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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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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행11:22-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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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
2002.10.30
이제 20세기가 67일 남았습니다. 시사저널 9월 22일 자 에 새 천년은 한국인에게 희망인가, 절망인가 라는 주제의 커버스토리가 실렸습니다. 요점은 한국인들은 새 천년에 대해 불안보다는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폴 케네디는 미래 는 인구문제. 환경문제, 기술문제가 가장 우선되는 부분이라고 언급했습니다. 20세기를 지나면서 우리는 제1, 2차 세계대전을 겪었습니다. 1차 대전으로 1000만 2차 대전으로 4000만이 전쟁으로 희생되었습니다. 칼막스의 이론과 레닌의 정치 혁명으로 공산주의와 공산국가가 생겼고 이 사상전으로 지난 75년 동안 약 2,000만 명이 국가 폭력에 의해 죽고 전세계적으로는 공산주의 이름아래 약 1억이 넘게 죽었다고 합니다. 1992년 공산주의 붕괴와 함께 데탕트(Detente) 시대가 열렸으나 여전히 핵무기 시대로 인류의 앞날은 캄캄합니다. 인류는 화약고에서 살고 있습니다. 인류는 좀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경제통합 시대를 열었지만 빈부의 차이로 몸살을 알고 있습니다. 21세기 에는 인류는 우주과학을 통하여 새로운 세계를 만들려 하고 있고 유전 공학을 통해 불사의 세포를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텔로메라제"를 발견하였는데 불멸의 효소로 생식세포나 암세포가 무한정 증식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효소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정상세포는 일생을 통하여 70번 정도 분열함으로 새 세포를 만들어내는데, 여기에 활성 텔로메라제’유전자를 세포에 이식시켜 세포로 하여금 무한 분열을 계속 하도록 하여 사람의 수명을 무한정 연장시킬 수 있다는 가설입니다. 컴퓨터 공학의 발달로 또한 사이버스페이스(Cyberspace; 가상공간) 시대의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21세기는 더욱 권력과 자본, 과학이 종교화될 것이고 사람의 가치관은 심각하게 변화될 것입니다. 특히 선한 사람의 가치가 점점 없어질 것입니다. 능력있는 사람을 요구할 것이고 그 능력 속에는 선이라는 것이 빠져 버릴 것입니다. 거추장스럽게 생각되어질 것입니다. 미래의 인간형에서 착한 사람은 경쟁력이 없는 사람으로 전락될 것입니다. 오늘 날도 그렇지만 착한 사람이 경쟁력이 있겠습니까? 착해 터져서 세상에서 어떻게 살지 모르겠다고 자녀들에게 말해 본일 없습니까? 착한 사람은 오늘 이 시대에 경쟁력이 없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이 이시대에 착한 사람은 경쟁력이 없을까요? 경쟁하여 이길 수 있는 힘이 없을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경쟁력이 있습니다. 경쟁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착한 사람이 나옵니다. 성경에는 착한 사람이라고 직접 표현한 분이 세 분 나옵니다. 다 승리한 사람으로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나오는 착한 종을 보십시오. 한므나로 10므나를 남긴 사람에게 주인이 말합니다.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눅 19:17)"
예수님이 선한 분으로 나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 10:11)" 예수님이 실패했습니까? 아닙니다. 승리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바나바가 나옵니다. 24절 보십시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행 11:24)" 큰 무리를 주님께 인도한 분입니다. 교회를 크게 부흥시킨 분입니다.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가 된 분입니다.(22) 안디옥 교회가 부흥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하였습니다. 사울을 초청하여 일년동안 안디옥 교회에서 가르치게 하였고(26) 바울을 선교의 중심인물로 만든 사람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작은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세계 선교의 중심역할을 하였고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 칭함을 받은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안디옥 교회를 그렇게 훌륭하게 만든 중심인물이 바로 바나바입니다.
착한 사람 바나바가 경쟁력이 없는 사람입니까? 실패한 사람입니까? 이런 분이 우리 교회에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착한 대도 경쟁력이 있는 비결은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오늘 본문 24절에서 그 핵심을 발견하였습니다. 착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믿음이 충만하였고 성령이 충만하였습니다.
1. 착한 사람이 경쟁력이 있기 위해서는 믿음이 충만해야 합니다.
로버트 캐플런은 "경쟁력을 키우려면 발상부터 바꿔야 한다"며 21세기 경쟁력의 3대 요소로 정보력, 순발력, 미래투시력을 제시하였습니다. 경제 학자들이 국제 경쟁력을 갖추려면 3가지 요소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첫째가 가격 경쟁력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가격면에서 다른 나라 제품보다 싸야한다는 것입니다. 비싸면 우선 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품질 경쟁력입니다. 똑같은 값이라면 좋은 품질의 것을 산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값싸고 품질 좋은 것을 사람들은 원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서비스 경쟁력입니다. 값이 싸고 품질이 좋다고 해도 사후 써비스가 좋지 않으면 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세 요소가 잘 갖추어지면 국제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합니다. 믿음의 사람이 이 험악한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경쟁력이 있으려면 무엇이 있어야 하겠습니까? 믿음입니다. 믿음의 경쟁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마지막 천국문에 들어가는 자격증은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정보력, 순발력, 미래 투시력, 가격 경쟁력, 품질 경쟁력, 서비스 경쟁력을 가지고 들어 갈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동안도 믿음 충만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얻은 그 수준의 믿음이 아니라 능력을 행하는 믿음입니다.
히11:1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막9:23에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마 17:20)"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교회는 다니는데 믿음이 적습니다. 기도하면서도 믿음이 적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특징입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눅 18:8)"
바나바를 보십시오. 타산적이요 계산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이것을 행하면 나에게 얼마나 유익이 올까 그것이 아닙니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 교인입니다. 부흥된 교회입니다. 편안하게 신앙생활 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말하면 큰 교회 교역자로 좋은 차를 타고 많은 사례금을 받고 수많은 성도들에게 설교를 하고 존경받으며 목회할 수 있었습니다. 소위 대교회 출세한 목사, 성공한 목사도 종교적 명예와 안락, 성취욕을 누리며 환영받으며 목회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22절을 보십시오. 그는 그 자리를 버리고 이방 땅에 세워진 조그마한 교회를 섬기러 떠났습니다.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습니다. 그곳에 가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기뻐합니다. 그가 예루살렘 교회에서 어떤 역할을 한 사람입니까? 사도행전 4:36-7절에 보면 알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는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고 제것이라 하는 이 없이 서로 도우면 행복하게 사는 교회가 되었는데 그 원동력을 불어넣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부동산처럼 확실한 재산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는 그것을 아깝게 생각하지 않고 교회를 위하여 가난한 자를 위하여 내어놓았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교회를 말없이 떠나 안디옥 교회로 갔습니다. 이 얼마나 순수한 능력있는 믿음입니까?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능력있는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에는 역사가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골 2:12)"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살전 1:3)"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살후 1:11)"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마 15:28)" 이렇한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2. 착한 사람이 경쟁력이 있기 위해서는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을 받은 바나나의 모습은 어떻게 나타납니까?
1) 인격적인 면에서 능력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나바는 인간의 소중함을 안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그가 안디옥 교회에 파송되어 첫 번째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는 선교 사업을 위하여 계획을 세웠습니까? 성경 공부 프로그램을 만들어 가르쳤습니까? 묘지가 필요하니 묘지를 사야겠다고 했습니까?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버스가 필요하니 버스를 사자고 했습니까? 안디옥 교회가 너무 비좁으니 교회를 부수고 새로 짖자고 했습니까? 예루살렘 주변에 신도시가 생기니까 그 신도시에서 큰 교회를 짖고 멋지게 목회하자고 했습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23절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가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고 모든 사람에게 굳센 마음으로 주님을 의지하라고 권하였습니다. 그가 교회에 부임하였을 때 교회가 큰 것을 보고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재정 많은 것, 교인 많은 것을 보고, 사택이 큰 것을 보고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기뻐하고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졌습니다.
오늘날 너무도 인간을 인간처럼 대접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인간이 도구로 전락된지는 오래 되었습니다. 돈을 위해 인간을 기계처럼 취급합니다. 쾌락을 위해 인간을 동물처럼 취급합니다. 자신의 명예와 출세를 위해 인간을 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쟁이라는 말로 서슴없이 표현합니다. 입시전쟁, 취업전쟁, 생존경쟁, 수출경쟁, 출근전쟁... 도대체 누구와의 전쟁이라는 말입니까? 타도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생명을 온천하보다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었습니다. 일의 목표만을 추구하다 보니 인간성은 짓밟히고 인간을 단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되어 버렸습니다. 세상이야 막가는 인생들이 사는 것이니까 그렇다 치고서라도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사는 교회는 그렇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 역시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성도가 목사의 능력을 대변하는 수단으로 전락되어 가고 있습니다. 사람의 귀중성을 상실해 가는 교회로 전락되어 가고 있습니다. 바나바는 이런 사람이었습니까?
사도행전 9장27절을 보십시오, 사울이 살기 등등하여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변하였습니다. 그의 삶은 완전히 변하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들과 사귀고자 제자들을 찾아갔으나 믿어 주지 않습니다. 그 때 사울의 신원을 보증해 준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바나바입니다. 어쩌면 자신과의 경쟁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이사람을 보증하겠습니다. 이사람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장차 주님의 큰 일군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을 믿어야합니다. 여러분, 내가 이 사람을 보증할테니 믿어 주십시오."라는 식으로 말을 합니다. 그의 보증과 변호 덕분에 바울은 비로소 사도로서 첫걸음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 때 그가 바울을 변호해 주지 않았다면 과연 오늘의 바울이 있었겠습니까? 바나바의 인간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비단 바울의 경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다 마찬가지 였습니다. 행 15장에 기록된 마가에 대한 바울과의 의견충돌 때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1차 전도 여행기간중 떠나간 마가를 다시 데리고 가자는 바나바의 의견과, 그런 사람은 데리고 갈 수 없다는 바울의 의견이 서로 대립되었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가려고 열심히 변호합니다.
"이 사람에게 한번 더 기회를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번의 실수로 어찌 사람을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 실수 때문에 더 열심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마가도 데리고 갑시다" 이렇게 말했을 런지도 모릅니다. 결국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갔고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각각 전도여행을 떠났습니다. 먼훗날 마가는 바나바의 말대로 훌륭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그의 말년에 "이 복음의 사역을 위해 내가 동역자가 필요하니 마가 요한을내게 보내주십시오"라고 고백한것을 보면 그는 훌륭한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 만약 바나바가 마가를 보호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마가는 한 낙심한 실패의 인생이 되었을런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하여 인격의 경쟁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십니다.
"고전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고전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2)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면에 있어서 경쟁력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성령 충만하여 신유의 능력이 나타나고 말씀의 능력을 받고 교회가 부흥하면 어떤 일을 합니까? 자기 영광을 나타내기에 바쁩니다. 예수님보다 교회 교회 보다는 어느 목사 이름 나타내기에 바쁩니다. 바나바를 보십시오. 무엇을 위한 경쟁인지 목적을 잃어 버리고 살아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목적을 잃어 버리고 사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 사는 지를 잃어 버리고 살아갑니다. 왜 공부를 하는지 왜 이길을 가는지 잃어 버리고 사는 경향이 있다는 말입니다.
인도 뉴델리의 한 마을에서 처남 매부가 동시에 물속에서 죽은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매부가 자기 아내가 배신했다고 비난을 하자 처남이 자기 누나를 변호하였습니다. 누가 진실인줄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동네에서는 이것을 가리는 방법이 두명다 물 속에 들어가 오래 있는 사람이 진실이라고 믿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판별하기 위해 물 속에 들어갔는데 둘 다 그만 나오지 않은 것입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아인슈타인이 한번은 버스를 탔답니다. 차장이 검표를 하는데 아무리 찾아도 차표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한참을 뒤적거리고 있는데 차장이 '한사람 걸려들었구나' 하면서 얼굴을 쳐다본 순간 놀라고 말았습니다. 당대 유명한 아인슈타인 선생님이었습니다. 당황이 된 차장이 떨리는 음성으로 “서 서 선생님, 선생님 같으면 괜찮습니다.'라고 말했답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여전히 호주머니를 뒤지는 일을 멈추지 않았답니다 "선생님, 괘 괜찮다는데 왜 그러십니까?' 그러자 아인슈타인이 화를 버럭내며 "야, 이 양반아! 당신이야 필요없지만 나한테 필요하단 말일세. 차표가 있어야 어디서 내려야 할지 알 것 아닌가.'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잃어 버리고 살아가면 되겠습니까?
왜 우리가 경쟁력이 있어야 합니까? 무엇을 위해 사는 것입니까?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바나바는 이 의식이 철저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가 안디옥교회의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바나바가 부임한 그날부터 안디옥교회는 부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몰려왔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 소문난 교회가 되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제자 훈련 잘하는 교회, 능력있는 교회, 하나님의 살아 계심이 나타나는 교회 등의 소문이겠지요. 아마 바나바의 종교적 인기는 최고도에 달했을 것입니다. 그 때 바나가가 한 것이 무엇입니까? 25절을 보십시오. 바울을 찾으러 다소에 갔습니다. 왜요 26절을 보십시오. 둘이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바나바가 자기밖에 모르고 옹졸한 목회자였다면 자기의 인기에 치명타를 줄지도 모르는 바울을 초청하여 함께 사역할 수 있을까요? 어떤 교회를 보면 부목사가 조금만 교인들에게 인기가 있으면 다른 교회에 보냅니다. 조금만 설교를 잘한다고 생각되면 아무말도 하지 않다가 수요 예배에 왔을 때 바로 설교를 시켜 버립니다. 조금 구분하기 위하여 갖가지 형식을 만들어 권위를 세웁니다.(박사까운을 입고 설교, 당회장, 담임목사, 부목사, 새끼목사) 등의 칭호로 권위를 세웁니다. 운전도 자기가 하지 안고 권위가 떨어진다고 부목사를 시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자기의 인기나 명예, 권위, 성취욕보다는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영광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초청했습니다 . 그 결과 안디옥 교회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가 오자마자 교회는 더욱 부흥하기 시작합니다. 안디옥 교회가 선교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소아시아 선교를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그를 대려 옮으로 말미암아 사울을 안디옥 교회를 발반으로 하여 세계선교를 감당하였습니다. 12장 부터는 바나바와 사울의 위치가 바뀌어집니다. 이전에는 바나바와 사울이라고 했는데 이제는 바울과 바나바로 바뀝니다.
"행 13:43 폐회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좇으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행 13:46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행 13:50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
선교의 주체가 바나바에게서 바울로 옮겨갔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바나바가 목회의 선배입니다. 한 때 날린 사람입니다. 나이도 많습니다.(행 14:12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
그러나 한번도 바나바는 이 일에 원망하거나 불평하거나 서운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일을 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꼭 내가 해야만 하고 나를 통해서만 교회일이 이루어 져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를 통해서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기나 명예, 목표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영광, 주님의 일이 중요한 것입니다. 나의 교회가 부흥되지 않더라도 주님의 교회가 부흥되면 그것으로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나를 통하여 교회일이 이루어지지 않더라고 다른 성도님을 통하여 교회일이 잘 될 때 그것으로 감사하며 감격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바울이 성숙되는 것을 보고 기뻐하면 조용히 자기 자리를 양보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인격입니다. 세례 요한을 보십시오. "요 3: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성령 충만히 받으면 능력있는 사람될 수 있습니다.
지금 자신의 모습을 보며 실망하지 마십시오. 능력이 없다고 좌절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경쟁력 있는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다.
"(고전1:27-29)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니님께서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목욕탕에서 이런 일이 있었답니다. 키가 작은 사람이 눈을 감고 비누를 잡으려다가 옆의사람 비누를 집어 쓰게 되었습니다. 비누의 주인인 체격이 좋은 청년이버럭 화를 내며 욕을 퍼부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눈을 감고 쓰다보니...용서하십시오.""뭐,용서? 너 이리 나와, 내가 누군 줄 알아? "체격이 좋은 젊은이는 먼저 나가서 옷을 입었습니다. 그는 군인으로 육군 중위 계급장을 번쩍였습니다. 키가 작은 사람도 나와서 옷을 입었는데 우연히 그도 군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육군 소령이었습니다. 자, 이때의 육군중위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겉모습만 보고 남을 평가하는 사람이 있다면이 육군 중위와 같은 못난 사람이 아닐는지요?
우리는 약하나 성령님의 능력을 힘입으면 강한 사람이 될 수 가 있습니다. 능력있는 사람 경쟁력있는 사람이 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바나바 같은 인물이 필요합니다. 너무나 타산적이고 계산적인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사람을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자신의 영광과 출세를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 세계를 세차례나 여행하면서 복음을 증거한 바울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없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넘어져 있는 한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바나바 같은 사람은 될 있습니다. 진정 타산 없는 헌신을 통하여 사람을 귀중히 여기며 하나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까지도 포기할 만한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지만 경쟁력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착하지만 성령충만 믿음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안디옥 교회에 가서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을 의지하라고 권면했습니다.(23) 사울을 초청하여 일년동안 안디옥 교회에서 가르쳤습니다.(26)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1)많은 사람이 주께로 나왔습니다.(24) (2)안디옥 교회 교인들이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았습니다.(26)
(3)사울을 선교의 중심인물로 만들었습니다.
이런 분을 경쟁 사회에서 진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경쟁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하면 선한 사람이 이 땅에서 경쟁력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착한 사람의 경쟁력/행11:22-26/김필곤 목사
이제 20세기가 67일 남았습니다. 시사저널 9월 22일 자 에 새 천년은 한국인에게 희망인가, 절망인가 라는 주제의 커버스토리가 실렸습니다. 요점은 한국인들은 새 천년에 대해 불안보다는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폴 케네디는 미래 는 인구문제. 환경문제, 기술문제가 가장 우선되는 부분이라고 언급했습니다. 20세기를 지나면서 우리는 제1, 2차 세계대전을 겪었습니다. 1차 대전으로 1000만 2차 대전으로 4000만이 전쟁으로 희생되었습니다. 칼막스의 이론과 레닌의 정치 혁명으로 공산주의와 공산국가가 생겼고 이 사상전으로 지난 75년 동안 약 2,000만 명이 국가 폭력에 의해 죽고 전세계적으로는 공산주의 이름아래 약 1억이 넘게 죽었다고 합니다. 1992년 공산주의 붕괴와 함께 데탕트(Detente) 시대가 열렸으나 여전히 핵무기 시대로 인류의 앞날은 캄캄합니다. 인류는 화약고에서 살고 있습니다. 인류는 좀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경제통합 시대를 열었지만 빈부의 차이로 몸살을 알고 있습니다. 21세기 에는 인류는 우주과학을 통하여 새로운 세계를 만들려 하고 있고 유전 공학을 통해 불사의 세포를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텔로메라제"를 발견하였는데 불멸의 효소로 생식세포나 암세포가 무한정 증식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효소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정상세포는 일생을 통하여 70번 정도 분열함으로 새 세포를 만들어내는데, 여기에 활성 텔로메라제’유전자를 세포에 이식시켜 세포로 하여금 무한 분열을 계속 하도록 하여 사람의 수명을 무한정 연장시킬 수 있다는 가설입니다. 컴퓨터 공학의 발달로 또한 사이버스페이스(Cyberspace; 가상공간) 시대의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21세기는 더욱 권력과 자본, 과학이 종교화될 것이고 사람의 가치관은 심각하게 변화될 것입니다. 특히 선한 사람의 가치가 점점 없어질 것입니다. 능력있는 사람을 요구할 것이고 그 능력 속에는 선이라는 것이 빠져 버릴 것입니다. 거추장스럽게 생각되어질 것입니다. 미래의 인간형에서 착한 사람은 경쟁력이 없는 사람으로 전락될 것입니다. 오늘 날도 그렇지만 착한 사람이 경쟁력이 있겠습니까? 착해 터져서 세상에서 어떻게 살지 모르겠다고 자녀들에게 말해 본일 없습니까? 착한 사람은 오늘 이 시대에 경쟁력이 없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이 이시대에 착한 사람은 경쟁력이 없을까요? 경쟁하여 이길 수 있는 힘이 없을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경쟁력이 있습니다. 경쟁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착한 사람이 나옵니다. 성경에는 착한 사람이라고 직접 표현한 분이 세 분 나옵니다. 다 승리한 사람으로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나오는 착한 종을 보십시오. 한므나로 10므나를 남긴 사람에게 주인이 말합니다.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눅 19:17)"
예수님이 선한 분으로 나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 10:11)" 예수님이 실패했습니까? 아닙니다. 승리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바나바가 나옵니다. 24절 보십시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행 11:24)" 큰 무리를 주님께 인도한 분입니다. 교회를 크게 부흥시킨 분입니다.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가 된 분입니다.(22) 안디옥 교회가 부흥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하였습니다. 사울을 초청하여 일년동안 안디옥 교회에서 가르치게 하였고(26) 바울을 선교의 중심인물로 만든 사람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작은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세계 선교의 중심역할을 하였고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 칭함을 받은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안디옥 교회를 그렇게 훌륭하게 만든 중심인물이 바로 바나바입니다.
착한 사람 바나바가 경쟁력이 없는 사람입니까? 실패한 사람입니까? 이런 분이 우리 교회에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착한 대도 경쟁력이 있는 비결은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오늘 본문 24절에서 그 핵심을 발견하였습니다. 착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믿음이 충만하였고 성령이 충만하였습니다.
1. 착한 사람이 경쟁력이 있기 위해서는 믿음이 충만해야 합니다.
로버트 캐플런은 "경쟁력을 키우려면 발상부터 바꿔야 한다"며 21세기 경쟁력의 3대 요소로 정보력, 순발력, 미래투시력을 제시하였습니다. 경제 학자들이 국제 경쟁력을 갖추려면 3가지 요소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첫째가 가격 경쟁력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가격면에서 다른 나라 제품보다 싸야한다는 것입니다. 비싸면 우선 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품질 경쟁력입니다. 똑같은 값이라면 좋은 품질의 것을 산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값싸고 품질 좋은 것을 사람들은 원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서비스 경쟁력입니다. 값이 싸고 품질이 좋다고 해도 사후 써비스가 좋지 않으면 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세 요소가 잘 갖추어지면 국제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합니다. 믿음의 사람이 이 험악한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경쟁력이 있으려면 무엇이 있어야 하겠습니까? 믿음입니다. 믿음의 경쟁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마지막 천국문에 들어가는 자격증은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정보력, 순발력, 미래 투시력, 가격 경쟁력, 품질 경쟁력, 서비스 경쟁력을 가지고 들어 갈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동안도 믿음 충만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얻은 그 수준의 믿음이 아니라 능력을 행하는 믿음입니다.
히11:1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막9:23에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마 17:20)"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교회는 다니는데 믿음이 적습니다. 기도하면서도 믿음이 적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특징입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눅 18:8)"
바나바를 보십시오. 타산적이요 계산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이것을 행하면 나에게 얼마나 유익이 올까 그것이 아닙니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 교인입니다. 부흥된 교회입니다. 편안하게 신앙생활 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말하면 큰 교회 교역자로 좋은 차를 타고 많은 사례금을 받고 수많은 성도들에게 설교를 하고 존경받으며 목회할 수 있었습니다. 소위 대교회 출세한 목사, 성공한 목사도 종교적 명예와 안락, 성취욕을 누리며 환영받으며 목회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22절을 보십시오. 그는 그 자리를 버리고 이방 땅에 세워진 조그마한 교회를 섬기러 떠났습니다.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습니다. 그곳에 가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기뻐합니다. 그가 예루살렘 교회에서 어떤 역할을 한 사람입니까? 사도행전 4:36-7절에 보면 알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는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고 제것이라 하는 이 없이 서로 도우면 행복하게 사는 교회가 되었는데 그 원동력을 불어넣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부동산처럼 확실한 재산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는 그것을 아깝게 생각하지 않고 교회를 위하여 가난한 자를 위하여 내어놓았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교회를 말없이 떠나 안디옥 교회로 갔습니다. 이 얼마나 순수한 능력있는 믿음입니까?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능력있는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에는 역사가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골 2:12)"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살전 1:3)"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살후 1:11)"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마 15:28)" 이렇한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2. 착한 사람이 경쟁력이 있기 위해서는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을 받은 바나나의 모습은 어떻게 나타납니까?
1) 인격적인 면에서 능력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나바는 인간의 소중함을 안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그가 안디옥 교회에 파송되어 첫 번째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는 선교 사업을 위하여 계획을 세웠습니까? 성경 공부 프로그램을 만들어 가르쳤습니까? 묘지가 필요하니 묘지를 사야겠다고 했습니까?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버스가 필요하니 버스를 사자고 했습니까? 안디옥 교회가 너무 비좁으니 교회를 부수고 새로 짖자고 했습니까? 예루살렘 주변에 신도시가 생기니까 그 신도시에서 큰 교회를 짖고 멋지게 목회하자고 했습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23절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가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고 모든 사람에게 굳센 마음으로 주님을 의지하라고 권하였습니다. 그가 교회에 부임하였을 때 교회가 큰 것을 보고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재정 많은 것, 교인 많은 것을 보고, 사택이 큰 것을 보고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기뻐하고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졌습니다.
오늘날 너무도 인간을 인간처럼 대접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인간이 도구로 전락된지는 오래 되었습니다. 돈을 위해 인간을 기계처럼 취급합니다. 쾌락을 위해 인간을 동물처럼 취급합니다. 자신의 명예와 출세를 위해 인간을 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쟁이라는 말로 서슴없이 표현합니다. 입시전쟁, 취업전쟁, 생존경쟁, 수출경쟁, 출근전쟁... 도대체 누구와의 전쟁이라는 말입니까? 타도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생명을 온천하보다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었습니다. 일의 목표만을 추구하다 보니 인간성은 짓밟히고 인간을 단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되어 버렸습니다. 세상이야 막가는 인생들이 사는 것이니까 그렇다 치고서라도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사는 교회는 그렇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 역시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성도가 목사의 능력을 대변하는 수단으로 전락되어 가고 있습니다. 사람의 귀중성을 상실해 가는 교회로 전락되어 가고 있습니다. 바나바는 이런 사람이었습니까?
사도행전 9장27절을 보십시오, 사울이 살기 등등하여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변하였습니다. 그의 삶은 완전히 변하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들과 사귀고자 제자들을 찾아갔으나 믿어 주지 않습니다. 그 때 사울의 신원을 보증해 준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바나바입니다. 어쩌면 자신과의 경쟁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이사람을 보증하겠습니다. 이사람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장차 주님의 큰 일군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을 믿어야합니다. 여러분, 내가 이 사람을 보증할테니 믿어 주십시오."라는 식으로 말을 합니다. 그의 보증과 변호 덕분에 바울은 비로소 사도로서 첫걸음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 때 그가 바울을 변호해 주지 않았다면 과연 오늘의 바울이 있었겠습니까? 바나바의 인간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비단 바울의 경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다 마찬가지 였습니다. 행 15장에 기록된 마가에 대한 바울과의 의견충돌 때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1차 전도 여행기간중 떠나간 마가를 다시 데리고 가자는 바나바의 의견과, 그런 사람은 데리고 갈 수 없다는 바울의 의견이 서로 대립되었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가려고 열심히 변호합니다.
"이 사람에게 한번 더 기회를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번의 실수로 어찌 사람을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 실수 때문에 더 열심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마가도 데리고 갑시다" 이렇게 말했을 런지도 모릅니다. 결국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갔고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각각 전도여행을 떠났습니다. 먼훗날 마가는 바나바의 말대로 훌륭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그의 말년에 "이 복음의 사역을 위해 내가 동역자가 필요하니 마가 요한을내게 보내주십시오"라고 고백한것을 보면 그는 훌륭한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 만약 바나바가 마가를 보호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마가는 한 낙심한 실패의 인생이 되었을런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하여 인격의 경쟁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십니다.
"고전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고전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2)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면에 있어서 경쟁력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성령 충만하여 신유의 능력이 나타나고 말씀의 능력을 받고 교회가 부흥하면 어떤 일을 합니까? 자기 영광을 나타내기에 바쁩니다. 예수님보다 교회 교회 보다는 어느 목사 이름 나타내기에 바쁩니다. 바나바를 보십시오. 무엇을 위한 경쟁인지 목적을 잃어 버리고 살아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목적을 잃어 버리고 사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 사는 지를 잃어 버리고 살아갑니다. 왜 공부를 하는지 왜 이길을 가는지 잃어 버리고 사는 경향이 있다는 말입니다.
인도 뉴델리의 한 마을에서 처남 매부가 동시에 물속에서 죽은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매부가 자기 아내가 배신했다고 비난을 하자 처남이 자기 누나를 변호하였습니다. 누가 진실인줄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동네에서는 이것을 가리는 방법이 두명다 물 속에 들어가 오래 있는 사람이 진실이라고 믿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판별하기 위해 물 속에 들어갔는데 둘 다 그만 나오지 않은 것입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아인슈타인이 한번은 버스를 탔답니다. 차장이 검표를 하는데 아무리 찾아도 차표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한참을 뒤적거리고 있는데 차장이 '한사람 걸려들었구나' 하면서 얼굴을 쳐다본 순간 놀라고 말았습니다. 당대 유명한 아인슈타인 선생님이었습니다. 당황이 된 차장이 떨리는 음성으로 “서 서 선생님, 선생님 같으면 괜찮습니다.'라고 말했답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여전히 호주머니를 뒤지는 일을 멈추지 않았답니다 "선생님, 괘 괜찮다는데 왜 그러십니까?' 그러자 아인슈타인이 화를 버럭내며 "야, 이 양반아! 당신이야 필요없지만 나한테 필요하단 말일세. 차표가 있어야 어디서 내려야 할지 알 것 아닌가.'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잃어 버리고 살아가면 되겠습니까?
왜 우리가 경쟁력이 있어야 합니까? 무엇을 위해 사는 것입니까?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바나바는 이 의식이 철저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가 안디옥교회의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바나바가 부임한 그날부터 안디옥교회는 부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몰려왔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 소문난 교회가 되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제자 훈련 잘하는 교회, 능력있는 교회, 하나님의 살아 계심이 나타나는 교회 등의 소문이겠지요. 아마 바나바의 종교적 인기는 최고도에 달했을 것입니다. 그 때 바나가가 한 것이 무엇입니까? 25절을 보십시오. 바울을 찾으러 다소에 갔습니다. 왜요 26절을 보십시오. 둘이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바나바가 자기밖에 모르고 옹졸한 목회자였다면 자기의 인기에 치명타를 줄지도 모르는 바울을 초청하여 함께 사역할 수 있을까요? 어떤 교회를 보면 부목사가 조금만 교인들에게 인기가 있으면 다른 교회에 보냅니다. 조금만 설교를 잘한다고 생각되면 아무말도 하지 않다가 수요 예배에 왔을 때 바로 설교를 시켜 버립니다. 조금 구분하기 위하여 갖가지 형식을 만들어 권위를 세웁니다.(박사까운을 입고 설교, 당회장, 담임목사, 부목사, 새끼목사) 등의 칭호로 권위를 세웁니다. 운전도 자기가 하지 안고 권위가 떨어진다고 부목사를 시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자기의 인기나 명예, 권위, 성취욕보다는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영광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초청했습니다 . 그 결과 안디옥 교회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가 오자마자 교회는 더욱 부흥하기 시작합니다. 안디옥 교회가 선교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소아시아 선교를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그를 대려 옮으로 말미암아 사울을 안디옥 교회를 발반으로 하여 세계선교를 감당하였습니다. 12장 부터는 바나바와 사울의 위치가 바뀌어집니다. 이전에는 바나바와 사울이라고 했는데 이제는 바울과 바나바로 바뀝니다.
"행 13:43 폐회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좇으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행 13:46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행 13:50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
선교의 주체가 바나바에게서 바울로 옮겨갔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바나바가 목회의 선배입니다. 한 때 날린 사람입니다. 나이도 많습니다.(행 14:12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
그러나 한번도 바나바는 이 일에 원망하거나 불평하거나 서운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일을 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꼭 내가 해야만 하고 나를 통해서만 교회일이 이루어 져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를 통해서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기나 명예, 목표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영광, 주님의 일이 중요한 것입니다. 나의 교회가 부흥되지 않더라도 주님의 교회가 부흥되면 그것으로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나를 통하여 교회일이 이루어지지 않더라고 다른 성도님을 통하여 교회일이 잘 될 때 그것으로 감사하며 감격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바울이 성숙되는 것을 보고 기뻐하면 조용히 자기 자리를 양보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인격입니다. 세례 요한을 보십시오. "요 3: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성령 충만히 받으면 능력있는 사람될 수 있습니다.
지금 자신의 모습을 보며 실망하지 마십시오. 능력이 없다고 좌절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경쟁력 있는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다.
"(고전1:27-29)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니님께서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목욕탕에서 이런 일이 있었답니다. 키가 작은 사람이 눈을 감고 비누를 잡으려다가 옆의사람 비누를 집어 쓰게 되었습니다. 비누의 주인인 체격이 좋은 청년이버럭 화를 내며 욕을 퍼부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눈을 감고 쓰다보니...용서하십시오.""뭐,용서? 너 이리 나와, 내가 누군 줄 알아? "체격이 좋은 젊은이는 먼저 나가서 옷을 입었습니다. 그는 군인으로 육군 중위 계급장을 번쩍였습니다. 키가 작은 사람도 나와서 옷을 입었는데 우연히 그도 군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육군 소령이었습니다. 자, 이때의 육군중위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겉모습만 보고 남을 평가하는 사람이 있다면이 육군 중위와 같은 못난 사람이 아닐는지요?
우리는 약하나 성령님의 능력을 힘입으면 강한 사람이 될 수 가 있습니다. 능력있는 사람 경쟁력있는 사람이 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바나바 같은 인물이 필요합니다. 너무나 타산적이고 계산적인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사람을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자신의 영광과 출세를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 세계를 세차례나 여행하면서 복음을 증거한 바울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없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넘어져 있는 한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바나바 같은 사람은 될 있습니다. 진정 타산 없는 헌신을 통하여 사람을 귀중히 여기며 하나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까지도 포기할 만한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지만 경쟁력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착하지만 성령충만 믿음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안디옥 교회에 가서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을 의지하라고 권면했습니다.(23) 사울을 초청하여 일년동안 안디옥 교회에서 가르쳤습니다.(26)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1)많은 사람이 주께로 나왔습니다.(24) (2)안디옥 교회 교인들이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았습니다.(26)
(3)사울을 선교의 중심인물로 만들었습니다.
이런 분을 경쟁 사회에서 진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경쟁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하면 선한 사람이 이 땅에서 경쟁력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착한 사람의 경쟁력/행11:22-26/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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