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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20:11-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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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38564 |
2005.3.27.
(오늘은 1995년 부활절에 행한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의 설교를 읽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이 설교는 그의 설교집 <Freude des Glaubens>에 실려 있는, 제목은 “Die Frau unter den Osterzeugen”입니다.)
우리는 오늘 기독교의 가장 오래된,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절기를 축하하고 있습니다. 부활절 기간의 날씨는 늘 올해처럼 을씨년스럽고 변덕스럽습니다. 그러나 부활주일 아침의 태양은, 즉 새롭고 영원한 생명은 첫 번 부활 축일 이후로 모든 기독교인들의 마음을 밝히 비춘 것처럼 우리의 마음도 비추고 있으며, 또한 우리의 유한하고 죽을 생명이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과 연결되어서 그 생명 안에서 빛을 얻게 된다는 희망을 가득 품게 만듭니다. 이런 희망은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써 예수님에게 있어났던 것입니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대략 시작 부분에서, 즉 부활 산책을 다루는 부분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이 정신적으로 부활했기 때문에 주님의 부활을 축하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매우 의미심장한 것처럼 들리는 이 말은 기독교인들의 부활절 신앙을 봄이 되어 자연이 기지개를 켜는 현상과 연결시킵니다. 파우스트의 이 말은 비록 위르겐 부쉐(Jürgen Busche)가 남독일 신문의 금년 부활절 단상에서 인용한 것이지만 참된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그저 의미심장하게 보일 뿐입니다. 기독교의 부활절 신앙은 자연이 매년 기지개를 켠다는 사실에 대한 상징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에 반대입니다. 봄이 되어 자연이 기지개를 키고 가을에 다시 죽음을 반복한다는 이것은 단지 예수님의 부활에서 확인할 수 있는 새롭고 영원한 생명의 현현에 대한 비유일 뿐입니다. 이것은 바로 썩지 않는 생명의 봄입니다.
이런 사건의 빛에서 기독교는 예수님의 탄생 이후로 예수님의 전체 길을 새롭고 심원하게 이해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즉 부활절이 없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단지 고상한 사람의 비참한 최후일지 모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이 실패한 것뿐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 부활의 빛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 우리의 죽음이 되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죽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습니다. 이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의 죽을 운명에 참여하신 분이십니다. 부활절 아침의 빛에서 기독교는 이미 베들레헴의 초라한 말구유에서 일어난 예수님의 탄생이 세계의 구원자가 오신 사건이라는 사실을 인식했습니다. 성탄절의 빛은 부활절 태양의 반사입니다. 이 부활절의 태양이 기독교인의 전체 삶을 두로 비추고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매 주일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주일이 다시 오는 것을 축하했습니다. 매 주일은 일종의 작은 부활절입니다. 따라서 주일은 유대인들의 안식일 대신에 우리 기독교인들의 축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일은 한 주간의 첫째 날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안식일이 세계 창조의 일곱째 날에 대한 원형(原形)이듯이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주간의 첫 날인 주일은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이제 영원한 생명이 새롭게 창조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의 상징입니다.
우리의 전체 삶을 통전적으로 변화시켜나가는 기독교의 부활절 기쁨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사도들의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주님이 이 사도들에게 생명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로 앞서 서간문 읽기에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 공동체에 보낸 첫 번째 편지에 서술된 이 사실을 들었습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분이 나타나신 사례를 일일이 열거했습니다. 이 현현은 교회의 토대가 되었으며, 또한 예수님을 메시아와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하는 선교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분은 제일 처음으로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열두 제자들에게, 이어서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야고보는 이 일로 인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큰 무리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는데, 이들은 모두 부활의 주님을 만남으로써 부활하시어 하나님으로 올림 받은 주님의 사자이며 선포자가 되었습니다. 즉 사도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인들의 목록입니다. 교회의 토대는 바로 이런 증인들에게 있습니다. 바울의 이름은 이런 목록의 마지막 자리에 등재되어있습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분이 자기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사명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바로 그것은 다마스커스로 가는 도중에 일어난 사건인데, 이 사건으로 인해서 바울은 공동체를 억압하는 입장에서 이방인을 위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이런 부활 증인의 목록에 여인들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들도 역시 교회의 부활절 전승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마가복음의 부활절 전승에서 이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여인들은 갈릴리 출신들로서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마지막 길을 따라 나섰습니다. 그녀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두 몸을 숨겨야만 했을 때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모여 있었습니다. 이 여인들 중에는 모든 복음서를 통해서 간추려보면 세 명의 이름이 명시적으로 거명됩니다. 세 명의 여인들 중에서 한 사람의 이름은 오락가락합니다. 그런데 게네사렛 호수 부근의 작은 마을인 막달라에서 온 마리아는 모든 복음서에서 공히 세 명의 여인 중의 한 사람으로 언급됩니다. 이 여인들은 예수님의 시체가 매장될 때 현장에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 멀찍이 바라보았겠지요. 그러나 모든 복음서는 이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들여다보기 위해서 부활절 아침에 그곳에 갔다고 설명합니다. 그녀들은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장 오래된 복음서인 마가복음은 이미 천사가 그녀들에게 나타나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사실을 보도합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여기에 계시지 않고 부활하셨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가복음에서 부활하신 분이 직접 여인들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전혀 들을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도 이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이르러서야 무덤에서 도망치는 길에 부활하신 분이 직접 여인들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온 온 여자가 막달라 마리아 뿐이라고 진술합니다. 이런 이야기와, 또한 부활한 분이 그녀와 만났다는 이야기는 아마 원시 기독교가 서로 나누고 지켜온 모든 상이한 종류의 부활절 이야기 중에서 가장 섬세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의미는 바울의 전승에 나오는 부활 증인의 목록과는 다릅니다. 바울의 경우에는 부활한 주님의 자기 알림이 핵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음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 실제로 부활하셨다는 교회의 신앙은 바로 바울이 증거 하는 이런 주님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요한복음에서 들을 수 있는 이야기는 약간 다른 종류에 속합니다. 이 이야기는 부활한 분에 대한 신앙이 어떻게 한 인간에게서 발생하는가에 대해서 알려줍니다.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를 예로 들면서 우리의 삶을 견인하는 이러한 신앙이 어떻게 우리에게서 발생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전하려고 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세 가지 특징을 주목해야만 합니다.
첫 번째 특징은 예수님이 그녀의 뒤로 오셔서 왜 울고 있는가 하고 물었을 때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님과 아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던 한 여자가 지금 말씀하시는 그 예수님을 즉시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은 부활하신 분의 외적인 현현이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분명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정원지기로 착각했다는 본문의 표현은 첫 기독교인의 부활 사신을 반대한 유대인들이 주장했던 일종의 풍자입니다. 사람들은 사도들이 예수님을 결코 만나보지 못한 채 대신 우연하게 그 자리에 있었던 정원지기를 예수님과 혼동했을 뿐이라고 공공연하게 떠들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주장은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그것에 대해서 이렇게 반론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그 사람을 처음에는 정원지기로 생각했지만,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그녀는 어떻게 그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을까요? 부활하신 분이 그녀와 만난 그 외적인 현현이 그녀로 하여금 예수님을 다시 인식할 수 있게 하지는 못했을 텐데 말입니다.
이제 요한이 전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바로 두 번째의 가장 중요한 특징입니다. 마리아가 알아보지 못한 예수님은 그녀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마리아는 갑자기 그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아보았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역시 부활하신 분의 현실성을 확신해야만 하며, 그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이름을 부르며 우리에게 말을 건네십니다. 우리 모든 개개인을 향해서 말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부르심을 우리는 너무나 건성으로 듣습니다. 세상의 소문은 너무 강하고 요란스러워서 우리는 우리의 이름을 부르며 말을 건네시는 예수님의 조용한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음성이 우리 일상의 요란스러움을 꿰뚫고 다가오는 순간이 우리 모두의 삶에 있습니다. 흡사 다른 세계로부터 오는 음성을 통해서 우리가 부름을 받는 것 같은 순간 말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이런 음성에 귀를 기울입시다. 마리아처럼 이렇게 대답합시다. 라보니, 주님. 우리의 삶은 이를 통해서 변화됩니다. 우리가 세상을 관찰하는 모든 방식은 변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아마 예수님이 이런 순간에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이름을 부르신다는 사실이 명백해질 것입니다. 모든 것이 새로운 빛을 받아 빛나게 된다는 사실을 듣고 체험하는 일이 아직은 너무 늦지 않았습니다. 우리 삶의 경험에서 우리를 부르신, 그래서 늘 모든 사람의 이름을 부르시는 그 음성에 귀를 기울입시다.
우리와 이렇게 만나시는 부활한 분의 현실성은 그렇게 명백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곧 오늘 이야기의 세 번째 특징입니다. “나를 붙잡지 말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본 기쁨으로 예수님을 얼싸안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걸 막으셨습니다. “나를 붙잡지 말라!” 예수님이 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신기하게 들립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아직 아버지에게 올라가지 못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이 땅에 계실 때 제자들이 그를 얼싸안았던 것처럼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올라가신 다음에는 다시 그를 얼싸안을 수 있다는 뜻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승천을 통해서 우리에게서 떠나셨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붙잡지 말아야 할 이유는 다르게 이해되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분은 마리아에게 가시적 형태로 나타나셨는데, 이 형태는 일종의 익명(Inkognito)입니다. 마리아는 그를 정원지기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녀는 단지 정원지기를 얼싸안으려고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부활하신 분의 생명은 변화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얼싸안을 수 없습니다. 사태가 이랬기 때문에 마리아는 부활하신 분이 아버지에게 올라가지 못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원지기라는 인물은 부활하신 분의 형태는 아닙니다.
바로 여기에 요한이 전하고 있는 또 하나의 다른 부활절 이야기, 즉 믿지 못했던 도마 이야기와 완전히 대조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도마에게 나타나신 부활의 예수님은 도마가 자신의 상처에 손을 넣을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도마는 이제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책망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막달라 마리아는 보지 못했고 대신 정원지기만 보았지만, 예수님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그곳에 예수님이 계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을 얼싸 안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변화하신 그 새로운 생명은 정원지기와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도마는 피상적으로만 좋은 입장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도마의 불신앙을 극복하게 하기 위해서 부활하신 분이 어쩔 수 없이 실제로 지상의 육체로 만날 수 있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분이 왜 부활절 이야기에서 매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셨는지 대충 알만 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형태를, 즉 영원성으로 변화한 생명의 형태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그분의 음성을 듣게 될 경우에 이러한 새로운 생명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분을 얼싸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만찬의 초청에 참여함으로써 그의 새로운 생명에 휩싸일 수 있습니다. 이 만찬에서도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가 먹는 빵처럼 포착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생명은 그 자리에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으로 변화됩니다. 이는 흡사 그분의 말씀과 교회의 신앙이 고백된 다음에 빵과 포도주에 예수님이 현재 함께 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부활절이 비추는 빛의 능력이며, 우리의 죽을 생명과 모든 창조를 비추는 새로운 생명의 능력입니다. 아멘. (1995. 부활절, 그래팰핑, 평화교회)
(오늘은 1995년 부활절에 행한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의 설교를 읽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이 설교는 그의 설교집 <Freude des Glaubens>에 실려 있는, 제목은 “Die Frau unter den Osterzeugen”입니다.)
우리는 오늘 기독교의 가장 오래된,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절기를 축하하고 있습니다. 부활절 기간의 날씨는 늘 올해처럼 을씨년스럽고 변덕스럽습니다. 그러나 부활주일 아침의 태양은, 즉 새롭고 영원한 생명은 첫 번 부활 축일 이후로 모든 기독교인들의 마음을 밝히 비춘 것처럼 우리의 마음도 비추고 있으며, 또한 우리의 유한하고 죽을 생명이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과 연결되어서 그 생명 안에서 빛을 얻게 된다는 희망을 가득 품게 만듭니다. 이런 희망은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써 예수님에게 있어났던 것입니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대략 시작 부분에서, 즉 부활 산책을 다루는 부분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이 정신적으로 부활했기 때문에 주님의 부활을 축하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매우 의미심장한 것처럼 들리는 이 말은 기독교인들의 부활절 신앙을 봄이 되어 자연이 기지개를 켜는 현상과 연결시킵니다. 파우스트의 이 말은 비록 위르겐 부쉐(Jürgen Busche)가 남독일 신문의 금년 부활절 단상에서 인용한 것이지만 참된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그저 의미심장하게 보일 뿐입니다. 기독교의 부활절 신앙은 자연이 매년 기지개를 켠다는 사실에 대한 상징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에 반대입니다. 봄이 되어 자연이 기지개를 키고 가을에 다시 죽음을 반복한다는 이것은 단지 예수님의 부활에서 확인할 수 있는 새롭고 영원한 생명의 현현에 대한 비유일 뿐입니다. 이것은 바로 썩지 않는 생명의 봄입니다.
이런 사건의 빛에서 기독교는 예수님의 탄생 이후로 예수님의 전체 길을 새롭고 심원하게 이해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즉 부활절이 없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단지 고상한 사람의 비참한 최후일지 모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이 실패한 것뿐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 부활의 빛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 우리의 죽음이 되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죽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습니다. 이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의 죽을 운명에 참여하신 분이십니다. 부활절 아침의 빛에서 기독교는 이미 베들레헴의 초라한 말구유에서 일어난 예수님의 탄생이 세계의 구원자가 오신 사건이라는 사실을 인식했습니다. 성탄절의 빛은 부활절 태양의 반사입니다. 이 부활절의 태양이 기독교인의 전체 삶을 두로 비추고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매 주일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주일이 다시 오는 것을 축하했습니다. 매 주일은 일종의 작은 부활절입니다. 따라서 주일은 유대인들의 안식일 대신에 우리 기독교인들의 축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일은 한 주간의 첫째 날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안식일이 세계 창조의 일곱째 날에 대한 원형(原形)이듯이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주간의 첫 날인 주일은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이제 영원한 생명이 새롭게 창조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의 상징입니다.
우리의 전체 삶을 통전적으로 변화시켜나가는 기독교의 부활절 기쁨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사도들의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주님이 이 사도들에게 생명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로 앞서 서간문 읽기에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 공동체에 보낸 첫 번째 편지에 서술된 이 사실을 들었습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분이 나타나신 사례를 일일이 열거했습니다. 이 현현은 교회의 토대가 되었으며, 또한 예수님을 메시아와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하는 선교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분은 제일 처음으로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열두 제자들에게, 이어서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야고보는 이 일로 인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큰 무리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는데, 이들은 모두 부활의 주님을 만남으로써 부활하시어 하나님으로 올림 받은 주님의 사자이며 선포자가 되었습니다. 즉 사도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인들의 목록입니다. 교회의 토대는 바로 이런 증인들에게 있습니다. 바울의 이름은 이런 목록의 마지막 자리에 등재되어있습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분이 자기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사명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바로 그것은 다마스커스로 가는 도중에 일어난 사건인데, 이 사건으로 인해서 바울은 공동체를 억압하는 입장에서 이방인을 위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이런 부활 증인의 목록에 여인들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들도 역시 교회의 부활절 전승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마가복음의 부활절 전승에서 이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여인들은 갈릴리 출신들로서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마지막 길을 따라 나섰습니다. 그녀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두 몸을 숨겨야만 했을 때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모여 있었습니다. 이 여인들 중에는 모든 복음서를 통해서 간추려보면 세 명의 이름이 명시적으로 거명됩니다. 세 명의 여인들 중에서 한 사람의 이름은 오락가락합니다. 그런데 게네사렛 호수 부근의 작은 마을인 막달라에서 온 마리아는 모든 복음서에서 공히 세 명의 여인 중의 한 사람으로 언급됩니다. 이 여인들은 예수님의 시체가 매장될 때 현장에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 멀찍이 바라보았겠지요. 그러나 모든 복음서는 이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들여다보기 위해서 부활절 아침에 그곳에 갔다고 설명합니다. 그녀들은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장 오래된 복음서인 마가복음은 이미 천사가 그녀들에게 나타나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사실을 보도합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여기에 계시지 않고 부활하셨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가복음에서 부활하신 분이 직접 여인들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전혀 들을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도 이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이르러서야 무덤에서 도망치는 길에 부활하신 분이 직접 여인들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온 온 여자가 막달라 마리아 뿐이라고 진술합니다. 이런 이야기와, 또한 부활한 분이 그녀와 만났다는 이야기는 아마 원시 기독교가 서로 나누고 지켜온 모든 상이한 종류의 부활절 이야기 중에서 가장 섬세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의미는 바울의 전승에 나오는 부활 증인의 목록과는 다릅니다. 바울의 경우에는 부활한 주님의 자기 알림이 핵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음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 실제로 부활하셨다는 교회의 신앙은 바로 바울이 증거 하는 이런 주님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요한복음에서 들을 수 있는 이야기는 약간 다른 종류에 속합니다. 이 이야기는 부활한 분에 대한 신앙이 어떻게 한 인간에게서 발생하는가에 대해서 알려줍니다.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를 예로 들면서 우리의 삶을 견인하는 이러한 신앙이 어떻게 우리에게서 발생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전하려고 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세 가지 특징을 주목해야만 합니다.
첫 번째 특징은 예수님이 그녀의 뒤로 오셔서 왜 울고 있는가 하고 물었을 때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님과 아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던 한 여자가 지금 말씀하시는 그 예수님을 즉시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은 부활하신 분의 외적인 현현이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분명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정원지기로 착각했다는 본문의 표현은 첫 기독교인의 부활 사신을 반대한 유대인들이 주장했던 일종의 풍자입니다. 사람들은 사도들이 예수님을 결코 만나보지 못한 채 대신 우연하게 그 자리에 있었던 정원지기를 예수님과 혼동했을 뿐이라고 공공연하게 떠들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주장은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그것에 대해서 이렇게 반론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그 사람을 처음에는 정원지기로 생각했지만,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그녀는 어떻게 그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을까요? 부활하신 분이 그녀와 만난 그 외적인 현현이 그녀로 하여금 예수님을 다시 인식할 수 있게 하지는 못했을 텐데 말입니다.
이제 요한이 전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바로 두 번째의 가장 중요한 특징입니다. 마리아가 알아보지 못한 예수님은 그녀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마리아는 갑자기 그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아보았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역시 부활하신 분의 현실성을 확신해야만 하며, 그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이름을 부르며 우리에게 말을 건네십니다. 우리 모든 개개인을 향해서 말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부르심을 우리는 너무나 건성으로 듣습니다. 세상의 소문은 너무 강하고 요란스러워서 우리는 우리의 이름을 부르며 말을 건네시는 예수님의 조용한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음성이 우리 일상의 요란스러움을 꿰뚫고 다가오는 순간이 우리 모두의 삶에 있습니다. 흡사 다른 세계로부터 오는 음성을 통해서 우리가 부름을 받는 것 같은 순간 말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이런 음성에 귀를 기울입시다. 마리아처럼 이렇게 대답합시다. 라보니, 주님. 우리의 삶은 이를 통해서 변화됩니다. 우리가 세상을 관찰하는 모든 방식은 변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아마 예수님이 이런 순간에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이름을 부르신다는 사실이 명백해질 것입니다. 모든 것이 새로운 빛을 받아 빛나게 된다는 사실을 듣고 체험하는 일이 아직은 너무 늦지 않았습니다. 우리 삶의 경험에서 우리를 부르신, 그래서 늘 모든 사람의 이름을 부르시는 그 음성에 귀를 기울입시다.
우리와 이렇게 만나시는 부활한 분의 현실성은 그렇게 명백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곧 오늘 이야기의 세 번째 특징입니다. “나를 붙잡지 말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본 기쁨으로 예수님을 얼싸안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걸 막으셨습니다. “나를 붙잡지 말라!” 예수님이 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신기하게 들립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아직 아버지에게 올라가지 못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이 땅에 계실 때 제자들이 그를 얼싸안았던 것처럼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올라가신 다음에는 다시 그를 얼싸안을 수 있다는 뜻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승천을 통해서 우리에게서 떠나셨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붙잡지 말아야 할 이유는 다르게 이해되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분은 마리아에게 가시적 형태로 나타나셨는데, 이 형태는 일종의 익명(Inkognito)입니다. 마리아는 그를 정원지기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녀는 단지 정원지기를 얼싸안으려고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부활하신 분의 생명은 변화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얼싸안을 수 없습니다. 사태가 이랬기 때문에 마리아는 부활하신 분이 아버지에게 올라가지 못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원지기라는 인물은 부활하신 분의 형태는 아닙니다.
바로 여기에 요한이 전하고 있는 또 하나의 다른 부활절 이야기, 즉 믿지 못했던 도마 이야기와 완전히 대조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도마에게 나타나신 부활의 예수님은 도마가 자신의 상처에 손을 넣을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도마는 이제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책망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막달라 마리아는 보지 못했고 대신 정원지기만 보았지만, 예수님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그곳에 예수님이 계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을 얼싸 안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변화하신 그 새로운 생명은 정원지기와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도마는 피상적으로만 좋은 입장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도마의 불신앙을 극복하게 하기 위해서 부활하신 분이 어쩔 수 없이 실제로 지상의 육체로 만날 수 있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분이 왜 부활절 이야기에서 매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셨는지 대충 알만 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형태를, 즉 영원성으로 변화한 생명의 형태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그분의 음성을 듣게 될 경우에 이러한 새로운 생명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분을 얼싸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만찬의 초청에 참여함으로써 그의 새로운 생명에 휩싸일 수 있습니다. 이 만찬에서도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가 먹는 빵처럼 포착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생명은 그 자리에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으로 변화됩니다. 이는 흡사 그분의 말씀과 교회의 신앙이 고백된 다음에 빵과 포도주에 예수님이 현재 함께 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부활절이 비추는 빛의 능력이며, 우리의 죽을 생명과 모든 창조를 비추는 새로운 생명의 능력입니다. 아멘. (1995. 부활절, 그래팰핑, 평화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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