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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전3:11-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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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
2002.10.30
가끔 어떤 부부들을 보면 서로 믿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을 봅니다. 아내가 집에 있는가 하루에도 몇차례 씩 전화를 하여 확인하는 사람도 있고 남편이 집에 돌아오면 윗옷을 받아 이리 저리 살피며 긴 머리가 없는가 립스틱 자국 없는가 확인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난 7월 31일 날 상주에서 부부가 서로 망치와 칼을 들고 싸운 사건이 보도되었습니다. 부인이 동네에 놀러갔다 오는데 남편이 "어딜 싸돌아 다니다 이제 오느냐"며 욕설을 퍼붓자 흥분한 아내가 집에 있는 망치로 남편의 머리를 가격해 버렸습니다. 머리를 맞은 남편은 이에 질세라 부엌에 들어가 부엌칼을 가지고 나와 부인을 찔렀습니다. 그래서 결국 119가 출동하였고 부인은 병원으로 실려갔고 남편은 경찰에 긴급 체포되었다는 기사였습니다.
대구에서는 너무나 남편이 의심하며 새벽까지 잠을 재우지 않자 남편을 밖에서 얘기하자고 다리로 유인하여 1.7M의 밑으로 떼밀어 버렸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남편이 떨어진 곳으로 내려가 23차례나 내리쳐 죽인 사건도 있었습니다. 경북 청송에서는 75세 할아버지가 72세 드신 할머니를 의심하여 죽인 사건도 있었습니다. 부부가 결혼하여 살면서 이렇게 산다면 얼마나 불행하겠습니까? 얼마전 코넬대학에서 연구한 것처럼 "가슴뛰는 사랑은 길어야 30개월"이라 하지만 어차피 사는 것 이렇게 살아서 되겠습니까? 요즈음 병원에 이상한 환자가 온다고 합니다. 친자확인을 하는 부부가 주요 병원마다 평균 월 15건이 넘는다는 것입니다. 아들 딸 낳아 놓고 자신의 아들 딸인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30%가 친자가 아닌 것으로 판명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 생활도 이렇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에 나오기는 나옵니다. 한달에 한번, 혹은 일년에 한번 나오는 사람도 있고 매주 나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확실한 믿음이 없어요. "하나님이 계시는지? 예수님이 부활하셨는지? 정말로 인간에게 영혼이 있는지? 죽은 후에 정말 천국에 가는지? 예수 안믿으면 지옥에 가는지? 정말 내 죄가 다 용서 받았는지?" 늘 의심을 합니다. 확신이 없어요. 이렇게 신앙 생활하면 참으로 행복한 신앙생활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치 의처증을 가지고 의부증을 가지고 가정생활을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꼭 초신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은지 오래된 사람도 그래요. 한 때 능력을 체험한 분도 그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도마도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어요.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솔로몬이라는 사람도 그랬습니다. 그는 왕이 될 때 1천 번제를 드릴 정도로 신앙이 있는 사람이었고 그것을 하나님이 인정해 주었습니다. 솔로몬이 지혜를 구했을 때 하나님이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왕상3:13)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그러니 그가 신앙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고 볼 수가 없었요.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고 하나님을 통하여 체험도 받은 사람입니다. 기도 응답도 받았어요. 능력도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의 말년에 기록한 전도서를 보시면 그는 깊은 종교적 회의에 빠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공허함 허전함에 빠져 버리게 된 것입니다. 전도서를 한번 보세요.
1. 자기 중심, 이 세상 중심의 허무주의, 종교적 회의주의 신앙
사람이 왜 신앙 생활하면서 능력있는 생활을 하지 못하고 늘 의심하면서 종교적 허무주의 회의주의에 빠지게 됩니까? 1장 3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해 아래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라고 질문을 던집니다. "이 땅에서(해 아래)라는 말이 무려 33회나 나옵니다. 이 세상에 관심을 지금 집중하고 있어요. 자신이 무엇을 하는 것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1)자기 바깥 세계를 관찰합니다.(1:4-11)-자연 법칙과 질서 즉 세상을 관찰해 보는 것입니다.
해, 바람, 물 등의 운행을 지켜 보면서 그는 한마디로 모든 것이 끊임 없이 움직이고 있으나(8)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이 없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허무하고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11)
2) 자기 바깥 세계에서 눈을 돌려 자기 자신에게 향해 봅니다.(1:12-18). 자기탐구를 해봅니다. 그러나 인간 지혜의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그는 자신이 몸 담고 있는 세계를 이해하려하며 그 속에서 살아야 할 삶의 원칙을 찾으려는 자신을 발견합니다(13). 그러나 이성에 비친 세계와 삶을 이해할 수도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무능력 앞에(15) 삶의 원칙을 찾으려는 그의 노력은 마음의 고통만 더할 뿐 해결을 얻지 못하고 인간 지식의 한계에 부딛치고 맙니다.(17,18절)
3) 삶 속에 뛰어 들어 실제 삶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아 보려 합니다.(2장)-즐겨 보자는 것입니다. 생각하니 머리만 아프다는 것입니다. 어짜피 한 평생 사는 것 실컷 즐기자는 것입니다.
①권세: 그는 왕으로 40년간 다스렸습니다(2:1).
심리학자 에들러-인간은 어떤 권력을 장악할 때 삶의 의미를 느낀다고 했습니다.
②부귀(전2:4-8): 솔로몬의 그릇은 다 금이었고(왕상10:21) 은은 돌같이 흔하여 (왕상10:27) 귀히 여기지 않을 정도였습니다.(왕상10:27)
③지혜(전2:3): 잠3천(왕상4:32) 노래 천 다섯(왕상4:32) 초목(왕상4:33) 동물, 물고기에 통달하였습니다.
④쾌락(전2:8,10): 1천명의 여자(왕상11:3)를 거느려 보았습니다. 눈과 마음에 원하는 일을 다 해보았습니다.
프로이드는 삶은 쾌락의 원칙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으로 자시의 욕망대로 충족시키면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지만 첩도 거느려 보고, 외도도 해보고 부귀 영화를 최우선하여 해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론은 무엇입니까? 그의 눈이 원하는 것을 금하지 않을 최상의 삶도 죽음으로 종말을 고한 다는 사실 앞에 허무해지고 맙니다.(2:16-17)
삶의 한계, 지식의 한계, 자신의 삶을 자신의 힘으로 지배할 수 없는 능력의 한계 앞에 삶은 무의미해저 버립니다. 폴틸리는 인간의 한계상황을 ①죽음과 자기 숙명성 ②허무와 무의미성 ③죄책감에 대한 불안이라고 했습니다.
신앙 생활을 하여도 나 중심, 이 세상 중심의 신앙 생활을 하면 결국 허무주의 종교적 회의주의에 빠지고 맙니다. 이런 신앙 생활은 결국 하나님을 이용하여 나의 부, 명예를, 나의 안락을 나의 평강을, 나의 출세를, 나의 건강을 보장받으려는 신앙 생활입니다. 이세상에서의 삶의 풍요를 위해서는 뭐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오직 이 세상만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집착하는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 생활은 능력있는 신앙 생활을 할 수 없어요. 문제만 일으켜요. 가라지로 기독교를 병들게 합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이런 사람들을 가까 교인이라고 합니다. 그는 3종류의 가짜 교인을 말합니다. 말씀을 듣지 않는 교인. 말씀을 그대로 받아 들이 지 않는 교인, 말씀을 듣고 인격과 생활이 변하지 않는 교인을 말합니다(고전2:14-3:3) 말씀과는 관계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말씀도 단지 이용의 수단이고 하나님도 단지 자신의 오늘의 삶을 위한 이용의 수단일 뿐입니다.
2. 하나님 중심이나 이세상 중심의 실존적 회의 주의 신앙
나 중심, 세상 중심의 사람들은 자연 종교자들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가라지입니다. 교회도 다니고 기도도하는 것 같으나 모든 것이 나 중심이고 이세상 중심입니다. 진정한 신앙인이 아닙니다. 신앙이 조금 성장하면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시각이 바뀌게 됩니다. 이것을 계시 종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영안을 열어 주시고 신령한 세계를 바라보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 세상에 집착합니다. 이렇게 되면 실존적 회의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전도서 기자를 보십시오.
1)눈을 돌려 세계밖의 하나님께 돌림(10)-신, 하나님, 초월자를 발견합니다.
그래 인생이란 인간들만의 세상이 아니야 이것으로 끝나면 얼마나 허무한가?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우연히 되지는 않았을 것야 모든 것이 만든 사람이 있는데 누군가 만든 분이 있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2:24, 3:10, 3:11 만사에는 하나님게서 부여하시는 의미가 있으며 그 의미는 오직 하나님의 뜻과 계획 속에서만 발견된다는 것입니다. 즉 전도자는 우리 삶을 움직이시는 세계 밖의 존재가 맹목적인 숙명이나 법칙이 아니라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며 세상사에 초연한 무관심한 하나님이 아니라 세계 내의 역사와 나의 삶에 개입하셔서 만사를 다스리고 주관하시며 또한 만사를 아름답게 의미있게 다스리시는 분이심을 깨닫습니다.(11)
2)그러나 실존적 회의에 사로잡힙니다.
여전히 이 세상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고 싶은데 안믿어지는 것입니다.
(1)(11절하) 인간은 꼭두각시가 아닌가? 사람의 정신이 자신과 세계 내의 것 만으로 만족할 수 없고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것에로 향하는 본능은 부여 받았으나 일의 시종을 깨달아 발견 할 수 있는 능력은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4)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데 (9) 자신이 행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냐는 것입니다.
(2)(3:16) 하나님이 다스린다고 하는 이 세상이 왜 그렇게 불공평하며 불의와 부조리가 만연한가?라는 것입니다.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 대접받지 못하고 악하고 불의한 사람이 잘먹고 잘사는 세상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왜 믿는 사람이 사고를 당하고 병에 걸려 죽고 고통을 당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박국의 고뇌처럼 왜 정치 종교 사회 지도자들의 타락을 그냥 보고 계시냐?는 것입니다. 왜 멸망 시킬려면 그들이나 멸망시키지 죄없는 백성들까지 이방 백성에 의하여 멸망시키느냐?는 것입니다. 요나의 고뇌처럼 왜 원수의 나라 니느웨를 멸망시키지 않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을 회개 시키느냐?냐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처럼 왜 믿는 사람이 고통당하고 불신자에게 조롱당하느냐는 것입니다(예레미야 애가 3장)
(3)이 세상(3:18)에서 어떤 삶을 살아던 관계없이 악인이나 의인은 똑깥은 종말을 맺는다는 것입니다. 죽고 나면 모두가 끝이다는 것입니다. 현실과 내세는 연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생활, 가정생활, 직장 생활 신앙으로 살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 생활을 하면 결국 능력있는 신앙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처럼 의심하여 물에 빠지는 생활을 합니다. 신앙 생활에 재미가 없습니다. 봉사 생활을 하여도 억지가 됩니다. 그저 체면 때문에 아내 때문에, 습관 때문에 교회에 나오게 될 수도 있습니다. 활력이 없습니다.
3. 능력있는 신앙인-전도자의 깨달음, 인생의 본분(전12:13-14)
우리는 능력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어차피 신앙 생활합니다. 성령 충만, 능력 충만한 생활을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태복음 8장에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배에 타셨는데도, 폭풍을 만났을 때에 제자들이 무서워 떨며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하고 부르짖을 때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하고 책망하셨는데 우리가 이런 책망을 늘 들으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막 9:23)"는 말씀처럼 능력을 나타내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마 15:28)"라는 말씀을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떤게 우리가 능력있는 신앙 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전도서를 보시기 바랍니다. 결론이 무엇입니까?
1) 말씀을 행함으로 능력있는 신앙생활을 하여야 합니다.-나 중심에서, 말씀 중심, 하나님 중심으로 변화
그는 실존적 회의론에 빠질 때 꼭두각시라고 했습니다. 과연 인간은 꼭두 각시일까요?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전혀 알리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명령(계명)을 삶의 원칙으로 주셔서 꼭두각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지키게 하셨습니다. 인간의 존재 의미는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그 삶 속에 실천하는데 있습니다. 나 혼자 인생을 즐기고 탐구하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고 그분의 명령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없는 인생철학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무의미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적인 판단으로는 보잘 것 없고 미련하게 보이나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는데 인생의 참된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을 구속한다고 생각합니다. 참 자유를 주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참 행복을 주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습니까?
(신10:13)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신33:29)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오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왜 성경을 기록하였습니까?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 20:31)"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면 손해됩니까? 더 고달퍼집니까?
파스칼은 팡세에서 하나님 계시다고 사는 것과 안 계시다고 사는 것 중 무엇이 유익하냐고 질문합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살았습니다. 우리가 죽었어요. 천국과 지옥이 없어요. 그러면 손해입니까? 이 땅에서 더 행복하게 정절하게 살지 않았습니까? 죽었는데 있어요. 그러면 믿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분의 결론은 믿고 사는 것이 훨씬 행복하고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손해보아야 본전이다는 것입니다. 예수믿고 손해본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말씀 대로 살아 손해 본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헌금해서 손해 보았습니까? 그건 손해가 아닙니다. 그보다 확실한 투자가 어디 있습니까? 좀도 동록되 해치지 못합니다. 30, 60, 100배의 결실을 맺습니다. 주일 날 교회에 출석하여 손해 봅니까? 그래서 주일이면 늘 갈등합니까? 산으로 갈까 바다로 갈까 차라리 교회로 갈까? 그렇습니까?
신문에서 보지 않았습니까? 영국의 일간지 더 타임스가 주일 예배에 매주 나가는 사람이 그렇지 않는 사람보다 7년이나 더 장수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해럴드 쾨니히박사는 "종교행사에 자주 참석하는 사람은 사망률도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46%나 낮았다"고 밝혔지 않습니까? 한달에 한 번 참석하는 사람보다 매주 참석하는 사람들이 더 건강하다는 것 이 아닙니까? 다트머스 의과대학 옥스만 박사와 연구팀이 발표한 자료에따르면 95년 심장병수술을 받은 2백32명을 조사한 결과 수술후 6개월 이내 사망한 사람 중 교회에 전혀 다니지 않은 사람의 사망률이 12%,가끔씩 출석한 사람의 사망률이 5%로 나타났고 반면 신앙심 깊고 적극적으로 교회를 다닌 사람은 모두 건강을 되찾은 것으로 조사됐다지 않습니까? 미국의 콤스톡과 패트리지 의학박사도 `교회출석과 건강'이란 논문을 통해 종교적인 믿음이 피를 맑게 해주고 정신건강에도 큰 도움을 준다고 주장했지 않았습니까?
우리 나라에서도 KBS 제1라디오가 공사 창립 26주년을 맞아 `1999년 한국인의 행복지수'조사를 하였는데 애주가보다는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이 행복감을 더 크게 느끼고 신앙을 가진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행복감을 느끼는 비율이 훨씬 더 높았다는 것 아닙니까?
말씀대로 살아 손해보는 것있습니까?
과학자들이 말하니까 믿습니까? 신명기 28장 1절 이하를 보십시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네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신 28:1-6)"
신앙인으로 왜 우리가 회의주의에 사로잡혀 무능력하게 살아야 합니까? 말씀대로 살아 보십시오. 능력있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다는 것을 확신하며 신앙 생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론적인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아닐까요? 불의한 자나 공의로운 자나 동일하게 대할까요? 최종적으로 공정한 평가를 받는 것은 이 세상에서가 아니라 언젠가 선악간에 모든 은밀한 것을 심판하실 그날이 임합니다. 부자와 나사로를 보십시오. 이 땅의 삶이 이 땅으로 끝이 났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믿으며 고난 받는 것을 억울해 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 일이지 만 하나님 때문에 우리는 힘들고 고달푼 인생을 살아 갈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언젠가는 선악간에 심판하시는 날이 있다는 것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은밀한 것까지 심판합니다.
(히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그러므로 선을 행하다 낙심할 필요없습니다. 우리가 손해 보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갈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살후3:13)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
세상을 두려워 할 필요도 없습니다. 용기있게 살아야 합니다. 없다고 못가졌다고 움추릴 필요 없습니다.
(마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니느웨는 니느웨일 따름입니다. 바벨론은 바벨론이 따름입니다. 한 때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쓸 따름입니다. 집을 지을 때 집 주위로 부목을 대어 벽돌을 쌓지만 집이 완성되면 다 허는 것입니다. 어렵게 신앙생활, 가정 생활, 사회생활, 성가대, 교사, 구역장, 직분을 가지고 봉사하는 것이 헛될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선악간에 은밀한 중에 심판하십니다.
어제 보니까 집사님 가정 온 식구가 나와 교회에서 청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떻습니까? 온 가족이 나와 금요 기도회를 하는 것을 봅니다. 그 시간 손해일까요? 영원한 나라에서는 하나님께서 알아주실 것이고 이 땅에서도 얼마나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것입니까?
3) 이 세상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중심으로 살 때 능력있는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3:18)에서 어떤 삶을 살아던 관계없이 악인이나 의인은 똑깥은 종말을 맺을까요. 내세와 현세는 단절되지 않았고 이 세상 삶의 진정한 평가는 내세이므로 의미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것 참으로 가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 보기에는 노아가 방주를 짖는 것처럼 어리석게 보여도 마지막 날에는 그들은 후회할 것입니다. 방주에 집어 놓은 것은 물에 휩쓸려 가지 않습니다. 나중에 놀라는 결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이라는 것은 바로 방주에 집어 넣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나의 재능, 나의 시간, 나의 기도, 나의 물질, 나의 건강 방주에 집어 넣으면 그것 죽음과 동시에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 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반드시 믿어야 할지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마10: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25: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주님을 부르면서 따르지 않고, 주님을 빛이라 부르면서 우러르지 않고, 주님을 길이라 부르면서 걷지 않고, 주님을 주인이라 하면서 의지하지 않고 주님을 지혜라 부르면서 배우지 않고 주님을 사랑하다하면서 사랑하지 않고 주님을 부자라 부르면서 구하지 않고 주님을 영원이라 부르면서 찾지 않고 주님을 존귀하다 하면서 섬기지 않고 주님을 왕이라 부르면서 존경하지 않고 주님을 심판주라 부르면서 두려워하지 않는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오늘도 도마와 같이 믿음 생활하면서도 능력있는 신앙 생활을 하지 못하는 우리를 행하여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요 20:27)"고 말씀하고 계실 것입니다.
믿음의 능력을 가진 신앙인이 됩시다. 기도의 능력, 삶의 능력, 영적인 능력을 나타내야 합니다. 이미 우리에게 그 능력들을 주었습니다. *
가끔 어떤 부부들을 보면 서로 믿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을 봅니다. 아내가 집에 있는가 하루에도 몇차례 씩 전화를 하여 확인하는 사람도 있고 남편이 집에 돌아오면 윗옷을 받아 이리 저리 살피며 긴 머리가 없는가 립스틱 자국 없는가 확인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난 7월 31일 날 상주에서 부부가 서로 망치와 칼을 들고 싸운 사건이 보도되었습니다. 부인이 동네에 놀러갔다 오는데 남편이 "어딜 싸돌아 다니다 이제 오느냐"며 욕설을 퍼붓자 흥분한 아내가 집에 있는 망치로 남편의 머리를 가격해 버렸습니다. 머리를 맞은 남편은 이에 질세라 부엌에 들어가 부엌칼을 가지고 나와 부인을 찔렀습니다. 그래서 결국 119가 출동하였고 부인은 병원으로 실려갔고 남편은 경찰에 긴급 체포되었다는 기사였습니다.
대구에서는 너무나 남편이 의심하며 새벽까지 잠을 재우지 않자 남편을 밖에서 얘기하자고 다리로 유인하여 1.7M의 밑으로 떼밀어 버렸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남편이 떨어진 곳으로 내려가 23차례나 내리쳐 죽인 사건도 있었습니다. 경북 청송에서는 75세 할아버지가 72세 드신 할머니를 의심하여 죽인 사건도 있었습니다. 부부가 결혼하여 살면서 이렇게 산다면 얼마나 불행하겠습니까? 얼마전 코넬대학에서 연구한 것처럼 "가슴뛰는 사랑은 길어야 30개월"이라 하지만 어차피 사는 것 이렇게 살아서 되겠습니까? 요즈음 병원에 이상한 환자가 온다고 합니다. 친자확인을 하는 부부가 주요 병원마다 평균 월 15건이 넘는다는 것입니다. 아들 딸 낳아 놓고 자신의 아들 딸인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30%가 친자가 아닌 것으로 판명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 생활도 이렇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에 나오기는 나옵니다. 한달에 한번, 혹은 일년에 한번 나오는 사람도 있고 매주 나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확실한 믿음이 없어요. "하나님이 계시는지? 예수님이 부활하셨는지? 정말로 인간에게 영혼이 있는지? 죽은 후에 정말 천국에 가는지? 예수 안믿으면 지옥에 가는지? 정말 내 죄가 다 용서 받았는지?" 늘 의심을 합니다. 확신이 없어요. 이렇게 신앙 생활하면 참으로 행복한 신앙생활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치 의처증을 가지고 의부증을 가지고 가정생활을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꼭 초신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은지 오래된 사람도 그래요. 한 때 능력을 체험한 분도 그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도마도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어요.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솔로몬이라는 사람도 그랬습니다. 그는 왕이 될 때 1천 번제를 드릴 정도로 신앙이 있는 사람이었고 그것을 하나님이 인정해 주었습니다. 솔로몬이 지혜를 구했을 때 하나님이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왕상3:13)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그러니 그가 신앙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고 볼 수가 없었요.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고 하나님을 통하여 체험도 받은 사람입니다. 기도 응답도 받았어요. 능력도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의 말년에 기록한 전도서를 보시면 그는 깊은 종교적 회의에 빠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공허함 허전함에 빠져 버리게 된 것입니다. 전도서를 한번 보세요.
1. 자기 중심, 이 세상 중심의 허무주의, 종교적 회의주의 신앙
사람이 왜 신앙 생활하면서 능력있는 생활을 하지 못하고 늘 의심하면서 종교적 허무주의 회의주의에 빠지게 됩니까? 1장 3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해 아래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라고 질문을 던집니다. "이 땅에서(해 아래)라는 말이 무려 33회나 나옵니다. 이 세상에 관심을 지금 집중하고 있어요. 자신이 무엇을 하는 것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1)자기 바깥 세계를 관찰합니다.(1:4-11)-자연 법칙과 질서 즉 세상을 관찰해 보는 것입니다.
해, 바람, 물 등의 운행을 지켜 보면서 그는 한마디로 모든 것이 끊임 없이 움직이고 있으나(8)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이 없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허무하고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11)
2) 자기 바깥 세계에서 눈을 돌려 자기 자신에게 향해 봅니다.(1:12-18). 자기탐구를 해봅니다. 그러나 인간 지혜의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그는 자신이 몸 담고 있는 세계를 이해하려하며 그 속에서 살아야 할 삶의 원칙을 찾으려는 자신을 발견합니다(13). 그러나 이성에 비친 세계와 삶을 이해할 수도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무능력 앞에(15) 삶의 원칙을 찾으려는 그의 노력은 마음의 고통만 더할 뿐 해결을 얻지 못하고 인간 지식의 한계에 부딛치고 맙니다.(17,18절)
3) 삶 속에 뛰어 들어 실제 삶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아 보려 합니다.(2장)-즐겨 보자는 것입니다. 생각하니 머리만 아프다는 것입니다. 어짜피 한 평생 사는 것 실컷 즐기자는 것입니다.
①권세: 그는 왕으로 40년간 다스렸습니다(2:1).
심리학자 에들러-인간은 어떤 권력을 장악할 때 삶의 의미를 느낀다고 했습니다.
②부귀(전2:4-8): 솔로몬의 그릇은 다 금이었고(왕상10:21) 은은 돌같이 흔하여 (왕상10:27) 귀히 여기지 않을 정도였습니다.(왕상10:27)
③지혜(전2:3): 잠3천(왕상4:32) 노래 천 다섯(왕상4:32) 초목(왕상4:33) 동물, 물고기에 통달하였습니다.
④쾌락(전2:8,10): 1천명의 여자(왕상11:3)를 거느려 보았습니다. 눈과 마음에 원하는 일을 다 해보았습니다.
프로이드는 삶은 쾌락의 원칙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으로 자시의 욕망대로 충족시키면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지만 첩도 거느려 보고, 외도도 해보고 부귀 영화를 최우선하여 해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론은 무엇입니까? 그의 눈이 원하는 것을 금하지 않을 최상의 삶도 죽음으로 종말을 고한 다는 사실 앞에 허무해지고 맙니다.(2:16-17)
삶의 한계, 지식의 한계, 자신의 삶을 자신의 힘으로 지배할 수 없는 능력의 한계 앞에 삶은 무의미해저 버립니다. 폴틸리는 인간의 한계상황을 ①죽음과 자기 숙명성 ②허무와 무의미성 ③죄책감에 대한 불안이라고 했습니다.
신앙 생활을 하여도 나 중심, 이 세상 중심의 신앙 생활을 하면 결국 허무주의 종교적 회의주의에 빠지고 맙니다. 이런 신앙 생활은 결국 하나님을 이용하여 나의 부, 명예를, 나의 안락을 나의 평강을, 나의 출세를, 나의 건강을 보장받으려는 신앙 생활입니다. 이세상에서의 삶의 풍요를 위해서는 뭐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오직 이 세상만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집착하는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 생활은 능력있는 신앙 생활을 할 수 없어요. 문제만 일으켜요. 가라지로 기독교를 병들게 합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이런 사람들을 가까 교인이라고 합니다. 그는 3종류의 가짜 교인을 말합니다. 말씀을 듣지 않는 교인. 말씀을 그대로 받아 들이 지 않는 교인, 말씀을 듣고 인격과 생활이 변하지 않는 교인을 말합니다(고전2:14-3:3) 말씀과는 관계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말씀도 단지 이용의 수단이고 하나님도 단지 자신의 오늘의 삶을 위한 이용의 수단일 뿐입니다.
2. 하나님 중심이나 이세상 중심의 실존적 회의 주의 신앙
나 중심, 세상 중심의 사람들은 자연 종교자들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가라지입니다. 교회도 다니고 기도도하는 것 같으나 모든 것이 나 중심이고 이세상 중심입니다. 진정한 신앙인이 아닙니다. 신앙이 조금 성장하면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시각이 바뀌게 됩니다. 이것을 계시 종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영안을 열어 주시고 신령한 세계를 바라보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 세상에 집착합니다. 이렇게 되면 실존적 회의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전도서 기자를 보십시오.
1)눈을 돌려 세계밖의 하나님께 돌림(10)-신, 하나님, 초월자를 발견합니다.
그래 인생이란 인간들만의 세상이 아니야 이것으로 끝나면 얼마나 허무한가?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우연히 되지는 않았을 것야 모든 것이 만든 사람이 있는데 누군가 만든 분이 있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2:24, 3:10, 3:11 만사에는 하나님게서 부여하시는 의미가 있으며 그 의미는 오직 하나님의 뜻과 계획 속에서만 발견된다는 것입니다. 즉 전도자는 우리 삶을 움직이시는 세계 밖의 존재가 맹목적인 숙명이나 법칙이 아니라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며 세상사에 초연한 무관심한 하나님이 아니라 세계 내의 역사와 나의 삶에 개입하셔서 만사를 다스리고 주관하시며 또한 만사를 아름답게 의미있게 다스리시는 분이심을 깨닫습니다.(11)
2)그러나 실존적 회의에 사로잡힙니다.
여전히 이 세상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고 싶은데 안믿어지는 것입니다.
(1)(11절하) 인간은 꼭두각시가 아닌가? 사람의 정신이 자신과 세계 내의 것 만으로 만족할 수 없고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것에로 향하는 본능은 부여 받았으나 일의 시종을 깨달아 발견 할 수 있는 능력은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4)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데 (9) 자신이 행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냐는 것입니다.
(2)(3:16) 하나님이 다스린다고 하는 이 세상이 왜 그렇게 불공평하며 불의와 부조리가 만연한가?라는 것입니다.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 대접받지 못하고 악하고 불의한 사람이 잘먹고 잘사는 세상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왜 믿는 사람이 사고를 당하고 병에 걸려 죽고 고통을 당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박국의 고뇌처럼 왜 정치 종교 사회 지도자들의 타락을 그냥 보고 계시냐?는 것입니다. 왜 멸망 시킬려면 그들이나 멸망시키지 죄없는 백성들까지 이방 백성에 의하여 멸망시키느냐?는 것입니다. 요나의 고뇌처럼 왜 원수의 나라 니느웨를 멸망시키지 않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을 회개 시키느냐?냐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처럼 왜 믿는 사람이 고통당하고 불신자에게 조롱당하느냐는 것입니다(예레미야 애가 3장)
(3)이 세상(3:18)에서 어떤 삶을 살아던 관계없이 악인이나 의인은 똑깥은 종말을 맺는다는 것입니다. 죽고 나면 모두가 끝이다는 것입니다. 현실과 내세는 연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생활, 가정생활, 직장 생활 신앙으로 살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 생활을 하면 결국 능력있는 신앙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처럼 의심하여 물에 빠지는 생활을 합니다. 신앙 생활에 재미가 없습니다. 봉사 생활을 하여도 억지가 됩니다. 그저 체면 때문에 아내 때문에, 습관 때문에 교회에 나오게 될 수도 있습니다. 활력이 없습니다.
3. 능력있는 신앙인-전도자의 깨달음, 인생의 본분(전12:13-14)
우리는 능력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어차피 신앙 생활합니다. 성령 충만, 능력 충만한 생활을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태복음 8장에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배에 타셨는데도, 폭풍을 만났을 때에 제자들이 무서워 떨며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하고 부르짖을 때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하고 책망하셨는데 우리가 이런 책망을 늘 들으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막 9:23)"는 말씀처럼 능력을 나타내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마 15:28)"라는 말씀을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떤게 우리가 능력있는 신앙 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전도서를 보시기 바랍니다. 결론이 무엇입니까?
1) 말씀을 행함으로 능력있는 신앙생활을 하여야 합니다.-나 중심에서, 말씀 중심, 하나님 중심으로 변화
그는 실존적 회의론에 빠질 때 꼭두각시라고 했습니다. 과연 인간은 꼭두 각시일까요?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전혀 알리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명령(계명)을 삶의 원칙으로 주셔서 꼭두각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지키게 하셨습니다. 인간의 존재 의미는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그 삶 속에 실천하는데 있습니다. 나 혼자 인생을 즐기고 탐구하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고 그분의 명령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없는 인생철학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무의미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적인 판단으로는 보잘 것 없고 미련하게 보이나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는데 인생의 참된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을 구속한다고 생각합니다. 참 자유를 주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참 행복을 주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습니까?
(신10:13)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신33:29)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오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왜 성경을 기록하였습니까?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 20:31)"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면 손해됩니까? 더 고달퍼집니까?
파스칼은 팡세에서 하나님 계시다고 사는 것과 안 계시다고 사는 것 중 무엇이 유익하냐고 질문합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살았습니다. 우리가 죽었어요. 천국과 지옥이 없어요. 그러면 손해입니까? 이 땅에서 더 행복하게 정절하게 살지 않았습니까? 죽었는데 있어요. 그러면 믿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분의 결론은 믿고 사는 것이 훨씬 행복하고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손해보아야 본전이다는 것입니다. 예수믿고 손해본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말씀 대로 살아 손해 본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헌금해서 손해 보았습니까? 그건 손해가 아닙니다. 그보다 확실한 투자가 어디 있습니까? 좀도 동록되 해치지 못합니다. 30, 60, 100배의 결실을 맺습니다. 주일 날 교회에 출석하여 손해 봅니까? 그래서 주일이면 늘 갈등합니까? 산으로 갈까 바다로 갈까 차라리 교회로 갈까? 그렇습니까?
신문에서 보지 않았습니까? 영국의 일간지 더 타임스가 주일 예배에 매주 나가는 사람이 그렇지 않는 사람보다 7년이나 더 장수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해럴드 쾨니히박사는 "종교행사에 자주 참석하는 사람은 사망률도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46%나 낮았다"고 밝혔지 않습니까? 한달에 한 번 참석하는 사람보다 매주 참석하는 사람들이 더 건강하다는 것 이 아닙니까? 다트머스 의과대학 옥스만 박사와 연구팀이 발표한 자료에따르면 95년 심장병수술을 받은 2백32명을 조사한 결과 수술후 6개월 이내 사망한 사람 중 교회에 전혀 다니지 않은 사람의 사망률이 12%,가끔씩 출석한 사람의 사망률이 5%로 나타났고 반면 신앙심 깊고 적극적으로 교회를 다닌 사람은 모두 건강을 되찾은 것으로 조사됐다지 않습니까? 미국의 콤스톡과 패트리지 의학박사도 `교회출석과 건강'이란 논문을 통해 종교적인 믿음이 피를 맑게 해주고 정신건강에도 큰 도움을 준다고 주장했지 않았습니까?
우리 나라에서도 KBS 제1라디오가 공사 창립 26주년을 맞아 `1999년 한국인의 행복지수'조사를 하였는데 애주가보다는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이 행복감을 더 크게 느끼고 신앙을 가진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행복감을 느끼는 비율이 훨씬 더 높았다는 것 아닙니까?
말씀대로 살아 손해보는 것있습니까?
과학자들이 말하니까 믿습니까? 신명기 28장 1절 이하를 보십시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네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신 28:1-6)"
신앙인으로 왜 우리가 회의주의에 사로잡혀 무능력하게 살아야 합니까? 말씀대로 살아 보십시오. 능력있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다는 것을 확신하며 신앙 생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론적인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아닐까요? 불의한 자나 공의로운 자나 동일하게 대할까요? 최종적으로 공정한 평가를 받는 것은 이 세상에서가 아니라 언젠가 선악간에 모든 은밀한 것을 심판하실 그날이 임합니다. 부자와 나사로를 보십시오. 이 땅의 삶이 이 땅으로 끝이 났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믿으며 고난 받는 것을 억울해 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 일이지 만 하나님 때문에 우리는 힘들고 고달푼 인생을 살아 갈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언젠가는 선악간에 심판하시는 날이 있다는 것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은밀한 것까지 심판합니다.
(히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그러므로 선을 행하다 낙심할 필요없습니다. 우리가 손해 보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갈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살후3:13)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
세상을 두려워 할 필요도 없습니다. 용기있게 살아야 합니다. 없다고 못가졌다고 움추릴 필요 없습니다.
(마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니느웨는 니느웨일 따름입니다. 바벨론은 바벨론이 따름입니다. 한 때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쓸 따름입니다. 집을 지을 때 집 주위로 부목을 대어 벽돌을 쌓지만 집이 완성되면 다 허는 것입니다. 어렵게 신앙생활, 가정 생활, 사회생활, 성가대, 교사, 구역장, 직분을 가지고 봉사하는 것이 헛될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선악간에 은밀한 중에 심판하십니다.
어제 보니까 집사님 가정 온 식구가 나와 교회에서 청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떻습니까? 온 가족이 나와 금요 기도회를 하는 것을 봅니다. 그 시간 손해일까요? 영원한 나라에서는 하나님께서 알아주실 것이고 이 땅에서도 얼마나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것입니까?
3) 이 세상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중심으로 살 때 능력있는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3:18)에서 어떤 삶을 살아던 관계없이 악인이나 의인은 똑깥은 종말을 맺을까요. 내세와 현세는 단절되지 않았고 이 세상 삶의 진정한 평가는 내세이므로 의미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것 참으로 가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 보기에는 노아가 방주를 짖는 것처럼 어리석게 보여도 마지막 날에는 그들은 후회할 것입니다. 방주에 집어 놓은 것은 물에 휩쓸려 가지 않습니다. 나중에 놀라는 결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이라는 것은 바로 방주에 집어 넣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나의 재능, 나의 시간, 나의 기도, 나의 물질, 나의 건강 방주에 집어 넣으면 그것 죽음과 동시에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 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반드시 믿어야 할지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마10: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25: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주님을 부르면서 따르지 않고, 주님을 빛이라 부르면서 우러르지 않고, 주님을 길이라 부르면서 걷지 않고, 주님을 주인이라 하면서 의지하지 않고 주님을 지혜라 부르면서 배우지 않고 주님을 사랑하다하면서 사랑하지 않고 주님을 부자라 부르면서 구하지 않고 주님을 영원이라 부르면서 찾지 않고 주님을 존귀하다 하면서 섬기지 않고 주님을 왕이라 부르면서 존경하지 않고 주님을 심판주라 부르면서 두려워하지 않는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오늘도 도마와 같이 믿음 생활하면서도 능력있는 신앙 생활을 하지 못하는 우리를 행하여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요 20:27)"고 말씀하고 계실 것입니다.
믿음의 능력을 가진 신앙인이 됩시다. 기도의 능력, 삶의 능력, 영적인 능력을 나타내야 합니다. 이미 우리에게 그 능력들을 주었습니다. *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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