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막11:12~14, 20~25 |
---|---|
설교자 : | 조용기 목사 |
참고 : | 2006년 10월 15일 주일 3부 설교 |
-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서 주무시고 감람산 언덕을 오르셔서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셨습니다. 베다니는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빈민촌이었습니다. 집들이 산비탈에 다닥다닥 지어져 있는 판자촌이었습니다. 주님은 항상 예루살렘에서 사역하실 때, 주무실 때는 가난한 베다니 사람들과 함께 거하시고 사역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날도 일찍 베다니를 떠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감람산 언덕길로 걸어가는데 거기에 무화과 단지가 있었습니다. 주님이 가난한 베다니에서 아무것도 대접을 받지 못하시고 굶주리신지라 무화과인줄 알고 무화과나무 단지 밑을 찾아갔으나 무화과가 없고 잎사귀만 무성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제자들 듣는 앞에서 무화과를 저주했습니다. “다시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제자들이 다 들었습니다. 그리고 난후 제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서 사역을 하시고 저녁에 또 베다니로 나오셔서 그곳에서 주무시고 그 이튿날 아침에 제자들 데리고 또 무화과나무 단지를 지나가실 때 베드로가 보니까 주님이 저주하신 무화과가 뿌리째 바싹 말라 버렸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선생님, 어제 선생님이 저주하신 무화과 나무가 말랐나이다.” 그 기회를 이용하셔서 예수님은 믿음에 대한 중대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바라보시고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 가운데 우리가 믿음의 생활을 하는 중대한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본론]
1. 하나님을 믿으라.
하나님이라고 하면 너무나 막연하지 않습니까? 어떤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인 것입니까? 미국 사람들은 국민의 90%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했습니다. 가히 기독교 국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것은 미국 텍사스 주 베일러 대학 종교연구소가 조사한 결과로서 국민일보 9월 19일자에 나온 사실입니다. 그런데 미국인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 미국인들의 31.4%가 악한 자를 벌하는 권위적인 하나님을 믿고, 23%가 사랑하고 용서하는 자비로운 하나님으로 믿고 있고, 16%가 세상일에 개입 않는 무관심한 하나님으로 믿고 있고, 24.4%가 심판을 준비하는 비판적인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는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표시가 사람들마다 다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나님 말씀하실 때 어떠한 하나님을 믿어야 될까요? 우리들도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악한 자를 벌하는 권위적인 하나님이라고만 믿을까요? 사랑하고 용서하는 자비로운 하나님이라고만 믿을까요? 세상일에 개입 없는 무관심한 하나님이라고 믿을까요? 심판을 준비하는 비판적인 하나님으로 믿을까요? 어떤 하나님을 믿어야 되겠습니까? 성경은 우리가 믿어야 될 하나님을 무엇으로 표시하고 있는 것입니까?
성경에는 좋으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 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아담 이후 그 자손들은 다 멸망에 처해 있습니다.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고 마귀의 종이 되어 멸망에 처해있는 우리들을 주님께서 건지기 위해서 그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멸망에 처한 인류들의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을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다 청산해 주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지를 짓고 우리가 불의하고 우리가 추악하고 우리가 버림받아야 마땅한데 왜 하나님은 그 아들을 보내셔서 죄 없는 그 아들이 우리의 죄와 우리의 불의, 우리의 추악, 우리의 저주, 절망을 대신 짊어지고 죽게 하셔서 우리로 그 모든 굴레에서 해방되게 해주셨을까요?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적극적인 표현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기에 멸망에 처한 우리들을 건지기 위해서 그 독생자를 주셨을까요? 이 하나님의 행위 속에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인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알파요,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인 하나님은 진실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좋은 하나님이라는 것은 시103: 1~ 5에 선언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이 좋은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하나님이 좋은 하나님이 아니시면 우리의 죄악을 사하시고 우리의 모든 병을 고치시고 우리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는 것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고 부탁할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게 해주려는 좋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시145: 8~10에 “야훼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야훼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 도다 야훼여 주께서 지으신 모든 것들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성도들이 주를 송축 하리이다”고 말한 것입니다.
요삼 1: 2에는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얼마나 자상스러운 하나님이신 것입니까? 네 영혼이 죽어서 천당에 가고 세상에는 마음대로 살아라. 고생하고 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영혼이 구원받아 잘되는 것처럼 너 범사에도 잘되고 건강하기를 내가 간구한다. 주님은 전인구원을 원하시는 정말 사랑의 하나님, 좋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저는 17살에 폐병에 걸려서 쓰러졌을 때 앞날이 캄캄했습니다. 정말 좌절되고 절망했습니다. 제 영혼이 앞길을 알지 못하고 저의 마음은 불안과 초조와 절망으로 꽉 들어차고 몸은 시시로 폐병으로 말미암아 피를 토하고 기침을 하고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나에게는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어둡고 캄캄하고 어느 곳에나 도움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럴 때 예수 그리스도의 전도를 받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고 좋으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 내 영혼 속에 들어와서 절망에서 소망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좌절에서 희망으로 이끌어 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 영혼을 구원해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은혜를 입게 했을 뿐 아니라 마음속에 꿈과 소망과 믿음을 주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료해 주셔서 기나긴 48년의 목회생활 동안 지치지 않고 피곤치 않게 하나님 사역을 할 수 있게 해주신 것은 좋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저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가슴 저밀게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좋으신 하나님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좋으신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저처럼 죄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할 인생, 폐병 걸려 파멸에 처한 인생을 구원하시고 건지시고 소망을 주시고 치료해 주시고 은혜를 베풀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무어라고 말해도 저에게는 우리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요, 좋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저는 이 사랑의 하나님, 좋은 하나님을 48년 동안 한국을 중심으로 해서 온 천하만국에 가서 전도했고 그 하나님께서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것을 보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해링턴 존 브라운은 하나님에 대해 고백하기를 “내 영혼은 창조 이후로 사물 안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모든 즐거움보다 말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더 크고 달콤하고 만족스러운 것을 발견하였다. 이 달콤하고 만족한 것은 나의 하나님, 너의 하나님이라는 두 마디로 표현할 수 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발견하고 말할 수 없는 영혼에 즐거움과 달콤함을 느꼈다고 말한 것입니다.
스펄젼 목사님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사랑하는 아내의 손을 잡고 남긴 마지막 유언은 “여보, 나는 좋으신 하나님과 함께 그토록 행복한 세월을 보냈다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성경이 말씀하시는 ‘좋으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을 섬기며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요, 사랑의 하나님인 것입니다. 좋은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면 성경 전체를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너무나 좋은 하나님께서 모든 일이 합동하여 선을 이루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내가 현재에 어렵고 고통스러운데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여, 좋은 하나님이여하고 불평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영혼이 잘된 이후에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항상 달콤한 것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쓴 약도 주시고 단약도 주시고 좋은 일도 주시고 나쁜 일도 주셔서 합동하여 선을 이루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 안에서 신령한 사람으로 성장하고 신령한 사람이 되므로 또 세상 축복도 허락하시고 건강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항상 발란스가 잡힌 그런 인격을 양성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 좋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여러분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은 상주시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히11: 6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간구하고 기도하는 사람에게 응답으로 상을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면 학교에서 상을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사회사업과 모범적인 일을 많이 하면 정부나 사회단체에서 상을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훌륭한 덕행을 쌓으면 훌륭한 시민으로써 상을 받는 것처럼 우리 하나님은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기도하는 자에게 반드시 상을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영적인 성령충만의 삶도 주시고 여러분 생활에 축복도 상으로 허락하여 주시고 치료와 건강의 기적도 상으로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좋은 상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인 것입니다. 상주시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히10:35에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말하기를 “믿음이란 저수지 물을 집으로 끌어다 주는 수도관과 같다. 즉 하늘의 보물을 지구에 날라다 주는 수송 파이프인 것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엄청난 축복을 하늘에 저수지처럼 예비해 놓았는데 우리가 믿음의 파이프를 통해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믿으면 그 파이프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놀라운 상을 허락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고 좋은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상주시는 하나님은 오늘날도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에게 사랑과 선함과 상을 베풀어 주시기를 원하시고 계신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종국적으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는 전인구원의 삶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 제일주의, 예수님 제일주의로 살아야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악세사리로 생각하고 세상일을 제일주의로 생각하면 하나님 우리 가운데 역사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채찍을 때리시고 불과 물과 시험을 통하게 하셔서 깨어지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깨어져야 하나님을 중심으로 모실수가 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우리 신앙생활 가운데 많은 시험과 환난도 다가오고 채찍도 다가오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좋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좋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상주시기 전에 올바른 신앙에 서게 만들려고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요, 행정대학원장을 역임한 유훈 장로님의 간증입니다.
장로님은 1953년 6.25 전쟁 중에 부산으로 피난을 가서 부산에서 대학생으로써 공부를 하다가 고등고시 행정과에 응시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시험 날이 월요일이라 수험생들 모두가 주일날까지 열심히 공부를 했는데 당시 장로님은 열심히 교회를 다니는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큰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마음 한구석에는 주일날 한번쯤 빼먹는다고 무슨 대수냐, 주일날 빼먹고 총정리를 하라. 그러나 다른 한편의 양심은 ‘아니야! 주일을 꼭 지켜야 하나님께 복을 받을 수 있다.’ 마음의 갈등에서 몸부림치다가 그는 마음속에 결정을 했습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일을 더하시리라 했으니 비록 월요일 날 고등고시 시험이 있을지라도 주일날 하나님부터 먼저 섬겨야 되겠다. 그래서 그는 총 정리하는 학생들을 떠나서 주일 교회 와서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월요일 날 하나님을 의지하고 시험을 쳤는데 멋지게 합격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고 그 신앙을 높여 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종종 갈등에 처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 것이냐, 그렇기 않으면 임시방편으로 세상 제일주의로 살 것이냐, 하나님이 눈감아 주시겠지. 그러나 여러분 우리의 삶속에 어떠한 일이 있어도 크고 적은 일에 하나님 제일주의로 나가야 하나님이 우리를 신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형편이 되면 하나님 제일주의로 하고 형편이 어려우면 세상제일주의로 나가면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신뢰를 받기 위해서는 모든 일에 하나님 제일주의로 나가서 하나님을 섬기면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선하신 은총과 상 주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당장 눈앞에 있는 이익 대신에 하나님을 택하고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반드시 상을 주시는 것입니다.
2. 위대한 꿈
하나님을 믿으라. 이 산더러 명하여 저 바다에 던지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산을 바다로 던집니까? 이것은 완전히 비이성적이고 비과학적입니다. 산이 어떻게 바다로 던져 갑니까? 이성적이고 과학적으로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감각적으로 느껴보더라도 산이 얼마나 높은데 그 산이 바다로 옮겨 갑니까? 우리 경험으로 봐서 사람이 산을 명하여 바다에 던지라고 한다고 산이 옮겨간 적이 없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적으로 불가능한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될 수 있으니 큰 꿈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은 인간의 이성과 과학으로도 그리고 경험적으로 봐도 감각적으로도 불가능해도 하나님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능치 못하심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말씀에 입각해서 큰 꿈을 꿀 수 있는 것입니다.
엡 3:20에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우리가 꿈을 꿀 수 있습니다. 꿈은 비천한 사람도 꿀 수 있고 위대한 사람도 꿈을 꿀 수 있습니다. 돈이 있는 사람도 돈 없는 사람도 꿈을 꿀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위대한 꿈을 꾸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이 위대하게 된 이유는 그가 학문이 많아서 그런 것도 아니고 가문이 좋았던 것도 아니고 부자였기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을 통해서 위대한 꿈을 꿀 수 있었던 것입니다. 눈에는 아무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이 산더러 명하여 바다에 던지라는 위대한 꿈을 아브라함은 마음에 품었던 것입니다.
롬 4:17~18에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에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을 수 없는 중에 믿으며 꿈을 꾸었습니다. 100세나 된 그가 90살 되는 아내에게 자식을 낳은 것이라는 것은 꿈이지 비과학적이고 비이성적이고 비 체험적이고 비감각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의해서 산을 바다로 옮기는 그런 꿈을 꾸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꿈을 이루어서 100세에 이삭을 낳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이요,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꿈을 꿔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의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꿈을 꾸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고 꿈을 꾸는 것이지 우리 마음대로 꿈을 꾸면 백일몽이 되고 허탈한 꿈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거짓이 없습니다. 저 하늘이 무너지고 이 땅이 꺼져도 일점, 일획도 변하지 아니하므로 말씀을 의지하고 꿈을 꿀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도 우리에게 꿈을 꾸도록 도와주십니다. 젊은이에게는 환상을 늙은이에게는 꿈을 꾸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각자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통해서 기적의 꿈을 꾸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꿈은 현실이 아닙니다. 내일에 이루어질 것이 오늘 잉태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를 가진 사람은 눈에 안보여도 어린 아이가 태어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꿈을 잉태한 사람은 안보여도 내일에 그 꿈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하는 이유가 내일을 잉태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꿈이 있으면 내일에 그 꿈대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꿈을 반드시 마음속에 품어야 되는 것입니다.
빌 2:13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나님이 소원이 우리를 통해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만리장천 멀리 계시지 않고 너희 안에서 행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안에 계세요. 지금 이 자리에 계세요.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속에 우리의 생각을 통하여 우리의 꿈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을 통하여 우리의 입술의 고백을 통하여 오늘날도 기적을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적극적인 사고방식」으로 잘 알려진 노만 빈센트 필 박사는 “당신이 만일 어떤 것을 오랫동안 열심히 상상하고 마음속에 그리면 그것을 얻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고,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꿈을 꾸며 의심치 아니하면 그 꿈을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를 바라보면 우리 누구든지 위대한 꿈을 꿀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몸 찢고 피 흘려서 주님 우리에게 새로운 피조물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용서받고 의롭게 된 내 자신을 꿈꿀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죄와 마귀에서 해방되고 거룩하고 성령충만한 내가 된 것을 꿈꿀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병 고침 받고 건강하게 된 나를 꿈꿀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저주에서 해방되고 아브라함의 축복을 받은 나를 꿈꿀 수가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함께 죽고 장사지내고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하사 하늘 보좌 우편에 앉은 나를 꿈꿀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은 내 자신을 거울을 들여다보듯이 꿈꿀 수 있습니다. 꿈을 꾸고 믿으면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믿고 꿈을 꾸고 꿈을 꾸고 믿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산더러 명하여 저 바다에 던지라는 위대한 기적적인 꿈을 꾸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이러한 위대한 꿈을 꿀 수가 없습니다. 꿈을 꿀 수 있는 조건이 없습니다. 말씀이 없는데 무엇을 믿고 꿈을 꾸겠습니까? 우리는 말씀이 있기 때문에 말씀을 의지하고 거대한 꿈을 꿀 수 있고 불가능을 믿을 수 있고 하나님께 입술로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믿음의 선언
천국의 능력은 말씀에 있습니다. 성경에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라 하고 그렇게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꿈꾸고 믿은 것은 입술로 선언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와 만물을 지으실 때 말씀으로 지으신 것입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생긴 것입니다. 궁창이 생겨나라 하니 궁창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바닷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육지가 생겨나라. 육지가 생겨난 것입니다. 모든 것이 말씀으로 지어진 것입니다.
시33: 6에 “야훼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고 말했으며
히11: 3에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으로 구원의 사역을 행하신 것을 압니다. 주님께서 회당에서 말씀 전할 때 귀신 들린 자가 고함을 치니까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마 8:16에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예수님이 쫓아낸 귀신들은 말씀으로 쫓아내고 병든 자도 예수님이 말씀하시므로 병이 나은 것입니다. 말씀은 기적을 창조하는 원천적인 능력이 되신 것입니다. 이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시다가 풍랑이 대적할 때도 예수님이 고요 하라. 잠잠 하라. 말씀하시니 풍랑이 잠잠하고 고요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이 죽어서 상여에 매어 오는 것을 중지시키고 관 뚜껑을 여시고 청년아, 일어나라. 말씀하시니 일어난 것입니다. 나사로가 무덤에 들어가서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날 때도 주님께서 무덤 문을 열어 제켜 놓으라고 하시고 나사로야 나오라. 말씀하시매 죽은 나사로가 걸어 나온 것입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도 주님이 물을 퍼서 가져다주라고 하시매 말씀으로 포도주가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주님의 사역은 모두다 말씀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사역도 다 말씀을 통해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사역하신 것도 말씀으로 역사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성령충만하고 난 다음 오후,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 기도하러 가실 때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은 메고 와서 미문가에 앉혀놓고 구걸을 시키는데 베드로와 요한이 그 곁에 갔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말씀으로 고쳤습니다.
성경 행 3: 6~ 8에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을 약을 주어서 고친 것 아닙니다. 침을 놓아서 고쳐준 것 아닙니다. 수술을 해서 고친 것 아닙니다. 말씀으로 고친 것입니다.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라. 베드로가 가진 것은 예수를 믿는 믿음과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가진 예수님 믿는 믿음 우리도 가지고 있고 베드로가 가지고 있는 말씀 우리도 가지고 있습니다만 베드로가 가지고 있는 것 우리가 못 가진 것이 있습니다. 담대함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여러분보고 앉은뱅이 보고 일어나라고 하면 다 도망치고 맙니다. 왜, 담대함이 없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한 믿음과 그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담대하여 이 산더러 명하여 저 바다가 던지라는 용감한 선언을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담력과 용기가 없어서 기적을 기대를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더 많은 담력을 가지고 이 산더러 명하여 저 바다에 던지라는 선언을 할수있는 믿음으로 가지면 기적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는 또한 중풍병자 애니아도 말씀으로 고친 것입니다. 그가 애니아가 중풍 병으로 누운 지 여덟 해가 된 것을 보고 가서 “애니아야 예수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침상을 정돈하고 일어나라”고 하시니 8년 중풍병자 애니아가 그 말씀 한마디로 부스스 일어나서 침상을 정돈하고 건강하게 된 것입니다.
행 9:33~35에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는 중풍 병으로 침상 위에 누운 지 여덟 해라 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 오니라”
주님께서 베드로를 통해서 역사하실 때 애니아에게 약을 준 것도 아니고 침을 놓은 것도 아닙니다. 마사지를 한 것도 아닙니다. 말씀입니다. “애니아야 예수께서 너를 일으키시니 일어나라!” 말씀을 하시매 말씀 선언을 따라 태산이 바다로 옮겨가는 기적이 일어나고 만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도르가의 부활인 것입니다. 도르가가 죽으매 과부들이 울고 그를 목욕시켜 옷을 입혀서 다락에 뉘여 놓고 베드로를 청한 것입니다. 도르가가 살아 생전에 과부들에게 많은 선한 일을 베풀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베드로가 와서 우는 사람을 다 내보내고 기도하고 도르가를 보고 시체를 향하여서 “도르가야 일어나라!”하니 죽은 도르가가 일어나고 만 것입니다.
행 9:40에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기적인 것입니다. 베드로가 도르가를 인공호흡을 시켰습니다. 심장마사지를 했다. 그렇게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으로 도르가를 일으킨 것입니다. 도르가여 일어나라. 그러므로 말씀의 선언이 여러분 얼마나 위대한 능력이 있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들도 선언하는 믿음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부정적인 말을 하면 부정적인 일이 일어납니다. 나는 못한다. 안 된다. 할 수 없다. 죄 많다. 병들었다. 망한다. 승리하지 못한다. 패배적인 말을 하면은 그 말이 우리 운명을 그렇게 이끌어가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언하는 믿음으로 십자가를 통하여 나는 의인이다. 나는 성령충만하다. 나는 건강하다. 나는 복받은 사람이다. 나는 천국 백성이 되었다. 내 영혼이 나는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사람이라고 선언하면 그대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선언하는 믿음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이 산더러 명하여 저 바다에 던지라는 선언을 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담대하게 선언해야 됩니다.
잠18:21에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혀를 잘못 사용하면 잘못됩니다. 혀를 잘 사용하면 잘됩니다. 혀를 파괴적으로 사용하면 파괴가 오고 건설적으로 사용하면 건설이 오는 것입니다. 사망을 말하면 사망이 오고 생명을 말하면 생명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축복을 말하면 축복이 오고 저주를 말하면 저주가 오는 것입니다. 살고 죽는 것이 혀에 있는 것입니다. 땅에서 혀로써 매면 하늘에서 매일 것이요, 땅에서 열어서 풀면 하늘에서 풀립니다. 죽고 사는 권세가 혀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혀로써 묶이고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시기 바랍니다. 이러므로 우리들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혀를 통하여 담대한 선언을 하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의심하지 않는 믿음
의심하지 않는 믿음을 가져야 되는데 어떻게 의심하지 않는 믿음을 가질 수가 있을까요?
막11:24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대게 우리는 미래형으로 기도합니다. 장차 구원해 주실 줄 믿습니다. 장차 병 나을 것을 믿습니다. 장차 축복해 줄 것을 믿습니다. 오늘은 내일이 장차고, 내일은 또 내일이 장차고, 내일은 또 내일이 장차고 무덤에 들어가 죽으면서 장차 잘될 줄 믿습니다. 그리고 죽는 것입니다. 미래형기도는 언제나 의심을 동반합니다. 언제 이루어질지 모르는 미래형을 가지고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그다음 기도하는 사람은 현재형 기도입니다. 주님 현재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현재 복을 주시옵소서. 현재 은혜를 주시옵소서. 그러면 마귀가 와서 말합니다. 안줘~ 안 구원해줘. 안 치료해줘. 현재 축복 안 해줘. 마귀하고 입 실갱이를 하게 됩니다. 현재 준다고 하는데 마귀는 안준다고 하고 그렇기 때문에 마음에 의심이 생겨요. 하나님의 은혜는 거의 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과거형 기도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2천 년 전에 이미 죄를 용서해 주셨으므로 나는 용서받은 사람이니 이것을 이루어 주시옵소서. 하나님 2천 년 전에 이미 내게 성령 주셨으므로 그것이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미 채찍에 맞았으므로 2천 년 전에 법적으로 나았으므로 그것이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2천 년 전에 이미 복을 주셨으므로 나는 이미 복을 받아 놓았으니 이것이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2천 년 전에 죽었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통해서 나도 죽고 부활하셨으니 이것이 현재 나타나게 해주시옵소서. 이미 이루어진 것에 대해서는 마귀가 논란할 수 없습니다. 장차 이루어질 것이라면 마귀가 꿈도 꾸지 말라고 말합니다. 지금 이루어 달라고 하면 안 이루어 준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미 이루어진 사실을 말할 때는 마귀가 입을 딱 다물고 의심을 줄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이미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어 주신 것을 지금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따라 말씀하세요. 이미 이루어진 것을 제게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미 고쳐주신 병을 지금 고쳐 주시옵소서. 이미 복을 주셨으니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과거형 기도입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그대로 되리라.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이름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사래에서 사라로 여주로 바꾼 것입니다. 아직 자식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이미 입으로 선언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가 의심을 갖다 주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욘 2: 6~ 7에 요나가 기도하기를 “나의 하나님 야훼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야훼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앉아서 기도합니다. 아직 물고기 뱃속에서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기도할 때 미래형 기도도 아니고 현재형 기도도 아니고 과거형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하나님 야훼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건지실 것이 아니고 건지고 있다도 아니고 이미 건졌다고 말한 것입니다. 내가 지금 물고기 뱃속에 있어도 이미 하나님은 나를 건지셨다. 내가 지금 기도할 때도 이미 하나님은 들으셨다. 그러므로 마귀가 의심을 갖다줄 수 없습니다. 이미 건졌는데 안건질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미 응답했는데 안 응답했다고 참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요나의 기도는 과거형 기도로써 응답을 받았던 것입니다.
사65:24에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마6: 8에는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이루어 놓은 것을 믿음으로 과거 형태로 받아들이고 그것이 현재 내 몫에 나타나도록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항상 장차를 바라보고 기도하지 마시고 현재에 이루어달라고 기도하지 마시고 이미 이루어 놓은 것을 하나님 내게 주시옵소서하고 기도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90%가 이미 이루어진 것입니다. 한 10%는 미래정도지 90%는 이미 이루어진 사실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루어진 것을 그대로 인정하여 받아들이고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짖는 하나님을 따라서 우리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시인해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려야 됩니다. 의심이 들어오려고 할때는 하나님께 원망, 불평을 하면 의심이 우리를 점령하고 말기 때문에 의심이 건들거리거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롬 4:20~21에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은 나이 100세고 아내가 90세니 의심이 들어오지 않겠습니까? 몸이 100세고 아내가 90세인데 자식을 낳을 수 있을까? 과학적으로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의심이 들어오고 감각을 통해서 경험을 통해서 의심이 들어올 만합니다. 그는 의심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자꾸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이룰 줄 믿고 감사와 찬양을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 자식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기적을 베풀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러자 의심이 들어올 수 없어요. 자꾸 받은 줄 알고 감사하니까. 의심이 한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치고 마는 것입니다. 마음에 의심하지 않기로 결심한 이상 하나님의 은혜를 늘 감사 찬양하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용서하지 못하면 마귀가 들어와서 의심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막11:25에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용서와 화해를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는 아담 이후로 하나님과 원수 되어 버림받았는데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십자가에 몸 찢고 피 흘려서 그 대가로 값없이 조건 없이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와 화해하신 것입니다. 무조건하고 용서하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끌어안아 화해해 주셨으니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용서와 화해의 빚을 졌습니다. 큰 용서와 화해를 받은 우리가 이제는 이웃을 용서하고 화해해야 될 책임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고 화해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고 화해한 그 은혜를 무로 돌리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남편이나 아내를 용서하고 화해해야 돼요. 부모 자식 간에 용서하고 화해하고 형제간에 용서하고 화해해야 되며 이웃 간에 용서하고 화해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하심은 우리가 용서하고 화해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서 얼마나 큰 용서를 주시고 원수 된 우리를 품에 품어서 자식으로 화해해 주셨는데 이 은혜를 빚을 안고서 내가 이웃을 용서하지 못하면 화해하지 못하면 마귀가 틈타 들어와서 마음속이 황폐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용서하고 화해하지 못하면 마음에 죄책감이 들어 있어 의심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웃을 용서하고 화해할 때 죄책감에서 해방되고 성령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마 6:15에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용서받았으니 용서해라. 네가 용서 안하면 나도 용서를 취소하겠다는 것입니다.
엡 4:32에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를 무조건 용서해 주셨는데 우리도 그처럼 용서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에 응답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용서하고 화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답이 막히게 되는 것입니다. 용서와 화해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허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영국의 시인 블레크는 “상호 각자 잘못을 용서하라. 그것이 천국의 문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영국의 성직자요, 시인이었던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 1593-1633)는 “남을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은 자기가 건너야 할 다리를 파괴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마음에 가책과 죄책감으로 의심이 생기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용서해야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결론]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서 승리하여 살기 위해서는 내 힘으로 안 되고 하나님과 함께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기적을 우리가 기대하고 이 산더러 명하여 저 바다에 던지라는 꿈과 믿음과 입술의 고백을 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적은일, 큰일 재반 사에 우리의 힘으로 하지 말고 하나님과 인생을 함께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믿고서 기적을 기대하고 꿈을 가지고 믿음을 가지고 입술의 고백을 하며 우리 마음속에 의심하지 않고 찬양하고 나가면 하나님의 기적이 반드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중에 기적의 체험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다른 종교와 뭐가 다릅니까? 다른 종교는 이론과 논리로써 가르치지만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함께 사는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같이 계시므로 기적이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무능력하지 않습니다. 유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곳에나 계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산을 옮기는 기적을 베푸시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또 기적을 베푸시기를 원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바울선생은 말하기를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써 너희를 구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은혜 베풀 때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은혜 베풀 때 우리 기도를 듣고 구원의 날에 도우시는 기적의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오늘 마음속에 깊이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우리 인간을 믿고 살지 않고 하나님을 믿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하나님을 믿으라. 하나님을 믿으라. 그리고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큰 꿈을 가져라. 이 산더러 명하여 저 바다에 던지라는 불가능에 대한 도전의 꿈을 가져라. 그리고는 마음속에 믿으라. 그것이 이룰 줄 믿고 의심하지 말고 입술로 선언하라.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선언하라. 그리고 용서와 화해를 하면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운행하고 역사해 주셔서 운명을 바꾸어 놓겠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내 인생이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의 깊음 속에 있을지라도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새로운 창조를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흑암은 광명으로, 무질서는 질서로, 죽음은 생명으로, 추는 미로, 가난은 부요로, 질병은 건강으로, 패배는 승리로 만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오셔서 새로운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창조를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입을 넓게 열면 하나님이 오늘날도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입을 넓게 열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큰 꿈을 꾸도록 믿음의 입을 열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여, 믿음의 선언을 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고 아버지 하나님 의심하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여, 언제나 용서하고 화해하는 우리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과 막힌 담이 없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는 기적이 필요합니다. 크고 적은 일에 하나님이 섭리하셔서 기적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여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 아멘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