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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기자의 간증

시편 조용기 목사............... 조회 수 1813 추천 수 0 2009.10.12 23:4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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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시118:5~7 
설교자 : 조용기 목사 
참고 : 2006년 9월 10일 주일3부 설교 
내가 고통 중에 야훼께 부르짖었더니 야훼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야훼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야훼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서론]
저는 ‘시편 기자의 간증’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구원을 체험한 사람은 각자 자기의 은혜 받은 간증이 있습니다. 거창스러운 간증이 될 수도 있고 보통 간증이 될 수도 있지만 주님을 만난 사람마다 변화를 얻은 간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평탄한 신앙생활보다 거센 삶의 풍랑을 당한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역사를 더 생생히 체험하고 간증할 수 있습니다. 고난은 그 당시에는 괴롭지만은 지나고 보면 큰 은혜의 증거가 됩니다.
세계적인 역사학자인 아놀드 토인비 박사는 역사의 발전 과정을 ‘도전과 응전’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습니다. 한 문명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도전, 즉 적당한 자극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우리 조상들도 “어릴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했고, 영국 속담에도 “항상 햇빛만 비치면 사막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고난은 그 당시에는 괴롭지만 지나고 보면 큰 은혜의 증거가 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시편을 기록한 시편 기자는 큰 고통 중에서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계시를 받아 이 시편을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증거 했습니다.

[본론]
1. 야훼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그는 말하기를 그가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께 부르짖게 되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사람이 평안하면 기도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고통이 적으면 적게 기도합니다. 고통이 많으면 혼신의 힘을 다해서 부르짖게 되는 것입니다. 육체적, 환경적 고통은 결과적으로 마음의 고통으로 집결되는 것입니다. 고통은 삶의 터전, 명예, 생명을 빼앗길 것이라는 마음의 불안과 공포로 나타납니다. 극심한 마음에 불안과 공포가 다가올 때는 온 생명이 지옥 불에 타는 것 같은 괴로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시31: 9에 “야훼여 내가 고통 중에 있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근심 때문에 눈과 영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고통이 다가와서 마음에 근심이 오면 눈이 다 어두워지고 영혼이 좌절과 절망에 휩싸이고 몸에 병이 들고 쇠약해진다는 것입니다. 고통이 우리에게 가져오는 엄청난 타격을 시편기자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절망적인 고통에 처하게 되면 사람은 부르짖게 되는 것입니다. 그냥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있는 힘을 다해서 부르짖습니다. 사람들이 흉을 보고 손가락질을 해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내가 죽게 되었으니 내가 이 고통에서 건짐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절망의 고통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느냐. 하나님만이 우리를 건질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고통 중에 몸부림치다가 파멸당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아무리 신앙의 잠에 들었다 할지라도 고통은 잠을 깨워 일으키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종종 적고 큰 고통을 당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것은 고통이 우리를 신앙의 잠에서 깨워 일으켜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만들어주는 효과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러므로 야훼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손을 내밀어 하나님의 손을 붙잡으려고 애를 쓰고 밤중에도 잠을 자지 않고 주님을 찾는 것은 고통이 우리에게 갖다주는 경고요, 깨달음인 것입니다.
시40:17에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
벧전 5: 7에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했으니 주님은 고통 중에 빠진 사람들을 건지는 능력을 가지고 계시고 또 건지려고 원하시는 소원을 가지고 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고통 때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 고통을 통과 할 수도 있고 고통에서도 건짐을 받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한국의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은 일제시대 신사참배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여러 번 감옥에 갇히셨습니다. 한 번은 다시 잡혀갈 것을 예상하며 기도제목을 말씀하셨는데, 그 중에는 이러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나의 기도제목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해주시는 주님이 내게도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죽음의 권세야말로 사탄의 최후의 무기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의 권세를 꺾고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셨습니다. 나의 기도의 힘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께서 죽음을 이기셨다면 나도 그분을 의지하여 얼마든지 죽음의 권세를 이길 수 있습니다. 죽음이 다가옵니다. 순교를 한 성도들이 많습니다. 일제 36년 동안에 신사참배를 거역하다가 감옥에 갇히고 모진 고문을 당해서 죽은 성도들이 많습니다. 이 죽음을 각오하고 신사참배를 거역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순교하는 것이 보통일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신학교 다닐 때 학생시절에 뭣도 모르고 기도시간에 “하나님이여, 순교하겠습니다. 순교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오금이 저리는 말인 것입니다. 순교가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순교라는 그 어려운 고통은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힘을 주시지 않고는 결코 받을 수 없는 은사인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님 같은 분은 하나님의 특별한 택함을 받고 순교의 은사를 받은 분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주목사님은 두 번째 기도제목을 “끝까지 고난을 견딜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한순간 받는 고통은 쉽게 견딜 수 있지만 오래도록 받는 고통은 정말 견딜 수 없습니다. 그는 그러나 그런 오랜 고통이 내려질지라도 끝까지 참을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고는 절대로 최후의 승리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고통이라는 것이 한 순간적으로 닥치는 것은 참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또 내일도 계속해서 고통이 다가올 때 나중에는 그 고통이 몸서리치게 되는 것입니다. 지겨워지고 고통당하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이러한 계속되고 끈질긴 고통에 대해서 저항하고 이길 수 있는 힘도 하나님이 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힘을 안주시면 고통에 깨어지고 두 손 들고 마는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어떠한 권세 앞에서도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여 부르짖었고 그는 영광스러운 순교의 관을 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나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어 고통을 감례하고 순교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 없이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육체적, 환경적 고통은 결과적으로 마음의 고통으로 집결됩니다. 그러나 지옥의 고통에서 건져주실 권세는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므로 우리가 고난당할 때 하나님께 부르짖어 교통하는 것입니다. 고통 중 기도는 목 졸린 짐승과 같은 부르짖음인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기도할 때 밤중에 찾아온 친구를 위해서 떡을 구하는 심정으로 기도하라 했습니다. 한 사람이 밤중에 친구가 찾아왔는데 헐벗고 굶주렸습니다. 먹일 떡이 없습니다. 이웃집은 부자요, 떡이 있습니다. 밤중에 이웃집에 가서 문을 두드리며 떡 세 덩이만 빌려달라고 하니까 그 안에서 대답하기를 “나와 애들이 이미 일을 다 끝마치고 잠자리에 들어와서 자고 있으니 지금 일어나서 떡을 줄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떡을 구하는 이 사람은 계속해서 맹렬하게 문을 두드리며 “떡을 달라. 떡을 달라. 떡을 빌려 달라. 떡을 빌려 달라. 떡을 빌려 달라.” 강렬하게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그 강청함으로 인하여 주인이 일어나서 떡을 주면서 “당신이 친구이기 때문에 떡을 주는 것이 아니라 강청함으로 떡을 주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때 강청을 하는 것입니다. 아예 뒤로 물러가지 말고 강하고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짐승의 목을 조르면 고함을 치고 몸부림치지 않습니까? 고통에 목이 졸릴 때 우리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강청하고 주의 도움을 간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주님께서는 기도할 때 불의한 재판관에게 와서 부르짖는 과부와 같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과부는 도와주는 사람이 없는 외롭고 쓸쓸한 분인 것입니다. 어려운 일을 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 불의한 재판관에게 와서 자기를 위해서 재판을 해달라고 하니 불의한 재판관이 들어줍니까? 돈도 없고 지위도 없고 빽도 없고 명예도 없는 한 여인을 위해서 자기가 스스로 재판을 해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부인은 끊임없이 와서 부르짖는 것입니다. 봄에 꽃이 필 때 부르짖은 그가 여름에 뜨거운 햇빛 아래서 부르짖고 가을 낙엽이 질 때 부르짖고 겨울에 눈이 올 때 눈을 덮어쓰고 부르짖었습니다. 주야로 부르짖으니 나중에 재판관이 말하기를 “내가 번거로워 견딜 수가 없으니 이 여인의 호소를 들어 주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두 가지 예를 들어서 기도할 때는 강청하는 기도와 번거롭게 할 정도로 오랜 인내력을 가지고 부르짖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여 주시고 고통에서 풀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부르짖게 만들고 우리가 강렬하게 부르짖고 끈질기게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또 반드시 고통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시116: 3~ 4에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스올의 고통이 내게 이르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내가 야훼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야훼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이와 같이 주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끈질기게 기도하면 야훼께서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이 시편기자는 말하기를 “내가 고통 중에 야훼께 부르짖으니 야훼께서 응답하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르짖는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렘33: 3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오늘날 시대에 큰 변화는 사람들이 부르짖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조용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소곤소곤 기도하지 부르짖고 기도하고 애타게 하나님을 찾지 않기 때문에 옛날 사람들이 체험한 그 위대한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조용하게 묵상하라. 조용하게 기도하라고 말하지 아니하지요.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고통이 없는 사람은 조용하게 기도해도 좋습니다. 묵상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내가 지금 고난 중에 있으면 하나님께 부르짖고 몸부림쳐 기도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시50:15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귀가 어둡지 않는데 왜 고함치고 부르짖느냐.”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귀가 어둡지 않지만 하나님은 부르짖는 기도를 하고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법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환난을 당한 때는 고통 중에서 부르짖으면 내가 응답하겠고 너를 건져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건져 나오는 신앙체험을 하고 간증을 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시34: 6에도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야훼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체험을 돌아보더라도 부르짖어 기도한 것을 하나님이 언제나 응답해 주었습니다. 저는 저의 긴 목회생활 중에서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을 많이 당했습니다. 보통 때는 부르짖지 않습니다. 그냥 조용조용히 기도합니다. 조용조용히 찬미합니다. 그러나 고난이 다가오면 부르짖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고난이 가벼울 때는 가볍게 부르짖지만 고난이 심하면 외마디 소리를 하고 하나님께 몸부림을 치며 눈물을 흘리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기억하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께 몸부림치고 눈물을 흘리며 외마디 소리를 외친 기도는 하나님이 응답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말하기를 “그가 나를 넓은 곳에 세워 주셨다.”고 한 것입니다. 고통은 좁은 감옥과 같습니다. 고통은 시련과 고난의 감옥 속에 갇혀서 옴짝달싹 못하고 고난에서 부르짖는데 부르짖으면 주님께서 감옥 문을 여시고 넓은 곳에 세워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고통 중에 야훼께 부르짖었더니 야훼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워 주셨다. 마음의 평안을 주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불안과 공포로 숨 막힌 마음으로 평안으로 넓혀 주시는 것 얼마나 좋습니까? 고난당했을 때 마음이 불안하고 고통스러우면 숨이 탁탁 막히고 사는 것이 지옥 같습니다. 어떤 때는 죽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할 때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자살하는 사람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살하지 않습니까? 인생살이가 편하지 않습니다. 고통이 다가오고 심해지면 그 육체적인 환경적인 고통보다도 마음이 당하는 번뇌와 고통이 더 격심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이 마음을 격심한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평안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 때 금보다 은보다 더 귀한 것이 마음의 평안인 것입니다. 지위나 명예나 권세나 돈보다 더 귀한 것이 마음에 평안인 것입니다. 평안이 가장 큰 축복이고 행복의 가장 근원이 마음에 평안에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안하게 잠자고 평안하게 깨어나는 것을 평범한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감사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매일 식사 기도할 때 “하나님 평안을 주시옵소서. 이 식사에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그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평안을 잃어버리면 인생살이가 지옥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평안이 있으면 모든 일에 안정한 마음을 갖고 행복을 추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시29:11에 “야훼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야훼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평강은 복인 것입니다. 복중에 복이 평안한 마음인 것입니다. 돈이 복이 아닙니다. 지위나 명예나 권세가 복이 아닙니다. 있다가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평안이 있어야 복이 되는 것입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평안이 없으면 돈이 아무 소용이 없이 티끌과 먼지 같습니다. 권세가 아무리 많아도 평안이 없으면 그 권세가 행복을 조금도 갖다 주지 못합니다. 평안 이것은 야훼께 부르짖어서 하나님이 주시는 위대한 선물인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잠시 있다 사라집니다. 하나님이 주신 평안을 폭풍우 가운데도 마음이 잠잠하고 평안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안이 군대와 같이 내 마음을 점령하고 둘러 진 쳐서 평안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요16:33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시므로 승리로써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마음에 평안을 주시면 곧장 환경의 절망에서 소망의 넓은 곳으로 길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이 마음에 평안을 주시고 그 다음에 가정과 사업과 생활에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마음속에서 먼저 역사하시고 그 다음에는 우리 환경에 역사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환경에 평안이 오면 내 마음이 평안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예수 믿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 부르짖어 기도해서 마음에 불안, 공포가 사라지고 마음에 하나님의 평안이 점령하면 그 평안을 따라 우리가 기도할 때 가정이 변화되고 환경이 변화되고 생활이 변화되고 평안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은 내 마음에 평안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마음의 확신과 평안이 있으면 불을 통하고 물을 통해도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같이 계시는데 불 위에 나를 어떻게 사를 수 있으며 물이 어찌 나를 음모할 수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마음을 점령했을 때 하나님이 임재로 오는 평화는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평안이 되는 것입니다.
시116: 8에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고 말한 것입니다.
평안이 오면 그 평안과 함께 기도할 때 주님은 능력을 베풀어 주셔서 오늘 시편 기자가 말한 것처럼 사망에서 눈물에서 넘어짐에서 건져주시는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평안을 가지면 환난이 변화여 천국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일제 시대에 주남선 목사님은 신사참배에 반대하다가 투옥되어 감옥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형(刑)을 마치고 나와서 "나는 감옥에 있는 동안 오로지 주님만 만나서 너무나 좋은 시간을 가졌는데, 여러분은 바깥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이런 거꾸로 된 인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비록 감옥에 갇혔지만 주님이 같이 계시므로 너무나 평안한 가운데 행복한 대화를 했다는 것입니다.
전영창이라는 분 역시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감옥에 들어갔는데, 감옥에서 낙심하고 좌절하고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이 평안을 주셔서 열심히 영어를 공부해서 감옥에서 나왔을 때는 영어를 잘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여권 1호를 받아서 미국 유학을 떠나 하나님 앞에서 훌륭한 사람이 된 기억이 있습니다. 환경의 절망이 반드시 우리에게 실패만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면 마음의 평안을 누릴 뿐 아니라 오히려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두려움 없이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 다가오는 큰 고난이 부르짖으면 큰 평안을 체험하게 만들고 평안가운데 더 나은 우리의 삶을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르짖는 자는 고난과 역경이 우리에게 더 평안한 삶을 가져오는 위대한 기회가 된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부르짖지 아니하면 역경을 우리를 파멸시키지만 부르짖으면 역경은 우리에게 봉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2.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야훼께서 내 편이 되신다. 하나님이 내편이 되시니 내가 두려워하지 않겠다. 사람이 내게 어찌하겠느냐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어떻게 해서 내편이 되십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이 자기들 편이 되었다는 이유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맺었을 때 모든 가정의 남자들은 할례를 받으라고 했었습니다. 양피 가죽을 베어서 할례를 받으면 하나님과 언약 맺은 증거를 몸에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할례 받은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확신을 가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하나님 위에 늘 같이 계신다는 보증을 얻은 것입니다.
창17:10에 보면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람은 언약을 어겨도 하나님은 언약을 어기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에 언약을 가지고 있습니다.
눅22:20에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우리에게 주시고 이것이 너희와 맺는 새 언약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할례를 통하여 언약을 맺었지만은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통해서 언약을 맺은 백성인 것입니다. 할례의 언약보다도 수천만 배 더 귀하고 영광스러운 언약인 것입니다. 할례를 받은 언약을 통해서도 강하고 담대했거든 하물며 예수님의 보혈을 믿고 보혈로 언약 맺은 백성들이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갖지 못하면 부끄러운 일이 되고 말 것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은 할례의 언약을 굳게 믿고 담대했습니다. 다윗 같은 초립동이 17살 정도밖에 안되었는데 어떻게 골리앗을 대항해서 싸우러 나가겠습니까? 그는 하나님을 직접 본 것도 없고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지 않았지만 그의 몸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태어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아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으므로 하나님은 언약을 어기지 않고 항상 같이 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같이 계시므로 골리앗을 이길 수 있다고 그는 확신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환경적으로 볼 때 골리앗은 대장부요, 다윗은 소년이었습니다. 골리앗은 용감한 군인이요, 다윗은 목동이었습니다. 인간적인 계산으로는 대상이 되지 않고 대적이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골리앗을 대적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그는 하나님이 나와 언약 맺어서 하나님이 같이 계시므로 하나님과 나와 함께 나가면 골리앗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삼상17:36에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할례 받지 않았으니 하나님과 언약을 맺지 않았고 하나님이 같이 계시지 않는 사람인데 아무리 대장부라도 나는 하나님과 언약 맺은 사람이요, 하나님이 같이 계시므로 하나님과 같이 나가면 골리앗은 문제없이 이길 수 있다는 강하고 담대한 신앙을 가지고 나가서 골리앗을 쳐서 이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오늘날 하나님이 내편이 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와 언약을 맺었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할례의 언약을 통해서 이스라엘과 같이 계시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언약을 통하여 여러분과 나와 같이 계신 것입니다. 좋을 때나, 어려울 때나, 고통당할 때나, 환난 당할 때나 언약 맺은 하나님은 언약을 어기지 않고 우리와 항상 같이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와 언약 맺어 우리 편이 되셨으면 우리도 열심히 하나님 편에 서도록 노력해서 믿고 순종하며 하나님을 따라야 될 것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편인데 내가 자꾸 떠나가면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이 언약을 통해서 내편이 되었으면 나는 더욱 힘써서 하나님 편에 서도록 순종하고 믿어야 될 것 것입니다.
성경 시91:14에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언약 맺은 백성은 하나님이 건져 주시고 높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여 주셨으니 어떠한 어려움에 처해도 하나님이 눈에 안보여도 하나님 음성을 못 들어도 나는 보혈을 믿음으로 하나님과 언약 맺고 하나님이 나와 같이 계시므로 하나님이 건져 주실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높여 주실 것은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28: 7에 “야훼께서 너를 대적하기 위해 일어난 적군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라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약 맺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 주셔서 성령이 항상 우리와 같이 계십니다. 주님께서 요14:18에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또한 요14:16에서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라고 한 것입니다. 성령께서 바람같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 안에 계시고 성령을 통해서 아버지와 아들이 우리와 같이 계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지 않고 버리지 않고 함께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언약 맺은 백성인 것을 확실히 알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옆에 계신 분들에게 당신은 언약 맺은 백성입니다. 그렇게 말해 주십시오. 우리는 하나님과 언약 맺은 사람으로 고아와 같이 버림받지 않았습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하나님이 같이 계십니다. 언약 맺은 사람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야훼께서 내 편이 되시니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요일 4: 4에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언약 맺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므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는 세상을 이길 수가 없어요. 내 힘으로 다가오는 염려와 근심, 불안, 초조, 절망을 어떻게 극복을 합니까? 미쳐 날뛸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언약을 맺었기에 하나님이 같이 계시므로 넉넉히 이길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기근이냐 죽음이냐 칼이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 힘으로 못 이깁니다. 내 힘으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언약 맺은 하나님이 같이 계시면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면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기적적으로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초자연적으로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네덜란드의 유명한 부흥사였던 코리 텐 붐 여사는 나치 수용소에서 무려 40일 동안이나 독방에 갇힌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죄수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독방에 갇히는 것입니다. 독방이 앉아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오그리고 40일 동안 앉아있는 것입니다. 머리도 움직이지 못합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독방에 24시간 쪼그리고 갇혀있는 것이니 대게 40일 독방에 갇히면 정신병자가 되어 나옵니다. 맑은 정신으로는 그 고통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정신이상자가 되어 나옵니다. 코리 텐 붐 여사도 독방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는 얼마나 힘이 들든지 나중에는 믿음도 사라지고 인내도 사라졌습니다. 그는 벽에 머리를 기대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이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는 이길 힘도 없습니다. 믿음도 다 사라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때 마침 눈앞에 개미 한 마리가 기어가다가 바닥의 물을 피해서 벽 옆에 난 조그마한 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코리야, 저 개미가 보이느냐? 개미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느냐?” “네, 하나님! 작은 틈으로 피해서 가고 있어요.” “그래, 너는 지금 피할 곳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바로 너의 피난처니라. 이제 나를 향해 오너라. 내가 너를 품어 주마. 너는 내 속에서 안전하게 보호함을 받을 수 있으리라. 나를 바라보라.” 그래서 코리 텐 붐 여사는 그 독방에서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저 개미가 틈에 들어가서 자기를 피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품에 내 자신을 맡기니 나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그러자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코리 텐 붐 여사의 마음속에 임하였습니다. 놀라운 평안이 마음을 점령해 버렸습니다. 형언할 수 없는 마음의 행복과 기쁨이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하루하루가 평안이요, 기쁨이요, 행복이었습니다. 독일 간수들은 코리 텐 붐 여사가 40일 만에 미칠 줄 알았는데 더 마음이 평안하고 얼굴이 화창하고 기쁨이 충만해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같이 계셔서 할 수 없는 일을 해주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요. 하나님이 내편이 되신다는 것은 어떠한 역경도 이길 수 있는 힘을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편 되심을 알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어떤 두려움도 이길 수가 있습니다. 믿음은 두려움의 치료제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하지 말고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자기를 의지하면 두려워할 수밖에 없지요. 내가 무슨 힘이 있습니까? 지혜도 총명도 모략도 재능도 지식도 모자른 내가 어떻게 운명과 환경을 이길 수 있습니까? 더구나 환경을 바라보면 태산 같은 문제가 부딪히고 큰 파도가 닥쳐오고 고통이 다가오는데 어떻게 내가 마음에 평안을 이길 수가 있습니까? 어떠한 것보다 크고 만유보다 위대하신 하나님이 내 편에 계신 것을 바라볼 때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편이 된다는 것 이것 얼마나 좋습니까? 하나님이 내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요.
성경 시27: 1~ 2에 “야훼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야훼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 하리요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 중심을 점령하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내 중심에 내가 앉아 있으면 벌벌 떨지요. 내 중심에 세상이 들어앉아 있으면 세상이 나를 점령하기 때문에 내가 벌벌 떨지요. 내 중심에 하나님이 점령하고 있으면 내가 두려워 할 것 없는 것은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 나의 중심에 나를 점령하고 계시므로 하나님이 나를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내 중심으로 살면 내 생각과 내 말을 하고 삽니다. 세상이 들어오면 세상 생각, 세상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오시면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삶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돈을 섬기거나 지위나 명예를 섬기기 위해서 만들어진 인생이 아닙니다. 자기 쾌락을 위해서 만들어 진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근본적으로 우리 지으실 때 우리를 통하여 영광 받고 찬양받기 위해서 지음을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 섬기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영광 돌리고 하나님이 나와 같이 계시면 내가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일 4:18에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하나님이 내속에 계시면 두려움이 쫓겨나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수 1: 9에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야훼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두려워 안할 래도 나 혼자는 두려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어릴 때는 어머니가 전지전능한줄 알았습니다. 우리 집에서 골짜기를 내려가서 논이 있는 들에 가면 우물이 있어요. 그 우물에 물을 길러 옵니다. 가끔가다가 어머니께서 물을 길러 오라고 하면 나 혼자 길을 걸어서 우물에 물을 길러 가면 굉장히 겁이나요. 귀신이 나올 것 같기도 하고 무서운 짐승이 나올 것 같기도 하고 새가 퍼드득 하면 기절초풍을 합니다. 그러나 어머니하고 같이 가면 마음이 편안해요. 짐승이 나와도 겁나지 않고 새가 퍼득거려도 겁나지 않고 귀신이 와도 우리 어머니는 이긴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릴 때는 어머니가 전지전능한 줄 알았습니다. 크고 보니 그렇지 않은데, 어머니가 같이 계셔서 마음이 평안하고 담대한데 하나님이 내편이 되시면 얼마나 강하고 담대할 수 있는 것입니까? 이 시편 기자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하나님은 내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리니 사람이 어찌할꼬. 사람도 자연도 나를 어찌 건드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학자 뱅겔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 외의 것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외의 모든 것을 두려워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섬기면 다른 것이 무섭지 않아요.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만사를 두려워하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요 라고 시편 기자가 말한 것처럼 여러분 두려움의 근원이 환경에도 있지만 사람이 가장 두렵습니다. 우리 할머님이 어릴 때 나보고 늘 하던 말이 “야, 네가 크거든 머리 검은 짐승을 두려워하라.” 그래서 머리 검은 짐승이 뭐냐? 나중에 알고 보니까 머리 검은 짐승은 사람이라. 사람이 가장 두렵다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산길을 가다가 여러분 짐승을 만나는 것은 별로 두렵지 않아요. 사람을 만나는 것이 두렵습니다. 요사이는 친구들도 서로 이해상관으로 싸우다가 죽이지 않습니까? 아파트 위에 있고 아래 있고 둘이다 똑같은 택시 기사인데 서로 평소에 친한데 소음이 들린다고 승강이 하다가 서로 멱살 잡고 싸우다가 칼로 찔러 죽여 버렸습니다. 친구도 화가 나면 죽여 버려요. 남편이 보험금 6억을 타려고 아내와 자식을 집에 넣어 놓고 불을 질러서 죽여 버렸습니다. 남편도 믿을 수가 없어요.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것 허다하지요. 요사이는 누가 믿어요? 부모도 믿을 수가 없고 자식도 믿을 수가 없고 남편과 아내와 친구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모두 다 두려움의 대상인 것입니다. 사람이 너무나 갑박한 시대에 살므로 자기를 통제하지 못하므로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오직 우리가 믿을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하고 언약 맺으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면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성경에는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희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시리라. 저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하면 사람도 내게 어찌할 수 없고 환경도 나를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같이 계신다는 것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래서 시편 기자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내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요. 나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히13: 5~ 6에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따라 말씀하세요.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요. 하나님이 내편이신데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요. 큰소리해도 별 볼일 없습니다. 하나님이 내편이시므로 사자와 곰도 내 앞에서 혼비백산하고 물러갈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성경에 말하기를 “내가 너에게 능력을 주노니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람보다 크신 하나님이 계시니 안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느부갓네살 왕은 바벨론 대왕으로써 생사여탈권을 가진 천하의 대왕이었습니다. 어마어마한 권력을 가진 그분이 자기의 신상을 만들어서 평온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그 제막식 날 천하만국의 문무백관들을 다 모아서 음악이 연주될 때 그 신상에 절하라고 했는데 바벨론도의 관원이 있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유대인 관원들은 결심하고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절을 하는데 이 세사람은 절을 안했습니다. 성경에 우상에 절하지 말라는 그 명령을 쫓아서 꿋꿋이 서있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이 분도막심해서 저들을 부리사 “네가 어찌 내 명령을 거역하느냐? 다시 한번 기회를 줄 테니까 음악이 연주되면 우상에 절을 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일곱 배나 되는 풀무 불에 던져서 태워 죽이겠다.” 그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말했습니다. “왕이여, 왕이 우리를 풀무 불에 던지면 하나님이 건져 주시겠거니와 건져 주시지 아니하실지라도 우상에는 절하지 안겠나이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무슨 빽을 믿고 그런 말을 했습니까? 그들은 만군의 야훼 하나님이 자기편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느부갓네살을 두려워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느부갓네살 왕이여 당신이 불에 던질지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건지실 것이요, 안 건져 주셔도 섬기지 않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분도막심해서 일곱 배나 되는 풀무 불에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던져 넣었을 때 제 네 번째 사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불의 세력을 멸하시매 묶은 밧줄만 타고 그들은 조금도 상처를 입지 않았습니다. 느부갓네살이 감동하고 놀래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불러내어서 그들을 더 높은 지위에 올리고 느부갓네살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사람보다 크신 하나님이 계시니 안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과거 대서양에서 조난당했던 런던 호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배에는 300여 명의 승객이 타고 있는데 배가 암초에 부딪혀서 파손되어 물이 쏟아져 들어오니 300명의 승객들이 서로 살겠다고 밀치고 밟고 넘어지고 아비규환의 생지옥이었습니다. 보트를 내려놓았는데 서로 타겠다고 밀고 당기므로 보트가 뒤집힙니다. 그럴 때 저 삼등실 한구석에서 조그만 한 소녀가 가냘픈 목소리로 찬송가를 불렀었습니다. 그 노래 소리는 약하지만 강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했습니다. 찬송가 439장이었습니다. “만세 반석 열린 곳에 내가 숨어 있으니 원수 마귀 손 못 대고 환난 풍파 없도다. 만세 반석 열린 곳에 내가 편히 쉬리니 나의 반석 구주 예수 나를 숨겨 주소서.” 어린소녀가 그 아비규환의 절규 속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이 찬송을 부르니까 이 찬송에 감동된 사람들이 모두다 찬송을 따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시고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그들을 점령하자 불안과 공포에서 평안을 주었습니다. 밀고 당기고 짓밟던 그 무질서가 사라지고 모두 다 평온하게 서서 차례를 따라서 구명보트에 타고 마음을 조용하게 우왕좌왕 안하니까 물이 차여지는 보트도 가라앉기 전에 구조선이 와서 한사람도 빠짐없이 다 구조를 받게 된 것입니다. 이 소녀 한 사람이 찬송을 불러서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두려워하지 않게 되자 도움을 받고 생명을 구할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두려움은 원수가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도구인 것입니다. 두려워하면 패배합니다. 두려워하면 마귀의 밥이 되는 것입니다. 욥이 뭐라고 했습니까? 내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오고 내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이 미쳤다고 말한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기 전에 우리 마음속에 격렬한 두려움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환경을 통하여 사람을 통하여 우리에게 두려움을 갖다 주고 큰마음에 번뇌와 고통으로 좌절하고 절망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이 내편인 것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요. 하나님이 내편인 것을 알고 마음에 평안을 가지고 안심하면 어떠한 어려움에도 우리는 승리하고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3. 야훼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하나님이 내편이 되어서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볼 것이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원수들이 많습니다. 우리를 완전히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고 파멸시키려는 원수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신 것을 알고 하나님께 의지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싸워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기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시56: 9에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들이 물러가리니 이것으로 하나님이 내 편이심을 내가 아나이다 이같이 아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위하심 이니이다.”
하나님이 내편이시면 원수들이 물러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평안하게 잘사는 것은 6.25때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대게 여러분은 6.25사변을 통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6.25사변을 중학교 때 당한 사람입니다. 그때 우리 한국은 한국을 지킬 힘이 없었습니다. 미국은 떠나가고 한국은 그때 군대조직이 엉성하고 무장도 일본 군인들이 남겨놓은 낡아 빠진 무기로써 무장을 했습니다. 그런데 최신무기로써 무장을 한 북한이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야크비행기를 앞세우고 중무장해서 내려오는데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6.25사변이 나자 사흘이내에 의정부와 서울이 함락되고 얼마 있지 아니하여 압록강에서 그들은 저 낙동강까지 점령하게 된 것입니다. 한국은 풍전등화가 되었습니다. 만일그때 UN군이 와서 도와주지 않았으면 우리는 오늘 다 김일성 수령, 김정일 장군님하고 굽신굽신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렇게만 살았나요? 전부 쪽박 차고 온 천하만국에 손 내밀고 밥 좀 달라고 부르짖는 비참한 국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세계에 무역11대국이 되어 오늘날 선진국 입구에 들어온 우리들이 된 것은 6.25때 안 죽고 살아남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것 왜 살아남았느냐.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셨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입니다. 우리의 무장이 우리를 건져준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1950년 6월 25일 오후 2시에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북한의 남침 소식을 듣고 이 문제를 UN 안보리에 회부했습니다. 뉴욕의 UN 본부에서 안보리 회의가 소집되었습니다. 당시 상임이사국은 미국과 자유중국과 소련, 프랑스, 영국 총 5개국으로 이 중에 한나라만 반대해도 UN군은 파견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국은 북한에 짓밟히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소련이 반대할 것 뻔합니다. UN 안보리 이사국 중에 소련이 들어있는데 소련이 북한을 시켜서 남한을 침공하게 했기 때문에 UN군이 한국을 방어하기 위해서 나가는 것을 반대할 것은 마땅한 일이지요. 당시 상황으로 보면 소련이 반대할 것은 너무나 명명백백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와 달랐습니다. 소련이 반대를 안했습니다. 희한하잖아요. 소련이 탱크와 비행기를 주고 탄약을 주고 대포를 주어서 김일성으로 하여금 한국을 침범하여 한국을 점령하게 만들어 놓고 UN 이사국에서 소련이 반대를 안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이 문을 닫으시면 열자가 없고 문을 열어 놓으면 닫을 자가 없습니다. 인간으로 상상할 수 없는 역사적인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6.25사변이 난 그 주간에 소련 스탈린이 휴가를 떠난 기간이인 것입니다. 휴가를 떠나도 독재자 스탈린이 보고를 받을 것인데 그때는 스탈린이 너무나 피곤했던지 엄명을 내렸습니다. “내가 휴가 가는 동안에 아무 놈도 전화하지마라. 전화하면 경을 칠 것이다.” 엄명을 내렸습니다. 스탈린이 휴가 간 동안에 6.25가 날 줄 몰랐는데 아무도 전화만 걸면 가만 안두겠다 했으니까 어느 사람의 명령인데 감히 순종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UN에서 급히 한국파병문제를 토의하기 위해서 안보리가 열렸습니다. 그런데 제이콥 말리크 소련대사가 발을 동동 구릅니다. 찬성표를 던질지 부표를 던질지 기권할지 스탈린의 명령을 받아야 되겠는데 스탈린이 “이놈아, 전화만 하면 가만 안 둔다. 한주일 휴가 동안에 가만히 있으라.” 그래서 할 수 없이 제이콥 말리크는 불참을 했습니다. 그러자 UN 안보리에서 한국파병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어 미국과 UN 16개국이 군대를 파견했기 때문에 한국이 살아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난 것입니다. 이 역사적인 사건을 통해서 볼 때 하나님은 우리 대한민국 편인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돕는 자 중에 거하시니 그러므로 우리를 미워하는 자가 보응 받는 것을 우리가 보리로다. 우리를 미워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보응하여 주셔서 UN 16개국을 보내어서 우리 한국을 절망적인 순간에 건져주신 것입니다. 풍전등화에서 건져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생각할수록 아찔한 것입니다. 도저히 인간으로 상상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나중에 UN군이 파견되고 난 다음에 스탈린이 노발대발하고 가슴을 쳤지만 자승자박입니다. 자기가 전화 걸지 말라고 해놓고 난 다음에 전화 안 걸었다고 호통 칠 수 없고 UN군은 파견이 되고 한국은 적화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역사를 통해서 보게 될 때 하나님은 우리 대한민국 편인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우리 편이면 지금은 얼마나 더 우리 편이겠습니까? 그때 우리 한국에 기독교 신자들이 백만도 안 되었는데 지금은 1,200만에 5만 교회에 10만 주의 종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100번이고 1,000번이고 우리 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 편이면 북한의 원자탄도 미사일도 장사포도 겁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머리털 하나라도 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참새 한 마리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찾을 것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께 의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고통 중에 야훼께 부르짖었더니 야훼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야훼께서 내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요. 하나님이 우리 대한민국편인 것을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하나님은 우리 개인, 개인, 우리 편이 되신 것을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다닐지라도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서 우리와 같이 계셔서 그 지팡이와 막대기로 우리를 안위해 주시는 것입니다. 내편에 계신 하나님은 지팡이를 통해서 길을 만들어 주시고 막대기를 가지고 우리를 보호하여 주시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에 평안을 가지고 할렐루야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녀도 하나님이 내편이니까 나는 이미 승리가 보장되어 있는 것입니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이렇게 다른 것입니다. 진리를 깨달은 자와 깨닫지 못하는 자가 이렇게 다른 것입니다. 아무리 주여, 주여! 해도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이 내편인줄 모르는 사람은 두려워 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여러분은 이 시편 기자가 계시한 이 말씀대로 하나님이 언약 맺어 내 편이 된 것을 알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시37:39~40에 “의인들의 구원은 야훼로부터 오나니 그는 환난 때에 그들의 요새이시로다 야훼께서 그들을 도와 건지시되 악인들에게서 건져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까닭이로다.”고 말했습니다.
시127:1에서는 “야훼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야훼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야훼께서 집을 짓지 아니하면 집짓는 자의 수고가 헛되다고 했는데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내편이 되시면 성을 지켜 주시고 집을 지어 주시고 우리에게 평안한 잠을 주시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같이 야훼 닛시, 우리 승리를 외치고 살 수 있습니다. 야훼 닛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승리의 깃발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느비딤에서 아말렉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애굽에서 나와서 아직 무장도 안되고 군대도 조직 못하고 너저리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주 오합지졸로 있을 때 잘 무장되고 조직된 아말렉이 처들어와서 멸망당하게 된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나가서 싸웠으나 백전백패 했습니다. 그때 모세가 아론과 훌을 데리고 나가서 기도하매 야훼께서 임하셔서 그 허술한 무장을 가지고 아말렉을 다 멸절시키고 승리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을 야훼 닛시 우리의 승리의 깃발이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라. 야훼는 우리 개인으로 닛시고, 우리 가정에 닛시고, 우리 사업에 닛시고, 우리 생활에 닛시고, 우리 대한민국의 닛시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야훼 닛시 우리 승리의 깃발이 되시는 것은 야훼가 언약 맺어 우리 편이 되신 것입니다.
시54: 7에 “참으로 주께서는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이 똑똑히 보게 하셨나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결론]
이 시편 기자는 심한 고통을 당해 심신이 질식할 만한 불안과 공포에 짓눌려 있었습니다. 그는 사망의 골짜기에서 야훼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응답하사 심신에 평안과 해방을 주시고 넓은 곳에 세워 주셨습니다. 이 체험을 통해서 그는 깨달았습니다. 야훼께서 내 편에 서 계시면 어떤 불안과 공포도 이길 수 있으며, 어떤 원수도 물리칠 수 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는 시118: 5~ 7의 계시된 이 말씀을 보배로 받아 들어야 될 것입니다. “내가 고통 중에 야훼께 부르짖었더니 야훼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야훼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야훼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할렐루야!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날이 승리와 기쁨과 소망 속에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
야훼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하나님 아버지여 주님이 언약을 통해서 우리 편에 계시므로 우리는 매일같이 기도하고 믿고 순종하여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과 함께 인생을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그러면 사람도 환경도 우리를 멸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안에서 영원히 잘되고 평안하고 강건하고 살 수 있게 됨을 감사드립니다. 야훼 하나님 우리는 자나 깨나 24시간 야훼 나와 함께 계신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섬기며 예배하고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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