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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롬8:12~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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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양모 신부 |
참고 : | 다석학회장/ 새길교회 2009.05.31주일설교 |
1. 예수님의 어린이 영성
언젠가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강복을 청했다. 그러자 제자들은 저들이 성가시게 군다고 물리치려라 하였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꾸짖으시고 “하느님의 나라는 어린이들 차지다”라고 일갈하신 다음 어린이들을 사랑스레 강복하셨다는 일화가 마르코 복음서(10, 13-14?16)에 전해 온다.
이 감동적인 일화 중간에 예수께서 다른 기회에 하신 말씀(短句)이 샌드위치 소마냥 어린이들 강복일화 중간에 끼어 있다. “진실히 여러분에게 말하거니와, 어린이처럼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10,15). 이 짤막한 단구를 두고 온갖 풀이가 난무한데 우선 두 가지 학설을 소개하면 이렇다. 일본인 신약학자 아라이 사사구는, 모름지기 우리는 어린이를 받아들이듯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보았다.(《신학사상》,84호, 1994봄, 83쪽). 어린이를 기꺼이 맞아들이듯 하느님을 환영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이런 풀이가 그리스어 문법으로는 충분히 가능하지만 극소수의 견해이다. 극소수의 견해와는 달리, 어린이가 받아들이듯이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여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게 다수의 견해이다. 이에 따르면 어린이가 신앙인의 귀감인데, 어린이의 어떤 면이 신앙인의 귀감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서는 또 십인십색 신약학자들의 풀이가 제각각이다. 나는 어디서도 보고들은 적이 없는 풀이를 시도코자 한다. 단구의 뜻인즉, 어린이가 아빠를 좋아하는 것처럼 모름지기 제자들도 하느님 아빠를 환영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겠다. 이 풀이의 근거는 이렇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을 아빠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당신 자신을 하느님 아빠의 아기로 보았다. 하느님 아빠와 그 아기인 자신의 관계는 아주 정겨운 관계로 진짜 부자유친(父子有親)이었다. 예수께서 당신의 부자유친 영성을 단구(마르 10,15)에서 드러내셨다는 게 내 생각이다. 단구를 의역하면 이렇다. “진실이 여러분에게 이르거니와, 어린이가 제 아빠를 좋아하듯이 모름지기 제자들도 하느님 아빠를 기꺼이 모셔야만 하느님 아빠의 품에 안길 수 있다.” 예수님의 어린이 영성을 재발견한 분이 리지외의 소화데레사(1873-97) 성녀였다. 하느님은 자애로운 아빠 같으신 분, 나는 그 품에 안겨 꼼지락거리는 아가 같은 미물, 이를 깨닫는 게 구원이지, 달리 구원이냐.
2. 다석 유영모의 어린이 영성
겨레의 스승 다석 유영모(1890-1981)가 1956-57년 종로 2가 YMCA에서 행한 《다석강의》, (현암사, 2006)를 읽다보면 여기저기 어린이 영성이 번득이는데 여기서는 두 단락만 소개코자 한다.
“하느님이 예수를 보낸 것은 유치원에서 유치원 장난을 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유치원의 어린이지 결코 전능한 아버지가 아닙니다. 그래서 어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치 아이들이 천진하게 아무것도 모르고 노는 것같이 사는 게 정말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괜히 어렵게 아버지를 닮듯이 하는 것은 다 소용없는 일이고, 유치원 어린이가 장난하는 것밖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산다는 것도, 죽는다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 정도쯤 되어야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다석강의》, 571-72쪽?참조 460-467쪽).
“어린이와 젖먹이들까지도 그 입술로 주님의 위엄을 찬양합니다. 주님께서는 원수와 복수하는 무리를 꺽으시고, 주님께 맞서는 자들을 막아낼 튼튼한 요새를 세우셨습니다.”(시편 8, 2)라는 말씀을 다석은 다음과 같이 풀이했다.
“어린이와 젖먹이로 하여금 주님의 위엄을 찬양하게 하고 원수와 복수하는 무리를 꺾는다는 대목은 「마태복음」의 장면과 연결됩니다. 주님께서는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에서 찬양이 나오게 하셨다.(마태 21;16) 성전 뜰에서 예수를 향해 호산나를 외치는 아이들을 보고 화를 내는 사람들에게 예수가 대답한 말입니다. 아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온전하다는 것을 밝힌 구절이라 하겠습니다…
아이들 입에서 절로 나오는 말은 성령의 말,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대로 찬미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린이의 입에서 나오는 동요 같은 것은 특히 찬송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나라 백성은 아이들입니다. 아주 악한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이 몇 사람 안 되는 악한 사람이 어린아이 같은 우리 동포를 못살게 합니다. 우리 동포가 비공식으로 하는 한숨 섞인 말이나 우연히 나오는 말도 다 성령이 시킨 말이고 하느님의 말입니다. 이런 소리가 몇 사람 안 되는 악인을 잠잠하게 만들 때가 필연코 오리라고 봅니다.” (《다석강의》, 761쪽).
다석의 제자들도 스승의 어린이 영성을 생생히 증언한다. 직제자 엄두섭 목사의 증언이다. “유영모는 한아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는 어린애처럼 놀아야 한다며 자주 손짓도 하고 노래도 불렀다”(《동방의 성인 다석 유영모》, 무애, 1993, 128쪽).
애제자 김흥호 목사의 증언과 찬탄은 사뭇 감동을 자아낸다.
“유영모는 언제나 아바디 아바디 하고 소리내서 불렀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소리만이 아니라.‘아’는 감탄사요 ‘바’는 밝은 빛이요 ‘디’는(디디다) 실천이다. 인생은 하나의 감격이다. 하나님을 뫼시고 사는 삶은 감격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그의 삶을 보고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그 뒤에는 하나님의 빛이 비치고 있다. 그 기쁨은 진리에서 솟아나오는 기쁨이요 그리스도로부터 터져나오는 기쁨이다. 그러기에 그것은 법열이요 참이었다. 진리의 충만이요 영광의 충만이다. 그래서 그는 아바디라고 했다. 아바디는 단순히 진리의 충만뿐이 아니다. 그 뒤에는 생명의 충만이 있고 힘의 충만이 있다. 그 힘으로 그는 이 세상을 이기고 높은 하늘로 올라갈 수가 있다. 그는 욕심과 정욕을 끊어버리고 오로지 깨끗과 거룩을 살았다. 그것이 그의 실천이다. 그는 죄악을 소멸하고 하늘의 별처럼 빛을 발하며 살았다. 그것이 도다. 도는 억지로 하는 율법이 아니다. 성령을 받음으로 거룩한 생활을 하는 하나님의 힘이다. 그것은 하나의 유희다. 하나님 앞에서 어린 아이가 되어 노는 것이다.”(《동방의 성인 다석 유영모》, 322-23쪽).
3. 유대교 랍비의 어린이 영성
유대교인들은 속죄의 날(히브리어로 욤 키푸르, 양력으론 10-11월 중)을 맞으면 온종일 단식하고 회당에서 랍비의 참회 설교를 듣고 기도하면서 지난 한 해 동안 저지른 죄를 참회한다. 미국의 어느 유명한 랍비가 속죄의 날에 참회 설교는 하지 않고 어린 딸과 장난을 쳐서 청중이 모두 어리둥절했다는 일화가 있는데, 랍비는 실상 어린이 영성을 주지시키고자 일종의 작은 공연을 했던 것이다. 랍비의 기행 전문은 이렇다(레이첼 나오미 레멘 지음, 유해욱 옮김, 《할아버지의 기도》, 문예출판사, 2005, 106-107쪽).
“랍비는 청중이 앉아 있는 좌석 앞까지 와서는 자기 부인에게서 어린 딸을 받아 연단으로 올라갔다. 겨우 돌을 지난 정도의 사랑스러운 아기였다. 아기는 아빠의 팔에 안기어 청중을 향해 방긋방긋 미소를 지었다. 그 자리의 모든 참석자들은 아기의 미소를 바라보며 마음이 따뜻해졌다. 아기는 아빠를 향해 얼굴을 돌리고는 앙증맞은 손으로 아빠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랍비는 아기에게 사랑스러운 미소를 보낸 후 전통적인 ‘욤 키푸르’ 설교를 시작했다. ‘속죄의 날’의 의미에 대한 내용이었다.
아기는 아빠의 시선이 다른곳으로 옮겨가자 손으로 아빠의 코를 잡아당겼다. 랍비는 아기의 손을 코에서 떼어 놓고 다시 설교를 했다. 조금 있으려니까 아기가 넥타이를 잡고 아빠의 입속에 집어넣었다. 사람들이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랍비는 입에서 넥타이를 꺼내어놓고 아기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아기는 작은 팔을 아빠의 목에 둘렀다. 랍비는 아기의 머리에 손을 얹고 청중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여러분, 이 아기가 어떤 일을 저질렀다고 해서 용서하지 못 할 일이 있겠습니까?’ 강당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의 아이나 손자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때 아기는 다시 손을 뻗어 아빠의 안경을 잡아챘다. 모두가 한바탕 크게 웃었다. 랍비는 아기에게서 안경을 뺏어 쓰면서 크게 웃으며 조용해지기를 기다리다가 다시 물었다.
‘언제 무조건 용서가 안 되는 그런 시기가 옵니까? 용서하기가 어려워지는 때는 언제입니까? 네 살입니까? 여덟 살입니까? 열다섯 살입니까? 서른다섯 살입니까? 도대체 몇 살이 되어야 우리 모두가 하느님 앞에 어린 아기라는 사실을 잊고 용서하기가 힘들어집니까?’”
4. 구상의 어린이 영성
신앙과 문학이 자연스레 어우러진 구상(1919-2004)선생의 시편에도 어린이 영성이 은은히 깔려 있는데 여기서는 지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마음의 구멍〉과 〈나자렛 예수〉시편만 예시한다. 이처럼 진솔한 신심시 (信心詩)는 전 세계 문학계를 통틀어 흔치 않다.
〈마음의 구멍>
내 마음 저 깊이 어디
한 구멍이 뚫려 있어
저 허공과
아니 저 무한과
저 영원과 맞닿아서
공(空)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는
그곳으로부터
신기한 바람이 불어온다.
신비한 울림이 울려온다.
신령한 말씀이 들려온다.
나는 어린애가 되어
말 이전의 말로
이에 응답할 제
온 세상 모든 것이
제 자리에서 제 모습을 하고
총총한 별이 되어 빛을 뿜으며
나는 나의 불멸을 실감하면서
삶의 덧없음이 오히려 소중해지며
더 없이 행복하구나!
〈나자렛 예수〉
당신은 사상가가 아니었다.
당신은 도덕가가 아니었다.
당신은 현세의 경룬가가 아니었다.
아니, 당신은 종교의 창시자도 아니었다.
그래서 당신은 어떤 지식을 가르치지 않았다.
당신은 어떤 규범을 가르치지 않았다.
당신은 어떤 사회혁신 운동을
일으키지 않았다.
또한 당신은 어떤 해탈을 가르치지도 않았다.
한편 당신은 어느 누구의 과거 공적이 있고 없고를 따지지 않았고
당신은 어느 누구의 과거 죄악의 많고 적은을 따지지 않았고
당신은 실로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생각이나
말을 뒤엎고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고
고통받는 인류의 해방을 선포하고
다만, 하느님이 우리의 아버지시오,
그지없는 사랑 그 자체이시니
우리는 어린애처럼 그 품에 들어서
우리도 아버지가 하시듯 서로를 용서하며
우리도 아버지가 하시듯 다함없이 사랑할 때
우리의 삶에 영원한 행복이 깃들고
그것이 곧‘하느님의 나라’라고 가르치고
그 사랑의 진실을 목숨 바쳐 실천하고
그 사랑의 불멸을 부활로써 증거하였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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