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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후11:23~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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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조용기 목사 |
참고 : | 2006년 11월 26일 주일 2부설교 |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내가 거짓말 아니하는 것을 아시느니라”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더불어 ‘싫지만 꼭 필요한 고난’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이 세상에 병균이 없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병균은 있고 이 병균과 싸워 이겨야 건강하게 살 수가 있습니다. 고난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 고난은 항상 다가오는 것입니다. 고난을 극복하면 강한 신앙인이 됩니다. 고난에 지면 신앙에 파선하게 됩니다.
<본론>
1. 하나님이 원하시는 전인구원
왜, 우리에게 고난이 있습니까? 여러분 원래 우리 조상 아담과 하와가 지음을 받았을 때는 고난이 있는 세계에 살도록 지음을 받지 않았습니다. 에덴은 낙원이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할 것이 없었습니다. 죽음조차 없었습니다. 그런 영광스러운 처소에 있으면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탐욕을 가지고 하나님을 반역하므로 오늘날 이 큰 재앙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므로 가져온 것은 삼대재앙인 것입니다. 첫째 재앙은 영혼이 죄로 말미암아 죽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지고 이제 하나님과의 관계가 두절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영원이 죽으므로 사람은 완전히 혼과 육만 가지고 사는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잃어버린 비극을 그들은 가져온 것입니다. 둘째 재앙은 저주를 가져온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반역하므로 말미암아 땅은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사는 삶의 고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가시와 엉겅퀴란 우리의 삶에 수많은 어려움과 고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 고생하고 수고하고 괴로움이 인생을 따를 것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재앙은 너희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죽음의 재앙이 온 것입니다. 원래 사람은 육체적으로도 죽지 않게 만들어졌는데 죄 값으로 육체가 죽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태어나자 나이 먹어 늙어지고 병들고 죽음의 고통이 인새에게 다가오게 된 것입니다.
창 3:17~19에 보면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는 가장 비극적인 선언을 받게 된 것입니다.
로 5: 12에 보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해서 에덴에서 쫓겨난 이후로 그 혈통에서 태어난 사람은 아담과 하와와 똑같은 죄를 안지어도 아담과 하와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다가온 원죄와 자 범죄로 모두 다 똑같은 형벌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이 세상에 고난은 왜 있는가, 우리 아담과 하와를 조상으로 섬기고 태어난 우리들은 운명적으로 삼대재앙을 가슴에 안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아무도 이 재앙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아무리 이 재앙에서 벗어나려고 애써도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해주셨습니다. 2천 년 전에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그리스도가 사람이 되어 오셔서 사람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아담이 지은 죄 형벌을 대신 갚으므로 삼대재앙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도 없고 흠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사람으로 오셔야만 되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오셔서 사람을 대신해서 사람이 지은 모든 죄와 불의, 추악, 저주, 절망을 대신 갚기 위해서 십자가에 고난당하신 것입니다. 형벌 받을 필요가 없는데 우리 때문에 대신해서 형벌을 받으므로 말미암아 모든 죄 가를 청산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은 우리에게 삼대축복, 삼중축복을 가져온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우리에게 죄를 청산하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헐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고 하나님 우리에게도 오지도 못할 죄악의 담을 주님께서는 그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서 다 청산하셨습니다. 죄를 갚아버린 것입니다. 죄에 대한 벌을 받았으므로 주님께서는 모든 죄를 다 허물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교통의 길이 열리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이 없어지매 하나님의 성령이 오셔서 우리 영혼을 살려 주시고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하나님을 섬기고 경외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영혼이 살아난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습니다. 예수님 이외에는 절대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의 자손으로 태어날 때부터 죄를 짊어지고 형벌을 받아 될 우리기 때문에 죄의 값을 갚지 않고는 절대로 하나님과 가까이 갈 수 없는데 죄의 값은 사망이라 죄 값을 갚으려면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죽으면 다시 살아나지 못하기 때문에 결코 자기 죄를 청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고 청산하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므로 죄의 값을 청산했기 때문에 천하 인간에게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종교도 많고 철학도 많고 선행하는 사람도 많고 고행하는 사람도 많고 수양과 도덕을 닦는 사람도 많지만 그로써는 결코 죄악을 청산하지 못합니다. 죄에 대해서 형벌을 받으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죄 없는 사람이 죄 있는 사람을 대신해서 형벌 받은 분은 역사상 예수님밖에 안계시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구원받을 사람이 한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열심히 예수님을 전도해야 될 것은 예수님만이 길입니다. 예수님만이 진리입니다. 예수님만이 생명이 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용서와 의와 영광을 가져와 주신 구원의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져오신 두 번째 축복은 저주에서 해방시켜 준 것입니다. 아담 이후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다 어겼으므로 율법의 저주 하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높이 달린 것은 우리의 저주를 대신 짊어지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저주받은 자는 나무에 매달라고 성경은 말했는데 복 받은 예수님이 나무에 매달릴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의 저주를 대신 짊어지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저주를 청산해 버렸기 때문에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저주는 없습니다. 리스도 안에서는 오직 아브라함의 복만 넘쳐날 따름인 것입니다.
사53: 5에 보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채찍에 맞으신 공로를 통해서 또한 세 번째의 재앙인 질병을 제하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서 살면서 가지가지 질병을 다 앓고 고통을 다 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의 질병을 갚기 위해서 빌라도의 뜰에서 사십에서 하나 감한 서른 아혼 차례 매를 맞고 가슴과 등허리가 갈기갈기 찢어지고 선지피를 흘렸습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입었다는 말씀은 이미 하나님께서 2천년 전에 이루신 축복인 것입니다. 이 말씀이 살아있고 이 말씀이 하늘에 굳게 선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채찍에 맞으신 공로를 말미암아 우리가 주님께 부르짖어 기도할 때 주님의 치료의 역사가 우리에게 나타나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요한삼서 1장 2절처럼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말씀하신 그대로 우리 주님이 오셔서 아담이 가져온 삼대재앙을 다 십자가에서 철폐하시고 영혼을 구원하시고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질병과 영원한 멸망에서 자유와 해방을 주시는 삼중축복을 우리에게 갖다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은총을 잊지 말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잊지 말라고 성경은 시편 103편에 말합니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해준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2. 신앙이 자라고 복도 받기 위하여
그러면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삼대재앙에서 삼중축복을 받고 주 안에서 생명을 얻고 넘치게 얻게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축복도 받고 신앙도 자라기 위해서는 우리가 끊임없이 주님께 의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축복은 우리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하므로 십자가의 공로로 말미암아 얻은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하고 우리가 붙어서 있으면 이 은혜를 얻거니와 예수님에게서 떨어지면 이 은혜를 잃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기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항상 예수께 붙어 있어서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것처럼 그렇게 할 때 예수님의 삼중축복이 넘쳐나서 우리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으며 살아갈 수 있는데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언제나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의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부모 없이는 살지 못하지 않습니까? 어머니 젖가슴에 늘 의지하고 아버지, 어머니의 보호하심과 돌보아 주시고 얼러줘야 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부모를 떠나서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점점 장성하면은 그 다음부터 부모를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떠나 독립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자라는 과정에 좋은 일이지만 비유로 말 하건데 자라나면 날수록 이제는 부모를 떠나게 됩니다. 초등학교 때는 가족이 휴양을 갈 때 같이 가자면 두말하지 않고 따라오는데 중학교 3학년만 되면 “야! 이번 가족휴가를 같이 가자.” 그러면 “아니요, 우린 친구하고 같이 갈테니까 아버지, 어머니 잘 다녀오십시오.” 중학교 3학년만 되어도 이제는 부모와 같이 동행하지 않고 떨어져서 자기 독립으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장할수록 독립적인 삶이 되는데 우리 영적으로는 그렇게 해서는 결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육신적으로 자녀는 성장할수록 부모에게 독립해야 되겠지만 영적으로는 우리가 항상 주님께 의지하고 우리가 약할 때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난 다음 강하게 되고 부유하게 되면 하나님을 떠나 독립적으로 살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신32:18에 “너를 낳은 반석을 네가 상관하지 아니하고 너를 내신 하나님을 네가 잊었도다”라고 탄식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자라면 자랄수록 주님께 더 의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더 붙잡고 주님과 함께 있어야 우리가 항상 성령안에서 자라고 축복을 받지 주님에게 떨어지면 나무에서 꺾어진 포도나무 가지와 같아서 말라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약할 때 주님께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 통계를 보면 1996년 국민소득 1만 불이 넘으면서 교회 출석률이 40%로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생활에 여유가 생기자 이제 사람들은 주일에 산으로, 들로, 사업장으로 가는 것입니다. 기도원도 마찬가지여서 국민소득 1만 불이 된 다음 기도원 출석률도 역시 30%로 떨어져서 열악한 기도원들은 문을 닫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나라 교인이 출석률이 가장 좋았던 때는 6.25사변이 일어났을 때입니다. 당시 전쟁으로 온 국민이 어마어마한 고통과 괴로움을 겪을 때 교회 출석률은 95%였습니다. 고난이 닥치자 그 영혼에 구원의 불길이 타올랐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고난을 당하고 고통스럽고 괴로워야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가까이 옵니다. 좀 잘 먹고, 잘 입고, 잘살게 되면 그만 하나님께로 향한 마음이 식어지고 느슨하게 되고 하나님을 뜨겁게 간절히 찾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으로 말미암아 항상 깨어져서 하나님을 찾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말했는데 마음이 가난해져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부요가 되어서 ‘이만하면 되었다. 나는 자신 있다. 이제는 나 스스로 행복할 수 있다.’고 하면 하늘나라가 멀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항상 자기가 못나고 약하고 무능력한 것을 깨닫고 언제나 자기를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의지하고 살아야 하늘나라가 마음속에 가득하고 생활이 임재 하여 있는 것입니다.
잠 3: 5~ 6에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깨어져 하나님을 찾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생활 속에 고난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는 깨어지지 않습니다. 자기 스스로 의지하고 자기 뜻대로 살려고 하는 경향성이 많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께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게 되면 그때로부터 기도가 게을러지고 말씀 읽기를 게을리 하고 하나님 찾기를 게을리 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점점 멀어집니다. 사탄을 따라서 세상 일락을 좋아하고 세상의 쾌락과 세상의 정욕을 따라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길을 막고 우리가 계속해서 주님품안에 있어서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고난이라는 사자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고난이 와서 우리를 괴롭힐 때 사람들은 깨어지고 또다시 하나님을 찾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배가 고파야 밥을 찾듯이 목이 말라야 우물물을 찾듯이 고난이 다가와서 고통스럽고 괴로우면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회개의 동기를 주는 것입니다. 언제나 인간은 고난당할 때 하나님을 찾습니다. 고난이 사라지면 또다시 게을러지고 자기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대하 15: 2에 “너희가 만일 그를 찾으면 그가 너희와 만나게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그를 버리면 그도 너희를 버리시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일하게 되면 주님을 버리게 되고 주님을 버리게 되면 주님도 우리를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찾아야 주님은 우리와 같이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매일같이 간절히, 간절히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매일매일 구해야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 하시는 것입니다.
대하 15: 4에 그들이 그 환난 때에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가서 찾으매 그가 그들과 만나게 하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환난 때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면 하나님이 만나 주시는 것입니다.
「레미제라블」로 유명한 프랑스의 작가 빅토르 위고는 젊은 시절 작가로서 명성을 날리면서 문란하고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가족은 그의 방탕을 고통으로 받았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딸이 “제발 가정으로 돌아와 착실한 아빠가 되어 주세요.”라는 유서를 남기고 세느 강에 투신해서 자살했습니다. 빅토르 위고는 자기의 외딸을 생명처럼 사랑했는데 그 딸이 아버지의 방탕으로 좌절하고 절망해서 세느 강에 투신자살을 했습니다. 이 일로 큰 충격을 받은 빅토르 위고는 “이 비극은 하나님께서 내게 내린 심판이다.”라고 말하며 완전히 깨어져서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리고 회개한 후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후생사회국 관리가 되었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가운데 교육부장관까지 지냈으며, 1862년에는 「아, 무정」이라는 제목의 책을 발표했습니다. 딸의 죽음이라는 고난이 그를 깨뜨려 하나님을 찾게 했고, 지금까지도 존경 받는 문학가로 남아있게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주심으로 회개하고 깨어져서 하나님께로 찾아오게 만드는 것입니다. 고난이 없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고난 안 받고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사람은 타락한 속성이 있어서 고난이 없으면 자꾸만 자기를 의지하고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자꾸만 세상으로, 세상으로 향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으로 가는 길을 차단하고 돌이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서 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고난이 와야 말씀을 찾고 성령충만을 찾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되는 것이 사람인 것입니다.
서양 격언에 “참호 속에는 무신론자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전쟁할 때 적군의 총탄이 빗발처럼 날라 오면 참호에 엎드려서 그냥 다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마더 테레사는 “고통은 성장의 법칙이요. 우리의 인격은 이 세계의 폭풍우와 긴장 속에서 만들어 지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독일 격언에 의하면 “고난은 기도의 선생”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 맞았어요. 고난이 기도의 선생입니다. 평소에 기도하라. 기도하라고 해도 무슨 말합니까? 시간이 없어요. 몸이 피곤해요. 바빠요. 기도할 여과 없어요. 온갖 잔소리 다 합니다. 그러나 그에게 기도를 가르치는 것은 고난과 폭풍우가 다가오면 두말하지 않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앉아도 기도하고, 서도 기도하고, 새벽기도 나오고, 철야기도하고, 금식기도하고, 기도원에 가고 고난이 기도의 선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깨어져서 하나님을 찾도록 하기 위해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3. 바울이 당한 고난
성경에 보면 사도바울 선생은 하나님이 사용한 위대한 종이었습니다.
역사이래로 사도바울만큼 하나님의 계시를 많이 받고 하나님이 능력 있게 사용한 분이 없습니다. 바울이 아니었으면 오늘날 우리 믿는 신앙의 기본 신학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바울이 하나님께 계시 받아 적은 로마서나 그 외에 고린도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주옥같은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계시를 엄청나게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엄청나게 가까이 있어야 되고 기도 많이 하고 부르짖어야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바울 선생에게 고난을 많이 보내셨습니다. 바울같이 신령하고 전심, 전력으로 하나님께 헌신한 사람도 고난이 회오리바람처럼 닥쳐왔습니다. 시시각각으로 고난의 폭풍우속을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도록 주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었고 매달리니까 신령한 세계 속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바울선생은 교만하지 않게 육체의 가시를 하나님이 주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는 육체의 가시, 사탄의 사자를 주어서 그를 항상 치게 만들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헬라어에 보면 육체의 가시라는 것은 육체에 말뚝이 박혀있다는 것입니다. 육체에 말뚝을 박아 놓은 것처럼 그는 어마어마한 고통을 하나님이 바울 선생에게 허락한 것입니다. 그에게는 육체적인 질병이나 안질이나 간질 등 이런 병이 있었다는 신학자들의 말이 있습니다만 무슨 병이든 여하간 사탄의 사자가 와서 극심한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선생은 앉으나 서나 고통 가운데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말씀을 증거 하면서도 고통 때문에 마음이 이그러졌습니다. 그렇게 고통을 당하면서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이렇게 고통스러워야 내가 어떻게 살수가 있습니까? 이렇게 고통을 당하고야 내가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까? 앉으나 서나 이렇게 육체가 괴로워서야 살수가 없으니 날 좀 놓아 주시옵소서.’ 한번 기도해도 응답이 없습니다. 또 두 번째 시간을 내어서 하나님을 찾아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목메어 울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습니다. 세 번째 그는 이제는 필사적으로 ‘하나님이 고통에서 나를 놓아주던지 그렇지 않으면 내 생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사는 것이 생지옥입니다. 너무 괴롭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네가 약할 때 내가 강하다. 네가 계시를 받은 것이 많으므로 교만해질 수 있고 오만해질 수 있고 기도를 게을리 할 수 있고 잘못될 수가 있다. 네가 만일 잘못되면 하늘나라가 무너진다. 네가 항상 깨어서 기도하고 겸손하고 낮아져서 주님을 의지하기 위해서 내가 사탄의 사자, 육체의 가시를 허락했다. 네가 사탄의 사자에게 얻어맞아 약할 때 나를 의지하므로 내가 너에게 강해질 수 있다. 내 은혜가 족하다. 언제나 네가 고통당할 때는 그 고통을 이길만한 은혜를 줄 테니까 내 은혜를 의지해서 고통을 극복하고 살아라.’ 바울은 이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고전15:31에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한 것입니다. 날 마나 죽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선생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그 모든 정신적인 고통, 육체적인 고통을 극복하고 환경의 어려움과 괴로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무시무시하게 하나님의 도움을 기도하고 매달리므로 하나님 은혜가 넘쳐난 것입니다. 조금도 등한할 수 없습니다. 조금이라고 기도를 게을리 하면 사탄의 사자가 짓눌러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자나, 깨나 하나님의 도움을 부르짖고 하나님의 도움에 의지했고 하나님은 그 기도를 통해서 은혜를 넘치게 주어서 일생을 주를 위해서 큰일을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원래 부장 판사의 아들로 상류 가문에 태어나서 명문 사립 고등학교와 하버드대학을 졸업한 냉철한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서른아홉의 나이에 갑자기 소아마비 증세로 중증 장애인이 되면서 휠체어에 앉아 다른 사람의 도움을 의지해서만 살아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장애인이 되면서부터 온화한 이미지의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신체 장애인의 어려움을 통해 국민들의 아픔을 헤아릴 수 있는 지도자가 되었고, 서민들의 애환을 이해하고 고통을 나누는 훌륭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질병과 싸우면서 습득한 도전 정신과 대담성은 경제대공황 앞에서 절망하고 좌절하는 국민들을 격려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 결과 루즈벨트는 대통령은 네 번이나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1930년대의 대공황을 타결했을 뿐 아니라, 제2차 대전 동안 연합국을 리드함으로써 세계 평화에 앞장서는 업적을 남겼던 것입니다. 그의 기념관에 들어서면 휠체어에 앉아 있는 루스벨트 동상이 있고 거기에는 이런 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질병은 그를 강인하게 만들었으며, 남의 아픔을 이해하고 고통을 나누는 마음을 가지게 했을 뿐 아니라, 인내심을 길러 주었다.” 육체의 연약이라는 가시를 통해서 루즈벨트는 상류층 귀족에서 가난하고 병들고 고통당하고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들을 끌어안을 수가 있게 되었고 일개 정치인으로서 국민의 지도자로 거듭난 것입니다. 고난의 채찍을 통해 깨어져서 겸손하게 되고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선생도 그는 냉철한 분이었습니다. 그는 차디찬 분이었습니다.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일 때 지도자역할을 했습니다. 생명을 빼앗는 것도 냉철하고 사람들을 잡아서 감옥에 가두고 죽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한 그가 회개하고 너무나 육체적 고통을 당하므로 깨어지고, 깨어지고, 회개하고, 회개하고 낮아지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그래서 사랑의 종이 되었습니다. 바울선생같이 사랑이 많고 인내력이 많고 위대하고 이해력과 동정심이 많은 주의 종이 어디 있었습니까? 그는 극심한 고통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매달리고 하나님 은혜가 그를 붙들어 주므로 점점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닮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후12: 9에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는 약한 것들을 자랑했습니다. 그 약한 것들은 무엇입니까?
고후12:10에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는 육체적으로 너무나 약했습니다.
고후10:10에 보면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그는 몸이 굉장히 약해서 늘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고 말을 더듬고 시원치 않았습니다. 너무나 아프기 때문에, 너무나 몸이 아파서 그것을 견디기 위해서 하나님께 끊임없이 부르짖고 기도해서 사람들이 보기에 약하고 말도 시원치 않았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마귀가 역사해서 능욕을 당했습니다.
고후11:23에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말할 수없는 능욕을 당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주님을 의지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궁핍했습니다. 고후11:27에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런 모든 고통을 당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해서 이것을 극복하고 이겨나가기 위해서 엄청나게 그는 주님께 부르짖어 기도한 것입니다. 가는 곳마다 마귀가 핍박을 일으켰습니다.
고후11:24~ 25에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곤란했습니다. 고후11:26에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였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엄청나게 기도해야만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선생의 기도는 우리가 상상할수 없을만한 기도였던 것입니다. 그는 기도 속에 살았고 끊임없이 기도의 줄을 붙잡았습니다. 기도의 줄을 놓치면 극복 못합니다. 연약을 극복하지 못합니다. 곤란을 극복하지 못합니다. 능력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환경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언제나 기도의 줄을 붙잡고 있으므로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와서 넉넉히 이기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 선생이 말하기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바울이 패배자로 안 살았습니다. 바울은 정말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삶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엄청나게 그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마귀의 공격을 이기기 위해서 기도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시50:15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바울선생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결론>
여러분 우리가 사는 동안에 고난이 동반하지 않은 축복은 저주가 되는 것입니다. 고난이 없이 축복만 받으면 반드시 세상으로 흘러갑니다. 고난 없이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부귀, 영화, 공명, 세상 쾌락을 얻게 되면 세상으로 흘러 가버리고 영혼도 잃어버리고 생명도 잃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이 동반하지 않은 축복은 저주라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고난을 주십니까? 고난 없는 세계에서 살고 싶습니다. 좋지요. 천당에 올라가면 고난 없이 살 수 있지요. 이 땅에는 마귀가 있고 세상이 있는 이상 마귀와 세상은 여러분을 유혹에서 어찌하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고 멀리멀리 세속을 따라 떠나서 지옥의 자식이 되게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삼중축복을 주시고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함을 주시기를 원하시지만 은혜와 축복을 받으면 뒤로 물러간다는 말인 것입니다. 잘되기만 하면 뒤로 물러가면 기별을 안 해도 말씀을 안 읽어요. 교회 출석을 등한이 해요. 전도하지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가 축복도 받고 신앙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바울에게 가시가 있었던 것처럼 가시를 반드시 보내야 되는 것입니다. 큰 축복을 받을 때는 큰 가시를 보내야 돼요. 적은 축복을 받을 때는 적은 가시를 보내야 돼요. 가시가 우리를 찔러야 우리가 축복도 누리고 신앙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과 고난은 하나님이 똑같이 사용하는 하나님의 도구인 것입니다. 축복만 받으면 안 됩니다. 또 고난만 있으면 파멸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고 축복 때 고난의 가시를 주어서 회개시켜 주시고 깨우쳐 주셔서 우리의 삶에 밸런스가 잡히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항상 고난의 채찍에 맞으며 깨어져 회개하며 받는 축복이 참된 축복인 것입니다. 얼마나 축복이 귀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고난의 채찍에 맞으면서 받는 축복이어야 올바른 축복이 되지 고난의 축복이 맞지 않는 축복은 저주가 되고 나중에는 영혼을 잃어버리는 처참한 고통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자손으로 태어나서 3대 재앙 속에 몸부림치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삼중축복을 다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기를 다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축복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고난도 항상 여러분에게 허락하는 것입니다. 고난이 와서 여러분을 늘 가시로 찌르고 채찍으로 때려서 회개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깨어진 마음에 하나님의 축복은 유지되는 것이지 회개하고 깨어진 마음이 없는 곳에 하나님의 축복은 사라져 버리고 저주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고난당할 때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하고 깨어지고 회개하고 주님께 더 가까이 나가며 축복받을 때 축복으로 말미암아 세상과 마귀에게 끌려가지 않도록 무서운 마음으로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고 하나님 찾는 일을 열심히 하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고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영광스러운 구원을 갖다온 것처럼 우리도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축복의 은혜 속에 거하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고난은 우리에게 괴로운 것이고 우리가 원치 않는 것이지만 그러나 고난은 우리를 깨뜨리고 회개시키고 변화시키고 하나님을 찾게 하는 하나님의 사자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게 도와주시옵소서. 축복만 있고 고난이 없으면 반드시 타락하고 세상으로 흘러가고 영혼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축복과 함께 고난이 함께 있어야 축복된 것이 되지 고난이 없는 축복은 죽음이요, 저주인 것을 알게 도와주시옵소서. 그러므로 축복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고난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 아멘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더불어 ‘싫지만 꼭 필요한 고난’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이 세상에 병균이 없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병균은 있고 이 병균과 싸워 이겨야 건강하게 살 수가 있습니다. 고난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 고난은 항상 다가오는 것입니다. 고난을 극복하면 강한 신앙인이 됩니다. 고난에 지면 신앙에 파선하게 됩니다.
<본론>
1. 하나님이 원하시는 전인구원
왜, 우리에게 고난이 있습니까? 여러분 원래 우리 조상 아담과 하와가 지음을 받았을 때는 고난이 있는 세계에 살도록 지음을 받지 않았습니다. 에덴은 낙원이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할 것이 없었습니다. 죽음조차 없었습니다. 그런 영광스러운 처소에 있으면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탐욕을 가지고 하나님을 반역하므로 오늘날 이 큰 재앙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므로 가져온 것은 삼대재앙인 것입니다. 첫째 재앙은 영혼이 죄로 말미암아 죽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지고 이제 하나님과의 관계가 두절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영원이 죽으므로 사람은 완전히 혼과 육만 가지고 사는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잃어버린 비극을 그들은 가져온 것입니다. 둘째 재앙은 저주를 가져온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반역하므로 말미암아 땅은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사는 삶의 고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가시와 엉겅퀴란 우리의 삶에 수많은 어려움과 고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 고생하고 수고하고 괴로움이 인생을 따를 것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재앙은 너희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죽음의 재앙이 온 것입니다. 원래 사람은 육체적으로도 죽지 않게 만들어졌는데 죄 값으로 육체가 죽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태어나자 나이 먹어 늙어지고 병들고 죽음의 고통이 인새에게 다가오게 된 것입니다.
창 3:17~19에 보면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는 가장 비극적인 선언을 받게 된 것입니다.
로 5: 12에 보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해서 에덴에서 쫓겨난 이후로 그 혈통에서 태어난 사람은 아담과 하와와 똑같은 죄를 안지어도 아담과 하와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다가온 원죄와 자 범죄로 모두 다 똑같은 형벌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이 세상에 고난은 왜 있는가, 우리 아담과 하와를 조상으로 섬기고 태어난 우리들은 운명적으로 삼대재앙을 가슴에 안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아무도 이 재앙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아무리 이 재앙에서 벗어나려고 애써도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해주셨습니다. 2천 년 전에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그리스도가 사람이 되어 오셔서 사람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아담이 지은 죄 형벌을 대신 갚으므로 삼대재앙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도 없고 흠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사람으로 오셔야만 되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오셔서 사람을 대신해서 사람이 지은 모든 죄와 불의, 추악, 저주, 절망을 대신 갚기 위해서 십자가에 고난당하신 것입니다. 형벌 받을 필요가 없는데 우리 때문에 대신해서 형벌을 받으므로 말미암아 모든 죄 가를 청산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은 우리에게 삼대축복, 삼중축복을 가져온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우리에게 죄를 청산하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헐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고 하나님 우리에게도 오지도 못할 죄악의 담을 주님께서는 그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서 다 청산하셨습니다. 죄를 갚아버린 것입니다. 죄에 대한 벌을 받았으므로 주님께서는 모든 죄를 다 허물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교통의 길이 열리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이 없어지매 하나님의 성령이 오셔서 우리 영혼을 살려 주시고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하나님을 섬기고 경외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영혼이 살아난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습니다. 예수님 이외에는 절대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의 자손으로 태어날 때부터 죄를 짊어지고 형벌을 받아 될 우리기 때문에 죄의 값을 갚지 않고는 절대로 하나님과 가까이 갈 수 없는데 죄의 값은 사망이라 죄 값을 갚으려면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죽으면 다시 살아나지 못하기 때문에 결코 자기 죄를 청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고 청산하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므로 죄의 값을 청산했기 때문에 천하 인간에게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종교도 많고 철학도 많고 선행하는 사람도 많고 고행하는 사람도 많고 수양과 도덕을 닦는 사람도 많지만 그로써는 결코 죄악을 청산하지 못합니다. 죄에 대해서 형벌을 받으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죄 없는 사람이 죄 있는 사람을 대신해서 형벌 받은 분은 역사상 예수님밖에 안계시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구원받을 사람이 한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열심히 예수님을 전도해야 될 것은 예수님만이 길입니다. 예수님만이 진리입니다. 예수님만이 생명이 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용서와 의와 영광을 가져와 주신 구원의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져오신 두 번째 축복은 저주에서 해방시켜 준 것입니다. 아담 이후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다 어겼으므로 율법의 저주 하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높이 달린 것은 우리의 저주를 대신 짊어지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저주받은 자는 나무에 매달라고 성경은 말했는데 복 받은 예수님이 나무에 매달릴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의 저주를 대신 짊어지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저주를 청산해 버렸기 때문에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저주는 없습니다. 리스도 안에서는 오직 아브라함의 복만 넘쳐날 따름인 것입니다.
사53: 5에 보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채찍에 맞으신 공로를 통해서 또한 세 번째의 재앙인 질병을 제하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서 살면서 가지가지 질병을 다 앓고 고통을 다 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의 질병을 갚기 위해서 빌라도의 뜰에서 사십에서 하나 감한 서른 아혼 차례 매를 맞고 가슴과 등허리가 갈기갈기 찢어지고 선지피를 흘렸습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입었다는 말씀은 이미 하나님께서 2천년 전에 이루신 축복인 것입니다. 이 말씀이 살아있고 이 말씀이 하늘에 굳게 선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채찍에 맞으신 공로를 말미암아 우리가 주님께 부르짖어 기도할 때 주님의 치료의 역사가 우리에게 나타나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요한삼서 1장 2절처럼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말씀하신 그대로 우리 주님이 오셔서 아담이 가져온 삼대재앙을 다 십자가에서 철폐하시고 영혼을 구원하시고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질병과 영원한 멸망에서 자유와 해방을 주시는 삼중축복을 우리에게 갖다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은총을 잊지 말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잊지 말라고 성경은 시편 103편에 말합니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해준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2. 신앙이 자라고 복도 받기 위하여
그러면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삼대재앙에서 삼중축복을 받고 주 안에서 생명을 얻고 넘치게 얻게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축복도 받고 신앙도 자라기 위해서는 우리가 끊임없이 주님께 의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축복은 우리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하므로 십자가의 공로로 말미암아 얻은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하고 우리가 붙어서 있으면 이 은혜를 얻거니와 예수님에게서 떨어지면 이 은혜를 잃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기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항상 예수께 붙어 있어서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것처럼 그렇게 할 때 예수님의 삼중축복이 넘쳐나서 우리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으며 살아갈 수 있는데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언제나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의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부모 없이는 살지 못하지 않습니까? 어머니 젖가슴에 늘 의지하고 아버지, 어머니의 보호하심과 돌보아 주시고 얼러줘야 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부모를 떠나서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점점 장성하면은 그 다음부터 부모를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떠나 독립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자라는 과정에 좋은 일이지만 비유로 말 하건데 자라나면 날수록 이제는 부모를 떠나게 됩니다. 초등학교 때는 가족이 휴양을 갈 때 같이 가자면 두말하지 않고 따라오는데 중학교 3학년만 되면 “야! 이번 가족휴가를 같이 가자.” 그러면 “아니요, 우린 친구하고 같이 갈테니까 아버지, 어머니 잘 다녀오십시오.” 중학교 3학년만 되어도 이제는 부모와 같이 동행하지 않고 떨어져서 자기 독립으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장할수록 독립적인 삶이 되는데 우리 영적으로는 그렇게 해서는 결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육신적으로 자녀는 성장할수록 부모에게 독립해야 되겠지만 영적으로는 우리가 항상 주님께 의지하고 우리가 약할 때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난 다음 강하게 되고 부유하게 되면 하나님을 떠나 독립적으로 살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신32:18에 “너를 낳은 반석을 네가 상관하지 아니하고 너를 내신 하나님을 네가 잊었도다”라고 탄식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자라면 자랄수록 주님께 더 의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더 붙잡고 주님과 함께 있어야 우리가 항상 성령안에서 자라고 축복을 받지 주님에게 떨어지면 나무에서 꺾어진 포도나무 가지와 같아서 말라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약할 때 주님께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 통계를 보면 1996년 국민소득 1만 불이 넘으면서 교회 출석률이 40%로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생활에 여유가 생기자 이제 사람들은 주일에 산으로, 들로, 사업장으로 가는 것입니다. 기도원도 마찬가지여서 국민소득 1만 불이 된 다음 기도원 출석률도 역시 30%로 떨어져서 열악한 기도원들은 문을 닫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나라 교인이 출석률이 가장 좋았던 때는 6.25사변이 일어났을 때입니다. 당시 전쟁으로 온 국민이 어마어마한 고통과 괴로움을 겪을 때 교회 출석률은 95%였습니다. 고난이 닥치자 그 영혼에 구원의 불길이 타올랐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고난을 당하고 고통스럽고 괴로워야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가까이 옵니다. 좀 잘 먹고, 잘 입고, 잘살게 되면 그만 하나님께로 향한 마음이 식어지고 느슨하게 되고 하나님을 뜨겁게 간절히 찾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으로 말미암아 항상 깨어져서 하나님을 찾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말했는데 마음이 가난해져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부요가 되어서 ‘이만하면 되었다. 나는 자신 있다. 이제는 나 스스로 행복할 수 있다.’고 하면 하늘나라가 멀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항상 자기가 못나고 약하고 무능력한 것을 깨닫고 언제나 자기를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의지하고 살아야 하늘나라가 마음속에 가득하고 생활이 임재 하여 있는 것입니다.
잠 3: 5~ 6에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깨어져 하나님을 찾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생활 속에 고난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는 깨어지지 않습니다. 자기 스스로 의지하고 자기 뜻대로 살려고 하는 경향성이 많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께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게 되면 그때로부터 기도가 게을러지고 말씀 읽기를 게을리 하고 하나님 찾기를 게을리 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점점 멀어집니다. 사탄을 따라서 세상 일락을 좋아하고 세상의 쾌락과 세상의 정욕을 따라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길을 막고 우리가 계속해서 주님품안에 있어서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고난이라는 사자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고난이 와서 우리를 괴롭힐 때 사람들은 깨어지고 또다시 하나님을 찾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배가 고파야 밥을 찾듯이 목이 말라야 우물물을 찾듯이 고난이 다가와서 고통스럽고 괴로우면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회개의 동기를 주는 것입니다. 언제나 인간은 고난당할 때 하나님을 찾습니다. 고난이 사라지면 또다시 게을러지고 자기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대하 15: 2에 “너희가 만일 그를 찾으면 그가 너희와 만나게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그를 버리면 그도 너희를 버리시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일하게 되면 주님을 버리게 되고 주님을 버리게 되면 주님도 우리를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찾아야 주님은 우리와 같이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매일같이 간절히, 간절히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매일매일 구해야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 하시는 것입니다.
대하 15: 4에 그들이 그 환난 때에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가서 찾으매 그가 그들과 만나게 하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환난 때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면 하나님이 만나 주시는 것입니다.
「레미제라블」로 유명한 프랑스의 작가 빅토르 위고는 젊은 시절 작가로서 명성을 날리면서 문란하고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가족은 그의 방탕을 고통으로 받았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딸이 “제발 가정으로 돌아와 착실한 아빠가 되어 주세요.”라는 유서를 남기고 세느 강에 투신해서 자살했습니다. 빅토르 위고는 자기의 외딸을 생명처럼 사랑했는데 그 딸이 아버지의 방탕으로 좌절하고 절망해서 세느 강에 투신자살을 했습니다. 이 일로 큰 충격을 받은 빅토르 위고는 “이 비극은 하나님께서 내게 내린 심판이다.”라고 말하며 완전히 깨어져서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리고 회개한 후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후생사회국 관리가 되었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가운데 교육부장관까지 지냈으며, 1862년에는 「아, 무정」이라는 제목의 책을 발표했습니다. 딸의 죽음이라는 고난이 그를 깨뜨려 하나님을 찾게 했고, 지금까지도 존경 받는 문학가로 남아있게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주심으로 회개하고 깨어져서 하나님께로 찾아오게 만드는 것입니다. 고난이 없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고난 안 받고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사람은 타락한 속성이 있어서 고난이 없으면 자꾸만 자기를 의지하고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자꾸만 세상으로, 세상으로 향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으로 가는 길을 차단하고 돌이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서 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고난이 와야 말씀을 찾고 성령충만을 찾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되는 것이 사람인 것입니다.
서양 격언에 “참호 속에는 무신론자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전쟁할 때 적군의 총탄이 빗발처럼 날라 오면 참호에 엎드려서 그냥 다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마더 테레사는 “고통은 성장의 법칙이요. 우리의 인격은 이 세계의 폭풍우와 긴장 속에서 만들어 지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독일 격언에 의하면 “고난은 기도의 선생”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 맞았어요. 고난이 기도의 선생입니다. 평소에 기도하라. 기도하라고 해도 무슨 말합니까? 시간이 없어요. 몸이 피곤해요. 바빠요. 기도할 여과 없어요. 온갖 잔소리 다 합니다. 그러나 그에게 기도를 가르치는 것은 고난과 폭풍우가 다가오면 두말하지 않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앉아도 기도하고, 서도 기도하고, 새벽기도 나오고, 철야기도하고, 금식기도하고, 기도원에 가고 고난이 기도의 선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깨어져서 하나님을 찾도록 하기 위해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3. 바울이 당한 고난
성경에 보면 사도바울 선생은 하나님이 사용한 위대한 종이었습니다.
역사이래로 사도바울만큼 하나님의 계시를 많이 받고 하나님이 능력 있게 사용한 분이 없습니다. 바울이 아니었으면 오늘날 우리 믿는 신앙의 기본 신학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바울이 하나님께 계시 받아 적은 로마서나 그 외에 고린도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주옥같은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계시를 엄청나게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엄청나게 가까이 있어야 되고 기도 많이 하고 부르짖어야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바울 선생에게 고난을 많이 보내셨습니다. 바울같이 신령하고 전심, 전력으로 하나님께 헌신한 사람도 고난이 회오리바람처럼 닥쳐왔습니다. 시시각각으로 고난의 폭풍우속을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도록 주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었고 매달리니까 신령한 세계 속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바울선생은 교만하지 않게 육체의 가시를 하나님이 주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는 육체의 가시, 사탄의 사자를 주어서 그를 항상 치게 만들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헬라어에 보면 육체의 가시라는 것은 육체에 말뚝이 박혀있다는 것입니다. 육체에 말뚝을 박아 놓은 것처럼 그는 어마어마한 고통을 하나님이 바울 선생에게 허락한 것입니다. 그에게는 육체적인 질병이나 안질이나 간질 등 이런 병이 있었다는 신학자들의 말이 있습니다만 무슨 병이든 여하간 사탄의 사자가 와서 극심한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선생은 앉으나 서나 고통 가운데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말씀을 증거 하면서도 고통 때문에 마음이 이그러졌습니다. 그렇게 고통을 당하면서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이렇게 고통스러워야 내가 어떻게 살수가 있습니까? 이렇게 고통을 당하고야 내가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까? 앉으나 서나 이렇게 육체가 괴로워서야 살수가 없으니 날 좀 놓아 주시옵소서.’ 한번 기도해도 응답이 없습니다. 또 두 번째 시간을 내어서 하나님을 찾아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목메어 울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습니다. 세 번째 그는 이제는 필사적으로 ‘하나님이 고통에서 나를 놓아주던지 그렇지 않으면 내 생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사는 것이 생지옥입니다. 너무 괴롭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네가 약할 때 내가 강하다. 네가 계시를 받은 것이 많으므로 교만해질 수 있고 오만해질 수 있고 기도를 게을리 할 수 있고 잘못될 수가 있다. 네가 만일 잘못되면 하늘나라가 무너진다. 네가 항상 깨어서 기도하고 겸손하고 낮아져서 주님을 의지하기 위해서 내가 사탄의 사자, 육체의 가시를 허락했다. 네가 사탄의 사자에게 얻어맞아 약할 때 나를 의지하므로 내가 너에게 강해질 수 있다. 내 은혜가 족하다. 언제나 네가 고통당할 때는 그 고통을 이길만한 은혜를 줄 테니까 내 은혜를 의지해서 고통을 극복하고 살아라.’ 바울은 이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고전15:31에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한 것입니다. 날 마나 죽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선생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그 모든 정신적인 고통, 육체적인 고통을 극복하고 환경의 어려움과 괴로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무시무시하게 하나님의 도움을 기도하고 매달리므로 하나님 은혜가 넘쳐난 것입니다. 조금도 등한할 수 없습니다. 조금이라고 기도를 게을리 하면 사탄의 사자가 짓눌러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자나, 깨나 하나님의 도움을 부르짖고 하나님의 도움에 의지했고 하나님은 그 기도를 통해서 은혜를 넘치게 주어서 일생을 주를 위해서 큰일을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원래 부장 판사의 아들로 상류 가문에 태어나서 명문 사립 고등학교와 하버드대학을 졸업한 냉철한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서른아홉의 나이에 갑자기 소아마비 증세로 중증 장애인이 되면서 휠체어에 앉아 다른 사람의 도움을 의지해서만 살아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장애인이 되면서부터 온화한 이미지의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신체 장애인의 어려움을 통해 국민들의 아픔을 헤아릴 수 있는 지도자가 되었고, 서민들의 애환을 이해하고 고통을 나누는 훌륭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질병과 싸우면서 습득한 도전 정신과 대담성은 경제대공황 앞에서 절망하고 좌절하는 국민들을 격려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 결과 루즈벨트는 대통령은 네 번이나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1930년대의 대공황을 타결했을 뿐 아니라, 제2차 대전 동안 연합국을 리드함으로써 세계 평화에 앞장서는 업적을 남겼던 것입니다. 그의 기념관에 들어서면 휠체어에 앉아 있는 루스벨트 동상이 있고 거기에는 이런 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질병은 그를 강인하게 만들었으며, 남의 아픔을 이해하고 고통을 나누는 마음을 가지게 했을 뿐 아니라, 인내심을 길러 주었다.” 육체의 연약이라는 가시를 통해서 루즈벨트는 상류층 귀족에서 가난하고 병들고 고통당하고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들을 끌어안을 수가 있게 되었고 일개 정치인으로서 국민의 지도자로 거듭난 것입니다. 고난의 채찍을 통해 깨어져서 겸손하게 되고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선생도 그는 냉철한 분이었습니다. 그는 차디찬 분이었습니다.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일 때 지도자역할을 했습니다. 생명을 빼앗는 것도 냉철하고 사람들을 잡아서 감옥에 가두고 죽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한 그가 회개하고 너무나 육체적 고통을 당하므로 깨어지고, 깨어지고, 회개하고, 회개하고 낮아지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그래서 사랑의 종이 되었습니다. 바울선생같이 사랑이 많고 인내력이 많고 위대하고 이해력과 동정심이 많은 주의 종이 어디 있었습니까? 그는 극심한 고통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매달리고 하나님 은혜가 그를 붙들어 주므로 점점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닮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후12: 9에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는 약한 것들을 자랑했습니다. 그 약한 것들은 무엇입니까?
고후12:10에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는 육체적으로 너무나 약했습니다.
고후10:10에 보면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그는 몸이 굉장히 약해서 늘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고 말을 더듬고 시원치 않았습니다. 너무나 아프기 때문에, 너무나 몸이 아파서 그것을 견디기 위해서 하나님께 끊임없이 부르짖고 기도해서 사람들이 보기에 약하고 말도 시원치 않았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마귀가 역사해서 능욕을 당했습니다.
고후11:23에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말할 수없는 능욕을 당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주님을 의지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궁핍했습니다. 고후11:27에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런 모든 고통을 당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해서 이것을 극복하고 이겨나가기 위해서 엄청나게 그는 주님께 부르짖어 기도한 것입니다. 가는 곳마다 마귀가 핍박을 일으켰습니다.
고후11:24~ 25에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곤란했습니다. 고후11:26에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였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엄청나게 기도해야만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선생의 기도는 우리가 상상할수 없을만한 기도였던 것입니다. 그는 기도 속에 살았고 끊임없이 기도의 줄을 붙잡았습니다. 기도의 줄을 놓치면 극복 못합니다. 연약을 극복하지 못합니다. 곤란을 극복하지 못합니다. 능력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환경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언제나 기도의 줄을 붙잡고 있으므로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와서 넉넉히 이기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 선생이 말하기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바울이 패배자로 안 살았습니다. 바울은 정말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삶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엄청나게 그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마귀의 공격을 이기기 위해서 기도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시50:15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바울선생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결론>
여러분 우리가 사는 동안에 고난이 동반하지 않은 축복은 저주가 되는 것입니다. 고난이 없이 축복만 받으면 반드시 세상으로 흘러갑니다. 고난 없이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부귀, 영화, 공명, 세상 쾌락을 얻게 되면 세상으로 흘러 가버리고 영혼도 잃어버리고 생명도 잃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이 동반하지 않은 축복은 저주라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고난을 주십니까? 고난 없는 세계에서 살고 싶습니다. 좋지요. 천당에 올라가면 고난 없이 살 수 있지요. 이 땅에는 마귀가 있고 세상이 있는 이상 마귀와 세상은 여러분을 유혹에서 어찌하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고 멀리멀리 세속을 따라 떠나서 지옥의 자식이 되게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삼중축복을 주시고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함을 주시기를 원하시지만 은혜와 축복을 받으면 뒤로 물러간다는 말인 것입니다. 잘되기만 하면 뒤로 물러가면 기별을 안 해도 말씀을 안 읽어요. 교회 출석을 등한이 해요. 전도하지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가 축복도 받고 신앙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바울에게 가시가 있었던 것처럼 가시를 반드시 보내야 되는 것입니다. 큰 축복을 받을 때는 큰 가시를 보내야 돼요. 적은 축복을 받을 때는 적은 가시를 보내야 돼요. 가시가 우리를 찔러야 우리가 축복도 누리고 신앙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과 고난은 하나님이 똑같이 사용하는 하나님의 도구인 것입니다. 축복만 받으면 안 됩니다. 또 고난만 있으면 파멸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고 축복 때 고난의 가시를 주어서 회개시켜 주시고 깨우쳐 주셔서 우리의 삶에 밸런스가 잡히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항상 고난의 채찍에 맞으며 깨어져 회개하며 받는 축복이 참된 축복인 것입니다. 얼마나 축복이 귀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고난의 채찍에 맞으면서 받는 축복이어야 올바른 축복이 되지 고난의 축복이 맞지 않는 축복은 저주가 되고 나중에는 영혼을 잃어버리는 처참한 고통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자손으로 태어나서 3대 재앙 속에 몸부림치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삼중축복을 다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기를 다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축복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고난도 항상 여러분에게 허락하는 것입니다. 고난이 와서 여러분을 늘 가시로 찌르고 채찍으로 때려서 회개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깨어진 마음에 하나님의 축복은 유지되는 것이지 회개하고 깨어진 마음이 없는 곳에 하나님의 축복은 사라져 버리고 저주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고난당할 때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하고 깨어지고 회개하고 주님께 더 가까이 나가며 축복받을 때 축복으로 말미암아 세상과 마귀에게 끌려가지 않도록 무서운 마음으로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고 하나님 찾는 일을 열심히 하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고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영광스러운 구원을 갖다온 것처럼 우리도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축복의 은혜 속에 거하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고난은 우리에게 괴로운 것이고 우리가 원치 않는 것이지만 그러나 고난은 우리를 깨뜨리고 회개시키고 변화시키고 하나님을 찾게 하는 하나님의 사자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게 도와주시옵소서. 축복만 있고 고난이 없으면 반드시 타락하고 세상으로 흘러가고 영혼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축복과 함께 고난이 함께 있어야 축복된 것이 되지 고난이 없는 축복은 죽음이요, 저주인 것을 알게 도와주시옵소서. 그러므로 축복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고난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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