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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사32: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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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조용기 목사 |
참고 : | 2006년 12월 24일 주일 2부설교 |
보라 장차 한 왕이 공의로 통치할 것이요 방백들이 정의로 다스릴 것이며 또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으리니 보는 자의 눈이 감기지 아니할 것이요 듣는 자가 귀를 기울일 것이며 조급한 자의 마음이 지식을 깨닫고 어눌한 자의 혀가 민첩하여 말을 분명히 할 것이라”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크리스마스에 오신 아기’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이사야 9장 6절에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예언을 주님 오시기전 600년에서 700년 전에 이사야가 담대하게 예언을 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요, 모사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고 예언을 했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 중 너무나 놀라운 것은 한 아기 한 아들이 우리에게 태어났는데 그가 바로 만왕의 왕, 만주의 주,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 이 말을 믿어 주겠습니까? 하나님이 핏덩어리 어린 아기로 어머니 뱃속에 열 달 동안 자라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 아기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요, 평강의 왕이라고 했으니 인간의 상상을 완전히 초월한 하나님의 기적이 아니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기 그 아들이 우리에게는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우는 곳이 될것이고, 마른 땅의 냇물 같고,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이 되신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본론>
1. 광풍을 피하는 곳
첫째로, 크리스마스에 오신 그 아기 그 아들은 우리에게 광풍을 피하는 곳이 될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광풍이락 말하면 갈릴리바다에 풍파가 일어났던 것을 기억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더불어 배를 타시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시는 중에 큰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배가 침몰할 직전에 도달했습니다. 제자들은 아비규환의 절망에 처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아무리 노를 젓고 배를 바로 잡으려고 해도 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거대한 풍랑이었습니다. 그때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우시니 예수님이 일어나셔서 바람과 파도를 꾸짖으시니 즉시로 잠잠해지고 말았습니다.
마가복음 4장 39절에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이것 얼마나 놀라운 일인 것입니까? 자연이 주님의 명령에 순종한 놀라운 사건인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상징적으로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 인생의 광풍을 잠잠케 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아담이 에덴에서 타락한 이후로 우리에게 삼대재앙의 광풍을 몰고 온 것입니다. 인간은 어머니 뱃속에 잉태될 때부터 재앙의 세계 속에 잉태된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벌써 삼대재앙의 광풍에 휘말려 태어난 것입니다. 인간은 죄악의 광풍을 맞아서 영혼이 파멸에 처해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중에 잉태되고 죄중에서 태어나고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는 동안에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한 인생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죄악의 광풍에 휘말아쳐 모든 영혼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결국 지옥으로 떨어질수밖에 없습니다.
이사야 38장 15절에는 “내 영혼의 고통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신토록 방황”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죄악의 광풍이 영혼들을 파멸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이 죄악의 광풍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줄수 있겠습니까? 저주의 광풍이 삶을 황폐케 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자손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모두 다 저주의 광풍에 휩쓸려 가는 초개와 같은 것입니다.
잠언서 1장 27절에 “너희의 두려움이 광풍 같이 임하겠고 너희의 재앙이 폭풍 같이 이르겠고 너희에게 근심과 슬픔이 임하리니”
두려움과 재앙과 근심과 슬픔이 광풍과 폭풍처럼 우리를 휘몰아쳐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이 광풍과 폭풍에 시달리고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죽음의 광풍이 절망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살다가 병들고 죽게 되는 것입니다. 늙지 않고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태어난 사람은 늙고 병들고 죽습니다. 죽음의 광풍에 아무도 피해나갈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에스겔 18장 4절은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고 말했으며
로마서 7장 24절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바울은 탄식한 것입니다.
아무도 이 죄악의 광풍, 저주의 광풍, 죽음의 광풍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갈릴리 호수를 건너던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서 파멸직전에 이른 것처럼 오늘 모든 사람들은 눈앞에 파멸을 보고 사는 것입니다. 죄악의 풍랑에 시달리고 저주의 광풍에 휘몰아치고 죽음의 광풍으로 파멸을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누가 이 비참한 광풍과 풍랑에서 우리를 건져줄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 그늘 밑에 들어가면 삶의 광풍을 피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광풍을 피하는 곳이 될 것이라고 성경에 말한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13절로 14절에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도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 모든 광풍을 홀로 맞으신 것입니다. 우리 인류 공동체의 대표자로써 인류를 위해서 십자가에 올라가서 죄악의 광풍을 맞아 몸찢고 피흘리셨으며 저주의 광풍을 맞아 나무에 매달렸었으며 죽음의 광풍을 맞아 무덤에 들어가서 사흘동안 계셨습니다. 주님은 죄악과 저주와 죽음을 한몸에 걸머지시고 몸찢고 피흘려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사 승리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이 광풍을 잠재워 버리고 만 것입니다. 갈릴리 풍랑을 잠재우신 예수님은 인류에게 다가온 삼대재앙의 광풍을 영원히 잠재워 버리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다 이루었다”고 외치실 때 광풍을 요란한 소리를 그치고 잠잠해져 버리고 만것입니다. 우리가 찬송가 471장을 볼지라도
‘십자가 그늘 밑에 나 쉬기 원하네 저 햇빛 심히 쬐이고 또 짐이 무거워
이 광야 같은 세상에 늘 방황할 때에 주 십자가의 그늘에 내 쉴 곳 찾았네’
십자가의 그늘 밑에 들어오면 광풍은 잠들고 휴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 없이 인간은 광풍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어느 곳에 가나 풍랑에 시달리고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 인생의 실상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사람들을 향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광풍에서 피하는 피난처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의 피난처요, 요새요, 의뢰하는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새사냥꾼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져 주시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이 우리의 광풍을 피하는 곳입니다. 바로 예수님이라는 인격적인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광풍을 피하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만나면 우리의 생애속에 다가오는 광풍은 모두 다 잠재워져 버리고 말 것인 것입니다.
2. 폭우를 가리는 곳
둘째로, 이 예수 그리스도를 폭우를 가리우는 곳이 될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폭우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인 것입니다. 이는 바로 하나님의 심판을 뜻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하늘에서 땅에 쏟아지는 것입니다. 여름 폭우가 가져오는 홍수는 삶의 터전을 휩쓸어가지 않습니까? 불은 타고나면 젓가락, 숟가락이라고 남지만 홍수가 휩쓸어간 곳에는 젓가락, 숟가락도 남지 않습니다. 말갛게 쓸어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시편 90편 5절에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라고 인간을 탄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폭우가 내려오면 우리는 그 폭우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올해 여름 우리나라는 태풍 에위니아가 강원도를 강타해서 수재민이 약 1천 500여명, 1조 1천 500억 원의 피해를 냈습니다. 태풍 매미 역시 1천 200명의 사상자와 5천억 원의 재산피해를 입혔습니다. 이러한 일은 한국 뿐만이 아닌 것입니다. 지구촌이 이러한 폭우와 자연재해로 몸살을 앓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올해 4월 헝가리 다뉴브강 수위가 120년 만에 최고를 기록하는 등 중동부 유럽은 홍수로 한바탕 물난리를 겪었습니다. 5월에는 인도네시아에 강진과 함께 쓰나미가 덮쳐 5천 여명이 숨지고 약 20만 명이 삶의 터전을 잃었습니다. 필리핀에서는 태풍 두리안이 강타해서 약 1천 명이 사망, 실종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폭우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로 하나님의 심판을 뜻합니다. 여름 폭우가 가져오는 홍수는 이처럼 우리 삶의 터전을 휩쓸어가듯이 하나님의 심판이 하늘에서 내려오면 인간은 송두리째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보십시오. 소돔과 고모라가 음란하고 부패하고 방탕하여 하나님을 거역할 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유황비를 비와같이 쏟아지게 해서 파멸시켜 버리고 만것입니다.
유다서 1장 7절에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 6절에도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하나님의 심판의 불이 소돔과 고모라를 멸한 것처럼 이는 장차 다가올 하나님의 영혼의 심판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장차 주를 거역하는 사람들, 거역하는 세상에 정치, 경제, 교육, 문화, 군사, 산업 모든 전반에 걸쳐 불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땅이 열렬한 불에 녹을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오직 주를 경외하고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의에 거하는 새하늘과 새땅이 예비되어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낡은 하늘, 낡은 땅 위에서 하나님을 반역하고 거역하고 사는 사람들은 폭우가 내려오듯이 하나님의 심판의 불이 내려와서 이 땅은 모두 다 파멸되고 말 것인 것입니다.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초개와 같이 불타고 말 것인 것입니다. 세계 역사는 종말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으며 인간은 파멸과 심판의 불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피하지 아니하면 이 폭우를 가리울 자가 없는 것입니다. 어떠한 인간의 종교도 수양과 도덕도 폭우를 가리울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폭우를 가리울 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는 것입니다. 옛날 말에도 순천 자는 흥하고 역천자는 망한다는 역사적 교훈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한 남북 이스라엘이나 독일이나 일본이나 구소련이나 북한의 심판을 우리는 눈에 보고 있는 것입니다.
신명기 5장 29절에 “그들이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순종해서 복받기를 하나님이 원하시지 하나님을 거역해서 심판받기를 하나님은 원하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말라기 4장 1절에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라
순천자는 흥하고 역천자는 망하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 심판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짊어진 것입니다. 십자가 상에 쏟아진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예수님 홀로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 온 인류에게 쏟아지는 하나님의 분노가 예수 그리스도 인류의 공동체의 대표로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에게 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정사정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심판한 것입니다. 처절한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을 당한 예수님은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몸부림을 쳤습니다. 예수님이 당한 고난은 우리 상상으로 측량할 수 없습니다. 영원히 깨달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한 고난의 높이와 깊이와 그 넓이는 인류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일 것입니다. 그를 통해서 주님은 하나님이 쏟아지는 심판의 폭우를 다 담당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우리를 가리우는 큰 우산이 되셔서 예수님 안에 들어가면 하나님의 심판의 폭우는 가리워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밖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의 폭우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살동안에도 다가오지만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서 이 다가오는 심판을 어떠한 사람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마지막 지옥의 불구덩이 가운데 쏟아지는 불길같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4절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고 말한 것입니다.
5절에 보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도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야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폭우가 쏟아질 때 예수님은 우리 대신해서 이 모든 것을 다 담당하시고 이를 다 잠재우고 말았던 것입니다. 십자가 밑에 나와야 심판의 폭우를 피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이외에는 우리가 피할 곳이 없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피난처가 되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야 말로 우리의 피난처요, 우리의 요새요, 의뢰하는 처소가 될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과 피난처와 희망과 기쁨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7절에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십자가 밑에 들어와서 구원받기를 하나님은 원하셔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얼마나 철저히 우리의 죄를 다 담당하셨든지 우리는 죄가 없는 의로운 사람이 되고 하나님처럼 의롭게 될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지금 용서한 것이 아니라 영원히 처치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영원한 제사를 통해서 주님은 우리의 죄를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청산해 버리고 만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우리의 죄가 영원히 용서를 받고 영원히 의롭다 함을 얻고 영원히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영원한 의를 선물로 받았으니 상상을 초월한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진노의 폭우를 가려 주시고 우리에게 용서와 의와 영원한 영광을 허락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되는 것입니다.
3. 마른 땅에 냇물
이 땅은 여러분, 마른땅과 같은 삶이 되어가고 마는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는 마른 땅에 냇물 같은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은 점점 사막화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지구는 점점 사막화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중국은 전국토의 18%가 사막화가 되었습니다. 베이징은 베이징 북쪽에 있는 사막이 계속 남진하고 있어 2,30년 후면 베이징이 모래에 파묻힐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 2008년 올림픽에 대비해 베이징시 당국은 녹지대 건설 등을 통해 사막화를 막으려고 애를 쓰고 있지만 매년 봄마다 30만톤 가량의 모래와 흑먼지가 날라와 올림픽 개최의 성공여부가 황사에 달렸다는 전망이 나올 정도로 사막화로 인한 황사 문제는 심각합니다. 또 고비사막의 모래와 소금기가 바람에 실려 중국과 한국 심지어는 미국 서부해안까지 영향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막화는 전세계를 급속하게 확산하며 메마른 지형과 기후를 확대시켜 사람이 살만한 터전을 더욱 줄이고 환경적으로 큰 문제를 일으키며 세계적인 위기를 안겨주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사막을 막을 수 있는 것은 물이 필요합니다. 물이 없으면 점점 세계는 사막화가 되고 삶의 터전은 상실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물이 지구상에서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전쟁이나 에이즈보다 더 무서운 것이 바로 물 부족 재앙인 것입니다. 유엔개발계획(UNDP)은 세계 인구 6명 중 1명이 깨끗한 물을 공급 받지 못하고 있으며, "21세기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물로 인하여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에 요사이 우리 뉴스에도 계속 나오는 것은 지하수를, 못마실 물을 개발해서 공공기관이나 학생에게 공급한 사건을 볼수 있는 것입니다. 물의 문제는 앞으로도 큰 문제인 것입니다. 유엔개발계획에 의하면 전 세계적으로 깨끗한 물을 얻지 못해 죽어가는 어린이가 에이즈로 사망하는 어린이보다 5배나 많다는 충격적인 보고를 내놓았습니다. 과거 '세계의 화약고'라 불리던 중동지역이 이제는 '물 전쟁의 화약고'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요르단 강의 수자원을 놓고 매일 물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최근 수십 만 명의 희생자를 낸 수단의 다르푸르 대학살도 물 부족이 한 원인이었습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어서 우리나라도 역시 물 부족이 심각하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이 세상은 이처럼 사막화 되어 가고 사막화를 막을 수 있는 물이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인간 삶을 상징적으로 보아주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이 사막화 되어 가는 것은 마른땅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고 우리의 생활 전반이 점점 마른땅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막화 되어가는 인심, 위로가 없는 인심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절로 5절에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사막화 되어가는 것입니다. 사람은 심령이 목말라 있습니다만 그 목마름을 축일 도리가 없습니다. 지구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마음이 사막화 되어가고 강팍하고 무서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요사이는 아무도 믿을 수가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갑자기 강도로 변하고 살인자로 변하고 사기꾼으로 변할지 알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이 사막화 되어가는 이 마음을 누가 축여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기를 목마른 자는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말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 14절에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7장 38절에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마음의 사막화를 물덴 동산으로 만들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 나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마음속에 들어오면 원튼 원치 않든 생불의 근원이 되어서 우리의 사막화 되는 마음을 축여주고 우리 마음속에 변화를 갖다주는 것입니다. 어떠한 것으로도 우리를 변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문학 작품으로 우리 마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영화를 가지고 음악을 가지고 댄스를 가지고 우리 마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오늘날 예술도 점점 사악한 세상을 반영하는 예술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생수의 강이 넘치게 할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을 모시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는 마른땅에 샘물 같을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내 마음이 말라빠지고 살 희망이 없어지고 기쁨도 사라지고 소망도 사라지고 처절한 좌절과 절망이 있을 때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고 그 앞에 무릎을 꿇으면 서서히 그 마른 땅에 물이 솟아오르기 시작하고 마른땅이 물덴 동산과 같이 변화 되어서 치료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그와 같이 주님께서 우리를 오늘날 초청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의 인생에 이와 같이 문제의 해답이 되신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4.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넷째, 크리스마스에 다가온 그 아들 그 어린이는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을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막에서 방황하는 사람은 바위 그늘이 생명의 처소가 됩니다. 사막에는 나무가 없지 않습니까? 햇빛이 내려 쪼입니다. 엄청나게 햇빛이 내려 쪼이므로 사막에 있는 사람들은 수분이 증발되어서 메말라 죽어가는 것입니다. 전쟁 때 사막에서 길을 잃은 군인들이 메말라서 미이라가 같이 되어 죽은 사건이 기록이 나는 것을 종종 보았습니다. 사막에는 나무 그늘이 없습니다. 햇빛이 내려 쪼이고 땅은 화로와 같이 활활 타오릅니다. 그곳에 바위가 있으면 바위 그늘 밑에 들어가면 즉시로 시원합니다. 습기가 없는 곳이기 때문에 바위 그늘에 들어가면 내려 쬐이는 태양이 그냥 사라지고 그렇게 서늘하고 좋을 수가 없습니다. 또 바위 그늘이 있으면 그 밑에 바위 틈 사이에서 물도 솟아 나올 수 있고 바위 그늘 속에 풀도 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른 땅에서 곤비한 땅에서 바위 그늘을 찾는다는 것은 생명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 사는 우리의 삶이 곤비한 땅에서 허덕이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소년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며 장정이라도 쓰러진다고 말한 것입니다. 살인, 강도, 강간, 비인간적인 행동, 가정파탄, 자살 이러한 것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문이나 라디오나 텔레비전이나 뉴스에 보면 이러한 사건을 이제 너무나 빈번하게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가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정도로 곤비한 인생길이 되고 만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16절에 보면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세상에 탐욕과 정욕이 있는 이상 사람들은 비인간화 되고 악마화 되는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욕심이 정상적으로 욕심을 채울 수 없기 때문에 삐뚫어진 것이 바로 죄인 것입니다.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습니다. 죄가 자라면 어떠한 무서운 일도 행하기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몇 년 전에 대학교수가 돈 많은 아버지를 죽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시 이 사건은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 때 이런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 떠돌았습니다. 어느 중년을 넘긴 사업가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데, "자네 요즘 별 일 없는가?" "아직은 별 일 없다네, 자네는?" "나도 아직까지는 별 일 없지만 숨죽이고 지켜보고 있다네" "나도 마찬가지야, 밤만 되면 애들이 방에 들어올까봐 무서워서 방문을 꼭꼭 닫고 잔다네."
자 부모가 자식을 믿을 수 없는 세상이 되었으니 탐욕이 들어오면 자식도 강도로 변하고 살인자로 변하고 남편과 아내도 보험금 들어놓고 남편 죽이고, 아내 죽이는 이런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얼마나 세상이 곤비한지 아무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세상은 살인, 강도, 강간 뿐 아니라 심지어 이렇게 자식이 부모를 살해하는 일이 일어날 정도로 인간은 악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무엇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 십자가 밑에 들어오면 새힘을 얻습니다. 곤비한 땅에 바위 그늘 같아서 예수님께 달려 들어오면 쉼을 얻게 되고 변화가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달음박질해도 피곤치 않고 걸어가도 곤비치 않을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40장 31절에 “오직 야훼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세상의 삶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달음박질 뛰며 숨이 턱에 닿도록 뛰어야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곤비해 지지요. 피곤해지지요. 그래도 주님을 앙망하면 새 힘이 자꾸 솟아올라 오르고 새 힘이 주어져서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가듯이 새로워지고 또 새로워지고 또 새로워지고 또 새로워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워져야 되는 것입니다. 어제 힘을 가지고 오늘 살 수 없고 오늘 힘을 가지고 내일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매일같이 새로운 생기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 생기가 어디서 옵니까? 예수를 구주로 모시면 죽었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생기를 불어 넣어 주어서 날개치고 올라가는 독수리같이 우리를 새롭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11절에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한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솔제니친은 구소련의 작가로써 당시의 체제를 강력히 비판하다가 반역자로 몰려 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그는 시베리아감옥에서 특별 범죄자로 구분되어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고 강제노역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설상가상으로 암에 걸렸습니다. 그 혹독한 고역을 하고 비위생적인 감옥에 있으면서 암까지 걸렸으니 그는 살 희망을 잃어 버렸습니다. 좌절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정신력과 신념을 모두 잃어버리고 인생이 탈진할 정도로 고생하는 솔제니친에게 한 사람이 다가오더니만 그 사람은 아무 말도 안하고 솔제니친을 가만히 보더니만 감옥 밖에서 십자가를 발로써 그렸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지나가 버렸습니다. 사람인지 천사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은 바닥에 십자가를 그어주며 그것을 바라보라고 한 후 사라졌는데 솔제니친이 그 사나이가 바닥에 그어준 십자가를 바라보는 순간 알지 못하는 힘이 마음속에 솟구쳐 오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완전히 인생을 버리고 탈진한 그에게 십자가를 바라보자 그 마음속에 십자가에 못박혀 자기 몸을 위해서 몸찢고 피흘려 죽어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마음속에 다가오면서 그리스도가 새로운 생기와 힘을 솔제니친이 마음속에 솟구치게 한 것입니다. 그는 그 후 암에서 나았습니다. 십자가를 생각하고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성경을 읽고 묵상하다가 암에서 고침을 받고 새 힘을 얻고 그는 시베리아에서 추방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미국으로 건너와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라는 소설로 당시 공산주의 사회의 비인간적인 생활을 폭로했고 그는 노벨문학상까지 탄 것입니다. 곤비한 땅에서 우리는 큰 바위 그늘인 예수님 십자가 밑에 들어오면 새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그늘 밑에 들어와야 우리가 참 힘을 얻을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광풍을 피하는 곳이 되고 폭우를 가리우는 곳이 되고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같이 되고 시냇물 같이 되어서 우리의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게 하는 위대한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결론>
오늘 인간은 구원과 은혜를 얻기 위하여 무엇을 행할까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구원과 은혜는 인간 행위가 아닌 만남을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 때 이 땅에 찾아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믿음으로 구원과 은혜를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깨닫고 믿는다는 것은 삶의 최고의 행복이요, 축복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마음 문을 활짝 열고 사람이 되어서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 우리 사람과 공동체가 되어서 우리의 모든 죄악을 짊어지시고 저주를 담당하시고 질병을 청산하시고 죽음을 이기신 그분은 우리에게 광풍을 피하는 피난처가 되시고 폭우를 가리우는 우산이 되어 주시고 마른땅에 냇물같이 되어 주시옵시고 곤비한 땅에 바위 그늘같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 안기면 우리는 새로운 인생이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우리가 인생에 새로움을 맛보고 체험하고 새로움 속에 살기를 원한다면 예수님을 만나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밖에는 우리를 새롭게 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축복과 호의를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 문을 열어 제켜 놓고 오늘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으로 다 나와서 하나님의 예비한 은총과 복을 누리게 되시기를 간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크리스마스 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보내 주셔서 인류공동체의 대표가 되게 하시고 나를 위해서 내가 대신해서 십자가를 짊어져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몸 찢고 피흘려 죽었다가 3일만에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이시여 광풍을 잠재워 버리셨습니다. 폭우를 가리워 버리셨습니다. 마른 땅에 냇물이 솟아 오리게 하셨습니다.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이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밖에는 귀한 분이 없습니다. 예수님 이외에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예수님 이외에 살길이 없습니다. 예수님 이외에 생수가 없습니다. 예수님 이외에 행복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외에 축복받을 곳이 없습니다. 예수님 이외에 천국 갈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예수님을 크리스마스에 보내주신 하나님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과 더불어 살고 예수님 안에서 항상 영광을 아버지께 돌리며 살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 아멘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크리스마스에 오신 아기’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이사야 9장 6절에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예언을 주님 오시기전 600년에서 700년 전에 이사야가 담대하게 예언을 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요, 모사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고 예언을 했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 중 너무나 놀라운 것은 한 아기 한 아들이 우리에게 태어났는데 그가 바로 만왕의 왕, 만주의 주,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 이 말을 믿어 주겠습니까? 하나님이 핏덩어리 어린 아기로 어머니 뱃속에 열 달 동안 자라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 아기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요, 평강의 왕이라고 했으니 인간의 상상을 완전히 초월한 하나님의 기적이 아니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기 그 아들이 우리에게는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우는 곳이 될것이고, 마른 땅의 냇물 같고,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이 되신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본론>
1. 광풍을 피하는 곳
첫째로, 크리스마스에 오신 그 아기 그 아들은 우리에게 광풍을 피하는 곳이 될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광풍이락 말하면 갈릴리바다에 풍파가 일어났던 것을 기억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더불어 배를 타시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시는 중에 큰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배가 침몰할 직전에 도달했습니다. 제자들은 아비규환의 절망에 처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아무리 노를 젓고 배를 바로 잡으려고 해도 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거대한 풍랑이었습니다. 그때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우시니 예수님이 일어나셔서 바람과 파도를 꾸짖으시니 즉시로 잠잠해지고 말았습니다.
마가복음 4장 39절에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이것 얼마나 놀라운 일인 것입니까? 자연이 주님의 명령에 순종한 놀라운 사건인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상징적으로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 인생의 광풍을 잠잠케 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아담이 에덴에서 타락한 이후로 우리에게 삼대재앙의 광풍을 몰고 온 것입니다. 인간은 어머니 뱃속에 잉태될 때부터 재앙의 세계 속에 잉태된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벌써 삼대재앙의 광풍에 휘말려 태어난 것입니다. 인간은 죄악의 광풍을 맞아서 영혼이 파멸에 처해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중에 잉태되고 죄중에서 태어나고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는 동안에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한 인생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죄악의 광풍에 휘말아쳐 모든 영혼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결국 지옥으로 떨어질수밖에 없습니다.
이사야 38장 15절에는 “내 영혼의 고통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신토록 방황”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죄악의 광풍이 영혼들을 파멸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이 죄악의 광풍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줄수 있겠습니까? 저주의 광풍이 삶을 황폐케 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자손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모두 다 저주의 광풍에 휩쓸려 가는 초개와 같은 것입니다.
잠언서 1장 27절에 “너희의 두려움이 광풍 같이 임하겠고 너희의 재앙이 폭풍 같이 이르겠고 너희에게 근심과 슬픔이 임하리니”
두려움과 재앙과 근심과 슬픔이 광풍과 폭풍처럼 우리를 휘몰아쳐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이 광풍과 폭풍에 시달리고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죽음의 광풍이 절망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살다가 병들고 죽게 되는 것입니다. 늙지 않고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태어난 사람은 늙고 병들고 죽습니다. 죽음의 광풍에 아무도 피해나갈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에스겔 18장 4절은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고 말했으며
로마서 7장 24절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바울은 탄식한 것입니다.
아무도 이 죄악의 광풍, 저주의 광풍, 죽음의 광풍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갈릴리 호수를 건너던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서 파멸직전에 이른 것처럼 오늘 모든 사람들은 눈앞에 파멸을 보고 사는 것입니다. 죄악의 풍랑에 시달리고 저주의 광풍에 휘몰아치고 죽음의 광풍으로 파멸을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누가 이 비참한 광풍과 풍랑에서 우리를 건져줄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 그늘 밑에 들어가면 삶의 광풍을 피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광풍을 피하는 곳이 될 것이라고 성경에 말한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13절로 14절에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도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 모든 광풍을 홀로 맞으신 것입니다. 우리 인류 공동체의 대표자로써 인류를 위해서 십자가에 올라가서 죄악의 광풍을 맞아 몸찢고 피흘리셨으며 저주의 광풍을 맞아 나무에 매달렸었으며 죽음의 광풍을 맞아 무덤에 들어가서 사흘동안 계셨습니다. 주님은 죄악과 저주와 죽음을 한몸에 걸머지시고 몸찢고 피흘려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사 승리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이 광풍을 잠재워 버리고 만 것입니다. 갈릴리 풍랑을 잠재우신 예수님은 인류에게 다가온 삼대재앙의 광풍을 영원히 잠재워 버리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다 이루었다”고 외치실 때 광풍을 요란한 소리를 그치고 잠잠해져 버리고 만것입니다. 우리가 찬송가 471장을 볼지라도
‘십자가 그늘 밑에 나 쉬기 원하네 저 햇빛 심히 쬐이고 또 짐이 무거워
이 광야 같은 세상에 늘 방황할 때에 주 십자가의 그늘에 내 쉴 곳 찾았네’
십자가의 그늘 밑에 들어오면 광풍은 잠들고 휴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 없이 인간은 광풍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어느 곳에 가나 풍랑에 시달리고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 인생의 실상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사람들을 향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광풍에서 피하는 피난처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의 피난처요, 요새요, 의뢰하는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새사냥꾼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져 주시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이 우리의 광풍을 피하는 곳입니다. 바로 예수님이라는 인격적인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광풍을 피하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만나면 우리의 생애속에 다가오는 광풍은 모두 다 잠재워져 버리고 말 것인 것입니다.
2. 폭우를 가리는 곳
둘째로, 이 예수 그리스도를 폭우를 가리우는 곳이 될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폭우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인 것입니다. 이는 바로 하나님의 심판을 뜻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하늘에서 땅에 쏟아지는 것입니다. 여름 폭우가 가져오는 홍수는 삶의 터전을 휩쓸어가지 않습니까? 불은 타고나면 젓가락, 숟가락이라고 남지만 홍수가 휩쓸어간 곳에는 젓가락, 숟가락도 남지 않습니다. 말갛게 쓸어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시편 90편 5절에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라고 인간을 탄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폭우가 내려오면 우리는 그 폭우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올해 여름 우리나라는 태풍 에위니아가 강원도를 강타해서 수재민이 약 1천 500여명, 1조 1천 500억 원의 피해를 냈습니다. 태풍 매미 역시 1천 200명의 사상자와 5천억 원의 재산피해를 입혔습니다. 이러한 일은 한국 뿐만이 아닌 것입니다. 지구촌이 이러한 폭우와 자연재해로 몸살을 앓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올해 4월 헝가리 다뉴브강 수위가 120년 만에 최고를 기록하는 등 중동부 유럽은 홍수로 한바탕 물난리를 겪었습니다. 5월에는 인도네시아에 강진과 함께 쓰나미가 덮쳐 5천 여명이 숨지고 약 20만 명이 삶의 터전을 잃었습니다. 필리핀에서는 태풍 두리안이 강타해서 약 1천 명이 사망, 실종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폭우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로 하나님의 심판을 뜻합니다. 여름 폭우가 가져오는 홍수는 이처럼 우리 삶의 터전을 휩쓸어가듯이 하나님의 심판이 하늘에서 내려오면 인간은 송두리째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보십시오. 소돔과 고모라가 음란하고 부패하고 방탕하여 하나님을 거역할 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유황비를 비와같이 쏟아지게 해서 파멸시켜 버리고 만것입니다.
유다서 1장 7절에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 6절에도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하나님의 심판의 불이 소돔과 고모라를 멸한 것처럼 이는 장차 다가올 하나님의 영혼의 심판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장차 주를 거역하는 사람들, 거역하는 세상에 정치, 경제, 교육, 문화, 군사, 산업 모든 전반에 걸쳐 불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땅이 열렬한 불에 녹을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오직 주를 경외하고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의에 거하는 새하늘과 새땅이 예비되어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낡은 하늘, 낡은 땅 위에서 하나님을 반역하고 거역하고 사는 사람들은 폭우가 내려오듯이 하나님의 심판의 불이 내려와서 이 땅은 모두 다 파멸되고 말 것인 것입니다.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초개와 같이 불타고 말 것인 것입니다. 세계 역사는 종말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으며 인간은 파멸과 심판의 불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피하지 아니하면 이 폭우를 가리울 자가 없는 것입니다. 어떠한 인간의 종교도 수양과 도덕도 폭우를 가리울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폭우를 가리울 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는 것입니다. 옛날 말에도 순천 자는 흥하고 역천자는 망한다는 역사적 교훈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한 남북 이스라엘이나 독일이나 일본이나 구소련이나 북한의 심판을 우리는 눈에 보고 있는 것입니다.
신명기 5장 29절에 “그들이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순종해서 복받기를 하나님이 원하시지 하나님을 거역해서 심판받기를 하나님은 원하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말라기 4장 1절에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라
순천자는 흥하고 역천자는 망하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 심판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짊어진 것입니다. 십자가 상에 쏟아진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예수님 홀로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 온 인류에게 쏟아지는 하나님의 분노가 예수 그리스도 인류의 공동체의 대표로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에게 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정사정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심판한 것입니다. 처절한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을 당한 예수님은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몸부림을 쳤습니다. 예수님이 당한 고난은 우리 상상으로 측량할 수 없습니다. 영원히 깨달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한 고난의 높이와 깊이와 그 넓이는 인류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일 것입니다. 그를 통해서 주님은 하나님이 쏟아지는 심판의 폭우를 다 담당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우리를 가리우는 큰 우산이 되셔서 예수님 안에 들어가면 하나님의 심판의 폭우는 가리워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밖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의 폭우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살동안에도 다가오지만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서 이 다가오는 심판을 어떠한 사람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마지막 지옥의 불구덩이 가운데 쏟아지는 불길같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4절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고 말한 것입니다.
5절에 보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도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야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폭우가 쏟아질 때 예수님은 우리 대신해서 이 모든 것을 다 담당하시고 이를 다 잠재우고 말았던 것입니다. 십자가 밑에 나와야 심판의 폭우를 피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이외에는 우리가 피할 곳이 없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피난처가 되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야 말로 우리의 피난처요, 우리의 요새요, 의뢰하는 처소가 될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과 피난처와 희망과 기쁨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7절에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십자가 밑에 들어와서 구원받기를 하나님은 원하셔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얼마나 철저히 우리의 죄를 다 담당하셨든지 우리는 죄가 없는 의로운 사람이 되고 하나님처럼 의롭게 될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지금 용서한 것이 아니라 영원히 처치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영원한 제사를 통해서 주님은 우리의 죄를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청산해 버리고 만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우리의 죄가 영원히 용서를 받고 영원히 의롭다 함을 얻고 영원히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영원한 의를 선물로 받았으니 상상을 초월한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진노의 폭우를 가려 주시고 우리에게 용서와 의와 영원한 영광을 허락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되는 것입니다.
3. 마른 땅에 냇물
이 땅은 여러분, 마른땅과 같은 삶이 되어가고 마는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는 마른 땅에 냇물 같은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은 점점 사막화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지구는 점점 사막화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중국은 전국토의 18%가 사막화가 되었습니다. 베이징은 베이징 북쪽에 있는 사막이 계속 남진하고 있어 2,30년 후면 베이징이 모래에 파묻힐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 2008년 올림픽에 대비해 베이징시 당국은 녹지대 건설 등을 통해 사막화를 막으려고 애를 쓰고 있지만 매년 봄마다 30만톤 가량의 모래와 흑먼지가 날라와 올림픽 개최의 성공여부가 황사에 달렸다는 전망이 나올 정도로 사막화로 인한 황사 문제는 심각합니다. 또 고비사막의 모래와 소금기가 바람에 실려 중국과 한국 심지어는 미국 서부해안까지 영향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막화는 전세계를 급속하게 확산하며 메마른 지형과 기후를 확대시켜 사람이 살만한 터전을 더욱 줄이고 환경적으로 큰 문제를 일으키며 세계적인 위기를 안겨주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사막을 막을 수 있는 것은 물이 필요합니다. 물이 없으면 점점 세계는 사막화가 되고 삶의 터전은 상실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물이 지구상에서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전쟁이나 에이즈보다 더 무서운 것이 바로 물 부족 재앙인 것입니다. 유엔개발계획(UNDP)은 세계 인구 6명 중 1명이 깨끗한 물을 공급 받지 못하고 있으며, "21세기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물로 인하여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에 요사이 우리 뉴스에도 계속 나오는 것은 지하수를, 못마실 물을 개발해서 공공기관이나 학생에게 공급한 사건을 볼수 있는 것입니다. 물의 문제는 앞으로도 큰 문제인 것입니다. 유엔개발계획에 의하면 전 세계적으로 깨끗한 물을 얻지 못해 죽어가는 어린이가 에이즈로 사망하는 어린이보다 5배나 많다는 충격적인 보고를 내놓았습니다. 과거 '세계의 화약고'라 불리던 중동지역이 이제는 '물 전쟁의 화약고'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요르단 강의 수자원을 놓고 매일 물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최근 수십 만 명의 희생자를 낸 수단의 다르푸르 대학살도 물 부족이 한 원인이었습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어서 우리나라도 역시 물 부족이 심각하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이 세상은 이처럼 사막화 되어 가고 사막화를 막을 수 있는 물이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인간 삶을 상징적으로 보아주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이 사막화 되어 가는 것은 마른땅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고 우리의 생활 전반이 점점 마른땅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막화 되어가는 인심, 위로가 없는 인심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절로 5절에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사막화 되어가는 것입니다. 사람은 심령이 목말라 있습니다만 그 목마름을 축일 도리가 없습니다. 지구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마음이 사막화 되어가고 강팍하고 무서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요사이는 아무도 믿을 수가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갑자기 강도로 변하고 살인자로 변하고 사기꾼으로 변할지 알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이 사막화 되어가는 이 마음을 누가 축여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기를 목마른 자는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말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 14절에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7장 38절에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마음의 사막화를 물덴 동산으로 만들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 나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마음속에 들어오면 원튼 원치 않든 생불의 근원이 되어서 우리의 사막화 되는 마음을 축여주고 우리 마음속에 변화를 갖다주는 것입니다. 어떠한 것으로도 우리를 변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문학 작품으로 우리 마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영화를 가지고 음악을 가지고 댄스를 가지고 우리 마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오늘날 예술도 점점 사악한 세상을 반영하는 예술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생수의 강이 넘치게 할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을 모시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는 마른땅에 샘물 같을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내 마음이 말라빠지고 살 희망이 없어지고 기쁨도 사라지고 소망도 사라지고 처절한 좌절과 절망이 있을 때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고 그 앞에 무릎을 꿇으면 서서히 그 마른 땅에 물이 솟아오르기 시작하고 마른땅이 물덴 동산과 같이 변화 되어서 치료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그와 같이 주님께서 우리를 오늘날 초청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의 인생에 이와 같이 문제의 해답이 되신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4.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넷째, 크리스마스에 다가온 그 아들 그 어린이는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을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막에서 방황하는 사람은 바위 그늘이 생명의 처소가 됩니다. 사막에는 나무가 없지 않습니까? 햇빛이 내려 쪼입니다. 엄청나게 햇빛이 내려 쪼이므로 사막에 있는 사람들은 수분이 증발되어서 메말라 죽어가는 것입니다. 전쟁 때 사막에서 길을 잃은 군인들이 메말라서 미이라가 같이 되어 죽은 사건이 기록이 나는 것을 종종 보았습니다. 사막에는 나무 그늘이 없습니다. 햇빛이 내려 쪼이고 땅은 화로와 같이 활활 타오릅니다. 그곳에 바위가 있으면 바위 그늘 밑에 들어가면 즉시로 시원합니다. 습기가 없는 곳이기 때문에 바위 그늘에 들어가면 내려 쬐이는 태양이 그냥 사라지고 그렇게 서늘하고 좋을 수가 없습니다. 또 바위 그늘이 있으면 그 밑에 바위 틈 사이에서 물도 솟아 나올 수 있고 바위 그늘 속에 풀도 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른 땅에서 곤비한 땅에서 바위 그늘을 찾는다는 것은 생명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 사는 우리의 삶이 곤비한 땅에서 허덕이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소년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며 장정이라도 쓰러진다고 말한 것입니다. 살인, 강도, 강간, 비인간적인 행동, 가정파탄, 자살 이러한 것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문이나 라디오나 텔레비전이나 뉴스에 보면 이러한 사건을 이제 너무나 빈번하게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가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정도로 곤비한 인생길이 되고 만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16절에 보면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세상에 탐욕과 정욕이 있는 이상 사람들은 비인간화 되고 악마화 되는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욕심이 정상적으로 욕심을 채울 수 없기 때문에 삐뚫어진 것이 바로 죄인 것입니다.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습니다. 죄가 자라면 어떠한 무서운 일도 행하기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몇 년 전에 대학교수가 돈 많은 아버지를 죽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시 이 사건은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 때 이런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 떠돌았습니다. 어느 중년을 넘긴 사업가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데, "자네 요즘 별 일 없는가?" "아직은 별 일 없다네, 자네는?" "나도 아직까지는 별 일 없지만 숨죽이고 지켜보고 있다네" "나도 마찬가지야, 밤만 되면 애들이 방에 들어올까봐 무서워서 방문을 꼭꼭 닫고 잔다네."
자 부모가 자식을 믿을 수 없는 세상이 되었으니 탐욕이 들어오면 자식도 강도로 변하고 살인자로 변하고 남편과 아내도 보험금 들어놓고 남편 죽이고, 아내 죽이는 이런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얼마나 세상이 곤비한지 아무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세상은 살인, 강도, 강간 뿐 아니라 심지어 이렇게 자식이 부모를 살해하는 일이 일어날 정도로 인간은 악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무엇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 십자가 밑에 들어오면 새힘을 얻습니다. 곤비한 땅에 바위 그늘 같아서 예수님께 달려 들어오면 쉼을 얻게 되고 변화가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달음박질해도 피곤치 않고 걸어가도 곤비치 않을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40장 31절에 “오직 야훼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세상의 삶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달음박질 뛰며 숨이 턱에 닿도록 뛰어야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곤비해 지지요. 피곤해지지요. 그래도 주님을 앙망하면 새 힘이 자꾸 솟아올라 오르고 새 힘이 주어져서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가듯이 새로워지고 또 새로워지고 또 새로워지고 또 새로워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워져야 되는 것입니다. 어제 힘을 가지고 오늘 살 수 없고 오늘 힘을 가지고 내일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매일같이 새로운 생기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 생기가 어디서 옵니까? 예수를 구주로 모시면 죽었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생기를 불어 넣어 주어서 날개치고 올라가는 독수리같이 우리를 새롭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11절에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한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솔제니친은 구소련의 작가로써 당시의 체제를 강력히 비판하다가 반역자로 몰려 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그는 시베리아감옥에서 특별 범죄자로 구분되어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고 강제노역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설상가상으로 암에 걸렸습니다. 그 혹독한 고역을 하고 비위생적인 감옥에 있으면서 암까지 걸렸으니 그는 살 희망을 잃어 버렸습니다. 좌절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정신력과 신념을 모두 잃어버리고 인생이 탈진할 정도로 고생하는 솔제니친에게 한 사람이 다가오더니만 그 사람은 아무 말도 안하고 솔제니친을 가만히 보더니만 감옥 밖에서 십자가를 발로써 그렸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지나가 버렸습니다. 사람인지 천사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은 바닥에 십자가를 그어주며 그것을 바라보라고 한 후 사라졌는데 솔제니친이 그 사나이가 바닥에 그어준 십자가를 바라보는 순간 알지 못하는 힘이 마음속에 솟구쳐 오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완전히 인생을 버리고 탈진한 그에게 십자가를 바라보자 그 마음속에 십자가에 못박혀 자기 몸을 위해서 몸찢고 피흘려 죽어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마음속에 다가오면서 그리스도가 새로운 생기와 힘을 솔제니친이 마음속에 솟구치게 한 것입니다. 그는 그 후 암에서 나았습니다. 십자가를 생각하고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성경을 읽고 묵상하다가 암에서 고침을 받고 새 힘을 얻고 그는 시베리아에서 추방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미국으로 건너와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라는 소설로 당시 공산주의 사회의 비인간적인 생활을 폭로했고 그는 노벨문학상까지 탄 것입니다. 곤비한 땅에서 우리는 큰 바위 그늘인 예수님 십자가 밑에 들어오면 새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그늘 밑에 들어와야 우리가 참 힘을 얻을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광풍을 피하는 곳이 되고 폭우를 가리우는 곳이 되고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같이 되고 시냇물 같이 되어서 우리의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게 하는 위대한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결론>
오늘 인간은 구원과 은혜를 얻기 위하여 무엇을 행할까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구원과 은혜는 인간 행위가 아닌 만남을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 때 이 땅에 찾아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믿음으로 구원과 은혜를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깨닫고 믿는다는 것은 삶의 최고의 행복이요, 축복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마음 문을 활짝 열고 사람이 되어서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 우리 사람과 공동체가 되어서 우리의 모든 죄악을 짊어지시고 저주를 담당하시고 질병을 청산하시고 죽음을 이기신 그분은 우리에게 광풍을 피하는 피난처가 되시고 폭우를 가리우는 우산이 되어 주시고 마른땅에 냇물같이 되어 주시옵시고 곤비한 땅에 바위 그늘같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 안기면 우리는 새로운 인생이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우리가 인생에 새로움을 맛보고 체험하고 새로움 속에 살기를 원한다면 예수님을 만나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밖에는 우리를 새롭게 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축복과 호의를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 문을 열어 제켜 놓고 오늘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으로 다 나와서 하나님의 예비한 은총과 복을 누리게 되시기를 간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크리스마스 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보내 주셔서 인류공동체의 대표가 되게 하시고 나를 위해서 내가 대신해서 십자가를 짊어져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몸 찢고 피흘려 죽었다가 3일만에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이시여 광풍을 잠재워 버리셨습니다. 폭우를 가리워 버리셨습니다. 마른 땅에 냇물이 솟아 오리게 하셨습니다.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이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밖에는 귀한 분이 없습니다. 예수님 이외에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예수님 이외에 살길이 없습니다. 예수님 이외에 생수가 없습니다. 예수님 이외에 행복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외에 축복받을 곳이 없습니다. 예수님 이외에 천국 갈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예수님을 크리스마스에 보내주신 하나님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과 더불어 살고 예수님 안에서 항상 영광을 아버지께 돌리며 살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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