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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롬1:8-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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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
2002.10.30
지난 주일 독일에서 10여년 공부하고 온 분을 만났습니다. 유학을 가기 전 교회에 열심히 다니며 신앙 생활을 하던 분인데 독일에 가서 교회를 나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를 말하였습니다. 저는 그 자매에게 교회에 나가서 내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어떻게 나태낼 것인가에 관심을 가지라고 충고해 드렸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와 우선 하나님께 예배드리지만 사람과도 만나는데 사람들을 만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고 실망하기 위해서입니까? 나의 가진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까? 아이들이 학교에 가서 선생님을 만나는 이유는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사업하는 분이 거레처 직원과 만나는 것은 장사를 위해서입니다. 선거철 정치인이 유권자와 만나는 이유는 선거에서 지지를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교회에서 성도를 만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한 열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 선생님은 그들을 만나기 위해 쉬지 않고 기도했다고 했습니다(9).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기를 너무도 간절이 원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이번 주면 목사님, 장로님, 권사님, 구역장님, 집사님 만나겠지 하며 기도하며 만나기를 열망하는 줄 믿습니다만 바울은 로마에 거하는 성도를 만나기 위한 열망이 남달랐습니다. 왜 그들을 만나려고 했습니까? 우리가 성도들을 만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 우리는 서로에게 주어진 은사를 통하여 신앙을 견고하게 해기 위해서입니다.-성도
바울은 그들을 만나 옷감을 팔려고 만난 것이 아닙니다. 가끔 보면 주일날 교인들 만나기를 학수 고대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다른 것에 있습니다. 무엇인가 거래를 하기 위해 만나기를 원합니다. 옷 장사하시는 분은 옷을 팔기 위해서, 책 세일하시는 분은 책 팔기 위해서 고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표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분들은 되도록 작은 교회보다는 큰 교회를 선택합니다. 어떤 분은 지난 주 당한 것을 보복하기 위해 만나기를 학수 고대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바울은 왜 로마에 있는 사람들을 그렇게도 만나기 고대하였습니까? 11절을 보십시오.
'너희를 견고케 하려'라고 말씀합니다. 견고케 한다는 말은 흔들리지 않게 한다는 말입니다. 신앙을 든든히 세워준다는 말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서로 만날 때는 무엇보다도 서로 신앙을 흔들리지 않도록 든든히 세워주는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 살면서 얼마나 신앙을 든든히 세우기가 어렵습니까? 신앙 지키기도 힘든 세상이 아닙니까? 세상 사람들 만나 얼마나 신앙이 무너집니까? 그들은 우리의 신앙을 세워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틈만 있으면 우리의 신앙을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텔레비전을 보면 텔레비전이 우리의 신앙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영화도, 직장 생활하면서도 많은 것들이 우리의 신앙을 으깨고 있습니다. 날마나 듣고 보고 늦끼는 것이 얼마나 세속적인 것이면 얼마나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입니까? 사탄이 우는 사자처럼 다니면 믿음의 사람을 삼키려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누구를 통하여 신앙을 세움받을 수 있겠습니까? 믿음의 형제 자매 아닙니까? 이렇게 주일 날 함께 나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영적인 가족이 아니겠습니까? 교회에서고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신앙인은 서로 서로 신앙을 든든히 세워주어야 합니다.
특히 신앙이 더 성숙한 사람이 세워 주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12절에는 피차라는 말이 나오지만 견고하게 되는 것은 너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신앙 생활 오래 했다고 생각된 분들은 끈임없이 어린 신앙인의 신앙을 어떤 홍수에도 무너지지 않도록 든든한 반석위에 세워주어야 합니다.
1)무엇으로 신앙을 든든히 세워줍니까?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무슨 신령한 은사입니다. 여기서 무슨이라는 말은 로마인들이 아직 모르는 어떤 이라는 말입니다. 아직 로마인들은 잘 모르지만 이미 바울은 체험한 은사 그 은사로 견고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지혜의 은사, 지식의 은사, 믿음의 은사, 신유(神癒) 병고침의 은사, 능력 행함의 은사, 영분별, 가르침, 방언, 젊은 이들이 겁나는 독신의 은사(고전 12:1-11), 예언(롬12:6), 섬기는 일(롬12:7), 권위(롬12:8), 구제(롬12:8), 다스리는 일(롬12:8), 긍휼(롬12:8),전도(고후1:11), 사랑(고전12:31-31:1) 등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로 신앙을 견고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엡4:12을 보십시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엡 4:11-12)"
교회나 세상이나 이 시대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 일을 하지 않습니다. 은사를 가지고 자기 이익으로 삼던지, 다른 사람을 깎아 내리는 데 사용하면 안됩니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데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사울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로 왕이 되었습니다. 그것으로 무엇을 합니까? 다윗이 자신보다 인기가 있자 그를 죽이려고 합니다. 막강한 힘을 가진 삼손은 그 힘으로 방탕해 버립니다.
우리는 살다보면 성도끼리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부부끼리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그것을 신앙을 잃어버리는 계기로 만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떤 장로님은 부부와 문제만 있으면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문제를 당하면 그것으로 인하여 더 신앙이 성장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신앙에 손해를 봅니다. 이렇게 하여서는 안됩니다. 신앙인의 만남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은 더욱 성장해야 합니다. 아내와 만나 아내의 신앙을 더 굳게 해주어야 합니다. 남편을 만나, 자식을 두고 자식의 신앙을 더 견고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2) 어떻게 견고하게 해줍니까?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바울이 주도적으로 자기 것을 나누어 준다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도 함께 공유하여 참여한다는 말입니다. 함께 참여하는 것입니다. 함께 삶을 나누는 것입니다. 내가 있어서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모는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것으로 서로의 신앙을 견고하게 세워주어야 합니다.
신앙을 새워 주어야 한다는 만남에 대한 분명한 이유를 가질 때 우리의 관계는 새롭게 변화합니다. 이번 주에 가서 누구의 신앙을 견고하게 해 줄 것인가를 기대할 것입니다.
2. 우리는 피차 믿음으로 인하여 위로를 주어야 합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
바울이 그렇게도 그들을 만나고 싶었던 두 번째 이유는 무엇입니까? 12절을 보십시오. 피차 안위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안위라는 것은 위로를 말합니다.
성도는 서로 만나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얼마나 세상에서 우리가 상처를 많이 받고 삽니까? 얼마전 어느 직장인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까? 너무나 치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정에 와서 교회에 와서 성도가 만나 위로는 받지 못하고 또다시 상처를 받으면 어디에서 우리가 위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허물과 단점을 들추어내어 상처를 주지 말고 부족한 점을 감싸주고 치유해주어 위로를 주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잘된 모습보다는 못된 모습을 보기 좋아하고 칭찬할 것 보다는 흠을 찾기 좋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친척들에게 10번 잘해 주다 한 번 잘못해 주면 어떻습니까? 그 한 번으로 친척과의 관계가 원만치 못하게 됩니다. 돈을 빌려로 와서 9번 빌려 주었는데 형편이 여의치 않아 한 번 빌려 주지 않으면 그것으로 인간 관계가 끝이 나는 경우를 봅니다.
찰스 알렌(Charles Allen)목사가 성공자들을 연구해 본 결과 다음 다섯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1)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 것 (2) 다른 사람을 비평하지 않는 것 (3)이득을 얻겠다는 생각을 버리는 것 (4)다른 사람의 장점을 보고 배우는 것 (5) 대인 관계의 화평을 이루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그지글러(Jigjigler)씨가 100명의 백만장자들을 조사해 보니까 공통점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70%가 가난한 시골 출신이고, 둘째는 타인의 장점을 보는 눈을 가졌고 칭찬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단점만 있는 사람도 없고 장점만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장단 점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무엇을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성도들끼리 서로 칭찬해 주고 위로 해 주십시오. 부부 간에도 여보 참 수고했소, 당신 때문에 내가 있소, 아이들에게도 너는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 될 것야 하고 하루에 한 번만 해 보십시오. 삶이 바꾸워 질 것입니다.
얼마전 한국 갤럽에서 조사한 기독교인의 일상생활 만족도를 보니까 참 낮아요. 가족관계/가정생활(76.2%),친구관계(65.9%),직장생활/학교생활(54.9%),살림살이(경제적 형편)(44.0%)입니다. 전체 만족도를 보니까 59.9%입니다. 60% 안되어요. 서로 만족할 만할 정도로 위로하면 살아야 합니다.
목회자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위로 받아야 할 존재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바울이 피차 위로를 받기를 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 같은 사람이 뭐 위로가 필요하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위로가 필요합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늘 목회자의 9가지 잘한 것은 보지 않고 1가지 잘못만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실망을 합니다. 목회자에게만 실망하면 좋은데 하나님에 대하여도 실망을 해버립니다.
금주에 저도 실수를 했는데 십 몇 년 만에 새벽 기도를 실 수 한 것 같습니다. 지난 화요일 새벽에 비가 많이 왔는데 새벽 예배에 나오지를 못했습니다. 월요일 목사님들 모임이 있어 저희 교회에서 모이고 월요일 까지 생명의 샘가 11. 12월 호 원고 마감 날이어서 원고를 다 써주지 못해 새벽 2시 30분까지 써서 이메일로 보내어 주었습니다. 제가 3시 50분이면 매일 일어나기 때문에 새벽 기도 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계속 있다가 새벽 기도 갈까 아니면 조금 자다 일어나 새벽기도회를 갈까 생각하다 아무래도 조금이나마 잠을 자고 새벽 기도회를 가는 것이 좋은 것 같아 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그만 일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저와 같이 오시는 집사님들이 새벽부터 바람맞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괴로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집사님이 목사님이 그럴 수 있냐고 말씀하면서 이제 새벽기도 안나간다고 안나오시거나, 저에 대하여 늘 새벽기도도 빠진 목사라고 생각하며 부정적으로 생각한다면 얼마나 더 죄송하겠습니까?
목회자도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어제는 새벽기도 안하는 날이었습니다.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3시 50분에 벌떨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아내를 깨우고 책상에 앉아 성경을 묵상하려고 하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토요일입니다. 금요 철야기도 하고 새벽기도 안하는 날이어요.
다른 사람이 실수하는 것 너무 그것 붙들고 사람 상처 주지 마세요. 그것 때문에 서로 손해 보지 마십시오. 다 연약한 질그릇입니다. 내려 뜨리면 깨집니다. 누가 얼마나 강하겠습니까? 부모님 돌아가시면 다 눈물 흘리는 것입니다. 서로 위해해 주어야 합니다. 서로 세워주어야 합니다. 자신이 잘못할 때는 상대방보다 더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가슴하파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억 방법을 보십시오. 우리의 잘못 진홍 같이 붉을 지라도 기억도 안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한 것은 소자 하나에게 물 한컵 대접한 것도 기억하신다고 했습니다. 그 상을 잃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태도도 그래야 합니다. 잘 해 준 것, 장점, 좋은 점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단점, 잘못된 것, 기분 나쁜 것은 기억하지 마십시오.
아내와의 관계도, 자녀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가 한 번 실수 한 것, 남편이 한 번 실수 한 것 죽을 때까지 썩먹지 마십시오.
자녀들을 볼 때 그들을 위로하십시오. 교회에 나오는 것만 해도 얼마나 대견한 일입니까? 아무나 교회에 나오는 것 아닙니다. 자꾸 틀린 것만 보지 마십시오. 10개 중에 하나 틀렸으면 잘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 틀린 것으로 야단치며 옆집 아이는 다 맞았다고 하지 마십시오.
무엇으로 위로를 받습니까?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그 믿음으로 사람을 정죄하고 넘어뜨리는 데 사용하지 마십시오. 믿음의 용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괴로워하는 자를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실패한 자를 세워 주어야 합니다. 욥의 친구들의 잘못이 그것이 아닙니까? 하루 아침에 그 거부가 모든 재산을 다 잃었습니다. 자식도 죽었습니다. 아내도 떠나 버립니다. 이런 상황에 있는 사람을 찾아가 "너 죄있지 죄 회개해"라고 욱박지르면 되겠습니까? 죄 있으면 본인이 더 잘 압니다. 말하지 않아도 그런 상황에 도달하면 다 자신을 해아려 보는 것입니다.
어려움 당하면 다시 재기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세워주어야 합니다. 상한 마음을 감싸주어야 합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야곱이 돌아가신 후 형들이 자기들의 잘못을 생각하고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그 때 요셉은 그들을 위로합니다(50:21). 졸지에 남편과 아들을 잃어 버리고 과부가 된 룻이 돌아 왔을 때 보아스가 어떻게 대합니까? 그는 룻의 위로가 되었습니다(룻2:13). 이민 가더니 잘 되었어. 그것 봐 하나님의 벌을 받았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요나단은 다윗 위로가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위로 받지 못하면 거짓 위로를 받으려고 합니다. 육신의 쾌락으로 술로 마약으로 위로를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위로는 자신을 더 깊은 수렁으로 끌고 갈 뿐입니다. 우리 위로가 한계가 있다 하더라도 위로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참 위로자이신 하나님께서 말씀합니다.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 40:1)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살전 4:18)
교회란 성한 사람 대접받는 곳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권력있고 학식있도 돈있고 건강있고 명예 있는 사람들이 자기 활동 영역을 넓히는 장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힘없고 능력없고 건강없고 무기력한 사람들이 위로받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새 힘을 얻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만남이 위로라는 목표에 맞추어 질 때 참으로 서로를 통하여 만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3. 우리는 만남으로 열매를 맺게 해 주어야 합니다.
왜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사람들은 만나기 원했습니까? 13절을 보십시오.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열매는 인격 성숙 즉 성령의 열매도 포함되겠지만 바로 뒤의 말씀을 보면 전도의 열매입니다. 바울이 사람을 만날 때 궁극적으로 관심을 갖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생명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가끔 보면 신문에 전 재산을 어느 대학에 기증했다는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참 좋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신문에 날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값진 일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사람들에게 많은 돈을 주는 것보다 더 값진 것은 온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신문이 있다면 오늘 분당에 있는 열린 교회 김집사가 누구에게 전도하여 그가 새생명을 얻다 이런 기사가 날 것입니다. 우리사 사람을 사랑하는 최대의 사랑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를 구원시키는 것입니다.
복음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16절 보십시오. "복음은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바울은 빚진 자의 심정으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빚을 갑지 않으면 얼마나 불안합니까? 한 시도 그것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지 않습니까?
인생의 만남 중에 중요한 만남 세가지는 부모와의 만남, 배우자와의 만남, 하나님과의 만남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배우자와의 만남을 가질 때 학자들이 늘 충고하는 것은 어린시절 부모와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를 알아 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 사람의 평생 인간관계를 좌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술주정이 심하다거나, 생활력이 없이 무능하다거나 바람을피웠다거나 해서 어머니를 속상하게 하는 아버지를 둔 여성은 "이러이러한 사람"이라는 적극적인 형태의 배우자상을 갖기 보다는 "우리 아버지같은 남자는 안 만나야겠다"는 식으로 배우자 선택의 잣대 자체를 제한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감정의 가장 맺힌 부분 핵심 감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알콜중독인 아버지를 둔 여성이 "알콜중독"을 기피하는데만 신경을 쓰다 오히려 도박꾼 남편을 만난 예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만날 때 핵심 감정, 핵심 사항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께 인도하는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불신 자를 만날 핵심적인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거래처를 가든, 아이들을 가르치든, 사업을 하든, 연구를 하든, 시장을 가든 이 핵심적인 대인 관계의 이유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불러 훈련시킨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를 이 땅에 남겨 놓고 일하라고 하는 핵심적 요구사항은 무엇이겠습니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
지난 주일 독일에서 10여년 공부하고 온 분을 만났습니다. 유학을 가기 전 교회에 열심히 다니며 신앙 생활을 하던 분인데 독일에 가서 교회를 나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를 말하였습니다. 저는 그 자매에게 교회에 나가서 내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어떻게 나태낼 것인가에 관심을 가지라고 충고해 드렸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와 우선 하나님께 예배드리지만 사람과도 만나는데 사람들을 만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고 실망하기 위해서입니까? 나의 가진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까? 아이들이 학교에 가서 선생님을 만나는 이유는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사업하는 분이 거레처 직원과 만나는 것은 장사를 위해서입니다. 선거철 정치인이 유권자와 만나는 이유는 선거에서 지지를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교회에서 성도를 만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한 열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 선생님은 그들을 만나기 위해 쉬지 않고 기도했다고 했습니다(9).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기를 너무도 간절이 원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이번 주면 목사님, 장로님, 권사님, 구역장님, 집사님 만나겠지 하며 기도하며 만나기를 열망하는 줄 믿습니다만 바울은 로마에 거하는 성도를 만나기 위한 열망이 남달랐습니다. 왜 그들을 만나려고 했습니까? 우리가 성도들을 만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 우리는 서로에게 주어진 은사를 통하여 신앙을 견고하게 해기 위해서입니다.-성도
바울은 그들을 만나 옷감을 팔려고 만난 것이 아닙니다. 가끔 보면 주일날 교인들 만나기를 학수 고대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다른 것에 있습니다. 무엇인가 거래를 하기 위해 만나기를 원합니다. 옷 장사하시는 분은 옷을 팔기 위해서, 책 세일하시는 분은 책 팔기 위해서 고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표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분들은 되도록 작은 교회보다는 큰 교회를 선택합니다. 어떤 분은 지난 주 당한 것을 보복하기 위해 만나기를 학수 고대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바울은 왜 로마에 있는 사람들을 그렇게도 만나기 고대하였습니까? 11절을 보십시오.
'너희를 견고케 하려'라고 말씀합니다. 견고케 한다는 말은 흔들리지 않게 한다는 말입니다. 신앙을 든든히 세워준다는 말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서로 만날 때는 무엇보다도 서로 신앙을 흔들리지 않도록 든든히 세워주는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 살면서 얼마나 신앙을 든든히 세우기가 어렵습니까? 신앙 지키기도 힘든 세상이 아닙니까? 세상 사람들 만나 얼마나 신앙이 무너집니까? 그들은 우리의 신앙을 세워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틈만 있으면 우리의 신앙을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텔레비전을 보면 텔레비전이 우리의 신앙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영화도, 직장 생활하면서도 많은 것들이 우리의 신앙을 으깨고 있습니다. 날마나 듣고 보고 늦끼는 것이 얼마나 세속적인 것이면 얼마나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입니까? 사탄이 우는 사자처럼 다니면 믿음의 사람을 삼키려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누구를 통하여 신앙을 세움받을 수 있겠습니까? 믿음의 형제 자매 아닙니까? 이렇게 주일 날 함께 나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영적인 가족이 아니겠습니까? 교회에서고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신앙인은 서로 서로 신앙을 든든히 세워주어야 합니다.
특히 신앙이 더 성숙한 사람이 세워 주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12절에는 피차라는 말이 나오지만 견고하게 되는 것은 너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신앙 생활 오래 했다고 생각된 분들은 끈임없이 어린 신앙인의 신앙을 어떤 홍수에도 무너지지 않도록 든든한 반석위에 세워주어야 합니다.
1)무엇으로 신앙을 든든히 세워줍니까?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무슨 신령한 은사입니다. 여기서 무슨이라는 말은 로마인들이 아직 모르는 어떤 이라는 말입니다. 아직 로마인들은 잘 모르지만 이미 바울은 체험한 은사 그 은사로 견고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지혜의 은사, 지식의 은사, 믿음의 은사, 신유(神癒) 병고침의 은사, 능력 행함의 은사, 영분별, 가르침, 방언, 젊은 이들이 겁나는 독신의 은사(고전 12:1-11), 예언(롬12:6), 섬기는 일(롬12:7), 권위(롬12:8), 구제(롬12:8), 다스리는 일(롬12:8), 긍휼(롬12:8),전도(고후1:11), 사랑(고전12:31-31:1) 등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로 신앙을 견고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엡4:12을 보십시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엡 4:11-12)"
교회나 세상이나 이 시대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 일을 하지 않습니다. 은사를 가지고 자기 이익으로 삼던지, 다른 사람을 깎아 내리는 데 사용하면 안됩니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데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사울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로 왕이 되었습니다. 그것으로 무엇을 합니까? 다윗이 자신보다 인기가 있자 그를 죽이려고 합니다. 막강한 힘을 가진 삼손은 그 힘으로 방탕해 버립니다.
우리는 살다보면 성도끼리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부부끼리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그것을 신앙을 잃어버리는 계기로 만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떤 장로님은 부부와 문제만 있으면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문제를 당하면 그것으로 인하여 더 신앙이 성장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신앙에 손해를 봅니다. 이렇게 하여서는 안됩니다. 신앙인의 만남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은 더욱 성장해야 합니다. 아내와 만나 아내의 신앙을 더 굳게 해주어야 합니다. 남편을 만나, 자식을 두고 자식의 신앙을 더 견고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2) 어떻게 견고하게 해줍니까?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바울이 주도적으로 자기 것을 나누어 준다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도 함께 공유하여 참여한다는 말입니다. 함께 참여하는 것입니다. 함께 삶을 나누는 것입니다. 내가 있어서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모는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것으로 서로의 신앙을 견고하게 세워주어야 합니다.
신앙을 새워 주어야 한다는 만남에 대한 분명한 이유를 가질 때 우리의 관계는 새롭게 변화합니다. 이번 주에 가서 누구의 신앙을 견고하게 해 줄 것인가를 기대할 것입니다.
2. 우리는 피차 믿음으로 인하여 위로를 주어야 합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
바울이 그렇게도 그들을 만나고 싶었던 두 번째 이유는 무엇입니까? 12절을 보십시오. 피차 안위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안위라는 것은 위로를 말합니다.
성도는 서로 만나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얼마나 세상에서 우리가 상처를 많이 받고 삽니까? 얼마전 어느 직장인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까? 너무나 치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정에 와서 교회에 와서 성도가 만나 위로는 받지 못하고 또다시 상처를 받으면 어디에서 우리가 위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허물과 단점을 들추어내어 상처를 주지 말고 부족한 점을 감싸주고 치유해주어 위로를 주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잘된 모습보다는 못된 모습을 보기 좋아하고 칭찬할 것 보다는 흠을 찾기 좋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친척들에게 10번 잘해 주다 한 번 잘못해 주면 어떻습니까? 그 한 번으로 친척과의 관계가 원만치 못하게 됩니다. 돈을 빌려로 와서 9번 빌려 주었는데 형편이 여의치 않아 한 번 빌려 주지 않으면 그것으로 인간 관계가 끝이 나는 경우를 봅니다.
찰스 알렌(Charles Allen)목사가 성공자들을 연구해 본 결과 다음 다섯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1)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 것 (2) 다른 사람을 비평하지 않는 것 (3)이득을 얻겠다는 생각을 버리는 것 (4)다른 사람의 장점을 보고 배우는 것 (5) 대인 관계의 화평을 이루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그지글러(Jigjigler)씨가 100명의 백만장자들을 조사해 보니까 공통점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70%가 가난한 시골 출신이고, 둘째는 타인의 장점을 보는 눈을 가졌고 칭찬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단점만 있는 사람도 없고 장점만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장단 점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무엇을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성도들끼리 서로 칭찬해 주고 위로 해 주십시오. 부부 간에도 여보 참 수고했소, 당신 때문에 내가 있소, 아이들에게도 너는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 될 것야 하고 하루에 한 번만 해 보십시오. 삶이 바꾸워 질 것입니다.
얼마전 한국 갤럽에서 조사한 기독교인의 일상생활 만족도를 보니까 참 낮아요. 가족관계/가정생활(76.2%),친구관계(65.9%),직장생활/학교생활(54.9%),살림살이(경제적 형편)(44.0%)입니다. 전체 만족도를 보니까 59.9%입니다. 60% 안되어요. 서로 만족할 만할 정도로 위로하면 살아야 합니다.
목회자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위로 받아야 할 존재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바울이 피차 위로를 받기를 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 같은 사람이 뭐 위로가 필요하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위로가 필요합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늘 목회자의 9가지 잘한 것은 보지 않고 1가지 잘못만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실망을 합니다. 목회자에게만 실망하면 좋은데 하나님에 대하여도 실망을 해버립니다.
금주에 저도 실수를 했는데 십 몇 년 만에 새벽 기도를 실 수 한 것 같습니다. 지난 화요일 새벽에 비가 많이 왔는데 새벽 예배에 나오지를 못했습니다. 월요일 목사님들 모임이 있어 저희 교회에서 모이고 월요일 까지 생명의 샘가 11. 12월 호 원고 마감 날이어서 원고를 다 써주지 못해 새벽 2시 30분까지 써서 이메일로 보내어 주었습니다. 제가 3시 50분이면 매일 일어나기 때문에 새벽 기도 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계속 있다가 새벽 기도 갈까 아니면 조금 자다 일어나 새벽기도회를 갈까 생각하다 아무래도 조금이나마 잠을 자고 새벽 기도회를 가는 것이 좋은 것 같아 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그만 일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저와 같이 오시는 집사님들이 새벽부터 바람맞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괴로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집사님이 목사님이 그럴 수 있냐고 말씀하면서 이제 새벽기도 안나간다고 안나오시거나, 저에 대하여 늘 새벽기도도 빠진 목사라고 생각하며 부정적으로 생각한다면 얼마나 더 죄송하겠습니까?
목회자도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어제는 새벽기도 안하는 날이었습니다.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3시 50분에 벌떨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아내를 깨우고 책상에 앉아 성경을 묵상하려고 하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토요일입니다. 금요 철야기도 하고 새벽기도 안하는 날이어요.
다른 사람이 실수하는 것 너무 그것 붙들고 사람 상처 주지 마세요. 그것 때문에 서로 손해 보지 마십시오. 다 연약한 질그릇입니다. 내려 뜨리면 깨집니다. 누가 얼마나 강하겠습니까? 부모님 돌아가시면 다 눈물 흘리는 것입니다. 서로 위해해 주어야 합니다. 서로 세워주어야 합니다. 자신이 잘못할 때는 상대방보다 더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가슴하파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억 방법을 보십시오. 우리의 잘못 진홍 같이 붉을 지라도 기억도 안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한 것은 소자 하나에게 물 한컵 대접한 것도 기억하신다고 했습니다. 그 상을 잃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태도도 그래야 합니다. 잘 해 준 것, 장점, 좋은 점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단점, 잘못된 것, 기분 나쁜 것은 기억하지 마십시오.
아내와의 관계도, 자녀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가 한 번 실수 한 것, 남편이 한 번 실수 한 것 죽을 때까지 썩먹지 마십시오.
자녀들을 볼 때 그들을 위로하십시오. 교회에 나오는 것만 해도 얼마나 대견한 일입니까? 아무나 교회에 나오는 것 아닙니다. 자꾸 틀린 것만 보지 마십시오. 10개 중에 하나 틀렸으면 잘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 틀린 것으로 야단치며 옆집 아이는 다 맞았다고 하지 마십시오.
무엇으로 위로를 받습니까?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그 믿음으로 사람을 정죄하고 넘어뜨리는 데 사용하지 마십시오. 믿음의 용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괴로워하는 자를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실패한 자를 세워 주어야 합니다. 욥의 친구들의 잘못이 그것이 아닙니까? 하루 아침에 그 거부가 모든 재산을 다 잃었습니다. 자식도 죽었습니다. 아내도 떠나 버립니다. 이런 상황에 있는 사람을 찾아가 "너 죄있지 죄 회개해"라고 욱박지르면 되겠습니까? 죄 있으면 본인이 더 잘 압니다. 말하지 않아도 그런 상황에 도달하면 다 자신을 해아려 보는 것입니다.
어려움 당하면 다시 재기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세워주어야 합니다. 상한 마음을 감싸주어야 합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야곱이 돌아가신 후 형들이 자기들의 잘못을 생각하고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그 때 요셉은 그들을 위로합니다(50:21). 졸지에 남편과 아들을 잃어 버리고 과부가 된 룻이 돌아 왔을 때 보아스가 어떻게 대합니까? 그는 룻의 위로가 되었습니다(룻2:13). 이민 가더니 잘 되었어. 그것 봐 하나님의 벌을 받았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요나단은 다윗 위로가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위로 받지 못하면 거짓 위로를 받으려고 합니다. 육신의 쾌락으로 술로 마약으로 위로를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위로는 자신을 더 깊은 수렁으로 끌고 갈 뿐입니다. 우리 위로가 한계가 있다 하더라도 위로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참 위로자이신 하나님께서 말씀합니다.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 40:1)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살전 4:18)
교회란 성한 사람 대접받는 곳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권력있고 학식있도 돈있고 건강있고 명예 있는 사람들이 자기 활동 영역을 넓히는 장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힘없고 능력없고 건강없고 무기력한 사람들이 위로받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새 힘을 얻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만남이 위로라는 목표에 맞추어 질 때 참으로 서로를 통하여 만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3. 우리는 만남으로 열매를 맺게 해 주어야 합니다.
왜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사람들은 만나기 원했습니까? 13절을 보십시오.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열매는 인격 성숙 즉 성령의 열매도 포함되겠지만 바로 뒤의 말씀을 보면 전도의 열매입니다. 바울이 사람을 만날 때 궁극적으로 관심을 갖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생명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가끔 보면 신문에 전 재산을 어느 대학에 기증했다는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참 좋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신문에 날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값진 일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사람들에게 많은 돈을 주는 것보다 더 값진 것은 온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신문이 있다면 오늘 분당에 있는 열린 교회 김집사가 누구에게 전도하여 그가 새생명을 얻다 이런 기사가 날 것입니다. 우리사 사람을 사랑하는 최대의 사랑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를 구원시키는 것입니다.
복음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16절 보십시오. "복음은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바울은 빚진 자의 심정으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빚을 갑지 않으면 얼마나 불안합니까? 한 시도 그것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지 않습니까?
인생의 만남 중에 중요한 만남 세가지는 부모와의 만남, 배우자와의 만남, 하나님과의 만남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배우자와의 만남을 가질 때 학자들이 늘 충고하는 것은 어린시절 부모와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를 알아 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 사람의 평생 인간관계를 좌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술주정이 심하다거나, 생활력이 없이 무능하다거나 바람을피웠다거나 해서 어머니를 속상하게 하는 아버지를 둔 여성은 "이러이러한 사람"이라는 적극적인 형태의 배우자상을 갖기 보다는 "우리 아버지같은 남자는 안 만나야겠다"는 식으로 배우자 선택의 잣대 자체를 제한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감정의 가장 맺힌 부분 핵심 감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알콜중독인 아버지를 둔 여성이 "알콜중독"을 기피하는데만 신경을 쓰다 오히려 도박꾼 남편을 만난 예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만날 때 핵심 감정, 핵심 사항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께 인도하는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불신 자를 만날 핵심적인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거래처를 가든, 아이들을 가르치든, 사업을 하든, 연구를 하든, 시장을 가든 이 핵심적인 대인 관계의 이유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불러 훈련시킨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를 이 땅에 남겨 놓고 일하라고 하는 핵심적 요구사항은 무엇이겠습니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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