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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5:11~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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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조용기 목사 |
참고 : | 2007년 1월 14일 주일설교 |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아! 하나님의 은혜로’이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 눅15:11~24에 탕자에 대한 비유를 설명했습니다. 한 농촌에 큰 농사를 짓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나무가 우거진 농장 수 만평이 그의 농장이었습니다. 집은 아름답고 그 주변에는 수려한 나무들이 많이 서있었습니다. 많은 일꾼들을 위해서 기숙사도 지었습니다. 짐승의 우리도 많았습니다. 일이 바뻤 습니다. 농사일이 잘되고 수입도 많았습니다. 이 사람은 두 아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건장하게 잘 자랐습니다. 공부도 잘했습니다. 아버지 일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 으로 도와서 굉장히 부자간에 좋은 관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갑자기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 나와서 “아버지 나도 이제 장성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농촌에서 농사일 하는 것이 몸서리가 납니다. 흙냄새가 맡기 싫습니다. 퇴비 냄새가 맡기 싫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저녁에 늦게 들어오는 생활이 이제는 염증이 났습니다. 나는 도시로 나가서 내 생활을 시작하겠습니다. 아버지, 법적으로 내게 줄 상속을 주십시오.” 유대인들은 장남에게 3분의 2의 재산을 상속으로 주고 차남에게는 3분의 1을 줍니다. “그 3분의 1을 아버지 내게 주십시오.” 아버지가 말렸습니다. “아직 너는 성년이 되지 못했다. 아직까지 재산을 상속받아 나갈 수 있는 처지에 있지 못하니 좀 더 기다려라. 세월이 흐르면 네가 장성하면 어련히 아버지가 주지 않겠느냐.” “아니오, 나는 기다릴 수 없습니다. 한시가 바쁩니다. 아버지 내게 속한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루 이틀 아니고 계속 간청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재산을 나누어서 둘째에게 주니까 그것을 다 처리해서 신속히 아버지의 그림자가 비취지 않는 먼 나라로 떠나가 버리고 만 것입니다. 거기에서 그는 돈이 있겠다, 허랑방탕하게 살았습니다. 돈을 쓰는 동안에 많은 친구들이 생기고, 많은 여성들이 그를 따라 다녔습니다. 그는 왕자처럼 생활했습니다. 그러나 돈이 항상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물 쓰듯이 돈을 쓰니 며칠간 계속 하겠습니까? 얼마 있지 아니하여 그 나라에 큰 기근이 다가왔습니다. 마치 우리나라에 왔던 IMF 같은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사람들은 직장을 잃어버리고 농토는 피폐화되고 먹고 살기가 힘들게 되자 이 사람도 돈이 다 떨어졌습니다. 자기의 친구들도 떠나고 여자들도 다 떠났습니다. 그렇게 자기를 왕처럼 대접하던 친구와 여자들이 얼굴을 돌려 버리고 한 푼의 돈도 빌려주지 않습니다. 그가 있는 주택에서 쫓겨났습니다. 먹고 살길이 없습니다. 호구지책의 대책을 세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직장을 구하려고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뛰어도 직장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겨우 얻은 직장이 농촌에서 나가 돼지를 기르는 회사에 직원으로 채용이 된 것입니다. 유대 나라에서 가장 천한 직업은 돼지를 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먹고 살자니까 별도리 있겠습니까? 돼지 치는 회사에 직원이 되어서 농촌으로 가서 돼지우리 속에서 돼지를 치는데 너무나 배가 고파서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먹으려고 해도 그것도 부족했습니다. 그러자 그 고통 중에 정신이 들었습니다. 생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내가 내 아버지 집에서 잘 먹고, 잘 입고, 잘사는 것은 당연지사고 여겼고, 아버지의 상속을 받아서 내가 독립하는 것도 당연지사로 여겼는데 이제 보니 그것이 아니었구나. 모든 것이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로써 내가 살았지 내가 당연지사로 내가 잘나서 살아 온 것은 아니었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 탕자의 비유 속에서 우리가 몇 가지 배워야 될 중대한 교훈이 있습니다.
<본론>
1. 율법 주의적 삶의 태도
탕자는 처음에는 율법적주의 적인 삶의 태도를 취했습니다.
‘모든 것이 당연지사다. 나는 이 집에 차남으로 태어났으니까 아버지가 먹여주고 입혀주고 돌보아줄 책임이 있다. 그것은 율법적으로 당연지사다. 그리고 나에게 아버지가 재산의 3분의 1을 주는 것은 율법적으로 당연지사다. 마땅히 그렇게 해야 될 일이다.’
조금도 거기에 대해서 은혜로 생각하지 않고 고맙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연지사를 내가 받았는데 내가 뭘 감사하고 고맙게 생각할일 있느냐. 아버지가 되었으니 날 먹여주고 입혀주고 돌보아 주고 나에게 재산 상속을 주어야 될 것이 아니냐. 율법주의자들은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는 자기중심으로 서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바로 정의요, 법이라고 생각하고 자기에게 어긋나면 다 법에 어긋나고 잘못 되었다고 비평하고 판단하는 것이 율법주의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생각하기는 이제 독립할 때가 왔으니 아버지 품을 떠나 먼 나라에 가서 아버지 없이 자기 스스로 사는 것이 당연하고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아버지에게 분깃을 달라고 해서 떠나고 만 것입니다. 율법주의는 교만하고 오만합니다. 이아들은 아버지 앞에 굉장히 교만하고 오만했습니다. 그동안 길러주신 아버지에게 감사하게 생각하지 아니했습니다. 당연지사로 생각했습니다. 돌보아주신 아버지의 은혜에 눈물을 흘리지 않았었습니다. ‘아버지가 할 일을 했는데 뭘 내가 아버지에게 구태어 고맙다고 머리를 조아릴 필요가 있느냐. 아버지가 나보다 더 잘해 주어야 될 것인데 더 이상 잘해주지 못했지 않느냐.’ 그런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자기제일주의입니다. 자기가 제일 잘났다고 생각했습니다. ‘나 같으면 아버지처럼 농촌에서 흙냄새 맡고 퇴비냄새 맡고 흙속에 파묻혀 살지 않겠다. 도시에 가서 호화롭게 살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는 마음에 교만했습니다. 아버지의 교훈을 듣지 않았습니다.
잠16:18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시 5: 5에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 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신다고 했었습니다.
사람들이 교만하면 자기 제일주의로 서고 자기 이외는 다 못나게 보이고 패배자, 실패자로 보이는 것입니다. 자기만이 성공자요, 자기만이 승리자요, 자기만이 지혜로운 자로 생각하는 착각 속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가 되면 타인에 대해서 몰인정하고 무관심합니다. 아버지에 대해서 이 둘째 아들은 몰인정했습니다. 그동안 아버지가 수고하고 고생하며 농사일을 해온 것을 불쌍히 여기고 길러준다고 고생한 것에 대한 감사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에게 대자고자로 내게 속한 나의 상속을 달라고 고함치고 몸부림쳤지 아버지에 대해서 사랑하는 마음도 없었고 동정하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농사일에 고생한 아버지의 등은 휘어졌고 머리는 희끗희끗 해졌고 얼굴에는 주름살이 졌습니다. 그것은 아들에게 아무 관심도 없었습니다. 나이를 먹으면 늙는 것 당연한일 아니냐. 나이를 먹었으니 머리가 희끗희끗한 것 당연한 일치지, 주름 살 이것 다 오는 거야. 율법주의 적으로 생각하고 거기에 대한 조그마한 정도 사랑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율법주의가 아니라 사랑과 동정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을 가지고 우리의 부모, 형제, 자매, 이웃을 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호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제사는 율법적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범죄 하면 범죄에 대한 대가로써 제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물 드리는 것보다 하나님은 우리가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동정하는 심정을 가지기를 원한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마9:13에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죄인과 함께 밥을 잡수시고 세리와 창녀들과 함께 교제한다는 것을 바리새교인들이 비난했을 때에 예수님이 말했습니다. “너는 성경에 하나님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아라. 하나님은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동정하는 것을 제사보다 더 원한다는 것을 너희가 알아라. 내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둘째 아들은 율법주의자가 되어서 아버지에 대해서 몰인정하고 무관심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조그마한 인정도 사랑도 자비도 갖지 않았습니다. 율법주의자인 것입니다. 감사할 줄 모릅니다. 율법주의자는 항상 불평만 말하고 감사할 줄 모릅니다. 자기 주위 환경에 감사할 것 많은데 감사할 것은 다 도외시하고 언제나 모자란 것, 안 되는 것, 부족한 것, 불편한 것만 들어서 불평, 원망, 탄식을 했습니다. 이 둘째는 농촌에서 사는 것이 불평, 불만이었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데 왜 아버지 마음대로 명령을 내려서 우리 순종해라. 아침 일찍 일어나야 되느냐. 왜 들로 나가서 농부들을 돌보아야 되고 감시해야 되고 소들을 먹이고 짐승들을 돌보아야 되느냐. 왜 과수원에 가서 전당을 해야 되고 거름을 주어야 되고 열매를 따야 되느냐. 왜 이런 고생을 해야 되느냐. 왜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을 해야 되느냐. 왜 이렇게 수고롭게 살아야 되느냐.” 따뜻한 옷 입고 뜨끈뜨끈한 밥 먹고 좋은 집에서 살고 좋은 환경에서 자라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언제나 율법적으로 자기에게 괴롭고 고통스럽고 편안하지 못한 것만 지적해서 불평하는 것입니다.
시106:25~27절에 보면 “그들의 장막에서 원망하며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아니 하였도다 이러므로 그가 그의 손을 들어 그들에게 맹세하기를 그들이 광야에 엎드러지게 하고 또 그들의 후손을 뭇 백성 중에 엎드러뜨리며 여러 나라로 흩어지게 하리라 하셨도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서 광야에서 편안하게 여행을 하면서 가나안 복지까지 나오게 된 것을 고맙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으로 쓴물이 달아지고 메추라기가 날라 오고 만나가 떨어지고 바위에 물이 나오는 것 기이하고 놀라운 일로 감사해야 될 것인데 오히려 그것을 원망과 불평과 탄식을 합니다. “이렇게 고통스러운 길을 왜 걷게 하느냐. 왜 광야를 지나게 하느냐. 왜 메추라기를 먹게 하고 만나를 먹게 하느냐. 질력이 나고 맛이 없다. 길이 험하고 고통스럽다.” 온갖 원망과 불평을 다 하므로 감사할 줄 모르는 율법주의자, 비평 론자, 평론자 들을 주님께서는 저버렸던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감사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2. 깨어지는 율법주의
그런데 이 율법주의가 깨어질 때가 오는 것입니다.
율법주의는 큰 시련과 고통을 당하면 박살이 나고 자기중심이 허물어지는 것입니다. 이 탕자의 세계 속에도 깨어질 날이 왔습니다. 탕자가 아버지 앞에서 자기가 마땅히 얻을 재산의 3분의 1을 가지고 “내 돈 내가 맘대로 쓰는데 누가 간섭할 것이냐. 내 돈 내 맘대로 쓸 수 있다.”고 율법주의 적으로 생각하고 비평과 평론과 교훈을 듣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아버지를 떠나 멀리 왔으니 아버지의 교훈을 듣지 않으니 평안했습니다. 그러나 기근이 다가와서 모든 사업이 다 무너지고 점포가 문을 닫고 직장을 잃어버리고 먹고 살길이 없고 호구지책을 할 도리가 없고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 젊은이가 갈 데가 없습니다. 직장을 찾아 하루 종일 허덕여도 직장을 얻을 수 없다가 기어이 얻은 것이 저 시골에 가서 돼지를 치는 직원이 되는 것입니다. 가장 천하고 낮은 직장을 얻은 것입니다.
여러분 잠11:28에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하려니와”라고 말했었습니다.
잠23:5절에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내어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
재물을 의지하면 언제고 그 재물이 독수리같이 날개를 치고 날라 갈 날이 오는 것입니다. 재물은 영원히 우리 곁에 있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써도 써도 끝없이 재물이 있을 줄 알고 재물을 쓰다가 기근이 다가오니 재물이 다 날라 가 버리고 빈손 들고 이제는 호구지책을 알 수없는 비참한 전경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포켓에 손을 넣어 봐도 딸랑거리는 돈도 없습니다. 은행에 아무런 구좌도 남은 것이 없습니다. 집도 쫓겨났습니다. 입은 옷도 다 낡아졌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먹을 밥이 없습니다. 그는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시골에 가서 돼지농장에 들어가서 돼지를 치는데 돼지 쥐엄 열매를 먹으려고 해도 충분히 주지 않습니다. 그는 거기에서 생각하기를 ‘야!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당연지사로 알았는데 당연지사가 아니구나. 아버지가 우리를 먹이고 입히고 기르고 돌보아 준 것은 아버지로써 마땅히 할 당연지사요, 내가 받을 것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구나. 밥 먹는 것이 이렇게 힘든 줄 몰랐다. 옷 입는 것이 이렇게 힘든 줄 몰랐다. 잠자리를 얻는 것이 이렇게 힘든 줄 몰랐다. 옛날에 아버지 집에 있을 때는 먹고 마시고 옷 입고 자고 깨고 사는 것은 당연지사로 여겼다. 그것 가지고 내가 감사하지 않았는데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고통이 다가오자 비로소 눈에 비늘이 떨어지고 율법주의가 떠나가고 아버지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친아버지가 베풀어준 은혜와 사랑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당연지사가 아닌 인생을 그는 깨닫게 된 것입니다. 최하로 인생이 낮아지자 비로소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삶이 은총과 축복으로 살아왔지 자기가 잘나서 자기가 수고해서 자기 능력으로 자기의 수단과 방법으로 살아온 인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의 글을 읽어 보았는데 한참 잘나가는 인생이었습니다. 최고학부를 나오고 좋은 직장에서 봉급도 많이 받고 모든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 가족들 가운데도 우상처럼 되었는데 그만 암에 걸렸습니다. 병원에서 진찰하기를 6개월 이상 못산다는 진찰이 생겼습니다. 그는 모든 것이 캄캄했습니다. 좌절과 절망에 처했습니다. 그러자 인생을 다시보기 시작했습니다. 자기는 자기가 일류대학을 나오고 일류직장에서 높은 월급을 받고 모든 사람들이 선망의 대상이 되고 온 가족 가운데도 우상처럼 존경을 받는 것이 당연지사로 알았습니다. ‘인생이 마땅히 그런 것 아니냐. 내가 잘났으니까 내 잘난 대가로써 이렇게 잘사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는데 암이 걸려 6개월 주어진 인생을 얻게 되자 이것이 당연지사가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인생이란 하나님이 천재이루로 주신 선물이구나. 하늘이 저렇게 아름다운 것을 그는 몰랐습니다. 땅에 서있다는 이 자체가 은혜란 것을 몰랐습니다. 공기를 숨 쉬는데 이 달콤한 공기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고 내 아내와 자녀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 것을 그전까지는 몰랐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난 다음에 이제 돌이켜 보니 하늘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요, 땅에 서있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요, 숨 쉬는 공기가 얼마나 달콤한지 죽기 전에 한번이라도 더 숨 쉬어 보겠다고 숨을 깊이 들이켜 쉬고 아내 사랑하는 자녀들이 주변에서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요, 당연지사가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그의 글에 그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나는 모든 인생을 내가 마땅히 잘났으니까 내 대가로써 받는 줄 알았는데 내가 죽음을 6개월 앞두고 보니까 모든 것이 내 대가가 아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이 내 힘으로 산 것도 아니다. 교육도 하나님이 받게 해주셨고 하나님이 잘나게 해주셨고 하나님이 일류회사에 들어가게 해주셨고 하나님이 높은 봉급을 받게 해주셨고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주었는데 이것을 감사할 줄 모르고 당연지사로 안 나의 인생은 참으로 잘못 살았다. 이제 6개월의 세월동안 나는 잘못산 것을 회개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감사하며 살다가 가겠다.’는 그런 글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렘17:5에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야훼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이 저주 그 자체인 것입니다. 은혜를 모르고 율법 주의적으로 자기중심으로 자기가 잘나서 당연지사로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인생을 잘못 산 사람인 것입니다. 껍데기만 핥고 산 사람인 것입니다. 인생의 진정한 깊이를 모르는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자라난 것도 하나님께서 어머니를 통해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인 것입니다 부모의 은혜와 사랑을 당연지사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교육을 받은 것도 당연지사가 아니지요. 우리가 편안하게 먹고, 살고, 생활하는 것 당연지사가 아니지요. 북한에 보면 북한에 있는 동포들은 자유와 인권이 없습니다. 예수 믿고 교회도 올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누리는 것 당연지사로 생각합니다. 교회 와서 예배드리는 것 당연지사가 아니냐. 그것 뭐 특별히 감사할 것 있겠는가 생각하는데 자유는 잃어봐야 자유가 얼마나 귀한 것을 알고 예배당을 잃어 버려봐야 예배드리는 처소가 있고 예배드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을 율법주의적인 당연지사에서 깨어나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요, 축복이란 것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청년은 자기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보았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니까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난 다음에야 모든 것이 은혜로 주어진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 우리 농장, 나의 자라난 어린 시절 그리고 돈을 받아서 허랑방탕하게 산 삶 모든 것이 은혜로써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지 자기가 마땅히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있어서 누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비로소 회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기가 율법주의로 잘못 산 죄를 회개하고 은혜를 간구하는 낮은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스스로 돌이켜 그는 말하기를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우리 아버지 집에는 품꾼들이라도 있을 곳과 먹을 것과 입을 옷을 받고 풍족하게 산다. 아버지의 은혜로. 그런데 나는 내 힘을 의지하고 내가 잘난 줄 알고 뛰어 나왔더니 아버지 은혜에서 끊어진 나의 형편은 지금은 쥐엄 열매도 얻어먹지 못하는 비극적인 인간이 되었다. 이제는 내 스스로 잘난 힘으로 살지 못하고 아버지 은혜가 없이는 못산다는 것을 그는 깊이 깨달은 것입니다.
3. 고난이 뜨게 한 눈
고난의 칼바람이 벗기는 율법주의인 것입니다. 율법주의 옷을 단단히 입고 잘난 척하고 자기중심주의로 남을 비평하고 평론하고 동서로 활개 치다가 고난의 칼바람이 불어와서 율법의 옷을 벗겨 버리니 자기는 비참한 인간, 은혜가 없이는 살수 없는 인간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젊은이는 지위도 명예도 돈도 부귀도 다 잃어 버렸습니다. 빈손 들게 되었습니다. 빈손 들게 되자 율법주의의 옷은 다 벗겨져 버리고 오직 크게 부각되는 것은 아버지의 은혜와 사랑만이 눈앞에 부각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부귀도 영화도 권세도 돈도 옷도 누린 것은 아버지의 은혜로써 그렇게 했구나. 내 힘으로 한 것이 아니었구나. 아버지의 은혜에 대한 것을 뼈 속까지 느끼게 된 것입니다.
시25:7에 “야훼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
젊은 시절에 율법주의가 되어서 철없이 지은 모든 죄를 회개해 달라고 시편기자는 외친 것입니다. 우리가 젊었을 때는 너무나 자기 중심주의적이고 자기 이기주의적이고 자기가 잘난 줄 알고 은혜를 생각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낭패와 실망을 당하여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돼지소굴로 낮아지고 쥐엄 열매를 먹게 될 때 비로서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살아온 것이 은혜로써 살아온 것을 그때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시71: 20절에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잘못을 깨닫고 깨어지고 비로소 은혜를 깨닫게 될 때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옥스포드와 캠브리지 대학 교수로 많은 기독교 서적을 집필한 C. S 루이스는 많은 사람들에게 꿈과 소망을 주었습니다. 한번은 루이스 교수가 옥스포드 채플에서 설교를 하고 나왔을 때 어떤 젊은이가 그에게 다가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신이 살아 계시다면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이 이 세상에 왜 이다지도 많습니까?" 루이스 교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젊은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러지 않아도 오만하고 교만한데 고통마저 없었다면 얼마나 교만하겠는가? 고통은 귀먹은 사람들을 깨우쳐주는 하나님의 확성기라네." 맞았습니다. 고통이 없었다면 이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오만하고 교만하고 율법 주의적으로 자기중심에 서서 기고만장하고 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고통이 와서 그들을 깨뜨리므로 율법주의에서 허물어지고 깨어지고 은혜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고통이 와야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하나님을 찾습니다. 탕자는 기근이 왔을 때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중심적인 율법주의 적 삶을 버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고난으로 낮아질 때 은혜의 눈이 띄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좋은 집에서 호의호식하고 편안하게 학교공부를 하고 편안하게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은 은혜를 모릅니다. 기고만장합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자기 힘으로 모든 것이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이 다가와서 고난의 칼바람이 모든 율법의 옷을 벗겨 버리면 낮아지고 깨어지면 은혜의 눈이 뜨이는 것입니다. 고난이 우리 눈을 뜨게 만드는 것입니다. 고난이 다가오기 전에는 은혜의 눈은 뜨이지 않습니다. 고통으로 나의 무력함과 무능력함과 비참함과 나의 존재의 허약함을 깨닫게 될 때 눈앞에 은혜의 시선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고통을 당한 사람이 은혜를 깊이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의 깊은 곳을 아는 사람은 은혜의 깊은 곳도 깨달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우리가 살면서 크고 작은 고난당하는 것을 원망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고통당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 일세라고 찬송 부르는 것은 고통을 당하고 보니까 이것이 지내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산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고통당하기 전에는 당연지사로 먹고 입고 산 것으로 생각했는데 고통을 당하고 보니까 있는 것 다 빼앗기고 보니까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그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구나 하는 것을 비로소 깨달은 것입니다. 은혜의 눈은 고통을 통해서 비로소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시80:7에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회복하여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우리가 고통을 당하면 하나님이 회복해 주시고 은혜의 눈이 뜨이게 되는 것입니다.
나이 많은 한 수도사가 정원에서 흙을 고르고 있는데 마침 들어온 얼마 안 되는 교만한 젊은 수도사가 다가왔습니다. 그는 후배 수도사에게 흙 위에 물을 뿌려 달라고 했습니다. 젊은 수도사가 물을 흙더미에 뿌리니까 흙더미가 단단했기 때문에 물이 좌르르 다 흘러버리거든요. 그러니까 늙은 수도사가 망치를 들고서 흙을 탁 탁 탁 깨뜨리고 난 다음 “여보게 물을 또 부어 주게나.” 젊은 수도사가 다시 그릇을 들고 물을 부으니까 깨어진 흙에는 물이 쫙쫙 빨려 들어가거든. 그러니 늙은 수도사가 싱긋이 웃으면서 “이제 흙이 물을 빨아 들였으니 이것을 잘 골라서 씨를 뿌리면 열매를 맺게 된다네. 자네 인생도 한가지야. 자기중심에 서서 고집덩어리가 되어 있을 때는 아무리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 주셔도 은혜의 물이 다 흘러가 버리고 마는 거야. 은혜의 물이 안 들어오는 거야. 그러나 인생고를 겪어서 깨어지고 부스러지면 하나님의 은혜가 스며 들어와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일세.” 그런 교훈을 했습니다. 맞았습니다. 우리가 자기중심에 서서 딱딱한 흙덩어리처럼 되어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하늘에서 아무리 쏟아져도 전부다 흘러가 버리고 속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깨어지고 문드러지고 가루가 되면 은혜가 다 스며들어 와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좋은 옥토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은혜는 한이 없게 겸손하게 만듭니다. 은혜를 받으면 사람이 겸손해 져요. 율법주의자는 고개를 들고서 흔들어댑니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내가 얼마나 잘났습니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내가 잘났지요. 그리고 난 다음 자기 중심으로 남을 평판하고 비평하고 자기 제일주의로 살고 감사할 줄 모르고 오만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율법주의가 깨어지면 은혜를 깨닫게 되면 한없이 낮아집니다. 내가 나 된 것은 은혜로 되었구나. 내가 나된 것은 내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우리 아버지 은혜로 우리 어머니 은혜로 우리 선생님의 은혜로 무엇보다도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으니 내가 자랑할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내가 아침에 일어나고 저녁에 누울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일용할 양식을 얻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명예와 지위를 얻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돈벌이를 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면 한없이 겸손하고 낮아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개를 흔들어 제키던 그 고개가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깊이 깊이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숙이게 되는 것입니다.
잠28:13에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은혜를 받으면 모든 잘못을 회개하고 자복하고 낮아지고 겸허하게 되는 것입니다.
약4:6에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겸손하니까 은혜를 받고 은혜를 받으니까 더욱 겸손해 지는 것입니다.
4. 깨달은 사람에게 주시는 은혜
그런데 하나님은 은혜를 깨달은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은혜를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어봤자 은혜는 다 흘러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소용이 없어요. 깨어지고 은혜를 아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퍼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험과 환난이 다가와서 지위도 명예도 권세도 돈도 건강도 다 잃어버리고 난 다음에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고 부르짖으면 그때야 하나님의 은혜를 퍼부어 주어서 우리가 변화된 사람이 많습니다. 처음부터 은혜를 받는 사람 없습니다. 사람들은 아담 자손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율법주의로 태어나서 모든 것을 당연지사로 생각하고 감사하게 생각하지 않고 교만하고 오만합니다. 고난과 시련을 통하여 깨어지고 난 다음에 은혜를 알게 되고 은혜를 알고 낮아지고 낮아지면 그때부터 하나님은 낮아진 정도를 따라서 은혜를 퍼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 탕자가 비로소 돼지 굴에서 쥐엄 열매를 먹다가 아버지의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모든 것이 아버지의 은혜로 내가 살았구나. 소년시절 청년시절 아버지의 은혜로 살았고 내가 재산을 얻은 것도 아버지의 은혜로 얻어 와서 살았구나. 모든 것이 아버지의 은혜구나.’ 아버지의 은혜를 생각하자 자기는 낮아지고 낮아지고 아버지가 돋보였습니다. 아버지가 높이고 감사하고 아버지를 찬양하게 된 것입니다. 낮아지고 은혜가 낮아지니까 ‘이제는 아버지께로 찾아가자.’은혜를 깨달은 사람이 은혜를 찾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깨달은 사람이 은혜의 하나님을 찾아 새벽기도도 하고 철야기도도 하고 기도원에 가서 금식기도도 하고 은혜 받기를 부르짖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깨닫고 난 다음에 은혜의 하나님께 나아오면 비로소 하나님은 진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지 은혜를 모르는 사람에게 은혜 줘봤자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그가 초췌한 모습으로 아버지께 오니 아버지가 뛰어 나와서 그를 얼싸안고 입을 맞춥니다. 그는 아버지께 말했습니다.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이제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낮아졌지요. 제일 처음 나갈 때는 “아버지, 나의 분깃을 내게 주소서. 내 재산 가져가는 것 마땅한 일 아닙니까? 내가 당당하게 독립해서 잘살겠습니다.” 오만하던 그가 이렇게 깨어졌습니다. 나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어서 이제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합니다. 낮아졌습니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품꾼으로써 일하고 밥만 먹여주면 감지덕지 하겠나이다. 은혜를 깨닫고 아버지의 은혜로 산 것을 깨닫고 아버지에게 은혜를 간구하니까 아버지가 그 아들을 꾸짖었습니까? 꾸짖지 않았습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에게 은혜를 덮습니다. 아버지가 종들에게 말하기를 “제일 좋은 옷을 갖다 입혀라.” 냄새가 나고 돼지 똥이 묻어 있는데 목욕도 안했는데도 불구하고 제일 좋은 옷을 갖다 입혀라. 은혜를 아는 사람에게 은혜를 주는 것입니다. “가락지를 갖다 끼워라.” 반지라는 것은 아들이 되었다는 표시인 것입니다. 유대 나라에서는 자식이 태어나면 아버지와 어머니와 형제들 이름을 적어 놓은 반지를 끼워 주는 것입니다. 그는 떠나올 때 반지를 뽑아서 던져 버리고 왔습니다. “나는 이 집안 자식이 안되어도 좋다. 독립해서 살겠다.” 그러나 은혜를 알고 돌아오니 집안에 또다시 멤버로써 집안의 모든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자격, 아들의 자격을 부여한 것입니다. 반지를 끼우라. “신발을 갖다 신겨라.” 종은 맨발로 돌아다닙니다. 아들은 신발을 신깁니다. “신발을 신겨라. 그리고 이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잃었다가 얻었으니 살찐 송아지를 잡으라. 우리 먹고 즐기자”
잔치 분위기가 된 것 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깨어져서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하고 나오면 하나님이 십자가 밑에서 제일 좋은 옷을 입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다 씻어주고 의로운 입을 입히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아무 의로운 옷을 입을 자격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은혜를 알고 오니까 죄의 모든 더러운 옷을 벗겨 버리고 의로운 그리스도의 옷을 입혀서 하나님과 교통하고 영광을 얻게 하고 그리고 가락지를 끼우라. 아들을 만들어라. 성령의 인을 쳐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축복을 누릴 수 있는 하나님과 같이 밥상에서 밥을 먹을 수 있고 하나님이 계신 집에 함께 살 수 있는 아들의 자격을 주어라. 아담 이후로 쫓겨나서 하나님 근처도 못 가던 우리들에게 은혜를 알고 예수님께 나오면 아들의 자격을 주시고 그리고 신발을 신겨라.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는 신발을 신겨라. 하나님의 약속의 신발을 신겨서 다시는 발이 걸레처럼 찢어지고 상처투성이가 된 인생을 살지 말고 약속의 은혜의 신발을 신고 승리로 삶을 살도록 만들어라. 그리고 살찐 송아지를 잡으라. 믿음, 소망, 사랑, 의, 평강, 희락, 넘치는 행복의 축복의 송아지를 잡으라. 그리고 이제 너무나 슬프게 살았으니 우리 집에 들어와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잔치를 가지고 살라. 우리 인생을 잔치 집에서 사는 것처럼 즐거움을 가지고 살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은혜를 깨닫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넘치는 은혜를 주어서 은혜의 축복 속에 살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결론>
율법주의적인 자기가 깨어진 사람만이 예수님이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게 되고 믿고 감격하고 변화 받게 되고 천국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적인 자아가 깨어지지 않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은혜를 찾지도 않습니다. 은혜도 구하지 않습니다. 인본주의로 서서 자기가 잘난 줄 생각하고 자기의 힘과 자기의 능력으로 내가 하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율법주의로 사는 사람은 영원히 은혜를 맛보지 못하고 멸망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깨어지고 환난을 당하고 시련과 고통을 당하고 율법주의가 깨어지고 자아가 깨어진 사람은 율법의 비늘이 떨어지고 은혜에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자식이고 부모의 은혜를 생각하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스승의 은혜를 생각하면 그는 성장하고 지식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은혜를 생각하고 은혜를 감격하면 마음이 겸손해지고 낮아지고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더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깨어진 목사, 깨어진 장로, 안수집사, 권사, 집사님, 지역장, 구역장, 평신도 여러분 깨어진 사람이 되어서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까지 나되었구나. 내가 나 된 것은 내 힘으로 된 것이 아니구나. 내가 잘나서 오늘날까지 살아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날까지 살아왔구나. 저 하늘도 하나님의 은혜요, 땅도 하나님의 은혜요, 시간도 공간도 하나님의 은혜요, 내 생명도 하나님의 은혜요, 내 아내도 하나님의 은혜요, 내 자식도 하나님의 은혜요, 나의 직장도 하나님의 은혜요, 나의 일용할 양식도 하나님의 은혜요. 그러면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가 이루어지고 무릎을 꿇어 감사하게 되고 겸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낮아지고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지 않은 사람이 겸손하지 않고 교만하지, 은혜 받은 사람은 낮아지고 낮아지고 낮아지고 낮아지고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께 의지합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께 나오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예비한 모든 은혜를 퍼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용서와 의의 옷을 입혀라. 거룩하고 성령 충만을 주어라. 치료와 건강을 주어라. 아브라함의 복과 형통을 주어라. 부활, 영생, 천국을 주어라.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만들어 주어라. 택하신 족속으로 만들어라. 왕 같은 제사장으로 만들어라. 거룩한 나라로 만들어라. 소유된 백성으로 만들어라. 마음에 기쁨을 충만히 해서 잔치 집 같이 생활하게 만들어라. 은혜는 우리 인생을 잔치 집에서 살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내 마음속에 하나님과 더불어 기쁨을 가지고 우리 가정에서 내가 소속한 기관에서 기쁨의 전도자가 되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새해에는 여러분 깨어져서 은혜를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은혜를 보는 눈을 얻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내가 겸손해 지는 것입니다. 내가 낮아지고 겸손해졌거든 내가 은혜를 받은 줄로 아십시오. 더 낮아지고 더 겸손해지면 정말 은혜의 사람이 된 줄 아십시오. 은혜의 사람이 부르짖으매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 응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은혜의 사람이 부르짖으매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못자국난 손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인생의 승패는 은혜를 알고 은혜를 받는데 있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는 자기도 망하고 이웃도 망하고 영원이 멸망당하고 말 것입니다. 오직 살아남는 자는 은혜를 알고 은혜를 받고 은혜를 나누는 사람이 영원히 살아나고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게 되실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탕자가 은혜를 모르고 율법주의에 서서 당연지사로 생각하고 아버지의 은혜도, 어머니의 은혜도 당연지사고 자기가 잘 먹고 잘 입고 잘사는 것도 당연지사고 상속을 받는 것도 당연지사로 살고 율법주의로 서서 자기중심에 서서 자기 잘난 줄 알았다가 큰 기근을 당하여 깨어지고 부스러지고 문드러지고 난 다음에는 자기가 얼마나 비참한 존재요, 자기의 수단과 방법과 노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을 깨닫고 아버지 은혜를 깨닫고 어머니 은혜를 깨닫고 이웃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낮아지고 깨어지고 은혜의 하나님, 은혜의 아버지께로 돌아오매 은혜위에 은혜를 하나님이 주신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아버지여 은혜를 모르는 사람에게 아버지는 은혜를 주시지 않사옵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에게 은혜를 퍼부어 주십니다. 내 아버지 하나님, 우리 마음속에 율법주의적인 잔재가 남았으면 환난과 시험을 통해서라도 깨뜨려 주시옵소서. 환난과 시험의 칼바람이 불어와서 율법주의의 옷을 다 산산조각으로 결단내어 주시옵소서. 우리가 깨어져서 낮아지고 은혜의 눈이 뜨이게 만들어 주시고 은혜로써 낮아지고 겸허해지고 은혜의 하나님께 담대히 나가서 은혜위에 은혜를 받아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어 평생을 잔치 상에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 아멘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아! 하나님의 은혜로’이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 눅15:11~24에 탕자에 대한 비유를 설명했습니다. 한 농촌에 큰 농사를 짓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나무가 우거진 농장 수 만평이 그의 농장이었습니다. 집은 아름답고 그 주변에는 수려한 나무들이 많이 서있었습니다. 많은 일꾼들을 위해서 기숙사도 지었습니다. 짐승의 우리도 많았습니다. 일이 바뻤 습니다. 농사일이 잘되고 수입도 많았습니다. 이 사람은 두 아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건장하게 잘 자랐습니다. 공부도 잘했습니다. 아버지 일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 으로 도와서 굉장히 부자간에 좋은 관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갑자기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 나와서 “아버지 나도 이제 장성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농촌에서 농사일 하는 것이 몸서리가 납니다. 흙냄새가 맡기 싫습니다. 퇴비 냄새가 맡기 싫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저녁에 늦게 들어오는 생활이 이제는 염증이 났습니다. 나는 도시로 나가서 내 생활을 시작하겠습니다. 아버지, 법적으로 내게 줄 상속을 주십시오.” 유대인들은 장남에게 3분의 2의 재산을 상속으로 주고 차남에게는 3분의 1을 줍니다. “그 3분의 1을 아버지 내게 주십시오.” 아버지가 말렸습니다. “아직 너는 성년이 되지 못했다. 아직까지 재산을 상속받아 나갈 수 있는 처지에 있지 못하니 좀 더 기다려라. 세월이 흐르면 네가 장성하면 어련히 아버지가 주지 않겠느냐.” “아니오, 나는 기다릴 수 없습니다. 한시가 바쁩니다. 아버지 내게 속한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루 이틀 아니고 계속 간청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재산을 나누어서 둘째에게 주니까 그것을 다 처리해서 신속히 아버지의 그림자가 비취지 않는 먼 나라로 떠나가 버리고 만 것입니다. 거기에서 그는 돈이 있겠다, 허랑방탕하게 살았습니다. 돈을 쓰는 동안에 많은 친구들이 생기고, 많은 여성들이 그를 따라 다녔습니다. 그는 왕자처럼 생활했습니다. 그러나 돈이 항상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물 쓰듯이 돈을 쓰니 며칠간 계속 하겠습니까? 얼마 있지 아니하여 그 나라에 큰 기근이 다가왔습니다. 마치 우리나라에 왔던 IMF 같은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사람들은 직장을 잃어버리고 농토는 피폐화되고 먹고 살기가 힘들게 되자 이 사람도 돈이 다 떨어졌습니다. 자기의 친구들도 떠나고 여자들도 다 떠났습니다. 그렇게 자기를 왕처럼 대접하던 친구와 여자들이 얼굴을 돌려 버리고 한 푼의 돈도 빌려주지 않습니다. 그가 있는 주택에서 쫓겨났습니다. 먹고 살길이 없습니다. 호구지책의 대책을 세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직장을 구하려고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뛰어도 직장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겨우 얻은 직장이 농촌에서 나가 돼지를 기르는 회사에 직원으로 채용이 된 것입니다. 유대 나라에서 가장 천한 직업은 돼지를 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먹고 살자니까 별도리 있겠습니까? 돼지 치는 회사에 직원이 되어서 농촌으로 가서 돼지우리 속에서 돼지를 치는데 너무나 배가 고파서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먹으려고 해도 그것도 부족했습니다. 그러자 그 고통 중에 정신이 들었습니다. 생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내가 내 아버지 집에서 잘 먹고, 잘 입고, 잘사는 것은 당연지사고 여겼고, 아버지의 상속을 받아서 내가 독립하는 것도 당연지사로 여겼는데 이제 보니 그것이 아니었구나. 모든 것이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로써 내가 살았지 내가 당연지사로 내가 잘나서 살아 온 것은 아니었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 탕자의 비유 속에서 우리가 몇 가지 배워야 될 중대한 교훈이 있습니다.
<본론>
1. 율법 주의적 삶의 태도
탕자는 처음에는 율법적주의 적인 삶의 태도를 취했습니다.
‘모든 것이 당연지사다. 나는 이 집에 차남으로 태어났으니까 아버지가 먹여주고 입혀주고 돌보아줄 책임이 있다. 그것은 율법적으로 당연지사다. 그리고 나에게 아버지가 재산의 3분의 1을 주는 것은 율법적으로 당연지사다. 마땅히 그렇게 해야 될 일이다.’
조금도 거기에 대해서 은혜로 생각하지 않고 고맙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연지사를 내가 받았는데 내가 뭘 감사하고 고맙게 생각할일 있느냐. 아버지가 되었으니 날 먹여주고 입혀주고 돌보아 주고 나에게 재산 상속을 주어야 될 것이 아니냐. 율법주의자들은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는 자기중심으로 서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바로 정의요, 법이라고 생각하고 자기에게 어긋나면 다 법에 어긋나고 잘못 되었다고 비평하고 판단하는 것이 율법주의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생각하기는 이제 독립할 때가 왔으니 아버지 품을 떠나 먼 나라에 가서 아버지 없이 자기 스스로 사는 것이 당연하고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아버지에게 분깃을 달라고 해서 떠나고 만 것입니다. 율법주의는 교만하고 오만합니다. 이아들은 아버지 앞에 굉장히 교만하고 오만했습니다. 그동안 길러주신 아버지에게 감사하게 생각하지 아니했습니다. 당연지사로 생각했습니다. 돌보아주신 아버지의 은혜에 눈물을 흘리지 않았었습니다. ‘아버지가 할 일을 했는데 뭘 내가 아버지에게 구태어 고맙다고 머리를 조아릴 필요가 있느냐. 아버지가 나보다 더 잘해 주어야 될 것인데 더 이상 잘해주지 못했지 않느냐.’ 그런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자기제일주의입니다. 자기가 제일 잘났다고 생각했습니다. ‘나 같으면 아버지처럼 농촌에서 흙냄새 맡고 퇴비냄새 맡고 흙속에 파묻혀 살지 않겠다. 도시에 가서 호화롭게 살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는 마음에 교만했습니다. 아버지의 교훈을 듣지 않았습니다.
잠16:18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시 5: 5에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 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신다고 했었습니다.
사람들이 교만하면 자기 제일주의로 서고 자기 이외는 다 못나게 보이고 패배자, 실패자로 보이는 것입니다. 자기만이 성공자요, 자기만이 승리자요, 자기만이 지혜로운 자로 생각하는 착각 속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가 되면 타인에 대해서 몰인정하고 무관심합니다. 아버지에 대해서 이 둘째 아들은 몰인정했습니다. 그동안 아버지가 수고하고 고생하며 농사일을 해온 것을 불쌍히 여기고 길러준다고 고생한 것에 대한 감사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에게 대자고자로 내게 속한 나의 상속을 달라고 고함치고 몸부림쳤지 아버지에 대해서 사랑하는 마음도 없었고 동정하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농사일에 고생한 아버지의 등은 휘어졌고 머리는 희끗희끗 해졌고 얼굴에는 주름살이 졌습니다. 그것은 아들에게 아무 관심도 없었습니다. 나이를 먹으면 늙는 것 당연한일 아니냐. 나이를 먹었으니 머리가 희끗희끗한 것 당연한 일치지, 주름 살 이것 다 오는 거야. 율법주의 적으로 생각하고 거기에 대한 조그마한 정도 사랑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율법주의가 아니라 사랑과 동정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을 가지고 우리의 부모, 형제, 자매, 이웃을 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호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제사는 율법적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범죄 하면 범죄에 대한 대가로써 제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물 드리는 것보다 하나님은 우리가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동정하는 심정을 가지기를 원한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마9:13에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죄인과 함께 밥을 잡수시고 세리와 창녀들과 함께 교제한다는 것을 바리새교인들이 비난했을 때에 예수님이 말했습니다. “너는 성경에 하나님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아라. 하나님은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동정하는 것을 제사보다 더 원한다는 것을 너희가 알아라. 내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둘째 아들은 율법주의자가 되어서 아버지에 대해서 몰인정하고 무관심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조그마한 인정도 사랑도 자비도 갖지 않았습니다. 율법주의자인 것입니다. 감사할 줄 모릅니다. 율법주의자는 항상 불평만 말하고 감사할 줄 모릅니다. 자기 주위 환경에 감사할 것 많은데 감사할 것은 다 도외시하고 언제나 모자란 것, 안 되는 것, 부족한 것, 불편한 것만 들어서 불평, 원망, 탄식을 했습니다. 이 둘째는 농촌에서 사는 것이 불평, 불만이었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데 왜 아버지 마음대로 명령을 내려서 우리 순종해라. 아침 일찍 일어나야 되느냐. 왜 들로 나가서 농부들을 돌보아야 되고 감시해야 되고 소들을 먹이고 짐승들을 돌보아야 되느냐. 왜 과수원에 가서 전당을 해야 되고 거름을 주어야 되고 열매를 따야 되느냐. 왜 이런 고생을 해야 되느냐. 왜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을 해야 되느냐. 왜 이렇게 수고롭게 살아야 되느냐.” 따뜻한 옷 입고 뜨끈뜨끈한 밥 먹고 좋은 집에서 살고 좋은 환경에서 자라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언제나 율법적으로 자기에게 괴롭고 고통스럽고 편안하지 못한 것만 지적해서 불평하는 것입니다.
시106:25~27절에 보면 “그들의 장막에서 원망하며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아니 하였도다 이러므로 그가 그의 손을 들어 그들에게 맹세하기를 그들이 광야에 엎드러지게 하고 또 그들의 후손을 뭇 백성 중에 엎드러뜨리며 여러 나라로 흩어지게 하리라 하셨도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서 광야에서 편안하게 여행을 하면서 가나안 복지까지 나오게 된 것을 고맙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으로 쓴물이 달아지고 메추라기가 날라 오고 만나가 떨어지고 바위에 물이 나오는 것 기이하고 놀라운 일로 감사해야 될 것인데 오히려 그것을 원망과 불평과 탄식을 합니다. “이렇게 고통스러운 길을 왜 걷게 하느냐. 왜 광야를 지나게 하느냐. 왜 메추라기를 먹게 하고 만나를 먹게 하느냐. 질력이 나고 맛이 없다. 길이 험하고 고통스럽다.” 온갖 원망과 불평을 다 하므로 감사할 줄 모르는 율법주의자, 비평 론자, 평론자 들을 주님께서는 저버렸던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감사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2. 깨어지는 율법주의
그런데 이 율법주의가 깨어질 때가 오는 것입니다.
율법주의는 큰 시련과 고통을 당하면 박살이 나고 자기중심이 허물어지는 것입니다. 이 탕자의 세계 속에도 깨어질 날이 왔습니다. 탕자가 아버지 앞에서 자기가 마땅히 얻을 재산의 3분의 1을 가지고 “내 돈 내가 맘대로 쓰는데 누가 간섭할 것이냐. 내 돈 내 맘대로 쓸 수 있다.”고 율법주의 적으로 생각하고 비평과 평론과 교훈을 듣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아버지를 떠나 멀리 왔으니 아버지의 교훈을 듣지 않으니 평안했습니다. 그러나 기근이 다가와서 모든 사업이 다 무너지고 점포가 문을 닫고 직장을 잃어버리고 먹고 살길이 없고 호구지책을 할 도리가 없고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 젊은이가 갈 데가 없습니다. 직장을 찾아 하루 종일 허덕여도 직장을 얻을 수 없다가 기어이 얻은 것이 저 시골에 가서 돼지를 치는 직원이 되는 것입니다. 가장 천하고 낮은 직장을 얻은 것입니다.
여러분 잠11:28에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하려니와”라고 말했었습니다.
잠23:5절에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내어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
재물을 의지하면 언제고 그 재물이 독수리같이 날개를 치고 날라 갈 날이 오는 것입니다. 재물은 영원히 우리 곁에 있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써도 써도 끝없이 재물이 있을 줄 알고 재물을 쓰다가 기근이 다가오니 재물이 다 날라 가 버리고 빈손 들고 이제는 호구지책을 알 수없는 비참한 전경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포켓에 손을 넣어 봐도 딸랑거리는 돈도 없습니다. 은행에 아무런 구좌도 남은 것이 없습니다. 집도 쫓겨났습니다. 입은 옷도 다 낡아졌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먹을 밥이 없습니다. 그는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시골에 가서 돼지농장에 들어가서 돼지를 치는데 돼지 쥐엄 열매를 먹으려고 해도 충분히 주지 않습니다. 그는 거기에서 생각하기를 ‘야!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당연지사로 알았는데 당연지사가 아니구나. 아버지가 우리를 먹이고 입히고 기르고 돌보아 준 것은 아버지로써 마땅히 할 당연지사요, 내가 받을 것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구나. 밥 먹는 것이 이렇게 힘든 줄 몰랐다. 옷 입는 것이 이렇게 힘든 줄 몰랐다. 잠자리를 얻는 것이 이렇게 힘든 줄 몰랐다. 옛날에 아버지 집에 있을 때는 먹고 마시고 옷 입고 자고 깨고 사는 것은 당연지사로 여겼다. 그것 가지고 내가 감사하지 않았는데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고통이 다가오자 비로소 눈에 비늘이 떨어지고 율법주의가 떠나가고 아버지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친아버지가 베풀어준 은혜와 사랑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당연지사가 아닌 인생을 그는 깨닫게 된 것입니다. 최하로 인생이 낮아지자 비로소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삶이 은총과 축복으로 살아왔지 자기가 잘나서 자기가 수고해서 자기 능력으로 자기의 수단과 방법으로 살아온 인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의 글을 읽어 보았는데 한참 잘나가는 인생이었습니다. 최고학부를 나오고 좋은 직장에서 봉급도 많이 받고 모든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 가족들 가운데도 우상처럼 되었는데 그만 암에 걸렸습니다. 병원에서 진찰하기를 6개월 이상 못산다는 진찰이 생겼습니다. 그는 모든 것이 캄캄했습니다. 좌절과 절망에 처했습니다. 그러자 인생을 다시보기 시작했습니다. 자기는 자기가 일류대학을 나오고 일류직장에서 높은 월급을 받고 모든 사람들이 선망의 대상이 되고 온 가족 가운데도 우상처럼 존경을 받는 것이 당연지사로 알았습니다. ‘인생이 마땅히 그런 것 아니냐. 내가 잘났으니까 내 잘난 대가로써 이렇게 잘사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는데 암이 걸려 6개월 주어진 인생을 얻게 되자 이것이 당연지사가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인생이란 하나님이 천재이루로 주신 선물이구나. 하늘이 저렇게 아름다운 것을 그는 몰랐습니다. 땅에 서있다는 이 자체가 은혜란 것을 몰랐습니다. 공기를 숨 쉬는데 이 달콤한 공기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고 내 아내와 자녀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 것을 그전까지는 몰랐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난 다음에 이제 돌이켜 보니 하늘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요, 땅에 서있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요, 숨 쉬는 공기가 얼마나 달콤한지 죽기 전에 한번이라도 더 숨 쉬어 보겠다고 숨을 깊이 들이켜 쉬고 아내 사랑하는 자녀들이 주변에서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요, 당연지사가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그의 글에 그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나는 모든 인생을 내가 마땅히 잘났으니까 내 대가로써 받는 줄 알았는데 내가 죽음을 6개월 앞두고 보니까 모든 것이 내 대가가 아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이 내 힘으로 산 것도 아니다. 교육도 하나님이 받게 해주셨고 하나님이 잘나게 해주셨고 하나님이 일류회사에 들어가게 해주셨고 하나님이 높은 봉급을 받게 해주셨고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주었는데 이것을 감사할 줄 모르고 당연지사로 안 나의 인생은 참으로 잘못 살았다. 이제 6개월의 세월동안 나는 잘못산 것을 회개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감사하며 살다가 가겠다.’는 그런 글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렘17:5에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야훼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이 저주 그 자체인 것입니다. 은혜를 모르고 율법 주의적으로 자기중심으로 자기가 잘나서 당연지사로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인생을 잘못 산 사람인 것입니다. 껍데기만 핥고 산 사람인 것입니다. 인생의 진정한 깊이를 모르는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자라난 것도 하나님께서 어머니를 통해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인 것입니다 부모의 은혜와 사랑을 당연지사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교육을 받은 것도 당연지사가 아니지요. 우리가 편안하게 먹고, 살고, 생활하는 것 당연지사가 아니지요. 북한에 보면 북한에 있는 동포들은 자유와 인권이 없습니다. 예수 믿고 교회도 올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누리는 것 당연지사로 생각합니다. 교회 와서 예배드리는 것 당연지사가 아니냐. 그것 뭐 특별히 감사할 것 있겠는가 생각하는데 자유는 잃어봐야 자유가 얼마나 귀한 것을 알고 예배당을 잃어 버려봐야 예배드리는 처소가 있고 예배드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을 율법주의적인 당연지사에서 깨어나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요, 축복이란 것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청년은 자기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보았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니까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난 다음에야 모든 것이 은혜로 주어진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 우리 농장, 나의 자라난 어린 시절 그리고 돈을 받아서 허랑방탕하게 산 삶 모든 것이 은혜로써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지 자기가 마땅히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있어서 누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비로소 회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기가 율법주의로 잘못 산 죄를 회개하고 은혜를 간구하는 낮은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스스로 돌이켜 그는 말하기를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우리 아버지 집에는 품꾼들이라도 있을 곳과 먹을 것과 입을 옷을 받고 풍족하게 산다. 아버지의 은혜로. 그런데 나는 내 힘을 의지하고 내가 잘난 줄 알고 뛰어 나왔더니 아버지 은혜에서 끊어진 나의 형편은 지금은 쥐엄 열매도 얻어먹지 못하는 비극적인 인간이 되었다. 이제는 내 스스로 잘난 힘으로 살지 못하고 아버지 은혜가 없이는 못산다는 것을 그는 깊이 깨달은 것입니다.
3. 고난이 뜨게 한 눈
고난의 칼바람이 벗기는 율법주의인 것입니다. 율법주의 옷을 단단히 입고 잘난 척하고 자기중심주의로 남을 비평하고 평론하고 동서로 활개 치다가 고난의 칼바람이 불어와서 율법의 옷을 벗겨 버리니 자기는 비참한 인간, 은혜가 없이는 살수 없는 인간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젊은이는 지위도 명예도 돈도 부귀도 다 잃어 버렸습니다. 빈손 들게 되었습니다. 빈손 들게 되자 율법주의의 옷은 다 벗겨져 버리고 오직 크게 부각되는 것은 아버지의 은혜와 사랑만이 눈앞에 부각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부귀도 영화도 권세도 돈도 옷도 누린 것은 아버지의 은혜로써 그렇게 했구나. 내 힘으로 한 것이 아니었구나. 아버지의 은혜에 대한 것을 뼈 속까지 느끼게 된 것입니다.
시25:7에 “야훼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
젊은 시절에 율법주의가 되어서 철없이 지은 모든 죄를 회개해 달라고 시편기자는 외친 것입니다. 우리가 젊었을 때는 너무나 자기 중심주의적이고 자기 이기주의적이고 자기가 잘난 줄 알고 은혜를 생각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낭패와 실망을 당하여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돼지소굴로 낮아지고 쥐엄 열매를 먹게 될 때 비로서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살아온 것이 은혜로써 살아온 것을 그때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시71: 20절에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잘못을 깨닫고 깨어지고 비로소 은혜를 깨닫게 될 때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옥스포드와 캠브리지 대학 교수로 많은 기독교 서적을 집필한 C. S 루이스는 많은 사람들에게 꿈과 소망을 주었습니다. 한번은 루이스 교수가 옥스포드 채플에서 설교를 하고 나왔을 때 어떤 젊은이가 그에게 다가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신이 살아 계시다면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이 이 세상에 왜 이다지도 많습니까?" 루이스 교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젊은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러지 않아도 오만하고 교만한데 고통마저 없었다면 얼마나 교만하겠는가? 고통은 귀먹은 사람들을 깨우쳐주는 하나님의 확성기라네." 맞았습니다. 고통이 없었다면 이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오만하고 교만하고 율법 주의적으로 자기중심에 서서 기고만장하고 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고통이 와서 그들을 깨뜨리므로 율법주의에서 허물어지고 깨어지고 은혜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고통이 와야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하나님을 찾습니다. 탕자는 기근이 왔을 때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중심적인 율법주의 적 삶을 버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고난으로 낮아질 때 은혜의 눈이 띄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좋은 집에서 호의호식하고 편안하게 학교공부를 하고 편안하게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은 은혜를 모릅니다. 기고만장합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자기 힘으로 모든 것이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이 다가와서 고난의 칼바람이 모든 율법의 옷을 벗겨 버리면 낮아지고 깨어지면 은혜의 눈이 뜨이는 것입니다. 고난이 우리 눈을 뜨게 만드는 것입니다. 고난이 다가오기 전에는 은혜의 눈은 뜨이지 않습니다. 고통으로 나의 무력함과 무능력함과 비참함과 나의 존재의 허약함을 깨닫게 될 때 눈앞에 은혜의 시선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고통을 당한 사람이 은혜를 깊이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의 깊은 곳을 아는 사람은 은혜의 깊은 곳도 깨달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우리가 살면서 크고 작은 고난당하는 것을 원망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고통당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 일세라고 찬송 부르는 것은 고통을 당하고 보니까 이것이 지내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산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고통당하기 전에는 당연지사로 먹고 입고 산 것으로 생각했는데 고통을 당하고 보니까 있는 것 다 빼앗기고 보니까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그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구나 하는 것을 비로소 깨달은 것입니다. 은혜의 눈은 고통을 통해서 비로소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시80:7에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회복하여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우리가 고통을 당하면 하나님이 회복해 주시고 은혜의 눈이 뜨이게 되는 것입니다.
나이 많은 한 수도사가 정원에서 흙을 고르고 있는데 마침 들어온 얼마 안 되는 교만한 젊은 수도사가 다가왔습니다. 그는 후배 수도사에게 흙 위에 물을 뿌려 달라고 했습니다. 젊은 수도사가 물을 흙더미에 뿌리니까 흙더미가 단단했기 때문에 물이 좌르르 다 흘러버리거든요. 그러니까 늙은 수도사가 망치를 들고서 흙을 탁 탁 탁 깨뜨리고 난 다음 “여보게 물을 또 부어 주게나.” 젊은 수도사가 다시 그릇을 들고 물을 부으니까 깨어진 흙에는 물이 쫙쫙 빨려 들어가거든. 그러니 늙은 수도사가 싱긋이 웃으면서 “이제 흙이 물을 빨아 들였으니 이것을 잘 골라서 씨를 뿌리면 열매를 맺게 된다네. 자네 인생도 한가지야. 자기중심에 서서 고집덩어리가 되어 있을 때는 아무리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 주셔도 은혜의 물이 다 흘러가 버리고 마는 거야. 은혜의 물이 안 들어오는 거야. 그러나 인생고를 겪어서 깨어지고 부스러지면 하나님의 은혜가 스며 들어와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일세.” 그런 교훈을 했습니다. 맞았습니다. 우리가 자기중심에 서서 딱딱한 흙덩어리처럼 되어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하늘에서 아무리 쏟아져도 전부다 흘러가 버리고 속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깨어지고 문드러지고 가루가 되면 은혜가 다 스며들어 와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좋은 옥토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은혜는 한이 없게 겸손하게 만듭니다. 은혜를 받으면 사람이 겸손해 져요. 율법주의자는 고개를 들고서 흔들어댑니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내가 얼마나 잘났습니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내가 잘났지요. 그리고 난 다음 자기 중심으로 남을 평판하고 비평하고 자기 제일주의로 살고 감사할 줄 모르고 오만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율법주의가 깨어지면 은혜를 깨닫게 되면 한없이 낮아집니다. 내가 나 된 것은 은혜로 되었구나. 내가 나된 것은 내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우리 아버지 은혜로 우리 어머니 은혜로 우리 선생님의 은혜로 무엇보다도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으니 내가 자랑할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내가 아침에 일어나고 저녁에 누울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일용할 양식을 얻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명예와 지위를 얻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돈벌이를 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면 한없이 겸손하고 낮아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개를 흔들어 제키던 그 고개가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깊이 깊이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숙이게 되는 것입니다.
잠28:13에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은혜를 받으면 모든 잘못을 회개하고 자복하고 낮아지고 겸허하게 되는 것입니다.
약4:6에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겸손하니까 은혜를 받고 은혜를 받으니까 더욱 겸손해 지는 것입니다.
4. 깨달은 사람에게 주시는 은혜
그런데 하나님은 은혜를 깨달은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은혜를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어봤자 은혜는 다 흘러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소용이 없어요. 깨어지고 은혜를 아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퍼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험과 환난이 다가와서 지위도 명예도 권세도 돈도 건강도 다 잃어버리고 난 다음에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고 부르짖으면 그때야 하나님의 은혜를 퍼부어 주어서 우리가 변화된 사람이 많습니다. 처음부터 은혜를 받는 사람 없습니다. 사람들은 아담 자손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율법주의로 태어나서 모든 것을 당연지사로 생각하고 감사하게 생각하지 않고 교만하고 오만합니다. 고난과 시련을 통하여 깨어지고 난 다음에 은혜를 알게 되고 은혜를 알고 낮아지고 낮아지면 그때부터 하나님은 낮아진 정도를 따라서 은혜를 퍼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 탕자가 비로소 돼지 굴에서 쥐엄 열매를 먹다가 아버지의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모든 것이 아버지의 은혜로 내가 살았구나. 소년시절 청년시절 아버지의 은혜로 살았고 내가 재산을 얻은 것도 아버지의 은혜로 얻어 와서 살았구나. 모든 것이 아버지의 은혜구나.’ 아버지의 은혜를 생각하자 자기는 낮아지고 낮아지고 아버지가 돋보였습니다. 아버지가 높이고 감사하고 아버지를 찬양하게 된 것입니다. 낮아지고 은혜가 낮아지니까 ‘이제는 아버지께로 찾아가자.’은혜를 깨달은 사람이 은혜를 찾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깨달은 사람이 은혜의 하나님을 찾아 새벽기도도 하고 철야기도도 하고 기도원에 가서 금식기도도 하고 은혜 받기를 부르짖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깨닫고 난 다음에 은혜의 하나님께 나아오면 비로소 하나님은 진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지 은혜를 모르는 사람에게 은혜 줘봤자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그가 초췌한 모습으로 아버지께 오니 아버지가 뛰어 나와서 그를 얼싸안고 입을 맞춥니다. 그는 아버지께 말했습니다.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이제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낮아졌지요. 제일 처음 나갈 때는 “아버지, 나의 분깃을 내게 주소서. 내 재산 가져가는 것 마땅한 일 아닙니까? 내가 당당하게 독립해서 잘살겠습니다.” 오만하던 그가 이렇게 깨어졌습니다. 나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어서 이제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합니다. 낮아졌습니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품꾼으로써 일하고 밥만 먹여주면 감지덕지 하겠나이다. 은혜를 깨닫고 아버지의 은혜로 산 것을 깨닫고 아버지에게 은혜를 간구하니까 아버지가 그 아들을 꾸짖었습니까? 꾸짖지 않았습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에게 은혜를 덮습니다. 아버지가 종들에게 말하기를 “제일 좋은 옷을 갖다 입혀라.” 냄새가 나고 돼지 똥이 묻어 있는데 목욕도 안했는데도 불구하고 제일 좋은 옷을 갖다 입혀라. 은혜를 아는 사람에게 은혜를 주는 것입니다. “가락지를 갖다 끼워라.” 반지라는 것은 아들이 되었다는 표시인 것입니다. 유대 나라에서는 자식이 태어나면 아버지와 어머니와 형제들 이름을 적어 놓은 반지를 끼워 주는 것입니다. 그는 떠나올 때 반지를 뽑아서 던져 버리고 왔습니다. “나는 이 집안 자식이 안되어도 좋다. 독립해서 살겠다.” 그러나 은혜를 알고 돌아오니 집안에 또다시 멤버로써 집안의 모든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자격, 아들의 자격을 부여한 것입니다. 반지를 끼우라. “신발을 갖다 신겨라.” 종은 맨발로 돌아다닙니다. 아들은 신발을 신깁니다. “신발을 신겨라. 그리고 이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잃었다가 얻었으니 살찐 송아지를 잡으라. 우리 먹고 즐기자”
잔치 분위기가 된 것 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깨어져서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하고 나오면 하나님이 십자가 밑에서 제일 좋은 옷을 입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다 씻어주고 의로운 입을 입히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아무 의로운 옷을 입을 자격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은혜를 알고 오니까 죄의 모든 더러운 옷을 벗겨 버리고 의로운 그리스도의 옷을 입혀서 하나님과 교통하고 영광을 얻게 하고 그리고 가락지를 끼우라. 아들을 만들어라. 성령의 인을 쳐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축복을 누릴 수 있는 하나님과 같이 밥상에서 밥을 먹을 수 있고 하나님이 계신 집에 함께 살 수 있는 아들의 자격을 주어라. 아담 이후로 쫓겨나서 하나님 근처도 못 가던 우리들에게 은혜를 알고 예수님께 나오면 아들의 자격을 주시고 그리고 신발을 신겨라.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는 신발을 신겨라. 하나님의 약속의 신발을 신겨서 다시는 발이 걸레처럼 찢어지고 상처투성이가 된 인생을 살지 말고 약속의 은혜의 신발을 신고 승리로 삶을 살도록 만들어라. 그리고 살찐 송아지를 잡으라. 믿음, 소망, 사랑, 의, 평강, 희락, 넘치는 행복의 축복의 송아지를 잡으라. 그리고 이제 너무나 슬프게 살았으니 우리 집에 들어와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잔치를 가지고 살라. 우리 인생을 잔치 집에서 사는 것처럼 즐거움을 가지고 살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은혜를 깨닫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넘치는 은혜를 주어서 은혜의 축복 속에 살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결론>
율법주의적인 자기가 깨어진 사람만이 예수님이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게 되고 믿고 감격하고 변화 받게 되고 천국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적인 자아가 깨어지지 않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은혜를 찾지도 않습니다. 은혜도 구하지 않습니다. 인본주의로 서서 자기가 잘난 줄 생각하고 자기의 힘과 자기의 능력으로 내가 하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율법주의로 사는 사람은 영원히 은혜를 맛보지 못하고 멸망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깨어지고 환난을 당하고 시련과 고통을 당하고 율법주의가 깨어지고 자아가 깨어진 사람은 율법의 비늘이 떨어지고 은혜에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자식이고 부모의 은혜를 생각하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스승의 은혜를 생각하면 그는 성장하고 지식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은혜를 생각하고 은혜를 감격하면 마음이 겸손해지고 낮아지고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더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깨어진 목사, 깨어진 장로, 안수집사, 권사, 집사님, 지역장, 구역장, 평신도 여러분 깨어진 사람이 되어서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까지 나되었구나. 내가 나 된 것은 내 힘으로 된 것이 아니구나. 내가 잘나서 오늘날까지 살아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날까지 살아왔구나. 저 하늘도 하나님의 은혜요, 땅도 하나님의 은혜요, 시간도 공간도 하나님의 은혜요, 내 생명도 하나님의 은혜요, 내 아내도 하나님의 은혜요, 내 자식도 하나님의 은혜요, 나의 직장도 하나님의 은혜요, 나의 일용할 양식도 하나님의 은혜요. 그러면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가 이루어지고 무릎을 꿇어 감사하게 되고 겸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낮아지고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지 않은 사람이 겸손하지 않고 교만하지, 은혜 받은 사람은 낮아지고 낮아지고 낮아지고 낮아지고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께 의지합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께 나오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예비한 모든 은혜를 퍼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용서와 의의 옷을 입혀라. 거룩하고 성령 충만을 주어라. 치료와 건강을 주어라. 아브라함의 복과 형통을 주어라. 부활, 영생, 천국을 주어라.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만들어 주어라. 택하신 족속으로 만들어라. 왕 같은 제사장으로 만들어라. 거룩한 나라로 만들어라. 소유된 백성으로 만들어라. 마음에 기쁨을 충만히 해서 잔치 집 같이 생활하게 만들어라. 은혜는 우리 인생을 잔치 집에서 살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내 마음속에 하나님과 더불어 기쁨을 가지고 우리 가정에서 내가 소속한 기관에서 기쁨의 전도자가 되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새해에는 여러분 깨어져서 은혜를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은혜를 보는 눈을 얻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내가 겸손해 지는 것입니다. 내가 낮아지고 겸손해졌거든 내가 은혜를 받은 줄로 아십시오. 더 낮아지고 더 겸손해지면 정말 은혜의 사람이 된 줄 아십시오. 은혜의 사람이 부르짖으매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 응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은혜의 사람이 부르짖으매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못자국난 손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인생의 승패는 은혜를 알고 은혜를 받는데 있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는 자기도 망하고 이웃도 망하고 영원이 멸망당하고 말 것입니다. 오직 살아남는 자는 은혜를 알고 은혜를 받고 은혜를 나누는 사람이 영원히 살아나고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게 되실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탕자가 은혜를 모르고 율법주의에 서서 당연지사로 생각하고 아버지의 은혜도, 어머니의 은혜도 당연지사고 자기가 잘 먹고 잘 입고 잘사는 것도 당연지사고 상속을 받는 것도 당연지사로 살고 율법주의로 서서 자기중심에 서서 자기 잘난 줄 알았다가 큰 기근을 당하여 깨어지고 부스러지고 문드러지고 난 다음에는 자기가 얼마나 비참한 존재요, 자기의 수단과 방법과 노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을 깨닫고 아버지 은혜를 깨닫고 어머니 은혜를 깨닫고 이웃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낮아지고 깨어지고 은혜의 하나님, 은혜의 아버지께로 돌아오매 은혜위에 은혜를 하나님이 주신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아버지여 은혜를 모르는 사람에게 아버지는 은혜를 주시지 않사옵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에게 은혜를 퍼부어 주십니다. 내 아버지 하나님, 우리 마음속에 율법주의적인 잔재가 남았으면 환난과 시험을 통해서라도 깨뜨려 주시옵소서. 환난과 시험의 칼바람이 불어와서 율법주의의 옷을 다 산산조각으로 결단내어 주시옵소서. 우리가 깨어져서 낮아지고 은혜의 눈이 뜨이게 만들어 주시고 은혜로써 낮아지고 겸허해지고 은혜의 하나님께 담대히 나가서 은혜위에 은혜를 받아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어 평생을 잔치 상에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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