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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

누가복음 길희성............... 조회 수 2252 추천 수 0 2009.10.22 14: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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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8:40~48 
설교자 : 길희성 형제 
참고 : 새길교회 2009.7.12 주일설교 
sgsermon.jpg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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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

[누가 8 : 40~48, 17 : 19, 18 : 42]

 

길희성 형제

인생을 살다보면 누구든 한두 번 쯤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됩니다. 인생은 자그마한 위기들의 연속이지만, 이런 자그마한 위기들은 오히려 우리 삶에 약이 됩니다. 밋밋하고 평탄한 삶보다는 굴곡이 있고 감당할만한 도전이 있는 삶이 우리 삶을 활기차게 만들고 더 보람 있게 만듭니다. 도전과 시련이 없으면 성취의 기쁨도 없으며, 고통이 없으면 행복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정한 이치입니다.

우리는 가끔 왜 하나님이 고통 없는 세계를 창조하시지 않았는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는 불가능하고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즐거움만 있고 고통이 없는 세계는 하나님도 만들 수 없습니다. 고통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생명체가 아예 없는 세계라면 몰라도, 생명체가 존재하는 한, 하나만 있고 다른 하나는 없는 세계는 전능하신 하나님에게도 불가능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하나님이 왜 고통과 즐거움을 느끼는 생명체를 만들었냐고 불평이라도 해야 합니까? 사실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는 이 방대한 우주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지만 이 지구라는 특별한 곳에서 생명이 탄생하고 인간이 출현하게 된 것을 하나님의 섭리이며 신비라고 생각하는 한, 왜 하나님이 즐거움만 있고 고통은 없는 세계를 창조하시지 않았는지 불평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을 일입니다.

배고픔이 없으면 먹는 것의 행복을 못 느끼며, 패배의 쓰라림을 모르면 승리의 기쁨도 모릅니다. 항시 날씨가 좋은 곳에 살면 날씨가 좋다는 것이 별 의미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생에 적당한 고난과 시련은 오히려 약이 됩니다. 가끔씩 찾아오는 패배, 좌절, 시련은 인생을 더 풍요롭게 하며 성숙되게 만듭니다.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자수성가한 사람의 인생에는 반드시 배울 점이 있지만, 어려움을 모르고 자라난 재벌 2세들은 아버지가 이루어 놓은 업적마저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지킨다 해도 그의 인생은 결코 남에게 감동을 주거나 자기 자신이 큰 보람을 느끼지도 못합니다.

문제는 누구나 겪는 이러한 감당할만한 시련 말고, 그야말로 감당하기 어려운 극심한 시련, 유독 나에게만 찾아온 듯한 극심한 고통과 좌절을 맞이하게 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감당 못할 시련은 주시지 않는다고 바울 사도는 말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이미 극심한 시련을 잘 감당한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처럼 사선을 넘는 온갖 역경을 다 경험한 사람의 이야기이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의 믿음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처음 그런 위기에 봉착한 사람들에게는 그런 말이 큰 위로를 주지 못합니다. 자기 스스로가 믿음으로 위기를 극복하여 그런 고백을 할 수 있기 전에는, 참고사항은 되겠지만 큰 위로가 되지는 못합니다.

사실, 절망적인 위기를 믿음으로 극복한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는 남이 알 수 없는 삶의 축복을 경험합니다. 그야말로 돈 주고 살 수 없는 귀한 경험이 되어서 그의 삶을 더 큰 축복으로 바꾸어줍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되살아 난 사람들이 한결같이 증언하는 바는,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축복인지,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또 우리가 일상적으로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들인지를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을 덮고 있던 두터운 비늘이 벗겨져서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게 되고, 세상의 부귀영화만을 좇고 살아왔던 지금까지의 자기중심적 삶이 얼마나 헛된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되며, 이제부터는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섬기는 삶을 살겠노라 믿음의 결단도 하게 됩니다. ‘작심삼일’이라고,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온 사람도 이러한 결단이 별로 오래가지 못하고 다시 세상일에 몰두하게 되는 것이 상례지만, 그래도 인생의 깊은 좌절과 절망을 통해서 세상과 인생을 한 번 포기하고 접었던 경험이 있는 사람과,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의 삶은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여하튼 이런 드라마틱한 경험이 없는 평범한 신자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자신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극심한 고통과 시련에 처하게 되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불운한 신세를 한탄하며 하나님을 원망하든지, 아니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께 매달리는 믿음의 길을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복음서를 보면 믿음으로 삶의 위기를 극복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오늘 아침 봉독한 이야기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병을 앓고 있던 한 여인이 - 일설에 의하면 이 여인은 치료를 위해 재산을 다 탕진했다고 합니다 - 예수님을 향해 몰려드는 군중을 헤치고 간신히 그의 옷자락을 만지자 그의 병이 곧 나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주목할 점은 “너의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표준새번역에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번역되어 있는데, 이는 의미를 지나치게 확대해석한 번역입니다. “너의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 혹은 “구하였다” 정도로 번역하면 좋을 것입니다. ‘구원’이라는 말은 주로 영생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이 육체적 질병이 낫는 기적적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영생의 경험을 했는지, 아니면 그저 일시적으로 병이 낫는 경험 정도만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단지 치유의 은사만을 받았다면, 앞으로도 언제든지 다시 아플 수 도 있을 것이며, 이는 결코 구원을 받았다고 할 일이 아닙니다.

병이 낫는 것 자체가 신앙적 의미의 구원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이 둘을 구별 못하고 병을 고치기 위해 예수를 믿을 정도로 병을 낫는 일을 신앙의 목적으로 삼고 있지만, 육체적 질병의 치료가 영생을 누리는 구원이 아님은 자명합니다. 병이 낫는 경험은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로 들어가는 계기가 될 수 있으며,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징표는 될 수 있지만, 결코 구원 그 자체는 아닙니다.

흔히 한국 기독교인들 대다수의 신앙을 ‘기복신앙’이라고 하는데, 기복신앙은 ‘기적신앙’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실 둘은 같은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열심히 일하지 않고 예수만 믿으면 사업이 번창하고 돈을 잘 번다면 그야말로 기적일 것이며, 몸이 아파도 병원에 가지 않고 기도만 해서 몸이 낫는다면 이 또한 기적일 것이고, 어머니가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 아들을 위해 새벽 기도를 열심히 해서 대학에 붙었다면 이것도 기적일 것입니다. 기복신앙은 곧 기적신앙입니다.

기적신앙은 세 가지 근본적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첫째는, 기독교 신앙을 마치 어떤 기적을 사실로 믿는 행위라고 오해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기적 이야기가 허다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흔히 이런 이야기들을 모두 사실로 믿는 것이 신앙이라고 가르쳐 왔으며, 기적을 믿지 못하면 신앙이 없다고 비판합니다. 이는 잘 못 된 것입니다.
기적 신앙의 둘째 문제는, 신앙을 기적에 의존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설령 어쩌다 기적을 경험했다 해도, 그런 경험에 의존하는 신앙은 와해되기 싶습니다. 자기가 생각했던 기적이 기적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거나, 또 다시 인생에 시련이 닥쳐왔을 때 기적을 경험하지 못하면 그의 신앙은 위기에 빠집니다. 기적의 뒷받침을 받는 신앙, 기적에 의해 입증되었다고 믿는 신앙에 길들여지다 보면, 기적에 대한 기적이 희미해지거나 기적을 더 이상 경험하지 못하게 되면 그의 신앙은 힘을 상실하게 됩니다.

세 번째 문제는, 기적을 경험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는 점입니다. 가령 병에 걸려 열심히 기도했는데 병이 낫지 않는다면, 자기의 신앙을 의심하게 됩니다. 내 신앙이 모자라서, 내 기도가 부족해서 치유의 기적을 경험하지 못하는 게 아닌지 의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가 중병에 걸리거나 자기 자식이 중병에 걸렸는데 간절히 기도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은 치유의 경험을 하지 못하고 죽습니다. 아니, 대다수가 그렇습니다. 아픈 것만도 괴로운데 나의 믿음이 부족해서 병이 낫지 않았다고 하니, 자식을 잃는 것만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나의 기도가 부족해서 내 자식이 죽었다니, 세상에 그런 원통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기적을 체험한 신앙 간증 함부로 하면 안 됩니다. 그런 체험을 못 한 사람에게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이야기로 들릴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지 않아도 낙심한 사람에게 더 깊은 상처를 입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예수께서 베푸신 많은 기적들을 사실로 믿습니다. 특히 치병 이야기만은 거의 다 사실이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들이 복음서에 없다 해도,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 그런 이적들을 행하지 않았다 해도, 나는 여전히 예수를 믿을 것입니다.

“너의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한 여인이 경험한 기적 이야기를 두고 하신 말씀이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기적신앙’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신앙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적이 신앙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기적을 만든다는 놀라운 진리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언젠가 저는 아프리카에서 16살 난 한 여자 전도사의 전도활동을 취재한 텔레비전 프로그람을 우연한 기회에 본 일이 있습니다. 이 전도사는 예수를 믿으면 아프리카에서 저주처럼 유행하고 있는 에이즈가 나을 뿐 아니라 에이즈에 걸리지도 않는다고 전도하면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런 식으로 전도하려 했던 한 청년이 있었는데, 이 청년은 사실 자신의 문란한 성 생활 때문에 내심 자기가 에이즈에 걸린 것 아닌가 하고 무척 걱정을 하고 있으면서도 끝까지 예수를 믿으려 하지 않았고 교회에 다니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병원에서 검사를 받은 후 다행히 자기가 아직 에이즈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크게 안도하고는 그 다음에야 예수를 믿기로 하고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감동적인 이야기였고 멋진 청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싸구려 기적신앙과 진정한 신앙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고서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토마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보지 않았음에도 믿는 자들은 복이 있다”는 말씀을 기억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기적이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필요 없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기적은 존재합니다. 적어도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자연적 설명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고 납득되지 않는 사건들의 경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와 개입에 의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렇다고 기적이 자연의 법칙을 어기고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연 법칙들의 입법자이신 하나님은 당연히 그 법칙을 통해서 일하시지 법칙을 어기면서 일하지시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 법칙들을 아직 완전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기적이 법칙을 어기는 것이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자연의 법칙은 사건들을 규제하는 힘이지만, 법칙 자체가 사건을 야기하는 힘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사건들을 발생시키는 물리적 힘을 넘어서, 그 힘 가운데 혹은 그 배후에, 추가적인 하나님의 힘이 있다고 믿습니다. 이 추가적 힘이 물리적 힘과 구체적으로 어떻게 관계하는지 우리의 지식은 아직 충분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힘은 또 하나의 자연에 속한 힘이 아니며, 물리적 인과관계 속의 한 고리는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은 영원히 우리에게 신비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행위만 잘 설명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 인간의 자유의지와 행위가 가능한지도 아직 잘 밝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닮아 초월적이고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우리의 행위가 우리의 신체에 의존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행위가 전적으로 신체에 의해서만 결정되고 주도되는 것은 아닙니다. 육체와 영혼 사이의 관계는 일방적이 결정론적 관계가 아니라 쌍방향적인 상호작용의 관계입니다. 나의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행위가 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며 또 그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행위를 하고서 내 몸이 시킨 것이다, 나의 두뇌가 한 짓이라고 책임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이 자유로운 행위가 어떻게 가능한지 그 어느 과학자나 철학자도 속 시원하게 이론적으로 밝히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자유의지나 행위가 없다거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자유도 이러한데, 하물며 인간을 지으신 초월자 하나님의 자유로운 행위야 말할 것 있겠습니까? 비록 우리가 하나님이 어떻게 행위를 하시는지 밝히지 못해도, 인격적 존재인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자유로운 행위가 분명이 있다고 믿습니다.

오늘 읽은 복음서의 말씀에 의하면, 혈루병을 앓고 있는 한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자마자 예수님은 그의 몸에서 어떤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으며, 즉시 그 여인의 혈루병이 나았다고 합니다. 이 힘의 실체가 과연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힘이 작용했다는 것을 무조건 의심해서도 안 됩니다. 우주에는 우리가 아직 발견하지 못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힘들이 많이 존재하며, 지금도 과학은 새로운 것들을 계속해서 발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앞으로 과학이 새로운 물리적 발견을 통해서 하나님의 힘과 행위의 정체를 밝혀줄 것이라고 섣불리 기대하는 것도 금물입니다. 이는 이른바 ‘창조과학’이라는 사이비 과학이나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힘은 어디까지나 물리적 힘과는 구별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궁금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도대체 어떻게 기적이라는 특별한 하나님의 행위를 야기하는지 묻게 됩니다. 치병의 기적을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우선 예수님의 치병 행위에 대해서 심리적 해석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몸의 건강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상식입니다. 누가 암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우리는 곧 그 사람이 마음고생을 많이 했구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구나 생각할 정도입니다. 또 많은 통계적 연구들은 종교적 신앙이라는 우리의 마음 상태가 환자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상당한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도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믿음은 무엇보다도 환자에게 자포자기하지 않고 희망을 가지게 함으로써 마음 상태를 긍정적으로 바꾸고 안정시키는 심리적 효과가 있습니다. 이것이 신체에 영향을 미쳐서 병을 호전시키거나 낫게 하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힘과 도움으로 병이 낫는 일을 이렇게 단지 우리의 긍정적 사고나 심리적 안정 정도로만 이해하는 것은 기적에 대한 불충분하고 비 신앙적인 태도입니다. 심리적 설명은 또 하나의 자연적 설명이며 결국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을 기적 아닌 것으로 설명해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심리적 힘과는 별도로 하나님 자신의 힘이 직접 사건에 힘을 미칠 수 있음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힘을 또 하나의 물리적 힘으로 간주해서도 안 되겠지만, 기적을 단순히 믿음이라는 심적 상태가 야기하는 심리적 효과 정도로 환원해버리는 것도 곤란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몸의 부활을 단지 제자들의 마음속에 일어난 심적 변화, 다시 말해 예수님을 잊지 못하는 제자들의 마음속에 있는 현존 정도로 이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충분한 설명입니다.

우리는 또 치유의 기적을 하나님께서 우리 몸에 직접 영향을 주어 병을 낫게 하기보다는 마음에 영향을 주어서 병을 낫게 하는 간접적 행위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설명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불가분적이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몸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도 우리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 몸의 일부인 두뇌라는 물질에 먼저 혹은 동시에 영향을 미쳐야만 할지 모릅니다.

물리적 변화든 심적 변화든, 기적이란 어디까지나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오는 신비한 힘에 의해서 일어나는 현상이며, 이것을 우리는 기적이라 부릅니다. 우리가 이러한 기적의 가능성 자체를 아예 부정한다면 모르지만 - 그런 신앙도 있습니다. 가령 이신론자들은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신 다음 세계에서 발생하는 일에 전혀 개입하지 않고 팔짱 끼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부재지주 같은 하나님입니다 - 하나님의 초월적 힘에 의해 야기되는 기적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한, 이에 대한 심리적 해석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 하나님의 초월적 힘을 받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인격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힘을 입으려면 우리는 그의 마음을 먼저 움직여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그가 내신 생명들의 고통에 무감한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 그의 자녀들이 처한 고난을 지켜보시기만 하는 분이 아니라 그들의 탄식을 들으시며 측은히 여기시는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라는 것이 성경 전체가 증언하는 바이고,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아시는 그의 아들 예수께서 증언하신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기도와 묵상 가운데 우리와 조용히 대화하시는 분이시며,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분이라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공통된 증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믿음이라는 인격 대 인격의 관계가 핵심적 요소로 작용하게 됩니다. 믿음은 근본적으로 인격이신 하나님,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뢰입니다. 이 신뢰는 먼저 우리가 자신의 뜻을 고집하며 자신만을 의지하고 살아왔던 이전의 삶을 포기하고, 순수하게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맡길 때에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힘을 얻으려면 자기 자신의 힘을 빼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실은 자기 자신의 뜻과 삶의 방식을 고집하거나 자신만을 믿는 교만한 마음을 청산하지 못했다면, 결코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를 포기하고 비움으로써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순수한 믿음의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의 마음은 움직일 것이며, 하나님은 우리의 탄원에 반응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자기 포기와 자기 비움의 믿음이 없이, 먼저 기적을 바라는 마음이 앞선다면, 아마도 하나님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진정으로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께 자신의 전 존재와 삶을 맡기는 순수한 신앙 없이 그저 살려는 욕심 때문에 하나님께 매달린다면,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의 자신의 삶의 태도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뉘우침 없이 나의 욕심만을 앞세워 기적을 바라거나 하나님께 매달린다면, 아마도 하나님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믿음의 표현인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먼저 자기의 뜻을 접고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지 자기 뜻을 먼저 구하는 이기적 욕망의 기도를 드린다면, 하나님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도 억울한 십자가의 처형을 면케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셧지만, 결국은 자기를 포기하시고 “나의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의 손에 자신을 맡기고 운명하셨습니다. 평생 자기를 철저히 비우고 하나님의 힘으로 사신 주님도 십자가 위에서는 절망하셨지만, 결국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고 운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활의 기적으로 그의 믿음의 삶에 응답하셨습니다. 기도란 나의 뜻을 굽혀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것이지 하나님의 뜻을 굽혀 나의 뜻에 맞추려는 행위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하나님을 협박하고 강요하듯이 기도하면서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 듭니다. 순수한 신앙은 먼저 자기 비움과 자기 포기가 있어야 하며, 기도는 먼저 자기 성찰과 회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반성과 자기 성찰, 자기 비움과 자기 포기 없이 다급한 마음에 기적부터 먼저 구하는 욕심을 앞세운다면, 이는 진정한 신앙의 자닐 것입니다. 누구든 다급할 때 하나님을 찾지 않겠습니까? 평소에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살다가 다급할 때 그를 찾는 얌체 같은 맹목적 행위가 신앙이란 말입니까? 이번 한 번만 저를 살려주신다면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는 식으로 하나님과 거래를 하려 해도, 진정한 신앙적 태도는 아닐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 순수한 믿음은 나의 욕망을 앞세우기 전에, 기적의 징표를 구하기 전에, 또 어떤 이론이나 사변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따지고 확인하려 하기 전에, 부모를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어린 아이 같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행위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마음은 움직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신뢰로서의 신앙의 진리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격적 관계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를 믿어주고 나에게 전적인 신뢰를 보이는 사람을 우리는 쉽게 배신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를 믿는지 의심하는지 모를 사람, 항시 나를 관찰하고 테스트하려 드는 사람은 우리도 달갑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우리의 마음은 움직일 수 없습니다. 의심과 불신으로 인간관계를 시작하는 사람 - 세상이 워낙 험하다 보니까 그러기는 하지만 - 저 사람이 믿을만한 사람인지 의심하고 시작하는 사람에게 우리도 마음을 열지 못합니다. 당신이 믿을만한 사람이라는 증거를 먼저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사람은 그야말로 입맛 없는 사람입니다. 남녀 간의 사랑이 그렇고, 친구 간의 우정이 그렇고, 심지어 사업 파트너 사이의 신뢰도 그럴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에게 이미 모든 것을 베풀어주신 하나님과의 관계야 어떠하겠습니까? 기적을 먼저 보여 달라, 당신의 사랑을 기적을 통해 먼저 보여 달라고 요구하거나, 이번만 나를 살려주시면 이제부터는 당신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하고 하나님과 ‘거래’를 하려는 신앙 아닌 신앙을 가진 사람을 하나님께서 달가워하실지 의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이라도 이런 사람은 별로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친구 간의 우정이나 남녀 간의 사랑도 그렇습니다. 저 친구가 정말 나를 믿고 나를 좋아하는지 항시 재어보면서 주변에서만 맴도는 친구는 가까운 친구, 진정한 친구가 되기 어렵습니다. 또 저 여자가 정말 나에게 관심이 있는지,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지를 테스트하고 확인하려 드는 남자에게는 사랑이 성사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오히려 먼저 저 여자가 나를 사랑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대쉬’하는 사람에게 사랑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우리가 나를 믿는 사람을 실망시키기 싫어하듯이, 부모를 하늘처럼 여기고 철석 같이 믿고 있는 자식을 배신할 수 없듯이, 하나님은 먼저 자기를 비우고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그의 자녀들을 실망시키지 않으실 것입니다.

믿음이란 흔히 생각하듯이 기독교의 교리를 믿는 행위가 아닙니다. 믿기 어려운 기적을 사실이라고 억지로 받아들이는 지적 행위도 아닙니다. 믿음은 한 인격이 다른 인격에게 보이는 근본적 신뢰입니다. 어린아이가 자기 부모를 철석같이 믿듯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의 뜻에 순종하고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아빠 하나님에 대한 어린아이 같은 믿음입니다. 그런 신뢰가 없는 사람을 가리켜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며, 그런 믿음이 있는 사람을 향해 오늘의 말씀에서 “너의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세 번이나 나오고 있다는 사실도 유의할 점입니다.
 순수한 믿음이란 결국 나의 뜻을 앞세우며 나 자신만을 믿고 살았던 지금까지의 자기중심적 삶을 포기하고 자기를 비워 하나님에게 자기 존재와 삶을 의탁하는 행위입니다. 자기만을 믿고 돈, 권력, 명예 같은 세상의 가치만을 추구하며 의지하고 살았던 지금까지의 헛되고 교만한 삶을 포기하는 행위 없이는 순수한 믿음은 불가능합니다.

이런 순수한 자기 비움, 자기 포기의 믿음은 무엇보다도 자기를 놓아버리는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세상적 가치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먼저 증거를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신앙, 기적을 구하고 기적을 경험해야 믿겠다는 기적신앙은 순수한 믿음은 못됩니다. 자기 포기의 믿음과 용기는 역설적으로 불확실성을 전제로 합니다. 가시적 증거가 없는 불확실성은 믿음의 용기, 실존주의자들이 강조하는 ‘믿음의 비약’을 필요로 합니다. 눈에 보이는 증거 내지 징표가 있을 때는, 믿음의 용기와 결단은 필요 없습니다. 그냥 보고 알면 됩니다. 보고도 믿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보이는 것은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보고 알면 됩니다. 사실, 증거를 보고 믿는 믿음은 자발적 믿음이 아니라 강요된 믿음이나 다름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통해서 “봤지? 나 여기 있어”라고 하시는데, 누가 감히 믿지 않겠습니까? 선택의 여지가 없는 강요된 믿음, 믿음의 결단이 필요하지 않는 ‘믿음 아닌 믿음’만이 존재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분입니다. 하나님을 보는 것(visio dei)은 우리가 사후에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할’ 때에만 가능하다고 기독교 신앙은 말합니다. 지상에서의 우리의 믿음은 어디까지나 불확실성 속에서 취하는 결단과 비약을 통해서만 가능하고, 이러한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취하는 자유로운 결단이야말로 순수한 믿음의 행위가 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해서 자기를 포기하는 용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보이는 세상의 삶의 방식을 포기하는 과감한 비약의 결단이 없이는 순수한 믿음은 불가능합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라는 히브리서 말씀은 이것을 의미합니다. 또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소망으로 구원을 얻은’ 사람들임을 강조하면서, 보이지 않는 것에 소망을 두고 사는 믿음의 삶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뿐만 아니라, 첫 열매로서 성령을 받은 우리도 자녀로 삼아 주실 것을, 곧 우리 몸을 속량하여 주실 것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면, 참으면서 기다려야 합니다.”(로 8: 22-25).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는 이러한 희망으로서의 믿음이야 말로 순수한 믿음이며, 이러한 믿음은 어떤 증거나 기적의 징표를 통해 입증되는 강요된 믿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용기와 비약의 결단을 필요로 하는 자발적 믿음입니다. 이러한 자발적이고 순수한 믿음을 가질 때, 우리는 심적 평화와 안정은 물론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의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순수한 믿음, 더 고차적이고 순수한 신앙은 기적에 의존하지 않는 신앙입니다. 기적에 의존하는 신앙이 아니고, 기적에 대한 욕구를 앞세우는 신앙도 아닙니다. 기적은 자기 비움의 순수한 신앙의 자연스러운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지 신앙의 전제가 아니며 목표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마이스터 엑카르트(Meister Eckhart)는 우리가 지닌 덕목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이나 겸손 같은 것이 아니라 자기를 철저히 비우는 초탈(Abgeschiedenheit)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가게 만들지만 자기를 비우는 초탈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나에게 오도록 강요한다고 말합니다. 물이 아래로 흐르듯이 하나님은 빈 곳으로 와서 채우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뜻대로 하소서 하면서 자신을 온전히 비우고 포기하고 하나님의 손에,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알 수 없는 미래에, 자신을 맡기는 모험적 신앙이야 말로 참다운 순수한 신앙입니다. 이런 믿음은 우리에게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닥쳐와도 우리를 좌절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게 만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 사도가 말하는 십자가 신앙입니다: “유대 사람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합니다.”(고전 1: 22-25).

그리스도 즉,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메시아가 무력하게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사실은 기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에게 실망할 수밖에 없었으며 예수는 결코 그들의 메시아가 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바울은 그래서 십자가를 ‘하나님의 약함’이라고 표현하면서, 이 하나님의 약함이 인간의 강함보다도 더 강하다는 역설의 진리를 펴고 있는 것입니다.

기적신앙은 바로 이런 역설의 진리를 모릅니다. 하나님의 약함을 모릅니다. 십자가 신앙을 모릅니다. 우리가 정작 약할 때 참으로 강하다는 바울 사도의 신앙을 모릅니다. 항시 강한 것을 요구합니다. 보이는 징표를 요구하는 지극히 상식적인 신앙, 즉자적이고 즉물적 신앙입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지만,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 이슬람의 신앙과 신학이 가지는 가장 심각한 신학적 문제 가운데 하나는 ‘약함의 하나님’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십자가 신앙, 십자가의 신학이 없습니다. 오직 강함과 승리의 하나님만을 믿습니다. 핍박받는 교회로 시작한 기독교와는 달리, 처음부터 승승장구한 이슬람 역사는 무슬림들로 하여금 십자가의 패배로 시작한 기독교 역사와 신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했으며 그런 신앙을 필요로 하지도 않게 했습니다. 초기 이슬람의 승리의 역사는 무슬림들의 신앙이 옳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슬람은 십자가에 달린 메시아,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의 아들 개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현대 이슬람의 위기의식의 근본은 찬란했던 초기 이슬람의 승리주의적 신앙이 현대 세계에 와서 배반당한 것 같다는 정서에도 옵니다. 중세까지만 해도 찬란했던 이슬람 세력과 문화가 현대에 와서 서구 세력에 의해 짓밟히면서 강했던 이슬람이 무력한 이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함과 핍박이라는 것을 모르던 이슬람이 서구 제국주의에 의해 굴욕을 당하자 신앙 자체의 위기로 이어진 것입니다. 현대 이슬람의 위기는 정치, 군사, 경제, 사회, 문화의 위기 이전에 근본적으로 패배를 모르는, 십자가를 모르는, 하나님의 약함을 모르는 이슬람의 신앙의 위기입니다. 종교적 위기이며 영적 위기입니다. 광신적이고 편협한 근본주의 신앙의 발호, 자살을 무릅쓰는 극단적 저항은 모두 이 현대적 신앙의 위기에서 오는 불안감에서 나온 행위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남의 종교 이야기 할 때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실제로는 막강한 군사력을 더 믿는 미국의 부쉬와 기독교 우파들, 또 ‘우파’를 자처하는 우리 한국 교회의 대다수 신앙인들의 승리주의적 신앙이나 기적신앙도 십자가의 영성, 십자가의 깊은 역설적 진리를 모르는 이슬람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신앙, 약함의 신앙으로 날마다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자기를 철저히 비우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삶의 연습과 훈련을 하며 산다면, 우리는 죽음에 직면해서도 두려움 없이 하나님께 나의 운명을 맡길 수 있을 것입니다. 사는 것이 죽는 것이요 죽는 것이 사는 것이라는 믿음,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를 위한다는 사도 바울의 신앙, “나에게는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고백을 할 수 있을 만큼 자기를 포기하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다면, 우리는 인생의 어떠한 파고와 위기도 편안한 마음으로 맞을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신앙 고백이 우리 모두의 신앙고백이 되었으면 합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삶도 죽음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로8: 38-39). 이런 신앙으로 하루하루를 기쁨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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