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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45:4-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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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
2002.10.30
어제 저희 집 7살 먹은 아이가 저에게 다가와 조용히 말했습니다. "아빠,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 "글세 모르겠다, 뭐가 가장 싫은 데" "그것도 몰라, 피아노 치는 것" 아내가 매일 피아노를 집에서 가르쳐 주는데 그것이 그렇게 하기 싫은가 봅니다. 지난 목요일 아내가 아이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주면서 박자를 맞추어 치라고 야단을 쳤는가 봅니다. "박자가 중요해 박자"라고 말하자 아이가 어머니에게 "박자보다 중요한 것이 있어"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제 아내가 "박자보다 중요한 것이 뭔데"라고 말하자 아이가 하는 말이 "그것은 하트야"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하트가 뭔데"라고 묻자 그 아이가 "사랑도 몰라"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 너의 말이 맞다." 아이들이 공부하는 것보다, 피아노 공부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어머니가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것이 더 중요할 것입니다. 우리 삶 가운데는 중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추석 명절이 다가 오고 있습니다. 추석이 되면 뿔뿔이 흩어졌던 부모 형제들이 한 자리에 만납니다. 추석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차례를 지냅니다. 성묘를 합니다. 이것이 정말로 중요할까요? 왜 사람들이 조상을 섬깁니까? 결국은 조상을 잘 섬김으로 조상의 은덕으로 후손이 잘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말하지 않더라고 저변에 흐르는 사상은 그런 것이 아닙니까? 추석이 되면 일가 친척들이 만나 이야기합니다. 그 이야기의 주 화제는 무엇일까요? "누구는 어떤 사업을 하는데 어떻게 되었고 고모집 딸은 시집을 갔는데 부자집 남자에게 시집을 갔고 이모 아들은 어느 대학을 나왔는데 고시에 합격하여 어떻게 되었고..." 뭐 이런 이야기가 아닙니까? 화제의 중심 내용은 무엇입니까? 요약하면 "잘사느냐?" 이것입니다. 화제의 중심은 잘살고 있느냐 잘되느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가 친척을 만났을 때 어떤 모습으로 보이면 좋겠습니까? 잘 사는 모습이 좋지 않겠습니까? 우린 잘 살아야 합니다. 잘 사는 것이 죄가 아닙니다. 잘 사는 것이 수치가 아닙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삼 1:2)"라고 말씀을 주시고 있지 않습니까? 영혼이 잘되고 하는 모든 일이 잘되고 건강하여 잘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셉 정도 잘 산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오랜만에 형제들을 만났습니다. 그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그의 지위는 애굽의 국무총리입니다. 신앙은 참으로 좋았습니다. 경제적인 부로 굶주린 형제들을 다 돌보아 주었습니다. 왕도 그를 인정해 줍니다. 명예도 있습니다. 자기만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뛰어난 지혜로 나라 경제를 일으키고 백성들을 가뭄으로부터 해방시켰습니다. 이 정도 우리가 잘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 잘 사는 것은 우연히 되어지는 일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요셉이 우연히 요셉이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정도를 걸어가야 합니다(5).
세상의 모든 일에는 정도와 사도가 있고, 순리와 비리가 있습니다. 서울가는 길로 가야 서울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고속 도로 들어서서 부산으로 향하면서 서울을 가려고 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참된 성공과 승리와 행복, 즉 잘 사는 인생의 길은 정도와 순리의 길로 가야만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순천자는 흥하고 역천자는 망한다' 신앙인의 말로 바꾼다면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는 망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는 흥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늘 착각을 합니다. 잘 되는 길이 비리과 사도로 가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잠깐의 잘됨은 있을 수 있지만 지속적으로 잘되는 길은 결코 보장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늘 현실 속에서 너무나 많이 보고 있지 않습니까? 바이 코리아를 외치던 모 회장, 잘 나가던 사람이 주가를 조작하는 그릇된 길로 가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한 때 잘 나간다던 파이낸사들 어떻게 되었습니까? 욕심으로 이루어 가던 무너졌던 대기업을 우리는 많이 보았지 않습니까? 총칼로 권력의 자리에 앉았던 사람들을 보십시오. 우리 나라의 많은 대통령의 길이 어떻습니까? 히틀러가 뭇솔린이 스탈린이 잘 살았다고 볼수 있을까요? 사기꾼이 끝까지 잘되는 법이 없습니다. 독재가가 끝까지 잘되는 법이 없습니다. 시므이 왕이 되었으나 7일만에 죽었습니다(왕상16:20). 살룸 왕이 되었으나 한 달만에 죽었습니다(왕하15:13,14). 여호 아아스(대하23:31-34) 왕이 되었으나 석달만에 죽었습니다. 여호야긴 석달 열흘(대하36:9) 죽었습니다. 이들이 잘 산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정도를 걸어가야 합니다. 요셉은 정도를 걸은 성경의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그동안 한 맺힌 형제들을 만났습니다. 자신을 인신 매매하여 노예로 팔아 먹은 사람들입니다. 자신에게는 지금 보복할 만한 힘이 있습니다. 그 당시 가장 강한 나라의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구걸하러 왔습니다. 얼마든지 보복할 수 있습니다. 인륜을 무시하고 철저하게 그들을 괴롭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형들을 용서합니다. 결코 그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길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정도입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보디발 부인의 유혹을 받는 내용을 보십시오. 눈짖을 하며 유혹을 합니다. 옷을 붙들고 늘어 집니다. 그래도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만약 그가 그 유혹에 넘어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잘 살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형제들을 국무총리가 되어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결국 사형당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한동안 중년 부인과 쾌락을 즐길 수는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오래 가겠습니까?
제가 아는 분 중에 미국에 유학을 가서 유수한 대한에서 상담학 박사 학위를 받은 분이 계십니다. 학교 다니며 연애하여 결혼하여 같이 미국에 갔는데 공부하는데 아내가 코리아 타임지에 취직하여 남편이 공부하는데 뒷바라지를 하였습니다. 어렵게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에서 상담소를 차렸습니다. 그런데 그만 상담소에 찾아온 여인과 눈이 맞아 바람이 났습니다. 그렇게도 희생하여 아내가 공부시켰는데 버려 버린 것입니다. 그 부인은 지금 홀로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 하나를 데리고 미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조강지첩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잘 사는 것이겠습니까? 사탄은 우리를 잘 못 살게 하기 위해 유혹합니다. 어떤 유혹에도 사악한 길을 걷지 말고 정도를 걸어야 합니다. 신앙인을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길의 길목과 끝에는 잘 사는 삶의 열매들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예-대학때 편집장 유혹)
성경을 보십시오 "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 앞에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 (전 8:13)"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시 1:6)"
2. 정도로 가는 길에 고난을 당하면 신앙으로 해석하고 극복해야 합니다.
정도를 걷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인생행로 자체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탄탄 대로가 아닙니다. 흥겨운 콧노래를 부르며 가는 길이 아닙니다. 고난이 도처에 깔려 있는 가시밭 길입니다.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입시에 실패하여 좌절할 수도 있습니다. 애인의 배신으로 죽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힐 수도 있습니다. 처자의 갑작스러운 죽음, 사업의 파산, 배우자의 불륜, 부부의 이혼, 불의의 실직, 자식농사의 실패 등 언제 고난과 시련의 폭풍이 내 앞에 닥쳐올지 모릅니다.
고난은 누구에게나 다가 올 수 있습니다. 문제는 고난이 아닙니다. 그 역경과 고난의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고 대처하는냐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현실을 파악하는 것은 문제를 정확히 분석함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만 정확히 파악하였다고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냐가 문제입니다. 상황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상황을 대처하는 태도입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어린 나이에 정든 고향을 떠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억울하게 감옥에 갔습니다. 이렇게 억울한 일을 당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는 조금만 억울한 일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면 어떻게 합니까?
오늘 새벽에 일어나 성경 묵상을 하기 위해 성경과 찬송가를 꺼내었습니다. 그런데 찬송가를 보니 엉망이었습니다. 가방에 넣어 놓았는데 아이들이 밟은 것 같았습니다. 제 책상에 전화가 있는데 아이들에게 전화할 때 아빠 가방 밟지 말라고 몇차례나 당부를 했는데 말을 듣지 않습니다. 찬송가를 펴보니 뒷장이 밟아 찟어져 있었습니다. 마음이 상했습니다. 분이 마음 한 쪽에서부터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 조그마한 일도 사람은 그렇습니다. 그럴 때 자는 아이들 깨워 야단을 치면 될까요?
요셉을 보십시오. 5-7절을 봇비시오. 요셉은 자신의 삶 모두를 신앙적으로 해석하고 신앙으로 극복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건을 당할 때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그 인생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공장을 하다가 부도가 납니다. 그러면 그 부도롤 인하여 자살을 해 버립니다. 어떤 사람은 학교 성적이 떨어지고, 실연의 아픔을 앓게 되면 그것으로 인생을 포기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어떻게 합니까? 그는 그렇게 해석하지 않습니다. 5절 보십시오. 비록 형들이 자신을 팔아 노예가 되었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려고 미리 보내신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8절 보십시오. 이 애굽 땅에 보낸 분은 하나님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어려움이 다가오면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더 잘 되게 만들기 위해 주신 훈련의 과정이지 이렇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려움이 다가오면 사람들은 그 어려움 때문에 오히려 더 잘 못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전화위복이 되어 더 잘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어려운 시련이 다가 오면 그것을 통하여 더 잘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잠 24:16)"
누구나 다 실수 할 수 있고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 때 그것을 딛고 일어날 수 있는 사람은 잘 살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잘 살 수가 없습니다.
링컨 대통령에게 어떤 사람이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의 놀라운 성공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로부터 높은 존경을 받는 그 삶의 비결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는 껄껄 웃으면서 특유의 기지를 발휘하여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간단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많은 실패를 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는 많은 실패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실패 속에서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존경받았던 것입니다.
가난한 켄터키주의 농촌 태생입니다. 학력은 국민학교 중퇴입니다. 열등감이 심했습니다. 몸이 허약했습니다. 잡화점을 차렸지만 빚만 지고 가게가 망했습니다. 빚 갚는데 15년이 걸렸습니다. 청년이 되자 결혼하였지만 불행한 결혼으로 끝납니다. 결혼에 실패하고 소규모 사업체를 차리지만 또 망합니다. 하원의원도, 상원의원도, 부통령도 실패했습니다. 결국 대통에 당선이 되었습니다. 인류가 흠모하는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는 늘 집무실에서 기도한 대통령입니다. 실패보다 중요한 것은 실패를 신앙으로 해석하는 우리의 자세입니다.
제가 아는 전도사님 한 분이 시어머니가 조금 정상적인 사람과는 다른 분이 있습니다. 교회 권사님입니다. 외아들인데 모든 돈을 자신이 직접 관리를 합니다. 김을 놓은데 김은 아들 앞에만 놓고 며느리가 먹으려고 하면 눈치를 줍니다. 친정이 조금 가난하였는데 집에 무엇이 없어지면 친정 어머니 왔다 갔느냐고 물어 봅니다.
언제가 그 전도사님이 저에게 그런 말씀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모난 훈련시키기 위해 그 시어머니를 만나게 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지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잘 못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 잘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재산에는 세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돈이요, 둘째는 건강이요 셋째는 정신적 재산이 이라고 합니다. 지식, 기술, 용기, 신용, 애정, 근면, 인내력, 양심, 인격 등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도덕적 재산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빠진 것이 있습니다. 신앙만큼 큰 재산은 없습니다. 다 잃어도 큰 신앙 가지면 우리는 얼마든지 잘 살 수 있습니다. 신앙의 관점이 중요합니다. 어떤 고난에서도 우리는 일어나 잘 살 수 있습니다.
3. 정도의 길을 가는 분명한 목표의식 사명의식이 있어야 합니다(5.7).
왜 내가 이 어려움을 당하는가? 왜 내가 이길을 거어야하는가라는 분명한 사명의식이 있을 때 우리는 잘 살 수 있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자신이 애굽에 온 분명한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가 권력을 갖고 출세하기 위해 온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5절에 보면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라고 말씀합니다. 7절에 보면 큰 구원을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후손들을 세상에 두시려고 보내었다고 말씀합니다. 사명감이 분명해야 합니다. 공부에 대하여, 가정에 대하여, 사업에 대하여, 성가대, 교사, 목사, 봉사, 자녀교육에 대하여 사명감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다릅니다. 모든 것은 우연히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많은 차이가 납니다.
인터넷이 세계적인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얼마전 와인 인터넷 사이트가 40억에 팔렸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가상 공간에서 지금 신대륙을 점령하듯 경쟁이 심합니다. 김치, 남대문, 등들도 외국인이 선점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 젊은이들은 인터넷 세계에서 새로운 것을 창출하는데 우리나라 젊은이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외국의 어느 싸이트에서 인터넷에서 세계 최고 미인을 뽑자고 해서 사이트를 개설하였다고 합니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한국의 유명 배우를 올려 놓았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찍어내는 것입니다. 사이트를 개설한 사람이 호소합니다. 제발 자신의 싸이트에 들어와 깽판은 놓는 사람들 접속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약 계속해서 그렇게 하면 지워버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찍어내어 지워버렸다는 것입니다. 어느 싸이트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사람을 뽑는데 강부자씨 뽑혔다고 합니다. 쓸데 없는데 사명감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셉이 가진 사명감은 어떤 사명감입니까? 내 형제를 살리기 위해 후손이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자기를 보내었다는 것입니다.
왜 내가 공부를 하는지? 왜 내가 사업을 하는지? 왜 내가 부자가 되어야하는지? 왜 이 남편을 만났는지? 왜 이 아내를 만났는지? 왜 내가 아들 딸을 공부시키는지 사명감이 있어야 합니다. 왜 우리가 구조 조정을 해야 하는지 좀더 투명한 기업을 해야하고 정직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분명한 사명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가정을 일으키고 직장과 교회를 일으켜야 합니다. 사명감이 없으면 중도에 쉽게 포기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맡겨준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자기가 어디 가는지를 전철을 타고 가면서도 무엇하러 가는지를 모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아인슈타인이 한번은 버스를 탔답니다. 차장이 검표를 하는데 아무리 찾아도 차표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한참을 뒤적거리고 있는데 차장이 '한사람 걸려들었구나' 하면서 얼굴을 쳐다본 순간 놀라고 말았습니다. 당대 유명한 아인슈타인 선생님이었습니다. 당황이 된 차장이 떨리는 음성으로 “서 서 선생님, 선생님 같으면 괜찮습니다.'라고 말했답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여전히 호주머니를 뒤지는 일을 멈추지 않았답니다 "선생님, 괘 괜찮다는데 왜 그러십니까?' 그러자 아인슈타인이 화를 버럭내며 "야, 이 양반아! 당신이야 필요없지만 나한테 필요하단 말일세. 차표가 있어야 어디서 내려야 할지 알 것 아닌가.'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내가 아내와 한 가정을 이루며 살면서도 사명의식이 없이 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사업을 하면서, 교회를 이루어 나가면서, 사명의식이 없이 해서는 안됩니다. 아파트에 가서 우리 집이 어디인지 모르고 해매면 되겠습니까?
19세기 말엽 미국에는 제임스라는 성을 가진 두 가문의 형제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전혀 다른 가문의 출신들이었으나 19세기의 미국 사회에서 유명했었다는 점에서 비슷하답니다. 한 가문의 제임스 형제의 이름은 제시와 프랭크였습니다. 종종 그들을 소재로 한 영화에서 보듯이 그들은 금고털이, 열차털이 강도로 유명한 총잡이였습니다. 이들 형제가 처음부터 사회의 반항아였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남북전쟁에 대한 환멸과 남군의 패배로 인한 사회적 소산이었습니다. 또 다른 제임스 형제의 이름은 윌리암과 헨리였습니다. 시대적 상황은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하버드 대학의 철학 교수로, 또 소설가로 미국인의 가슴속에 지금도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 지성인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사명의식입니다. 똑같은 상황이지만 사명의식이 있냐 없느냐에 따라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렸을 때 아버지를 잃었으나 아버지의 유훈만은 잊지 않고 자랐습니다. “아버지가 죽더라도 내가 못다한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너희를 보내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그들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유훈대로 배우며 성장했습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의 일처럼 여기며 임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주신 일이라는 사명감을 갖고 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행하는 자가 의인이라 그 후손에게 복이 있느니라 (잠 20:7)"
"악인은 그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 (잠 14:32)"
어제 저희 집 7살 먹은 아이가 저에게 다가와 조용히 말했습니다. "아빠,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 "글세 모르겠다, 뭐가 가장 싫은 데" "그것도 몰라, 피아노 치는 것" 아내가 매일 피아노를 집에서 가르쳐 주는데 그것이 그렇게 하기 싫은가 봅니다. 지난 목요일 아내가 아이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주면서 박자를 맞추어 치라고 야단을 쳤는가 봅니다. "박자가 중요해 박자"라고 말하자 아이가 어머니에게 "박자보다 중요한 것이 있어"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제 아내가 "박자보다 중요한 것이 뭔데"라고 말하자 아이가 하는 말이 "그것은 하트야"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하트가 뭔데"라고 묻자 그 아이가 "사랑도 몰라"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 너의 말이 맞다." 아이들이 공부하는 것보다, 피아노 공부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어머니가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것이 더 중요할 것입니다. 우리 삶 가운데는 중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추석 명절이 다가 오고 있습니다. 추석이 되면 뿔뿔이 흩어졌던 부모 형제들이 한 자리에 만납니다. 추석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차례를 지냅니다. 성묘를 합니다. 이것이 정말로 중요할까요? 왜 사람들이 조상을 섬깁니까? 결국은 조상을 잘 섬김으로 조상의 은덕으로 후손이 잘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말하지 않더라고 저변에 흐르는 사상은 그런 것이 아닙니까? 추석이 되면 일가 친척들이 만나 이야기합니다. 그 이야기의 주 화제는 무엇일까요? "누구는 어떤 사업을 하는데 어떻게 되었고 고모집 딸은 시집을 갔는데 부자집 남자에게 시집을 갔고 이모 아들은 어느 대학을 나왔는데 고시에 합격하여 어떻게 되었고..." 뭐 이런 이야기가 아닙니까? 화제의 중심 내용은 무엇입니까? 요약하면 "잘사느냐?" 이것입니다. 화제의 중심은 잘살고 있느냐 잘되느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가 친척을 만났을 때 어떤 모습으로 보이면 좋겠습니까? 잘 사는 모습이 좋지 않겠습니까? 우린 잘 살아야 합니다. 잘 사는 것이 죄가 아닙니다. 잘 사는 것이 수치가 아닙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삼 1:2)"라고 말씀을 주시고 있지 않습니까? 영혼이 잘되고 하는 모든 일이 잘되고 건강하여 잘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셉 정도 잘 산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오랜만에 형제들을 만났습니다. 그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그의 지위는 애굽의 국무총리입니다. 신앙은 참으로 좋았습니다. 경제적인 부로 굶주린 형제들을 다 돌보아 주었습니다. 왕도 그를 인정해 줍니다. 명예도 있습니다. 자기만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뛰어난 지혜로 나라 경제를 일으키고 백성들을 가뭄으로부터 해방시켰습니다. 이 정도 우리가 잘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 잘 사는 것은 우연히 되어지는 일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요셉이 우연히 요셉이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정도를 걸어가야 합니다(5).
세상의 모든 일에는 정도와 사도가 있고, 순리와 비리가 있습니다. 서울가는 길로 가야 서울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고속 도로 들어서서 부산으로 향하면서 서울을 가려고 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참된 성공과 승리와 행복, 즉 잘 사는 인생의 길은 정도와 순리의 길로 가야만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순천자는 흥하고 역천자는 망한다' 신앙인의 말로 바꾼다면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는 망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는 흥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늘 착각을 합니다. 잘 되는 길이 비리과 사도로 가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잠깐의 잘됨은 있을 수 있지만 지속적으로 잘되는 길은 결코 보장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늘 현실 속에서 너무나 많이 보고 있지 않습니까? 바이 코리아를 외치던 모 회장, 잘 나가던 사람이 주가를 조작하는 그릇된 길로 가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한 때 잘 나간다던 파이낸사들 어떻게 되었습니까? 욕심으로 이루어 가던 무너졌던 대기업을 우리는 많이 보았지 않습니까? 총칼로 권력의 자리에 앉았던 사람들을 보십시오. 우리 나라의 많은 대통령의 길이 어떻습니까? 히틀러가 뭇솔린이 스탈린이 잘 살았다고 볼수 있을까요? 사기꾼이 끝까지 잘되는 법이 없습니다. 독재가가 끝까지 잘되는 법이 없습니다. 시므이 왕이 되었으나 7일만에 죽었습니다(왕상16:20). 살룸 왕이 되었으나 한 달만에 죽었습니다(왕하15:13,14). 여호 아아스(대하23:31-34) 왕이 되었으나 석달만에 죽었습니다. 여호야긴 석달 열흘(대하36:9) 죽었습니다. 이들이 잘 산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정도를 걸어가야 합니다. 요셉은 정도를 걸은 성경의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그동안 한 맺힌 형제들을 만났습니다. 자신을 인신 매매하여 노예로 팔아 먹은 사람들입니다. 자신에게는 지금 보복할 만한 힘이 있습니다. 그 당시 가장 강한 나라의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구걸하러 왔습니다. 얼마든지 보복할 수 있습니다. 인륜을 무시하고 철저하게 그들을 괴롭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형들을 용서합니다. 결코 그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길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정도입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보디발 부인의 유혹을 받는 내용을 보십시오. 눈짖을 하며 유혹을 합니다. 옷을 붙들고 늘어 집니다. 그래도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만약 그가 그 유혹에 넘어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잘 살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형제들을 국무총리가 되어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결국 사형당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한동안 중년 부인과 쾌락을 즐길 수는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오래 가겠습니까?
제가 아는 분 중에 미국에 유학을 가서 유수한 대한에서 상담학 박사 학위를 받은 분이 계십니다. 학교 다니며 연애하여 결혼하여 같이 미국에 갔는데 공부하는데 아내가 코리아 타임지에 취직하여 남편이 공부하는데 뒷바라지를 하였습니다. 어렵게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에서 상담소를 차렸습니다. 그런데 그만 상담소에 찾아온 여인과 눈이 맞아 바람이 났습니다. 그렇게도 희생하여 아내가 공부시켰는데 버려 버린 것입니다. 그 부인은 지금 홀로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 하나를 데리고 미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조강지첩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잘 사는 것이겠습니까? 사탄은 우리를 잘 못 살게 하기 위해 유혹합니다. 어떤 유혹에도 사악한 길을 걷지 말고 정도를 걸어야 합니다. 신앙인을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길의 길목과 끝에는 잘 사는 삶의 열매들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예-대학때 편집장 유혹)
성경을 보십시오 "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 앞에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 (전 8:13)"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시 1:6)"
2. 정도로 가는 길에 고난을 당하면 신앙으로 해석하고 극복해야 합니다.
정도를 걷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인생행로 자체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탄탄 대로가 아닙니다. 흥겨운 콧노래를 부르며 가는 길이 아닙니다. 고난이 도처에 깔려 있는 가시밭 길입니다.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입시에 실패하여 좌절할 수도 있습니다. 애인의 배신으로 죽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힐 수도 있습니다. 처자의 갑작스러운 죽음, 사업의 파산, 배우자의 불륜, 부부의 이혼, 불의의 실직, 자식농사의 실패 등 언제 고난과 시련의 폭풍이 내 앞에 닥쳐올지 모릅니다.
고난은 누구에게나 다가 올 수 있습니다. 문제는 고난이 아닙니다. 그 역경과 고난의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고 대처하는냐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현실을 파악하는 것은 문제를 정확히 분석함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만 정확히 파악하였다고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냐가 문제입니다. 상황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상황을 대처하는 태도입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어린 나이에 정든 고향을 떠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억울하게 감옥에 갔습니다. 이렇게 억울한 일을 당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는 조금만 억울한 일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면 어떻게 합니까?
오늘 새벽에 일어나 성경 묵상을 하기 위해 성경과 찬송가를 꺼내었습니다. 그런데 찬송가를 보니 엉망이었습니다. 가방에 넣어 놓았는데 아이들이 밟은 것 같았습니다. 제 책상에 전화가 있는데 아이들에게 전화할 때 아빠 가방 밟지 말라고 몇차례나 당부를 했는데 말을 듣지 않습니다. 찬송가를 펴보니 뒷장이 밟아 찟어져 있었습니다. 마음이 상했습니다. 분이 마음 한 쪽에서부터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 조그마한 일도 사람은 그렇습니다. 그럴 때 자는 아이들 깨워 야단을 치면 될까요?
요셉을 보십시오. 5-7절을 봇비시오. 요셉은 자신의 삶 모두를 신앙적으로 해석하고 신앙으로 극복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건을 당할 때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그 인생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공장을 하다가 부도가 납니다. 그러면 그 부도롤 인하여 자살을 해 버립니다. 어떤 사람은 학교 성적이 떨어지고, 실연의 아픔을 앓게 되면 그것으로 인생을 포기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어떻게 합니까? 그는 그렇게 해석하지 않습니다. 5절 보십시오. 비록 형들이 자신을 팔아 노예가 되었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려고 미리 보내신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8절 보십시오. 이 애굽 땅에 보낸 분은 하나님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어려움이 다가오면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더 잘 되게 만들기 위해 주신 훈련의 과정이지 이렇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려움이 다가오면 사람들은 그 어려움 때문에 오히려 더 잘 못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전화위복이 되어 더 잘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어려운 시련이 다가 오면 그것을 통하여 더 잘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잠 24:16)"
누구나 다 실수 할 수 있고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 때 그것을 딛고 일어날 수 있는 사람은 잘 살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잘 살 수가 없습니다.
링컨 대통령에게 어떤 사람이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의 놀라운 성공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로부터 높은 존경을 받는 그 삶의 비결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는 껄껄 웃으면서 특유의 기지를 발휘하여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간단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많은 실패를 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는 많은 실패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실패 속에서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존경받았던 것입니다.
가난한 켄터키주의 농촌 태생입니다. 학력은 국민학교 중퇴입니다. 열등감이 심했습니다. 몸이 허약했습니다. 잡화점을 차렸지만 빚만 지고 가게가 망했습니다. 빚 갚는데 15년이 걸렸습니다. 청년이 되자 결혼하였지만 불행한 결혼으로 끝납니다. 결혼에 실패하고 소규모 사업체를 차리지만 또 망합니다. 하원의원도, 상원의원도, 부통령도 실패했습니다. 결국 대통에 당선이 되었습니다. 인류가 흠모하는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는 늘 집무실에서 기도한 대통령입니다. 실패보다 중요한 것은 실패를 신앙으로 해석하는 우리의 자세입니다.
제가 아는 전도사님 한 분이 시어머니가 조금 정상적인 사람과는 다른 분이 있습니다. 교회 권사님입니다. 외아들인데 모든 돈을 자신이 직접 관리를 합니다. 김을 놓은데 김은 아들 앞에만 놓고 며느리가 먹으려고 하면 눈치를 줍니다. 친정이 조금 가난하였는데 집에 무엇이 없어지면 친정 어머니 왔다 갔느냐고 물어 봅니다.
언제가 그 전도사님이 저에게 그런 말씀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모난 훈련시키기 위해 그 시어머니를 만나게 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지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잘 못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 잘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재산에는 세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돈이요, 둘째는 건강이요 셋째는 정신적 재산이 이라고 합니다. 지식, 기술, 용기, 신용, 애정, 근면, 인내력, 양심, 인격 등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도덕적 재산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빠진 것이 있습니다. 신앙만큼 큰 재산은 없습니다. 다 잃어도 큰 신앙 가지면 우리는 얼마든지 잘 살 수 있습니다. 신앙의 관점이 중요합니다. 어떤 고난에서도 우리는 일어나 잘 살 수 있습니다.
3. 정도의 길을 가는 분명한 목표의식 사명의식이 있어야 합니다(5.7).
왜 내가 이 어려움을 당하는가? 왜 내가 이길을 거어야하는가라는 분명한 사명의식이 있을 때 우리는 잘 살 수 있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자신이 애굽에 온 분명한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가 권력을 갖고 출세하기 위해 온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5절에 보면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라고 말씀합니다. 7절에 보면 큰 구원을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후손들을 세상에 두시려고 보내었다고 말씀합니다. 사명감이 분명해야 합니다. 공부에 대하여, 가정에 대하여, 사업에 대하여, 성가대, 교사, 목사, 봉사, 자녀교육에 대하여 사명감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다릅니다. 모든 것은 우연히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많은 차이가 납니다.
인터넷이 세계적인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얼마전 와인 인터넷 사이트가 40억에 팔렸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가상 공간에서 지금 신대륙을 점령하듯 경쟁이 심합니다. 김치, 남대문, 등들도 외국인이 선점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 젊은이들은 인터넷 세계에서 새로운 것을 창출하는데 우리나라 젊은이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외국의 어느 싸이트에서 인터넷에서 세계 최고 미인을 뽑자고 해서 사이트를 개설하였다고 합니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한국의 유명 배우를 올려 놓았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찍어내는 것입니다. 사이트를 개설한 사람이 호소합니다. 제발 자신의 싸이트에 들어와 깽판은 놓는 사람들 접속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약 계속해서 그렇게 하면 지워버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찍어내어 지워버렸다는 것입니다. 어느 싸이트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사람을 뽑는데 강부자씨 뽑혔다고 합니다. 쓸데 없는데 사명감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셉이 가진 사명감은 어떤 사명감입니까? 내 형제를 살리기 위해 후손이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자기를 보내었다는 것입니다.
왜 내가 공부를 하는지? 왜 내가 사업을 하는지? 왜 내가 부자가 되어야하는지? 왜 이 남편을 만났는지? 왜 이 아내를 만났는지? 왜 내가 아들 딸을 공부시키는지 사명감이 있어야 합니다. 왜 우리가 구조 조정을 해야 하는지 좀더 투명한 기업을 해야하고 정직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분명한 사명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가정을 일으키고 직장과 교회를 일으켜야 합니다. 사명감이 없으면 중도에 쉽게 포기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맡겨준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자기가 어디 가는지를 전철을 타고 가면서도 무엇하러 가는지를 모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아인슈타인이 한번은 버스를 탔답니다. 차장이 검표를 하는데 아무리 찾아도 차표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한참을 뒤적거리고 있는데 차장이 '한사람 걸려들었구나' 하면서 얼굴을 쳐다본 순간 놀라고 말았습니다. 당대 유명한 아인슈타인 선생님이었습니다. 당황이 된 차장이 떨리는 음성으로 “서 서 선생님, 선생님 같으면 괜찮습니다.'라고 말했답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여전히 호주머니를 뒤지는 일을 멈추지 않았답니다 "선생님, 괘 괜찮다는데 왜 그러십니까?' 그러자 아인슈타인이 화를 버럭내며 "야, 이 양반아! 당신이야 필요없지만 나한테 필요하단 말일세. 차표가 있어야 어디서 내려야 할지 알 것 아닌가.'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내가 아내와 한 가정을 이루며 살면서도 사명의식이 없이 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사업을 하면서, 교회를 이루어 나가면서, 사명의식이 없이 해서는 안됩니다. 아파트에 가서 우리 집이 어디인지 모르고 해매면 되겠습니까?
19세기 말엽 미국에는 제임스라는 성을 가진 두 가문의 형제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전혀 다른 가문의 출신들이었으나 19세기의 미국 사회에서 유명했었다는 점에서 비슷하답니다. 한 가문의 제임스 형제의 이름은 제시와 프랭크였습니다. 종종 그들을 소재로 한 영화에서 보듯이 그들은 금고털이, 열차털이 강도로 유명한 총잡이였습니다. 이들 형제가 처음부터 사회의 반항아였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남북전쟁에 대한 환멸과 남군의 패배로 인한 사회적 소산이었습니다. 또 다른 제임스 형제의 이름은 윌리암과 헨리였습니다. 시대적 상황은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하버드 대학의 철학 교수로, 또 소설가로 미국인의 가슴속에 지금도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 지성인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사명의식입니다. 똑같은 상황이지만 사명의식이 있냐 없느냐에 따라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렸을 때 아버지를 잃었으나 아버지의 유훈만은 잊지 않고 자랐습니다. “아버지가 죽더라도 내가 못다한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너희를 보내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그들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유훈대로 배우며 성장했습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의 일처럼 여기며 임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주신 일이라는 사명감을 갖고 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행하는 자가 의인이라 그 후손에게 복이 있느니라 (잠 20:7)"
"악인은 그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 (잠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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