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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가 주어지는 4대 이유 (신 8:1-10)
< 개척자의 고난은 축복입니다 > 어제 뉴스를 보니까 소녀 가수 그룹인 원더걸스가 이번 주에 미국 빌보드 노래 순위 76위에 올랐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겨우 76위로 뭘 그러냐?”라고 하지만 한국인으로는 113년 만에 처음 들은 것이고, 동양인으로 100위 안에 들은 것이 30년 만에 처음이라니까 어린 소녀들이 타국 땅에서 잘했다고 칭찬해주고 싶습니다. 어떤 멤버는 미국 진출 후 매일 밤마다 울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인기를 뒤로 하고 미국에서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하려니까 얼마나 서러웠겠습니까? 언어가 부족하니까 몸짓 언어로 웃어주고, 까불어주고, 애교를 부려주면서 속상한 일도 많이 겪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하루에 6시간 동안 영어를 공부하고, 공연 전과 공연 후에 2시간씩 관중들과 직접 대면하면서 얼굴을 알렸기에 짧은 기간 안에 인지도를 올린 것입니다. 이제 빌보드 76위에 들었으니까 앞으로는 더 잘할 것입니다. 계속 정진하고 겸손히 노력하면 10위 안에 들 날도 올 것이고, 언젠가는 1위가 될 날도 올 것입니다. 또한 본인이 그 꿈을 이루지 못해도 개척자로 걸어간 그들을 ‘교사’로 삼아 다음 주자와 후배 주자들이 그 꿈을 이룰 날이 올 것입니다. 그 그룹을 이끄는 박진영 씨는 말했습니다. “저는 ‘설마 미국에서 되겠어!’ 하는 생각을 깨고 싶고, 계속 도전하다가 망해도 후회 없이 망하고 싶습니다.” 멋있는 말입니다. 옛날에 그는 ‘튀는 행동(pert)’으로 구설수도 많았고, 외모도 누군가의 표현처럼 고릴라처럼 생겼지만 지금은 점점 ‘튀는 행동이 빠진 원숙한 전문가(expert)’가 되면서 옛날의 ‘튀는 행동’이 그의 가슴속에 잠자던 개척정신의 표출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호불호 문제와 신앙 문제를 떠나서 그가 가진 개척정신은 배워야 합니다. 지금부터 30년 전에 캔디 만화가 대단히 인기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고난 중에도 낙심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서 마침내 행복을 찾기 때문입니다. 성도들도 고난을 이겨낸 캔디처럼 새로운 도전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새로운 세계를 멋지게 개척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누군가 걸어보지 않은 숲에서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모습을 대견하게 지켜보실 것입니다. 물론 개척은 힘듭니다. 그러나 개척자의 고난은 축복이고 개척자의 발자국은 나중에 ‘역사’가 됩니다. 이제 우리 교회를 통해 한국에 기독교 선교연맹 교회들을 속속 개척될 것입니다. 지금은 7개의 작은 개척교회들만 있지만 앞으로는 10년 안에는 몇 십 개, 20년 안에는 몇 백 개로 계속 늘어날 것입니다. 또한 현재까지 완성된 29개의 성경 설교파일이 점점 늘어나 15년쯤 후에는 성경 전권 파일이 완성되고, 미션퍼블릭과 네트영어를 통해서도 하나님이 재정을 주셔서 세계선교와 교회개척의 선봉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또한 성경 전권 파일이 완성되면 그때부터 그 피일을 영어로 번역하며 미국과 세계를 향해 말씀사역을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설마 미국과 세계를 대상으로 한 말씀사역이 통하겠어!”라고 하겠지만 저는 통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를 통해 수많은 교회가 세워지고, 수많은 인물들이 배출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어려움도 있겠지만 계속 매진하면 반드시 열매가 있을 것이고, 우리가 못하면 우리의 후대와 후배를 통해서 그 일이 이뤄질 것입니다.< 자기를 극복하십시오 > 이제 현재의 위치에서 안주하려는 자기를 끊임없이 극복하십시오. 사실상 자기를 극복하는 것처럼 복된 삶은 없습니다. 왜 사람에게 ‘원망과 미움’이 왜 생깁니까? 가장 큰 이유는 자기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자기극복을 이뤄내십시오. 그래서 감사보다는 원망이 많은 자기를 극복하고, 사랑하기보다는 사랑 받으려는 자기를 극복하십시오. 성도의 할 일은 ‘사랑하는 것’이지 ‘사랑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남이 내 기대대로 되기만 바라는 의존적인 삶은 항상 미움과 분노를 낳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독립적으로 살기를 힘쓰십시오. 교제와 어울림을 외면하라는 말이 아니라 잘 어울리면서도 독립적인 믿음인 ‘독립신(獨立信)’과 독립적인 마음인 ‘독립심(獨立心)’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살면서 최악의 경우를 당해 내 곁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느껴도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고 기쁨을 잃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60억의 인류를 가진 사람’보다 ‘하나님을 가진 사람’이 사실상 더 행복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도 남에게 너무 해달라고 하지 말고, 어디 신령한 곳이나 신령한 사람에게 가서 기도 받겠다고 하지 마십시오. 성경은 “스스로 직고하라!”고 했습니다(롬 14:12). 왜 어디에 가서 함부로 머리를 내밉니까? 아무리 신령하다고 해도 모르는 사람의 기도보다 자기를 잘 알고 사랑하는 담임목사나 교우의 기도가 더 파워가 있고, 담임목사나 교우의 기도보다 자신의 진실한 기도가 더 파워가 있을 수 있음을 왜 모릅니까? 그처럼 남을 지나치게 의존하는 마음과 생각을 극복해야 합니다. 어느 날, 한 여인이 병원에 와서 자기 뱃속의 개구리를 꺼내 달라고 했습니다. 의사선생님이 자초지종을 묻자 그 여자가 말했습니다. 몇 달 전, 자신이 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너무 목이 말라서 웅덩이에 고인 물을 손바닥으로 움켜서 먹었는데 일어서보니까 그 웅덩이에서 올챙이들이 헤엄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복통이 심한데 생각해보니까 그때 몸속으로 들어간 올챙이가 개구리가 되어 몸 안을 돌아다닌다는 얘기였습니다.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의사가 아무리 설명해하고 엑스레이를 찍어 보여주어도 소용없었습니다. 결국 의사선생님이 수술하는 척 하면서 미리 준비한 개구리를 한 마리 보여주자, 그 여인은 배가 시원해졌다고 하면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몇 달 후에 다시 배가 아프다고 병원을 찾아와 또 개구리를 꺼내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지난번 수술할 때 개구리는 꺼냈지만, 그 개구리가 낳은 알이 부화해서 지금 올챙이들이 몸 안에서 돌아다닌다는 것이었다. 이 개구리가 무엇입니까? 바로 원망과 미움입니다. 결국 의존적인 삶이 원망과 미움을 만들고, 배를 아프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처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 자기를 인정해주거나 사랑해주지 않으면 삶의 의욕을 잃고 불안해합니다. 물론 사랑받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있고, 사랑 받을 때 자신이 가치를 깨닫고 힘이 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남의 인정과 사랑을 통해서만 삶의 의미를 느낀다면 그 삶이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삶의 목표를 ‘더 사랑받는 것’에 두면 그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욕구불만은 계속됩니다. 그러나 삶의 목표를 ‘더 사랑하는 것’에 두면 행복해지고 욕구불만이 사라지며, 그때 더 남들의 사랑을 받습니다. 결국 사랑을 많이 받는 가장 좋은 방법은 먼저 사랑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표를 사랑받는 것에 두면 사랑받을만한 가치 있는 사람이 되기 힘들지만 인생의 목표를 사랑하는 것에 두면 사랑받을만한 가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성도의 삶의 목표는 ‘사랑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남이 무엇을 해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의존적인 성향을 버리십시오. 왜 하나님이 고난을 허락하실까요? 사람을 의지하는 의존적인 성향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더욱 성숙해지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 고난이 오는 이유 4가지 >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의 삶을 허락하셨습니까? 신명기는 광야 40년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전에 모세가 행한 세 번의 고별설교로 이루어진 책입니다. 그런데 그 고별설교에서 모세는 광야 40년의 이유를 설명합니다. 본문 2절 전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왜 하나님께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셨습니까?1. 더 순종하게 하게 위해서 하나님은 성도가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왜 순종하라고 하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예로 삼고 이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축복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 생명과 번성의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1절). 말씀대로 될 것을 믿고 순종할 때 기적의 역사는 나타납니다. 결국 하나님 말씀을 얼마나 인정하고 순종하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성패가 달려 있습니다. 이제 주님 말씀이 들려지면 항상 “예!”하고 반응하십시오. 시간과 물질과 생명을 바치는 일에도 “예!”라고 반응하십시오. 이 세상에 가장 복된 사람은 말씀의 감동대로 살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나를 위해 먼저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위해서라면 아무 것도 아까운 것이 없어야 하고, 주님이 무엇을 원하든지 “아멘!” 하고 순종하십시오. 그때 기적은 일어날 것입니다.2. 더 겸손하게 하기 위해서 본문 2-3절 말씀을 보면 두 번에 걸쳐 ‘너를 낮추시며’란 표현이 나옵니다. 왜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고난을 통해서 낮추십니까? 그래야 진짜로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축복의 근원이고 교만은 만병의 근원입니다. 그러므로 더욱 겸손해지기를 위해 힘써야 합니다. 주님은 스스로의 성품을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2가지로 요약했습니다(마 11:29). 결국 온유함과 겸손함은 성도가 추구해야 할 최대 성품입니다. 그 성품이 없으면 하나님은 그 성품을 주시려고 때로 징계와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사람이 겸손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상처도 상처가 되지 않고, 실망도 실망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그 마음이 복된 마음이 되겠습니까? 성도는 있어도 겸손하고 없어도 겸손해야 합니다. 있다고 해서 없는 자를 무시하는 교만도 없어야 하지만 없다고 해서 한이 맺혀서 있는 자를 무조건 비판하는 것도 교만도 없어야 합니다. 교만은 행복과 건강을 파괴하는 세균입니다. 교만은 고난을 초래하게 하지만 겸손은 고난을 물러가게 합니다. 결국 겸손한 마음을 가지는 것은 건강과 축복의 최대 비결이고 가장 소중한 삶의 지혜 중의 하나입니다. 3. 더 감사하게 하기 위해서 사람은 영혼을 가진 존재이기에 떡으로만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삽니다(3절). 그러나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떡 문제로 끊임없이 불평했습니다. 민수기 11장을 보면 나중에는 기적적으로 만나를 주시는 것까지 불평하며 “이제는 만나가 질렸다. 고기가 먹고 싶다, 애굽에서 먹었던 생선, 외, 수박, 부추, 파, 마늘이 먹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어떤 조치를 취하셨습니까? 민수기 11장 18-20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실 것이라/ 하루나 이틀이나 닷새나 열흘이나 이십 일만 먹을 뿐 아니라/ 코에서 넘쳐 싫어하기까지 일개월간을 먹게 하시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 중에 거하는 여호와를 멸시하고 그 앞에서 울며 이르기를 우리가 어찌하여 애굽에서 나왔는고 함이라 하라.” 즉 만나를 가지고 불평하니까 일 개월 동안 끊임없이 고기를 주어 질리게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구 먹이시는 것이 축복이 아니라 진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눔을 실천하지 않고 욕심을 극복하지 못하는 재벌은 가장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존재입니다. 물질적인 부는 물질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가장 복된 삶이 될 수도 있고 가장 저주 받은 삶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말씀으로 삶을 단장하고, 현재의 삶에 대해 만족하고 감사하며, 내가 가진 것을 이웃과 나누는 것입니다. 그처럼 힘든 상황에서도 만족의 조건을 찾고 작은 것에도 감사의 조건을 찾는 삶을 배우게 하려고 하나님은 때로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4. 더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성도에게 고난을 주시는 목적은 고난을 통해 훈련한 후에 마침내 축복을 내려주기 위해서입니다(7-10절). 광야의 길은 어렵고 힘들지만 하나님은 그 과정을 통해서 높이 날 수 있는 강건한 축복의 날개를 달아주십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주어질 때 그 고난이 축복을 위한 훈련과정으로 생각하고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사람은 물질적인 축복만 바라보지만 하나님은 통전적인 축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 통전적인 축복을 주시려고 우리의 생각을 초월한 더 나은 플랜을 가지고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진짜 축복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고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지만 무턱대고 물질을 주시면서 욕망을 채워주시는 물주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시기에 ‘영혼의 축복’과 ‘영원한 축복’에 더욱 관심이 많으십니다. 그래서 그에 대한 가장 멋진 각본을 가지고 오늘보다 내일 더 유익을 주시고 최후의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하십시오. 저는 학생 때 무협지를 가끔 봤습니다. 무협지를 보면 그 패턴이 거의 똑같습니다. 처음에는 주인공이 엄청나게 고난을 당합니다. 그래서 대부분 부모가 죽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본인도 절벽으로 떨어집니다. 그런데 절벽 밑에서 천년 전 비급을 발견하고, 2갑자의 내공을 주는 약초나 산삼을 먹고 최고의 무예를 익힌 후에 강호로 나옵니다. 그래서 결국 악당을 처단하고 반드시 주인공이 승리하는 것으로 소설이 끝납니다. 성도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가는 과정이 어려워도 성도의 삶은 최종적으로는 반드시 승리하고 축복 받는 것으로 끝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각본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한 각본을 신뢰하고 문제와 고난에 대해 너무 불평하지 말고 그때 더욱 하나님을 붙잡고 감사하십시오. 그처럼 고난 중에도 믿음으로 살면 선한 결말은 더욱 빨리 나타날 것입니다. < 온전한 믿음으로 사십시오 > 이제 자신을 돌아보고 불신앙적인 요소를 버리십시오. 자꾸 옛날처럼 점을 치러 다니고 불안해서 여기저기 예언 받는다고 하면 하나님의 진국 은혜와 가나안의 축복은 멀어지고 오히려 삶의 고통만 심해집니다. 중요한 것은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위대한 믿음은 위대한 순종을 낳고, 위대한 순종은 위대한 축복을 낳습니다. 다음과 같은 기독교 전승이 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과 제자들이 높은 산에 올라갈 때 산 밑에서 제자들에게 각각 돌 하나씩 가지고 올라가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의아해했습니다. 그때 도마는 생각했습니다. “돌을 가지고 뭘 하시려고 그러지? 집을 지으려면 이곳에 짓지 왜 산 꼭대기에다 짓나? 이상하다.” 그런데 그냥 갈 수가 없어 작은 돌을 골라 주머니에 넣고 갔습니다. 그때 가룟 유다는 옆의 제자들이 들으라고 이렇게 큰소리로 중얼거렸습니다. “아니, 여기서부터 왜 돌을 가지고 가나? 위에도 돌이 많을 텐데. 필요하면 거기서 돌을 주우면 되지. 여기서부터 힘들게 가지고 올라갈 필요가 없잖아!” 그러면서 빈손으로 올라갔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줏대 없는 빌립도 따라서 빈손으로 올라갔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아니! 주님이 돌을 가지고 올라가라면 가지고 갈 것이지, 뭐 그렇게 말이 많아?” 그리고 큼직한 돌을 둘러매고 갔습니다. 드디어 산꼭대기에 올라섰습니다. 그러자 산꼭대기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 모두 수고했다. 땀도 흘리고 피곤하고 배도 고플 텐데 어서들 앉아라.”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간구하셨습니다. “하나님이여! 저희들 손에 있는 돌이 변하여 떡이 되게 하소서.” 그래서 베드로의 손에 있는 돌이 가장 큰 떡이 되어 풍성하게 먹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기쁘게 순종할 때 반드시 축복을 예비해주십니다. 교회생활을 하면서 잘 순종하는 분들을 보면 마치 마음에 바퀴가 달린 것 같습니다. 리더가 카리스마가 있어서 잘 이끄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에게 믿음의 바퀴가 있어서 잘 이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모습을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그처럼 좋은 믿음의 바퀴를 가진 사람이 되십시오. 아무런 인간적인 계산이 없이 그저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의 주신 사명대로 살려고 힘쓰면 하나님이 반드시 그 마음의 소원을 이뤄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산적인 신앙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믿음은 계산을 배제해야 가장 온전한 믿음이 됩니다. 기도도 계산을 배제해야 가장 온전한 기도가 되고, 헌신도 계산을 배제해야 가장 온전한 헌신이 됩니다. 하나님은 계산이 배제된 온전한 예배를 원하십니다. 왜 선교하는 마음이 필요합니까? 비계산적인 삶을 훈련하기 위해서 ‘선교에 동참하는 것’만큼 좋은 훈련과목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왜 점치는 신앙과 무속신앙을 싫어합니까? 그 마음속에 욕심과 계산이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계산을 배제하십시오. 계산을 버리면 오히려 계산을 초월한 복된 열매를 더욱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계산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사십시오. 때로 고난이 있어도 감사하십시오. 이미 구원의 큰 은혜를 받은 존재임을 깨닫고 어떤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말고 과거의 잘못된 습성은 과감히 끊으십시오. 일본의 어떤 할머니는 교회를 잘 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수요예배를 드리고 돌아오는 중에 소방차가 윙윙거리고 자신의 집이 불타는 장면을 보고 털썩 주저앉아 무심코 말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습관과 관습이 이처럼 집요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다녀도 그런 무속적인 모습이 여전히 있어서 점치는 식이나 푸닥거리를 하는 식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찡한 것을 느끼고 진짜처럼 느낍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모습입니까? 오감을 만족시키는 찡한 체험에 신앙의 초점을 둘 때, 찡한 체험 후에 얻는 것은 끝없는 마음의 고통과 불행한 현실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신기하고 화려한 기적은 없어도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꾸준히 예배하고 기도하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때 그의 앞날에는 결코 어두움이 없을 것이고, 인간적인 생각을 초월한 하나님의 축복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항상 주님만 바라보고 대 평안을 노래하며, 비계산적인 신앙을 통해 예수 믿고 인물이 되는 복된 역사의 주인공들이 되길 바랍니다. ⓒ 글 : 이한규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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