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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과 함께 사는 신앙인

누가복음 김필곤 목사............... 조회 수 1811 추천 수 0 2009.10.10 14:4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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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0:25-37 
설교자 : 김필곤 목사 
참고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2002.10.30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Ulrich Beck)은 오늘날의 사회를 "위험사회"로 규정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현재의 한국 사회는 울리히 벡이 얘기하는 "위험사회"에다 갖가지 차원의 부패와 비리, 위험과 협잡이 첨가된 "복합적 위험사회"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한국 보건 사회연구원은 국가체제 최고의 위기상황을 100(내란)으로 볼 때 지난 5월의 한국사회의 총체적 위기수준이 70.2 즉 비교적 위기상황으로 분석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늘의 현실은 마치 39년 전 [데모 만능] 풍조로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던 제 2 공화국 시대를 방불케 한다고 합니다. 얼마 전에는 지방 초등학생들까지 상경하여 교육부의 소규모 학교 통폐합에 반대하는 농성을 벌이더니 이제는 신중하고 근엄한 대학교수들도 [두뇌한국 21]을 놓고 거리시위를 벌이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현대사를 오염시키고도 여전히 건재한 기득권 정치가들 때문입니까? 반성없는 부당한 치부에 여념이 없는 재벌들, 사회 곳곳에 퍼져있는 피라미드 부패 세력들, 지역 정서에 매몰된 백성들, 거리에 가득찬 불신과 거짓 때문이겠습니까? 그 밑바닥은 무엇입니까?
사회 비평 에세이집 '색깔이 있는 생각들' 을 펴낸 UCLA 의대 정균희 교수는 한국 사회를
좀먹는 요소로 조급증. 흑백논리. 한탕주의 등을 지적했습니다. 물론 적절한 지적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것은 이기주의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갈등과 거의 모든 나쁜 사건들은 우리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비합리적인 이기주의 때문이라고 말해도 과도한 말은 아닐 것입니다. 사람들이 거리에서 아우성 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입니다. 내 몫을 내놓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욕심입니다. 이익을 따라 주장하고 행동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습성입니다. 합리적인 이기주의야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불합리한 이기주의입니다. 다른 사람의 합법적인 권리와 이익에 손해를 끼치면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생각과 행위입니다. 나와 내 가족, 동향, 동문, 동질 집단의 이익과, 편리, 쾌락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집단 이기주의가 문제입니다. 이웃간에 이루어지는 이 불합리한 이기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1.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설 것이라는 내세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갈등을 중재하기 위해서는 정치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불완전합니다. 정치 역시 이익 집단이기 때문입니다. 절대적 가치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세관이 분명한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율적 양심에 의해 제어 받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내세관이 있다하여도 그 내세관을 이용하여 현재의 욕망을 채우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신앙인 마저 세상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근 한 기독교잡지의 조사 결과에 의하면 비기독교인들의 눈에 비친 기독교인의 모습은 이기적이다가 31.4%, 비인격적이다가 22.9%, 위선적/자기중심적 18.6%, 모범적/인격적이가가 17.1%, 기타 10.0% 였습니다. 참 부끄러운 결과입니다.
오늘 나오는 율법사가 요즈음 말하면 그런 사람일 것입니다. 예수님께 한 율법사가 왔습니다. 그리고 물어 봅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 당시야 당연한 것이지만 오늘 날로 생각하면 대단한 질문입니다. 오늘날은 별로 영생에 대하여 내세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현실 삶 속에서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즐겁게 살까? 어떻게 하면 멋지게 살까?를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질문은 그 동기가 진정 내세에 대한 관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다른 데에 있었습니다. 내세에 대한 질문은 지극히 현실적인데 있었습니다. 자신의 현실적 목적을 성취하는데 있었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그가 질문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진정 구원의 길을 몰라서 물어 본 것입니까? 당시 유대인들은 대부분 구약에서 말씀하는 구원의 길을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시험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시험하여 자신들의 종교적 기득권을 거슬리고 인기를 누리고 있는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내세적 관심도 지극히 현실적인 것을 위해 사용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속마음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대답하는 것보다 다시 그에게 질문을 합니다. "네가 잘 알고 있는 율법에서 뭐라고 말씀하시더냐?" 그는 27절에서 대답을 합니다. 구약 신6:5; 레19:18를 들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합니다. 이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보십시오. 28절 "네 대답이 옳다. 그러면 이것을 말로만 하지 말고 행해 보라. 지금 너는 나를 시험하기 위해 가증스럽게 말하고 있지 않느냐?"라는 것입니다.
이웃과의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받습니다. 우리가 이웃과 바른 관계를 가지려면은 내세관을 가진 진정한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 사회가 바르게 되려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바로 내세관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야 합니다. 오늘이 전부라고 생각하니까? 사기치고 거짓말하고 속이고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세상이 전부가 아닙니다. 언젠가는 인생의 끝이 다가오는 것을 분명하게 깨닫고 사는 사람은 그렇게 살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40년 동안 권세와 부귀 지혜 쾌락을 누린 솔로몬의 소백을 보십시오(전12:13-14)
삶의 한계 지식의 한계, 자신의 삶을 자신의 힘으로 지배할 수 없는 능력의 한계 앞에 삶은 무의미합니다. 폴틸리는 인간의 한계상황을 1.죽음과 자기 숙명성 2.허무와 무의미성 3.죄책감에 대한 불안이라 하였습니다. 언젠가는 끝이 옵니다. 그 끝이 오면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히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
"(갈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살후3:13)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 "
"(마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

2. 서로 실천적인 사랑과 자비를 통하여 함께 사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기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무조건적 사랑입니다. 희생적 사랑입니다. 신앙으로 나누어 볼 때 세상에는 세 종류의 인간이 있습니다. 신자, 무신론자, 이신론자입니다. 이신론자 중에선 비판적 이신론자, 실천적 이신론자가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실천적 이신론자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기는 믿지만 그대로 살지는 못합니다. 행위로 부정합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께 속마음이 들켰습니다. 그러자 뭐라고 말합니까?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질문합니다. 그 의도는 무엇입니까? 옳게 보이려고 그런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옷도 돈도 다 빼앗기고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그를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그 때 마침 제사장이 내려갔습니다. 그는 종교지도자입니다. 자비를 외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레위인이 지나갔습니다. 그는 성전에서 일하는 자입니다. 그도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혼혈아라고 사람취급을 하지 않는 사마리아인이 지나가다가 그를 발견하고 불쌍히 여기고 상처를 치료해 주고 가까운 주막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두 데나리온을 주면서 주인에게 보살펴 줄 것을 부탁합니다.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시고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과연 누가 이웃이냐는 것입니다. 그는 스스로 말합니다. 자비를 베픈 자입니다. 알기는 잘 압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도덕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원칙은 잘 알고 있습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도 잘 압니다. 문제는 실천력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가서 너도 이와같이 하라. 오늘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말씀을 하실 것입니다. 그래 너희는 행함으로 구원받으려고 하지 말고 이미 믿음으로 구원의 선물을 받았으니 이제 구원받은 백성답게 행함으로 구원의 증거를 보여 주어라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으로 구원받은 백성의 증거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자비로 구원받은 백성의 증거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율법사는 자신의 선행을 자랑하기 위해 누가 이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누가 나의 이웃인가보다는 누가 사랑과 자선을 보였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숨까지 내놓았습니다. 우리는 이웃을 위해 무엇을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제사장도 레위인도 사마리아인도 똑같이 보았습니다. 상황을 보는 것은 똑같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반응은 다른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은 (1)마음으로 불쌍히 여겼습니다(33) (2)행동으로 가까이 갔습니다(34) (3)물질적으로 투자를 하였습니다(34,35) (3)장례 문제까지 관심을 가졌습니다(35).한데나리온 당시 노동자 하루의 품삯입니다. 당시 로마의 하루의 숙박비 1/32데나리온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두 데나리온은 두달치 숙박비입니다. 그것도 모자라면 더 주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이웃에 대하여 어떻게 해야하겠습니까?
1)먼저는 지옥으로 가는 영혼 마음으로 사랑하여야 합니다.(롬9:1-3). 우리가 이웃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이 무엇이겠습니까? 이 사랑을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요1:41 안드레가 자기 형제 시몬을 가까이 찾아 요1:45 빌립이 나다나엘)
그리고 바울 처럼 물질적 투자를 해야 합니다. 고후12:15 장례문제까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살전3:1-3
새신자의 교회출석 동기 새 신자들이 교회에 나온 동기를 보면 이웃과 친척의 끈질긴 권유와 정에못이겨 출석했다는 사람이 80%에 이르고 있습니다. 생활전도훈련원이 새신자 1백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의하면 교회에 출석한 동기가 이웃의 정과 권유에 이끌려가 80%, 스스로 등록했다가 10%, 문서 전도지를 통해가 5%,기타 5%였습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가장 베풀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복음을 전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해야 합니다.

2)영혼의 상처뿐 만 아니라 육신의 상처 삶의 상처를 자비의 마음으로 치유해 주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4무 병에 걸려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무관심, 무반응, 무의식, 무책임이라고 합니다. 신앙인은 이웃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반응하여야 합니다. 책임감을 느껴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처음 신학교에 들어가면 사회정의에 대한 열정도 있고 복음에 대한 뜨거움과 구원에 대한 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것은 점점 살아진다는 것입니다. 신학교 1학년때 해변에서 사람이 물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것을 보면 옷입은 채 물에 뛰어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2학년이 되면 튀브를 던진다는 것입니다. 이제 졸업반이 되면 뛰어 들어가지도 않고 링을 던지지도 않고 밖에서 "어 나와"하며 손짓한다는 것입니다.
미국 뉴욕 퀸즈 어느 아파트 앞에서 16세 소녀 Kitty Genovese(키티 제노비스)가 한 괴한에 의하여 30분 동안 폭행을 당했습니다. 이 때 38명이 창문을 통해 그 광경을 보고 있었는데 아무도 이를 말리거나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고, 그 소녀는 마침내 죽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경찰 조사에서 이들 모두는 한결같이 "다른 사람이 도와줄 것으로 생각했다"는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구원을 홀로받지만 삶이란 늘 홀로가 아닙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주님 말씀합니다. "이를 행하라, 너도 이와같이 하라"는 말씀이 예수님의 결론의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요일 4:20)"

평생 베풀면서 살다간 방경삼 목사 소천이라는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방 목사님은 1935년 평안 남도에서 출생하여 월남하여 목회를 하였습니다. 목사님은 "영적 심적 물적으로 저들에게 베풀 수 있을 때까지만 목회하겠다"일념으로 결혼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강원도 원주 나환자 촌으로 들어 갔습니다. 음성 나환자 뿐 만 아니라 양성 나환자 등 3백명이 전국에서 모여 사는 경천원에들어 갔을 때 그들은 고름이 흐르는 손으로 계란을 건네 주었습니다. 방목사는 그것을 덥석 받아 먹고 그들의 환영 가운데 그곳에서 목회를 하였습니다. 그후 신안 농원에 가서 목회를 하였고 중부교회에서 교도소 출소자 뒷바라지를 하며 대전 신학교와 청주신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르치는 제자들이 어려울 때 생활비와 자녀학비를 내주느라 정작 자신의 딸과 아들의 등록금은 한 번도 자신의 손으로 주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한이 되어 마지막 조의금으로 아들 등록금 한 번 내 주고 나머지는 섬서교회 후ㅜ언과 목회자 미망인 자녀 장학금에 전달하고 돌아 가셨습니다. 마지막 그는 5월 15일 향년 62세로 아내에게 "살아 생전 내가 못다 베푼 어려운 이들을 당신이 대신 돌봐달라. 내가 죽거든 시신을 세브란스 병원에 기증하고 장례식 대신 노회장으로 감사 예배를 드려달라"는 말을 남기고 소천하였습니다. 입관식도 발인식도, 장례식도 없는 감사예배로 이 땅의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이웃과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는 언젠가 주님 앞에 서게 됩니다. 그날 어떤 말을 듣고 싶습니까?
"(마10: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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