있는 무엇을 일깨우도록 하는 것을 ‘환기식 독법(evocative reading)’이라 한다면,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환기식 듣기(evocative listening)을 부탁드리는 셈입니다.

표층과 심층

그리스도교, 불교, 이슬람, 유대교, 유교 등 세계의 거의 모든 종교들을 살펴보면 각 종교에는 크게 두 가지 층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를 각 종교가 가지고 있는 ‘표층적’ 신앙 형태와 ‘심층적’신앙 형태라 할 수 있습니다. 영어로는 “exoteric"과 ”esoteric"이라 하는데, 보통 현교(顯敎)와 밀교(密敎)라 번역하기도 하지만, 좀 더 알아듣기 쉬운 영어 낱말로 하면 한 종교의 ‘surface level’과 ‘depth level’이라 할 수 있습니다.

표층 종교의 특징으로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첫째는 문자주의로, 문자의 표피적 뜻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기중심주의로, 지금의 나, 다석 유영모 선생님의 표현으로 ‘몸나’, ‘제나’, ‘좀나’ 중심의 신앙 형태로서, 믿어서 지금도 잘 살고 내세에 가서도 잘 살자고 하는 마음입니다. 표층적 종교에서는 신앙이란 이기적 욕망을 극대화시키는 수단이 됩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심층 종교의 특징은 첫째 문자주의를 넘어 더 깊은 뜻을 찾으려 합니다. 다석 선생님의 표현대로 글자의 ‘속내’를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둘째 특징은 지금의 나에서 벗어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나에서 죽고 새로운 나, 큰나, 참나, 얼나로 부활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부활한 나, 얼나가 바로 내 속에 있는 하느님의 일부, 혹은 신성(神性)이라 보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나와 하느님의 하나됨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칩니다. 지금의 나를 부정하고 지금에 나에게서 죽는 것입니다.

이런 심층 종교는 어느 종교에서나 ‘비밀’이기 때문에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져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유대교의 카발라 전통에서는 카발라의 진리는 40대 이상 결혼한 사람만 공부할 자격이 있는 것이라 합니다. 네 살짜리 꼬마에게는 산타 할아버지가 문자적으로 와서 선물을 가져다준다고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아이에게 산타는 사랑을 나눔, 하늘과 땅의 합일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등, 이 이야기의 더 깊은 뜻을 말해주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진주를 돼지에게 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나사로의 부활 이야기(요11:1-44)

오늘은 여러분과 함께 죽음과 부활을 예로 들어 표층적 뜻과 심층적 뜻의 차이를 알아보려고 합니다. 복음서에는 부활 이야기가 네 번 나옵니다. 공관복음 모두에 나오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 이야기,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나인 성 과부의 아들 이야기,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나사로의 이야기,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특히 나사로의 부활 이야기를 살펴보고 싶습니다. 여기 나사로를 부활시키는 이 기적은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으로 시작되는 요한복음의 일곱 가지 기적 중에 최후 최고의 기적입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이 나사로의 부활 이야기를 표층적,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물론 2천 년 전 예수님이 베다니라는 동네에서 죽은 나사로라는 사람을 살리셨다는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나이가 들면 산타 할아버지가 문자 그대로 굴뚝을 타고 내려 올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듯이, 몇 가지 사실을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이 부활 이야기의 본래적 의도가 우리에게 역사적인 사실을 말해주려는 것이 아님을 곧 알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첫째, 이렇게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 같이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대 사건이 어찌 요한복음을 제외하고 다른 문헌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는가 하는 점입니다. ??로마인 이야기??에서 보듯, 무엇이나 꼼꼼히 기록으로 남기는 로마 사람들의 문헌에도 전혀 언급이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생애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다른 복음서들마저도 예수님이 행하신 이 중차대한 사건에 대해 침묵할 수 있을까,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공관복음서보다 먼저 쓰인 바울 서신에서도 나사로의 부활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둘째, “베다니에서 나사로를 부활시키셨다”고 하는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요한복음의 저자보다 몇 천 년 전에 기록된 이집트의 ??사자(死者)의 서??에 그대로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거기 보면 Anu라고 하는 이집트 도시에 죽음과 부활을 재현하는 예식이 매년 거행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지명 Anu를 히브리어 식으로 부르면, ‘베들레헴’이나 ‘베델’이라는 지명처럼 ‘집’이라는 뜻의 ‘Beth’가 덧붙여져, ‘BethAnu’가 되고 여기서 ‘베다니(Bethany)’라는 지명이 생겼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또 이 예식에서 이집트 신 Horus는 죽은 자기 아버지 Osiris 신이 묻힌 동굴 무덤 안을 향해 “일어나 나오십시오”하고 외칩니. Osiris 신이 살아서 밖으로 걸어 나옵니다. 그런데 이 Osiris 신은 예전에 Asar 혹은 Azar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이름에다 엘리야, 엘리사의 이름에서 보는 것처럼 “주님”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el을 붙이면 El-Asar가 됩니다. 많은 경우에서 그렇듯, 여기서도 제일 앞에 나오는 모음 ‘e’가 탈락되어 Lasar가 되고 이 이름이 바로 '나사로(Lazarus)'로 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몇 가지 사실을 감안할 때 이 이야기를 반드시 2천 년 전 유대 땅 베다니에서 있었던 역사적 사건으로 볼 필요가 없다고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런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이겠습까? 요한복음의 저자는 우리에게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고 하는 역사적 사실이나 죽은 사람도 살아날 수 있다고 하는 생물학적 진리를 가르쳐주기 위한 역사 교과서나 생물 교과서를 쓴 것이 아닙니다. 저자가 말해주려고 하는 본의는 우리 속에 있는 참된 자아, ‘참나’가 부활할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이야기해 줌으로, 우리도 우리 속의 참 자아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함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이 바로 이처럼 죽음과 부활을 가능하게 하는 힘을 가지신 분, 그리고 스스로도 그 가능성을 몸소 보여주신 분이라고 하는 것을 1세기 세계관과 그 표현 방법을 사용하여 말하려 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은 여기 본문에 보면 요한복음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도마가 “우리도 그와 함께 죽으러 가자”하는 말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죽은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죽으러 가자고 했다는 것은 뭔가 이상스럽습니다. 도마가 한 말은 우리도 죽음과 부활이라는 종교적 예식에 참여하고 그 뜻을 실현하려 가자는 말이라 보는 것이 더 좋으리라 여겨집니다. 옛 나에게 죽고 새로운 나로 다시 살아나는 삶을 체현하자는 권고입니다.

이처럼 성경에 나오는 부활 이야기를 문자대로 읽고 받아들이려 하면, 쉽게 받아들일 수도 없고, 또 설령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큰 의미가 없습니다. 스퐁이라는 성공회 주교는 “복음서에 나오는 부활의 언어는 문자적 넌센스에 불과하다 (The resurrection language of the gospels is literal nonsense.)”는 말을 했지만, 이렇게 심하게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부활 언어를 종교적 상징으로 받아들여야 비로소 그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다고 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도 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지만, 오늘은 거기까지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단 우리가 명심해야 할 사실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죽어서 부활하시려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고 하고, 이 생명은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한 17:3)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것이고 그 앎에 바탕을 둔 삶을 사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사실 요한복음은 ‘아는 것’보다 ‘믿는 것’을 더 강조합니다. ‘믿음’이라는 말이 요한복음 90번 나옵니다. 그에 비해 근래에 발견된 도마복음서에는 ‘믿음’이라는 말이 1번 (91절), 그것도 예수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한 말에서 나옵니다. 도마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은 그 대신 ‘앎’ 혹은 ‘깨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속에 하느님이, 좀 더 구체적으로, 그리스도가 계시다는 것을 깨달음으로 자유를 얻으라고 가르치십니다. 그야말로 ‘또 다른 예수’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맺으면서

우리가 이런 말을 하면 동료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우리 보고“어찌 부활을 믿지 않는가? 부활을 믿지 않고도 어찌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느냐?”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고린도전서15:17-19:“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여러분은 아직도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사람들도 멸망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 세상에만 해당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하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우리를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 동정할 것입니다.

이런 반응에 대한 대답은 간단합니다. 우리는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표층적, 문자적 뜻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표층적, 문자적 뜻을 넘어서 그 ‘속내’를 알아보려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체적 부활을 믿으려는 분들을 정죄하거나 비난할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는 육체적 부활이라는 표층적인 뜻에 만족할 수가 없을 뿐입니다.

사실 그들이 인용하는 바울의 말씀도 우리 나름대로 더욱 깊이 음미해보면 우리가 피상적으로나 상식적으로 생각하던 것과 다른 뜻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가 우리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의 믿음이 헛되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런 육체적 부활 같이 이 세상에만 해당되는 표층적(exoteric)인 것이라면,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됨을 지적하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불쌍한 사람이 누구인가 헷갈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나사로의 부활 이야기나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를 읽을 때 우리가 초점을 맞추어야 할 부분은 ‘새로운 나로 부활’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를 알아듣기 쉬운 요즘 말로 하면 내면적 ‘변혁(transformation)’이라는 것입니다. 영적 눈이 뜨여 내 속의 참나를 찾음, 나와 하느님이 하나 됨을 체험함, 이런 내적 변화를 통해 의연하고 늠름한 자유인이 되는 것, 그리하여 참된 기쁨을 누리는 것,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도 그 가장 깊은 속에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으로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이런 것이 부활 이야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더 깊은 뜻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이런 ‘또 다른 부활’에 동참하게 되기 빕니다.

기도

생명의 근원되시는 하느님,
저희는 영원부터 영원토록 저희 속에 계시는 당신을 깨닫지 못하여
참 생명을 모른 채 죽은 사람으로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영적 눈을 뜨게 하셔서 저희 속에 살아계시는 당신의 임재하심을
깨닫게 하여 주시고, 그리하여 저희 모두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부활의 체험을 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새로 얻은 새 생명을 통해 하루하루 기쁨을 누리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아멘

(참고: 이 말씀 증거는 제가 이번에 새로 낸 <또 다른 예수>(예담, 2009)라는 도마복음서 풀이의 기본 정신에 입각해서 작성한 것임을 밝힙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댓글 '6'

나그네

2017.03.31 20:53:50

오강남씨, 육체적 부활을 믿으면 어딘지 저급한 것 같고, 육체적 부활이 아니라 <내면적 변혁>이라고 하면 뭔가 고상한것 같고...
부활이란 죽은 생명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내면적 변혁이니 삶의 재건이니 말장난하면 안됩니다.
그러면서 기도할때는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
세월호에서 죽은 자식이 있다고 합시다. 그 아들의 시체라도 건지고 싶은 것이 부모의 소망입니다.
그 자식이 다시 살아오지 않는 한어떤 말장난도 부모를 위로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생명입니다.
그냥 부활 안믿는다고 하세요. 어설픈 논리로 설교하지 마세요.

새길

2017.04.01 11:57:29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제 말을 들으시고 참고가 될 것이 있다면 참고로 삼아 주시고, 그렇지 않으시면 그냥 지나치시기 바란다는 것입니다. 남이 쓴 글을 보고, 그 말의 진위를 떠나 그 글이 던지는 문제에 대해 우리 나름대로 생각해보고 우리 속에 있는 무엇을 일깨우도록 하는 것을 ‘환기식 독법.이라고 합니다.

끌어올림

2017.04.01 11:46:43

위 설교자라는 사람은 기독교인이 아니라 불교인과 천주교인 중간 정도 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도 믿지 않고요. 교묘한 말장난으로 이단 사이비를 빠져 나갈뿐입니다.
그리고 도마복음서를인용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정확히 말해 이단입니다.
이단들이 이곳에서 설치지 못하도록 정신차려야 합니다.

새길

2017.04.01 11:57:54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제 말을 들으시고 참고가 될 것이 있다면 참고로 삼아 주시고, 그렇지 않으시면 그냥 지나치시기 바란다는 것입니다. 남이 쓴 글을 보고, 그 말의 진위를 떠나 그 글이 던지는 문제에 대해 우리 나름대로 생각해보고 우리 속에 있는 무엇을 일깨우도록 하는 것을 ‘환기식 독법.이라고 합니다.

내려놓음

2017.04.01 13:38:53

'환기식독법' 좋은 말이네요. ㅎㅎ
하지만
나름대로 생각해서 이단에 빠진 사람들은 어쩌라구요..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안드나요?

상록수

2020.04.10 08:43:02

부모가 자식에게
"내가 너를 낳고 안낳고가 중요한게 아니고
너와 나와의 내면의 관계가 중요한거란다."
라고 말한다면 아이는 어리둥절할 것입니다.
"먼 소리래? 엄마 맞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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