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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16:7~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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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최만자 자매 |
참고 : | 새길교회 2009.9.6 설교 |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생존과 해방으로의 인도자 - 하갈의 하나님
창세기 16 : 7~12, 21 : 12~13]
최만자 자매
인생에 하나의 정답이 있겠습니까? 우리의 살아가는 여정에서 터져 나오는 수많은 문제들을 놓고 동서고금의 현자들과 석학들이 그 해답을 찾으려 수많은 경전과 금언들을 내어 놓았지만 아직도 우리들에게는 여전히 인생의 질문들이 쏟아져 나오고 그에 대한 정답 없이 무수한 해답들만을 우리가 순례하고 있는 현실이지요. 성서도 그 많은 답들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성서는 그 해답을 얻는 근원이며 그것에 따라 사는 삶의 기반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어떤 문답 형식의 책이 아니며 더욱이 권위나 규법성으로 대답을 주는 책이 아니라 사람들이 성서와 더불어 살아온 삶의 역사, 곧 실존적이며 종교적인 지평으로부터 대답을 하고 있고 또한 찾아 나가고 있는 그러한 책입니다.
목원대 김경희 교수는 성서를 ‘그리스도인들의 종교적 고향이다’라고 말합니다. 성서는 고대 세계의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깨닫고 체험 하게 된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뜻에 대한 그들의 종교적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과 만나는 경험들, 또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과정들이 성서 텍스트들과 전승들의 맥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에 대한 깨달음을 가졌다’ 든가 ‘고난과 핍박 가운데 있던 히브리인들을 에집트에서 탈출시킨 것은 하나님 이었다’는 것, ‘하나님에게 기름진 제물을 바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역겹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진정 기쁘게 하는 것은 정의의 구현이다’라는 깨우침, 또 ‘하나님은 의인을 사랑하고 죄인을 벌주시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죄인과 창기가 의인으로 자처하는 사람들보다도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전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예수가 말씀하셨다는‘ 것 등 등 선조들의 종교적 경험들이 기록된 책이라는 것입니다.
김경희 교수의 통찰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서 안에서 우리 신앙 선조들의 종교적 경험들과 만납니다. 우리들은 선조들의 그 경험을 우리 일상의 경험들과 연결시키며, 그것에 비추어 우리 자신들의 삶의 경험들을 해석하며 선조들의 종교적 경험들로부터 고생스러운 삶 안에서, 때로는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위로와 격려를, 살아갈 용기와 미래에 대한 희망을,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헌신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조들의 종교적 경험 안에는 그들의 윤리적 발언들과 태도들이 있으며, 그것이 우리 사는 모습의 기본적 방향과 모델을 제시해 줍니다. 인간 존엄성, 평등성, 정의, 평화, 약자와 소외된 이들에 대한 책임과 배려, 타인을 위한 봉사, 희생, 더불어 삶, 관용과 용서 등 기본적 윤리들이 성서로부터 형성되어 온 것입니다. 성서에서 나오는 이 윤리적 가치들과 태도들에 우리 삶을 비추어 보고 살고, 또 그렇게 살도록 요청을 받은 것이지요. 다시 말해 성서는 규범이 아닌 윤리적 본보기가 되며 그래서 현재 우리의 대화의 파트너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성서본문으로부터 우리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사라의 여종인 에집트여인 하갈의 종교적 경험, 그의 하나님과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적으로 나눠보고자 합니다. 기독교의 전통이나 오늘의 현실에서도 이 본문 메시지의 중심은 아브라함과 사라라고 생각하지요. 신약성서 사도 바울도 하갈은 ‘구원사를 방해한 말썽을 일으킨 자’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이야기의 중심을 하갈에게로 옮겨 보려 합니다. 다르게 말하면 성서 안에서 주류가 아니고 비주류인, 구원사의 라인에 선 사람이 아니고 구원사 라인 밖에 있는 사람의 하나님 경험을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전에도 하갈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만 오늘은 하갈의 하나님 경험을 세밀히 찾아보고, 그것이 오늘 우리와 무슨 상관인지를 생각고자 합니다. 족장사는 대략 주전 2000년경부터 1200년경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고 문서화 된 것이 주전 950-700년경으로 보면 주전 2000년경에서 700년 사이의 이야기와 신학이 모두 담겨있어 우리와 4000년 세월의 간격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인간의 문제는 고대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입니다만 그러나 우리와 직선적으로 연결하는 것은 조심스럽기도 합니다.
하갈 이야기는 이야기의 도입부인 창세기 16장과 종결부인 21장에 나옵니다. 두 본문은 매우 유사한 부분이 많으면서도 또 각각 특수한 부분을 가지고 연결된 내용입니다. 16장에는 에집트 여인 하갈이 어떤 상황에서 인지 모르지만 사라의 몸종으로 아브라함과 사라가 에집트에서 가나안으로 올 때 함께 따라왔고 사라가 아이가 없어 씨받이로 이용되면서 일어나게 되는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당시는 일부다처제도였으며, 결혼 때 부인이 몸종을 데리고 결혼하고 아내가 자식이 없는 겨우 몸종을 남편에게 주어 아이를 낳게 하였습니다. 그 아이는 당연히 부인의 아이가 되었고 이를 상징하기 위해 몸종은 부인의 무릎에서 해산하는 관습도 있었습니다. 이런 사회제도와 관습을 잘못된 것으로 보고 신양시대에 이르러는 없어졌지만 아직도 그런 풍습의 여파는 남아있지요. 이 제도 안에서 본 부인과 첩 사이의 갈등, 이복형제간의 갈등, 아이 낳지 못하는 부인과 씨받이 여성 모두가 가부장제의 희생자로 고통의 세월을 살아야만 했던 사회였습니다.
하늘의 별처럼 수많은 후손을 받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지체되어 사라는 아이를 낳지 못하자 결국 몸종 하갈을 남편 아브라함에게 주었습니다. 하갈이 임신하게 되었는데 임신한 하갈이 교만해져 사라를 업신여기게 됐고 사라의 위험과 분노가 하갈을 학대하게 되었으며, 이를 견디지 못한 하갈은 광야로 도망을 칩니다. 하갈이 도망친 곳은 에집트 경계지역 수르라고 하는 곳의 샘 곁이었습니다. 이곳은 에집트 경계지역이며 하갈에게는 고향으로 가는 길목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하갈에게 사래(사라)에게 돌아가 그에게 복종하며 지내라는 것과 하나님이 하갈의 고통을 들으셨다는 것, 그리고 두 가지 약속을 줍니다. 하나는 많은 자손을 주겠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하나님께서 들으심)로 지을 것과 이스마엘이 큰 민족을 이룰 것이며 자유롭고 야성적이며, 호전적인 삶을 사는 베두인의 조상이 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갈은 그가 만난 하나님을 ‘나를 보시는 하나님’이라고 외쳤고, 그 샘터는 ‘브엘-라이-로이’ 즉 나를 보시는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샘이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엔 제의 장소나 이스마엘 족속 기원에 관한 원인론적 설명이 있긴 하지만 이야기의 중심은 여자들의 갈등문제입니다.
창세기 21장에는 16장과 매우 비슷한 상황이 보도되고 있습니다. 하갈은 사래에게 돌아왔고 사라도 하나님의 약속대로 임신하여 이삭을 낳습니다. 결국 사라와 하갈의 긴장, 적대관계가 더 고조되고 하갈은 더욱 고통을 당합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의 상속경쟁이 예민해 지는 상황에서 사라는 결국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이스마엘을 추방할 것을 요구합니다. 아브라함은 16장과 달리 심각히 고민하다가(아들 때문에?) 하나님의 권유를 따라 두 모자를 쫓아냅니다. 21:14 절에 아브라함은 다음날 아침 일찍, 먹을거리 얼마와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에게 주고, 그것들을 하갈의 어께 메워 주고서 두 모자를 함께 내보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갈은 해방이 아닌 추방을 경험합니다. 하갈은 다시 브엘세바 빈들에서 정처 없이 방황하는 신세가 됩니다. 이 브엘세바 들은 수르와 달리 에집트 경계지역도 아니고 물 한 방울도 없는 사막입니다. 이곳은 삶과 죽음의 양극성이 있는 곳이었지요. 물도 다 떨어지고 죽게 될 상황에서 하갈은 대성통곡합니다. 그런데 다시 하나님의 사자가 등장하여 하갈을 위로하고 아들이 큰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을 약속합니다. 그제야 하갈의 눈이 밝아져 샘물을 보게 되고 아이와 함께 살아납니다. 21장 20절에는 ‘그 아이가 자라는 동안에, 하나님이 그 아이와 늘 함께 계면서 돌보셨다. 그는 광야에서 살면서 활을 쏘는 사람이 되었다. 그가 바란 광야에서 살 때에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에집트 땅에 사는 여인을 데려가서 아내로 삼게 하였다’라고 끝맺고 있습니다.
두 본문에 나오는 하갈의 이야기를 더 자세히 상상력을 동원해서 읽어 봅니다. 하갈은 종족으로는 이방인 에집트인이고 신분으로는 노예-종의 몸이었고, 성으로는 여성인 3중적 차별구조의 고통을 살아야 했던 불쌍한 낮은 계층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갈은 늘 자유를 구가하며 인간적인 삶을 살기를 희망한 여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가 임신하자 교만하여져 사라를 경멸하였다는 기록을 가지고 해석이 분분하지요. 노예주제에 아무리 임신했어도 교만해지면 안 되지, 어떤 경우에도 교만은 죄야, 역시 신분은 못 속여 노예 주제니까 제 입장 달라졌다고 교양 없이 굴었지, 그러니까 사라의 학대는 정당한 것이야, 라는 등등의 해석들은 어떻게든 주류와 정통을 정당화하려는 욕망의 일환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하갈은 씨받이로 이용당한 억울함을 갖고 있습니다. 한 낮 도구로 취급당한 자신을 한 인간으로 세우려는 몸짓을 그는 사라를 경멸하는 것으로 나타내었을 것입니다. 하갈은 사라의 권력구조에 도전한 것입니다. 노예제도, 씨받이 제도 이런 것들로 내 인간존재를 비참하게 끝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사라를 경멸하고 교만하여 진 것이지요. 그러나 그의 이런 도전은 하나님은 전혀 개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의 도전이 그런 제도들을 무력화시키기는커녕 더 강화시켰습니다. 결국 그는 자유를 위해 해방을 위해 도망을 친 것입니다. 그런데 수르 광야에서 방황할 때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지요. 하지만 그 하나님과의 만남은 하갈로서는 예상할 수 없었고 용납하기도 힘든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은 하갈을 ‘사래의 여종 하갈아’라고 여전히 계급구조, 권력구조를 인정하는 의미를 갖고 부르면서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 그녀의 손아래에서 학대를 감수하라’(원문 직역)고 한 것입니다. 이 16:9은 해석이 난감하기 짝이 없는 구절입니다. 억압구조로부터 해방을 원하는 용기 있는 한 여성에게 얼마나 공포스러운 말입니까? ‘학대를 받으라’라는 학대하다는 이 단어는 히브리인들이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당하던 학대와 같은 단어입니다. 출애굽의 이야기로 보면 노예들의 고난을 보고 구출하거 오신 하나님이 억압자 파라오와 동일시되어 종살이를 계속하면서 학대 받고 살고 있어라 하고 하시는 격이 되는 것입니다. 하갈 이야기를 출애굽 이야기의 예시로 많이 언급하고 있는 유니온 신학대학 필리스 트리블 교수(지금은 은퇴) 는 이구절의 애매모호성이 결국 하나님이 학대를 승인하는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게 한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하갈에게 수많은 자손을 주겠다는 것과 아들의 출생과 이름과 장래의 삶을 담은 수태고지를 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고 합니다.
21장에서 하갈은 자유를 얻게 되지만 그것은 추방에 의한 자유와 해방이지 하갈 스스로 추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얻어진 자유와 해방의 상황에 주어진 것은 극한적인 생명의 위협이었습니다. 물 한 방울 없는 사막에서 아이가 죽어가고 잇는 상태를 보면서 대성통곡 밖에 할 수 없는 하갈은 격정에 찬 한 모성으로 나타납니다. 권력구조에의 도전보다도 급박한 생존유지의 상황에서 자식의 죽음 앞에 그를 살리고자 하는 절박한 모성, 그의 울음소리는 하늘에 울려 퍼졌을 것입니다. 하갈이 직면한 생존에의 절박함은 목마름, 배고픔, 그리고 죽음의 위협과 더 나아갈 길이 없음에 대한 공포였습니다. 무엇보다 아들의 목마름과 죽음 앞에 있는 처절함이었습니다. 이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하갈을 위로하고 다시 아들이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는 미래의 약속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곁에 있는 샘물을 보게 합니다. 분노와 절망으로 곁의 물을 못 본 하갈이 물을 보게 되고 아들의 생명을 살립니다. 이제 드디어 생존을 유지시켜주고 삶의 새 힘을 주며 위로를 주신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21장에서 하갈의 추방을 유도하는 하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역시 하나님이 가진 자들의 신이구나라고 생각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하갈이 사라의 곁과 그 집에서 떠나보내어진 것은 그 끝없는 학대의 고통, 질투와 갈등의 고통, 예속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고 종의 신분을 넘어서는 해방의 사건이 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종살이를 벗어난 자유한 에집트인, 자기 정체성을 찾게 된 기쁨을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독립된 인간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사건입니까.
하갈이 만난 하나님은 비록 해방에 애매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이 이야기의 전반에 흐르는 하나님의 모습은 하나님이 하갈을 지극히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고대 근동사회에서 신은 권력자, 가진 자, 주인(여주인)을 지지하는 신이었고 노예들을 지지해 주고 힘주는 그런 신은 아니었습니다. 야훼 종교 역시 아브라함과 사라의 하나님이지 하갈의 하나님이기는 어려운 사회적 문화였지요. 그런데 성서는 이 야훼 하나님이 하잘 것 없는 여종 하갈을 부르고, 찾아가고, 위로하고, 그리고 탄생고지와 미래의 희망을 약속하는 하갈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라고 비록 계급의식이 베이긴 했지만 이는 성서에서 모세나, 아브라함이나, 예언자들을 부르시는 부름과 동일합니다. 성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은 노예에게까지 열려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갈로 하여금 사라의 손아래 학대를 참고 견디라는 말이 해방적 하나님과 모순되는 한계는 아마도 당시 사회문화의 한계 안에 쓰여진 것이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학자들은 이구절의 난감함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연구를 했지요. 이경숙 교수가 학자들의 견해를 정리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16장과 21장 두 설화는 원래 같은 기본 설화를 가지고 있었던 평행문임을 볼 수 있다. 우 이야기 등장인물, 두 여자의 경쟁과 질투, 계급간의 학대, 도주 등이 공통된 내용이다. 두 이야기가 차이도 있고 비슷한데 21장이 훨씬 묘사가 감동적이고 심리묘사가 뛰어난 것으로 보아 후대 작품으로 생각된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16장을 주전 950년경의 J기자의 것이고 21장을 주전 700년경의 E기자의 것으로 생각하며 하나님이 잔인하다고 생각되는 16:9의 명령은 하갈이 사라의 곁으로 돌아가야만 두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연결되기 때문에 두 이야기를 연결시키기 위한 후대 설화자의 삽입이다’
하갈의 이야기는 학대받는 종의 신분으로부터 해방과 생존의 위협이 절박한 상황에서 구출되는 생존유지의 이야기가 그의 인생여정으로 엮어져 있습니다. 생존과 해방이라는 화두는 여성신학에서 여성들의 경험을 이야기 할 때 등장하고 있습니다. 1세계 중심의 여성들의 경험이 가부장적 구조로부터 여성해방에 더 집중하고 있다면 제3세계 여성들 특히 흑인 여성들은 생존의 문제가 포괄되지 않은 해방은 의미 없다고 못을 박습니다. 흑인들의 삶에서 생존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주장합니다. 그들을 억압하는 구조를 탈출하거나 부셔버릴 수 없는 무력한 상황에서 그들이 살아남아야 하는 생존의 문제는 너무나 절실한 것이지요. 흑인 어머니들은 그들의 자녀들을 주인집 음식 부스러기를 모아 기르면서 흑인 공동체를 유지시키고 그들의 미래-곧 큰 민족이 될- 꿈을 키워냈다는 것입니다. black woman power 는 바로 이 하갈이 모델이 되는 것입니다. 구조개혁을 향한 해방운동이 신앙의 우선적 과제라는 입장과 긴급한 생존문제를 더 우선시해야 한다는 논쟁은 양자 모두를 아울러야 한다는 포용의 방향을 지향하려 하지만 그러나 서로간의 충돌과 갈등이 빚어지기도 합니다.
많은 비약이 있긴 합니다만, 이런 갈등의 현실이 오늘 우리사회나 교회 안에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무력한 사회주변부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지루 하리 만큼 끈질긴 투쟁적 행동을 하는 수가 있는데 이에 대해 표피적으로 거부감을 느끼는 편견을 가졌거나, 또 혹은 일상적 삶의 차원들, 개인적 안정과 억압 없는 평안한 생활의 문제에 매달리는 평범한 사람들의 기원에 대하여 비난하거나 하는 현상들입니다. 우리는 용산참사 사건을 잊어가고 있지만 저들은 아직도 시신의 장례도 치르지 못한 채 매일 매순간을 억울함을 풀고 생존권의 보장을 요구하는 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회주변부인 그들, 사회에서 무력한 그들의 투쟁은 마치 하갈의 모습과도 유사하며, 그들의 하나님 또한 해방에 한계적인 하갈의 하나님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일상적 삶에서 평안을 찾고 서로 사랑하며 충실하게 살아가기 위해 기도하며 살고자 하는 이들은 저들의 투쟁적 태도에 식상해 합니다. 더욱이 교회 안에서 이런 이야기들이 말해지는 것에 대하여 불편해 하고 그것이 신앙의 이야기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반면 이러한 사고에 대해 해방지향의 사람들은 저들이 형제의 고난에 참여하지 않고 있음에 대하여 비난하기도 합니다.
저는 하갈을 통하여 우리 인생의 여정이 때로는 생존의 위협아래 있게 되기도 하고 일상적 삶의 무게에 짓눌려 울부짖게 되는 때도 있으며, 또 때로는 억압적이고 학대의 고통에 시달려 해방적 투쟁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될 때도 있는, 우리 역시 하갈과 같은 인생여정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생존과 해방, 이런 상황들은 우리 삶의 여정에서 겪게되는 생의 과정일 것입니다. 우리는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삶의 안정을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고 노력하여야 할 것이지만 동시에 사회 구조적 평화와 학대 없는 세상의 정의를 위해서도 기도해야하며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의 모습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갈의 학대받음을 부당하게 보셨고 그의 자유로움을 위해 길을 인도하셨으며 그의 안정된 미래를 위해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사랑과 보살핌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바로 그러한 삶을 자녀 된 우리에게도 요구하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우리 자신들의 일상적 생존적 삶, 평안을 위해 기도하면서도 동시에 용산 참사 투쟁자들의 고통을 안타까워하면서 그들을 지지하는 머릿수 하나 더 보탤 수는 없는 것일까요? 왜 꼭 신앙의 이분화가 일어나야 하는 것일까요? 무력한 자들이 자신들의 삶의 조건변화를 위한 몸부림에 하나님의 사랑이 분명 함께 하신다면 그것은 우리에게도 그런 삶을 살아라고 하시는 요청이 아니겠는지요?
이제 이야기를 더 진전시켜 보겠습니다. 오늘의 하갈은 누구일까요?
필리스 트리블 교수는 하갈이 모든 버림받은 여자들, 지배계층 남성과 여성에게 이용당하고 학대받는 흑인여성, 대리모, 법적 보호를 못 받는 불법 체류 외국인, 소외된 여성, 미혼모, 집 없는 여성, 등등 현대의 다양한 류의 사람들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저는 불의한 구조 속에서 학대받고 또한 생존의 절박함 아래 있는 모든 이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생존의 절박함이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저는 어렸을 적에 지독한 가난을 경험해 보아서 어렴풋이 알고 있습니다. 제 어머니는 36세에 홀로 되셔서 올망졸망 어린 딸 넷을 기르셨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이집 저집 친척집을 기웃거려 어둑한 저녁에 쌀 됫박을 얻어 오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극한적 가난에 처한 사람들, 또 특히 가난한 임신한 여성, 그의 몸은 생존의 위협을 더 느끼지요. 한 끼만 걸려도 온 몸이 고통스러워지는 배고픔에 시달립니다. 지금 북한의 임산부들, 또 북한의 아이들은 어떤 고통 속에 있을까요? 배고픔, 목마름, 소외됨, 나아갈 길이 막힌 삶의 상황, 절박한 생존의 위협에 놓인 이들을 하갈의 하나님이 찾아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죽음의 문턱 앞에서 또는 삶의 고통의 절박함 앞에서 울부짖는 기도들을 우리는 감히 기복신앙이라 비난할 수 없습니다. 한국교회 왜곡된 기복신앙행태야 비판되어야 하지만 생의 절박함 앞에서 부르짖는 기도를 외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귀기우리고 하갈의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용당하고 학대 받는 자로 성서에 제일 처음 나오는 하잘 것 없는 에집트 여인 하갈, 그의 이야기가 억압자의 관점에서 기록되어져 있어 그의 해방적 차원은 한계가 있는 기록입니다. 그럼에도 그가 자신의 억압구조를 넘어서려고 계속 투쟁하며 산 모습에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땅의 힘없는 자들의 저항이 언제나 무력히 끝나고 오히려 더 억압적 상황을 만들어 내게도 하는 역사현실을 하갈을 통해 다시 직시하게 됩니다. 이 현실이 바로 비주류, 주변적 사람들의 신앙의 경험이라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성서는 우회적으로 하갈을 찾아 와 위로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통하여 사라와 아브라함의 학대와 편견과 신분차별이 불의한 행위이며 잘못된 것임을 말하고 있음에 귀 기우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갈의 자유와 해방을 도우시는 하나님을 바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갈을 만나시는 하나님을 통하여 성서는 야훼 하나님이 하잘 것 없는 여종까지도 사랑하고 보살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며, 신분차별을 철폐하시는 하나님이며, 노예의 자유와 해방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이며, 이방 민족도 보살피시고 세우시는 하나님이며, 생존의 위협에 놓인 모든 사람들에게 위로와 생명의 힘을 새롭게 주시는 분이며, 하나님은 모든 차별을 뛰어 넘어 인간 모두가 각자 독립된 해방의 길을 찾도록 도와주시는 분이라는 하나님 속성의 지평을 활짝 열어 날 수 있습니다.
성서에서 중심은 아니지만 잊혀 지지 않는 인물 하갈, 그는 다양한 방식으로 믿음을 형성하고 믿음에 도전하였습니다. 성서로부터 믿음의 흑인 여성 조상을 회상하는 일은 주변부에 사는 사람들의 경험을 우리의 것으로 새롭게 경험해 보고자 하는 그와의 연결지점을 찾는 일입니다. 우리 삶의 생존의 차원도 해방의 차원도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하심이 함께 하는 길임을 하갈의 이야기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길을 가는 하갈에게 하나님은 부단한 노력과 인내를 요구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갈의 이 끈질긴 노력과 인내 위에 오늘 우리 새길공동체에게는 겸손과 한 마음 되는 화합을 더하여 요구하고 계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겸손하고 한 마음 되는 화합을 위한 노력을 하는 우리 곁으로 하갈의 하나님께서 위로와 새 힘을 주시며 우리를 찾아오시고 함께 하시리라는 믿음을 가져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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