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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해야할 바리새인의 누룩

마태복음 임영수 목사............... 조회 수 3072 추천 수 0 2009.10.16 11:3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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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23:23∼28 
설교자 : 임영수 목사 
참고 : 주님의교회 주일 설교말씀 1998년 10월 25일 

오늘은 종교 개혁 주일입니다. 개혁 주일을 맞아 오늘 우리 시대에서 개혁의 정신이 어떤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바리새인의 형식주의에 대한 논쟁의 내용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본문이 기록되어 있는 이 장에는 그러한 형식주의에 대한 논쟁의 내용이 집약적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아마도 복음서 기자 마태는 그 당시 나이 어린 초대교회 공동체가 유대주의 자들의 도전과 핍박에 굴복하지 않고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이 있는 공동체가 되게 하기 위해 그렇게 편집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본문에 나타나 있는 예수님의 논쟁의 내용은 모두 다 잘못된 형식주의에 관한 것으로, 내용상으로 구분할 때 세 가지입니다. 먼저는 십일조 문제, 두 번째와 마지막 것은 유대인의 정결법과 관련된 것입니다. 이 세 가지 모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외식과 위선을 풍자적으로 통렬하게 꾸짖은 내용입니다.


구약의 율법에는 농산물이나 과일의 십일조에 관한 규정이 있습니다. 농산물에 관한 십일조 규정으로, 해마다 씨를 뿌려 밭에서 거둔 소출 농산물이나 과일 가운데 그 십분의 일을 떼어 두었다가 그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규정이 있습니다.(신 14:22∼29)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 규정을 야채에까지 확대시켜서 백성들에게 엄격하게 지켜가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율법의 보다 중심적인 것들, 곧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정의 문제, 이웃에 대해 베풀어야 하는 자비의 문제, 인간 관계에서 중요시되어야 할 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고 그것을 실천하지 않는데 대해서는 문제시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위선적인 행위를 하루살이와 약대에 풍자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포도주를 마실 때 종교적 이유로 하루살이 때문에 포도주가 더럽혀지지 않게 하기 위해 천으로 하루살이를 걸러내곤 하면서도, 그것 보다 종교적으로 더 불결한 짐승인 낙타는 삼킨다고 풍자적으로 비판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종교 생활에 도덕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규정은 엄격하게 지켜가면서 보다 더 중요한 도덕적인 문제인 정의·자비·신의는 소홀히 하는 그들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맹인된 인도자들이라고 꾸짖었습니다.


그 다음 유대인들에게는 정결법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바리새인들은 그 정결법에 따라 음식을 먹고 마실 때마다 그릇을 잘 씻곤 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규정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을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먹고 마시는 음식물은 부당하게 탈취해서 만든 것인데 그것은 전혀 문제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릇의 겉을 씻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음식물을 정당하게 취득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형식주의와 외식을 회칠한 무덤으로 풍자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에 유월절이 가까우면, 순례자들이 죽은 사람의 시체나, 뼈에 무의식적으로 접촉되는 일을 피하게 하기 위해 무덤에 회를 칠해서 눈에 잘 띄이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역시 정결법에 따른 것으로 죽은 사람의 시신에 접하는 것은 종교적으로 몸을 더럽힌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위선과 외식을 비판하신 것입니다. 회칠한 무덤이 겉보기에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속에는 냄새나는 썩은 시신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 시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겉으로는 거룩하게 옳게 보이려고 했지만 실제 그들의 속은 위선과 불법이 가득차 있다는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그 당시 유대 종교가 이렇게 형식주의에 집착하게 된 데는 그럴만한 역사적 원인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로부터 돌아온 후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포로로 잡혀간 것은 율법을 바르게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그 후부터 율법을 문자적으로 엄격하게 지켜 가는 형식주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로마가 팔레스틴을 지배한 후 여러 지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유대 종교가 정체성의 위기에 부딪히게 되면서 더욱 형식주의를 강조하게 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형식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그것에 대해 경고하신 이유를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형식주의와 문자주의는 사람을 진실된 종교인으로 만들지 못하고 위선자로 만듭니다. 그리스말에 `위선자'라는 말은 광대라는 뜻이 있습니다. 종교적 의미에서 이것은 말과 속셈이 다른 사람을 말합니다. 겉으로는 경건한 척하지만 속 내면은 그렇지 못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가면을 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형식주의는 사회적 무책임한 사람을 만들어 갑니다. 이것은 종교적 이기주의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회적 무책임을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다음으로 형식주의는 신앙의 본질보다 비본질적인 것에 집착하게 만듭니다. 하나님과 인간을 사랑하기보다는 제도를 더 사랑하게 만듭니다. 예수께서 어느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 마른 사람을 고쳤을 때 그 자리에 있던 정통파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했다고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에 대한 관심을 제쳐놓고 제도나 규정에 넋을 잃은 무리에 대해 격렬한 노여움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보다도 제도나 규정에 마음을 빼앗기는 일은 종교인들이 빠지기 쉬운 잘못입니다.


형식주의와 문자주의는 하나님과 자기 자신을 속이게 됩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공동체 안에 고르반이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노인들을 위한 복지 제도입니다. 이 제도를 위해 그 당시 유대인들은 십일조 이외에 노인들을 위해 일정한 액수의 부담금을 내곤 하였습니다.


이 제도가 나중에 부패해서 노인들에게 복지금이 엄연히 전달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인들을 도와야 할 사람들은 그들이 고르반 제도를 이행했다고 하여 노인들을 외면했습니다.


형식주의는 죄인이 아닌 죄인을 많이 만들어 내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의 형식주의는 그 당시 많은 사람을 죄인 아닌 죄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으로 낙인찍힌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이러한 형식주의 때문에 교회가 많은 범죄를 저질러 왔습니다. 교회는 많은 사람을 정죄하고, 이단자로 몰아 태워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미워하는 마음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말한 시대는 종교의 시대가 아니라 광기의 시대였다고 했습니다.


형식주의는 삶의 진정한 변화를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형식주의의 기준은 자기들의 틀에 맞느냐 그렇지 않는 가이기 때문에 인간의 삶의 변화는 문제로 삼지 않게 됩니다. 자기들의 틀에 맞지 않을 때는 다 틀린 것이며 죄인입니다. 그러나 종교의 진정한 의미는 삶의 변화입니다. 변화지만 올바르게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형식주의는 역사의 어느 한 시대에만 있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시대에나 있을 수 있습니다. 제가 목사가 되고 나서 제 자신과의 싸움, 목회 현장에서 갈등하며 많은 시간을 낭비하며 다루어 온 문제들 역시 형식주의와 문자주의였습니다. 한국교회 역사를 돌이켜 볼 때에도 교회가 분열하고 갈라지고, 서로 적대시해 오는 문제들 거의가 다 이러한 범주에 들어있습니다.


그러한 분열과 다툼 이면에는 인간적인 독선·아집·문자주의에 의한 무지, 인간적인 교권 다툼, 경제적인 이득권 같은 문제들이 깔려 있습니다. 그러면서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명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위선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러한 그릇된 형식주의에 빠져 들지 않고 이것을 극복해 가면서 바람직한 교회 공동체와 참된 인간성을 이루어 가기 위해서 몇 가지 유념해야 할 사항들이 있습니다.


먼저 신앙생활의 중심을 제도나 형식이 아닌 진리에 입각한 원칙 Principle에 중심을 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 보다 정의·자비·신의를 더 중요시하는 마음가짐입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비판할 때 십일조를 기준 하는 것이 아니고, 그가 정의로운 사람인가, 그는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 줄 아는가, 그는 신의를 존중하는 사람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역시 자기 자신을 돌이켜 볼 때에도 십일조를 어김없이 내고 있는 의인가를 묻기 보다 나는 제도나 형식보다 인간을 더 존중하고 사랑하고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 교회 공동체는 제도나 형식을 하나님과 인간보다 더 중요시하고 있지 않는가, 우리는 정의·자비·평화·신의를 존중하고 있는 공동체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원칙을 중심으로 한 신앙생활에는 언제나 창조성이 요청되지만, 제도나 형식을 위주로 한 삶에는 지켰는가 안지켰는가가 문제시됩니다. 원칙
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는 매우 포용적이지만, 형식을 중심으로한 공동체는 매우 배타적입니다. 원칙을 중심할 때 갖게 되는 관심은 그 나라와 그 의이지만, 형식이 중심이 될 때에는 우리와 같지 않다는 것이 언제나 문제가 됩니다.


건전한 원칙을 중심으로 한 신앙생활은 사회를 위해 공헌할 수 있지만 제도나 규정에 얽매어 있는 신앙은 자기의 그룹에서는 헌신적이고 그 그룹을 위해서는 순교도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사랑하고 계시는 세상을 위해서는 매우 무관심하게 됩니다.


어느 흉악범만 수감하는 교도소에 새로운 교도소장이 부임했습니다. 그 교도소에는 교도관 이외에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비심이 많은 교도소장의 아내는 교도소에 운동회와 같은 특별한 일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아이들을 데리고 재소자들 틈에 끼어서 함께 응원도 하고 친교를 갖기도 했습니다. 그는 앞을 못 보는 맹인 재소자들에게는 점자를 가르쳐 주고, 그리고 듣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수화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알게 모르게 그 교도소에는 점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교도 소장 부인이 교통 사고로 숨졌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의 장례식을 위해 소장은 고참 간수에게 책임을 맡기고 교도소에 출근을 하지 않았습니다. 장례식 날 교도소 안에 있는 모든 재소자들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교도소 정문에 모여 있었습니다. 고참 간수가 놀라서 그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와 보니 재소자들의 눈은 모두 붉게 충혈 되어 있었습니다. 간수장은 즉시 규정을 어기고 문 앞에 모인 재소자들 모두가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도록 교도소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재소자들 전원이 장례식에 참석하여 깊이 슬퍼했습니다. 그날 장례식이 끝나고 거기에 참석하였던 재소자들 가운데 단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교도소로 다시 다 돌아왔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제도나 규정을 넘어서서 참된 원칙을 가지고 사는 삶이 어떤 것임을 말해주고 있고, 그러한 삶의 창조적 힘이 어떤 것임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제도나 규정을 절대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의 제도나 규정에는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언제나 보완되어야 하고, 수정되고, 어느 시점에 가서는 폐기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절대시 할 때 언제나 분열이 생기게 되고 생명력을 상실한 공동체가 됩니다.


다음으로 부단히 자기 갱신을 해가야 합니다. 부단한 자기 갱신을 통해서 자유하는 사람이 되어가지 않으면 형식주의에 노예가 됩니다. 형식주의에 묶여 있을 때 진정한 구원의 경험은 불가능합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가 고수하고 있는 그 형식주의 자체가 구원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형식주의에 안주해서 세상적인 복을 누리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참 인간이 되어 가는 것, 진리 안에서 진정한 자유인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들이 내건 종교 개혁의 세 가지 목표가 믿음·은혜·말씀입니다. 이 세 가지는 결국 진리 안에서 자유해 가는 삶의 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자유를 위해 부름 받고 있고,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랑·정의·자비·신의를 존중할 줄 알뿐 아니라 그러한 품성을 가진 인간으로 살아가야 할 희망의 약속으로 부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부르심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을 위한 수단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교회 공동체가 존속하는 한 지속적인 갱신으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비유로서 하나님 나라의 지극히 부분적인 특성만이라도 나타내 보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공동체 안에서 위선과 외식이라는 바리새인의 누룩을 경계하여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바리새인의 누룩은 번식력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 깊이 주의하지 않으면 우리도 모른 사이에 공동체의 참모습을 변질시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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