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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15:22~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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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조용기 목사 |
참고 : | 2007년 3월 4일 성찬주일 2부 설교 |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 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모세가 야훼께 부르짖었더니 야훼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야훼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 하실세.”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변화의 능력 십자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거느리고 홍해를 건너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사흘 길을 걸어가도 물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이 사흘 동안 물을 마시지 않고 살수가 있나요? 입술이 트고, 혀가 입천정에 붙었습니다. 물 달라는 소리가 아우성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연못물을 발견했는데 뛰어가서 마셔보니 물이 써서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물을 마시자마자 토하고 뒹굽니다. 그리고 통곡을 하고 울면서 “모세야, 우리에게 물을 달라. 우리가 물이 없어 죽겠다.”고 하니까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매 그 연못가에 있는 한 나무를 지시하시는지라 그 나무를 가지 꺾어서 연못물에 던지니 쓴물이 달아져서 마음껏 물을 마시고 기갈을 해결했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굉장히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로 들어온 것은 마치 홍해를 건너온 것과 같습니다. 마귀의 지배에서 벗어나서 홍해를 건너오는 것이 중생의 체험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 광야의 길을 지나 천국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데 이 광야를 지나는 동안에 우리는 별 도리 없이 많이 쓴물이 마음속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 사는 동안 평안한 일만 있을 수가 없어요. 마음속에 쓴물이 생겨나서 쓴물을 마시고 고통을 당하고 심신이 병들고 슬프고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이 쓴물을 무엇으로 달게 하고 우리가 이 광야 여행길을 편안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쓴물을 달게 하는 것은 나뭇가지를 꺾어 던져야 된다고 하는데 그 나뭇가지가 바로 십자가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끌어안으면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로 우리 마음속의 쓴물이 달아 진다는 것을 성경은 상징적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광야를 여행하는 동안에 어떠한 쓴물이 우리 마음속에 생겨나는 것입니까?
<본론>
1. 미움과 분노의 쓴물
첫째로,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사람들과 서로 부딪히므로 미움과 분노의 쓴물이 마음속에 생겨납니다. 부부간에도 미움과 분노의 쓴물이 생겨나고, 부모 자식 간에, 형제간에, 이웃 간에, 사업 파트너 간에 서로 부딪히고 분노의 쓴물, 미움의 쓴물이 마음속에 생겨납니다. 미움이나 분노라는 것이 굉장히 독이 심합니다.
오사카 대학에서 시험을 해본 결과에 개에게 분노를 하게 해서 그 혈액을 뽑아서 독소를 추출해 보니까 그 개 한 마리가 분노를 한 피 속에서 나오는 독소가 여덟 마리의 개에게 주사를 해준즉 다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여덟 마리의 개를 죽일만한 독소가 한 마리의 개의 분노의 피 속에 생겨나더라. 그만큼 분노에는 어마어마한 독소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노하므로 우리의 심신이 병들고 고통당하는 것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미움과 분노의 쓴물을 마시지 아니할 수가 없느냐 하면 이 세상에 사는 것이 매일매일 극심한 생존경쟁을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가만히 편안히 살 수 있으면 분노할 필요가 없지요. 그러나 생존경쟁에서 밀고 밀리고 쫓고 쫓기는 가운데 서로 상처를 입고 분노가 생기가 미움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욥 5:2에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고 말했습니다. 분노는 죽이고 멸하는 독소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30~40대 남자들은 피곤합니다. 직장에서는 선배와 상사의 눈치를 봐야 하고, 밑에서 언제든지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을 견제해야 합니다. IMF 이후 퇴직의 압력도 만만치 않습니다. 가정에서도 남자들은 편하지 않습니다. 과거와 같이 아버지로서의 권위와 힘 보다는 아이를 중심으로 하는 풍조로 인해 자녀들의 눈치를 봅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나라 30~40대 남자 사망률이 세계에서 1위가 되어 있습니다. 통계청이 발표한 우리나라 40대 남자의 '2004년 사망원인 통계 결과'를 보면 사망 원인 1위가 54%로 간질환입니다. 2위는 자살이 43%, 3위는 간암이 35%, 4위는 뇌졸중이 28% 순입니다. 이러한 결과를 보면 우리나라의 40대 남자가 생존경쟁의 치열한 생활 속에서 얼마나 미움과 분노가 마음을 억압하고 피곤하고 고달픈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삶의 경쟁 속에 별 도리 없이 사람들은 시달리기 때문에 미움과 분노의 스트레스에 걸리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럴 뿐 아니라 끊임없이 시간과 삶에 쫓기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옛날 농경생활시대에는 해가 떠서 일어날 수도 있고 또 늦게 일하더라도 쫓기지 않고 쉬엄쉬엄 일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그렇지 않아요. 모든 것이 스케줄에 딱 짜여 있어서 아침 정시에 출근해야 되고, 일해야 되고, 일을 성취해야 되기 때문에 끊임없이 시간과 삶에 쫓기는 노예생활을 하므로 긴장과 고통이 계속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팽팽한 신경이 긴장된 가운데서 조금만 건드려도 분노를 하고 미움이 생기고 다툼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전2:23에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한다고 했는데 정말 매일같이 긴장하고 슬퍼하고 쉬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우리의 삶속에는 더 많은 성과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별 도리 없이 성과를 이루지 못하면 직장도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 발표에 보니까 서울시청에서는 공무원이 성과를 이루지 못하면 퇴직시키겠다는 발표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성과를 나타내려고 끊임없이 뛰고 긴장해야 되는 것입니다. 지난 달 신문에서 직장인 1천 735명을 대상으로 '직장인 일중독 증후군'에 대한 조사 결과가 실린 것을 보았습니다. 거기에 보면 조사에 참여한 사람 중 절반이 넘는 51.2%가 자신을 일 중독자에 걸렸다고 말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일을 많이 하기로 유명한데 OECD 국가 중 단연히 최고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일본사람을 게을러 보이게 하는 유일한 민족은 한국 사람밖에 없답니다. '일에 대한 태도'를 한국, 미국, 일본, 독일과 비교해보면, 한국의 일중독현상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자신의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해, 일본과 독일 사람들은 가족과의 시간을 1순위로 꼽은 반면에 한국 사람들은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니까 '만족스런 일자리'를 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국 사람에게는 자나 깨나 일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일 가운데 다가오는 긴장과 스트레스로 말미암아 마음에 미움과 분노가 쌓여지는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세상에 살면 우리가 자선 사회 속에 살고 있지 않지 않습니까? 모두다 이기주의와 황금만능주의로 되게 되는 것입니다. 모두 다 나만 보고 뛰지 남을 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유리창 밖으로 보면 세상의 산도 보이고, 들도 보이고, 강도 보이고, 사람들도 보이지요. 거울을 들여다보면 똑같은 유리인데 자기밖에 안 보이는 것입니다. 이기주의와 황금만능주의가 마음을 덮으면 자기밖에 안보여요. 눈에 보이는 것 없어요. 산도, 물도, 들도, 사람도 안보여요. 모두 다 내 이기주의적 내 중심밖에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한다는 딤후3:2 의 말세의 증후군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뿐 아니라 이 세상에는 이해할 수 있는 대화가 부족한 것입니다. 모두다 만인이 만인을 상대해서 경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에게 정말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합니까? 요사이 모 정치인을 보면 밑에 데리고 있던 비서가 온갖 고발을 다하고 신문에 나오고, TV에 나오는 것 보니까 세상에 비서도 믿을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믿을 수 있습니까? 아무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남의 말을 안 듣고 이제 자기말만 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해도 자기가 하는 말을 설득 시키려고 하지 남의 말을 듣고서 이해하려고 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이렇기 때문에 오해가 오해를 쌓고, 생각을 하고, 분노하고, 미워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잠12:16절에 미련한 자는 당장 분노를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는데 오늘날 우리는 수욕을 참지 못합니다. 미련하니까 당장 분노하고 미워하고 분을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마음에 미움의 씨앗이 되고 분노로 폭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을 어떻게 우리가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과 포용으로만이 쓴물이 달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여러 가지 사회적 현상으로 다가오는 마음의 미움과 분노의 쓴물을 달게 하지 아니하면 그 독이 우리 영을 죽이고 마음을 죽이고 육체를 죽이고 생활을 파탄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독이 되는 것입니다. 이 독을 해독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끌어안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받으면 모든 미움이 사라지고 분노가 사라지고 마음속에 사랑과 평화를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일 4:10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그러므로 엡 4:32에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이와 같은 은혜는 십자가를 끌어안을 때 십자가를 통한 보혈의 역사와 성령의 역사로 우리 마음속에 변화가 와야만 되는 것입니다. 변화는 내 힘으로 가져올 수 없어요. 내 힘으로 미움을 해독시킬 수가 없고 분노를 잠재울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나는 보혈의 능력과 성령의 은혜가 우리 마음을 해독시키고 변화시켜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매일같이 우리가 십자가 밑에 나와서 주님을 바라보고 기도하고 주님께 의지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주님은 우리 마음을 해독해 주시고 변화시켜 주시고 미움과 분노 대신에 사랑과 인내를 주시기를 원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마음속에 던지지 않고 미움의 쓴 연못물을 달게 할 수가 없습니다. 미움의 쓴 연못물을 마시고 고통과 괴로움을 안 당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2. 공포와 불안의 쓴물
둘째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마음에 생기는 쓴물은 공포와 불안의 쓴물입니다. 누구를 불구하고 이 세상에 사는 사람 가슴을 쓸어내리며 공포와 불안을 느끼지 않는 사람 없습니다. 매일 매일 공포와 불안이 우리를 엄습해 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면 두 가지 공포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큰 소리를 지르면 어린 아이가 울고 높은데서 떨어뜨리며 어린 아이가 굉장히 두려워합니다. 어른들은 그것도 모르고 어린 아이 좋아한다고 던졌다가 안고, 던졌다가 안는데 애들은 기절초풍을 하는 것입니다. 높은데서 떨어지는 공포와 큰 고함소리의 공포가 어린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자라나면서 이것이 우리의 다른 형태의 다른 공포로 자라는 것입니다. 어른들은 큰소리가 아니라 비난과 비평 받는 데에 대한 불안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아내는 남편에게 비난과 공격을 받을까 불안해하고 남편은 아내에게 비난과 공격을 받을까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공격을 받을까 불안해하고 공포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에 나가면 어느 곳에 가든지 비난과 비평받는 것을 두려워하고 항상 몸을 움츠리는 것입니다.
시38:19에도 보면 내 원수가 활발하며 강하고 부당하게 나를 미워하는 자가 많다고 미워하는 사람들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사이는 더구나 인터넷에 악플 들이 올라오는 것입니다. 인터넷을 열면 홈페이지에 온갖 칭찬도 있지만 욕이 다 있다 말입니다. 그 욕지거리를 읽고 난 다음 아름다운 미모의 탤런트들이 세상을 하직할 정도로 좌절과 절망을 느낍니다. 좀 유명하다는 사람은 욕 안얻어 먹는 사람이 없어요. 욕을 태반으로 얻어 먹습니다. 저도 저의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욕을 태반으로 얻어먹어요. 아에 거기에 구둑 살이 올라와야지 그것을 보고서 웃고, 웃으면 사람 미쳐요. 그러므로 마음이 약한 젊은 여성들이 자기 홈페이지에 들어오는 온갖 악플을 읽고 난 다음에 좌절하고 절망하고 젊은 삶을 자살로써 끝맺고 마는 비극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비난하고 비평 하는 데에 대한 굉장한 불안과 공포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 세상에 살면서 인정받지 못하고 소외되고, 버림받는 불안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혼자 살지 못하잖아요. 함께 삽니다. 집안에서나 이웃에서나 회사에서나 다 함께 사는데 함께 사는 사람들 가운데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소외되고 버림받으면 어떻게 할까하는 그러한 불안이 굉장히 많습니다.
시38:11에 보면 “내가 사랑하는 자와 내 친구들이 내 상처를 멀리하고 내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
사람들이 자기를 멀리하고 소외시키고 인정하지 않을까 굉장히 불안하지요. 사람은 인정을 받으면 굉장히 좋습니다. 자기를 인정하는 자를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가정에도 그래요. 남편이 부인을 인정해 주면 신바람이 나는 것입니다. 부인이 남편보고 “여보 당신 참 잘해. 잘났다.”하면 회사에 가서 하루 종일 우쭐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정을 받았다는 것은 굉장한 즐거움을 주는 것입니다. 고래도 칭찬하면 춤을 춘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고래조차도 칭찬하면 춤을 추는데 사람들을 칭찬하면 하루 종일 기분이 좋지 않습니까? 지나가는 말 같지만 “아유, 굉장히 젊어 보이네요. 왜 이렇게 젊어 보입니까?” 그러면 하루 종일 그 음성이 귀에 울리는 것입니다. ‘젊다. 너는 젊다. 너는 젊다.’ 체험해 봐서 제가 알아요. 우리 성도들이 나를 보고서 “아이고 목사님, 요사이 젊어졌네요. 50대 같네요.” “무슨 소리 그렇게 해요.” 그러면서도 하루 종일 귓가에서 ‘너는 젊다. 너는 50대다. 50대다.’ 그것 여운이 남아 있어서 기분이 보통 좋지 안 다구요. 사람들이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는다는 것 굉장한 삶의 기름부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할 수만 있으면 이웃을 칭찬하고 인정하고 긍정적으로 말하는 습관을 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늘 남을 헐뜯고 비난하고 남의 결점을 찾는 것은 대단히 나쁜 습관이고 자기도 좋지 않고 남도 좋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인정받지 못하고 소외되고 버림받는 불안을 가지고 있고 또 삶에 실패할까 패배할까 하는 불안이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혹시 실패하면 어떻게 할까?’하는 살얼음위에 걸어가서 얼음이 꺼질까 싶어서 겁나는 것처럼 불안증이 마음속에 가득하고 패배하면 어떻게 할까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욥기에 보면 욥은 동방에서 제일가는 부자였지만 그가 욥3:25절에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해서 항상 무서워하고 두려워하고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우리는 질병과 죽음에 대한 불안은 그림자처럼 다가오는 것입니다. 언제 무슨 병이 들지 모릅니다. 요사이는 더구나 비만증으로 말미암아 다가오는 성인병이 많습니다. 고혈압, 신경통, 심장병, 관절염, 암 온갖 질병이 언제 내게 다가올지 모르는 것입니다. 질병에 대한 불안과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그런 불안증이 있어서 모든 사람들은 죽음의 그림자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불안과 공포의 쓴물을 늘 마시고 있는데 이 쓴물을 청산해야 돼요. 매일같이. 불안과 공포의 쓴물을 어떻게 청산합니까? 매일같이 십자가 밑에 나가서 주님을 바라보면 십자가를 통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는 은혜와 사랑을 통해서 불안과 공포를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돌보아 주시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버리지 않고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것을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는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셔서 나는 도와주시고 보호하시고 이끌어 주신다는 신념을 십자가 보혈을 통해서 성령의 은혜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불안과 공포의 쓴물을 다른 무엇으로도 달게 만들 수 없습니다. 근원적으로 달게 만드는 것은 예수 십자가를 끌어안으면 내가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죄 있는 그대로, 못난 그대로, 나를 품어 주시고 사랑해 주시고 하나님 자녀로 삼아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고 마음이 편안하고 잠잠해지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지어 먹어서 될 수 없습니다. 주님 십자가 밑에 나가서 내가 불안과 공포를 가지고 부르짖을 때 하늘에서 평화가 마치 군대가 도시를 점령하듯이 우리 마음속에 임하여 우리 마음을 점령해서 우리 마음속이 평안하게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일 우리가 주님께 새벽 기도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지요. 새벽에 나와서 주님께 부르짖으므로 마음의 불안과 공포를 다 잠재워 버리고 넘치는 하나님의 평안을 가지고 하루를 살아갈 수가 있는 행복을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히13:5~6에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요.”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는데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요. 마음속에 평안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은혜로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3. 열등의식의 쓴물
셋째로, 우리의 가슴속에 늘 생기는 쓴물은 열등의식의 쓴물입니다. 누구든지 마음속에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어요. 자기가 잘났다고 뽐내는 사람은 오히려 열등의식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덮으려고 의시 대는 것이 바로 잘났다고 교만을 떠는 것입니다. 열등의식은 우리 마음속을 굉장히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열등의식을 가집니까? 가난하고 어려운 성장기에 대한 열등의식은 반사회적 반항의식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라날 때 헐벗고 굶주리고 가난하게 자라났다. 그러므로 나보다 잘 먹고, 잘 입고, 잘사는 사람에 대해서 열등의식을 느끼고 반항심을 느끼는 것입니다. 공산주의라는 것은 못살고 가난한 사람들이 잘살고 재산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열등의식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열등의식이란 것은 반사회적인 반항의식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지난 27일 송파구 문정동 개미마을 30가구에 배달된 요구르트 사건 알지요? 요구르트에 세제를 집어넣어 가지고서 마시자마자 목이 타고 구토를 하고 야단법석을 해서 굉장히 심문에 나고 TV에 뉴스거리가 된 것입니다. 그 범인을 잡고 보니 선 모씨라는 사람인데 그 어머니는 가락동 시장에서 과일 장사를 하며 고생고생을 하는데 개미마을 사람들은 국가 땅에서 강제로 점용해서 판자촌 짓고 살다가 편안히 살면서 재개발로 쉽게 돈을 국가에서 보상받게 되었다. 그러니 배가 아프지요. 열등의식이 생기는 것입니다. 왜, 똑같이 고생하는데 저는 국가에서 보상받고 우리 어머니는 가락동 시장에서 내내 과일장사 하면서 고생하느냐. 에라. 내 못 먹는 밥에 재나 뿌려 보자. 그래 가지고서 개미마을 사람들에게 요구르트를 쫙 나누어 주었는데 또 공짜라고 먹은 게 큰일이지요. 공짜 없어요. 여러분, 문을 열어 보니까 문밖에 요구르트가 공짜로 있으니까 좋다고 마셨다가 큰 변을 당하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삶에서 생겨난 열등의식이 사회적인 반항의식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오스트리아의 '작은 독재자'로 불렸던 돌푸스 수상은 나치스에 의해 암살당했습니다. 한번은 신문 기자가 돌푸스 수상의 어머니를 인터뷰했습니다. 그의 어머니 역시 키가 135㎝의 단신 이었습니다.그녀는 자기 아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아들은 결코 야망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돌푸스는 소년시절 목사가 될 꿈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주위에서 '너처럼 키가 작은 사람이 어떻게 목사가 되겠느냐'고 놀려댔습니다. 돌푸스는 그때부터 열등감을 갖기 시작했고 결국은 열등감을 없애기 위해서 정치계로 뛰어 들어가서 독재자가 되고 어마어마한 독재를 행했다." 고 말한 것입니다. 이처럼 열등감은 치유되지 못하고 남아 있으면 성격과 기질에 영향을 미치고 다른 사람에게도 좋지 못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열등의식을 가지는 것은 교육적 과정에 대한 열등의식인 것입니다. 지방대학을 나온 사람은 서울에 있는 대학을 나온 사람에게 열등의식을 느끼고,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있는 서울대학이나 고려대학, 연세대학을 안 나오면 열등의식을 느끼고 한국에 있는 대학을 나온 사람은 미국의 대학 나온 사람에게 열등의식을 느끼고 학교 학문에 대한 열등의식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에라. 까짓것 조기에 입학을 미국에서 공부시키자고 초등학교, 중등학교, 고등학교 학생들을 미국으로 보내고 어머니는 미국가 있고 아버지는 한국에서 기러기 아빠, 기러기 엄마가 되어서 태평양을 건너 목을 쭉 내밀고 꽈악 꽈악 꼬악 그러다가 가정이 깨어지고 낭패에 이르고 비극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모두다 교육적 과정에 대한 열등의식인 것입니다. 사실은 이 세상에서 공부 많이 했다고 성공해서 살지 않습니다. 머리 좋다고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살지 않습니다. 예수 잘 믿어야 성공하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문을 열면 닫을 자가 없고 하나님이 문을 닫아 놓으면 열자가 없는데 이 세상에 어떤 시골에 자랐을지라도 예수 잘 믿고 하나님 잘 섬기면 성령이 함께 계셔서 머리가 되고 꼬리 되지 않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방향을 잘못 잡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오해를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잘사는 길은 하나님을 섬기는 길이고, 지혜의 근본이 하나님을 알고 믿고 섬기는 것이 지혜의 근본인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교육적인 과정에 대한 열등의식으로 사람들은 오늘날 고통을 당하고 쓴물을 마시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외모에 대한 열등의식도 대단한 것입니다. 요사이 신문에 보니까 젊은 여성치고 성형외과를 찾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요사이 농담에 천당에 들어가는데 시간이 상당히 오래 걸린답니다. 왜냐 하니까. 하나님 천사가 와서 들어오는 사람 신분조사를 하는데 사진에 나온 것 하고 본인하고 얼굴이 틀리니까. “이것 틀리지 않느냐?” “아이고 그때는 성형외과 수술을 하기 전이고 지금 수술해서 틀립니다.” 그것을 알아보는데 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만큼 많은 사람이 성형수술을 했습니다. 성형수술은 다른 사람보라고 하는 것 보다도 자기 마음에 외모에 대한 열등의식을 카바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우리 집사람이 제게 와서 “당신 가발 몇 개냐?” 그래서 “4개.” “왜 네 개나 가발을 만들었어?” “젊을 때부터 머리가 조금씩 벗어지니까 한번 덮어보려고 만든 것이 네 개나 만들었다.” 저 조차도 거울을 들여다보면 보기 싫습니다. 머리가 벗어졌으니까. 더구나 TV에 나오는 머리는 번쩍 거려서 정말 보기가 싫어요. 그래서 가발로 덮어 보려고 하다가 성도들이 너무 웃어서 그만 못했습니다. 사람들마다 자기 외모에 대한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할 정도로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아무리 잘났어도 자기 얼굴에 어느 부분적으로 못난 것에 대한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습니다. 이새의 아들이 여덟 명이 있었는데 사무엘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름 부어서 그중 아들 중에 한 사람에게 왕을 만들려고 하는데 이새가 사무엘에게 일곱 아들만 데려 갔습니다. 첫째 아들, 와 잘생겼다. 하나님이 “아니야. 버렸다.” 둘째 아들 사무엘이 보니까 “왕이 될 만하구나!” 하나님이 “버렸다.” 셋째 아들 “와! 이놈도 잘 생겼는데!” 하나님이 “그놈도 버렸다.” 일곱째까지 나왔는데 하나님이 다 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이새에게 물었습니다. “또 아들하나 없느냐?” “하하하. 하나 있기는 있지만 그것은 우리 집에서 아주 못난 놈이에요. 별 볼일 없어서 내가 아예 데리고도 안 나왔어요. 그 놈은 저 산에서 지금 양을 치고 있습니다.” “그런 말 하지 마세요. 걔를 데리고 오세요.” 그래서 다윗이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하는 아버지의 뜻에도 불구하고 데려와서 사무엘 앞에 서니까 하나님이 “보아라. 이 사람을 내가 택해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으니 이 아이에게 기름을 부으라.”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속사람을 보는 것입니다. 외모가 아무리 잘나도 하나님은 속사람을 보아서 속사람이 합격 안하면 외모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잘 보여야 출세를 하고 성공을 하고 행복하고 잘사는 것이지 사람에게 잘 보여 봤자 별 소용없지 않습니까?
삼상16:7에 “야훼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야훼는 중심을 보느니라”
그 다음 또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 국가적인 열등의식이 있습니다. 우리는 오랜 세월동안 5천년 역사 가운데 수없이 중국 사람들에게 침략을 당하고 중국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중국에 대해서 국가적인 문화적인 열등의식을 늘 가지고 있습니다. 거기에다가 일본에 36년 동안 지배를 당했으므로 언제나 일본에 대해서 열등의식, 좌절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삼일절만 되면 일본에 대해서 분노를 퍼붓고, 8.15만 되면 분노를 퍼붓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유화적인 분노를 벗어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열등의식과 좌절감, 국가적인 열등의식과 좌절감을 늘 품고 살면 여러분 성공하지 못합니다. 열등의식과 좌절감엔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백미러를 쳐다보는 것과 한가지인 것입니다.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자꾸 백미러를 쳐다보고 뒤에 뭐가 오느냐고 자꾸 보면 앞에 충돌하고 마는 것입니다. 뒤에 것은 잊어버리고 푯대를 향하여 앞으로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중국과 과거에 우리가 당했던 설움도 잊어 버려야 되고 이제는 일본에게 침략을 당해서 우리가 고통을 당했던 것도 잊을 때가 왔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아득한 옛날에 이미 지나간 역사적 한 사건인 것입니다. 이제는 역사적인 사건으로써 기억은 하지만 그를 따라서 감정적인 분노와 슬픔과 억울함과 이것을 청산해 버릴 때가 왔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는 우리는 앞으로 전진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과거사의 수치를 지금까지 연속하는 것은 비극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적은 민족이지만 이스라엘이 적은 민족이라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사 선택하니까 바벨로니아, 앗수르와 메데, 파사, 로마 다 망해도 오랜 유구한 세월동안 적은 이스라엘은 지금도 면면이 살아서 세계적인 우수한 국가와 민족으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신7:7에 “야훼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더라도 예수 잘 믿으면 하나님이 높여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가 적은 민족이라도 우리가 예수를 잘 믿고 하나님을 잘 섬기면 하나님이 건지고 하나님이 높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인 옛날에 대해서 열등의식이나 수치심이나 분노를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나 모두 다 이런 마음에 열등의식을 가지고 고통을 당하는데 이것도 예수님이 십자가 밑에 나와서 십자가를 끌어안으면 하나님의 은혜와 보혈의 역사로써 다 씻어 버리고 열등의식과 좌절감에서 벗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나의 상담실에 한번 상담 온 젊은 부부의 이야기가 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사장 아들이 아버지 회사에 왔다 갔다 하다가 직원으로 있는 아버지 비서실에서 일하는 이쁜 아가씨가 탐이 나서 데이트를 하다가 결혼에 성공했는데 이 아가씨는 가난한집 출신입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이 여성하고 결혼하고 난 다음 굉장히 행복했어요. 그러나 그 부인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열등의식 때문에. 그 아들이 그 아내를 데리고서 좋은 식당에 가서 아름다운 환경 가운데서 맛있는 음식을 주문해서 먹을 때마다 하는 말이 “너 친정에서는 못 먹어 봤지?” 그것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친정에서 못 먹었지요. 가난한데 뭘 먹기는 먹겠어요? 그러면 웃으면서 “못 먹어 봤어요. 당신덕분에 호강합니다.” 그러면 될 것인데 혀를 꼬부라져서 “뭐 어째고 어째? 너는 부잣집 아들이니까 이것 잘 먹었네. 날 보고서 왜 음식가지고 친정까지 끌어 들이느냐?” 열등의식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부인이 좋은 옷 입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좋아서 백화점에 가서 좋은 옷을 사주는 것은 좋은데 꼭 사서 집에 데리고 와서 “너 친정에서 이런 옷 못 입어 봤지? 내게 시집왔으니 입어보지 않느냐.” 그 말에 그냥 굉장히 충격을 느꼈습니다. 이래서 모든 일에 이 남자는 아무 의미 없이 평범하게 이야기 했는데 그 부인은 굉장한 충격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부인의 생활 과정을 통한 열등의식 때문인 것입니다. 결국에는 그 부인이 신앙상담을 와서 하는 말이 “나는 좋은 집도 싫고, 좋은 옷도 싫고, 내 정도에 맞는 남자하고 살아야지 이 남자하고는 못살겠습니다. 이 남자는 나하고 레벨이 틀리기 때문에 나하고 대화가 안 되고 항상 나에게 슬픔을 갖다 주고 나의 열등의식을 살아나게 합니다.” 그 열등의식이란 여러분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 안에 들어오면 열등의식이 없어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받아 하나님 백성이 되면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님의 신부가 되고 하늘나라를 상속으로 받는 사람이 되는데 무슨 열등의식이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 십자가를 끌어안으면 열등의식의 쓴물이 달아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같이 열등의식이 안생길수는 없으나 이 열등의식을 십자가를 통해서 달도록 변화를 가져와야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은혜를 받고 보면 높고 낮은 것이 없어요. 교회 와서 높고 낮은 것이 있습니까? 교회에 높은 사람이라고 해서 좋은 자리에 앉고 낮은 사람이라고 해서 낮은 자리에 앉는 것이 있습니까? 교회 나오면 전부다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하늘나라 상속으로 받을 그리스도의 신부들인데 너나 나나 같은데 뭘 열등의식과 좌절감을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까?
4. 좌절감과 낙심의 쓴물
넷째로, 쓴물은 인생을 살면서 좌절감과 낙심의 쓴물인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좌절감이 다가오고 낙심이 다가오는 쓴물, 항상 좌절감, 낙심 속에 눈물을 흘리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아는 한 사람은 부인이 죽은 지 벌써 근 10년이 다 되어 가는데 지금도 그 방안에 부인의 사진과 유품을 고스란히 두고서 밤낮 부인 쳐다보고 울고 직장도 갖지 않고 술을 마시고 폐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마다 오면 자기 부인 잃어버린 슬픔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한 두 마디 동정을 하지만 그것도 한 두 해가 아니고 10년이 가까이 오니까 이제는 넌덜머리가 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좌절감과 낙심의 쓴물을 마시고 있으면 그 인생은 파괴되고 마는 것입니다. 지나간 것은 뒤로 던져 버리고 잊어버리고 새로 인생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십자가 밑에 나오면 하나님은 우리를 새롭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예수를 통해서 주시는 새로운 삶을 우리가 살아야지 옛날 삶에 붙잡혀서 눈물 흘리고 지내고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좌절감과 낙심의 쓴물을 마시는 것은 자기의 무력감을 늘 마음속에 의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 열 정탐꾼은 가나안 족속들을 바라보고 그들과 우리 비교하면 우리는 메뚜기더라. 메뚜기 자화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항상 나는 메뚜기다. 나는 메뚜기다. 메뚝. 메뚝 메뚜기다. 메뚝. 메뚝 메뚜기다. 메뚜기가 사람하고 어떻게 싸웁니까? 그러니까 뒤로 물러가지요. 나는 못한다. 나는 못해요. 나는 안돼요. 할 수 없어요. 나는 죽어요. 그러면 안되고, 못되고, 죽어요. 안 기뻐도 마음속에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서 나는 기뻐요. 나는 기뻐요. 나는 기뻐요. 나는 기뻐요.’ 여러분 하루에 만 번 만 기쁘다고 해 보십시오. 기쁨이 솟아납니다. 약한 사람도 ‘나는 강해요. 나는 강해요. 나는 강해요. 나는 강해요. 나는 약하지 않아요. 나는 강해요. 나는 강해요.’ 아침, 점심, 저녁으로 한 백번씩만 하루에 3백번만 외워 보세요. 연약이 한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치고 마는 것입니다. 항상 자기의 좌절감과 낙심의 쓴물을 마시고 사람들이 성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 자화상을 바꿔야 돼요. 자기의 무력한 의식을 가지고 늘 쓴물을 마시면 안돼요. 항상 환경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마음은 안 되잖아요. 무엇을 바라보아도 부정적으로 바라봅니다. 이스라엘 열 정탐꾼이 유대광야를 바라보고 “와! 주민을 삼키는 광야구나!” 광야를 바라보고 주민을 삼키니 저곳에 갔다가는 우리들 다 삼킴을 받겠다.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와~ 넓은 땅, 하나님이 젖과 꿀이 흐르도록 만들 땅이 이렇게 많구나!” 똑같은 땅을 보는데 주민을 삼키는 땅이라고 보고 다른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므로 젖과 꿀이 흐르게 만들 땅이라고 본 것 입니다. 항상 환경을 부정적으로 보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마음이 광야가 되고 사막이 되어 버리고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므로 모든 슬픔은 기쁨으로 좌절은 희망으로 죽음은 삶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같이 계시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빌립은 5천명 남자와 수만명 부녀자들을 보고 못 먹인다고 말했었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먹인다고 말했었습니다. 빌립은 광야니 못 먹이고, 돈이 없으니 못 먹이고, 사람이 많으니 못 먹이고, 떡 살 곳이 없어서 못 먹인다고 했으나 안드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일 수 있다. 왜 예수님이 같이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기 때문에 먹일 수가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결국 빌립은 못 먹였으나 안드레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먹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 십자가를 끌어안고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주님이 모든 일에 기적을 행하신다는 것을 믿어서 긍정적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부정적인 환경을 바라보고 희망에 등 돌린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절망에서 절대희망을 가진 사람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죽어서 절망 아닙니까? 무덤에 들어간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사망과 음부를 영원히 멸해 버렸기 때문에 예수님 계신 곳에는 부활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업이 망했습니까? 예수님이 들어오면 부활할 것입니다. 가정이 망했습니까? 예수님이 들어오면 부활할 것입니다. 마음이 절망적입니까? 예수님이 들어오면 부활할 것입니다. 실망했습니까? 예수님이 들어오면 부활할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앉아도 서도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우리가 바라보고 끌어안으면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시고 치료하시고 부활의 생명을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위대함은 부활이 있기 때문에 위대한 것입니다. 지금 겨울이 지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눈이 녹습니다. 왜, 봄이 다가오기 때문인 것입니다. 봄이 오면 아무리 사나운 겨울도 봄을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시면 아무리 사나운 죽음도 절대로 대항할 수 없습니다. 부활에 녹아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우리와 같이 부활과 생명으로 같이 계시므로 여러분의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활합니다. 부활합니다. 광야가 꽃동산이 되는 것입니다. 사막이 물 덴 동산이 되는 것입니다. 왜, 주님이 부활한 능력으로 우리와 같이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롬 8:32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롬 8:34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인간의 삶에는 항상 쓴물이 넘쳐납니다. 미움과 분노의 쓴물, 불안과 공포의 쓴물, 열등의식의 쓴물, 좌절감등의 이런 쓴물을 늘 마시고 살면 실패합니다. 쓴물을 변화 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이 쓴 마음의 샘물에 십자가 그리스도를 끌어안으면 즉시로 쓴물이 달아지고 변화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사랑과 평안과 자존심과 희망의 샘으로 변화되고 삶은 행복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샘물과 같은 보혈 앞에 나와서 씻고 십자가를 우리 마음속에 끌어 안으면 우리 마음의 모든 쓴물은 달게 되고 변화가 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변화의 기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보혈과 성령의 능력으로 흑암에서 광명으로 무질서에서 질서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추에서 미로 가난에서 부요로 변화시키는 기적을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광야를 지나오면서 우리가 목이 말라 허덕이다가 쓴물을 마시고 쓰러질 수밖에 없지만 예수 십자가를 끌어안으면 모든 쓴물은 달아지고 우리는 기뻐지고 소망 차게 되고 즐거워지고 용기백배해서 승리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십자가 무한영광일세 십자가 십자가 나를 위한 치료의 샘물인 것을 믿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여!
우리는 이 광야 같은 세상을 지나면서 별 도리 없이 매시마다 마음속에 쓴 연못물이 생겨납니다. 미움과 분노의 쓴물, 불안과 공포의 쓴물, 열등의식의 쓴물, 좌절감과 낙심의 쓴물이 솟아나고 쓴물을 마시고 우리는 좌절과 절망합니다. 내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이 쓴물을 마시지 않고 이 쓴물을 단물로 변화시키는 십자가를 끌어안게 도와주시옵소서. 십자가 앞에 나가서 주님께 부르짖으면 보혈의 능력과 성령의 권능으로 모든 쓴물은 달아 지고 오히려 쓴 경험이 우리에게 축복의 단물이 된다는 것을 알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아멘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변화의 능력 십자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거느리고 홍해를 건너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사흘 길을 걸어가도 물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이 사흘 동안 물을 마시지 않고 살수가 있나요? 입술이 트고, 혀가 입천정에 붙었습니다. 물 달라는 소리가 아우성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연못물을 발견했는데 뛰어가서 마셔보니 물이 써서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물을 마시자마자 토하고 뒹굽니다. 그리고 통곡을 하고 울면서 “모세야, 우리에게 물을 달라. 우리가 물이 없어 죽겠다.”고 하니까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매 그 연못가에 있는 한 나무를 지시하시는지라 그 나무를 가지 꺾어서 연못물에 던지니 쓴물이 달아져서 마음껏 물을 마시고 기갈을 해결했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굉장히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로 들어온 것은 마치 홍해를 건너온 것과 같습니다. 마귀의 지배에서 벗어나서 홍해를 건너오는 것이 중생의 체험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 광야의 길을 지나 천국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데 이 광야를 지나는 동안에 우리는 별 도리 없이 많이 쓴물이 마음속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 사는 동안 평안한 일만 있을 수가 없어요. 마음속에 쓴물이 생겨나서 쓴물을 마시고 고통을 당하고 심신이 병들고 슬프고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이 쓴물을 무엇으로 달게 하고 우리가 이 광야 여행길을 편안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쓴물을 달게 하는 것은 나뭇가지를 꺾어 던져야 된다고 하는데 그 나뭇가지가 바로 십자가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끌어안으면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로 우리 마음속의 쓴물이 달아 진다는 것을 성경은 상징적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광야를 여행하는 동안에 어떠한 쓴물이 우리 마음속에 생겨나는 것입니까?
<본론>
1. 미움과 분노의 쓴물
첫째로,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사람들과 서로 부딪히므로 미움과 분노의 쓴물이 마음속에 생겨납니다. 부부간에도 미움과 분노의 쓴물이 생겨나고, 부모 자식 간에, 형제간에, 이웃 간에, 사업 파트너 간에 서로 부딪히고 분노의 쓴물, 미움의 쓴물이 마음속에 생겨납니다. 미움이나 분노라는 것이 굉장히 독이 심합니다.
오사카 대학에서 시험을 해본 결과에 개에게 분노를 하게 해서 그 혈액을 뽑아서 독소를 추출해 보니까 그 개 한 마리가 분노를 한 피 속에서 나오는 독소가 여덟 마리의 개에게 주사를 해준즉 다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여덟 마리의 개를 죽일만한 독소가 한 마리의 개의 분노의 피 속에 생겨나더라. 그만큼 분노에는 어마어마한 독소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노하므로 우리의 심신이 병들고 고통당하는 것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미움과 분노의 쓴물을 마시지 아니할 수가 없느냐 하면 이 세상에 사는 것이 매일매일 극심한 생존경쟁을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가만히 편안히 살 수 있으면 분노할 필요가 없지요. 그러나 생존경쟁에서 밀고 밀리고 쫓고 쫓기는 가운데 서로 상처를 입고 분노가 생기가 미움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욥 5:2에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고 말했습니다. 분노는 죽이고 멸하는 독소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30~40대 남자들은 피곤합니다. 직장에서는 선배와 상사의 눈치를 봐야 하고, 밑에서 언제든지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을 견제해야 합니다. IMF 이후 퇴직의 압력도 만만치 않습니다. 가정에서도 남자들은 편하지 않습니다. 과거와 같이 아버지로서의 권위와 힘 보다는 아이를 중심으로 하는 풍조로 인해 자녀들의 눈치를 봅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나라 30~40대 남자 사망률이 세계에서 1위가 되어 있습니다. 통계청이 발표한 우리나라 40대 남자의 '2004년 사망원인 통계 결과'를 보면 사망 원인 1위가 54%로 간질환입니다. 2위는 자살이 43%, 3위는 간암이 35%, 4위는 뇌졸중이 28% 순입니다. 이러한 결과를 보면 우리나라의 40대 남자가 생존경쟁의 치열한 생활 속에서 얼마나 미움과 분노가 마음을 억압하고 피곤하고 고달픈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삶의 경쟁 속에 별 도리 없이 사람들은 시달리기 때문에 미움과 분노의 스트레스에 걸리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럴 뿐 아니라 끊임없이 시간과 삶에 쫓기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옛날 농경생활시대에는 해가 떠서 일어날 수도 있고 또 늦게 일하더라도 쫓기지 않고 쉬엄쉬엄 일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그렇지 않아요. 모든 것이 스케줄에 딱 짜여 있어서 아침 정시에 출근해야 되고, 일해야 되고, 일을 성취해야 되기 때문에 끊임없이 시간과 삶에 쫓기는 노예생활을 하므로 긴장과 고통이 계속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팽팽한 신경이 긴장된 가운데서 조금만 건드려도 분노를 하고 미움이 생기고 다툼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전2:23에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한다고 했는데 정말 매일같이 긴장하고 슬퍼하고 쉬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우리의 삶속에는 더 많은 성과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별 도리 없이 성과를 이루지 못하면 직장도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 발표에 보니까 서울시청에서는 공무원이 성과를 이루지 못하면 퇴직시키겠다는 발표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성과를 나타내려고 끊임없이 뛰고 긴장해야 되는 것입니다. 지난 달 신문에서 직장인 1천 735명을 대상으로 '직장인 일중독 증후군'에 대한 조사 결과가 실린 것을 보았습니다. 거기에 보면 조사에 참여한 사람 중 절반이 넘는 51.2%가 자신을 일 중독자에 걸렸다고 말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일을 많이 하기로 유명한데 OECD 국가 중 단연히 최고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일본사람을 게을러 보이게 하는 유일한 민족은 한국 사람밖에 없답니다. '일에 대한 태도'를 한국, 미국, 일본, 독일과 비교해보면, 한국의 일중독현상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자신의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해, 일본과 독일 사람들은 가족과의 시간을 1순위로 꼽은 반면에 한국 사람들은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니까 '만족스런 일자리'를 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국 사람에게는 자나 깨나 일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일 가운데 다가오는 긴장과 스트레스로 말미암아 마음에 미움과 분노가 쌓여지는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세상에 살면 우리가 자선 사회 속에 살고 있지 않지 않습니까? 모두다 이기주의와 황금만능주의로 되게 되는 것입니다. 모두 다 나만 보고 뛰지 남을 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유리창 밖으로 보면 세상의 산도 보이고, 들도 보이고, 강도 보이고, 사람들도 보이지요. 거울을 들여다보면 똑같은 유리인데 자기밖에 안 보이는 것입니다. 이기주의와 황금만능주의가 마음을 덮으면 자기밖에 안보여요. 눈에 보이는 것 없어요. 산도, 물도, 들도, 사람도 안보여요. 모두 다 내 이기주의적 내 중심밖에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한다는 딤후3:2 의 말세의 증후군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뿐 아니라 이 세상에는 이해할 수 있는 대화가 부족한 것입니다. 모두다 만인이 만인을 상대해서 경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에게 정말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합니까? 요사이 모 정치인을 보면 밑에 데리고 있던 비서가 온갖 고발을 다하고 신문에 나오고, TV에 나오는 것 보니까 세상에 비서도 믿을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믿을 수 있습니까? 아무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남의 말을 안 듣고 이제 자기말만 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해도 자기가 하는 말을 설득 시키려고 하지 남의 말을 듣고서 이해하려고 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이렇기 때문에 오해가 오해를 쌓고, 생각을 하고, 분노하고, 미워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잠12:16절에 미련한 자는 당장 분노를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는데 오늘날 우리는 수욕을 참지 못합니다. 미련하니까 당장 분노하고 미워하고 분을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마음에 미움의 씨앗이 되고 분노로 폭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을 어떻게 우리가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과 포용으로만이 쓴물이 달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여러 가지 사회적 현상으로 다가오는 마음의 미움과 분노의 쓴물을 달게 하지 아니하면 그 독이 우리 영을 죽이고 마음을 죽이고 육체를 죽이고 생활을 파탄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독이 되는 것입니다. 이 독을 해독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끌어안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받으면 모든 미움이 사라지고 분노가 사라지고 마음속에 사랑과 평화를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일 4:10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그러므로 엡 4:32에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이와 같은 은혜는 십자가를 끌어안을 때 십자가를 통한 보혈의 역사와 성령의 역사로 우리 마음속에 변화가 와야만 되는 것입니다. 변화는 내 힘으로 가져올 수 없어요. 내 힘으로 미움을 해독시킬 수가 없고 분노를 잠재울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나는 보혈의 능력과 성령의 은혜가 우리 마음을 해독시키고 변화시켜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매일같이 우리가 십자가 밑에 나와서 주님을 바라보고 기도하고 주님께 의지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주님은 우리 마음을 해독해 주시고 변화시켜 주시고 미움과 분노 대신에 사랑과 인내를 주시기를 원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마음속에 던지지 않고 미움의 쓴 연못물을 달게 할 수가 없습니다. 미움의 쓴 연못물을 마시고 고통과 괴로움을 안 당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2. 공포와 불안의 쓴물
둘째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마음에 생기는 쓴물은 공포와 불안의 쓴물입니다. 누구를 불구하고 이 세상에 사는 사람 가슴을 쓸어내리며 공포와 불안을 느끼지 않는 사람 없습니다. 매일 매일 공포와 불안이 우리를 엄습해 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면 두 가지 공포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큰 소리를 지르면 어린 아이가 울고 높은데서 떨어뜨리며 어린 아이가 굉장히 두려워합니다. 어른들은 그것도 모르고 어린 아이 좋아한다고 던졌다가 안고, 던졌다가 안는데 애들은 기절초풍을 하는 것입니다. 높은데서 떨어지는 공포와 큰 고함소리의 공포가 어린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자라나면서 이것이 우리의 다른 형태의 다른 공포로 자라는 것입니다. 어른들은 큰소리가 아니라 비난과 비평 받는 데에 대한 불안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아내는 남편에게 비난과 공격을 받을까 불안해하고 남편은 아내에게 비난과 공격을 받을까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공격을 받을까 불안해하고 공포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에 나가면 어느 곳에 가든지 비난과 비평받는 것을 두려워하고 항상 몸을 움츠리는 것입니다.
시38:19에도 보면 내 원수가 활발하며 강하고 부당하게 나를 미워하는 자가 많다고 미워하는 사람들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사이는 더구나 인터넷에 악플 들이 올라오는 것입니다. 인터넷을 열면 홈페이지에 온갖 칭찬도 있지만 욕이 다 있다 말입니다. 그 욕지거리를 읽고 난 다음 아름다운 미모의 탤런트들이 세상을 하직할 정도로 좌절과 절망을 느낍니다. 좀 유명하다는 사람은 욕 안얻어 먹는 사람이 없어요. 욕을 태반으로 얻어 먹습니다. 저도 저의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욕을 태반으로 얻어먹어요. 아에 거기에 구둑 살이 올라와야지 그것을 보고서 웃고, 웃으면 사람 미쳐요. 그러므로 마음이 약한 젊은 여성들이 자기 홈페이지에 들어오는 온갖 악플을 읽고 난 다음에 좌절하고 절망하고 젊은 삶을 자살로써 끝맺고 마는 비극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비난하고 비평 하는 데에 대한 굉장한 불안과 공포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 세상에 살면서 인정받지 못하고 소외되고, 버림받는 불안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혼자 살지 못하잖아요. 함께 삽니다. 집안에서나 이웃에서나 회사에서나 다 함께 사는데 함께 사는 사람들 가운데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소외되고 버림받으면 어떻게 할까하는 그러한 불안이 굉장히 많습니다.
시38:11에 보면 “내가 사랑하는 자와 내 친구들이 내 상처를 멀리하고 내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
사람들이 자기를 멀리하고 소외시키고 인정하지 않을까 굉장히 불안하지요. 사람은 인정을 받으면 굉장히 좋습니다. 자기를 인정하는 자를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가정에도 그래요. 남편이 부인을 인정해 주면 신바람이 나는 것입니다. 부인이 남편보고 “여보 당신 참 잘해. 잘났다.”하면 회사에 가서 하루 종일 우쭐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정을 받았다는 것은 굉장한 즐거움을 주는 것입니다. 고래도 칭찬하면 춤을 춘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고래조차도 칭찬하면 춤을 추는데 사람들을 칭찬하면 하루 종일 기분이 좋지 않습니까? 지나가는 말 같지만 “아유, 굉장히 젊어 보이네요. 왜 이렇게 젊어 보입니까?” 그러면 하루 종일 그 음성이 귀에 울리는 것입니다. ‘젊다. 너는 젊다. 너는 젊다.’ 체험해 봐서 제가 알아요. 우리 성도들이 나를 보고서 “아이고 목사님, 요사이 젊어졌네요. 50대 같네요.” “무슨 소리 그렇게 해요.” 그러면서도 하루 종일 귓가에서 ‘너는 젊다. 너는 50대다. 50대다.’ 그것 여운이 남아 있어서 기분이 보통 좋지 안 다구요. 사람들이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는다는 것 굉장한 삶의 기름부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할 수만 있으면 이웃을 칭찬하고 인정하고 긍정적으로 말하는 습관을 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늘 남을 헐뜯고 비난하고 남의 결점을 찾는 것은 대단히 나쁜 습관이고 자기도 좋지 않고 남도 좋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인정받지 못하고 소외되고 버림받는 불안을 가지고 있고 또 삶에 실패할까 패배할까 하는 불안이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혹시 실패하면 어떻게 할까?’하는 살얼음위에 걸어가서 얼음이 꺼질까 싶어서 겁나는 것처럼 불안증이 마음속에 가득하고 패배하면 어떻게 할까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욥기에 보면 욥은 동방에서 제일가는 부자였지만 그가 욥3:25절에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해서 항상 무서워하고 두려워하고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우리는 질병과 죽음에 대한 불안은 그림자처럼 다가오는 것입니다. 언제 무슨 병이 들지 모릅니다. 요사이는 더구나 비만증으로 말미암아 다가오는 성인병이 많습니다. 고혈압, 신경통, 심장병, 관절염, 암 온갖 질병이 언제 내게 다가올지 모르는 것입니다. 질병에 대한 불안과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그런 불안증이 있어서 모든 사람들은 죽음의 그림자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불안과 공포의 쓴물을 늘 마시고 있는데 이 쓴물을 청산해야 돼요. 매일같이. 불안과 공포의 쓴물을 어떻게 청산합니까? 매일같이 십자가 밑에 나가서 주님을 바라보면 십자가를 통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는 은혜와 사랑을 통해서 불안과 공포를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돌보아 주시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버리지 않고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것을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는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셔서 나는 도와주시고 보호하시고 이끌어 주신다는 신념을 십자가 보혈을 통해서 성령의 은혜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불안과 공포의 쓴물을 다른 무엇으로도 달게 만들 수 없습니다. 근원적으로 달게 만드는 것은 예수 십자가를 끌어안으면 내가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죄 있는 그대로, 못난 그대로, 나를 품어 주시고 사랑해 주시고 하나님 자녀로 삼아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고 마음이 편안하고 잠잠해지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지어 먹어서 될 수 없습니다. 주님 십자가 밑에 나가서 내가 불안과 공포를 가지고 부르짖을 때 하늘에서 평화가 마치 군대가 도시를 점령하듯이 우리 마음속에 임하여 우리 마음을 점령해서 우리 마음속이 평안하게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일 우리가 주님께 새벽 기도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지요. 새벽에 나와서 주님께 부르짖으므로 마음의 불안과 공포를 다 잠재워 버리고 넘치는 하나님의 평안을 가지고 하루를 살아갈 수가 있는 행복을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히13:5~6에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요.”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는데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요. 마음속에 평안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은혜로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3. 열등의식의 쓴물
셋째로, 우리의 가슴속에 늘 생기는 쓴물은 열등의식의 쓴물입니다. 누구든지 마음속에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어요. 자기가 잘났다고 뽐내는 사람은 오히려 열등의식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덮으려고 의시 대는 것이 바로 잘났다고 교만을 떠는 것입니다. 열등의식은 우리 마음속을 굉장히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열등의식을 가집니까? 가난하고 어려운 성장기에 대한 열등의식은 반사회적 반항의식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라날 때 헐벗고 굶주리고 가난하게 자라났다. 그러므로 나보다 잘 먹고, 잘 입고, 잘사는 사람에 대해서 열등의식을 느끼고 반항심을 느끼는 것입니다. 공산주의라는 것은 못살고 가난한 사람들이 잘살고 재산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열등의식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열등의식이란 것은 반사회적인 반항의식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지난 27일 송파구 문정동 개미마을 30가구에 배달된 요구르트 사건 알지요? 요구르트에 세제를 집어넣어 가지고서 마시자마자 목이 타고 구토를 하고 야단법석을 해서 굉장히 심문에 나고 TV에 뉴스거리가 된 것입니다. 그 범인을 잡고 보니 선 모씨라는 사람인데 그 어머니는 가락동 시장에서 과일 장사를 하며 고생고생을 하는데 개미마을 사람들은 국가 땅에서 강제로 점용해서 판자촌 짓고 살다가 편안히 살면서 재개발로 쉽게 돈을 국가에서 보상받게 되었다. 그러니 배가 아프지요. 열등의식이 생기는 것입니다. 왜, 똑같이 고생하는데 저는 국가에서 보상받고 우리 어머니는 가락동 시장에서 내내 과일장사 하면서 고생하느냐. 에라. 내 못 먹는 밥에 재나 뿌려 보자. 그래 가지고서 개미마을 사람들에게 요구르트를 쫙 나누어 주었는데 또 공짜라고 먹은 게 큰일이지요. 공짜 없어요. 여러분, 문을 열어 보니까 문밖에 요구르트가 공짜로 있으니까 좋다고 마셨다가 큰 변을 당하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삶에서 생겨난 열등의식이 사회적인 반항의식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오스트리아의 '작은 독재자'로 불렸던 돌푸스 수상은 나치스에 의해 암살당했습니다. 한번은 신문 기자가 돌푸스 수상의 어머니를 인터뷰했습니다. 그의 어머니 역시 키가 135㎝의 단신 이었습니다.그녀는 자기 아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아들은 결코 야망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돌푸스는 소년시절 목사가 될 꿈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주위에서 '너처럼 키가 작은 사람이 어떻게 목사가 되겠느냐'고 놀려댔습니다. 돌푸스는 그때부터 열등감을 갖기 시작했고 결국은 열등감을 없애기 위해서 정치계로 뛰어 들어가서 독재자가 되고 어마어마한 독재를 행했다." 고 말한 것입니다. 이처럼 열등감은 치유되지 못하고 남아 있으면 성격과 기질에 영향을 미치고 다른 사람에게도 좋지 못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열등의식을 가지는 것은 교육적 과정에 대한 열등의식인 것입니다. 지방대학을 나온 사람은 서울에 있는 대학을 나온 사람에게 열등의식을 느끼고,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있는 서울대학이나 고려대학, 연세대학을 안 나오면 열등의식을 느끼고 한국에 있는 대학을 나온 사람은 미국의 대학 나온 사람에게 열등의식을 느끼고 학교 학문에 대한 열등의식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에라. 까짓것 조기에 입학을 미국에서 공부시키자고 초등학교, 중등학교, 고등학교 학생들을 미국으로 보내고 어머니는 미국가 있고 아버지는 한국에서 기러기 아빠, 기러기 엄마가 되어서 태평양을 건너 목을 쭉 내밀고 꽈악 꽈악 꼬악 그러다가 가정이 깨어지고 낭패에 이르고 비극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모두다 교육적 과정에 대한 열등의식인 것입니다. 사실은 이 세상에서 공부 많이 했다고 성공해서 살지 않습니다. 머리 좋다고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살지 않습니다. 예수 잘 믿어야 성공하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문을 열면 닫을 자가 없고 하나님이 문을 닫아 놓으면 열자가 없는데 이 세상에 어떤 시골에 자랐을지라도 예수 잘 믿고 하나님 잘 섬기면 성령이 함께 계셔서 머리가 되고 꼬리 되지 않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방향을 잘못 잡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오해를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잘사는 길은 하나님을 섬기는 길이고, 지혜의 근본이 하나님을 알고 믿고 섬기는 것이 지혜의 근본인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교육적인 과정에 대한 열등의식으로 사람들은 오늘날 고통을 당하고 쓴물을 마시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외모에 대한 열등의식도 대단한 것입니다. 요사이 신문에 보니까 젊은 여성치고 성형외과를 찾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요사이 농담에 천당에 들어가는데 시간이 상당히 오래 걸린답니다. 왜냐 하니까. 하나님 천사가 와서 들어오는 사람 신분조사를 하는데 사진에 나온 것 하고 본인하고 얼굴이 틀리니까. “이것 틀리지 않느냐?” “아이고 그때는 성형외과 수술을 하기 전이고 지금 수술해서 틀립니다.” 그것을 알아보는데 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만큼 많은 사람이 성형수술을 했습니다. 성형수술은 다른 사람보라고 하는 것 보다도 자기 마음에 외모에 대한 열등의식을 카바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우리 집사람이 제게 와서 “당신 가발 몇 개냐?” 그래서 “4개.” “왜 네 개나 가발을 만들었어?” “젊을 때부터 머리가 조금씩 벗어지니까 한번 덮어보려고 만든 것이 네 개나 만들었다.” 저 조차도 거울을 들여다보면 보기 싫습니다. 머리가 벗어졌으니까. 더구나 TV에 나오는 머리는 번쩍 거려서 정말 보기가 싫어요. 그래서 가발로 덮어 보려고 하다가 성도들이 너무 웃어서 그만 못했습니다. 사람들마다 자기 외모에 대한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할 정도로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아무리 잘났어도 자기 얼굴에 어느 부분적으로 못난 것에 대한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습니다. 이새의 아들이 여덟 명이 있었는데 사무엘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름 부어서 그중 아들 중에 한 사람에게 왕을 만들려고 하는데 이새가 사무엘에게 일곱 아들만 데려 갔습니다. 첫째 아들, 와 잘생겼다. 하나님이 “아니야. 버렸다.” 둘째 아들 사무엘이 보니까 “왕이 될 만하구나!” 하나님이 “버렸다.” 셋째 아들 “와! 이놈도 잘 생겼는데!” 하나님이 “그놈도 버렸다.” 일곱째까지 나왔는데 하나님이 다 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이새에게 물었습니다. “또 아들하나 없느냐?” “하하하. 하나 있기는 있지만 그것은 우리 집에서 아주 못난 놈이에요. 별 볼일 없어서 내가 아예 데리고도 안 나왔어요. 그 놈은 저 산에서 지금 양을 치고 있습니다.” “그런 말 하지 마세요. 걔를 데리고 오세요.” 그래서 다윗이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하는 아버지의 뜻에도 불구하고 데려와서 사무엘 앞에 서니까 하나님이 “보아라. 이 사람을 내가 택해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으니 이 아이에게 기름을 부으라.”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속사람을 보는 것입니다. 외모가 아무리 잘나도 하나님은 속사람을 보아서 속사람이 합격 안하면 외모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잘 보여야 출세를 하고 성공을 하고 행복하고 잘사는 것이지 사람에게 잘 보여 봤자 별 소용없지 않습니까?
삼상16:7에 “야훼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야훼는 중심을 보느니라”
그 다음 또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 국가적인 열등의식이 있습니다. 우리는 오랜 세월동안 5천년 역사 가운데 수없이 중국 사람들에게 침략을 당하고 중국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중국에 대해서 국가적인 문화적인 열등의식을 늘 가지고 있습니다. 거기에다가 일본에 36년 동안 지배를 당했으므로 언제나 일본에 대해서 열등의식, 좌절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삼일절만 되면 일본에 대해서 분노를 퍼붓고, 8.15만 되면 분노를 퍼붓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유화적인 분노를 벗어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열등의식과 좌절감, 국가적인 열등의식과 좌절감을 늘 품고 살면 여러분 성공하지 못합니다. 열등의식과 좌절감엔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백미러를 쳐다보는 것과 한가지인 것입니다.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자꾸 백미러를 쳐다보고 뒤에 뭐가 오느냐고 자꾸 보면 앞에 충돌하고 마는 것입니다. 뒤에 것은 잊어버리고 푯대를 향하여 앞으로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중국과 과거에 우리가 당했던 설움도 잊어 버려야 되고 이제는 일본에게 침략을 당해서 우리가 고통을 당했던 것도 잊을 때가 왔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아득한 옛날에 이미 지나간 역사적 한 사건인 것입니다. 이제는 역사적인 사건으로써 기억은 하지만 그를 따라서 감정적인 분노와 슬픔과 억울함과 이것을 청산해 버릴 때가 왔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는 우리는 앞으로 전진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과거사의 수치를 지금까지 연속하는 것은 비극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적은 민족이지만 이스라엘이 적은 민족이라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사 선택하니까 바벨로니아, 앗수르와 메데, 파사, 로마 다 망해도 오랜 유구한 세월동안 적은 이스라엘은 지금도 면면이 살아서 세계적인 우수한 국가와 민족으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신7:7에 “야훼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더라도 예수 잘 믿으면 하나님이 높여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가 적은 민족이라도 우리가 예수를 잘 믿고 하나님을 잘 섬기면 하나님이 건지고 하나님이 높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인 옛날에 대해서 열등의식이나 수치심이나 분노를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나 모두 다 이런 마음에 열등의식을 가지고 고통을 당하는데 이것도 예수님이 십자가 밑에 나와서 십자가를 끌어안으면 하나님의 은혜와 보혈의 역사로써 다 씻어 버리고 열등의식과 좌절감에서 벗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나의 상담실에 한번 상담 온 젊은 부부의 이야기가 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사장 아들이 아버지 회사에 왔다 갔다 하다가 직원으로 있는 아버지 비서실에서 일하는 이쁜 아가씨가 탐이 나서 데이트를 하다가 결혼에 성공했는데 이 아가씨는 가난한집 출신입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이 여성하고 결혼하고 난 다음 굉장히 행복했어요. 그러나 그 부인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열등의식 때문에. 그 아들이 그 아내를 데리고서 좋은 식당에 가서 아름다운 환경 가운데서 맛있는 음식을 주문해서 먹을 때마다 하는 말이 “너 친정에서는 못 먹어 봤지?” 그것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친정에서 못 먹었지요. 가난한데 뭘 먹기는 먹겠어요? 그러면 웃으면서 “못 먹어 봤어요. 당신덕분에 호강합니다.” 그러면 될 것인데 혀를 꼬부라져서 “뭐 어째고 어째? 너는 부잣집 아들이니까 이것 잘 먹었네. 날 보고서 왜 음식가지고 친정까지 끌어 들이느냐?” 열등의식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부인이 좋은 옷 입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좋아서 백화점에 가서 좋은 옷을 사주는 것은 좋은데 꼭 사서 집에 데리고 와서 “너 친정에서 이런 옷 못 입어 봤지? 내게 시집왔으니 입어보지 않느냐.” 그 말에 그냥 굉장히 충격을 느꼈습니다. 이래서 모든 일에 이 남자는 아무 의미 없이 평범하게 이야기 했는데 그 부인은 굉장한 충격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부인의 생활 과정을 통한 열등의식 때문인 것입니다. 결국에는 그 부인이 신앙상담을 와서 하는 말이 “나는 좋은 집도 싫고, 좋은 옷도 싫고, 내 정도에 맞는 남자하고 살아야지 이 남자하고는 못살겠습니다. 이 남자는 나하고 레벨이 틀리기 때문에 나하고 대화가 안 되고 항상 나에게 슬픔을 갖다 주고 나의 열등의식을 살아나게 합니다.” 그 열등의식이란 여러분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 안에 들어오면 열등의식이 없어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받아 하나님 백성이 되면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님의 신부가 되고 하늘나라를 상속으로 받는 사람이 되는데 무슨 열등의식이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 십자가를 끌어안으면 열등의식의 쓴물이 달아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같이 열등의식이 안생길수는 없으나 이 열등의식을 십자가를 통해서 달도록 변화를 가져와야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은혜를 받고 보면 높고 낮은 것이 없어요. 교회 와서 높고 낮은 것이 있습니까? 교회에 높은 사람이라고 해서 좋은 자리에 앉고 낮은 사람이라고 해서 낮은 자리에 앉는 것이 있습니까? 교회 나오면 전부다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하늘나라 상속으로 받을 그리스도의 신부들인데 너나 나나 같은데 뭘 열등의식과 좌절감을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까?
4. 좌절감과 낙심의 쓴물
넷째로, 쓴물은 인생을 살면서 좌절감과 낙심의 쓴물인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좌절감이 다가오고 낙심이 다가오는 쓴물, 항상 좌절감, 낙심 속에 눈물을 흘리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아는 한 사람은 부인이 죽은 지 벌써 근 10년이 다 되어 가는데 지금도 그 방안에 부인의 사진과 유품을 고스란히 두고서 밤낮 부인 쳐다보고 울고 직장도 갖지 않고 술을 마시고 폐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마다 오면 자기 부인 잃어버린 슬픔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한 두 마디 동정을 하지만 그것도 한 두 해가 아니고 10년이 가까이 오니까 이제는 넌덜머리가 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좌절감과 낙심의 쓴물을 마시고 있으면 그 인생은 파괴되고 마는 것입니다. 지나간 것은 뒤로 던져 버리고 잊어버리고 새로 인생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십자가 밑에 나오면 하나님은 우리를 새롭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예수를 통해서 주시는 새로운 삶을 우리가 살아야지 옛날 삶에 붙잡혀서 눈물 흘리고 지내고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좌절감과 낙심의 쓴물을 마시는 것은 자기의 무력감을 늘 마음속에 의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 열 정탐꾼은 가나안 족속들을 바라보고 그들과 우리 비교하면 우리는 메뚜기더라. 메뚜기 자화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항상 나는 메뚜기다. 나는 메뚜기다. 메뚝. 메뚝 메뚜기다. 메뚝. 메뚝 메뚜기다. 메뚜기가 사람하고 어떻게 싸웁니까? 그러니까 뒤로 물러가지요. 나는 못한다. 나는 못해요. 나는 안돼요. 할 수 없어요. 나는 죽어요. 그러면 안되고, 못되고, 죽어요. 안 기뻐도 마음속에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서 나는 기뻐요. 나는 기뻐요. 나는 기뻐요. 나는 기뻐요.’ 여러분 하루에 만 번 만 기쁘다고 해 보십시오. 기쁨이 솟아납니다. 약한 사람도 ‘나는 강해요. 나는 강해요. 나는 강해요. 나는 강해요. 나는 약하지 않아요. 나는 강해요. 나는 강해요.’ 아침, 점심, 저녁으로 한 백번씩만 하루에 3백번만 외워 보세요. 연약이 한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치고 마는 것입니다. 항상 자기의 좌절감과 낙심의 쓴물을 마시고 사람들이 성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 자화상을 바꿔야 돼요. 자기의 무력한 의식을 가지고 늘 쓴물을 마시면 안돼요. 항상 환경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마음은 안 되잖아요. 무엇을 바라보아도 부정적으로 바라봅니다. 이스라엘 열 정탐꾼이 유대광야를 바라보고 “와! 주민을 삼키는 광야구나!” 광야를 바라보고 주민을 삼키니 저곳에 갔다가는 우리들 다 삼킴을 받겠다.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와~ 넓은 땅, 하나님이 젖과 꿀이 흐르도록 만들 땅이 이렇게 많구나!” 똑같은 땅을 보는데 주민을 삼키는 땅이라고 보고 다른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므로 젖과 꿀이 흐르게 만들 땅이라고 본 것 입니다. 항상 환경을 부정적으로 보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마음이 광야가 되고 사막이 되어 버리고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므로 모든 슬픔은 기쁨으로 좌절은 희망으로 죽음은 삶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같이 계시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빌립은 5천명 남자와 수만명 부녀자들을 보고 못 먹인다고 말했었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먹인다고 말했었습니다. 빌립은 광야니 못 먹이고, 돈이 없으니 못 먹이고, 사람이 많으니 못 먹이고, 떡 살 곳이 없어서 못 먹인다고 했으나 안드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일 수 있다. 왜 예수님이 같이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기 때문에 먹일 수가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결국 빌립은 못 먹였으나 안드레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먹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 십자가를 끌어안고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주님이 모든 일에 기적을 행하신다는 것을 믿어서 긍정적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부정적인 환경을 바라보고 희망에 등 돌린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절망에서 절대희망을 가진 사람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죽어서 절망 아닙니까? 무덤에 들어간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사망과 음부를 영원히 멸해 버렸기 때문에 예수님 계신 곳에는 부활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업이 망했습니까? 예수님이 들어오면 부활할 것입니다. 가정이 망했습니까? 예수님이 들어오면 부활할 것입니다. 마음이 절망적입니까? 예수님이 들어오면 부활할 것입니다. 실망했습니까? 예수님이 들어오면 부활할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앉아도 서도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우리가 바라보고 끌어안으면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시고 치료하시고 부활의 생명을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위대함은 부활이 있기 때문에 위대한 것입니다. 지금 겨울이 지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눈이 녹습니다. 왜, 봄이 다가오기 때문인 것입니다. 봄이 오면 아무리 사나운 겨울도 봄을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시면 아무리 사나운 죽음도 절대로 대항할 수 없습니다. 부활에 녹아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우리와 같이 부활과 생명으로 같이 계시므로 여러분의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활합니다. 부활합니다. 광야가 꽃동산이 되는 것입니다. 사막이 물 덴 동산이 되는 것입니다. 왜, 주님이 부활한 능력으로 우리와 같이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롬 8:32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롬 8:34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인간의 삶에는 항상 쓴물이 넘쳐납니다. 미움과 분노의 쓴물, 불안과 공포의 쓴물, 열등의식의 쓴물, 좌절감등의 이런 쓴물을 늘 마시고 살면 실패합니다. 쓴물을 변화 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이 쓴 마음의 샘물에 십자가 그리스도를 끌어안으면 즉시로 쓴물이 달아지고 변화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사랑과 평안과 자존심과 희망의 샘으로 변화되고 삶은 행복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샘물과 같은 보혈 앞에 나와서 씻고 십자가를 우리 마음속에 끌어 안으면 우리 마음의 모든 쓴물은 달게 되고 변화가 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변화의 기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보혈과 성령의 능력으로 흑암에서 광명으로 무질서에서 질서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추에서 미로 가난에서 부요로 변화시키는 기적을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광야를 지나오면서 우리가 목이 말라 허덕이다가 쓴물을 마시고 쓰러질 수밖에 없지만 예수 십자가를 끌어안으면 모든 쓴물은 달아지고 우리는 기뻐지고 소망 차게 되고 즐거워지고 용기백배해서 승리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십자가 무한영광일세 십자가 십자가 나를 위한 치료의 샘물인 것을 믿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여!
우리는 이 광야 같은 세상을 지나면서 별 도리 없이 매시마다 마음속에 쓴 연못물이 생겨납니다. 미움과 분노의 쓴물, 불안과 공포의 쓴물, 열등의식의 쓴물, 좌절감과 낙심의 쓴물이 솟아나고 쓴물을 마시고 우리는 좌절과 절망합니다. 내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이 쓴물을 마시지 않고 이 쓴물을 단물로 변화시키는 십자가를 끌어안게 도와주시옵소서. 십자가 앞에 나가서 주님께 부르짖으면 보혈의 능력과 성령의 권능으로 모든 쓴물은 달아 지고 오히려 쓴 경험이 우리에게 축복의 단물이 된다는 것을 알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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