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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4:23~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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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조용기 목사 |
참고 : | 2007년 3월 18일 주일2부 설교 |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 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었느니라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서론>
“살아 있는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독수리나 곰을 박제로 만들어 전시해 놓은 것을 우리가 간혹 보게 됩니다. 박제된 독수리나 곰은 살아 있을 때와 꼭 같습니다. 독수리는 눈이 반짝반짝하고 곰은 발톱을 내고 지금이라고 뛰어들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들은 죽었고 생명이 없어 자유로이 움직이지 못합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식적인 박제된 믿음은 종교적인 형식이나 의식은 잘 행하되 생명력이 없습니다. 성령께서 함께 역사하시는 신앙이 아니면 신앙은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렛 회당에서 말씀하신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본론>
1. 엘리야와 시돈 땅 사르밧 과부의 기적
3년 6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고 수많은 사람이 굶주려 죽을 때 이스라엘에 수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그들은 박제된 신앙을 가졌지 살아있는 순종하는 믿음을 안 가졌습니다. 오직 이방 땅 시돈에 있는 사렙다의 과부만이 살아있는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엘리야가 그곳에 보냄을 받아서 기적을 행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엘리사시대에 이스라엘에 수많은 나병 환자가 있었으나 한 사람도 살아있는 믿음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깨끗함을 받지 못했으나 이방 나라 수리아의 대장 나아만은 살아있는 믿음을 가지고 엘리사를 찾아와서 고침을 받았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회당장 회당의 사람들은 너무나 화가 나서 예수님을 언덕에 밀어 죽이려고 했으나 주님께서 피해서 나가셨다는 말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주님께서는 3년 6개월 동안 가뭄이 와서 먹을 것이 없을 때 이스라엘의 수많은 과부에게는 안가고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과부에게만 엘리야를 보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가 극심하여 아합 왕 때 하나님께서 3년 6개월 동안 가뭄의 심판을 보낸 것입니다. 그때에 온 천하가 굶주림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시돈 땅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돈 땅에도 역시 이방 땅이지만 가뭄이 와서 수많은 사람이 굶주려서 절망에 처했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시돈 땅 성문 곁에 가니까 한 과부가 나무를 줍고 있습니다. “무엇을 하느냐?” “나무를 주어서 마지막 남은 밀가루와 기름을 가지고 빵을 만들어서 내 아들과 나누어 먹고 죽으려고 합니다.” 엘리야가 가만히 보고 “글쎄. 그것은 그렇게 해도 좋겠지만 가서 물 한 사발을 내게 갖다 주시오. 나는 엘리야요.” 그러니까 그 과부가 나무 잎사귀를 줍다말고 물을 길러 가는데 “조금 기다리세요. 기다리세요. 물만 가져 오지 말고 빵을 만들어서 내게 먼저 가져 오세요.” 깜짝 놀라서 뒤돌아 보았 습니다. 마지막 빵 하나 만들어서 자기와 자식하고 나눠 먹겠다고 했는데 이것을 가지고서 빵을 만들어 엘리야에게 먼저 가져 오라니 어떻게 된 일인 것입니까? 망연자실하여 쳐다보니까 엘리야가 “만일 당신이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가뭄이 지날 때까지 밀가루 통에 밀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기름병에 기름이 떨어지지 아니할 것입니다.”하나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받아서 믿든 안 믿든 그것은 사렙다의 과부의 책임입니다. 사렙다의 과부는 극한 상황에 처해있는데 그 절박한 상황 속에서 엘리야를 만났는데 엘리야가 너무나 어려운 부탁을 한 것입니다. 아들은 떡을 달라고 몸부림치고 우는데 물 한사발도 구하기 힘든데 마지막 밀가루와 기름으로 떡을 만들어서 엘리야에게 먼저 가져오라니 이 일이 웬일입니까? 과부는 어찌할 찌 몰라서 당황했으나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는 사람이었고 엘리야가 하나님의 종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결단을 내렸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주어졌으므로 말씀을 믿든 안 믿든 그것은 자기가 선택할 것인데 사렙다의 과부는 말씀을 선택했습니다. 수많은 이스라엘의 과부들은 말씀을 듣고도 말씀을 저버렸습니다. 사렙다의 과부는 이방 여인이지만 하나님이 종, 엘리야의 말을 듣고 그 말씀을 믿기로 작정을 하고 그는 가서 물 한 사발과 빵을 만들어서 가져오는데 어린 아들이 따라오면서 떡을 달라고 몸부림치고 웁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뿌리치고 물 한 사발과 떡을 엘리야에게 주었습니다. 우리 생각하기는 엘리야가 받아서 도로 돌려줄 것 같이 생각했는데 그 과부와 어린아이가 보는 앞에서 엘리야는 그 떡을 혼자서 다 먹고 그 물 한 사발을 다 꿀꺽꿀꺽 마셨습니다. 야박하게 보이지요. 너무나 사랑이 없다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를 통해서 과부의 신앙을 시험하고 계신 것입니다. 네가 정말 백척간두에서 진일보로 한발자국, 벼랑에서 믿음의 발을 내딛느냐, 안 내딛느냐 보시는 것입니다. 정말 믿음으로 목숨을 내어 놓고 순종하느냐, 안하느냐를 시험해 보신 것입니다. 과연 그 이후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서 과부가 밀가루 통에 가보니까 밀가루가 끊이지 않고 흘러나오고 기름병에 기름이 계속 흘러 나와서 그 가뭄이 다 지날 때까지 과부와 그 어린아이와 엘리야가 한집에 살면서 배고프지 않고 넉넉히 먹고 가뭄을 이길 수가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나서 실천하는 믿음에 대해서 기적을 보여준 것입니다. 행동하는 믿음이란 쉽게 보이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서커스가 외줄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것 보셨지요? 미국의 유명한 블론딘 이라는 줄타기 서커스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나이아가라 폭포를 미국과 캐나다에 걸쳐서 줄을 걸쳐 놓고 장대를 들고 지나갔었습니다. 그리고 올 때는 조그마한 손수레를 허리에 걸고 그 줄을 타고서 건너왔습니다. 밑에는 천길만길 폭포가 쏟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찔합니다. 캐나다 편에서나 미국 편에 수많은 군중들이 모여서 박수를 쳤습니다. 그때 그가 미국 편에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여러분, 이 수레에 내가 사람을 태워서 이 줄을 타고 캐나다 편으로 건너갈 수 있다고 여러분 믿으십니까?" 모두 다 "믿습니다." "그러면 누구 자원하는 사람 여기 수레에 타십시오." 한 사람도 안탔습니다. 여러분 믿음이란 것은 벼랑에서 뛰어 내리는 것이 믿음인데 모두다 이 사람이 손수레에 사람을 싣고 그 외줄을 타고 나이아가라 폭포를 건너갈 것을 믿는다고 했지만 수레에 자원해서 올라타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우리 믿음은 그와 같은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마음으로 믿는다고 하지만 행동을 옮긴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렙다의 과부가 엘리야에게 물 한 그릇과 빵을 만들어 주었다는 것 우리가 읽을 때 마음으로 쉽게 생각합니다. “그것 나라도 물 달라고 하면 물주고 하나님의 종이니까 빵을 만들어서 대접 하는 것 당연한 이치지. 그것 어려울 것 있느냐.” 그러나 실제는 너무나 배가 고프고 너무나 절박한 상황에 과부 혼자도 아닌 아들조차 달려서 떡을 달라고 우는데 엘리야가 와서 물 한 그릇과 떡 한쪽을 만들어 먼저 가져오라고 그렇게 하면 가뭄이 끝날 것 같이 밀가루 통에 밀가루가 흘러나오고 기름병에 기름이 흘러 나올 것이라고 말을 했지만 그것이 될지 안 될지 어떻게 알아요.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말하면 믿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직접 여러분 집에 와서 달라면 나는 달라요. 나는 못해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렙다의 과부가 엘리야보고 “당신이나 잘 먹고 잘사십시오. 나는 이 떡을 만들어서 당신에게 줄 수 없어. 떡을 먹고 아들과 나는 마지막 죽겠소.” 그렇게 했으면 그대로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의 말을 듣고 이 사렙다의 과부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했습니다. 하나님 먼저 대접하고 그 다음 살겠다. 살아도 하나님 먼저, 죽어도 하나님 먼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실천한 결과에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2. 엘리사와 수리아 대장군 나아만의 나병 치유
엘리사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에 문둥병자가 굉장히 많았으나 아무도 살아계신 하나님께 기적을 일어날 것을 믿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원수의 나라 수리아에 대장군 나아만은 위대한 장군이었으나 그 옷 속으로는 몸이 문드러지고 썩어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외면적으로 화려하나 내적으로는 썩어져가는 문둥병 환자였습니다. 절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수리아군인들이 국경에 나가서 이스라엘 처녀 한사람을 잡아와서 그 집에 도우미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 처녀가 그 주인의 비참함을 보고 주모에게 말하기를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의 엘리사에게 갔으면 참 좋겠습니다. 엘리사가 그를 고쳐 주었을 것입니다.” 도우미 말을 어떻게 믿습니까? 그러나 성경에는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했는데 도우미의 말을 듣고 주모가 나아만에게 말을 하니 나아만이 귀가 번쩍했습니다. 그가 임금님에게 가서 “이스라엘에는 엘리사가 있어서 문둥병을 고친다고 하니 나에게 말미를 주어서 이스라엘에 가서 문둥병을 고침을 받고 오겠습니다. 편지하나 써주십시오.” 시리아의 왕이 이스라엘 왕에게 “내 부하를 보내니 문둥병을 고쳐 주십시오.” 그 편지를 받아 가지고서 시리아의 대장군 나아만이 수레를 타고 군인들을 거느리고 당당하게 이스라엘로 갔었습니다. 조그마한 소녀의 말을 듣고 믿음으로 행했다는 것 대단한 일인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 생각하지만 실제 당해보면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이스라엘은 원수의 나라인 것입니다. 가서 체포당할 수도 있습니다.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또 과연 엘리사가 문둥병을 고칠지 안고칠지를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녀의 말을 듣고 믿고서 실천한 것입니다. 믿음이란 이와 같이 눈에는 아무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모험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언제나 생사를 걸어놓은 모험인 것입니다. 천길만길 벼랑에 믿음으로 한발자국 들여놓는 것입니다. 그가 이스라엘 왕에게 그 편지를 내니 이스라엘 왕이 그 편지를 읽고 옷을 찢고 고함을 쳤습니다. “내가 하나님인가? 문둥병을 고치게. 시리아왕이 시비를 걸어서 우리하고 전쟁하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엘리사가 “그를 나에게 보내십시오.” 그래서 엘리사에게 보내니까 보부 당당하게 군인들을 끌고 나팔을 불고 엘리사 집에 가니까 조그만 초막에 엘리사가 나오지 않고 그 종 게하시가 허리가 구부정하게 나와서 굽신굽신 하면서 하는 말이 “우리 주인이 말씀하기를 저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목욕하라고 합니다.” 굉장한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자기는 그래도 시리아의 참모총장인데 대장군인데.. 주인이 나오지 않고 종이 나와서 허리를 굽신거리고 “요단강의 물로 일곱 번 목욕을 하라.” “사람을 무시해도 유분수가 있지. 내 생각에는 엘리사가 나와서 손을 들어 내 당체에 흔들고 기도를 해서 고쳐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모욕을 줄 수 있느냐? 목욕을 할 것 같으면 우리 시리아의 아바나강과 바르발강이 얼마나 맑고 좋으냐? 목욕해서 나을 바에야 그곳에 가서 내가 목욕하지!” 분을 내고 돌아서니까 그 종자들이 말했습니다. “아버지여, 대장군이여! 노하지 마소서. 선지자가 이보다 더 어려운 일 하라고 해도 했을 것 아닙니까? 요단강의 물로써 목욕하라는데 못할 것 뭐 있겠습니까? 하십시오.” 믿음은 동지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내가 믿음이 약할 때 옆에 있는 사람이 도와주면 굉장히 좋습니다. 그대로 돌아갈 뻔 당했는데 자기 보좌관들이 간청하는 바람에 그는 요단강으로 갔습니다. 요단강에 들어가서 흙물이 쫙 솟아오르는 곳에 그는 사성장군의 옷을 입고 퐁당 들어갔다 나옵니다. 이제 밖에서 헤아립니다. “두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여전히 문둥이입니다. “일곱 번!” 일곱 번째 올라오니까 문둥이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깨끗이 나았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 나아만장군도 이 어린 이스라엘 소녀의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까지 나와서 행동하는 믿음으로 나아갔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3. 살아 있는 믿음
여러분 믿음은 복제된 믿음과 행동으로 옮기는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형식은 다가지고 있어도 죽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 오늘날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믿습니다 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절망상황에 처해보면 자기의 몸을 날려 주님을 믿고 맡기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인간이 벼랑 끝에 설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믿음을 시험해 보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다해보는 것입니다. 자기가 의지 할 곳은 다 의지해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복제된 신앙인 것입니다. 형식적인 신앙인 것입니다. 목숨을 내어 건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나중에 벼랑 끝에 서서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 어찌할 수 없을 때 죽으면 죽으리다. 하고 주님을 믿을 때 주님이 기적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여행객들이 배에서 부산하게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귀부인이 발을 잘못 딛어서 그만 배에서 물로 빠졌습니다. 물에 빠져서 허우적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선원을 보고 “빨리 건져라! 건져라!” 합니다. 선원이 가만히 내려다보고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이 여자는 물에 푹 잠겼다가 솟구쳐 올라왔습니다. 또 두 번째 푹 잠겼다가 또 솟구쳐 올라왔습니다. 세 번째 물에 푹 빠지면서 그만 가라앉습니다. 그러자 쏜살같이 이 선원이 뛰어 들어가서 완전히 기가 빠지고 기절한 이 여인을 끌어안고 나와 가지고서 인공호흡을 시켜서 살려 놓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선원을 보고 고함을 쳤습니다. “무슨 악취미냐? 물에서 허두둥칠 때 건져내지 기절할 때까지 왜 기다리느냐? 그런 악취미가 어디 있느냐?”그때 그 선원이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모르는 소리하지 마십시오.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아 쥡니다. 물에 빠져 있을 때 내가 들어가면 그가 살아있을 때는 내 몸을 휘어 감으면 나도 같이 빠져 죽습니다. 절대 헤엄 못 칩니다. 그가 기운이 다 빠지고 기진맥진 했을 때 내 손에 자기를 맡길 때 내가 건질 수가 있습니다.” 그 말 맞습니다. 여러분이 살겠다고 발버둥 칠 때 하나님이 내려오면 하나님도 붙잡혀서 꼼짝을 못합니다. 기진맥진해서 하나님 손에 맡길 때까지 하나님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제는 수단과 방법을 다해보고 노력을 다해보고 이제는 할 수 없다. 나는 죽었다고 생각하고 기진맥진하고 주여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주님 뜻대로 하시옵소서. 주님께 내어 맡기면 그때야 주님께서 와서 건져 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49년의 목회생활 가운데 수많은 어려운 난관에 부딪힌 적이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인간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습니다. 아무리해도 인간은 불안하기 때문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다합니다. 수단과 방법과 노력을 다하고 나중에 아무리해도 사람으로써 해결할 수 없을 때 천부여 의지 없어서 주님께 옵니다.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주님 뜻대로 하시 옵소서 하면 꼭 그때 와서 주님이 건져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마음속에 ‘주님 취미가 너무 하십니다. 왜 떨어지면 낙동강 떨어지면 낙동강까지 기다립니까? 낙동강까지 오기 전에 좀 건져 주시지.’ 그래도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었습니다. 마지막까지 기다려서 내가 정말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느냐, 의지하지 않느냐를 테스트 해보시고 난 다음에 전적으로 주님을 믿을 때 주님의 능력과 권세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신앙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경험이 쌓이면 우리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내어 맡겨도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는 확신이 생기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점점 인간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사렙다의 과부가 죽음이냐, 삶이냐의 기로에 섰을 때 주님께 내어 맡긴 것입니다. 수리아의 대장군 나아만이 자기의 인격이 달려있고 명예가 달려있고 수리아의 명예가 달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종의 말을 듣고 엘리사를 믿고서 찾아온 것은 믿음의 결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마지막 벼랑에 처할 때 주님께서 찾아 오신다는 것을 알고 마지막까지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벼랑에 서기 전에 주님을 믿을 수 있으면 참 좋습니다. 그것은 노련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지만 초신자는 어찌할 수 없이 벌거벗어야 하나님 옷 달라고 부르짖게 되는 것입니다. 벌거벗기 전에는 자기가 검불을 가지고라도 스스로 옷을 만들어 입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전폭적으로 의지하는 자를 책임져 주시지 반신반의 하는 자는 주님께서 돌보아 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무엇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사렙다의 과부가 뭘 믿고 자기의 마지막 물 한 그릇과 떡 한 조각을 엘리야에게 내놓았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엘리야가 말하기를 “야훼께서 말씀하기를 네가 그렇게 하면 이 가뭄이 지날 때 까지 밀가루 통에 밀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기름병에 기름이 떨어지지 아니하리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말씀이 있기 때문에 믿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대장군 나아만도 자기 집에 있는 이스라엘 여종의 입을 통해서 엘리사 앞에 서면 병이 낫는다는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이 없이 믿는다는 것은 감각이요, 감정이요, 인간의 지혜요, 지식이요, 믿음은 아닌 것입니다. 믿음은 반드시 들음에서 나는 것입니다.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 없이 내 생각과 내 감각으로 믿는다는 것은 엉터리인 것입니다. 내가 보이는 것이 없고 들리는 것이 없고 만져지는 것이 없고 내 마음이 아무리 차고 냉정할지라도 말씀이 있으면 말씀에 서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저 하늘이 무너지고 이 땅이 꺼져도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으려면 말씀을 찾아 가십시오. 하나님을 믿으려면 말씀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은 말씀을 떠나서 우리에게 역사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는 간절히 사모하고 말씀을 달라고 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문제가 부딪히고 고통을 당할 때 아무리 믿으려고 발버둥쳐도 믿음이 오지 않지 않습니까? 하나님이여, 말씀을 주시옵소서. 나에게 말씀으로 찾아와 주시옵소서. 그리고 집회에 나가고 예배에 나오고 성경을 읽으면서 말씀을 달라고 간구할 때 성령께서 말씀을 우리 마음속에 심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요15:7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믿으면 말씀을 찾고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믿어지면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한 것입니다. 이루어지겠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크리스천은 말씀을 찾아서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미국을 뒤흔든 위대한 설교자 무디는 거듭난 이후에 깊은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산에 가서 열심히 기도해서 성령의 놀라운 은혜를 받았습니다. ‘내가 성령의 은혜를 이렇게 체험했으니 이제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겠다.’고 세상에 나와서 한달이 지나자 그만 세상으로 빠져들어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안 되겠구나! 위대한 주의 종들이 부흥회 이곳저곳 찾아가면서 부흥회에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부흥회에서 은혜를 받으면 이제 나는 믿음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부흥회에 은혜 받고 얼마 세월이 지나가지 않으니까 또다시 마음이 흔들리고 믿음이 약해졌습니다. 그는 탄식했습니다. 나는 화인 맞은가 보다. 나는 하나님이 버렸는가 보다. 믿기는 믿었는데 믿음을 계속할 수 없으니 어떻게 되겠는가. 탄식했습니다. 그러자 하루는 성경을 읽다가 롬 10:17을 읽게 된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가슴을 탁 쳤습니다. ‘아, 내가 은혜만 찾았지 말씀을 찾지 않았구나! 말씀을 매일같이 읽고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가지고 있었으면 내가 믿음이 굳건하게 설수 있겠구나!’ 그래서 그때부터 무디 목사님은 말씀을 가슴에 품고 다녔습니다. 항상 말씀을 읽고,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과 더불어 사니까 그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고 만세반석에 섰습니다.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나의 사랑하는 故신현균 목사님이 40일 금식기도를 하고 난 다음에 나에게 연락을 했어요. “조 목사 빨리 오너라. 날 좀 만나자.” 만나니까 “나하고 자네하고 차원이 다르다”고 그래요. “자네는 40일 금식기도 안했지만 나는 40일 금식기도를 해서 나는 성결하게 되었다. 이제 나는 거룩하다. 나는 이제는 세상과 완전히 끊었다. 그러므로 내 근처도 오지 마라. 너는 세상적인 사람이다.” 그래서 내가 ‘며칠 가는가 한번 보자.’ 며칠 동안은 정말 거룩하고 신령하게 지내더니만 한 한달 쯤 지나고 난 다음 날보고 하는 말이 “조 목사 날 좀 만나자.” 보니까 “나 효과 다 떨어져 버렸어. 한 한달 동안 신령하더니만 이제는 온 세상이 내 속에 들어오고 나도 세상에 들어오고 이럴 수 있느냐?” 그래서 “여보시오. 당신 40일 금식기도 한 것이나 40일 금식기도 안한 사람이나 별 차이 없지 않소? 문제는 말씀에 있는 거요. 40일 금식기도 하는 것 좋아요. 그러나 말씀에 서야 되고 금식기도 못했어도 말씀에 서야 되고 말씀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말씀에 잡히면 신령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제가 말한 적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를 승리케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우리가 믿음을 얻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말씀을 찾아 가십시오. 성경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 7천 가지의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다 주옥같은 말씀인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말씀에 서서 원하는 대로 구하라. 이루리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해야 될 것은 믿음의 결단을 내리고 행동하고 순종하는 믿음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결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늘 중간에 서서 이래 저래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타협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안 믿으려면 안 믿고, 믿으려면 믿고, 뜨거우면 뜨겁고, 차면 차갑고 화끈해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사로의 무덤가에 가셨을 때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났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를 보고 무덤 문을 옮겨 놓아 라고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를 보고는 “마르다야, 마리아야, 광신자가 되지 말아라. 네 오라버니가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나는데 무덤 문을 옮겨 놓다니. 그런 일이 어디 있느냐?” 그래서 마르다가 울상이 되어서 예수님을 쳐다보고 “주여, 우리 오라버니가 무덤에 들어간 지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나나이다. 그런데 왜 무덤의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합니까?”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결단을 못 내렸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얼굴을 붉히고 주먹을 불끈 쥐고 고함을 쳤습니다. “마르다여, 내가 네게 말하노니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믿음이란 생각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결단을 내리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마르다가 생각하니 결단을 하고 행동을 하려니 그 주위에 보는 수많은 유대인들이 나를 광신자라고 비웃을 것이다. 어찌할 것이냐. 타협할 것이냐, 결단을 내릴 것이냐. 그는 마리아와 함께 결단을 내렸습니다. “욕을 먹든, 미쳤다고 하든, 유대인의 회당에서 쫓겨나든 예수님 말씀대로 순종하자.” 그래서 두 처녀가 돌문에 매달렸습니다. 큰 돌이라 움직이지 않아요. 그가 돌을 움직이려고 매달려서 발톱이 떨어져 나가고 몸이 찢기고 피가 흐르고 그래도 아무도 안도와 줍니다. 예수님도 안도와 주고 유대인들도 안도와 줍니다. 왜냐, 믿음은 우리가 행동하는 결단으로 보여줘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정말 믿으면 끝까지 실천하는 것입니다. 행동하는 믿음을 결단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명령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여러분이 결단을 내려서 믿음을 실천할 때까지 안도와 줍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해야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여러분 눈에 보여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숨어있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어린 아기를 가진 부인이 동에 가서 “내 아기를 동네에 호적등록을 하려고 합니다.” “아기가 아들입니까? 딸입니까?” “아직 몰라요. 내 배속에 있어요.” 그러면 뭐라고 합니까? “낳거든 오십시오.” “아이, 내 배속에 있는데요?” “그러나 배속에 있는 아기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낳거든 아들인지, 딸인지 이름 지어서 오십시오.”라고 그럴 것입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보여줘.” “배속에 있습니다.” “그것 나는 못 믿어.” “내놓아. 행동으로 내놓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야. 보여 다오.” 주님은 믿음을 보시고 역사하는 것입니다. 나사로를 살리기 전에 마르다와 마리아가 믿음을 보여 주기를 원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들어갔을 때 수많은 사람이 인산인해로 진을 쳐서 예수님 앞에 더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중풍병 환자가 친구들에게 의해서 들것에 들려서 왔으나 예수님 앞에 나올 수가 없으므로 지붕에 올라가서 지붕을 뜯고 그 침대를 내려놓았던 것입니다. 남의 집 지붕을 뚫고 침대를 내려놓을 때는 얼마나 행동하는 믿음인 것입니까? 집을 통째로 헐었으니까 집값을 지불해야 될 것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앉아서 계셨습니다. 먼지가 쏟아지고 매로써 지붕을 때리니 때리는 쿵쿵 소리가 나도 주님은 꾸짖지 않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고함을 쳤습니다. “왜 남의 집을 허느냐? 왜 매로 때리느냐? 이 먼저를 왜 날리느냐? 그만두라”고 고함을 쳐도 예수님은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 침대가 줄에 달려서 예수님 앞에 내려왔을 때 성경은 말씀하기를 예수님이 그 사람의 믿음을 보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주님은 믿음을 끝까지 참아 보시고 난 다음 “네 믿음대로 될찌어다. 침상을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라!” 기적이 일어나고 만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도 있는 힘을 다해서 초죽음이 될 때까지 돌을 흔들어서 옮겨 놓으니까 썩은 냄새가 확 무덤에서 납니다. 그때 예수님이 무덤 안에 서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하시니 죽은 나사로가 수의를 동인 채 나온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실천하면 주님이 기적을 행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타협하고 이것도 저것도 안하면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적이 일어날 것을 언제나 기대하고 감사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은 기적이 없으면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기적인 것입니다.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난 것이 기적이고, 요단강에서 세례 받고 성령 받은 것이 기적이고, 주님의 일생은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문둥이를 깨끗이 하고, 파도를 잠잠케 하시고, 오병이어로 5천명 먹이고 열 두 바구니 남기시고,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그렇게 한 일절 모든 것이 기적인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기적을 빼놓으면 아무것도 믿을 것이 없습니다. 성경에 기적을 빼놓으면 겉장과 끝장밖에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어요. 어떤 현대주의 목사님이 설교를 하는데 그 교회 교인이 출석을 했습니다. 목사님이 성경을 펼쳐놓고 “이것은 이야기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역사다. 이것은 이스라엘인이 지은 시다. 이것은 소설이다. 이것은 전해온 이야기다.” 그럴 때마다 성경을 찢기 시작한 것입니다. 1년을 교회 나오고 난 다음에 성경 껍데기만 들고 목사님께 나와서 “목사님, 안녕히 계십시오. 나는 이제 교회를 떠납니다.” “아니 당신같이 착한 교인이 왜 떠납니까?” “1년 동안 목사님 설교를 듣고 나니까 모두다 성경은 소설이고, 이야기고, 신화고, 지어낸 말이고 하나도 믿을 것이 없으므로 다 찢어 보니까 겉장만 남았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기적을 제켜 버리면 겉장만 남습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성경은 모두다 기적의 이야기요, 기적이 일어난 이야기인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기적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감사하지 아니하면 믿을 것이 없어요. 우리가 회개하고 거듭나서 새사람이 되는 것 기적인 것입니다. 성령 받는 것 기적인 것입니다. 병 낫는 것 기적인 것입니다. 저주에서 해방되는 것 기적인 것입니다. 죽어 천당 가는 것 기적인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모든 신앙생활에 적은 기적이나 큰 기적이나 기적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할 바에야 믿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기적의 종교라는 것은 일본의 우치무라 간조라는 신학자가 한말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기적이다. 그뿐만 아니라 성경에서 만일 기적을 제외한다면 성경은 표지 2장만 남을 것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기적은 언제 일어날까? 영국의 웨스터 민스터 사원에 들어가면 정면에 이런 구호가 붙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위대한 일을 기대하는 것이 바로 기적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우리 집안에 가족들이 구원받을 것을 기대하는 것은 기적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가족이 병 낫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기적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망한 사업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는 것은 기적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셔서 오늘도 우리 가운데 주님은 기적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결론>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단히 종교적이었으나 죽은 신앙, 형식적인 신앙이었습니다. 신앙에 대한 지식을 알고 의식은 집행하나 살아있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엘리야 때 가뭄이 와도 하나님의 기적을 믿지 않았습니다. 엘리사 시대 많은 나병환자들이 있어도 치유 받을 것을 믿지 않았었습니다. 행동하는 믿음이 없는 종교는 의식에 묶인 죽은 박제품에 불과한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속에 어떤 믿음이 있든지 그것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예수를 믿고 교회 왔다 갔다 했는지 그것 인정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주님 앞에 나오면 말합니다. 주님께서 “네 믿음을 보여 다오.” “주여, 우리 가족을 구원해 주시옵소서.” “네 믿음을 보여 다오.” 어떻게 보여 줍니까? “네 가족들을 교회에 데리고 나오라. 네가. 구원은 내가 하지만 데리고 나오는 것은 네가 해야 되는 것이다.” “주여,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십일조와 헌물을 심어라. 그러면 축복은 내가 한다.” “그러지 말고 복부터 먼저 주세요.” “안보여주는 믿음에 내가 기적을 행할 수가 없느니라.” 주님은 여러분의 믿음을 보여 달라고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심의 무덤돌문을 옮겨 놓아라. 그러면 내가 기적을 행하마.” 여러분은 사회적인 체면 때문에 사람들의 비난을 두려워해서 마음에 불안과 공포가 있어서 믿음을 실천하지 않고 머뭇거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주님도 머뭇거리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것이냐, 저것이냐 확실히 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차면 차고, 더우면 더우라. 미지근하면 뱉어 버리겠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 사렙다의 과부처럼 받아들이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굶어 죽을지라도 믿어보자. 수리아의 대장 나아만처럼 명예와 권세를 다 잃어버릴지라도 이스라엘 적국의 나라에 가서 엘리사에게 몸을 맡겨 보자. 실천하는 믿음, 행동하는 믿음, 이것이 살아있는 믿음이요, 이런 믿음이 있으면 적으면 적은 데로, 크면 큰 데로 오늘날도 주님은 기적을 행하셔서 여러분의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역사하는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너무나 박제된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 왔다 갔다 하고 형식적이고 의식적인 신앙을 집행해도 마음속에 감춰 놓은 믿음을 가지고 있고 행동하는 믿음을 갖고 있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주의 말씀을 들었으면 그것을 믿고 실천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적게 실천하면 적게 기적을 체험하고 많이 실천하면 많이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도 주님은 우리 마음 문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믿음을 실천하면 내가 그에게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 가짜 신자 되지 말고 진짜 신자가 되게 도와 주시 옵시고 바라보는 신자 되지 말고 행동하는 신자 되게 도와주시옵기 간절히 바라옵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아멘
<서론>
“살아 있는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독수리나 곰을 박제로 만들어 전시해 놓은 것을 우리가 간혹 보게 됩니다. 박제된 독수리나 곰은 살아 있을 때와 꼭 같습니다. 독수리는 눈이 반짝반짝하고 곰은 발톱을 내고 지금이라고 뛰어들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들은 죽었고 생명이 없어 자유로이 움직이지 못합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식적인 박제된 믿음은 종교적인 형식이나 의식은 잘 행하되 생명력이 없습니다. 성령께서 함께 역사하시는 신앙이 아니면 신앙은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렛 회당에서 말씀하신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본론>
1. 엘리야와 시돈 땅 사르밧 과부의 기적
3년 6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고 수많은 사람이 굶주려 죽을 때 이스라엘에 수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그들은 박제된 신앙을 가졌지 살아있는 순종하는 믿음을 안 가졌습니다. 오직 이방 땅 시돈에 있는 사렙다의 과부만이 살아있는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엘리야가 그곳에 보냄을 받아서 기적을 행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엘리사시대에 이스라엘에 수많은 나병 환자가 있었으나 한 사람도 살아있는 믿음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깨끗함을 받지 못했으나 이방 나라 수리아의 대장 나아만은 살아있는 믿음을 가지고 엘리사를 찾아와서 고침을 받았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회당장 회당의 사람들은 너무나 화가 나서 예수님을 언덕에 밀어 죽이려고 했으나 주님께서 피해서 나가셨다는 말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주님께서는 3년 6개월 동안 가뭄이 와서 먹을 것이 없을 때 이스라엘의 수많은 과부에게는 안가고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과부에게만 엘리야를 보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가 극심하여 아합 왕 때 하나님께서 3년 6개월 동안 가뭄의 심판을 보낸 것입니다. 그때에 온 천하가 굶주림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시돈 땅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돈 땅에도 역시 이방 땅이지만 가뭄이 와서 수많은 사람이 굶주려서 절망에 처했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시돈 땅 성문 곁에 가니까 한 과부가 나무를 줍고 있습니다. “무엇을 하느냐?” “나무를 주어서 마지막 남은 밀가루와 기름을 가지고 빵을 만들어서 내 아들과 나누어 먹고 죽으려고 합니다.” 엘리야가 가만히 보고 “글쎄. 그것은 그렇게 해도 좋겠지만 가서 물 한 사발을 내게 갖다 주시오. 나는 엘리야요.” 그러니까 그 과부가 나무 잎사귀를 줍다말고 물을 길러 가는데 “조금 기다리세요. 기다리세요. 물만 가져 오지 말고 빵을 만들어서 내게 먼저 가져 오세요.” 깜짝 놀라서 뒤돌아 보았 습니다. 마지막 빵 하나 만들어서 자기와 자식하고 나눠 먹겠다고 했는데 이것을 가지고서 빵을 만들어 엘리야에게 먼저 가져 오라니 어떻게 된 일인 것입니까? 망연자실하여 쳐다보니까 엘리야가 “만일 당신이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가뭄이 지날 때까지 밀가루 통에 밀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기름병에 기름이 떨어지지 아니할 것입니다.”하나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받아서 믿든 안 믿든 그것은 사렙다의 과부의 책임입니다. 사렙다의 과부는 극한 상황에 처해있는데 그 절박한 상황 속에서 엘리야를 만났는데 엘리야가 너무나 어려운 부탁을 한 것입니다. 아들은 떡을 달라고 몸부림치고 우는데 물 한사발도 구하기 힘든데 마지막 밀가루와 기름으로 떡을 만들어서 엘리야에게 먼저 가져오라니 이 일이 웬일입니까? 과부는 어찌할 찌 몰라서 당황했으나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는 사람이었고 엘리야가 하나님의 종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결단을 내렸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주어졌으므로 말씀을 믿든 안 믿든 그것은 자기가 선택할 것인데 사렙다의 과부는 말씀을 선택했습니다. 수많은 이스라엘의 과부들은 말씀을 듣고도 말씀을 저버렸습니다. 사렙다의 과부는 이방 여인이지만 하나님이 종, 엘리야의 말을 듣고 그 말씀을 믿기로 작정을 하고 그는 가서 물 한 사발과 빵을 만들어서 가져오는데 어린 아들이 따라오면서 떡을 달라고 몸부림치고 웁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뿌리치고 물 한 사발과 떡을 엘리야에게 주었습니다. 우리 생각하기는 엘리야가 받아서 도로 돌려줄 것 같이 생각했는데 그 과부와 어린아이가 보는 앞에서 엘리야는 그 떡을 혼자서 다 먹고 그 물 한 사발을 다 꿀꺽꿀꺽 마셨습니다. 야박하게 보이지요. 너무나 사랑이 없다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를 통해서 과부의 신앙을 시험하고 계신 것입니다. 네가 정말 백척간두에서 진일보로 한발자국, 벼랑에서 믿음의 발을 내딛느냐, 안 내딛느냐 보시는 것입니다. 정말 믿음으로 목숨을 내어 놓고 순종하느냐, 안하느냐를 시험해 보신 것입니다. 과연 그 이후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서 과부가 밀가루 통에 가보니까 밀가루가 끊이지 않고 흘러나오고 기름병에 기름이 계속 흘러 나와서 그 가뭄이 다 지날 때까지 과부와 그 어린아이와 엘리야가 한집에 살면서 배고프지 않고 넉넉히 먹고 가뭄을 이길 수가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나서 실천하는 믿음에 대해서 기적을 보여준 것입니다. 행동하는 믿음이란 쉽게 보이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서커스가 외줄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것 보셨지요? 미국의 유명한 블론딘 이라는 줄타기 서커스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나이아가라 폭포를 미국과 캐나다에 걸쳐서 줄을 걸쳐 놓고 장대를 들고 지나갔었습니다. 그리고 올 때는 조그마한 손수레를 허리에 걸고 그 줄을 타고서 건너왔습니다. 밑에는 천길만길 폭포가 쏟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찔합니다. 캐나다 편에서나 미국 편에 수많은 군중들이 모여서 박수를 쳤습니다. 그때 그가 미국 편에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여러분, 이 수레에 내가 사람을 태워서 이 줄을 타고 캐나다 편으로 건너갈 수 있다고 여러분 믿으십니까?" 모두 다 "믿습니다." "그러면 누구 자원하는 사람 여기 수레에 타십시오." 한 사람도 안탔습니다. 여러분 믿음이란 것은 벼랑에서 뛰어 내리는 것이 믿음인데 모두다 이 사람이 손수레에 사람을 싣고 그 외줄을 타고 나이아가라 폭포를 건너갈 것을 믿는다고 했지만 수레에 자원해서 올라타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우리 믿음은 그와 같은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마음으로 믿는다고 하지만 행동을 옮긴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렙다의 과부가 엘리야에게 물 한 그릇과 빵을 만들어 주었다는 것 우리가 읽을 때 마음으로 쉽게 생각합니다. “그것 나라도 물 달라고 하면 물주고 하나님의 종이니까 빵을 만들어서 대접 하는 것 당연한 이치지. 그것 어려울 것 있느냐.” 그러나 실제는 너무나 배가 고프고 너무나 절박한 상황에 과부 혼자도 아닌 아들조차 달려서 떡을 달라고 우는데 엘리야가 와서 물 한 그릇과 떡 한쪽을 만들어 먼저 가져오라고 그렇게 하면 가뭄이 끝날 것 같이 밀가루 통에 밀가루가 흘러나오고 기름병에 기름이 흘러 나올 것이라고 말을 했지만 그것이 될지 안 될지 어떻게 알아요.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말하면 믿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직접 여러분 집에 와서 달라면 나는 달라요. 나는 못해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렙다의 과부가 엘리야보고 “당신이나 잘 먹고 잘사십시오. 나는 이 떡을 만들어서 당신에게 줄 수 없어. 떡을 먹고 아들과 나는 마지막 죽겠소.” 그렇게 했으면 그대로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의 말을 듣고 이 사렙다의 과부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했습니다. 하나님 먼저 대접하고 그 다음 살겠다. 살아도 하나님 먼저, 죽어도 하나님 먼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실천한 결과에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2. 엘리사와 수리아 대장군 나아만의 나병 치유
엘리사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에 문둥병자가 굉장히 많았으나 아무도 살아계신 하나님께 기적을 일어날 것을 믿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원수의 나라 수리아에 대장군 나아만은 위대한 장군이었으나 그 옷 속으로는 몸이 문드러지고 썩어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외면적으로 화려하나 내적으로는 썩어져가는 문둥병 환자였습니다. 절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수리아군인들이 국경에 나가서 이스라엘 처녀 한사람을 잡아와서 그 집에 도우미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 처녀가 그 주인의 비참함을 보고 주모에게 말하기를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의 엘리사에게 갔으면 참 좋겠습니다. 엘리사가 그를 고쳐 주었을 것입니다.” 도우미 말을 어떻게 믿습니까? 그러나 성경에는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했는데 도우미의 말을 듣고 주모가 나아만에게 말을 하니 나아만이 귀가 번쩍했습니다. 그가 임금님에게 가서 “이스라엘에는 엘리사가 있어서 문둥병을 고친다고 하니 나에게 말미를 주어서 이스라엘에 가서 문둥병을 고침을 받고 오겠습니다. 편지하나 써주십시오.” 시리아의 왕이 이스라엘 왕에게 “내 부하를 보내니 문둥병을 고쳐 주십시오.” 그 편지를 받아 가지고서 시리아의 대장군 나아만이 수레를 타고 군인들을 거느리고 당당하게 이스라엘로 갔었습니다. 조그마한 소녀의 말을 듣고 믿음으로 행했다는 것 대단한 일인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 생각하지만 실제 당해보면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이스라엘은 원수의 나라인 것입니다. 가서 체포당할 수도 있습니다.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또 과연 엘리사가 문둥병을 고칠지 안고칠지를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녀의 말을 듣고 믿고서 실천한 것입니다. 믿음이란 이와 같이 눈에는 아무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모험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언제나 생사를 걸어놓은 모험인 것입니다. 천길만길 벼랑에 믿음으로 한발자국 들여놓는 것입니다. 그가 이스라엘 왕에게 그 편지를 내니 이스라엘 왕이 그 편지를 읽고 옷을 찢고 고함을 쳤습니다. “내가 하나님인가? 문둥병을 고치게. 시리아왕이 시비를 걸어서 우리하고 전쟁하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엘리사가 “그를 나에게 보내십시오.” 그래서 엘리사에게 보내니까 보부 당당하게 군인들을 끌고 나팔을 불고 엘리사 집에 가니까 조그만 초막에 엘리사가 나오지 않고 그 종 게하시가 허리가 구부정하게 나와서 굽신굽신 하면서 하는 말이 “우리 주인이 말씀하기를 저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목욕하라고 합니다.” 굉장한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자기는 그래도 시리아의 참모총장인데 대장군인데.. 주인이 나오지 않고 종이 나와서 허리를 굽신거리고 “요단강의 물로 일곱 번 목욕을 하라.” “사람을 무시해도 유분수가 있지. 내 생각에는 엘리사가 나와서 손을 들어 내 당체에 흔들고 기도를 해서 고쳐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모욕을 줄 수 있느냐? 목욕을 할 것 같으면 우리 시리아의 아바나강과 바르발강이 얼마나 맑고 좋으냐? 목욕해서 나을 바에야 그곳에 가서 내가 목욕하지!” 분을 내고 돌아서니까 그 종자들이 말했습니다. “아버지여, 대장군이여! 노하지 마소서. 선지자가 이보다 더 어려운 일 하라고 해도 했을 것 아닙니까? 요단강의 물로써 목욕하라는데 못할 것 뭐 있겠습니까? 하십시오.” 믿음은 동지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내가 믿음이 약할 때 옆에 있는 사람이 도와주면 굉장히 좋습니다. 그대로 돌아갈 뻔 당했는데 자기 보좌관들이 간청하는 바람에 그는 요단강으로 갔습니다. 요단강에 들어가서 흙물이 쫙 솟아오르는 곳에 그는 사성장군의 옷을 입고 퐁당 들어갔다 나옵니다. 이제 밖에서 헤아립니다. “두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여전히 문둥이입니다. “일곱 번!” 일곱 번째 올라오니까 문둥이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깨끗이 나았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 나아만장군도 이 어린 이스라엘 소녀의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까지 나와서 행동하는 믿음으로 나아갔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3. 살아 있는 믿음
여러분 믿음은 복제된 믿음과 행동으로 옮기는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형식은 다가지고 있어도 죽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 오늘날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믿습니다 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절망상황에 처해보면 자기의 몸을 날려 주님을 믿고 맡기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인간이 벼랑 끝에 설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믿음을 시험해 보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다해보는 것입니다. 자기가 의지 할 곳은 다 의지해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복제된 신앙인 것입니다. 형식적인 신앙인 것입니다. 목숨을 내어 건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나중에 벼랑 끝에 서서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 어찌할 수 없을 때 죽으면 죽으리다. 하고 주님을 믿을 때 주님이 기적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여행객들이 배에서 부산하게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귀부인이 발을 잘못 딛어서 그만 배에서 물로 빠졌습니다. 물에 빠져서 허우적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선원을 보고 “빨리 건져라! 건져라!” 합니다. 선원이 가만히 내려다보고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이 여자는 물에 푹 잠겼다가 솟구쳐 올라왔습니다. 또 두 번째 푹 잠겼다가 또 솟구쳐 올라왔습니다. 세 번째 물에 푹 빠지면서 그만 가라앉습니다. 그러자 쏜살같이 이 선원이 뛰어 들어가서 완전히 기가 빠지고 기절한 이 여인을 끌어안고 나와 가지고서 인공호흡을 시켜서 살려 놓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선원을 보고 고함을 쳤습니다. “무슨 악취미냐? 물에서 허두둥칠 때 건져내지 기절할 때까지 왜 기다리느냐? 그런 악취미가 어디 있느냐?”그때 그 선원이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모르는 소리하지 마십시오.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아 쥡니다. 물에 빠져 있을 때 내가 들어가면 그가 살아있을 때는 내 몸을 휘어 감으면 나도 같이 빠져 죽습니다. 절대 헤엄 못 칩니다. 그가 기운이 다 빠지고 기진맥진 했을 때 내 손에 자기를 맡길 때 내가 건질 수가 있습니다.” 그 말 맞습니다. 여러분이 살겠다고 발버둥 칠 때 하나님이 내려오면 하나님도 붙잡혀서 꼼짝을 못합니다. 기진맥진해서 하나님 손에 맡길 때까지 하나님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제는 수단과 방법을 다해보고 노력을 다해보고 이제는 할 수 없다. 나는 죽었다고 생각하고 기진맥진하고 주여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주님 뜻대로 하시옵소서. 주님께 내어 맡기면 그때야 주님께서 와서 건져 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49년의 목회생활 가운데 수많은 어려운 난관에 부딪힌 적이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인간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습니다. 아무리해도 인간은 불안하기 때문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다합니다. 수단과 방법과 노력을 다하고 나중에 아무리해도 사람으로써 해결할 수 없을 때 천부여 의지 없어서 주님께 옵니다.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주님 뜻대로 하시 옵소서 하면 꼭 그때 와서 주님이 건져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마음속에 ‘주님 취미가 너무 하십니다. 왜 떨어지면 낙동강 떨어지면 낙동강까지 기다립니까? 낙동강까지 오기 전에 좀 건져 주시지.’ 그래도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었습니다. 마지막까지 기다려서 내가 정말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느냐, 의지하지 않느냐를 테스트 해보시고 난 다음에 전적으로 주님을 믿을 때 주님의 능력과 권세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신앙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경험이 쌓이면 우리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내어 맡겨도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는 확신이 생기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점점 인간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사렙다의 과부가 죽음이냐, 삶이냐의 기로에 섰을 때 주님께 내어 맡긴 것입니다. 수리아의 대장군 나아만이 자기의 인격이 달려있고 명예가 달려있고 수리아의 명예가 달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종의 말을 듣고 엘리사를 믿고서 찾아온 것은 믿음의 결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마지막 벼랑에 처할 때 주님께서 찾아 오신다는 것을 알고 마지막까지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벼랑에 서기 전에 주님을 믿을 수 있으면 참 좋습니다. 그것은 노련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지만 초신자는 어찌할 수 없이 벌거벗어야 하나님 옷 달라고 부르짖게 되는 것입니다. 벌거벗기 전에는 자기가 검불을 가지고라도 스스로 옷을 만들어 입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전폭적으로 의지하는 자를 책임져 주시지 반신반의 하는 자는 주님께서 돌보아 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무엇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사렙다의 과부가 뭘 믿고 자기의 마지막 물 한 그릇과 떡 한 조각을 엘리야에게 내놓았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엘리야가 말하기를 “야훼께서 말씀하기를 네가 그렇게 하면 이 가뭄이 지날 때 까지 밀가루 통에 밀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기름병에 기름이 떨어지지 아니하리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말씀이 있기 때문에 믿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대장군 나아만도 자기 집에 있는 이스라엘 여종의 입을 통해서 엘리사 앞에 서면 병이 낫는다는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이 없이 믿는다는 것은 감각이요, 감정이요, 인간의 지혜요, 지식이요, 믿음은 아닌 것입니다. 믿음은 반드시 들음에서 나는 것입니다.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 없이 내 생각과 내 감각으로 믿는다는 것은 엉터리인 것입니다. 내가 보이는 것이 없고 들리는 것이 없고 만져지는 것이 없고 내 마음이 아무리 차고 냉정할지라도 말씀이 있으면 말씀에 서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저 하늘이 무너지고 이 땅이 꺼져도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으려면 말씀을 찾아 가십시오. 하나님을 믿으려면 말씀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은 말씀을 떠나서 우리에게 역사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는 간절히 사모하고 말씀을 달라고 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문제가 부딪히고 고통을 당할 때 아무리 믿으려고 발버둥쳐도 믿음이 오지 않지 않습니까? 하나님이여, 말씀을 주시옵소서. 나에게 말씀으로 찾아와 주시옵소서. 그리고 집회에 나가고 예배에 나오고 성경을 읽으면서 말씀을 달라고 간구할 때 성령께서 말씀을 우리 마음속에 심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요15:7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믿으면 말씀을 찾고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믿어지면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한 것입니다. 이루어지겠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크리스천은 말씀을 찾아서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미국을 뒤흔든 위대한 설교자 무디는 거듭난 이후에 깊은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산에 가서 열심히 기도해서 성령의 놀라운 은혜를 받았습니다. ‘내가 성령의 은혜를 이렇게 체험했으니 이제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겠다.’고 세상에 나와서 한달이 지나자 그만 세상으로 빠져들어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안 되겠구나! 위대한 주의 종들이 부흥회 이곳저곳 찾아가면서 부흥회에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부흥회에서 은혜를 받으면 이제 나는 믿음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부흥회에 은혜 받고 얼마 세월이 지나가지 않으니까 또다시 마음이 흔들리고 믿음이 약해졌습니다. 그는 탄식했습니다. 나는 화인 맞은가 보다. 나는 하나님이 버렸는가 보다. 믿기는 믿었는데 믿음을 계속할 수 없으니 어떻게 되겠는가. 탄식했습니다. 그러자 하루는 성경을 읽다가 롬 10:17을 읽게 된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가슴을 탁 쳤습니다. ‘아, 내가 은혜만 찾았지 말씀을 찾지 않았구나! 말씀을 매일같이 읽고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가지고 있었으면 내가 믿음이 굳건하게 설수 있겠구나!’ 그래서 그때부터 무디 목사님은 말씀을 가슴에 품고 다녔습니다. 항상 말씀을 읽고,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과 더불어 사니까 그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고 만세반석에 섰습니다.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나의 사랑하는 故신현균 목사님이 40일 금식기도를 하고 난 다음에 나에게 연락을 했어요. “조 목사 빨리 오너라. 날 좀 만나자.” 만나니까 “나하고 자네하고 차원이 다르다”고 그래요. “자네는 40일 금식기도 안했지만 나는 40일 금식기도를 해서 나는 성결하게 되었다. 이제 나는 거룩하다. 나는 이제는 세상과 완전히 끊었다. 그러므로 내 근처도 오지 마라. 너는 세상적인 사람이다.” 그래서 내가 ‘며칠 가는가 한번 보자.’ 며칠 동안은 정말 거룩하고 신령하게 지내더니만 한 한달 쯤 지나고 난 다음 날보고 하는 말이 “조 목사 날 좀 만나자.” 보니까 “나 효과 다 떨어져 버렸어. 한 한달 동안 신령하더니만 이제는 온 세상이 내 속에 들어오고 나도 세상에 들어오고 이럴 수 있느냐?” 그래서 “여보시오. 당신 40일 금식기도 한 것이나 40일 금식기도 안한 사람이나 별 차이 없지 않소? 문제는 말씀에 있는 거요. 40일 금식기도 하는 것 좋아요. 그러나 말씀에 서야 되고 금식기도 못했어도 말씀에 서야 되고 말씀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말씀에 잡히면 신령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제가 말한 적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를 승리케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우리가 믿음을 얻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말씀을 찾아 가십시오. 성경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 7천 가지의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다 주옥같은 말씀인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말씀에 서서 원하는 대로 구하라. 이루리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해야 될 것은 믿음의 결단을 내리고 행동하고 순종하는 믿음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결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늘 중간에 서서 이래 저래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타협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안 믿으려면 안 믿고, 믿으려면 믿고, 뜨거우면 뜨겁고, 차면 차갑고 화끈해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사로의 무덤가에 가셨을 때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났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를 보고 무덤 문을 옮겨 놓아 라고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를 보고는 “마르다야, 마리아야, 광신자가 되지 말아라. 네 오라버니가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나는데 무덤 문을 옮겨 놓다니. 그런 일이 어디 있느냐?” 그래서 마르다가 울상이 되어서 예수님을 쳐다보고 “주여, 우리 오라버니가 무덤에 들어간 지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나나이다. 그런데 왜 무덤의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합니까?”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결단을 못 내렸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얼굴을 붉히고 주먹을 불끈 쥐고 고함을 쳤습니다. “마르다여, 내가 네게 말하노니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믿음이란 생각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결단을 내리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마르다가 생각하니 결단을 하고 행동을 하려니 그 주위에 보는 수많은 유대인들이 나를 광신자라고 비웃을 것이다. 어찌할 것이냐. 타협할 것이냐, 결단을 내릴 것이냐. 그는 마리아와 함께 결단을 내렸습니다. “욕을 먹든, 미쳤다고 하든, 유대인의 회당에서 쫓겨나든 예수님 말씀대로 순종하자.” 그래서 두 처녀가 돌문에 매달렸습니다. 큰 돌이라 움직이지 않아요. 그가 돌을 움직이려고 매달려서 발톱이 떨어져 나가고 몸이 찢기고 피가 흐르고 그래도 아무도 안도와 줍니다. 예수님도 안도와 주고 유대인들도 안도와 줍니다. 왜냐, 믿음은 우리가 행동하는 결단으로 보여줘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정말 믿으면 끝까지 실천하는 것입니다. 행동하는 믿음을 결단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명령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여러분이 결단을 내려서 믿음을 실천할 때까지 안도와 줍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해야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여러분 눈에 보여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숨어있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어린 아기를 가진 부인이 동에 가서 “내 아기를 동네에 호적등록을 하려고 합니다.” “아기가 아들입니까? 딸입니까?” “아직 몰라요. 내 배속에 있어요.” 그러면 뭐라고 합니까? “낳거든 오십시오.” “아이, 내 배속에 있는데요?” “그러나 배속에 있는 아기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낳거든 아들인지, 딸인지 이름 지어서 오십시오.”라고 그럴 것입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보여줘.” “배속에 있습니다.” “그것 나는 못 믿어.” “내놓아. 행동으로 내놓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야. 보여 다오.” 주님은 믿음을 보시고 역사하는 것입니다. 나사로를 살리기 전에 마르다와 마리아가 믿음을 보여 주기를 원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들어갔을 때 수많은 사람이 인산인해로 진을 쳐서 예수님 앞에 더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중풍병 환자가 친구들에게 의해서 들것에 들려서 왔으나 예수님 앞에 나올 수가 없으므로 지붕에 올라가서 지붕을 뜯고 그 침대를 내려놓았던 것입니다. 남의 집 지붕을 뚫고 침대를 내려놓을 때는 얼마나 행동하는 믿음인 것입니까? 집을 통째로 헐었으니까 집값을 지불해야 될 것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앉아서 계셨습니다. 먼지가 쏟아지고 매로써 지붕을 때리니 때리는 쿵쿵 소리가 나도 주님은 꾸짖지 않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고함을 쳤습니다. “왜 남의 집을 허느냐? 왜 매로 때리느냐? 이 먼저를 왜 날리느냐? 그만두라”고 고함을 쳐도 예수님은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 침대가 줄에 달려서 예수님 앞에 내려왔을 때 성경은 말씀하기를 예수님이 그 사람의 믿음을 보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주님은 믿음을 끝까지 참아 보시고 난 다음 “네 믿음대로 될찌어다. 침상을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라!” 기적이 일어나고 만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도 있는 힘을 다해서 초죽음이 될 때까지 돌을 흔들어서 옮겨 놓으니까 썩은 냄새가 확 무덤에서 납니다. 그때 예수님이 무덤 안에 서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하시니 죽은 나사로가 수의를 동인 채 나온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실천하면 주님이 기적을 행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타협하고 이것도 저것도 안하면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적이 일어날 것을 언제나 기대하고 감사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은 기적이 없으면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기적인 것입니다.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난 것이 기적이고, 요단강에서 세례 받고 성령 받은 것이 기적이고, 주님의 일생은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문둥이를 깨끗이 하고, 파도를 잠잠케 하시고, 오병이어로 5천명 먹이고 열 두 바구니 남기시고,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그렇게 한 일절 모든 것이 기적인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기적을 빼놓으면 아무것도 믿을 것이 없습니다. 성경에 기적을 빼놓으면 겉장과 끝장밖에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어요. 어떤 현대주의 목사님이 설교를 하는데 그 교회 교인이 출석을 했습니다. 목사님이 성경을 펼쳐놓고 “이것은 이야기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역사다. 이것은 이스라엘인이 지은 시다. 이것은 소설이다. 이것은 전해온 이야기다.” 그럴 때마다 성경을 찢기 시작한 것입니다. 1년을 교회 나오고 난 다음에 성경 껍데기만 들고 목사님께 나와서 “목사님, 안녕히 계십시오. 나는 이제 교회를 떠납니다.” “아니 당신같이 착한 교인이 왜 떠납니까?” “1년 동안 목사님 설교를 듣고 나니까 모두다 성경은 소설이고, 이야기고, 신화고, 지어낸 말이고 하나도 믿을 것이 없으므로 다 찢어 보니까 겉장만 남았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기적을 제켜 버리면 겉장만 남습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성경은 모두다 기적의 이야기요, 기적이 일어난 이야기인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기적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감사하지 아니하면 믿을 것이 없어요. 우리가 회개하고 거듭나서 새사람이 되는 것 기적인 것입니다. 성령 받는 것 기적인 것입니다. 병 낫는 것 기적인 것입니다. 저주에서 해방되는 것 기적인 것입니다. 죽어 천당 가는 것 기적인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모든 신앙생활에 적은 기적이나 큰 기적이나 기적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할 바에야 믿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기적의 종교라는 것은 일본의 우치무라 간조라는 신학자가 한말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기적이다. 그뿐만 아니라 성경에서 만일 기적을 제외한다면 성경은 표지 2장만 남을 것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기적은 언제 일어날까? 영국의 웨스터 민스터 사원에 들어가면 정면에 이런 구호가 붙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위대한 일을 기대하는 것이 바로 기적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우리 집안에 가족들이 구원받을 것을 기대하는 것은 기적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가족이 병 낫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기적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망한 사업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는 것은 기적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셔서 오늘도 우리 가운데 주님은 기적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결론>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단히 종교적이었으나 죽은 신앙, 형식적인 신앙이었습니다. 신앙에 대한 지식을 알고 의식은 집행하나 살아있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엘리야 때 가뭄이 와도 하나님의 기적을 믿지 않았습니다. 엘리사 시대 많은 나병환자들이 있어도 치유 받을 것을 믿지 않았었습니다. 행동하는 믿음이 없는 종교는 의식에 묶인 죽은 박제품에 불과한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속에 어떤 믿음이 있든지 그것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예수를 믿고 교회 왔다 갔다 했는지 그것 인정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주님 앞에 나오면 말합니다. 주님께서 “네 믿음을 보여 다오.” “주여, 우리 가족을 구원해 주시옵소서.” “네 믿음을 보여 다오.” 어떻게 보여 줍니까? “네 가족들을 교회에 데리고 나오라. 네가. 구원은 내가 하지만 데리고 나오는 것은 네가 해야 되는 것이다.” “주여,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십일조와 헌물을 심어라. 그러면 축복은 내가 한다.” “그러지 말고 복부터 먼저 주세요.” “안보여주는 믿음에 내가 기적을 행할 수가 없느니라.” 주님은 여러분의 믿음을 보여 달라고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심의 무덤돌문을 옮겨 놓아라. 그러면 내가 기적을 행하마.” 여러분은 사회적인 체면 때문에 사람들의 비난을 두려워해서 마음에 불안과 공포가 있어서 믿음을 실천하지 않고 머뭇거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주님도 머뭇거리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것이냐, 저것이냐 확실히 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차면 차고, 더우면 더우라. 미지근하면 뱉어 버리겠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 사렙다의 과부처럼 받아들이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굶어 죽을지라도 믿어보자. 수리아의 대장 나아만처럼 명예와 권세를 다 잃어버릴지라도 이스라엘 적국의 나라에 가서 엘리사에게 몸을 맡겨 보자. 실천하는 믿음, 행동하는 믿음, 이것이 살아있는 믿음이요, 이런 믿음이 있으면 적으면 적은 데로, 크면 큰 데로 오늘날도 주님은 기적을 행하셔서 여러분의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역사하는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너무나 박제된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 왔다 갔다 하고 형식적이고 의식적인 신앙을 집행해도 마음속에 감춰 놓은 믿음을 가지고 있고 행동하는 믿음을 갖고 있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주의 말씀을 들었으면 그것을 믿고 실천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적게 실천하면 적게 기적을 체험하고 많이 실천하면 많이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도 주님은 우리 마음 문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믿음을 실천하면 내가 그에게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 가짜 신자 되지 말고 진짜 신자가 되게 도와 주시 옵시고 바라보는 신자 되지 말고 행동하는 신자 되게 도와주시옵기 간절히 바라옵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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