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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후5: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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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조용기 목사 |
참고 : | 2006년 9월 3일 성찬주일 2부 설교 |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나는 누구인가?’ 이 제목으로 은혜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동물은 자기가 누구인가를 절대로 묻지 않습니다. 동물은 육혼 밖에 없어 그저 육체적인 삶만 추구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과 다릅니다. 가난하고 공부도 못하고 화전을 가꾸며 사는 농부라도 자기가 누군가를 생각하고 밭을 매다가 허리를 툭툭 치면서 한숨을 길게 내쉬고 이렇게 중얼거립니다.??인생이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어디로 갈까???이와 같은 질문은 자기를 찾는 질문입니다. 저는 저의 마음에 잊지 못할 우리 할머니에 대한 추억이 있습니다. 저는 어릴 때 할머니하고 같이 살았는데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할머니는 뜨거운 불교신자였기 때문에 염주를 손으로 이렇게 헤아리면서 무엇을 중얼중얼하고 계세요. 그래서 “할머니 뭐하노?” 그러면 할머님이 “나를 찾는다.” 그러자 할머니를 내가 탁 손을 대면서 “여기 있는데 뭘 찾기는 찾아 할머니?”라고 말하면, 할머님 하시는 말씀이 “아니야, 내가 누군가. 내가 누군가. 내가 누군가. 내가 누군가. 그것을 늘 찾는 것이다.” 다시 “그러면 찾았어?”라고 물어보면, 할머니는 “못 찾았어.”라고 합니다. 그러면 내가 “밤낮 그래도 못 찾아 여기 있는데 무얼 할머니가 할머니를 찾아.” 그러니까 “아니야, 내 영혼을 찾는 거야.” 그 말이 저의 마음속에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우리 할머님은 초등학교도 못 나오신 분입니다. 그러나 열심 있는 불교도였는데 늘 그가 자기를 찾는다고 아침마다 염주를 헤아리면서 계시는데 결국은 자기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으시고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고 천국 가시는 것을 본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 라는 질문은 자기를 찾는 질문입니다. 인간은 아담 이후 진정한 자기를 잃어버렸기 때문인 것입니다.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하루는 꾀죄죄한 옷차림에 흐트러진 모습으로 프랑크푸르트의 한 공원에 앉아 있었습니다. 공원 관리인은 그가 노숙자인줄 알고 “당신 누구요?”하고 퉁명스럽게 물었습니다. 그때 쇼펜하우어가 몹시 괴로운 어조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발 나도 내가 누구인지 좀 알았으면 좋겠소.”
인간은 누구나 ‘나는 누구인가?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어디로 갈까?’하는 고민을 합니다. 이와 같은 질문은 자기를 찾는 질문인 것입니다. 인간은 아담 이후 진정한 자기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늘 마음속에 공허를 느끼고 있습니다.
‘현대인은 두 가지 병(病)을 갖는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것이 첫째의 병이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둘째의 병이다.’라고 무신론자 니체조차도 말을 했습니다.
<본론>
1.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입니까? 모든 종교는 이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이 질문은 자기의 내면을 향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육체를 뛰어넘어 영혼을 찾는 질문인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가? 육체적으로 말하면 여기에는 있는 육체적인 인간이 자기인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여기 자기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누구인가를 묻는 것은 영혼을 찾는 질문인 것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많은 질문을 하고 어마어마한 노력으로 연구를 했습니다. 그 결과로 그들이 발견한 자기는 함축하여 세가지 면에서 보여 주었습니다. 첫째로 죄책의 절망을 아는 자기라는 것입니다. 자기는 누구냐. 죄에 둘러쌓여 있다. 죄 덩어리다. 죄와 정죄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자기를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믿지 않는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발견한 자기인 것입니다. 자기는 죄책과 정죄의 절망에 처한 사람이다. 그 다음 자기는 허무와 무의미를 아는 자기다. 이 세상에 허무하고 무의미한 존재다. 삶이 어디에서 와서 왜살며 어디로 가는지 알수가 없다. 우연히 태어나서 허망하게 살다가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이 인생이다. 허무와 무의미의 존재가 자기라는 것을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발견한 것입니다. 그다음 그들이 발견한 것은 인간이란 죽음과 무의 절망을 품은 자기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 한번나서 죽고 죽고나면 안개가 사라지듯이 사라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무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을 절망적인 존재라고 말한 것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였던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가장 무서운 병은 암 같은 질병이 아니라 자아상실 즉, 자기를 잃어버린 절망이다"라고 했습니다. 칼 야스퍼스는 "인간의 삶에는 죽음, 고뇌, 투쟁, 죄책 등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한계 상황이 있다. 이러한 현실의 한계상황으로 인한 좌절을 인정하는 데에 인간의 실존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실존주의 문학가 까뮈 역시 "인생은 부조리한 것으로, 살려면 인생의 무의미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오늘날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찾은 자기는 이처럼 죄의 절망과 허무와 무의미의 절망, 죽음의 절망의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 아는 것이 인생이라고 그들은 말했습니다. 성경에도 전도서에서 예루살렘의 전도자 솔로몬이 인간실존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도서 1장 2절로 3절에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전도서 2장 23절에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그러므로 전도자가 발견한 자기도 모두 헛된것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극작가요, 문학 비평가였던 버나드 쇼는 인생의 절망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게는 두 가지 절망이 있다. 하나는 무슨 일들이 마음대로 안 되는 절망이요, 둘째는 마음대로 되고 난 이후에 다가오는 절망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일이 어찌되던지 간에 그 결과는 항상 절망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항상 절망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절망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오직 구속해 주시는 이가 와서 구원해 주시지 않으면 희망이 없는 존재가 인간인 것입니다. 성경은 나에 대해서 뭐라고 말합니까?
창세기 3장 17절로 19절에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타락한 아담 그에대한 성경은 절망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로 벌거벗고 버림받은 나를 발견한 것입니다. 죄를 짓자 하나님 영광이 떠나니까 벌거벗은 수치로 가득했습니다. 그 부끄러움을 가릴수가 없었습니다. 죄책의 부끄러움 앞에서 몸부림치고 도망쳐서 나무뒤에 숨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는 자기는 저주받은 땅에서 고생하며 사는 자아를 발견한 것입니다. 땅은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이마에 땀을 흘려야 생존할 수 있는 비차한 환경을 발견하게 된 자기인 것입니다. 그리고 종국적으로 아담과 하와가 발견한 자기는 병들고 죽어 흙으로 돌아가는 비극적인 자아인 것입니다. 성경도 인간은 절망적인 존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14절에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베드로전서 1장 24절에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라고 말한 것입니다.
얼마나 절망적인 표현인 것입니까? 나는 누구인가? 거기에 대한 대답은 철학자들은 나는 절망적인 존재라고 말하고 성경에서도 타락한 인간은 절망적인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망의 바다에 빠져서 허우적이는 우리에게 유일한 희망이란 우리를 구원해줄 자가 와서 이 절망의 바다에서 건져주는 길밖에는 살아갈 길이 없습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절망적인 존재인 것입니다. 이 절망적인 바다에 빠져 허우적이고 있습니다. 이 바다에 빠진 우리들을 건져줄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손을 내밀어 우리를 건져주기 전에는 우리는 절망자인 것입니다. 철학자요, 절망자요, 종교적인 절망자인 것입니다.
심리학자 칼 융(Carl Jung)에 의하면, 인생의 중반을 넘긴 환자들 대부분이 인생의 최후 수단으로 종교적 인생관을 발견하는 문제로 씨름한다. 또한 종교적인 인생관을 얻지 못한 사람은 어느 누구도 치유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자기 존재의 이유를 발견할 때까지 의미 없이 방황하며, 그로 인해 인생이 상실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예수님을 발견하기 전에는 절망적인 존재로 인생의 의미를 결코 찾을 수가 없습니다. 분주하게 정치를 하고 경제활동을 하고 예술활동을 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고 저녁에 늦게 누워도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며 절망적인 행동에 불과한 것입니다.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인간의 존재 자체가 절망인 것입니다.
2. 예수님과 만나야 한다
예수님과 만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누군지를 모르고야 예수님을 만날수가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누구십니가? 예수님은 육신을 쓰고 오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는 사람과 하나되기 위해서 이땅에 오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절망적인 인간과 하나되어 인간을 건지기 위한 것입니다. 바다에 빠진 사람을 건지려면 바닷물속에 같이 뛰어 들어가서 헤엄을 치고 건져내야지 육지에 서서 바다에 빠진 사람을 건질수 없습니다. 절망하여 바다에 빠진 사람을 건지려고 하면은 같이 바닷물속에 뛰어 들어가서 그를 건져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떄문에 절망의 바다에 빠진 인생들을 건지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셔서 바닷물속에 풍덩 뛰어 들어온 것입니다. 그는 사람과 하나가 되어 절망의 바다속에서 생존하시고 절망의 바다에 빠진 우리를 건져주신 분이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2장 14절로 15절에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를 마귀에게서 해방시켜 주시고 사망의 절망에서 건져 주시기 위해서 주님은 인간으로 절망의 바다속으로 뛰어 들어오신 분인 것입니다. 주님은 사람의 재물을 대신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을 당신의 것으로 짊어지고 인간의 채무를 당신이 담당하신 분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지은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절망적인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 그 자체가 희망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때문에 주님은 죄짐을 짊어지고 마귀의 굴레속에 몸을 내어 맡기고 병들고 저주받고 고난 당하고 죽음을 짊어지신 것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려면 헤엄을 잘쳐야 돼요. 자기도 헤엄을 못치는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려고 해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는 옛날에 어릴때에 유원지에 산책을 갔는데 우리 사촌 동생도 같이 산책을 갔습니다. 그런데 사촌동생은 외할머니하고 같이 왔어요. 그런데 사촌동생이 물가에서 놀다가 미끄러져서 물에 빠져서 허우적댑니다. 그런데 외할머니가 물속에 들어가서 사촌동생을 건지려고 하다가 사촌동생보다 더 물을 먹고 허우적 거리는 것입니다. 헤엄도 못치는 외할머니가 외손주가 물에 빠지니까 건지겠다고 뛰어 들어갔으나 건질 실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중에 장정들이 와서 나의 사촌동생보다도 외할머니 건지는데 더 혼비백산을 했습니다.
우리가 절망의 물에 빠졌는데 우리를 건지려면 절망을 이길수 있는 분이 와야 우리를 건질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도 절망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이 와서 건진다고 큰소리하고 절망에 허우적이다가 빠져 죽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많은 종교인들 많은 철학자들 현명한 사람들이 우리를 절망에서 건진다고 큰소리하고 절망의 바다에 뛰어 들어왔다가 우리보다 먼저 빠져 죽었습니다. 우리를 건지지 못해요.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써 사람이 되어 오신 것은 절망의 바다에 빠져 허덕이는 우리를 건질수 있는 실력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어떤 깊은 바다에 빠져서 얼마나 절망적으로 허덕일지라도 주님은 우리를 건지고도 남음이 있는 실력이 있기 때문에 사람으로 오신 것입니다. 죄와 더러움, 질병과 저주, 죽음을 십자가에서 청산하고 부활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죽고 부활할 힘이 없어 죽음의 포로가 되고 말지만 예수님은 죽었다가 부활할 힘이 있기 때문에 죽음을 통해서 모든 것을 청산하시고 죽음의 바다에서 스스로 나온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 나라로 옮기신 위대한 능력을 가지고 계신 주님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므로 확실하게 다 이루시고 이기신 분인 것입니다. 부활 못했으면 절망의 바다에 빠져 죽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절망의 바다에서 건진다고 하면서 빠지고 일어나오지 못하고 죽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확실히 절망의 바다에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절망에서 건지신 것을 보증하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5절로 57절에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죽으실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망적인 인간이 예수님을 만나면 절망이 희망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절망의 바다에서 허우적이다가 예수님 손을 잡기만 하면은 우리는 그 절망의 바다에서 건져냄을 받아 충만한 희망의 세계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건지기 위해서 오셔서 이 절망속에 들어와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우리 죄, 우리 불의, 추악, 저주, 죽음을 대신 짊어지고 청산하시고 확실하게 부활하시므로 주님 부활이요 생명이요 영원한 승리자가 되신 것은 우리에게 끝없는 소망의 원천이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로 죄에서 용서받고 의로운 선물을 이미 받았습니다.
에베소서 1장 7절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4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이제 죄의 바다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의롭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삶의 모든 부정을 씻음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더럽고 추악합니까? 악한 습관에 묶이고 마귀의 종인 우리가 더러움에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받고 해방되고 거룩하게 살 수 있는 성령을 주셔서 그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세속의 더러움을 이기고 살수있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
사도행정 2장 38절에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디도서 3장 5절로 6절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신에 치료받고 건강을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의 병, 육체의 병을 치료하시고 건강과 생명을 선물로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 질병의 고통과 절망에서 해방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3장 25절에 “네 하나님 야훼를 섬기라 그리하면 야훼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서 병을 제하리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아브라함의 복에 동참하게 하신 것입니다. 저주와 가난, 낭패와 실망에 허우적이며 마른땅에서 절망하고 탄식하는 우리들을 대신해서 주님은 절망을 다 청산하시고 절망의 바다에서 우리를 건져주신 주님이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과 형통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9절에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그리스도의 죽으셨다 부활하심을 통해서 사망과 음부에서 해방되고 천국 영생을 선물로 받게 된 것입니다. 인간의 절대절망이 예수님의 절대소망으로 변화되게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로 3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일이 있을수가 과연 있느냐. 예수 믿는다고 해서 용서와 의와 영광을 얻고 거룩함과 성령충만을 얻고 예수 믿는다고 해서 치료받고 건강하고 예수 믿는다고 해서 저주에서 해방되고 아브라함의 복과 형통에 참여하고 예수믿는다고 해서 부활, 영생, 천국을 얻는다. 그 꿈같은 소리 하는구나. 그렇게 질문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주변에는 옛날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현실화 된 경우가 많습니다.
자동차가 없던 자동차가 없던 1840년대에는 '시속 30마일, 즉 48km로 여행하면 누구나 질식하고 말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자동차로 시속 200km로 달려도 질식해서 죽는 사람 없습니다. 사람이 하늘을 나는 것을 불가능하게 여겼던 1900년대 초에 '인간이 하늘을 날아 비행을 가능하게 하는 실제적인 기계 조립은 불가능하다'고 말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보잉 747을 타고 수백명이 태평양, 대서양을 유유히 날라서 온지구를 일일생활권으로 만들어 놓고 만것입니다. 또한 인간이 우주 밖으로 나가는 것은 꿈에서나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달에 간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인간은 벌써 달에 가서 깃발을 휘날리고 이제는 화성에 가서 깃발을 꽂으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에 불가능하다는 것이 지금은 다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불가능한 모든 것이 현실화 되었을뿐 아니라 오히려 더 발전하고 있습니다. 일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생각이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필립 얀시는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심지어 우리 자신도 믿을 수 없을 때, 그때도 하나님은 그곳에 계신다"고 말한 것입니다. 5만 번의 기도 응답을 받았던 조지 뮬러는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없는 것이 더 낫습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 있으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람이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다 가능하게 되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절망의 바다에 빠진 우리가 소망으로 건짐을 받는다는 것은 절대 가능한 일입니다. 확실한 것입니다. 틀림없는 사실인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네 믿음대로 될찌어다.’ 하나님은 크고 위대하시며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전능한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망적인 인간이 예수님을 만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 절망이 희망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을 만난 사람의 삶
그러므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어떻게 살아요?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다고 말해서 우리는 이제 길, 진리, 생명을 가지고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는 길을 찾은 삶을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길을 잃어버린 사람이 아닙니다. 길을 잃어버린다면 얼마나 난처합니까? 더구나 산속에 가서 길을 잃어 버리고 해는 뉘엇뉘엇 저가면 절망하지 않습니까? 길을 잘아는 안내원을 따라가면 어떠한 곳에 가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에 길을 잃어 버리고 방황한다는 것은 정말 절망입니다.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방황하다가 죽어 버리면 잃어버린 인생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으로 사는 길을 열어주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바로 길이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용서받고 의로움을 받는 길이요, 거룩하고 성령받는 길이요, 치료와 건강의 길이요, 부활과 영생의 길이요, 축복과 형통의 길이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길을 가르치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길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길을 모시고 살기 때문에 길을 잃어버릴 염려가 전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다 환하게 열린길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더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천국 길이 우리에게 열렸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는 길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이요, 우리는 진리를 얻은 삶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절대적인 진리가 없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예수님은 절대적인 진리입니다. 왜냐하면 죽었다가 부활하신 분은 예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앞에 죽음은 산산조각 나고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절대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상대적인 진리가 아닌 것입니다. 변화될수 있는 진리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신 것은 영원한 진리요, 영원한 확실한 사실이요, 중간에 가서 변경될 수가 없는 절대진리인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진리를 얻었기 때문에 마음에 참 기쁨을 소유한 사람인 것입니다. 거짓이 아닌 진리속에 사니까 진리속에 하나님을 만나고 마음에 기쁨이 충만한 것입니다.
시편 16편 11절에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주님과 함께 계시므로 즐거움과 기쁨이 우리 마음속에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온 세상은 악한 자에게 속하였다고 요한일서 5장 19절에 말하므로 마귀의 미혹에 빠져 있습니다. 세상은 탐욕으로 미혹되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식욕, 성욕, 명예욕, 물욕, 권력욕 등의 노예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탐욕에 끌려가면 절대로 잘못되어 갑니다. 나중에 가시밭을 지나고 지옥의 길로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9절로 11절에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들은 길과 진리를 발견한 사람인 것입니다. 참된 삶을 예수님 안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증명되지 않은 가르침의 사람들이 많이 미혹되어 있습니다. 이길로 가면 산다. 이 길로 가면 안전하다. 이 길로 가면 참된 길이라고 하지만 증명되지 않았어요. 모두다 그 길로 가서 산다는 증명을 하지를 못했습니다. 그 증명은 뭡니까? 죽었다가 살아나야 증명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길을 가도 진실로 천국 영생의 길로 간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죽었다가 부활해야 확실한 증거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지 못하는 가르침은 모두다 이 세상에서 끝나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예수님이 말씀한 것은 예수님이 직접 죽었다가 살아났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믿으면 죽어도 살아난다. 증명하시오. 내가 죽었다가 사흘만에 살아났다. 어때? 할말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한사람치고 증명하지 못한 가르침은 거짓되고 헛된 미혹의 가르침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유명한 프란시스 쉐퍼 박사가 스위스의 라브리에서 세계의 지성인들이 모인 가운데 이 시대의 방향과 믿음의 갈 길을 제시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19세기에 일어났던 가장 커다란 비극은 사람들이 절대 가치를 버린 것이다. 그래서 현대인은 절망의 선 밑으로 떨어졌다." 절대가치, 하나님은 절대 가치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절대 가치인데 하나님도 계시지 않는다. 예수님도 계시지 않다. 절대 진리는 없다. 진리는 언제나 상대적이다. 이렇게 하므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완전히 길을 잃어 버리고 진리를 잃어 버리고 방황하게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19세기 이전의 사람들은 절대로 옳은 것과 절대로 그른 것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19세기에 들어와 사람들이 '절대 가치'를 의심하면서 더욱 깊은 절망의 늪으로 빠져들어가고 만것입니다. 절대적인 가치가 없기 때문에 절대적인 옳은 길도 없고 절대적으로 믿을만한 진리도 없다고 말하므로 모든 사람은 방황하고 허우적이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라는 절대 진리를 버리고 절망적인 인간이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인간의 절대 절망은 오직 예수님을 만나야 절대 소망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어두움은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절망은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죽음도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영원히 빛과 영광만 가득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절대진리가 있습니다. 절대적인 길이 있어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은 우리가 살아가는 절대적인 길이요, 어두움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 진리인 것입니다. 죽었다가 부활하셔서 증명하신 절대 진리요, 상대적인 진리가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생명의 성령을 받아서 성령의 생명으로 현재와 내일을 삽니다. 하나님의 생기를 받아서 사는 삶이 얼마나 좋습니까? 여러분 시들어져가는 나무나 풀이 비가 오면 생기가 발랄하지 않습니까? 우리속에 세상으로 시들어진 우리 인생에 성령이 오셔서 생기가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9절로 20절에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되 풍성히 주시는 것입니다.
김춘근 박사가 쓴 「Why Me?」라는 책에 보면 그가 하나님을 만나 변화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단돈 200불을 들고 미국으로 유학을 건너가 30대 초에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고, 페퍼다인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4년 만에 최우수 교수상을 받은 한국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명예도 잠시, 37세라는 젊은 나이에 간경화와 간염으로 일년 안에 죽을 것이라는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는 주저앉아 처절하게 울부짖었습니다. "오 갓 (Oh~ GOD!) 와이 미(Why me)? 왜 하필이면 접니까? 무엇을 얼마나 잘못했다고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 젊은 나이에 처자를 두고 죽어야 합니까? 왜 구태어 납니까?" 그러나 절망 중에 문득 '인간을 창조하시고 또 정말 나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내가 왜 죽어야 하는지, 나의 병을 고쳐서 다시 살게 하실 수는 없는지는 대답할 수 있는 분이 아니겠느냐.' 하나님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어차피 죽을 몸 하나님께 매달리자. 응답 받기 전에는 절대로 산을 내려오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산에 올라가서 조그마한 집을 빌리고 그곳에 머물면서 결사적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이미 죽음이 확정된 그 처지에서 살길은 하나님 찾는 길밖에 없기 때문에 타협할 수가 없습니다. 전심전력으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기도 중에 자신의 입술을 통해 하나님이 이렇게 예언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육체적으로는 네 피 속에 있는 독소 때문에 죽어 가지만, 진정 네가 영혼 속에 있는 독소 때문에 죽어 가는 것은 모르느냐?" 순간 김춘근 박사의 눈앞에 지금까지 그가 지었던 모든 죄가 영화와 같이 펼쳐졌습니다. 그는 엎드러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지은 죄목을 무려 52페이지에 달할 정도로 적어서 믿음 생활 22년 동안, 자신의 뜻대로 살아왔던 삶을 처절하게 회개했습니다. 밤을 새우고 회개하며 새벽녘이 되자 환상 중에 예수님이 흰옷을 입고 광채를 내고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꼭 껴안고 등을 어루만져 주시면서 "내가 너를 용서한다. 내가 너를 용서한다. 그리고 내가 너를 용서한다"라고 세번 말씀하셨습니다. 김춘근 박사는 이 날을 인생의 분기점으로 삼고 예수님을 위해 살기로 결단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김춘근 박사를 용서하실 뿐 아니라 간암에서 완전히 고쳐주셨습니다. 이후에 김춘근 박사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그를 '알래스카의 요셉'이라고 불렀습니다. 현재 그는 JAMA(Jesus Awakening Movement for America, 미국을 위한 예수각성 운동)의 대표자로서 미국과 한국청소년들의 신앙과 도덕성 회복 운동을 위해 청년들을 변화시키는 일에 전심전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생명의 역사 아닌 것입니까? 예수님을 만나면 종교를 만나는 것이 아니고 철학을 만나는 것이 아니고 생명을 만나는 것입니다. 영혼의 죽음을 변화시켜줄뿐 아니라 육체적인 죽음에서까지 건져 주셔서 김춘근 박사같은 생명의 길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가 곧 너의 길이요, 너의 진리요, 너의 생명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절대적인 길이요, 절대적인 진리요, 절대적인 생명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깨어진 몸을 먹고 흘린 피를 마실 때 우리는 절대적인 길을 먹고 마시고 절대적인 진리를 먹고 마시고 절대적인 생명을 먹고 마셔서 예수님이 내 안에 내가 예수님 안에 하나가 되는 위대한 삶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17세기의 파스칼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어져 있다. 그 구멍은 세상적인 쾌락이나 물질이나 명예나 권세로 채울 수가 없다. 그럴 경우 오히려 실망과 불만족과 허무만이 남게 된다. 오직 그 구멍을 채울 수 있는 것은 끝없이 부어 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뿐이다. 그래서 인간은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실 때에 진실한 만족을 느낄수 있다." 고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야만 인간의 절대절망이 예수님의 절대 희망으로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절망의 질그릇인 내 속에 예수님을 모심으로 거듭나서 소망으로 넘치는 삶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발견했습니다. 나는 누구냐. 도대체 나는 누구냐. 그 부르짖음과 울부짖음속에 우리는 해답을 발견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길과 진리와 생명을 발견한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여!
사람은 누구든지 내가 누구냐를 질문합니다. 아무리 총명한 침팬지도 자기가 누군가를 질문하지 않습니다. 짐승은 자기를 잃어 버리지 않았습니다.그러나 사람은 아담과 하와 이후 죄를 짓고 자기를 잃어 버렸기 때문에 항상 자기를 찾는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이 질문이 모든 종교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종교가 참된 종교는 아닙니다. 증명된 종교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는 길을 찾고 진리를 찾고 생명을 찾았습니다. 내가 누구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될 때 나는 이러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나는 이제 길을 찾은 자요, 나는 진리를 얻은자요, 나는 생명을 얻은자가 된 것을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영광받아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 아멘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나는 누구인가?’ 이 제목으로 은혜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동물은 자기가 누구인가를 절대로 묻지 않습니다. 동물은 육혼 밖에 없어 그저 육체적인 삶만 추구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과 다릅니다. 가난하고 공부도 못하고 화전을 가꾸며 사는 농부라도 자기가 누군가를 생각하고 밭을 매다가 허리를 툭툭 치면서 한숨을 길게 내쉬고 이렇게 중얼거립니다.??인생이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어디로 갈까???이와 같은 질문은 자기를 찾는 질문입니다. 저는 저의 마음에 잊지 못할 우리 할머니에 대한 추억이 있습니다. 저는 어릴 때 할머니하고 같이 살았는데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할머니는 뜨거운 불교신자였기 때문에 염주를 손으로 이렇게 헤아리면서 무엇을 중얼중얼하고 계세요. 그래서 “할머니 뭐하노?” 그러면 할머님이 “나를 찾는다.” 그러자 할머니를 내가 탁 손을 대면서 “여기 있는데 뭘 찾기는 찾아 할머니?”라고 말하면, 할머님 하시는 말씀이 “아니야, 내가 누군가. 내가 누군가. 내가 누군가. 내가 누군가. 그것을 늘 찾는 것이다.” 다시 “그러면 찾았어?”라고 물어보면, 할머니는 “못 찾았어.”라고 합니다. 그러면 내가 “밤낮 그래도 못 찾아 여기 있는데 무얼 할머니가 할머니를 찾아.” 그러니까 “아니야, 내 영혼을 찾는 거야.” 그 말이 저의 마음속에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우리 할머님은 초등학교도 못 나오신 분입니다. 그러나 열심 있는 불교도였는데 늘 그가 자기를 찾는다고 아침마다 염주를 헤아리면서 계시는데 결국은 자기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으시고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고 천국 가시는 것을 본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 라는 질문은 자기를 찾는 질문입니다. 인간은 아담 이후 진정한 자기를 잃어버렸기 때문인 것입니다.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하루는 꾀죄죄한 옷차림에 흐트러진 모습으로 프랑크푸르트의 한 공원에 앉아 있었습니다. 공원 관리인은 그가 노숙자인줄 알고 “당신 누구요?”하고 퉁명스럽게 물었습니다. 그때 쇼펜하우어가 몹시 괴로운 어조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발 나도 내가 누구인지 좀 알았으면 좋겠소.”
인간은 누구나 ‘나는 누구인가?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어디로 갈까?’하는 고민을 합니다. 이와 같은 질문은 자기를 찾는 질문인 것입니다. 인간은 아담 이후 진정한 자기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늘 마음속에 공허를 느끼고 있습니다.
‘현대인은 두 가지 병(病)을 갖는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것이 첫째의 병이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둘째의 병이다.’라고 무신론자 니체조차도 말을 했습니다.
<본론>
1.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입니까? 모든 종교는 이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이 질문은 자기의 내면을 향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육체를 뛰어넘어 영혼을 찾는 질문인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가? 육체적으로 말하면 여기에는 있는 육체적인 인간이 자기인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여기 자기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누구인가를 묻는 것은 영혼을 찾는 질문인 것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많은 질문을 하고 어마어마한 노력으로 연구를 했습니다. 그 결과로 그들이 발견한 자기는 함축하여 세가지 면에서 보여 주었습니다. 첫째로 죄책의 절망을 아는 자기라는 것입니다. 자기는 누구냐. 죄에 둘러쌓여 있다. 죄 덩어리다. 죄와 정죄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자기를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믿지 않는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발견한 자기인 것입니다. 자기는 죄책과 정죄의 절망에 처한 사람이다. 그 다음 자기는 허무와 무의미를 아는 자기다. 이 세상에 허무하고 무의미한 존재다. 삶이 어디에서 와서 왜살며 어디로 가는지 알수가 없다. 우연히 태어나서 허망하게 살다가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이 인생이다. 허무와 무의미의 존재가 자기라는 것을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발견한 것입니다. 그다음 그들이 발견한 것은 인간이란 죽음과 무의 절망을 품은 자기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 한번나서 죽고 죽고나면 안개가 사라지듯이 사라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무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을 절망적인 존재라고 말한 것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였던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가장 무서운 병은 암 같은 질병이 아니라 자아상실 즉, 자기를 잃어버린 절망이다"라고 했습니다. 칼 야스퍼스는 "인간의 삶에는 죽음, 고뇌, 투쟁, 죄책 등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한계 상황이 있다. 이러한 현실의 한계상황으로 인한 좌절을 인정하는 데에 인간의 실존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실존주의 문학가 까뮈 역시 "인생은 부조리한 것으로, 살려면 인생의 무의미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오늘날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찾은 자기는 이처럼 죄의 절망과 허무와 무의미의 절망, 죽음의 절망의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 아는 것이 인생이라고 그들은 말했습니다. 성경에도 전도서에서 예루살렘의 전도자 솔로몬이 인간실존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도서 1장 2절로 3절에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전도서 2장 23절에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그러므로 전도자가 발견한 자기도 모두 헛된것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극작가요, 문학 비평가였던 버나드 쇼는 인생의 절망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게는 두 가지 절망이 있다. 하나는 무슨 일들이 마음대로 안 되는 절망이요, 둘째는 마음대로 되고 난 이후에 다가오는 절망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일이 어찌되던지 간에 그 결과는 항상 절망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항상 절망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절망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오직 구속해 주시는 이가 와서 구원해 주시지 않으면 희망이 없는 존재가 인간인 것입니다. 성경은 나에 대해서 뭐라고 말합니까?
창세기 3장 17절로 19절에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타락한 아담 그에대한 성경은 절망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로 벌거벗고 버림받은 나를 발견한 것입니다. 죄를 짓자 하나님 영광이 떠나니까 벌거벗은 수치로 가득했습니다. 그 부끄러움을 가릴수가 없었습니다. 죄책의 부끄러움 앞에서 몸부림치고 도망쳐서 나무뒤에 숨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는 자기는 저주받은 땅에서 고생하며 사는 자아를 발견한 것입니다. 땅은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이마에 땀을 흘려야 생존할 수 있는 비차한 환경을 발견하게 된 자기인 것입니다. 그리고 종국적으로 아담과 하와가 발견한 자기는 병들고 죽어 흙으로 돌아가는 비극적인 자아인 것입니다. 성경도 인간은 절망적인 존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14절에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베드로전서 1장 24절에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라고 말한 것입니다.
얼마나 절망적인 표현인 것입니까? 나는 누구인가? 거기에 대한 대답은 철학자들은 나는 절망적인 존재라고 말하고 성경에서도 타락한 인간은 절망적인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망의 바다에 빠져서 허우적이는 우리에게 유일한 희망이란 우리를 구원해줄 자가 와서 이 절망의 바다에서 건져주는 길밖에는 살아갈 길이 없습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절망적인 존재인 것입니다. 이 절망적인 바다에 빠져 허우적이고 있습니다. 이 바다에 빠진 우리들을 건져줄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손을 내밀어 우리를 건져주기 전에는 우리는 절망자인 것입니다. 철학자요, 절망자요, 종교적인 절망자인 것입니다.
심리학자 칼 융(Carl Jung)에 의하면, 인생의 중반을 넘긴 환자들 대부분이 인생의 최후 수단으로 종교적 인생관을 발견하는 문제로 씨름한다. 또한 종교적인 인생관을 얻지 못한 사람은 어느 누구도 치유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자기 존재의 이유를 발견할 때까지 의미 없이 방황하며, 그로 인해 인생이 상실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예수님을 발견하기 전에는 절망적인 존재로 인생의 의미를 결코 찾을 수가 없습니다. 분주하게 정치를 하고 경제활동을 하고 예술활동을 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고 저녁에 늦게 누워도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며 절망적인 행동에 불과한 것입니다.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인간의 존재 자체가 절망인 것입니다.
2. 예수님과 만나야 한다
예수님과 만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누군지를 모르고야 예수님을 만날수가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누구십니가? 예수님은 육신을 쓰고 오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는 사람과 하나되기 위해서 이땅에 오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절망적인 인간과 하나되어 인간을 건지기 위한 것입니다. 바다에 빠진 사람을 건지려면 바닷물속에 같이 뛰어 들어가서 헤엄을 치고 건져내야지 육지에 서서 바다에 빠진 사람을 건질수 없습니다. 절망하여 바다에 빠진 사람을 건지려고 하면은 같이 바닷물속에 뛰어 들어가서 그를 건져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떄문에 절망의 바다에 빠진 인생들을 건지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셔서 바닷물속에 풍덩 뛰어 들어온 것입니다. 그는 사람과 하나가 되어 절망의 바다속에서 생존하시고 절망의 바다에 빠진 우리를 건져주신 분이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2장 14절로 15절에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를 마귀에게서 해방시켜 주시고 사망의 절망에서 건져 주시기 위해서 주님은 인간으로 절망의 바다속으로 뛰어 들어오신 분인 것입니다. 주님은 사람의 재물을 대신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을 당신의 것으로 짊어지고 인간의 채무를 당신이 담당하신 분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지은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절망적인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 그 자체가 희망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때문에 주님은 죄짐을 짊어지고 마귀의 굴레속에 몸을 내어 맡기고 병들고 저주받고 고난 당하고 죽음을 짊어지신 것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려면 헤엄을 잘쳐야 돼요. 자기도 헤엄을 못치는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려고 해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는 옛날에 어릴때에 유원지에 산책을 갔는데 우리 사촌 동생도 같이 산책을 갔습니다. 그런데 사촌동생은 외할머니하고 같이 왔어요. 그런데 사촌동생이 물가에서 놀다가 미끄러져서 물에 빠져서 허우적댑니다. 그런데 외할머니가 물속에 들어가서 사촌동생을 건지려고 하다가 사촌동생보다 더 물을 먹고 허우적 거리는 것입니다. 헤엄도 못치는 외할머니가 외손주가 물에 빠지니까 건지겠다고 뛰어 들어갔으나 건질 실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중에 장정들이 와서 나의 사촌동생보다도 외할머니 건지는데 더 혼비백산을 했습니다.
우리가 절망의 물에 빠졌는데 우리를 건지려면 절망을 이길수 있는 분이 와야 우리를 건질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도 절망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이 와서 건진다고 큰소리하고 절망에 허우적이다가 빠져 죽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많은 종교인들 많은 철학자들 현명한 사람들이 우리를 절망에서 건진다고 큰소리하고 절망의 바다에 뛰어 들어왔다가 우리보다 먼저 빠져 죽었습니다. 우리를 건지지 못해요.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써 사람이 되어 오신 것은 절망의 바다에 빠져 허덕이는 우리를 건질수 있는 실력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어떤 깊은 바다에 빠져서 얼마나 절망적으로 허덕일지라도 주님은 우리를 건지고도 남음이 있는 실력이 있기 때문에 사람으로 오신 것입니다. 죄와 더러움, 질병과 저주, 죽음을 십자가에서 청산하고 부활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죽고 부활할 힘이 없어 죽음의 포로가 되고 말지만 예수님은 죽었다가 부활할 힘이 있기 때문에 죽음을 통해서 모든 것을 청산하시고 죽음의 바다에서 스스로 나온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 나라로 옮기신 위대한 능력을 가지고 계신 주님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므로 확실하게 다 이루시고 이기신 분인 것입니다. 부활 못했으면 절망의 바다에 빠져 죽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절망의 바다에서 건진다고 하면서 빠지고 일어나오지 못하고 죽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확실히 절망의 바다에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절망에서 건지신 것을 보증하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5절로 57절에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죽으실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망적인 인간이 예수님을 만나면 절망이 희망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절망의 바다에서 허우적이다가 예수님 손을 잡기만 하면은 우리는 그 절망의 바다에서 건져냄을 받아 충만한 희망의 세계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건지기 위해서 오셔서 이 절망속에 들어와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우리 죄, 우리 불의, 추악, 저주, 죽음을 대신 짊어지고 청산하시고 확실하게 부활하시므로 주님 부활이요 생명이요 영원한 승리자가 되신 것은 우리에게 끝없는 소망의 원천이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로 죄에서 용서받고 의로운 선물을 이미 받았습니다.
에베소서 1장 7절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4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이제 죄의 바다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의롭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삶의 모든 부정을 씻음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더럽고 추악합니까? 악한 습관에 묶이고 마귀의 종인 우리가 더러움에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받고 해방되고 거룩하게 살 수 있는 성령을 주셔서 그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세속의 더러움을 이기고 살수있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
사도행정 2장 38절에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디도서 3장 5절로 6절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신에 치료받고 건강을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의 병, 육체의 병을 치료하시고 건강과 생명을 선물로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 질병의 고통과 절망에서 해방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3장 25절에 “네 하나님 야훼를 섬기라 그리하면 야훼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서 병을 제하리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아브라함의 복에 동참하게 하신 것입니다. 저주와 가난, 낭패와 실망에 허우적이며 마른땅에서 절망하고 탄식하는 우리들을 대신해서 주님은 절망을 다 청산하시고 절망의 바다에서 우리를 건져주신 주님이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과 형통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9절에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그리스도의 죽으셨다 부활하심을 통해서 사망과 음부에서 해방되고 천국 영생을 선물로 받게 된 것입니다. 인간의 절대절망이 예수님의 절대소망으로 변화되게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로 3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일이 있을수가 과연 있느냐. 예수 믿는다고 해서 용서와 의와 영광을 얻고 거룩함과 성령충만을 얻고 예수 믿는다고 해서 치료받고 건강하고 예수 믿는다고 해서 저주에서 해방되고 아브라함의 복과 형통에 참여하고 예수믿는다고 해서 부활, 영생, 천국을 얻는다. 그 꿈같은 소리 하는구나. 그렇게 질문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주변에는 옛날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현실화 된 경우가 많습니다.
자동차가 없던 자동차가 없던 1840년대에는 '시속 30마일, 즉 48km로 여행하면 누구나 질식하고 말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자동차로 시속 200km로 달려도 질식해서 죽는 사람 없습니다. 사람이 하늘을 나는 것을 불가능하게 여겼던 1900년대 초에 '인간이 하늘을 날아 비행을 가능하게 하는 실제적인 기계 조립은 불가능하다'고 말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보잉 747을 타고 수백명이 태평양, 대서양을 유유히 날라서 온지구를 일일생활권으로 만들어 놓고 만것입니다. 또한 인간이 우주 밖으로 나가는 것은 꿈에서나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달에 간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인간은 벌써 달에 가서 깃발을 휘날리고 이제는 화성에 가서 깃발을 꽂으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에 불가능하다는 것이 지금은 다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불가능한 모든 것이 현실화 되었을뿐 아니라 오히려 더 발전하고 있습니다. 일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생각이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필립 얀시는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심지어 우리 자신도 믿을 수 없을 때, 그때도 하나님은 그곳에 계신다"고 말한 것입니다. 5만 번의 기도 응답을 받았던 조지 뮬러는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없는 것이 더 낫습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 있으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람이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다 가능하게 되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절망의 바다에 빠진 우리가 소망으로 건짐을 받는다는 것은 절대 가능한 일입니다. 확실한 것입니다. 틀림없는 사실인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네 믿음대로 될찌어다.’ 하나님은 크고 위대하시며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전능한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망적인 인간이 예수님을 만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 절망이 희망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을 만난 사람의 삶
그러므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어떻게 살아요?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다고 말해서 우리는 이제 길, 진리, 생명을 가지고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는 길을 찾은 삶을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길을 잃어버린 사람이 아닙니다. 길을 잃어버린다면 얼마나 난처합니까? 더구나 산속에 가서 길을 잃어 버리고 해는 뉘엇뉘엇 저가면 절망하지 않습니까? 길을 잘아는 안내원을 따라가면 어떠한 곳에 가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에 길을 잃어 버리고 방황한다는 것은 정말 절망입니다.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방황하다가 죽어 버리면 잃어버린 인생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으로 사는 길을 열어주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바로 길이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용서받고 의로움을 받는 길이요, 거룩하고 성령받는 길이요, 치료와 건강의 길이요, 부활과 영생의 길이요, 축복과 형통의 길이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길을 가르치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길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길을 모시고 살기 때문에 길을 잃어버릴 염려가 전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다 환하게 열린길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더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천국 길이 우리에게 열렸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는 길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이요, 우리는 진리를 얻은 삶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절대적인 진리가 없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예수님은 절대적인 진리입니다. 왜냐하면 죽었다가 부활하신 분은 예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앞에 죽음은 산산조각 나고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절대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상대적인 진리가 아닌 것입니다. 변화될수 있는 진리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신 것은 영원한 진리요, 영원한 확실한 사실이요, 중간에 가서 변경될 수가 없는 절대진리인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진리를 얻었기 때문에 마음에 참 기쁨을 소유한 사람인 것입니다. 거짓이 아닌 진리속에 사니까 진리속에 하나님을 만나고 마음에 기쁨이 충만한 것입니다.
시편 16편 11절에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주님과 함께 계시므로 즐거움과 기쁨이 우리 마음속에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온 세상은 악한 자에게 속하였다고 요한일서 5장 19절에 말하므로 마귀의 미혹에 빠져 있습니다. 세상은 탐욕으로 미혹되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식욕, 성욕, 명예욕, 물욕, 권력욕 등의 노예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탐욕에 끌려가면 절대로 잘못되어 갑니다. 나중에 가시밭을 지나고 지옥의 길로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9절로 11절에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들은 길과 진리를 발견한 사람인 것입니다. 참된 삶을 예수님 안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증명되지 않은 가르침의 사람들이 많이 미혹되어 있습니다. 이길로 가면 산다. 이 길로 가면 안전하다. 이 길로 가면 참된 길이라고 하지만 증명되지 않았어요. 모두다 그 길로 가서 산다는 증명을 하지를 못했습니다. 그 증명은 뭡니까? 죽었다가 살아나야 증명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길을 가도 진실로 천국 영생의 길로 간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죽었다가 부활해야 확실한 증거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지 못하는 가르침은 모두다 이 세상에서 끝나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예수님이 말씀한 것은 예수님이 직접 죽었다가 살아났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믿으면 죽어도 살아난다. 증명하시오. 내가 죽었다가 사흘만에 살아났다. 어때? 할말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한사람치고 증명하지 못한 가르침은 거짓되고 헛된 미혹의 가르침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유명한 프란시스 쉐퍼 박사가 스위스의 라브리에서 세계의 지성인들이 모인 가운데 이 시대의 방향과 믿음의 갈 길을 제시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19세기에 일어났던 가장 커다란 비극은 사람들이 절대 가치를 버린 것이다. 그래서 현대인은 절망의 선 밑으로 떨어졌다." 절대가치, 하나님은 절대 가치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절대 가치인데 하나님도 계시지 않는다. 예수님도 계시지 않다. 절대 진리는 없다. 진리는 언제나 상대적이다. 이렇게 하므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완전히 길을 잃어 버리고 진리를 잃어 버리고 방황하게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19세기 이전의 사람들은 절대로 옳은 것과 절대로 그른 것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19세기에 들어와 사람들이 '절대 가치'를 의심하면서 더욱 깊은 절망의 늪으로 빠져들어가고 만것입니다. 절대적인 가치가 없기 때문에 절대적인 옳은 길도 없고 절대적으로 믿을만한 진리도 없다고 말하므로 모든 사람은 방황하고 허우적이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라는 절대 진리를 버리고 절망적인 인간이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인간의 절대 절망은 오직 예수님을 만나야 절대 소망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어두움은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절망은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죽음도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영원히 빛과 영광만 가득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절대진리가 있습니다. 절대적인 길이 있어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은 우리가 살아가는 절대적인 길이요, 어두움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 진리인 것입니다. 죽었다가 부활하셔서 증명하신 절대 진리요, 상대적인 진리가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생명의 성령을 받아서 성령의 생명으로 현재와 내일을 삽니다. 하나님의 생기를 받아서 사는 삶이 얼마나 좋습니까? 여러분 시들어져가는 나무나 풀이 비가 오면 생기가 발랄하지 않습니까? 우리속에 세상으로 시들어진 우리 인생에 성령이 오셔서 생기가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9절로 20절에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되 풍성히 주시는 것입니다.
김춘근 박사가 쓴 「Why Me?」라는 책에 보면 그가 하나님을 만나 변화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단돈 200불을 들고 미국으로 유학을 건너가 30대 초에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고, 페퍼다인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4년 만에 최우수 교수상을 받은 한국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명예도 잠시, 37세라는 젊은 나이에 간경화와 간염으로 일년 안에 죽을 것이라는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는 주저앉아 처절하게 울부짖었습니다. "오 갓 (Oh~ GOD!) 와이 미(Why me)? 왜 하필이면 접니까? 무엇을 얼마나 잘못했다고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 젊은 나이에 처자를 두고 죽어야 합니까? 왜 구태어 납니까?" 그러나 절망 중에 문득 '인간을 창조하시고 또 정말 나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내가 왜 죽어야 하는지, 나의 병을 고쳐서 다시 살게 하실 수는 없는지는 대답할 수 있는 분이 아니겠느냐.' 하나님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어차피 죽을 몸 하나님께 매달리자. 응답 받기 전에는 절대로 산을 내려오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산에 올라가서 조그마한 집을 빌리고 그곳에 머물면서 결사적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이미 죽음이 확정된 그 처지에서 살길은 하나님 찾는 길밖에 없기 때문에 타협할 수가 없습니다. 전심전력으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기도 중에 자신의 입술을 통해 하나님이 이렇게 예언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육체적으로는 네 피 속에 있는 독소 때문에 죽어 가지만, 진정 네가 영혼 속에 있는 독소 때문에 죽어 가는 것은 모르느냐?" 순간 김춘근 박사의 눈앞에 지금까지 그가 지었던 모든 죄가 영화와 같이 펼쳐졌습니다. 그는 엎드러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지은 죄목을 무려 52페이지에 달할 정도로 적어서 믿음 생활 22년 동안, 자신의 뜻대로 살아왔던 삶을 처절하게 회개했습니다. 밤을 새우고 회개하며 새벽녘이 되자 환상 중에 예수님이 흰옷을 입고 광채를 내고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꼭 껴안고 등을 어루만져 주시면서 "내가 너를 용서한다. 내가 너를 용서한다. 그리고 내가 너를 용서한다"라고 세번 말씀하셨습니다. 김춘근 박사는 이 날을 인생의 분기점으로 삼고 예수님을 위해 살기로 결단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김춘근 박사를 용서하실 뿐 아니라 간암에서 완전히 고쳐주셨습니다. 이후에 김춘근 박사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그를 '알래스카의 요셉'이라고 불렀습니다. 현재 그는 JAMA(Jesus Awakening Movement for America, 미국을 위한 예수각성 운동)의 대표자로서 미국과 한국청소년들의 신앙과 도덕성 회복 운동을 위해 청년들을 변화시키는 일에 전심전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생명의 역사 아닌 것입니까? 예수님을 만나면 종교를 만나는 것이 아니고 철학을 만나는 것이 아니고 생명을 만나는 것입니다. 영혼의 죽음을 변화시켜줄뿐 아니라 육체적인 죽음에서까지 건져 주셔서 김춘근 박사같은 생명의 길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가 곧 너의 길이요, 너의 진리요, 너의 생명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절대적인 길이요, 절대적인 진리요, 절대적인 생명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깨어진 몸을 먹고 흘린 피를 마실 때 우리는 절대적인 길을 먹고 마시고 절대적인 진리를 먹고 마시고 절대적인 생명을 먹고 마셔서 예수님이 내 안에 내가 예수님 안에 하나가 되는 위대한 삶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17세기의 파스칼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어져 있다. 그 구멍은 세상적인 쾌락이나 물질이나 명예나 권세로 채울 수가 없다. 그럴 경우 오히려 실망과 불만족과 허무만이 남게 된다. 오직 그 구멍을 채울 수 있는 것은 끝없이 부어 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뿐이다. 그래서 인간은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실 때에 진실한 만족을 느낄수 있다." 고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야만 인간의 절대절망이 예수님의 절대 희망으로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절망의 질그릇인 내 속에 예수님을 모심으로 거듭나서 소망으로 넘치는 삶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발견했습니다. 나는 누구냐. 도대체 나는 누구냐. 그 부르짖음과 울부짖음속에 우리는 해답을 발견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길과 진리와 생명을 발견한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여!
사람은 누구든지 내가 누구냐를 질문합니다. 아무리 총명한 침팬지도 자기가 누군가를 질문하지 않습니다. 짐승은 자기를 잃어 버리지 않았습니다.그러나 사람은 아담과 하와 이후 죄를 짓고 자기를 잃어 버렸기 때문에 항상 자기를 찾는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이 질문이 모든 종교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종교가 참된 종교는 아닙니다. 증명된 종교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는 길을 찾고 진리를 찾고 생명을 찾았습니다. 내가 누구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될 때 나는 이러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나는 이제 길을 찾은 자요, 나는 진리를 얻은자요, 나는 생명을 얻은자가 된 것을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영광받아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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