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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한계

고린도전 정용섭 목사............... 조회 수 1878 추천 수 0 2009.10.14 22:2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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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고전1:10-17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38551 
emoticon  2005.1.23          

고린교회의 상황
우리가 일반적으로 초대 교회는 우리와 무언가 크게 다를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들도 근본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런 한계 중의 하나가 분열입니다. 사도행전의 앞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예루살렘에 있던 교회도 역시 유대파와 헬라파로 분열되었습니다. 종교 집단만이 아니라 사람이 살고 있는 모든 공동체는 숙명적으로 갈라질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창세기 11장에 기록되어 있는 바벨탑 설화는 분열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을 해명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노아 홍수 이후에 더 이상 홍수로 멸망당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았지만 하나님이 그런 시도를 좋지 않게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이런 일을 작당할 수 있는 힘이 같은 말을 쓴다는 데 있다고 보시고 사람들의 언어 관계를 허물어버리셨습니다. 그 이후로 사람들은 더 이상 이런 일을 도모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사람 사이에는 참된 소통이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뜻이겠지요.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고린도 교회 신자들도 역시 바울파, 아폴로파, 베드로파, 심지어는 그리스도파로 서로 파당을 짓고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얼마나 큰지 알 수는 없지만 아무리 크다고 해봐야 그 당시 헬라 문화권에서 얼마나 컸겠습니까? 별로 크지 않은 가운데서도 이렇게 여러 파로 갈려서 네가 옳니, 내가 옳니 하고 다툼이 있었다는 건 아무리 인간에게 갈라지는 본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을 이룬 교회로서는 부끄러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이렇게 네 가지 파로 갈리게 된 이유를 오늘 우리가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신약학자들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몇 가지 계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베드로와 바울 사이에 있었던 안디옥 논쟁(갈 2:11-14)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율법적인 복음과 비율법적인 복음 사이에 있었던 신학적 대립입니다. 베드로는 여전히 율법을 중요하게 생각한 반면에 바울은 이방인 기독교인들을 율법으로부터 벗어나게 했습니다. 둘째로는 탁월한 웅변가였던 아폴로의 수사학이 일정한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행 18:24-28). 셋째는 성찬식과 관계된 문제로서 부자들과 가난한 사람들 사이의 대립이 그것입니다(고전 11:17-34). 마지막으로 고린도 지역에 있던 가정교회 사이에 벌어진 지역적 대립도 또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롬 16:23, 고전 16:19).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은 “나는 그리스도파다” 하고 떠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12절). 바울파, 베드로파, 아볼로파라는 것은 그런대로 이해가 가지만 그리스도파까지 등장했다는 게 좀 이상합니다. 바울이나 베드로나 아폴로 모두 그리스도를 전했을 텐데도 굳이 그리스도파라는 게 생겨난 이유 말입니다. 앞에서 세 파의 특징은 어느 정도 설명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약화시키는 반면에 베드로는 여전히 율법을 강조했고, 아폴로는 구약성서에 근거한 변증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파는 어떤 특징이 있다는 걸까요? 아마 그리스도파는 어떤 인간적인 지도자의 권위를 모두 부인하고 주로 신비주의적 신앙 형식을 강조한 이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에 자주 반복되었던 이런 특징들이 이미 고린도 교회에 등장했다는 사실이 흥미롭기는 하지만 이런 현상은 자칫 기독교의 본질을 훼손시킬 수 있는 개연성이 있다는 점에서 좀 진지하게 생각해야만 합니다.

바울이 세례를 베풀지 않은 이유
그 이유가 어디에 있었든지 바울은 자기가 제2차 선교여행 당시에(51,52년) 개척한 고린도 교회가 이런 분파의 수렁에 빠졌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개인적으로 적잖이 마음이 아팠을 것입니다. 단순히 감정적인 차원에서만 본다면 크게 책망하고 싶었겠지만 이 문제는 그런 방식으로 처리할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만약 이단과의 논쟁이라고 한다면, 즉 진리와 거짓과의 투쟁이라고 한다면 상대방의 문제점을 지적해야만 했겠지요. 그러나 여기서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베드로와 아폴로가 이단이라거나 그들의 가르침이 거짓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에 약간씩 다른 강조점이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더 중요한 대목은 지도자들의 차이점보다는 그런 차이점에 대한 신자들의 태도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도자들이 약간씩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사실을 놓치고 그 부수적인 것에 마음을 쏟았습니다. 그들의 이런 태도가 결국 분파의 결정적인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지도자들이 결국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세례’를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갈라졌다는 말입니까?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 것이 바울로였습니까? 또 여러분이 바울로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단 말입니까?”(13절). 바울은 자기가 세례를 베푼 사람이 그리스보, 가이오, 스테파나 집안사람들뿐이었다는 걸 다행스럽게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아마 그 당시 고린도 신자들은 자기가 누구에게서 세례를 받았는가 하는 사실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우리가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자기가 존경하는 사도에게서 세례를 받는다는 건 즐거운 일입니다. 지금도 아마 그런 현상은 마찬가지일 겁니다. 조용기 목사님에게서 직접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면 그걸 대단히 큰 자랑으로 생각할 겁니다. 더 나아가서 자기가 어떤 큰 교회에 다니는 것 자체를 큰 자랑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서울대학교 출신이라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하듯이 이름난 교회 자체에 마음을 두는 것은 그런대로 이해할 수 있기는 하지만 그것 자체가 신앙의 근거가 될 때는 적지 않는 문제가 일어납니다.
최근에 교회가 ‘직장 폐쇄’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지난 2천년의 기독교 역사 이래로 타의에 의한 게 아니라 교회 스스로 폐쇄한 경우는, 그것도 자신들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폐쇄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 아닐까요? 서울 천호동에 있는 광성교회는 담임 목사와 원로 목사 사이에 갈등이 너무 심해서 결국 원로 목사 쪽에 있는 10명 가까운 부목사들이 교회 노조에 가입한 다음 교회 앞마당에 천막을 치고 농성에 들어갔으며,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 담임 목사 쪽에서는 노동부에 “직장페쇄” 신고를 했습니다. 노동법에 의하면 농성은 합법이지만 직장폐쇄가 결정되면 불법이 됩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가능한 이유는 한국교회 신자들이 신앙의 본질보다는 교회 조직에 속하는 걸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듯 누구에게서 세례를 받았는가에 모든 기준을 놓고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17절). 우리는 세례야말로 기독교 신앙에서 매우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데 반해서 바울은 그것마저 상대화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과 세례를 베푸는 일이 이렇게 다른 걸까요? 세례가 의미 없다는 말씀일까요? 우리는 이런 말을 하는 바울의 생각을 완전하게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그가 무슨 의미에서 자기가 세례를 별로 많이 베풀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길 뿐만 아니라 세례는 복음 전하는 일에 비해 부차적인 것이라거나 상대적인 것으로 여겨질 만한 언급을 하고 있을까요?

신앙의 형식과 본질
그는 복음이 본질로부터 멀어지고 오히려 형식 논리에 빠져들 수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뚫어보고 있습니다. 그 형식 논리가 세례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바울은 지금 자기가 세례를 베풀지 않은 것에 대해서 다행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의 통찰은 정확합니다. 세례는 얼마든지 형식적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모르면서도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소위 모태신앙 안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이런 위험성이 훨씬 큽니다.
신앙의 한 형식이라 할 수 있는 세례를 간과하는 것도 문제이긴 하지만 그 세례를 준 사람에게 마음을 쏟느라고 신앙의 본질을 등한히 하는 것은 더 큰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형식은 우리에게 아주 간단하게 확인될 수 있는 요소이지만 본질은 꾸준한 노력이 없이는 우리가 인식하거나 포착할 수 없는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가족관계에서도 본질보다는 형식이 지배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화목하고 행복한 가족보다 우리 삶에도 더 소중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본질은 아닙니다. 각자의 삶이 심화하고 기쁨과 평화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들이 본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형식과 본질이 일치한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지만 일반적으로 그게 좀 힘듭니다. 왜냐하면 가족 사이에 서로에게 요구하는 것들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고, 서로의 요구에 응하다 보면 결국 본질을 등한시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지금 교회마저도 이런 형식의 포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형식의 포로가 되면 복음이 단지 ‘말재주’로 전락하게 됩니다. 복음을 그저 그럴듯하게 설명하거나, 혹은 여러 말기술로 신자들을 자기 교회에 묶어놓는 일에 모든 힘을 쏟습니다. 흡사 아무런 의미도 모르고 세례를 받는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말재주로 사람들이 감동받을 수는 있지만 그것 자체가 곧 복음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이 차이를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설교를 전달하는 기술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보통 ‘입담’이 있으면 설교의 내용이 어떻든지 간에 사람들이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단지 말재주로 사람들에게 확인시키려고 한다는 말입니다.

말의 한계
결국 말은 아무리 잘한다고 하더라도 한계가 있습니다. 더구나 말은 잘하면 잘 할수록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물론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말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시인들의 시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듯이, 또한 성서의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 말 자체에 어떤 존재론적 능력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말하기 전에, 말기술을 배우기 전에 그 말을 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말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적인 사건에 대한 경험과 인식입니다. 만약 이런 경험과 인식의 깊이가 없이 말에만 치우친다면 치우치면 치우칠수록 그 말은 그 원천적인 사건을 막아버릴 것입니다. 이게 곧 말의 한계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말의 한계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말의 한계 정도로 끝나는 게 아니라 말에 치우치면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 뜻을 잃어버린다고 합니다. 말로 인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 뜻을 잃는다고 한다면 결국 말을 잘 한다는 것은 복음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요즘 설교비평 작업에 참여하면서 여러 설교자들의 설교를 읽게 되는데, 설교 명망가들은 말을 잘하는 반면에 그 잘하는 능력이 오히려 복음을 가리거나 망가뜨리는 일이 많은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작은 복음의 형식 안에 안주하면서 그것을 확대 재생산하고, 침소봉대하는,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을 자극하는 수사학적 기술에 치우쳐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 설교를 듣는 청중들은 자신들이 은혜 받았다고 생각하는 설교자들에게 치우치게 되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의 관계는 별로 깊어지지 않습니다. 물론 겉으로는 믿음과 은혜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말 잘하는 설교자의 그 말에 취해 있습니다. 서울 중심으로 몇몇 설교자들은 교회를 개척한지 일, 이년 안에 수천 명의 신자들을 끌어들이곤 합니다. 그들에게 그들만의 특별한 카리스마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자기 취향에 맞는 설교자를 따라간다는 게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이어야만 합니다. 흡사 로또 복권에 당첨되어 졸지에 부자가 되듯이 몇 년 안에 수천, 수만 명의 신자들을 끌어들인다는 것은 말재주에 사람들이 마음을 빼앗긴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어떻게 사람이나 교회 자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앞으로 드러나게 할 수 있을까요? 만약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드러나는 일이 아니라고 한다면 아무리 많은 군중이 모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복음 운동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우리가 사람이나 어떤 단체를 앞세우기 위해서 말재주와 말기술에 떨어지지 않았는지 성찰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문제는 우리 개인의 삶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연민에 싸여 있는지, 그래서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가 그 뜻을 잃고 있는지 성찰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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