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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4:13~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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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조용기 목사 |
참고 : | 2007년 1월 28일 주일2부설교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우물물과 생명수’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날 유대 땅을 가는 길에 사마리아를 통과 하시는데 정오가 되었습니다. 햇빛이 쨍쨍 쬐이고 대단히 더운 날씨였습니다. 배가 고프고 허기가 졌습니다. 사마리아에 동리밖에 있는 우물가에 왔을 때 예수님이 우물곁에 앉으셨는데 제자들은 음식물을 사러 사마리아 시내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한 여인이 온몸을 치렁치렁 너울로 덮어쓴 채 물동이를 짊어지고 물을 길러 나왔습니다. 보통 물은 아침에나 저녁에 길러 나오지 대낮에 길러 나오지 않습니다. 사연이 있는 여인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앉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들떠보지도 않고 우물가에 동여를 내려놓고 물을 긷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여인을 보시고 “물을 좀 주시오.” 그러니까 그 여인이 치켜 보면서 하는 말이 “당신은 유대인으로써 사마리아인을 개같이 취급하는데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 그때 예수님께서 “물을 달라는 이가 누군지 알았더라면 당신이 물을 달라고 구했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주었을 것이요.” “아니 이 우물은 굉장히 깊고 물 뜰 두레박도 없는데 무엇으로 당신이 물을 길러 내게 준단 말이오? 이 물은 우리 조상 야곱이 파놓은 우물이요, 그와 그 자식들과 짐승들이 이 우물에서 먹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넌지시 바라보시고 “이 물을 먹는 자는 다시 목마르거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다시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영생토록 솟아나는 샘물이 될 것이요.” 여자가 깜짝 놀랐습니다. 듣도 보도 못한 말입니다. “아니 그러면 그 물을 내게도 주사 나도 목마르지 않고 이 우물에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소서.” 예수님이 “네 남편을 데려 오시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맞았소. 당신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는데 다 버리고 지금은 오다가다 만난 여섯째 남자하고 살고 있소.” 굉장히 사연이 깊은 여자입니다. 왜 이 여자가 남편을 다섯이나 버리고 여섯 번째 남편하고 살고 있을까요? 저는 종종 이 여자가 지나온 과거사를 머릿속에 생각해 보고 이 여자의 사연을 추측해 본때가 있습니다. 이 여자는 틀림없이 상당히 미모의 여자 인 것 같습니다. 그 당시는 남존여비의 사상이 팽창한 때라 남자가 여자를 다섯을 갈았다면 스토리가 안 되는데 여자가 남자를 다섯 사람이나 갈았다는 것은 보통 여자가 아닌 것입니다. 보통 인물이 좋고 재색이 겸비한 그러한 여자가 아니고는 남자를 마음대로 발로 차버리고 또 구하고 또 차버리고 또 구하고 그것도 한 두 명이면 족할 것인데 다섯 명이나 그렇게 했다면 이것은 여장부입니다. 그런데 왜 이 여자가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 치웠을까? 제가 생각해 볼 때 그 여자는 삶의 의미와 행복을 남편을 통해서 얻으려고 한 것입니다.
<본론>
1. 수가 성 우물가의 여인
삶의 환경에서 인생의 의미와 가치와 행복을 찾아보려고 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좋은 신랑을 만나서 행복한 삶을 얻으면 인생에 젖과 꿀이 흐르는 삶을 살 수 있을 것 이라는 기대를 가졌습니다. 아마 이 여자는 제일 처음 돈 많은 부자하고 결혼을 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돈 많은 부자하고 결혼을 하면 좋은 집에서 많은 하인들을 거느리고 살며 호의호식하고 돈도 마음대로 쓰고 친구들과 여행도 하고 좋은 식당에 가서 음식도 먹고 얼마나 좋을까? 남편하고 해외여행도 다니고 정말 돈이 많은 남자하고 결혼하면 행복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돈 많은 남자하고 결혼을 했을 것입니다. 꿈을 품고 결혼을 해서 실제 살아보니 꿈하고는 다릅니다. 돈이 많은 남자가 돈을 많이 벌자니까 끊임없이 시간에 쫓겨서 언제 자기와 머리를 맞대고 가만히 오순도순 밥 먹을 시간이 없습니다. 아침에도 모임에 나가고 점심에도 모임에 나가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는 밤늦게 술이 취해서 돌아오고 그리고 돈이 많으니까 바람기가 있어서 소문들이 좋지 않게 나고 속상한 일이 많았습니다. 그 사람을 가만히 보니까 인생을 돈에 쫓기면서 사는 것 같습니다. 돈을 찾아가고 돈을 추구하기 때문에 자기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인간관계에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돈을 벌자니까 돈을 빌리기도 하고 빌려 주기도 하고 또 노사 갈등도 있고 돈 달라고 오고 돈 받을 것은 못 받으니 시비에 걸리기도 하고 상당히 고통스러웠습니다. 가만히 사는 삶을 보니까 일을 하기 위해서 살지 살기 위해서 일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삶이 자기 생각하던 그러한 무지개빛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이래서 가만히 보니 ‘아이고 늙기 전에 이 돈 많은 남자하고 살아서는 아무 희망이 없겠다. 나는 인생에 꿈꾸는 행복이 돈에서 오지 않는다.’ 그래서 그 남자를 차버리고 만 것입니다.
빌리 그래함은 그의 자서전에서 카리비안 섬에 있을 때의 일화를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하루는 그 섬에서 가장 부자인 사람이 그의 집으로 빌리 그래함 부부를 점심 식사에 초대했는데 75세가 되는 그 노인이 식사 시간 내내 무슨 말인가를 할듯할듯 하면서 안하더니 드디어 식사를 마치고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밖에 요트가 있어서 제가 원하는 곳은 어디든지 갈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는 개인 자가용 비행기도 있고 헬리콥터도 있습니다. 행복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이 있지만 저는 너무나 비참합니다. 나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돈이 행복을 줄줄 알았더니 나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울었습니다. 바로 그날 오후에 빌리 그래함 부부는 그 지역 목사님의 방문을 받았는데 그 목사님도 75세로 그리스도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열정과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노인은 말하기를 “목사님, 저는 제 앞으로 2파운드의 돈도 갖고 있지 않지만 이곳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이 섬에서 나는 가장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처럼 환경에서 삶의 의미와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참된 행복은 돈과 같은 외적인 환경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돈이 행복을 가져온다면 이 여자는 부자하고 영원히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돈이 결코 행복을 갖다 주지 못했습니다. 전5:10~12에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재산이 많아지면 먹는 자들도 많아지나니 그 소유주들은 눈으로 보는 것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그 부요함 때문에 자지 못 하느니라”
눅12:15에도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 하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행복계량학파의 에드 디너 교수는 2004년 포브스가 뽑은 미국 400대 부호와 인터뷰를 했는데 이들의 행복지수는 동토의 땅 그린란드에 사는 사람들이나 케냐 사막의 유목 민족과 거의 같은 수준으로 나타났습니다. 타임스 誌의 연구 결과도 비슷했습니다. 행복을 주는 요인 중 돈은 14위로 애정이나 자유, 유머보다도 그 순위가 훨씬 아래였습니다. 과학저널 사이언스에 실린 연구논문은 "평균 이상의 소득을 가진 사람들은 더 긴장되어 있고 특별히 즐길 만한 행동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않기 때문에 일반인들보다 더 행복하지 않다"고 결론지었습니다. 미국 노동부 자료에 따르면 사람들이 돈이 많아질수록 행복을 위해 쏟는 시간이 더 적어지기 때문에 오히려 행복감이 떨어질 수 있다고 합니다. 돈의 노예가 되거든요. 돈을 추구하다 보니까 시간도 환경도 돈벌이에 다 빼앗기고 아내도 자식도 가족도 돌볼 겨를이 없습니다. 돈으로 행복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돈의 노예가 되어서 항상 긴장 속에서 살고 스트레스 속에 살기 때문에 돈은 오히려 불행의 근원이 될 수가 있습니다. 돈 많은 사업가는 시간에 쫓기고 돈에 쫓기고 인간관계로 시달리는 생활을 합니다. 이들은 일하기 위해 사는 삶 일뿐 거기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와 행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혜롭고 총명한 여인은 부자와 살아서 결코 인생의 의미와 가치와 행복을 가질 수 없고 공허한 마음을 채울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그 부자를 발로 차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제2의 인생을 살아야 되겠다.’ 그는 또 꿈을 꾸었습니다. ‘나는 정치가하고 결혼하겠다. 신바람나지 않느냐. 대중 앞에 나가서 연설을 하고 박수를 받고 권력을 가지고 살면 사람들 앞에서 존경을 받고 권력 있는 사람에게 아부하는 사람도 많고 친구도 많으니 화려한 인생을 정치가로써 살아보면 좋겠다.’ 그래서 정치가에게 시집을 갔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정치가에게 시집을 가고 난 다음 가만히 보니까 사생활이 전혀 없습니다. 정치가는 공인으로 살기 때문에 항상 사람들의 눈앞에 비평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옷을 못 입어도 비평하고, 잘 입어도 비평하고, 좋은 집에 살아도 비평하고, 못난 집에 살아도 비평하고 걸음 걸이 조차도 비평의 대상이 됩니다. 요사이 인터넷 홈페이지에 보면 온갖 비평이 다 올라옵니다. 아주 그것 보면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인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나 변덕스러운 민심인지 널뛰는 여론조사에 하루도 마음이 편하지 못합니다. 어제 여론조사에 50%라고 지지한다더니 오늘 여론조사에 30%가 되고 대통령 출발 때 여론조사가 60%더니 대통령 말기에는 10%도 안 되고 널뛰는 민심에 마음이 괴로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무한경쟁 사회 속에서 정치인들의 의합집산이 끊임없습니다. 정당으로 모였다가 헤어지고 헤어졌다가 또 모이고 깨어지고 서로 비난, 시기, 모략, 중상이 끝이 없습니다. 정치가의 아내로 살아보니까 아예 골머리가 아픕니다. 지위도 명예도 권세도 행복을 갖다 주지 못합니다. 그는 행복을 추구해서 왔는데 행복이 아니라 이것은 사자와 곰의 동굴에 들어와서 서로 권력다툼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만히 생각하니 여기에도 행복이 없다. 결론을 지었습니다.
시146:3~4에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 하리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생각하기를 ‘아이고 부자도 소망이 없고, 정치가도 행복을 갖다 주지 못하니까 착하고 조용한 백면서생인 학자하고 결혼해야 되겠다. 학자하고 결혼하면 점잖고 행복하게 살 수있지 않겠느냐. 잘 이해도하고, 동정도 해주고, 대화도 오순도순 하면서 시끄럽지 않게 잘 살수 있겠다.’는 꿈을 가지고 또 학자를 꾀여 가지고서 학자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학자하고 결혼해서 얼마 살아보니까 이 학자는 자기하고 결혼한 것이 아니에요. 학문하고 결혼한 사람이에요. 집에 와서 항상 서재에 들어가서 처박혀 있고 좀 이야기 하자면 내일 강의할 원고 작성해야 되는데 왜 잔소리를 하느냐. 시끄럽다고 고함을 칩니다. 그리고 늘 연구 논문 작성에 머리를 쓰고 연구하는데 골몰합니다. 도대체 나하고 결혼했나, 학문하고 결혼을 했나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학자하고 결혼하는데 계산을 잘못했습니다. 학자가 타오는 월급이 쥐꼬리만 하니까 그것으로 먹고 사는데도 넉넉하지 못하고 때를 따라 변화되는 시절을 쫓아 사 입을 옷도 충분히 사 입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식사시간에 만나서 대화를 해보면 딴 세상 이야기를 합니다. 완전히 자기는 학자 일 때는 학자 학문의 이야기를 하는데 자기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친구들과의 이야기, 동리의 이야기를 하면서 아무런 관심도 흥미도 베풀어 주지 않습니다. 자기하고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나는 우리 교회에 나오는 자매님 한분의 눈물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서대문에서 있을 때 입니다. 그 부인이 대학교수의 부인인데 유명한 한국의 생화학 교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와서 도저히 그 남편하고 살수 없어서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하면서 신앙상담을 왔는데 왜냐 하니까 자기 남편이 2층집인데 집에 아래층에는 쥐를 기른답니다. 실험용 흰쥐를 잔뜩 기르는데 항상 자기에게 제일먼저 묻는 말이 “흰쥐 밥 주었느냐? 물 주었느냐? 흰쥐 돌봐 주었느냐?” 자기는 흰쥐를 기르는 종으로써 사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화가 나서 집에 들어오면 흰쥐부터 먼저 들여다보고 자기를 안 찾았기 때문에 흰쥐를 지하실로 다 치워 버렸습니다. 흰쥐를 치워 버리면 자기를 찾을 줄 알고 흰쥐를 다 지하실로 치워 버리고 난 다음 집에 있으니까 남편이 학교 갔다 오더니만 “여보” 그러거든요. ‘아이고 날 찾는구나. 이제는 쥐를 찾지 않고 나를 찾는구나.’ “나 여기 있어요. 빨리 오세요.” 그러니까 “흰쥐 어디 두었어?” 자기를 찾는 것이 자기를 사랑해서 찾는 것이 아니라 쥐를 찾기 위해서 자기를 찾는다. 자기는 쥐보다 못하다. 이런 인생을 무엇 하러 살아야 되느냐. 그래서 나에게 신앙상담을 왔어요. 쥐보다 못한 내 인생을 내가 무엇 때문에 살아야 되겠습니까? 나중에 그 남편도 교회에 데리고 와서 제가 신앙상담을 했습니다만 쥐보다 아내를 더 사랑하라고 제가 간절히 부탁한 적이 있습니다. 학자하고 살아보니까 자기와 세계가 다릅니다. 그러므로 도저히 이야기를 해도 벽면을 두고 이야기 하는 것 같이 서로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마음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꿈도 이상도 채울 수가 없습니다.
전1:18에 보면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전12:12에 많은 책들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한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학자와 같이 사는 것은 자기로써는 견딜 수가 없기 때문에 그도 포기하고 하루는 학자보고 “당신 길로 가세요. 나는 당신하고 내 이상을 이룰 수 없으니 살수 없소. 빠이빠이.” 그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그는 꿈을 꾸기를 ‘이제는 도시생활 질력이 난다. 부자도 정치가도 학자도 다 필요 없다. 시골로 가야 되겠다. 맑은 공기를 숨 쉬고 아침에 종달새 울음을 들으면서 깨어나고 아침 이슬을 밟으면서 농토를 걸으며 토마토 심어서 토마토 먹고 감자 심어서 감자 삶아먹고 고구마 심어서 고구마 먹고 얼마나 이상적이고 좋은 삶이냐. 건전하고 건강한 삶을 살겠다.’ 그래서 농촌 농부를 꾀 가지고서 또 시집을 갔어요. 농부는 왠 떡이냐, 도시에 아름다운 여인하고 결혼을 했으니 아주 신바람이 났습니다. 그래서 신혼의 단꿈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농부는 별수 없이 농사를 지어야 되니까 아침 일찍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새벽같이 일어나야 되는데 종달새가 울기 전에 일어나야 돼요. 일어나니까 시골에 일꾼들에게 밥을 지어줘야지요. 그 다음에는 짐승들에게 소죽 끓여 주어야지요. 그리고 바쁘게 하고 난 다음에는 집에 있을 수가 있습니까? 일터에 나가야 됩니다. 머리에 수건 쓰고 호미 들고 나가서 김 메야지요. 허리가 아프도록 김을 메고 낮에는 또 점심상 차려야 되지요. 저녁 늦게 들어오면
온 사지가 쑤시지요. 이것 종달새 소리 듣고 일어나고 아침 이슬 밟으면서 상쾌한 공기를 마시고 걸으면서 토마토 먹고 사과 먹고 그런 꿈은 다 산산조각 나고 만 것입니다. 왜냐하면 토마토도 수확하니까 신선하고 좋은 토마토를 먹으려고 하니까 남편이 돈 될 것 먹지 말라고 썩어진 토마토만 먹으라고 하고 감자도 썩어진 감자만 삶아먹고 이 세상에 모든 것이 이상에 맞지를 않습니다. 육체적인 수고는 말할 필요 없거니와 농산물을 생산해서 판매하는데 염려, 근심이 많습니다. 농사를 짓는데 들어가는 비용도 안 나오는 생산가에도 미치지 못하는 판매를 하게 되니 걱정, 근심이 많고 몸이 거칠어져서 도시에서 올 때 언제 크림을 발랐는지 얼굴을 바라보니 새카맣게 되고 손도 거칠어지고 손톱도 길던 것이 다 갈라지고 말이 아닙니다. ‘내가 이렇게 있다가 완전히 고구마 할머니 되고 말겠다. 내가 이런 농부 아내로써 무슨 희망과 꿈이 있겠느냐.’하루 가만히 생각하다가 집어치우고 “여보, 나는 당신하고 못살겠어. 당신은 농촌 여자하고 살아요. 빠이빠이.” 발로 차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으로 생각하기를 ‘이제는 부자도 말고 정치인도 말고 학자도 말고 농부도 말고 파도소리나 들으면서 나의 귀는 조개껍질 파도소리를 그리워하오. 철썩철썩 파도치는 소리 들으며 바다의 신선한 공기를 맛보고 모래밭 위를 걸으며 펄떡펄떡 하는 생선을 잡아와서 회쳐먹고 걱정 없이 사는 어부에게 결혼을 해야 되겠다.’ 그래서 또 잘 골라서 어부에게 프로 포즈 하니까 어부가 왠 떡이냐 하고 덥썩 물었습니다. 그래서 잘 골라서 어부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그래서 어부하고 결혼을 했어요. 그리고 이제 행복하게 사는 줄 알았는데 어부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으니까 배를 타고 고기를 잡으러 나가는데 자기는 생각지 못한 일이 생겼습니다. 파도 소리를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파도소리가 공포로 변했습니다. 왜냐하면 기상변화에 따라서 파도가 치면 남편배가 침몰 되었는지 아닌지 알 수가 없어요. 매일같이 기상대에서 발표하는 기상소식에 귀를 기울이고 파도에 파만 들으면 간이 철렁거립니다. 조용하면 좋은데 파도소리가 요란스러우면 배가 파선되지 안 았나 두려움이 끝이 없습니다. 또한 생선이 많이 잡힐지 안 잡힐지 늘 불안하고 그리고 물고기의 수확이 불확실하기 때문에 생활에 염려가 많습니다. 또 남편이 잡은 펄떡펄떡 치는 생선을 회쳐 먹으려고 하니까 남편이 눈을 부릅뜨고서 “이것은 팔아야지. 이것을 먹으면 되느냐?” 잡아오다가 눈알이 썩은 생선을 보고 이것이나 먹으라고 합니다. 이럴 수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고 남편이라고 저녁에 이브자리에 들어오는데 생선 냄새가 비린내가 나서 곁에 데리고 잘 수도 없습니다. 환경이 자기가 생각하는 이상과 꿈은 다 사라지고 모든 것이 불안과 공포뿐입니다. 하늘을 봐도 구름만 봐도 공포요, 바람소리만 나도 공포가 들리고 언제 배가 파선될지 남편이 무사히 돌아올지 모르고 돌아와도 늘 마음에 불안하고 이상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생각하기를 ‘에라. 농부하고도 안 되는 것이 어부하고도 나는 인연이 없다.’ “여보, 당신 고기잡이 딸하고 결혼해서 사세요. 나는 당신하고 못살겠습니다.” 발로 차버렸습니다.
잠27:1에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고기잡이의 부인이 되니까 하루에도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시38:8에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 하나이다”
마음이 불안하고 신음하는데 살수가 있습니까?
2. 삶의 행복을 포기한 삶
이래서 다섯 남편을 바꾸고 나니까 너무나 공허하므로 이제는 아무 이상도 꿈도 없이 오다가다 만난 놈팽이 하나 데리고서 사는 것입니다. 결혼도 할 수가 없고 이상도 없고 꿈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의 소문거리가 되므로 아침에 물 길러 나오면 동리 사람들에게 다 손가락질 받고 저녁에 물 길러 나오면 손가락질 받기 때문에 사람들이 물 길러 나오지 않은 대낮 쨍쨍 햇볕이 비취는 그때야 물동이를 메고서 물 길러 나오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그 여인은 삶의 행복을 포기했습니다. 환경에서 삶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부자에게서도 행복을 얻을 수가 없고 정치가에게서도 행복을 얻을 수 없고 학자에게도 행복을 얻을 수 없고 농부에게도 행복을 얻을 수 없고 그는 어부에게도 행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 여자는 사람을 통하여 환경을 통하여 행복을 추구하고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았는데 번지를 잘못 짚은 것입니다. 결코 행복은 사람을 통해서 얻을 수도 없고 환경을 통해서도 행복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한 것처럼 이 물을 마시면 또 목말라진다. 우물물을 다섯 번 갈아 마셨습니다. 부자 집 우물 마시고 그 다음에는 정치인 우물 마시고 학자의 우물 마시고 농부의 우물 마시고 어부의 우물 마시고 이 물을 마시면 다시 목말라진다. 아무리 깊은 우물의 물이라도 세상 물마시면 다시 목말라진다. 내가 주는 물을 마셔야 목마르지 않게 된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여러분 여섯 번째 남편을 거느리고 대낮에 물 길러온 그 여인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그는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졌습니다. 허무와 무의미를 되씹고 살았습니다. 여러분 그때에 예수님을 만나게 된 큰 행운이 다가오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예수님 없이는 절망적인 존재인 것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을 삼대절망에 처한 존재라고 했습니다. 죄책과 정죄의 절망에 처한 인간은 짐승과 달라서 모두다 양심이 있으므로 죄책을 느낍니다. 살아갈수록 부모에 대해서 잘못한 죄책, 남편이나 아내에 대해서 잘못한 죄책, 자식들에게 잘못한 죄책, 이웃하고 잘못 산 죄, 살아가면 마음속에 죄책과 정죄의식만 쌓이고 이것을 없앨 수가 없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사람은 죄인된 것을 깨닫고 있으니 죄책의 절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시38:4에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
렘2:19에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야훼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다 죄책과 정죄의 절망을 가슴에 안고 삽니다. 그리고 허무와 무의미의 절망 속에 허덕이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시골에 아무 학문이 없는 농부라도 밭에서 일하다가 허리를 툭툭 치고 일어나서 ‘후유 인생이 무엇인가. 일하다가 죽어서 북망산천으로 돌아가면 아무것도 없지 않는가. 무엇 때문에 사는가, 밤낮으로 아침에 일어나서 낮에 일하고 저녁에 피곤한 몸을 끌고 집에 들어가서 잠자고 이 생활이 반복하는 가운데 머리를 희어지고 허리는 굽어지고 이렇게 죽는 구나’ 허무와 무의미, 사람은 이 세상에 분명하게 살다가도 어느 순간에 재정신이 들어오면 인생이 왜 이렇게 허망 하냐, 스스로 느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참 젊을 때는 그것을 못 느끼지만 나이를 먹어갈수록 허무와 무의미가 그 삶속에 파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시39:6에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 하나이다”
잠14:13에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
벧전1:24에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그러므로 인생 자체가 무엇입니까?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인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다 허무와 무의미의 절망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십시오. 온 천하를 휘어 잡겠다고 큰소리하던 정치인들도 다 떠나가고 한줌의 흙으로 변화되고 천하를 호령하던 경제인들도 우리 기억에서 사라져간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있는 것은 없어지고 존재하는 것은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도 다 무를 향해서 줄달음질쳐 가고 있는 것입니다. 심장의 고동소리를 따라서 한발자국, 두발자국 우리는 죽음을 향해서 전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이다. 이것이 가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가 있다. 이것이 정말 행복이라고 무엇 하나 드러내놓을 것이 없이 다 지나가 버리고 마는 것이고 우리는 허공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 일장춘몽이요, 거품을 잡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인간은 또한 죽음과 무의 절망에 처한 것입니다. 저는 매 토요일에 기도원에 기도하러 올라갑니다. 기도하러 올라가면서 왼편에 저 산위의 무덤을 바라봅니다. 그곳에 우리 최자실 목사님도 계시고 그곳에 작년 까지만 해도 살아계신 우리 아버님이 누워 계시고 그곳에 우리 장로님, 안수집사님, 권사님, 지역장, 구역장 줄줄이 아무 이야기 없이 그 무덤에 누워 있습니다. 제가 지나가면서 그들을 볼 때 내 뇌리 속에 그들의 살아서 저와 함께 웃고 박수치고 울고 신앙상담하고 찬양하던 것이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그러나 무덤에 들어가서 아무 이야기 없습니다. 저를 봐도 잘 왔다고 말도 하지 않습니다. 환영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추억만 내 머릿속에 남아있지 죽음은 무로서 그들을 덮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만일 죽어서 영혼이 없다면 인간의 삶이란 너무나 비참합니다. 짐승은 죽어서 저 건너편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죽으면 그뿐이지만 인간은 죽고 난 다음 무엇이 있을까, 저 건너편을 생각하면서 죽기 때문에 더 비극적인 존재인 것입니다.
시89:48에 “누가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자기의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지리이까”
히 9:27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시편90:4~5에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 이니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순식간에 인생은 지나가고 죽음으로써 우리는 끝이 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사는 그 자체가 절망인 것입니다. 이 수가성 물가의 여인만 삶의 절망을 느낀 것이 아니라 모든 인생으로 태어난 사람은 죄책과 정죄의 절망, 허무와 무의미의 절망, 죽음과 무의 절망을 가슴에 안고 사는 존재인 것입니다. 가슴속에 텅빈 절망의 공간을 안고서 사람들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에 든 것이 인간의 실존인 것입니다. 그러한 가슴을 안고서 사람들은 환경의 행복을 찾습니다. 사람을 통하여 행복을 찾고 부귀, 영화, 공명을 통해서 행복을 찾고, 출세를 통해서 행복을 찾는데 여태까지 인류 역사상 그를 통해서 행복을 찾은 사람이 없습니다. 옛 시인은 말하기를 산너머 행복이 있다기에 산을 넘어가니 또 저 산너머 행복이 있다 하더라. 행복의 무지개를 찾아 아무리 산을 넘고 들을 달리고 개울을 건너도 행복은 저만큼 멀리 있고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날 환경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은 언제나 허무하게 되는 것입니다.
1977년 하워드 휴즈와 폴 게티라는 미국의 대부호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미국 항공 산업의 개척자이자 영화 제작자였던 하워드 휴즈는 억만장자였지만 영양실조로 죽었습니다. 그는 정신적인 고독과 공허를 달래기 위하여 방탕한 생활을 했고, 건강이 나빠지자 그의 주변에는 그의 재산을 노리는 사람들이 몰려 모든 사람을 불신하여 강박장애에 빠졌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독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집에서 혼자 요리사를 불러다 놓고 쥬스만 마시고 살았습니다. 영양실조가 걸려 그는 죽었을 때 그의 머리털은 정강이까지 길게 내려왔습니다. 손톱은 매 발톱과 같았습니다. 정신이상이 걸려 죽은 것입니다. 억만장자가 되었지만 수없이 결혼하고 이혼하고 결혼하고 이혼했으므로 죽었을 때 그를 위해서 울어주는 사람 한 사람 없고 모두 다 재산만 탐해서 악의 다툼을 한 것입니다. 그는 결코 행복하지 못하고 고독하고 쓸쓸한 사람의 대명사로써 세상을 뜨게 된 것입니다. 그 다음 석유를 통해서 억만장자가 된 폴 게티는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늘 본문의 사마리아여인처럼 다섯 번 결혼해서 다섯 번 이혼했습니다. 그가 런던에 있을 때 신문기자가 폴 게티에게 와서 “당신은 행복했습니까?” 하니까 성을 버럭 내면서 “행복이 어디 있어? 돈 있다고 행복하나?” 고함을 쳤습니다. 그는 돈이 많았기 때문에 그 자손들도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막내아들은 폐렴으로 죽고, 장남은 과음으로 죽었습니다. 아무리 외형적인 조건이 풍부해도 삶의 행복을 포기한 삶은 죄책과 정죄의 절망, 허무와 무의미의 절망 가운데 빠져서 허우적이게 되는 것입니다.
프랑스 철학자인 파스칼은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는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은 공백이 있다. 이것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질 수 없고 오직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의해서만 채워질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없이 지위나 명예나 권세나 돈이나 쾌락으로 이 마음의 공백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마음의 공백인 것입니다. 동물들은 그것이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들어와야 마음속에 가득하게 채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는 언제나 마음속에 허무와 무의미를 되씹히며 살수밖에 없습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 당신은 당신 자신을 위해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마음은 당신 안에서 안식을 찾을 때까지 평안을 누리지 못합니다.”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세상 우물은 아무리 마셔도 목마르고 터진 웅덩이일 뿐입니다. 우리 마음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높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결코 인간의 행복은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우물물과 생명수를 우리는 잘 선택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부귀, 영화, 공명, 출세는 모두다 우물물입니다. 그 물은 자꾸 우물물을 바꿔 가면서 마셔도 또 목마르고 마셔도 또 목마른 것입니다. 생수는 예수님밖에 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3. 우물물과 생명수
요4:13~14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만이 영원히 솟아나는 샘물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시지 않고는 언제나 목마릅니다. 돈이 있어도 목마르고 권력이 있어도 목마르고 지위나 명예가 있어도 목마르고 부귀와 영화가 있어도 목마릅니다. 그 목마름은 세상 것으로 아무리 바꿔도 채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수가 성 우물가의 여인처럼 아무리 남편을 바꾸고 환경을 바꾸어도 목마름을 채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 우물은 아무리 마셔도 목마르나 그것은 터진 우물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렘 2:13에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 들이니라”
모두 다 터진 웅덩이입니다. 대통령 자리도 터진 웅덩이고, 장관 자리도 터진 우물이고, 재벌의 자리도 터진 웅덩이인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모든 지위, 명예, 권세, 부귀, 영화는 다 터진 우물이요, 다 물이 줄줄 세 버리고 나중에는 바짝 말라 버릴 것입니다. 그것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 허무맹랑하게 되고 좌절하고 절망하게 될 것입니다.
사29:8에 주린 자가 꿈에 먹었을지라도 깨면 그 속은 여전히 비고 목마른 자가 꿈에 마셨을지라도 깨면 곤비하며 그 속에 갈증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한 것입니다.
꿈에 먹은들 깨면 무엇입니까? 꿈에 물이 마신들 목마름이 가셔지지 않는 것이 오늘날 인생이 살아가는 것인 것입니다. 속에서 찾은 행복이 되어야 참된 행복이 됩니다. 밖에서 찾는 행복은 다 터진 우물을 찾는 것입니다. 참 행복은 속에서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 속에 찾은 행복은 예수님을 속으로 모셔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4:24~26에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 지니라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 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이 여자와 대화하는 중에 그 여자가 우리 조상들은 다 사마리아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당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는 데가 있다고 합디다. 그러자 예수님이 “여자여, 이제는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사마리아에서도 말고, 진실로 하나님을 찾을 데가 어디냐. 하나님은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 “우리는 이것 몰라요. 메시아가 오면 그것 알려줄 것이요.” “내가 바로 그 메시아요.” 이 여자의 눈이 번쩍 깨었습니다. 그는 깜짝 놀랬었습니다. 생명의 근원되신 예수님이 자기 앞에 있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깨닫고 마음을 열고 모셔 들이자마자 그렇게 갈급하던 마음속에 생명수가 넘쳐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는 물동이를 내던져 버리고 너울도 던져 벗어 버리고 미친 사람같이 천방지축으로 뛰어서 사마리아 시내로 들어가서 고함 고함을 쳤습니다. “여보시오. 내 말 들으십시오. 메시아를 내가 만났소. 우물가에서 내가 메시아를 만나서 내가 변화된 것을 보십시오. 남편을 다섯이나 바꾸고도 허무맹랑하고 마음이 허무하고 고통스러웠는데 그분을 만나고 보고 난 다음에 마음에 만족하고 생수가 강같이 넘쳐흐르게 되었소.” 외친 것입니다. 그 사실이 바로 수가성 우물가 여인의 변화의 사실인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만이 생명의 근원이 되십니다.
요14: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생명의 원천 되시는 아버지에게 갈 길이 열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는 것입니다.
요1:4에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 속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 몸 찢고 피를 흘려 이 생명수를 터뜨려 놓은 것입니다.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서 우리는 용서와 의의 생명수를 마십니다. 십자가의 보혈을 통하여 거룩함과 성령 충만의 생명수를 마시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의 보혈을 통하여 치료와 건강의 생명수를 마시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의 보혈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축복과 형통의 생명수를 마십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부활, 영생, 천국의 생명수를 마시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 나와서 예수를 구주로 모시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은혜의 생명수를 마시게 되는 것입니다. 택하신 족속의 생명수가 넘쳐나고 왕 같은 제사장의 생명수가 넘쳐나고 거룩한 나라의 생명수가 넘쳐나고 소유된 백성이라는 생명수가 넘쳐나는 것입니다.
요7:37~39에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목마른 자는 이제 세상의 우물을 찾아가지 말고 예수님을 찾아와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우물은 마시면 또 목마르고, 마셔도 또 목마르지만 영원토록 솟아나는 샘물은 예수님만이 주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의미와 가치와 행복은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오신 예수님 안에서 찾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엡2:4~5에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그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빛과 같이 마른땅의 냇물같이 목마른 자에게 생수같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사32:2에 “또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으리니”
사44:3에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론>
수가 성 여인은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깨닫자 순식간에 속에서 생수가 넘쳐나고 변화가 다가오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속에 있는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을 의지하십시오. 하나님께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 속에 생수가 넘치도록 기도하십시오. 행복은 여러분 속에 들어오신 예수님께로부터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밖에는 아무리 빛이 찬란해 보여도 거짓입니다. 사기입니다. 속습니다. 이 수가 성 우물가의 여인처럼 청원의 꿈을 품고 행복을 그리워하면서 그는 남편을 다섯 번이나 갈아 우물물을 다섯 번이나 갈아 마셨습니다. 행복은 없었습니다. 좌절과 절망밖에 없었으나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깨닫자마자 그 영혼 속에 만족과 행복과 생수가 넘쳐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빛이요, 소망이요, 생수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의, 평강, 희락은 모두다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므로 여러분 생애 속에 태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 있어야 돈도 효과를 발생하고 예수 있어야 권력도 효과가 있으며, 예수 있어야 학문도 가치가 있으며, 예수 있고 농사지으며, 예수 있고 물고기 잡으며, 예수 믿고 세상에 살면 부귀와 영화와 공명도 축복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 없는 것은 다 터진 웅덩이인 것입니다. 하나도 행복을 그 속에 에워 놓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찬송가 409장 다 같이 한번 부르십시다.
1. 목마른 내 영혼 주가 이미 허락한 그 귀한 영생 수 주여 갈망합니다.
그 약속 따라서 힘써 간구하오니 오주여 내 기도 어서 들어주소서.
예수의 사랑 예수의 사랑 바다 물결같이 내게 임하니
영광의 물결에 온전히 싸여서 내영혼의 기쁨 한량없도다.
2. 주 내게 약속한 큰 비 내려 주시려 은혜의 저 구름 건너편에 떠올라
그 귀한 징조가 내게 밝히 보이니 나 힘을 다하여 주께 간구합니다.
예수의 사랑 예수의 사랑 바다 물결같이 내게 임하니
영광의 물결에 온전히 싸여서 내영혼의 기쁨 한량없도다.
3. 은혜의 소낙비 지금 흡족히 내려 구원의 큰 강물 흘러 차고 넘쳐서
내 추한 모든 죄 모두 씻어 버리니 나 지금 은혜를 충만하게 받았네
예수의 사랑 예수의 사랑 바다 물결같이 내게 임하니
영광의 물결에 온전히 싸여서 내영혼의 기쁨 한량없도다.
4. 그 차고 넘치는 주의 은혜의 물결 힘차게 밀려와 내게 만족하오니
오 할렐루야로 주를 찬송하오니 내 맘에 기쁨이 항상 충만함이라
예수의 사랑 예수의 사랑 바다 물결같이 내게 임하니
영광의 물결에 온전히 싸여서 내영혼의 기쁨 한량없도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기쁨이 넘치고, 즐거움이 넘칩니다. 평안하고, 예수님 안에서 나는 행복합니다.’ 옆에 계신 분들에게 ‘당신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 고개 숙여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시여!
우리 사람들은 헛되이 분유하며 하나님 없이 무슨 일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야훼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야훼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면 파숫 꾼의 경성함이 허사가 되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저녁에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허사입니다. 내 아버지 하나님이여,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처럼 남편을 다섯이나 바꾸어도 행복을 얻지 못합니다. 행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을 수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십자가에 못 박혀 우리 위해서 몸 찢고 피 흘려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께서 생명의 원천이 되시고 생수의 근원이 되심을 감사합니다. 이 예수님을 모시고 그리스도에 의지해서 진실한 행복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 이름 받들어 기도드리옵나이다. - 아멘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우물물과 생명수’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날 유대 땅을 가는 길에 사마리아를 통과 하시는데 정오가 되었습니다. 햇빛이 쨍쨍 쬐이고 대단히 더운 날씨였습니다. 배가 고프고 허기가 졌습니다. 사마리아에 동리밖에 있는 우물가에 왔을 때 예수님이 우물곁에 앉으셨는데 제자들은 음식물을 사러 사마리아 시내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한 여인이 온몸을 치렁치렁 너울로 덮어쓴 채 물동이를 짊어지고 물을 길러 나왔습니다. 보통 물은 아침에나 저녁에 길러 나오지 대낮에 길러 나오지 않습니다. 사연이 있는 여인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앉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들떠보지도 않고 우물가에 동여를 내려놓고 물을 긷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여인을 보시고 “물을 좀 주시오.” 그러니까 그 여인이 치켜 보면서 하는 말이 “당신은 유대인으로써 사마리아인을 개같이 취급하는데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 그때 예수님께서 “물을 달라는 이가 누군지 알았더라면 당신이 물을 달라고 구했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주었을 것이요.” “아니 이 우물은 굉장히 깊고 물 뜰 두레박도 없는데 무엇으로 당신이 물을 길러 내게 준단 말이오? 이 물은 우리 조상 야곱이 파놓은 우물이요, 그와 그 자식들과 짐승들이 이 우물에서 먹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넌지시 바라보시고 “이 물을 먹는 자는 다시 목마르거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다시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영생토록 솟아나는 샘물이 될 것이요.” 여자가 깜짝 놀랐습니다. 듣도 보도 못한 말입니다. “아니 그러면 그 물을 내게도 주사 나도 목마르지 않고 이 우물에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소서.” 예수님이 “네 남편을 데려 오시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맞았소. 당신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는데 다 버리고 지금은 오다가다 만난 여섯째 남자하고 살고 있소.” 굉장히 사연이 깊은 여자입니다. 왜 이 여자가 남편을 다섯이나 버리고 여섯 번째 남편하고 살고 있을까요? 저는 종종 이 여자가 지나온 과거사를 머릿속에 생각해 보고 이 여자의 사연을 추측해 본때가 있습니다. 이 여자는 틀림없이 상당히 미모의 여자 인 것 같습니다. 그 당시는 남존여비의 사상이 팽창한 때라 남자가 여자를 다섯을 갈았다면 스토리가 안 되는데 여자가 남자를 다섯 사람이나 갈았다는 것은 보통 여자가 아닌 것입니다. 보통 인물이 좋고 재색이 겸비한 그러한 여자가 아니고는 남자를 마음대로 발로 차버리고 또 구하고 또 차버리고 또 구하고 그것도 한 두 명이면 족할 것인데 다섯 명이나 그렇게 했다면 이것은 여장부입니다. 그런데 왜 이 여자가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 치웠을까? 제가 생각해 볼 때 그 여자는 삶의 의미와 행복을 남편을 통해서 얻으려고 한 것입니다.
<본론>
1. 수가 성 우물가의 여인
삶의 환경에서 인생의 의미와 가치와 행복을 찾아보려고 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좋은 신랑을 만나서 행복한 삶을 얻으면 인생에 젖과 꿀이 흐르는 삶을 살 수 있을 것 이라는 기대를 가졌습니다. 아마 이 여자는 제일 처음 돈 많은 부자하고 결혼을 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돈 많은 부자하고 결혼을 하면 좋은 집에서 많은 하인들을 거느리고 살며 호의호식하고 돈도 마음대로 쓰고 친구들과 여행도 하고 좋은 식당에 가서 음식도 먹고 얼마나 좋을까? 남편하고 해외여행도 다니고 정말 돈이 많은 남자하고 결혼하면 행복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돈 많은 남자하고 결혼을 했을 것입니다. 꿈을 품고 결혼을 해서 실제 살아보니 꿈하고는 다릅니다. 돈이 많은 남자가 돈을 많이 벌자니까 끊임없이 시간에 쫓겨서 언제 자기와 머리를 맞대고 가만히 오순도순 밥 먹을 시간이 없습니다. 아침에도 모임에 나가고 점심에도 모임에 나가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는 밤늦게 술이 취해서 돌아오고 그리고 돈이 많으니까 바람기가 있어서 소문들이 좋지 않게 나고 속상한 일이 많았습니다. 그 사람을 가만히 보니까 인생을 돈에 쫓기면서 사는 것 같습니다. 돈을 찾아가고 돈을 추구하기 때문에 자기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인간관계에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돈을 벌자니까 돈을 빌리기도 하고 빌려 주기도 하고 또 노사 갈등도 있고 돈 달라고 오고 돈 받을 것은 못 받으니 시비에 걸리기도 하고 상당히 고통스러웠습니다. 가만히 사는 삶을 보니까 일을 하기 위해서 살지 살기 위해서 일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삶이 자기 생각하던 그러한 무지개빛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이래서 가만히 보니 ‘아이고 늙기 전에 이 돈 많은 남자하고 살아서는 아무 희망이 없겠다. 나는 인생에 꿈꾸는 행복이 돈에서 오지 않는다.’ 그래서 그 남자를 차버리고 만 것입니다.
빌리 그래함은 그의 자서전에서 카리비안 섬에 있을 때의 일화를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하루는 그 섬에서 가장 부자인 사람이 그의 집으로 빌리 그래함 부부를 점심 식사에 초대했는데 75세가 되는 그 노인이 식사 시간 내내 무슨 말인가를 할듯할듯 하면서 안하더니 드디어 식사를 마치고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밖에 요트가 있어서 제가 원하는 곳은 어디든지 갈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는 개인 자가용 비행기도 있고 헬리콥터도 있습니다. 행복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이 있지만 저는 너무나 비참합니다. 나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돈이 행복을 줄줄 알았더니 나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울었습니다. 바로 그날 오후에 빌리 그래함 부부는 그 지역 목사님의 방문을 받았는데 그 목사님도 75세로 그리스도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열정과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노인은 말하기를 “목사님, 저는 제 앞으로 2파운드의 돈도 갖고 있지 않지만 이곳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이 섬에서 나는 가장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처럼 환경에서 삶의 의미와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참된 행복은 돈과 같은 외적인 환경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돈이 행복을 가져온다면 이 여자는 부자하고 영원히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돈이 결코 행복을 갖다 주지 못했습니다. 전5:10~12에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재산이 많아지면 먹는 자들도 많아지나니 그 소유주들은 눈으로 보는 것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그 부요함 때문에 자지 못 하느니라”
눅12:15에도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 하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행복계량학파의 에드 디너 교수는 2004년 포브스가 뽑은 미국 400대 부호와 인터뷰를 했는데 이들의 행복지수는 동토의 땅 그린란드에 사는 사람들이나 케냐 사막의 유목 민족과 거의 같은 수준으로 나타났습니다. 타임스 誌의 연구 결과도 비슷했습니다. 행복을 주는 요인 중 돈은 14위로 애정이나 자유, 유머보다도 그 순위가 훨씬 아래였습니다. 과학저널 사이언스에 실린 연구논문은 "평균 이상의 소득을 가진 사람들은 더 긴장되어 있고 특별히 즐길 만한 행동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않기 때문에 일반인들보다 더 행복하지 않다"고 결론지었습니다. 미국 노동부 자료에 따르면 사람들이 돈이 많아질수록 행복을 위해 쏟는 시간이 더 적어지기 때문에 오히려 행복감이 떨어질 수 있다고 합니다. 돈의 노예가 되거든요. 돈을 추구하다 보니까 시간도 환경도 돈벌이에 다 빼앗기고 아내도 자식도 가족도 돌볼 겨를이 없습니다. 돈으로 행복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돈의 노예가 되어서 항상 긴장 속에서 살고 스트레스 속에 살기 때문에 돈은 오히려 불행의 근원이 될 수가 있습니다. 돈 많은 사업가는 시간에 쫓기고 돈에 쫓기고 인간관계로 시달리는 생활을 합니다. 이들은 일하기 위해 사는 삶 일뿐 거기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와 행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혜롭고 총명한 여인은 부자와 살아서 결코 인생의 의미와 가치와 행복을 가질 수 없고 공허한 마음을 채울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그 부자를 발로 차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제2의 인생을 살아야 되겠다.’ 그는 또 꿈을 꾸었습니다. ‘나는 정치가하고 결혼하겠다. 신바람나지 않느냐. 대중 앞에 나가서 연설을 하고 박수를 받고 권력을 가지고 살면 사람들 앞에서 존경을 받고 권력 있는 사람에게 아부하는 사람도 많고 친구도 많으니 화려한 인생을 정치가로써 살아보면 좋겠다.’ 그래서 정치가에게 시집을 갔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정치가에게 시집을 가고 난 다음 가만히 보니까 사생활이 전혀 없습니다. 정치가는 공인으로 살기 때문에 항상 사람들의 눈앞에 비평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옷을 못 입어도 비평하고, 잘 입어도 비평하고, 좋은 집에 살아도 비평하고, 못난 집에 살아도 비평하고 걸음 걸이 조차도 비평의 대상이 됩니다. 요사이 인터넷 홈페이지에 보면 온갖 비평이 다 올라옵니다. 아주 그것 보면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인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나 변덕스러운 민심인지 널뛰는 여론조사에 하루도 마음이 편하지 못합니다. 어제 여론조사에 50%라고 지지한다더니 오늘 여론조사에 30%가 되고 대통령 출발 때 여론조사가 60%더니 대통령 말기에는 10%도 안 되고 널뛰는 민심에 마음이 괴로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무한경쟁 사회 속에서 정치인들의 의합집산이 끊임없습니다. 정당으로 모였다가 헤어지고 헤어졌다가 또 모이고 깨어지고 서로 비난, 시기, 모략, 중상이 끝이 없습니다. 정치가의 아내로 살아보니까 아예 골머리가 아픕니다. 지위도 명예도 권세도 행복을 갖다 주지 못합니다. 그는 행복을 추구해서 왔는데 행복이 아니라 이것은 사자와 곰의 동굴에 들어와서 서로 권력다툼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만히 생각하니 여기에도 행복이 없다. 결론을 지었습니다.
시146:3~4에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 하리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생각하기를 ‘아이고 부자도 소망이 없고, 정치가도 행복을 갖다 주지 못하니까 착하고 조용한 백면서생인 학자하고 결혼해야 되겠다. 학자하고 결혼하면 점잖고 행복하게 살 수있지 않겠느냐. 잘 이해도하고, 동정도 해주고, 대화도 오순도순 하면서 시끄럽지 않게 잘 살수 있겠다.’는 꿈을 가지고 또 학자를 꾀여 가지고서 학자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학자하고 결혼해서 얼마 살아보니까 이 학자는 자기하고 결혼한 것이 아니에요. 학문하고 결혼한 사람이에요. 집에 와서 항상 서재에 들어가서 처박혀 있고 좀 이야기 하자면 내일 강의할 원고 작성해야 되는데 왜 잔소리를 하느냐. 시끄럽다고 고함을 칩니다. 그리고 늘 연구 논문 작성에 머리를 쓰고 연구하는데 골몰합니다. 도대체 나하고 결혼했나, 학문하고 결혼을 했나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학자하고 결혼하는데 계산을 잘못했습니다. 학자가 타오는 월급이 쥐꼬리만 하니까 그것으로 먹고 사는데도 넉넉하지 못하고 때를 따라 변화되는 시절을 쫓아 사 입을 옷도 충분히 사 입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식사시간에 만나서 대화를 해보면 딴 세상 이야기를 합니다. 완전히 자기는 학자 일 때는 학자 학문의 이야기를 하는데 자기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친구들과의 이야기, 동리의 이야기를 하면서 아무런 관심도 흥미도 베풀어 주지 않습니다. 자기하고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나는 우리 교회에 나오는 자매님 한분의 눈물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서대문에서 있을 때 입니다. 그 부인이 대학교수의 부인인데 유명한 한국의 생화학 교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와서 도저히 그 남편하고 살수 없어서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하면서 신앙상담을 왔는데 왜냐 하니까 자기 남편이 2층집인데 집에 아래층에는 쥐를 기른답니다. 실험용 흰쥐를 잔뜩 기르는데 항상 자기에게 제일먼저 묻는 말이 “흰쥐 밥 주었느냐? 물 주었느냐? 흰쥐 돌봐 주었느냐?” 자기는 흰쥐를 기르는 종으로써 사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화가 나서 집에 들어오면 흰쥐부터 먼저 들여다보고 자기를 안 찾았기 때문에 흰쥐를 지하실로 다 치워 버렸습니다. 흰쥐를 치워 버리면 자기를 찾을 줄 알고 흰쥐를 다 지하실로 치워 버리고 난 다음 집에 있으니까 남편이 학교 갔다 오더니만 “여보” 그러거든요. ‘아이고 날 찾는구나. 이제는 쥐를 찾지 않고 나를 찾는구나.’ “나 여기 있어요. 빨리 오세요.” 그러니까 “흰쥐 어디 두었어?” 자기를 찾는 것이 자기를 사랑해서 찾는 것이 아니라 쥐를 찾기 위해서 자기를 찾는다. 자기는 쥐보다 못하다. 이런 인생을 무엇 하러 살아야 되느냐. 그래서 나에게 신앙상담을 왔어요. 쥐보다 못한 내 인생을 내가 무엇 때문에 살아야 되겠습니까? 나중에 그 남편도 교회에 데리고 와서 제가 신앙상담을 했습니다만 쥐보다 아내를 더 사랑하라고 제가 간절히 부탁한 적이 있습니다. 학자하고 살아보니까 자기와 세계가 다릅니다. 그러므로 도저히 이야기를 해도 벽면을 두고 이야기 하는 것 같이 서로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마음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꿈도 이상도 채울 수가 없습니다.
전1:18에 보면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전12:12에 많은 책들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한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학자와 같이 사는 것은 자기로써는 견딜 수가 없기 때문에 그도 포기하고 하루는 학자보고 “당신 길로 가세요. 나는 당신하고 내 이상을 이룰 수 없으니 살수 없소. 빠이빠이.” 그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그는 꿈을 꾸기를 ‘이제는 도시생활 질력이 난다. 부자도 정치가도 학자도 다 필요 없다. 시골로 가야 되겠다. 맑은 공기를 숨 쉬고 아침에 종달새 울음을 들으면서 깨어나고 아침 이슬을 밟으면서 농토를 걸으며 토마토 심어서 토마토 먹고 감자 심어서 감자 삶아먹고 고구마 심어서 고구마 먹고 얼마나 이상적이고 좋은 삶이냐. 건전하고 건강한 삶을 살겠다.’ 그래서 농촌 농부를 꾀 가지고서 또 시집을 갔어요. 농부는 왠 떡이냐, 도시에 아름다운 여인하고 결혼을 했으니 아주 신바람이 났습니다. 그래서 신혼의 단꿈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농부는 별수 없이 농사를 지어야 되니까 아침 일찍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새벽같이 일어나야 되는데 종달새가 울기 전에 일어나야 돼요. 일어나니까 시골에 일꾼들에게 밥을 지어줘야지요. 그 다음에는 짐승들에게 소죽 끓여 주어야지요. 그리고 바쁘게 하고 난 다음에는 집에 있을 수가 있습니까? 일터에 나가야 됩니다. 머리에 수건 쓰고 호미 들고 나가서 김 메야지요. 허리가 아프도록 김을 메고 낮에는 또 점심상 차려야 되지요. 저녁 늦게 들어오면
온 사지가 쑤시지요. 이것 종달새 소리 듣고 일어나고 아침 이슬 밟으면서 상쾌한 공기를 마시고 걸으면서 토마토 먹고 사과 먹고 그런 꿈은 다 산산조각 나고 만 것입니다. 왜냐하면 토마토도 수확하니까 신선하고 좋은 토마토를 먹으려고 하니까 남편이 돈 될 것 먹지 말라고 썩어진 토마토만 먹으라고 하고 감자도 썩어진 감자만 삶아먹고 이 세상에 모든 것이 이상에 맞지를 않습니다. 육체적인 수고는 말할 필요 없거니와 농산물을 생산해서 판매하는데 염려, 근심이 많습니다. 농사를 짓는데 들어가는 비용도 안 나오는 생산가에도 미치지 못하는 판매를 하게 되니 걱정, 근심이 많고 몸이 거칠어져서 도시에서 올 때 언제 크림을 발랐는지 얼굴을 바라보니 새카맣게 되고 손도 거칠어지고 손톱도 길던 것이 다 갈라지고 말이 아닙니다. ‘내가 이렇게 있다가 완전히 고구마 할머니 되고 말겠다. 내가 이런 농부 아내로써 무슨 희망과 꿈이 있겠느냐.’하루 가만히 생각하다가 집어치우고 “여보, 나는 당신하고 못살겠어. 당신은 농촌 여자하고 살아요. 빠이빠이.” 발로 차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으로 생각하기를 ‘이제는 부자도 말고 정치인도 말고 학자도 말고 농부도 말고 파도소리나 들으면서 나의 귀는 조개껍질 파도소리를 그리워하오. 철썩철썩 파도치는 소리 들으며 바다의 신선한 공기를 맛보고 모래밭 위를 걸으며 펄떡펄떡 하는 생선을 잡아와서 회쳐먹고 걱정 없이 사는 어부에게 결혼을 해야 되겠다.’ 그래서 또 잘 골라서 어부에게 프로 포즈 하니까 어부가 왠 떡이냐 하고 덥썩 물었습니다. 그래서 잘 골라서 어부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그래서 어부하고 결혼을 했어요. 그리고 이제 행복하게 사는 줄 알았는데 어부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으니까 배를 타고 고기를 잡으러 나가는데 자기는 생각지 못한 일이 생겼습니다. 파도 소리를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파도소리가 공포로 변했습니다. 왜냐하면 기상변화에 따라서 파도가 치면 남편배가 침몰 되었는지 아닌지 알 수가 없어요. 매일같이 기상대에서 발표하는 기상소식에 귀를 기울이고 파도에 파만 들으면 간이 철렁거립니다. 조용하면 좋은데 파도소리가 요란스러우면 배가 파선되지 안 았나 두려움이 끝이 없습니다. 또한 생선이 많이 잡힐지 안 잡힐지 늘 불안하고 그리고 물고기의 수확이 불확실하기 때문에 생활에 염려가 많습니다. 또 남편이 잡은 펄떡펄떡 치는 생선을 회쳐 먹으려고 하니까 남편이 눈을 부릅뜨고서 “이것은 팔아야지. 이것을 먹으면 되느냐?” 잡아오다가 눈알이 썩은 생선을 보고 이것이나 먹으라고 합니다. 이럴 수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고 남편이라고 저녁에 이브자리에 들어오는데 생선 냄새가 비린내가 나서 곁에 데리고 잘 수도 없습니다. 환경이 자기가 생각하는 이상과 꿈은 다 사라지고 모든 것이 불안과 공포뿐입니다. 하늘을 봐도 구름만 봐도 공포요, 바람소리만 나도 공포가 들리고 언제 배가 파선될지 남편이 무사히 돌아올지 모르고 돌아와도 늘 마음에 불안하고 이상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생각하기를 ‘에라. 농부하고도 안 되는 것이 어부하고도 나는 인연이 없다.’ “여보, 당신 고기잡이 딸하고 결혼해서 사세요. 나는 당신하고 못살겠습니다.” 발로 차버렸습니다.
잠27:1에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고기잡이의 부인이 되니까 하루에도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시38:8에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 하나이다”
마음이 불안하고 신음하는데 살수가 있습니까?
2. 삶의 행복을 포기한 삶
이래서 다섯 남편을 바꾸고 나니까 너무나 공허하므로 이제는 아무 이상도 꿈도 없이 오다가다 만난 놈팽이 하나 데리고서 사는 것입니다. 결혼도 할 수가 없고 이상도 없고 꿈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의 소문거리가 되므로 아침에 물 길러 나오면 동리 사람들에게 다 손가락질 받고 저녁에 물 길러 나오면 손가락질 받기 때문에 사람들이 물 길러 나오지 않은 대낮 쨍쨍 햇볕이 비취는 그때야 물동이를 메고서 물 길러 나오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그 여인은 삶의 행복을 포기했습니다. 환경에서 삶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부자에게서도 행복을 얻을 수가 없고 정치가에게서도 행복을 얻을 수 없고 학자에게도 행복을 얻을 수 없고 농부에게도 행복을 얻을 수 없고 그는 어부에게도 행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 여자는 사람을 통하여 환경을 통하여 행복을 추구하고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았는데 번지를 잘못 짚은 것입니다. 결코 행복은 사람을 통해서 얻을 수도 없고 환경을 통해서도 행복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한 것처럼 이 물을 마시면 또 목말라진다. 우물물을 다섯 번 갈아 마셨습니다. 부자 집 우물 마시고 그 다음에는 정치인 우물 마시고 학자의 우물 마시고 농부의 우물 마시고 어부의 우물 마시고 이 물을 마시면 다시 목말라진다. 아무리 깊은 우물의 물이라도 세상 물마시면 다시 목말라진다. 내가 주는 물을 마셔야 목마르지 않게 된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여러분 여섯 번째 남편을 거느리고 대낮에 물 길러온 그 여인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그는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졌습니다. 허무와 무의미를 되씹고 살았습니다. 여러분 그때에 예수님을 만나게 된 큰 행운이 다가오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예수님 없이는 절망적인 존재인 것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을 삼대절망에 처한 존재라고 했습니다. 죄책과 정죄의 절망에 처한 인간은 짐승과 달라서 모두다 양심이 있으므로 죄책을 느낍니다. 살아갈수록 부모에 대해서 잘못한 죄책, 남편이나 아내에 대해서 잘못한 죄책, 자식들에게 잘못한 죄책, 이웃하고 잘못 산 죄, 살아가면 마음속에 죄책과 정죄의식만 쌓이고 이것을 없앨 수가 없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사람은 죄인된 것을 깨닫고 있으니 죄책의 절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시38:4에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
렘2:19에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야훼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다 죄책과 정죄의 절망을 가슴에 안고 삽니다. 그리고 허무와 무의미의 절망 속에 허덕이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시골에 아무 학문이 없는 농부라도 밭에서 일하다가 허리를 툭툭 치고 일어나서 ‘후유 인생이 무엇인가. 일하다가 죽어서 북망산천으로 돌아가면 아무것도 없지 않는가. 무엇 때문에 사는가, 밤낮으로 아침에 일어나서 낮에 일하고 저녁에 피곤한 몸을 끌고 집에 들어가서 잠자고 이 생활이 반복하는 가운데 머리를 희어지고 허리는 굽어지고 이렇게 죽는 구나’ 허무와 무의미, 사람은 이 세상에 분명하게 살다가도 어느 순간에 재정신이 들어오면 인생이 왜 이렇게 허망 하냐, 스스로 느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참 젊을 때는 그것을 못 느끼지만 나이를 먹어갈수록 허무와 무의미가 그 삶속에 파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시39:6에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 하나이다”
잠14:13에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
벧전1:24에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그러므로 인생 자체가 무엇입니까?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인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다 허무와 무의미의 절망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십시오. 온 천하를 휘어 잡겠다고 큰소리하던 정치인들도 다 떠나가고 한줌의 흙으로 변화되고 천하를 호령하던 경제인들도 우리 기억에서 사라져간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있는 것은 없어지고 존재하는 것은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도 다 무를 향해서 줄달음질쳐 가고 있는 것입니다. 심장의 고동소리를 따라서 한발자국, 두발자국 우리는 죽음을 향해서 전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이다. 이것이 가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가 있다. 이것이 정말 행복이라고 무엇 하나 드러내놓을 것이 없이 다 지나가 버리고 마는 것이고 우리는 허공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 일장춘몽이요, 거품을 잡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인간은 또한 죽음과 무의 절망에 처한 것입니다. 저는 매 토요일에 기도원에 기도하러 올라갑니다. 기도하러 올라가면서 왼편에 저 산위의 무덤을 바라봅니다. 그곳에 우리 최자실 목사님도 계시고 그곳에 작년 까지만 해도 살아계신 우리 아버님이 누워 계시고 그곳에 우리 장로님, 안수집사님, 권사님, 지역장, 구역장 줄줄이 아무 이야기 없이 그 무덤에 누워 있습니다. 제가 지나가면서 그들을 볼 때 내 뇌리 속에 그들의 살아서 저와 함께 웃고 박수치고 울고 신앙상담하고 찬양하던 것이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그러나 무덤에 들어가서 아무 이야기 없습니다. 저를 봐도 잘 왔다고 말도 하지 않습니다. 환영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추억만 내 머릿속에 남아있지 죽음은 무로서 그들을 덮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만일 죽어서 영혼이 없다면 인간의 삶이란 너무나 비참합니다. 짐승은 죽어서 저 건너편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죽으면 그뿐이지만 인간은 죽고 난 다음 무엇이 있을까, 저 건너편을 생각하면서 죽기 때문에 더 비극적인 존재인 것입니다.
시89:48에 “누가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자기의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지리이까”
히 9:27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시편90:4~5에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 이니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순식간에 인생은 지나가고 죽음으로써 우리는 끝이 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사는 그 자체가 절망인 것입니다. 이 수가성 물가의 여인만 삶의 절망을 느낀 것이 아니라 모든 인생으로 태어난 사람은 죄책과 정죄의 절망, 허무와 무의미의 절망, 죽음과 무의 절망을 가슴에 안고 사는 존재인 것입니다. 가슴속에 텅빈 절망의 공간을 안고서 사람들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에 든 것이 인간의 실존인 것입니다. 그러한 가슴을 안고서 사람들은 환경의 행복을 찾습니다. 사람을 통하여 행복을 찾고 부귀, 영화, 공명을 통해서 행복을 찾고, 출세를 통해서 행복을 찾는데 여태까지 인류 역사상 그를 통해서 행복을 찾은 사람이 없습니다. 옛 시인은 말하기를 산너머 행복이 있다기에 산을 넘어가니 또 저 산너머 행복이 있다 하더라. 행복의 무지개를 찾아 아무리 산을 넘고 들을 달리고 개울을 건너도 행복은 저만큼 멀리 있고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날 환경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은 언제나 허무하게 되는 것입니다.
1977년 하워드 휴즈와 폴 게티라는 미국의 대부호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미국 항공 산업의 개척자이자 영화 제작자였던 하워드 휴즈는 억만장자였지만 영양실조로 죽었습니다. 그는 정신적인 고독과 공허를 달래기 위하여 방탕한 생활을 했고, 건강이 나빠지자 그의 주변에는 그의 재산을 노리는 사람들이 몰려 모든 사람을 불신하여 강박장애에 빠졌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독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집에서 혼자 요리사를 불러다 놓고 쥬스만 마시고 살았습니다. 영양실조가 걸려 그는 죽었을 때 그의 머리털은 정강이까지 길게 내려왔습니다. 손톱은 매 발톱과 같았습니다. 정신이상이 걸려 죽은 것입니다. 억만장자가 되었지만 수없이 결혼하고 이혼하고 결혼하고 이혼했으므로 죽었을 때 그를 위해서 울어주는 사람 한 사람 없고 모두 다 재산만 탐해서 악의 다툼을 한 것입니다. 그는 결코 행복하지 못하고 고독하고 쓸쓸한 사람의 대명사로써 세상을 뜨게 된 것입니다. 그 다음 석유를 통해서 억만장자가 된 폴 게티는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늘 본문의 사마리아여인처럼 다섯 번 결혼해서 다섯 번 이혼했습니다. 그가 런던에 있을 때 신문기자가 폴 게티에게 와서 “당신은 행복했습니까?” 하니까 성을 버럭 내면서 “행복이 어디 있어? 돈 있다고 행복하나?” 고함을 쳤습니다. 그는 돈이 많았기 때문에 그 자손들도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막내아들은 폐렴으로 죽고, 장남은 과음으로 죽었습니다. 아무리 외형적인 조건이 풍부해도 삶의 행복을 포기한 삶은 죄책과 정죄의 절망, 허무와 무의미의 절망 가운데 빠져서 허우적이게 되는 것입니다.
프랑스 철학자인 파스칼은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는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은 공백이 있다. 이것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질 수 없고 오직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의해서만 채워질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없이 지위나 명예나 권세나 돈이나 쾌락으로 이 마음의 공백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마음의 공백인 것입니다. 동물들은 그것이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들어와야 마음속에 가득하게 채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는 언제나 마음속에 허무와 무의미를 되씹히며 살수밖에 없습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 당신은 당신 자신을 위해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마음은 당신 안에서 안식을 찾을 때까지 평안을 누리지 못합니다.”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세상 우물은 아무리 마셔도 목마르고 터진 웅덩이일 뿐입니다. 우리 마음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높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결코 인간의 행복은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우물물과 생명수를 우리는 잘 선택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부귀, 영화, 공명, 출세는 모두다 우물물입니다. 그 물은 자꾸 우물물을 바꿔 가면서 마셔도 또 목마르고 마셔도 또 목마른 것입니다. 생수는 예수님밖에 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3. 우물물과 생명수
요4:13~14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만이 영원히 솟아나는 샘물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시지 않고는 언제나 목마릅니다. 돈이 있어도 목마르고 권력이 있어도 목마르고 지위나 명예가 있어도 목마르고 부귀와 영화가 있어도 목마릅니다. 그 목마름은 세상 것으로 아무리 바꿔도 채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수가 성 우물가의 여인처럼 아무리 남편을 바꾸고 환경을 바꾸어도 목마름을 채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 우물은 아무리 마셔도 목마르나 그것은 터진 우물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렘 2:13에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 들이니라”
모두 다 터진 웅덩이입니다. 대통령 자리도 터진 웅덩이고, 장관 자리도 터진 우물이고, 재벌의 자리도 터진 웅덩이인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모든 지위, 명예, 권세, 부귀, 영화는 다 터진 우물이요, 다 물이 줄줄 세 버리고 나중에는 바짝 말라 버릴 것입니다. 그것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 허무맹랑하게 되고 좌절하고 절망하게 될 것입니다.
사29:8에 주린 자가 꿈에 먹었을지라도 깨면 그 속은 여전히 비고 목마른 자가 꿈에 마셨을지라도 깨면 곤비하며 그 속에 갈증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한 것입니다.
꿈에 먹은들 깨면 무엇입니까? 꿈에 물이 마신들 목마름이 가셔지지 않는 것이 오늘날 인생이 살아가는 것인 것입니다. 속에서 찾은 행복이 되어야 참된 행복이 됩니다. 밖에서 찾는 행복은 다 터진 우물을 찾는 것입니다. 참 행복은 속에서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 속에 찾은 행복은 예수님을 속으로 모셔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4:24~26에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 지니라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 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이 여자와 대화하는 중에 그 여자가 우리 조상들은 다 사마리아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당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는 데가 있다고 합디다. 그러자 예수님이 “여자여, 이제는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사마리아에서도 말고, 진실로 하나님을 찾을 데가 어디냐. 하나님은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 “우리는 이것 몰라요. 메시아가 오면 그것 알려줄 것이요.” “내가 바로 그 메시아요.” 이 여자의 눈이 번쩍 깨었습니다. 그는 깜짝 놀랬었습니다. 생명의 근원되신 예수님이 자기 앞에 있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깨닫고 마음을 열고 모셔 들이자마자 그렇게 갈급하던 마음속에 생명수가 넘쳐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는 물동이를 내던져 버리고 너울도 던져 벗어 버리고 미친 사람같이 천방지축으로 뛰어서 사마리아 시내로 들어가서 고함 고함을 쳤습니다. “여보시오. 내 말 들으십시오. 메시아를 내가 만났소. 우물가에서 내가 메시아를 만나서 내가 변화된 것을 보십시오. 남편을 다섯이나 바꾸고도 허무맹랑하고 마음이 허무하고 고통스러웠는데 그분을 만나고 보고 난 다음에 마음에 만족하고 생수가 강같이 넘쳐흐르게 되었소.” 외친 것입니다. 그 사실이 바로 수가성 우물가 여인의 변화의 사실인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만이 생명의 근원이 되십니다.
요14: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생명의 원천 되시는 아버지에게 갈 길이 열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는 것입니다.
요1:4에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 속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 몸 찢고 피를 흘려 이 생명수를 터뜨려 놓은 것입니다.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서 우리는 용서와 의의 생명수를 마십니다. 십자가의 보혈을 통하여 거룩함과 성령 충만의 생명수를 마시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의 보혈을 통하여 치료와 건강의 생명수를 마시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의 보혈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축복과 형통의 생명수를 마십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부활, 영생, 천국의 생명수를 마시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 나와서 예수를 구주로 모시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은혜의 생명수를 마시게 되는 것입니다. 택하신 족속의 생명수가 넘쳐나고 왕 같은 제사장의 생명수가 넘쳐나고 거룩한 나라의 생명수가 넘쳐나고 소유된 백성이라는 생명수가 넘쳐나는 것입니다.
요7:37~39에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목마른 자는 이제 세상의 우물을 찾아가지 말고 예수님을 찾아와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우물은 마시면 또 목마르고, 마셔도 또 목마르지만 영원토록 솟아나는 샘물은 예수님만이 주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의미와 가치와 행복은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오신 예수님 안에서 찾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엡2:4~5에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그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빛과 같이 마른땅의 냇물같이 목마른 자에게 생수같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사32:2에 “또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으리니”
사44:3에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론>
수가 성 여인은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깨닫자 순식간에 속에서 생수가 넘쳐나고 변화가 다가오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속에 있는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을 의지하십시오. 하나님께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 속에 생수가 넘치도록 기도하십시오. 행복은 여러분 속에 들어오신 예수님께로부터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밖에는 아무리 빛이 찬란해 보여도 거짓입니다. 사기입니다. 속습니다. 이 수가 성 우물가의 여인처럼 청원의 꿈을 품고 행복을 그리워하면서 그는 남편을 다섯 번이나 갈아 우물물을 다섯 번이나 갈아 마셨습니다. 행복은 없었습니다. 좌절과 절망밖에 없었으나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깨닫자마자 그 영혼 속에 만족과 행복과 생수가 넘쳐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빛이요, 소망이요, 생수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의, 평강, 희락은 모두다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므로 여러분 생애 속에 태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 있어야 돈도 효과를 발생하고 예수 있어야 권력도 효과가 있으며, 예수 있어야 학문도 가치가 있으며, 예수 있고 농사지으며, 예수 있고 물고기 잡으며, 예수 믿고 세상에 살면 부귀와 영화와 공명도 축복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 없는 것은 다 터진 웅덩이인 것입니다. 하나도 행복을 그 속에 에워 놓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찬송가 409장 다 같이 한번 부르십시다.
1. 목마른 내 영혼 주가 이미 허락한 그 귀한 영생 수 주여 갈망합니다.
그 약속 따라서 힘써 간구하오니 오주여 내 기도 어서 들어주소서.
예수의 사랑 예수의 사랑 바다 물결같이 내게 임하니
영광의 물결에 온전히 싸여서 내영혼의 기쁨 한량없도다.
2. 주 내게 약속한 큰 비 내려 주시려 은혜의 저 구름 건너편에 떠올라
그 귀한 징조가 내게 밝히 보이니 나 힘을 다하여 주께 간구합니다.
예수의 사랑 예수의 사랑 바다 물결같이 내게 임하니
영광의 물결에 온전히 싸여서 내영혼의 기쁨 한량없도다.
3. 은혜의 소낙비 지금 흡족히 내려 구원의 큰 강물 흘러 차고 넘쳐서
내 추한 모든 죄 모두 씻어 버리니 나 지금 은혜를 충만하게 받았네
예수의 사랑 예수의 사랑 바다 물결같이 내게 임하니
영광의 물결에 온전히 싸여서 내영혼의 기쁨 한량없도다.
4. 그 차고 넘치는 주의 은혜의 물결 힘차게 밀려와 내게 만족하오니
오 할렐루야로 주를 찬송하오니 내 맘에 기쁨이 항상 충만함이라
예수의 사랑 예수의 사랑 바다 물결같이 내게 임하니
영광의 물결에 온전히 싸여서 내영혼의 기쁨 한량없도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기쁨이 넘치고, 즐거움이 넘칩니다. 평안하고, 예수님 안에서 나는 행복합니다.’ 옆에 계신 분들에게 ‘당신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 고개 숙여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시여!
우리 사람들은 헛되이 분유하며 하나님 없이 무슨 일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야훼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야훼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면 파숫 꾼의 경성함이 허사가 되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저녁에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허사입니다. 내 아버지 하나님이여,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처럼 남편을 다섯이나 바꾸어도 행복을 얻지 못합니다. 행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을 수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십자가에 못 박혀 우리 위해서 몸 찢고 피 흘려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께서 생명의 원천이 되시고 생수의 근원이 되심을 감사합니다. 이 예수님을 모시고 그리스도에 의지해서 진실한 행복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 이름 받들어 기도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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