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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후6:8~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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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조용기 목사 |
참고 : | 2006년 9월 24일 주일3부 설교 |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기독교 신앙과 역설’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욕을 얻어먹는데도 실제 내용인즉 오히려 그것이 영광이 되는 것이 역설이 아닙니까? 사람들 보기에는 악한 사람들 같은데 사실 알아보면 정말 아름답고 선하고 착한 사람입니다. 이것도 역설입니다.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된 것을 전하는 자들이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무명한 사람 같으나 실제 하나님 앞에서는 유명한 사람인이 기독교 신자들인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는 세상이 보는 것과 하나님이 보시는 것에는 완전히 다른 역설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질그릇 같은 인간이 그 안에 죽으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시고 있으면 겉으로 보기에는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서 이제는 재기불능으로 보이는데도 불과하고 내용인즉 주님을 의지하고 싸이지 아니하고 승리롭게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우리 기독교 신앙인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답답한 일을 당하여 이제는 재기불능이 되는 것 같으나 안으로 보면 전혀 낙심치 아니하고 담대하고 용감하고 평안한 것입니다. 밖에서 볼 때 핍박을 당해 외톨이가 된 것 같으나 주님의 품안에서 위로 받아 버림받지 않고 더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이 신앙의 역설인 것입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해서 망한 것 같은데 어디를 봐도 망한 것 같은데 불사조처럼 살아나는 것이 우리 신앙인의 현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이란 하나님이 언제나 악을 선으로 바꾸시면 판을 바꾸어 버리는 놀라운 역사를 베푸는 역설적인 은혜의 의미가 넘쳐나고 있는 것입니다.
[본론]
1. 죄가 많은 곳에 용서와 의의 은혜가 넘친다.
생각해 보십시오. 의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아야 될 것인데 성경은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죄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더 많은 은혜를 받는다.
탕자의 비유에서 보면 한 농부가 두 아들을 길렀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자기 몫의 택한 재산을 달라고 강요를 했습니다. 그 아들은 자기가 지혜가 있고 총명이 있고 모략이 있고 재능이 있고 당당하고 자신만만하고 잘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디가도 아버지쯤은 제켜놓고 더 잘 살 수 있다는 자신이 넘쳐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재산을 나누어 받아서 그는 아버지가 없는 먼 나라로 가서 자기중심에 서서 당당하게 허랑방탕하면서 살았는데 나중에는 재산이 다 동나고 그 나라에 기근이 와서 밥도 먹을 수 없는 호구지책을 세울 수 없는 비참한 처지에 떨어졌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직장을 구하는데 나중에는 제일 천한 직업인 시골에 가서 돼지를 치는 직원으로 등용이 되고 돼지를 치면서 배가 고파서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얻어먹으려고 하다가도 그것도 충분하지 못해서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완전히 비참하게 되었을 때에 마음에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얼마나 무능력하고 실력이 없고 바보천치 같고 살아날 수도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달은 것입니다. 탕자가 되어 깨어지고 나니 그때는 내가 과거에 살았던 것은 전적 아버지의 은혜로 살았다. 아버지가 은혜가 없으면 이제 살수가 없다는 자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 탕자가 아버지 집에 있을 때는 자기가 잘나고 실력이 있고 능력이 있고 당당하고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아버지의 은혜는 전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은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생활전선에 나와서 낭패와 실망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고 깨어지고 의지할 것 없게 되어서 비로소 자기가 얼마나 못나고 바보천치 같고 무능력하고 실력이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 알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집에 있을 때 살았던 것이 모두다 아버지의 은혜로써 살았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고 앞으로도 아버지의 은혜가 없이는 결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성경 눅15:17~19에 보면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 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 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처럼 변화된 것입니다. 이제는 아들도 될 자격이 없이 하루하루 품팔이해서 먹고 사는 품꾼의 하나로써 고용해 달라고 아버지께 구하겠다. 그와 같이 깨어진 것은 고통이 다가와서 그 실상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고통이 없을 때는 그가 잘 난줄 알았는데 고통을 당하고 그의 실상이 벗겨지자 얼마나 못난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그가 살아나온 모든 과거는 아버지의 은혜고 앞으로도 살아나갈 길은 아버지의 은혜밖에 없다는 은혜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타락하기 전에는 은혜를 몰랐습니다. 타락한 이후로 은혜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타락하지 않은 맏형은 집에 있으면서 아버지에게 원망, 불평하면서 아버지의 은혜를 조금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고통이 다가오고 우리가 얼마나 못났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때 은혜에 대한 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바리새인의 집에 초청을 받아서 식사를 하다가 가는데 그 동네에서 아주 죄 많은 창녀, 모든 사람이 죄인으로 하는 그 여자가 예수님 뒤에 따라오면서 계속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의 발에 키스하고 눈물로 발을 적시고 머리를 풀어서 그 발을 닦고 향유를 그 발에 부었습니다. 계속 따라오면서 그렇게 하니까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왔는데 바리새인 시몬이 보니까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선지자라고 하는데 ‘아니구나. 만일 그렇다면 저 더러운 여자가 계속 와서 눈물을 흘리고 발에 입을 맞추고 머리로 발을 씻고 향유를 부으면 부정 타는데 그렇게 못하게 할 것인데 저렇게 아무것도 모르고 허락하는 것 보니 사람을 통찰하는 안목이 없고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구나.’ 그렇게 속으로 비평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아! 시몬아!” “예!” “한 사람이 두 사람에게 돈을 빌려 주었다. 한 사람은 50 데나리온, 다른 사람에게는 500 데나리온의 빚을 주었는데 둘이가 다 빚을 못 갚았다. 그래서 간청하기 때문에 빚을 탕감해 버렸는데 50 데나리온 빌린 사람도 탕감해주고 500 데나리온 빚진 자도 탕감해 주었는데 그 중에 누가 더 채주를 사랑하겠느냐?” “아! 그야 500 데나리온 탕감 받은 사람이 많이 탕감 받았기 때문에 그 은혜를 크게 감사하고 느끼겠지요.” “맞았다. 내가 여기 들어올 때 저 여자는 끊임없이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발을 닦고 향유를 붓고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않았다. 너는 내가 들어올 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고 내 뺨에 입도 맞춰 주지 아니하고 머리에 감람유도 부어주지 않았다. 이 여자가 나를 이렇게 많이 사랑하는 것은 많은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에 그 은혜에 감격해서 나를 사랑한 것이다. 적게 용서받고 적게 은혜 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하나 많이 용서받은 사람, 큰 은혜를 마음속에 느끼고 크게 사랑하느니라.” 그리고 그 여자를 보고 말하기를 “여자여, 내 죄가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여기 말씀하신 것은 뭡니까? 죄를 많이 용서받았으면 그 죄 용서받은 것을 깊이 느끼고 그 은혜에 감격해서 더 많이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청년시절에 부산 대신동에 있는 월드미션이라는 교회에 출석을 했습니다. 거기 목사님이 루피 리차드 목사님이었는데 같이 교회 나오는 북한에서 피난 나온 자매님이 한분 계셨습니다. 그 자매님은 자기 딸을 늘 데리고 교회를 나왔는데 그 딸은 중등학교 교사로 있다가 연애를 했으나 남자에게 배반을 당하고 그로 말미암아 고통을 하다가 정신병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도와주지 않고는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는 딸입니다. 늘 싱글벙글 웃고 있어요. 그 딸을 데리고 언제나 교회 와서 내 옆에 앉아서 예배를 드립니다. 늘 하나님 앞에서 기도를 하면서 눈물을 비 오듯이 흘리고 손수건을 적시도록 울어요. 그래서 내가 “할머님, 매일같이 예배를 드리면서 왜 웁니까?” 그러니까 “청년은 울지 않느냐?” “나는 울 것이 없는데요. 나는 안 우는데요.” “나는 죄 많아서 내 죄를 자꾸 파헤치고 죄를 회개할수록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하루도 눈물을 흘리지 않고 살수가 없네.” 내 생각으로 과부로써 혼자 불쌍한 딸을 데리고 사는데 무슨 죄를 그렇게 많이 지어서 저렇게 우는가. 조금 모자라는 분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제가 돌이켜 보니 얼마나 제가 어리석고 바보 같고 천치 같은 놈인지 모르겠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죄를 많이 짓거나 적게 짓거나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깊은 죄인이냐는 것을 깊이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이 감사하고 그 은혜에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고 주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젊을 때는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죄의 깊이를 깊이 느끼지 못하므로 십자가에 몸 찢고, 피 흘려, 죄를 용서하신 주님의 은혜를 깊이 감동하게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세월이 흘러가고 나이를 먹게 되면 과거를 돌이켜 보게 되고 과거를 돌이켜 보게 되면 지은 것이 죄밖에 없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젊을 때는 죄가 없는 줄 알았는데 나이를 먹고 뒤를 돌아보니 모든 걸음걸음마다 죄를 지은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너무나 고마워. 젊을 때는 느끼지 못한 그 죄를 용서받은 은혜가 너무나 고마워서 눈물을 흘리게 되고 그리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많이 용서받은 사람은 많은 은혜를 받고 많이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평양의 바울이라고 불리는 이기풍 목사는 원래 장안의 소문난 불량배요, 건달이었습니다. 잔칫집마다 찾아다니며 술 내어 놓으라 떡 내놓으라고 고함을 치고 잔치 집을 풍비박산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우리나라에 온 모펫이 복음을 증거 하는데 그 집에 친구들과 함께 찾아가서 돌을 던지고 모펫 선교사를 때리고 돌로써 턱을 쳐서 턱이 부스러져서 병원에 입원까지 하게 만들었습니다. 얼마 후 그가 원산에 갔다가 또 다른 선교사를 만났습니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 모펫 선교사가 떠올랐습니다. ‘그 사람은 왜 내게 얻어맞고 돌로써 턱이 맞아 뼈가 부러져도 나에게 반항을 안했을까? 원망 한마디 안하고 나에게 주먹질 안하고 순순히 매를 맞고도 나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했는데 내가 정말 나쁜 사람이구나.’ 그런 마음에 충격이 왔습니다. 그런데 하루 밤에 잠을 자는데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피를 쭉쭉 흘리시면서 흰옷을 입은 분이 나타나서 “기풍아, 기풍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그래서 “누구십니까? 언제 내가 당신을 핍박했습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 그리스도라. 기풍아, 내가 너를 택해서 나의 증인으로 삼겠노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놀라서 깨어 나보니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이전에 지었던 죄들이 꼬리를 물고 가슴속에 다가왔습니다. 건축하던 장대현 교회를 때려 부순 일부터 시작해서 선교사를 때리고 그의 집에 돌을 던진 일 등 수많은 죄가 떠올랐습니다. 가슴을 치고 통곡을 해도 시원치가 않아요. 너무나 죄 많고 죄가 깊었습니다. 몸부림을 치다가 그는 스왈른 선교사를 찾아 갔습니다. 그리고 스왈른 선교사에게 자기 모든 과거의 일을 고백하니까 스왈른 선교사님이 “당신의 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몸 찢고, 피 흘려 다 청산한 것이오.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면 예수님이 값없이 용서해 준답니다.” 이기풍 목사님은 너무나 죄악을 깊이 통회하고 자복했기 때문에 은혜를 넘치게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 마음에 넘쳐났고 예수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불 붓듯이 부었습니다. 그는 곧 신학교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고 한국에서 처음 초대목사가 되어서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 받아 7년을 제주도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제주도에 교회 기초를 쌓았습니다. 그리고 전라도 일대에서 복음을 증거 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잡혀서 신사참배 반대한다고 너무나 큰 고문을 받아 그 결과로 세상을 뜨고 천국 가셨습니다. 교회를 핍박하고 선교사를 괴롭히던 청년이 예수님의 용서를 체험하자 그 용서가 너무나 감사하고 감격해서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더 열렬히 주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일생을 바치고 목숨까지 바치는 위대한 주의 종이 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깊이 뉘우치면 뉘우칠수록 용서해 주신 주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게 되고 은혜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주님에 대한 사랑이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용서 안 받은 사람은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용서받은 사람이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너무나 감격적으로 가슴에 사무쳐 오는 것입니다.
딤전 1:15에 보면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바울선생이 일평생을 수 없는 고통과 괴로움에서 허덕이면서도 복음을 전한 것은 주님의 은혜를 너무나 크게 받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다.” 이와 같은 큰 죄인을 주님이 용서해 주셨으니 그 은혜가 너무나 크고 그 은혜 때문에 그리스도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 사랑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내가 죄를 많이 지어야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은 죄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가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하는 은혜가 넘쳐난다는 것입니다. 나의 죄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를 같잖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죄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내 죄가 얼마나 깊고 높고 넓고 무서운 것인지를 알게 되고 그를 용서해 주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깊이깊이 느끼게 되고 감격하게 되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의 성령이 오셔서 우리의 마음에 깊은 깨달음을 주셔서 회개하게 만드시고 주님의 은혜를 넘치게 받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찬송가 138장을 보면 그 찬송가 작가의 마음속에 느끼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읽을 수가 있습니다.
만왕의 왕 내 주께서 왜 고초 당했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그 보혈 흘렸네.
♬ 1. 만왕의 왕 내 주께서 왜 고초 당했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그 보혈 흘렸네.
2. 주 십자가 못 박힘은 속죄함 아닌가. 그 긍휼함과 큰 은혜 말할 수 없도다.
후렴)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
3. 늘 울어도 그 큰 은혜 다 갚을 수 없네. 나 주님께 몸 바쳐서 주의 일 힘쓰리.
주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고 헌신하여 주님을 사랑해서 일생을 내어 맡기지 주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어떻게 받나요.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 것을 깊이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내 죄를 깨닫게 해주시면 죄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은 역설적입니다. 내가 의롭다고 할 때는 은혜를 받지 못하나 내가 죄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많게 되는 것입니다.
♬3. 늘 울어도 그 큰 은혜 다 갚을 수 없네. 나 주님께 몸 바쳐서 주의 일 힘쓰리.
후렴)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감사하면 우리한번 박수 하십시다.
죄의 추악함과 더러움을 깨달을수록 예수님의 용서의 은혜를 깊이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저는 별로 눈물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최자실 목사님이 조용기 목사의 눈에 눈물이 있으면 얼마나 많은 사람을 감동시킬 것인데 눈물이 없다고, 그런데 최자실 목사님이 이 교회에 오셔서 기도만 하면 훌쩍훌쩍 우시기 때문에 나는 강단에 앉아서 ‘참 주책이다. 자꾸 울어서 부끄러워 못 견디겠네.’ 그랬는데 이제 제가 크게 후회합니다. 그때 저는 젊었을 때 고 최자실 목사님은 연로하셔서 인생을 살아오면서 죄의 깊이와 그리스도의 용서의 은혜의 크심을 깨달아 알았는데 저는 말씀을 증거 하면서 너무나 피상적으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았습니다. 내 죄의 깊이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많이 받지 못했기 때문에 눈물이 없었어요. 그런데 요사이는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나와서 부끄러워 못 견디겠어요. 손수건 없이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할 수가 없는 것은 나이를 먹으니까 내가 살아온 모든 발걸음마다 ♬걸음마다 자국마다 다 죄 뿐입니다. 쓰리고 아픈 마음 가눌 길 없어서 골고다 언덕 위로 지금 찾아옵니다.♬ 걸음마다 자국마다 죄밖에 기억이 안나니 십자가의 은혜가 얼마나 고마운지 말로 다할 수가 없어요. 그 은혜가 없이는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수가 있겠습니까? 영원히 지옥 불에 탈 수밖에 없는데 주님이 날 대신 지옥불이 타시고 날 대신 못 박혀 고통과 눈물을 흘려주시고 건져주신 그 은혜가 얼마나 큰지 말로 다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고후 5:21에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엡 2: 8에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율법의 방망이로 얻어맞은 자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치료가 가능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율법 앞에서 죄의 깊이를 깨달은 사람이 비로소 은혜로 용서를 받고 변화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는 역설적인 그리스도의 은혜를 우리가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 병약한 곳에 치료와 건강의 은혜가 넘친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쓸 데 있다고 성경에 말한 것처럼 건강하면 자기 건강을 의지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치료를 바랄 필요도 없고 바라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몸이 약하면 이 세상에도 의원을 찾아가고 약을 찾는 것처럼 우리 주를 믿는 사람은 몸이 약하면 치료하는 예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벧전 2:24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이 말씀을 전에는 별로 관심 없게 보았는데 병들면 이 말씀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고쳐줄 주님이 채찍에 맞으시므로 내 병을 다 갚았으니 그 은혜로 말미암아 나도 병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소망과 믿음을 얻을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치료의 대속의 은혜는 병이 들었을 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내가 약할 때 내가 강하다는 역설적인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건강할 때는 자기의 건강에 의지하는데 인간의 건강이란 순식간에 없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아침 안개같이 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언제 치명적인 병이 걸려서 생명이 파멸될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사 2:22에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약할 때는 생명의 능력되신 주님께 매분, 매시, 매초 의지하고 살게 되므로 주님의 건강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약할 때는 나를 붙들어 주실 주님을 의지하고 병들었을 때 나를 치료하는 주님을 바라보고 기도하고 의지합니다. 그것도 한번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시시각각으로 주님이 붙들어 주지 아니하면 힘이 없고 살아갈 수 없으므로 매시, 매분, 매초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께서 그 생명의 능력을 부어 주심으로 주님의 건강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시41: 3~ 4에 “야훼께서 그를 병상에서 붙드시고 그가 누워 있을 때마다 그의 병을 고쳐 주시나이다 내가 말하기를 야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주께 범죄 하였사오니 나를 고치소서 하였나이다.” 그렇게 말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의지하면 믿음의 번지점프를 하며 삽니다. 매일같이 주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믿음으로 불가능한 것을 도전하면서 나가는 것입니다. 병상에 드러누울 수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입었다는 말씀을 듣고 병상에서 일어나며 걸음걸이를 못하는데도 이 말씀을 의지하고 걷고 직장에 나갈 수 없는데도 이 말씀을 의지하고 직장에 나가고 일할 수 없는데도 이 말씀을 의지하고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간마다 주님의 은혜를 의지하므로 건강한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약한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도 견디지 못할 강한 노동을 주님을 의지하므로 주님의 능력으로 하고 건강한 사람이 할 수 없는 여행도 주님의 능력을 의지해서 그 여행을 마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후12: 9에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 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바울선생은 형언 할 수없이 몸이 약했습니다. 그가 주님께 의지 안했으면 약봉지 가지고 늘 드러누워 있을 사람인 것입니다. 너무나 몸이 약했기 때문에 한번 주님께 나와서 몸을 건강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나 응답받지 못하고 두 번째 주님께 매달려도 응답받지 못하고 세 번째 주님께 나와서 ‘주님, 나의 몸을 건강하게 해주셔야 내가 주님 섬길 수 있습니다.’ 하니까 주님께서 말씀하기를 ‘바울아, 네가 약할 때 네가 강하다. 네가 약할 때 나를 의지하고 기도하고 나를 붙들므로 내가 너와 같이 하므로 너를 강하게 만들어 준다.’ 그래서 그 병약한 바울이 주님을 의지하고 온 천하만국에 다니면서 복음을 증거하고 수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그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강의 위험, 도적의 위험, 광야의 위험, 배고픔, 헐벗음, 굶주림, 떪, 바다에서 파선하여 3일 동안 물위에 떠돌아다니는 그 고통, 수많은 매를 유대인에게 돌로 얻어맞고 건강한 사람도 감당할 수 없을만한 고통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선생은 이것을 다 극복하고 그가 달려갈 길을 달려가고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을 의지해서 주님의 평강으로 살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약하나 주님의 건강으로 건강한 사람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약함을 자랑한다고 바울은 말하기를 고후12:10에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주 없이 살 수 없어. 순간순간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바라보니 주님의 능력으로 그는 살았던 것입니다. 오늘 그러므로 이 역설적인 의미가 우리 기독교 신앙인인 것입니다. 병이 있고 몸이 연약한데 저 사람이 어떻게 건강한 사람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더 활달하고 더 행복하게 사느냐. 희한하지 않느냐. 그것은 희한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약하고 병들고 무능력해도 그를 살리고 건강 주시고 힘을 주시는 주님께 시시각각으로 의지하기 때문에 주님의 건강으로 살고 주님의 능력으로 살고 주님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러므로 약한 사람이 더 강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은 더 강한 예수님께 의지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1967년 이스라엘의 총리였던 골다 메이어 여사는 굉장히 인물이 못났습니다. 제가 볼지라도 남자얼굴같이 생겼어요. 나라도 골다 메이어 같은 여자하고 살라하면 천리로 달아날 것입니다. 완전히 남상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이스라엘의 총리가 되어서 어려울 때 이스라엘을 튼튼한 국가로 세우는 놀라운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죽고 난 다음 자서전에 이런 말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내 얼굴이 못난 것이 다행입니다. 나는 못났기 때문에 아무 남자도 나에게 프로포즈도 안하고 시집도 못가고 그러므로 내가 열심히 공부해서 나의 약함이 오히려 강함이 되어서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이스라엘의 총리대신이 될 수 있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사실 여러분 보세요. 다 그렇지는 않지만 우리 한국에도 훌륭한 의사 선생님, 훌륭한 대학교수, 훌륭한 기술자, 훌륭한 정치가들 중에 인물 좋은 여자들 별로 없습니다. 인물이 좋은 여성은 학교 공부할때부터 남자들이 찝쩍거려서 견디지를 못합니다. 졸업하자마자 차서 데리고 가버리기 때문에 그러나 인물이 못나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하고 전문지식을 얻어서 사회적으로 훌륭한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손해 보지 않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클린턴 대통령 부인이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기가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면 클린턴이 와서 옆에 앉아서 책은 안보고 자기만 처다 보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클린턴하고 결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골다 메이어 같이 나는 인물이 못났기 때문에 아무 남자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나는 시집도 못가고 그 반면에 나는 열심히 공부를 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그러한 훌륭한 총리대신이 되었다고 그는 말한 것입니다. 그는 죽고 난 다음에 알게 되었는데 골다 메이어가 수상 자리에 있는 12년 동안 아무도 모르게 백혈병과 사투를 벌였다는 것입니다. 그의 몸에는 혈액 암이 있어서 백혈병으로 말미암아 시시각각으로 어지럼증으로 쓰러지고 구토를 하고 고통을 당했지만 하나님께 그로 말미암아 죽도록 의지해서 하나님 능력으로 훌륭한 총리대신의 일을 할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약함이 곧 강함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강한 자는 하나님을 의지 하지 않지만 약한 자는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말미암아 오히려 그 약함이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이 나타나는 그릇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역설적인 것입니다. 성경에 역설적인 말씀으로 너희가 약할 때 내가 강하다. 너희가 강하면 강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오히려 우리의 약한 것을 자랑하고 내가 약함으로 주님께 의지하기 때문에 주님이 나를 통하여 강한 능력을 베풀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감사해야 될 것입니다.
3. 가난한 곳에 부요와 형통의 은혜가 넘친다.
배가 고픈 자가 음식을 찾고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는 것처럼 가난하기 때문에 부요하신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돈 있고 부요한 사람이 하나님 믿습니까? 배고프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이 나를 도와줄 수 있는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까?
제가 1958년도에 불광동에서 개척했을 때는 너무나 사람들이 헐벗고 굶주리고 가난했었습니다. 그들에게 내가 그리스도께서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해주신다고 복음을 전했을 때 사람들은 내말에 귀를 기울이고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찾아 나온 것입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기복신앙을 전도한다고 욕을 하지만 여러분 사람들이 헐벗고 굶주리고 가난하면 하나님밖에 찾을 데 없는 것입니다. 내가 등 따뜻하고 배부르면 하나님을 안 찾잖아요. 헐벗고 굶주리고 배고프면 사람들이 안도와주고 나라도 안도와 주는데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지요. 하나님께 복을 받아 복을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기 위해서 잘 사용하면 복은 큰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축복을 받아서 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 자랑을 위해서 쓴다면 복이 해가되고 독이 되지만 축복을 올바르게 사용하면 축복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축복을 받아야 하나님 사업도 하고 축복을 받아야 이웃사람들을 도와 줄 수도 있고 기부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와 주셔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삼상 2: 7~ 8에 “야훼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난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하나님은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했는데 그 하나님은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가난하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빈 손들고 고향산천 떠났지만 훗날에는 그는 가나안에서 큰 부자로 거인이 된 것입니다. 그 종 엘리에셀이 창24:35에 주인 아브라함에 대해서 말하기를 “야훼께서 나의 주인에게 크게 복을 주시어 창성하게 하시되 소와 양과 은금과 종들과 낙타와 나귀를 그에게 주셨고”라고 증거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집에서 사병을 318명을 길렀습니다. 어떠한 부자도 자기 사병을 318명을 기를 수가 없습니다. 그럴 정도로 아브라함은 거부가 되고 장성했던 것입니다. 그 아들 이삭은 어떠했습니까? 창26:12~14에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야훼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았다” 성경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거지가 되어 헐벗고 굶주려 동냥하고 살았다.”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침내 창대하여 거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축복해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은 어떠했습니까? 야곱은 외삼촌 집에 갈 때 지팡이 하나 들고 가서 20년 동안 외삼촌 집에서 일하며 살았는데 그가 돌아올 때는 하나님이 거부가 되어서 돌아오게 한 것입니다. 그는 성경에 말하기를 창32:10에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가난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요하고 풍성하게 은혜를 주어서 하나님을 잘 섬기며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고통당하는 이웃을 도와 줄 수 있는 힘이 있게 만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교회 나오면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을 찾으면 복을 받습니다. 기복신앙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복을 구하는 신앙이 좋은 신앙인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께 복을 받아 장성하기 때문에 교회를 300개나 개척하고 600명의 선교사를 내보내고 엘림 복지동산을 세워서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젊은 청년들과 노인들을 돌보아 주고 대학을 세우고 신문사를 세우고 NGO를 통해서 온 북한과 전 세계에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복을 주셨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남을 도와주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복을 받아 내 탐욕을 가지고 살겠다고 하면은 그 복이 나쁘지 복을 올바르게 사용하면 얼마나 큰 복이 되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처럼 복을 받아 하나님께 헌금하고 헌신하고 이웃을 돌보아 주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갈 3: 9에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복을 받겠다고 성경은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난을 짓지 않았습니다. 에덴을 만들었을 때 에덴은 아름답고 영광스럽고 부요로 충만했습니다.
창 2: 8~ 9에 “야훼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야훼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동산에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낙원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난과 저주가 오게 된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거역하고 타락하므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아 가난과 헐벗음과 굶주림이 오게 된 것입니다.
창 3:17~19에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
여러분,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라 했으니 얼마나 고생과 수고와 가난과 괴로움이 따른 것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범죄 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새로운 조상,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몸 찢고, 피 흘리심으로 아담이 가져온 모든 이 저주를 청산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우리의 모든 가난이, 저주가 청산된 것입니다.
고후 8: 9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이 33년 동안의 삶은 풍찬노숙을 하며 살았습니다. 헐벗고 굶주리며 길거리에서 주무시고 살았습니다. 왜냐, 그의 가난함으로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함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의 가난을 그의 33년 생애를 통해서 청산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당할 때도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갈 3:13~14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아담이 가져온 저주를 다 청산하시고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준 복을 우리에게도 주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으면 복 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복 받는 길 인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도 잘되게 하고 강건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과 믿음으로 부요하게 되고 그 믿음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깨달아 알아서 내가 저주받은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께 복 받은 사람이요, 그리스도의 가난을 통해서 축복을 받은 사람인 것을 깨달아 알게 되고 복 받은 나를 꿈꾸고 바라보고 생각하고 이를 믿고 나는 복 받은 사람이라고 언제나 입술로 시인하고 고백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면 마음에 넘치는 복이 우리 생활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너희 마음에 가득한 것이 밖으로 나온다.
“네 믿음대로 될 찌어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복을 받을만한 확실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저주를 몸으로 십자가에서 다 청산해 버리고 말았기 때문에 예수 안에서는 아브라함의 복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확실한 것입니다.
고전 2: 9에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예비한 복은 우리 상상을 초월합니다. 눈에 못보고 귀로 못 듣고 마음으로 깨달을 수 없을 정도의 복을 예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보이리라. “목사님 나 같은 처지에 어떻게 복을 받겠습니까? 나는 지식도 없고 능력도 없고 돈도 없고 세상의 쓰레기더미 같고 무능력하고 버림받은 사람인데 내게 무슨 희망이 있습니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절대로 그런 말을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비밀한 길을 예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놀라운 축복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예비해 놓았기 때문에 우리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지 못했습니다. 크고 비밀한 일을 예비해 놓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허락해 주시면서 언제나 주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놀랬지? 깜짝 놀랬지?”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혀 생각도 못하고 상상도 할 수 없고 꿈도 못 꿀 일을 주님은 예비해 놓았기 때문에 주께 능치 못하심이 없으므로 강하고 담대하게 믿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의 축복은 먼저 마음속에 깨닫고 바라보는 법칙으로 꿈과 환상을 가지고 내가 믿고 입으로 시인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고후 1:20에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한국에 박사 마을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2003년 2월 7일 국민일보 기사에 춘천시 서면에 관한 기사가 난 적이 있습니다. 서면은 원래 춘천에서 가장 가까운 동네입니다. 그러나 지리상으로 춘천에서 멀지는 않지만 강을 2개나 건너야 되기 때문에 굉장히 외지고 벽지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농토가 적고 경제적으로 낙후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1954년 금산리에 금산교회가 설립되고 복음이 전파되면서부터 달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유교의 전통에서 체면과 의식을 중시하던 수동적인 주민들의 기질이 복음을 듣고 난 다음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바뀌어 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에 예수를 믿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금산교회의 홍순우 목사는 서면이 발전한 주요한 원인 중 하나가 ‘교회를 통해 받아들인 복음과 새로운 사고’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런데 현재 서면은 일명 ‘박사 마을’이라고 불리는데, 실제로 이 마을에서만 박사학위를 취득한자가 78명이나 있습니다. 조그마한 동리에 78명이 박사를 받고 전국 면 단위로 가장 많은 박사가 그곳에서 태어났고 이 외에도 초, 중등 교장급 이상 교육자가 71명, 국회의원이 3명, 군수가 5명, 법조인이 6명, 교육감이 2명, 5급 이상 공직자도 60여명이 나왔고 목사도 10명이나 나왔습니다. 가난한 한 고장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가자 말씀과 믿음으로 부요케 되자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여러분 금산리의 조그마한 가난한 동리에 복음이 전파되자 저주가 사라지고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난 것처럼 오늘날 우리나라가 복 받는 길은 예수 잘 믿는 길인 것입니다. 여러분 개인과 자녀들이 복 받고 잘사는 것은 예수 잘 믿는 길이 최선의 길인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수단과 방법으로 노력을 해도 하나님이 복을 안주시면 아무 효과가 없는 것입니다. 농부가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김을 매도 비가 안 오면 다 말라죽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위에서 하나님이 복을 주어야 교육도 받고 노력도 하고 사업도 하고 모든 하는 것이 열매를 맺고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에게 부요를 주시는 좋은 하나님인 것을 믿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23:25에 “네 하나님 야훼를 섬기라 그리하면 야훼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서 병을 제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23: 1에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아 복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고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이웃을 돕는데 사용하면 하나님은 자꾸 30배, 60배, 100배로 더 넘치게 부어주는 것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돌려 줄 것이니 후히 되어 눌러 흔들어 넘치게 해서 안겨 주리라. 우리가 복을 받아서 내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쓴다면 이는 기복신앙이요, 잘못된 신앙인 것입니다. 그러나 복을 받아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고 돌보아 주기 위해서 사용하는 복음 받으면 받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복으로 여러분에게 채워 주시고 우리나라에 넘치게 채워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독일의 사회학자요, 경제학자인 막스 베버는 “유럽 사회에 자본이 형성되고 복지국가가 형성된 이유는 기독교인의 마음속에 ‘재물의 주인은 하나님이다’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서구 경제의 근간이 기독교인의 믿음에서 출발했습니다. 유럽이 잘 살게 되고 미국이 잘살게 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물질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니 복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겨 살아야 되겠다는 그러한 올바른 신앙의 자세를 가졌으므로 하나님이 유럽과 미국을 복 주셔서 세계 일등국가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가난을 부요로 만드시는 것은 역설적인 것입니다.
[결론]
여러분!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이 역설적으로 달라집니다. 하나님은 판을 바꾸는 것입니다. 악을 선으로 바꾸고 절망의 판을 뒤엎어서 축복과 소망의 판으로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역설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어두움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밝음이 되어 버리고 저주가 축복이 되어 버리고 절망이 소망이 되어 버리고 가난이 부요가 되어 버리고 죽음이 영생으로 변화되어 버리고 말기 때문에 하나님은 판을 바꾸시는 역설적인 역사를 하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후 5:17의 말씀대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전 식 사고로 살지 않습니다. 이전 식 꿈으로 꿈꾸지 않습니다. 이전 식으로 믿지 않습니다. 이전 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새롭게 된 것입니다. 새로운 생각을 하고 새로운 꿈을 꾸고 새로운 믿음으로 갖고 새로운 말을 하고 새로운 찬양을 부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같이 계시면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넘쳐나고 병든 곳에 치료와 건강이 넘쳐나고 가난한 곳에 오히려 축복과 부요가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찾아와서 우리의 모든 상상을 초월한 위대한 기적적인 역사를 베풀어 주십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여!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 되심을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역전의 하나님이라 우리에게 와서 역설적인 일을 얼마든지 행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사방으로 우겨싸임을 받은 것 같으나 하나님이 보시면 싸이지 아니하고 사람보기에는 낙심한 것 같으나 하나님 편에 보면 낙심하지 아니하고 사람 편에서 보면 핍박을 받아 버림받은 것 같으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위로와 평안이 넘치게 되고 사람 편에서 보면 거꾸러뜨림을 당해 죽은 것 같으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불사조같이 살아 일어나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세상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반대되는 형상이 우리에게 항상 나타남을 알고 믿고 감사하고 찬양하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신앙으로 나가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 아멘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기독교 신앙과 역설’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욕을 얻어먹는데도 실제 내용인즉 오히려 그것이 영광이 되는 것이 역설이 아닙니까? 사람들 보기에는 악한 사람들 같은데 사실 알아보면 정말 아름답고 선하고 착한 사람입니다. 이것도 역설입니다.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된 것을 전하는 자들이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무명한 사람 같으나 실제 하나님 앞에서는 유명한 사람인이 기독교 신자들인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는 세상이 보는 것과 하나님이 보시는 것에는 완전히 다른 역설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질그릇 같은 인간이 그 안에 죽으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시고 있으면 겉으로 보기에는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서 이제는 재기불능으로 보이는데도 불과하고 내용인즉 주님을 의지하고 싸이지 아니하고 승리롭게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우리 기독교 신앙인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답답한 일을 당하여 이제는 재기불능이 되는 것 같으나 안으로 보면 전혀 낙심치 아니하고 담대하고 용감하고 평안한 것입니다. 밖에서 볼 때 핍박을 당해 외톨이가 된 것 같으나 주님의 품안에서 위로 받아 버림받지 않고 더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이 신앙의 역설인 것입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해서 망한 것 같은데 어디를 봐도 망한 것 같은데 불사조처럼 살아나는 것이 우리 신앙인의 현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이란 하나님이 언제나 악을 선으로 바꾸시면 판을 바꾸어 버리는 놀라운 역사를 베푸는 역설적인 은혜의 의미가 넘쳐나고 있는 것입니다.
[본론]
1. 죄가 많은 곳에 용서와 의의 은혜가 넘친다.
생각해 보십시오. 의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아야 될 것인데 성경은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죄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더 많은 은혜를 받는다.
탕자의 비유에서 보면 한 농부가 두 아들을 길렀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자기 몫의 택한 재산을 달라고 강요를 했습니다. 그 아들은 자기가 지혜가 있고 총명이 있고 모략이 있고 재능이 있고 당당하고 자신만만하고 잘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디가도 아버지쯤은 제켜놓고 더 잘 살 수 있다는 자신이 넘쳐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재산을 나누어 받아서 그는 아버지가 없는 먼 나라로 가서 자기중심에 서서 당당하게 허랑방탕하면서 살았는데 나중에는 재산이 다 동나고 그 나라에 기근이 와서 밥도 먹을 수 없는 호구지책을 세울 수 없는 비참한 처지에 떨어졌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직장을 구하는데 나중에는 제일 천한 직업인 시골에 가서 돼지를 치는 직원으로 등용이 되고 돼지를 치면서 배가 고파서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얻어먹으려고 하다가도 그것도 충분하지 못해서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완전히 비참하게 되었을 때에 마음에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얼마나 무능력하고 실력이 없고 바보천치 같고 살아날 수도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달은 것입니다. 탕자가 되어 깨어지고 나니 그때는 내가 과거에 살았던 것은 전적 아버지의 은혜로 살았다. 아버지가 은혜가 없으면 이제 살수가 없다는 자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 탕자가 아버지 집에 있을 때는 자기가 잘나고 실력이 있고 능력이 있고 당당하고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아버지의 은혜는 전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은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생활전선에 나와서 낭패와 실망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고 깨어지고 의지할 것 없게 되어서 비로소 자기가 얼마나 못나고 바보천치 같고 무능력하고 실력이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 알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집에 있을 때 살았던 것이 모두다 아버지의 은혜로써 살았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고 앞으로도 아버지의 은혜가 없이는 결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성경 눅15:17~19에 보면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 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 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처럼 변화된 것입니다. 이제는 아들도 될 자격이 없이 하루하루 품팔이해서 먹고 사는 품꾼의 하나로써 고용해 달라고 아버지께 구하겠다. 그와 같이 깨어진 것은 고통이 다가와서 그 실상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고통이 없을 때는 그가 잘 난줄 알았는데 고통을 당하고 그의 실상이 벗겨지자 얼마나 못난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그가 살아나온 모든 과거는 아버지의 은혜고 앞으로도 살아나갈 길은 아버지의 은혜밖에 없다는 은혜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타락하기 전에는 은혜를 몰랐습니다. 타락한 이후로 은혜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타락하지 않은 맏형은 집에 있으면서 아버지에게 원망, 불평하면서 아버지의 은혜를 조금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고통이 다가오고 우리가 얼마나 못났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때 은혜에 대한 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바리새인의 집에 초청을 받아서 식사를 하다가 가는데 그 동네에서 아주 죄 많은 창녀, 모든 사람이 죄인으로 하는 그 여자가 예수님 뒤에 따라오면서 계속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의 발에 키스하고 눈물로 발을 적시고 머리를 풀어서 그 발을 닦고 향유를 그 발에 부었습니다. 계속 따라오면서 그렇게 하니까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왔는데 바리새인 시몬이 보니까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선지자라고 하는데 ‘아니구나. 만일 그렇다면 저 더러운 여자가 계속 와서 눈물을 흘리고 발에 입을 맞추고 머리로 발을 씻고 향유를 부으면 부정 타는데 그렇게 못하게 할 것인데 저렇게 아무것도 모르고 허락하는 것 보니 사람을 통찰하는 안목이 없고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구나.’ 그렇게 속으로 비평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아! 시몬아!” “예!” “한 사람이 두 사람에게 돈을 빌려 주었다. 한 사람은 50 데나리온, 다른 사람에게는 500 데나리온의 빚을 주었는데 둘이가 다 빚을 못 갚았다. 그래서 간청하기 때문에 빚을 탕감해 버렸는데 50 데나리온 빌린 사람도 탕감해주고 500 데나리온 빚진 자도 탕감해 주었는데 그 중에 누가 더 채주를 사랑하겠느냐?” “아! 그야 500 데나리온 탕감 받은 사람이 많이 탕감 받았기 때문에 그 은혜를 크게 감사하고 느끼겠지요.” “맞았다. 내가 여기 들어올 때 저 여자는 끊임없이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발을 닦고 향유를 붓고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않았다. 너는 내가 들어올 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고 내 뺨에 입도 맞춰 주지 아니하고 머리에 감람유도 부어주지 않았다. 이 여자가 나를 이렇게 많이 사랑하는 것은 많은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에 그 은혜에 감격해서 나를 사랑한 것이다. 적게 용서받고 적게 은혜 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하나 많이 용서받은 사람, 큰 은혜를 마음속에 느끼고 크게 사랑하느니라.” 그리고 그 여자를 보고 말하기를 “여자여, 내 죄가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여기 말씀하신 것은 뭡니까? 죄를 많이 용서받았으면 그 죄 용서받은 것을 깊이 느끼고 그 은혜에 감격해서 더 많이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청년시절에 부산 대신동에 있는 월드미션이라는 교회에 출석을 했습니다. 거기 목사님이 루피 리차드 목사님이었는데 같이 교회 나오는 북한에서 피난 나온 자매님이 한분 계셨습니다. 그 자매님은 자기 딸을 늘 데리고 교회를 나왔는데 그 딸은 중등학교 교사로 있다가 연애를 했으나 남자에게 배반을 당하고 그로 말미암아 고통을 하다가 정신병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도와주지 않고는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는 딸입니다. 늘 싱글벙글 웃고 있어요. 그 딸을 데리고 언제나 교회 와서 내 옆에 앉아서 예배를 드립니다. 늘 하나님 앞에서 기도를 하면서 눈물을 비 오듯이 흘리고 손수건을 적시도록 울어요. 그래서 내가 “할머님, 매일같이 예배를 드리면서 왜 웁니까?” 그러니까 “청년은 울지 않느냐?” “나는 울 것이 없는데요. 나는 안 우는데요.” “나는 죄 많아서 내 죄를 자꾸 파헤치고 죄를 회개할수록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하루도 눈물을 흘리지 않고 살수가 없네.” 내 생각으로 과부로써 혼자 불쌍한 딸을 데리고 사는데 무슨 죄를 그렇게 많이 지어서 저렇게 우는가. 조금 모자라는 분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제가 돌이켜 보니 얼마나 제가 어리석고 바보 같고 천치 같은 놈인지 모르겠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죄를 많이 짓거나 적게 짓거나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깊은 죄인이냐는 것을 깊이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이 감사하고 그 은혜에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고 주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젊을 때는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죄의 깊이를 깊이 느끼지 못하므로 십자가에 몸 찢고, 피 흘려, 죄를 용서하신 주님의 은혜를 깊이 감동하게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세월이 흘러가고 나이를 먹게 되면 과거를 돌이켜 보게 되고 과거를 돌이켜 보게 되면 지은 것이 죄밖에 없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젊을 때는 죄가 없는 줄 알았는데 나이를 먹고 뒤를 돌아보니 모든 걸음걸음마다 죄를 지은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너무나 고마워. 젊을 때는 느끼지 못한 그 죄를 용서받은 은혜가 너무나 고마워서 눈물을 흘리게 되고 그리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많이 용서받은 사람은 많은 은혜를 받고 많이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평양의 바울이라고 불리는 이기풍 목사는 원래 장안의 소문난 불량배요, 건달이었습니다. 잔칫집마다 찾아다니며 술 내어 놓으라 떡 내놓으라고 고함을 치고 잔치 집을 풍비박산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우리나라에 온 모펫이 복음을 증거 하는데 그 집에 친구들과 함께 찾아가서 돌을 던지고 모펫 선교사를 때리고 돌로써 턱을 쳐서 턱이 부스러져서 병원에 입원까지 하게 만들었습니다. 얼마 후 그가 원산에 갔다가 또 다른 선교사를 만났습니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 모펫 선교사가 떠올랐습니다. ‘그 사람은 왜 내게 얻어맞고 돌로써 턱이 맞아 뼈가 부러져도 나에게 반항을 안했을까? 원망 한마디 안하고 나에게 주먹질 안하고 순순히 매를 맞고도 나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했는데 내가 정말 나쁜 사람이구나.’ 그런 마음에 충격이 왔습니다. 그런데 하루 밤에 잠을 자는데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피를 쭉쭉 흘리시면서 흰옷을 입은 분이 나타나서 “기풍아, 기풍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그래서 “누구십니까? 언제 내가 당신을 핍박했습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 그리스도라. 기풍아, 내가 너를 택해서 나의 증인으로 삼겠노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놀라서 깨어 나보니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이전에 지었던 죄들이 꼬리를 물고 가슴속에 다가왔습니다. 건축하던 장대현 교회를 때려 부순 일부터 시작해서 선교사를 때리고 그의 집에 돌을 던진 일 등 수많은 죄가 떠올랐습니다. 가슴을 치고 통곡을 해도 시원치가 않아요. 너무나 죄 많고 죄가 깊었습니다. 몸부림을 치다가 그는 스왈른 선교사를 찾아 갔습니다. 그리고 스왈른 선교사에게 자기 모든 과거의 일을 고백하니까 스왈른 선교사님이 “당신의 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몸 찢고, 피 흘려 다 청산한 것이오.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면 예수님이 값없이 용서해 준답니다.” 이기풍 목사님은 너무나 죄악을 깊이 통회하고 자복했기 때문에 은혜를 넘치게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 마음에 넘쳐났고 예수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불 붓듯이 부었습니다. 그는 곧 신학교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고 한국에서 처음 초대목사가 되어서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 받아 7년을 제주도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제주도에 교회 기초를 쌓았습니다. 그리고 전라도 일대에서 복음을 증거 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잡혀서 신사참배 반대한다고 너무나 큰 고문을 받아 그 결과로 세상을 뜨고 천국 가셨습니다. 교회를 핍박하고 선교사를 괴롭히던 청년이 예수님의 용서를 체험하자 그 용서가 너무나 감사하고 감격해서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더 열렬히 주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일생을 바치고 목숨까지 바치는 위대한 주의 종이 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깊이 뉘우치면 뉘우칠수록 용서해 주신 주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게 되고 은혜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주님에 대한 사랑이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용서 안 받은 사람은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용서받은 사람이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너무나 감격적으로 가슴에 사무쳐 오는 것입니다.
딤전 1:15에 보면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바울선생이 일평생을 수 없는 고통과 괴로움에서 허덕이면서도 복음을 전한 것은 주님의 은혜를 너무나 크게 받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다.” 이와 같은 큰 죄인을 주님이 용서해 주셨으니 그 은혜가 너무나 크고 그 은혜 때문에 그리스도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 사랑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내가 죄를 많이 지어야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은 죄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가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하는 은혜가 넘쳐난다는 것입니다. 나의 죄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를 같잖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죄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내 죄가 얼마나 깊고 높고 넓고 무서운 것인지를 알게 되고 그를 용서해 주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깊이깊이 느끼게 되고 감격하게 되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의 성령이 오셔서 우리의 마음에 깊은 깨달음을 주셔서 회개하게 만드시고 주님의 은혜를 넘치게 받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찬송가 138장을 보면 그 찬송가 작가의 마음속에 느끼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읽을 수가 있습니다.
만왕의 왕 내 주께서 왜 고초 당했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그 보혈 흘렸네.
♬ 1. 만왕의 왕 내 주께서 왜 고초 당했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그 보혈 흘렸네.
2. 주 십자가 못 박힘은 속죄함 아닌가. 그 긍휼함과 큰 은혜 말할 수 없도다.
후렴)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
3. 늘 울어도 그 큰 은혜 다 갚을 수 없네. 나 주님께 몸 바쳐서 주의 일 힘쓰리.
주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고 헌신하여 주님을 사랑해서 일생을 내어 맡기지 주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어떻게 받나요.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 것을 깊이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내 죄를 깨닫게 해주시면 죄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은 역설적입니다. 내가 의롭다고 할 때는 은혜를 받지 못하나 내가 죄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많게 되는 것입니다.
♬3. 늘 울어도 그 큰 은혜 다 갚을 수 없네. 나 주님께 몸 바쳐서 주의 일 힘쓰리.
후렴)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감사하면 우리한번 박수 하십시다.
죄의 추악함과 더러움을 깨달을수록 예수님의 용서의 은혜를 깊이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저는 별로 눈물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최자실 목사님이 조용기 목사의 눈에 눈물이 있으면 얼마나 많은 사람을 감동시킬 것인데 눈물이 없다고, 그런데 최자실 목사님이 이 교회에 오셔서 기도만 하면 훌쩍훌쩍 우시기 때문에 나는 강단에 앉아서 ‘참 주책이다. 자꾸 울어서 부끄러워 못 견디겠네.’ 그랬는데 이제 제가 크게 후회합니다. 그때 저는 젊었을 때 고 최자실 목사님은 연로하셔서 인생을 살아오면서 죄의 깊이와 그리스도의 용서의 은혜의 크심을 깨달아 알았는데 저는 말씀을 증거 하면서 너무나 피상적으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았습니다. 내 죄의 깊이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많이 받지 못했기 때문에 눈물이 없었어요. 그런데 요사이는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나와서 부끄러워 못 견디겠어요. 손수건 없이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할 수가 없는 것은 나이를 먹으니까 내가 살아온 모든 발걸음마다 ♬걸음마다 자국마다 다 죄 뿐입니다. 쓰리고 아픈 마음 가눌 길 없어서 골고다 언덕 위로 지금 찾아옵니다.♬ 걸음마다 자국마다 죄밖에 기억이 안나니 십자가의 은혜가 얼마나 고마운지 말로 다할 수가 없어요. 그 은혜가 없이는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수가 있겠습니까? 영원히 지옥 불에 탈 수밖에 없는데 주님이 날 대신 지옥불이 타시고 날 대신 못 박혀 고통과 눈물을 흘려주시고 건져주신 그 은혜가 얼마나 큰지 말로 다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고후 5:21에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엡 2: 8에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율법의 방망이로 얻어맞은 자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치료가 가능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율법 앞에서 죄의 깊이를 깨달은 사람이 비로소 은혜로 용서를 받고 변화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는 역설적인 그리스도의 은혜를 우리가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 병약한 곳에 치료와 건강의 은혜가 넘친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쓸 데 있다고 성경에 말한 것처럼 건강하면 자기 건강을 의지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치료를 바랄 필요도 없고 바라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몸이 약하면 이 세상에도 의원을 찾아가고 약을 찾는 것처럼 우리 주를 믿는 사람은 몸이 약하면 치료하는 예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벧전 2:24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이 말씀을 전에는 별로 관심 없게 보았는데 병들면 이 말씀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고쳐줄 주님이 채찍에 맞으시므로 내 병을 다 갚았으니 그 은혜로 말미암아 나도 병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소망과 믿음을 얻을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치료의 대속의 은혜는 병이 들었을 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내가 약할 때 내가 강하다는 역설적인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건강할 때는 자기의 건강에 의지하는데 인간의 건강이란 순식간에 없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아침 안개같이 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언제 치명적인 병이 걸려서 생명이 파멸될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사 2:22에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약할 때는 생명의 능력되신 주님께 매분, 매시, 매초 의지하고 살게 되므로 주님의 건강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약할 때는 나를 붙들어 주실 주님을 의지하고 병들었을 때 나를 치료하는 주님을 바라보고 기도하고 의지합니다. 그것도 한번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시시각각으로 주님이 붙들어 주지 아니하면 힘이 없고 살아갈 수 없으므로 매시, 매분, 매초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께서 그 생명의 능력을 부어 주심으로 주님의 건강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시41: 3~ 4에 “야훼께서 그를 병상에서 붙드시고 그가 누워 있을 때마다 그의 병을 고쳐 주시나이다 내가 말하기를 야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주께 범죄 하였사오니 나를 고치소서 하였나이다.” 그렇게 말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의지하면 믿음의 번지점프를 하며 삽니다. 매일같이 주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믿음으로 불가능한 것을 도전하면서 나가는 것입니다. 병상에 드러누울 수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입었다는 말씀을 듣고 병상에서 일어나며 걸음걸이를 못하는데도 이 말씀을 의지하고 걷고 직장에 나갈 수 없는데도 이 말씀을 의지하고 직장에 나가고 일할 수 없는데도 이 말씀을 의지하고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간마다 주님의 은혜를 의지하므로 건강한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약한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도 견디지 못할 강한 노동을 주님을 의지하므로 주님의 능력으로 하고 건강한 사람이 할 수 없는 여행도 주님의 능력을 의지해서 그 여행을 마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후12: 9에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 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바울선생은 형언 할 수없이 몸이 약했습니다. 그가 주님께 의지 안했으면 약봉지 가지고 늘 드러누워 있을 사람인 것입니다. 너무나 몸이 약했기 때문에 한번 주님께 나와서 몸을 건강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나 응답받지 못하고 두 번째 주님께 매달려도 응답받지 못하고 세 번째 주님께 나와서 ‘주님, 나의 몸을 건강하게 해주셔야 내가 주님 섬길 수 있습니다.’ 하니까 주님께서 말씀하기를 ‘바울아, 네가 약할 때 네가 강하다. 네가 약할 때 나를 의지하고 기도하고 나를 붙들므로 내가 너와 같이 하므로 너를 강하게 만들어 준다.’ 그래서 그 병약한 바울이 주님을 의지하고 온 천하만국에 다니면서 복음을 증거하고 수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그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강의 위험, 도적의 위험, 광야의 위험, 배고픔, 헐벗음, 굶주림, 떪, 바다에서 파선하여 3일 동안 물위에 떠돌아다니는 그 고통, 수많은 매를 유대인에게 돌로 얻어맞고 건강한 사람도 감당할 수 없을만한 고통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선생은 이것을 다 극복하고 그가 달려갈 길을 달려가고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을 의지해서 주님의 평강으로 살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약하나 주님의 건강으로 건강한 사람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약함을 자랑한다고 바울은 말하기를 고후12:10에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주 없이 살 수 없어. 순간순간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바라보니 주님의 능력으로 그는 살았던 것입니다. 오늘 그러므로 이 역설적인 의미가 우리 기독교 신앙인인 것입니다. 병이 있고 몸이 연약한데 저 사람이 어떻게 건강한 사람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더 활달하고 더 행복하게 사느냐. 희한하지 않느냐. 그것은 희한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약하고 병들고 무능력해도 그를 살리고 건강 주시고 힘을 주시는 주님께 시시각각으로 의지하기 때문에 주님의 건강으로 살고 주님의 능력으로 살고 주님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러므로 약한 사람이 더 강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은 더 강한 예수님께 의지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1967년 이스라엘의 총리였던 골다 메이어 여사는 굉장히 인물이 못났습니다. 제가 볼지라도 남자얼굴같이 생겼어요. 나라도 골다 메이어 같은 여자하고 살라하면 천리로 달아날 것입니다. 완전히 남상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이스라엘의 총리가 되어서 어려울 때 이스라엘을 튼튼한 국가로 세우는 놀라운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죽고 난 다음 자서전에 이런 말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내 얼굴이 못난 것이 다행입니다. 나는 못났기 때문에 아무 남자도 나에게 프로포즈도 안하고 시집도 못가고 그러므로 내가 열심히 공부해서 나의 약함이 오히려 강함이 되어서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이스라엘의 총리대신이 될 수 있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사실 여러분 보세요. 다 그렇지는 않지만 우리 한국에도 훌륭한 의사 선생님, 훌륭한 대학교수, 훌륭한 기술자, 훌륭한 정치가들 중에 인물 좋은 여자들 별로 없습니다. 인물이 좋은 여성은 학교 공부할때부터 남자들이 찝쩍거려서 견디지를 못합니다. 졸업하자마자 차서 데리고 가버리기 때문에 그러나 인물이 못나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하고 전문지식을 얻어서 사회적으로 훌륭한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손해 보지 않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클린턴 대통령 부인이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기가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면 클린턴이 와서 옆에 앉아서 책은 안보고 자기만 처다 보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클린턴하고 결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골다 메이어 같이 나는 인물이 못났기 때문에 아무 남자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나는 시집도 못가고 그 반면에 나는 열심히 공부를 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그러한 훌륭한 총리대신이 되었다고 그는 말한 것입니다. 그는 죽고 난 다음에 알게 되었는데 골다 메이어가 수상 자리에 있는 12년 동안 아무도 모르게 백혈병과 사투를 벌였다는 것입니다. 그의 몸에는 혈액 암이 있어서 백혈병으로 말미암아 시시각각으로 어지럼증으로 쓰러지고 구토를 하고 고통을 당했지만 하나님께 그로 말미암아 죽도록 의지해서 하나님 능력으로 훌륭한 총리대신의 일을 할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약함이 곧 강함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강한 자는 하나님을 의지 하지 않지만 약한 자는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말미암아 오히려 그 약함이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이 나타나는 그릇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역설적인 것입니다. 성경에 역설적인 말씀으로 너희가 약할 때 내가 강하다. 너희가 강하면 강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오히려 우리의 약한 것을 자랑하고 내가 약함으로 주님께 의지하기 때문에 주님이 나를 통하여 강한 능력을 베풀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감사해야 될 것입니다.
3. 가난한 곳에 부요와 형통의 은혜가 넘친다.
배가 고픈 자가 음식을 찾고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는 것처럼 가난하기 때문에 부요하신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돈 있고 부요한 사람이 하나님 믿습니까? 배고프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이 나를 도와줄 수 있는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까?
제가 1958년도에 불광동에서 개척했을 때는 너무나 사람들이 헐벗고 굶주리고 가난했었습니다. 그들에게 내가 그리스도께서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해주신다고 복음을 전했을 때 사람들은 내말에 귀를 기울이고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찾아 나온 것입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기복신앙을 전도한다고 욕을 하지만 여러분 사람들이 헐벗고 굶주리고 가난하면 하나님밖에 찾을 데 없는 것입니다. 내가 등 따뜻하고 배부르면 하나님을 안 찾잖아요. 헐벗고 굶주리고 배고프면 사람들이 안도와주고 나라도 안도와 주는데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지요. 하나님께 복을 받아 복을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기 위해서 잘 사용하면 복은 큰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축복을 받아서 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 자랑을 위해서 쓴다면 복이 해가되고 독이 되지만 축복을 올바르게 사용하면 축복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축복을 받아야 하나님 사업도 하고 축복을 받아야 이웃사람들을 도와 줄 수도 있고 기부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와 주셔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삼상 2: 7~ 8에 “야훼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난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하나님은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했는데 그 하나님은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가난하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빈 손들고 고향산천 떠났지만 훗날에는 그는 가나안에서 큰 부자로 거인이 된 것입니다. 그 종 엘리에셀이 창24:35에 주인 아브라함에 대해서 말하기를 “야훼께서 나의 주인에게 크게 복을 주시어 창성하게 하시되 소와 양과 은금과 종들과 낙타와 나귀를 그에게 주셨고”라고 증거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집에서 사병을 318명을 길렀습니다. 어떠한 부자도 자기 사병을 318명을 기를 수가 없습니다. 그럴 정도로 아브라함은 거부가 되고 장성했던 것입니다. 그 아들 이삭은 어떠했습니까? 창26:12~14에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야훼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았다” 성경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거지가 되어 헐벗고 굶주려 동냥하고 살았다.”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침내 창대하여 거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축복해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은 어떠했습니까? 야곱은 외삼촌 집에 갈 때 지팡이 하나 들고 가서 20년 동안 외삼촌 집에서 일하며 살았는데 그가 돌아올 때는 하나님이 거부가 되어서 돌아오게 한 것입니다. 그는 성경에 말하기를 창32:10에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가난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요하고 풍성하게 은혜를 주어서 하나님을 잘 섬기며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고통당하는 이웃을 도와 줄 수 있는 힘이 있게 만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교회 나오면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을 찾으면 복을 받습니다. 기복신앙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복을 구하는 신앙이 좋은 신앙인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께 복을 받아 장성하기 때문에 교회를 300개나 개척하고 600명의 선교사를 내보내고 엘림 복지동산을 세워서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젊은 청년들과 노인들을 돌보아 주고 대학을 세우고 신문사를 세우고 NGO를 통해서 온 북한과 전 세계에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복을 주셨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남을 도와주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복을 받아 내 탐욕을 가지고 살겠다고 하면은 그 복이 나쁘지 복을 올바르게 사용하면 얼마나 큰 복이 되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처럼 복을 받아 하나님께 헌금하고 헌신하고 이웃을 돌보아 주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갈 3: 9에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복을 받겠다고 성경은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난을 짓지 않았습니다. 에덴을 만들었을 때 에덴은 아름답고 영광스럽고 부요로 충만했습니다.
창 2: 8~ 9에 “야훼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야훼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동산에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낙원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난과 저주가 오게 된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거역하고 타락하므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아 가난과 헐벗음과 굶주림이 오게 된 것입니다.
창 3:17~19에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
여러분,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라 했으니 얼마나 고생과 수고와 가난과 괴로움이 따른 것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범죄 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새로운 조상,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몸 찢고, 피 흘리심으로 아담이 가져온 모든 이 저주를 청산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우리의 모든 가난이, 저주가 청산된 것입니다.
고후 8: 9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이 33년 동안의 삶은 풍찬노숙을 하며 살았습니다. 헐벗고 굶주리며 길거리에서 주무시고 살았습니다. 왜냐, 그의 가난함으로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함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의 가난을 그의 33년 생애를 통해서 청산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당할 때도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갈 3:13~14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아담이 가져온 저주를 다 청산하시고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준 복을 우리에게도 주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으면 복 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복 받는 길 인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도 잘되게 하고 강건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과 믿음으로 부요하게 되고 그 믿음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깨달아 알아서 내가 저주받은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께 복 받은 사람이요, 그리스도의 가난을 통해서 축복을 받은 사람인 것을 깨달아 알게 되고 복 받은 나를 꿈꾸고 바라보고 생각하고 이를 믿고 나는 복 받은 사람이라고 언제나 입술로 시인하고 고백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면 마음에 넘치는 복이 우리 생활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너희 마음에 가득한 것이 밖으로 나온다.
“네 믿음대로 될 찌어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복을 받을만한 확실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저주를 몸으로 십자가에서 다 청산해 버리고 말았기 때문에 예수 안에서는 아브라함의 복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확실한 것입니다.
고전 2: 9에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예비한 복은 우리 상상을 초월합니다. 눈에 못보고 귀로 못 듣고 마음으로 깨달을 수 없을 정도의 복을 예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보이리라. “목사님 나 같은 처지에 어떻게 복을 받겠습니까? 나는 지식도 없고 능력도 없고 돈도 없고 세상의 쓰레기더미 같고 무능력하고 버림받은 사람인데 내게 무슨 희망이 있습니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절대로 그런 말을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비밀한 길을 예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놀라운 축복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예비해 놓았기 때문에 우리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지 못했습니다. 크고 비밀한 일을 예비해 놓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허락해 주시면서 언제나 주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놀랬지? 깜짝 놀랬지?”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혀 생각도 못하고 상상도 할 수 없고 꿈도 못 꿀 일을 주님은 예비해 놓았기 때문에 주께 능치 못하심이 없으므로 강하고 담대하게 믿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의 축복은 먼저 마음속에 깨닫고 바라보는 법칙으로 꿈과 환상을 가지고 내가 믿고 입으로 시인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고후 1:20에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한국에 박사 마을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2003년 2월 7일 국민일보 기사에 춘천시 서면에 관한 기사가 난 적이 있습니다. 서면은 원래 춘천에서 가장 가까운 동네입니다. 그러나 지리상으로 춘천에서 멀지는 않지만 강을 2개나 건너야 되기 때문에 굉장히 외지고 벽지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농토가 적고 경제적으로 낙후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1954년 금산리에 금산교회가 설립되고 복음이 전파되면서부터 달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유교의 전통에서 체면과 의식을 중시하던 수동적인 주민들의 기질이 복음을 듣고 난 다음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바뀌어 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에 예수를 믿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금산교회의 홍순우 목사는 서면이 발전한 주요한 원인 중 하나가 ‘교회를 통해 받아들인 복음과 새로운 사고’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런데 현재 서면은 일명 ‘박사 마을’이라고 불리는데, 실제로 이 마을에서만 박사학위를 취득한자가 78명이나 있습니다. 조그마한 동리에 78명이 박사를 받고 전국 면 단위로 가장 많은 박사가 그곳에서 태어났고 이 외에도 초, 중등 교장급 이상 교육자가 71명, 국회의원이 3명, 군수가 5명, 법조인이 6명, 교육감이 2명, 5급 이상 공직자도 60여명이 나왔고 목사도 10명이나 나왔습니다. 가난한 한 고장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가자 말씀과 믿음으로 부요케 되자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여러분 금산리의 조그마한 가난한 동리에 복음이 전파되자 저주가 사라지고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난 것처럼 오늘날 우리나라가 복 받는 길은 예수 잘 믿는 길인 것입니다. 여러분 개인과 자녀들이 복 받고 잘사는 것은 예수 잘 믿는 길이 최선의 길인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수단과 방법으로 노력을 해도 하나님이 복을 안주시면 아무 효과가 없는 것입니다. 농부가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김을 매도 비가 안 오면 다 말라죽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위에서 하나님이 복을 주어야 교육도 받고 노력도 하고 사업도 하고 모든 하는 것이 열매를 맺고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에게 부요를 주시는 좋은 하나님인 것을 믿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23:25에 “네 하나님 야훼를 섬기라 그리하면 야훼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서 병을 제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23: 1에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아 복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고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이웃을 돕는데 사용하면 하나님은 자꾸 30배, 60배, 100배로 더 넘치게 부어주는 것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돌려 줄 것이니 후히 되어 눌러 흔들어 넘치게 해서 안겨 주리라. 우리가 복을 받아서 내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쓴다면 이는 기복신앙이요, 잘못된 신앙인 것입니다. 그러나 복을 받아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고 돌보아 주기 위해서 사용하는 복음 받으면 받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복으로 여러분에게 채워 주시고 우리나라에 넘치게 채워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독일의 사회학자요, 경제학자인 막스 베버는 “유럽 사회에 자본이 형성되고 복지국가가 형성된 이유는 기독교인의 마음속에 ‘재물의 주인은 하나님이다’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서구 경제의 근간이 기독교인의 믿음에서 출발했습니다. 유럽이 잘 살게 되고 미국이 잘살게 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물질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니 복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겨 살아야 되겠다는 그러한 올바른 신앙의 자세를 가졌으므로 하나님이 유럽과 미국을 복 주셔서 세계 일등국가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가난을 부요로 만드시는 것은 역설적인 것입니다.
[결론]
여러분!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이 역설적으로 달라집니다. 하나님은 판을 바꾸는 것입니다. 악을 선으로 바꾸고 절망의 판을 뒤엎어서 축복과 소망의 판으로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역설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어두움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밝음이 되어 버리고 저주가 축복이 되어 버리고 절망이 소망이 되어 버리고 가난이 부요가 되어 버리고 죽음이 영생으로 변화되어 버리고 말기 때문에 하나님은 판을 바꾸시는 역설적인 역사를 하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후 5:17의 말씀대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전 식 사고로 살지 않습니다. 이전 식 꿈으로 꿈꾸지 않습니다. 이전 식으로 믿지 않습니다. 이전 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새롭게 된 것입니다. 새로운 생각을 하고 새로운 꿈을 꾸고 새로운 믿음으로 갖고 새로운 말을 하고 새로운 찬양을 부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같이 계시면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넘쳐나고 병든 곳에 치료와 건강이 넘쳐나고 가난한 곳에 오히려 축복과 부요가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찾아와서 우리의 모든 상상을 초월한 위대한 기적적인 역사를 베풀어 주십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여!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 되심을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역전의 하나님이라 우리에게 와서 역설적인 일을 얼마든지 행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사방으로 우겨싸임을 받은 것 같으나 하나님이 보시면 싸이지 아니하고 사람보기에는 낙심한 것 같으나 하나님 편에 보면 낙심하지 아니하고 사람 편에서 보면 핍박을 받아 버림받은 것 같으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위로와 평안이 넘치게 되고 사람 편에서 보면 거꾸러뜨림을 당해 죽은 것 같으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불사조같이 살아 일어나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세상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반대되는 형상이 우리에게 항상 나타남을 알고 믿고 감사하고 찬양하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신앙으로 나가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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