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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민11:24-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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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38579 |
2005.5.15.
떼죽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보기에 따라서 매우 자연스러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또는 우리의 이해를 벗어나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에 관한 이야기니까 자연스러운 것 같지만 그 현상에 얽혀있는 사연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특히 72명의 장로들이 영에 심취해서 황홀경에 빠진 사건을 놓고 여호수아가 그런 행동을 금지시켜야 한다고 모세에게 조언한다거나, 그 조언을 들은 모세가 보인 냉소적 반응은 분명히 여기에 복잡한 사연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그 사연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요?
출애굽의 이스라엘이 40년을 보낸 광야생활은 시내산 사건이 하나의 분기점을 이룹니다. 이들은 이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비롯한 여러 율법을 완성시켰습니다. 이는 곧 그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가나안 이방민족들에게 밀리지 않을 만큼의 정신세계의 토대를 확보했다는 뜻입니다. 그 시내산에서 있었던 사건이 출 19장부터 레위기 전체, 그리고 민 10:10에 진술되어 있습니다. 이제 명실상부한 법전 공동체로서의 위상을 갖춘 이스라엘은 다시 지루한 제2의 광야생활을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이런 분기점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11장 1절은 오늘 본문의 배경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지적합니다. “백성들이 괴로워하며 불평하는 소리가 야훼의 귀에 다다랐다. 그 소리를 들으시고 야훼께서는 몹시 회가 나시어 불을 떨어뜨려 진지의 변두리를 살라 버리셨다.” 우리는 출애굽의 이스라엘이 광야생활 40년 내도록 불평을 입에 달고 살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물과 먹을거리에 궁핍을 느끼면 즉시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던 과거를 기억한다면 늘 감사하고 찬양해야 할 그들이 먹을 게 좀 없다고 불평하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건 매우 당연한 행동입니다. 이집트의 노예생활을 벗어났다는 사실이나 미래에 약속으로 주어진 가나안의 삶보다는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그들에게 현안이었습니다. 민중신학자들은 역사의 주체가 민중이라고 합니다만 그 말은 부분적으로만 옳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손에 이끌림을 받을 때 정의와 평화를 위한 주체가 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 거꾸로 먹고 마실 것 때문에 정의와 평화를 팔아버립니다. 개인이나 민중이나 하나님의 손에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는 한 발등에 떨어진 불에 모든 정신을 팔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의 불평을 듣고 모세는 하나님께 하소연했습니다. “이 많은 백성을 저 혼자서는 도저히 책임질 수 없습니다. 너무나 무거운 짐입니다. 진정 이렇게 하셔야겠다면 차라리 저를 죽여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과히 밉지 않으시거든 이런 꼴을 더 이상 보지 않게 해 주십시오.”(민 11:14,15). 모세의 부담감이 그만큼 컸기 때문인지, 아니면 야훼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그만큼 분명했기 때문이지 모세는 좀 어린애 같은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렇게 계속 불평을 듣게 하려면 자기를 죽이든지, 아니면 좀 어떻게 해결해 달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직접 이렇게 하소연했다기보다는 성서기자가 그런 식으로 모세의 마음을 해석한 것이겠지요.
모세의 기도를 들으신 야훼 하나님이 해결해주셨습니다. 고기를 먹고 싶다고 아우성치는 백성들에게 구역질이 날 정도로(11:20) 고기를 먹게 해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31절 이후에 보면 야훼 하나님이 바람을 일으켜 메추라기를 몰아다 그들에게 배불리 먹게 해주셨습니다. 고기를 먹이겠다는 약속은 그대로 지켜졌지만 그날 야훼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임해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합니다. 아마 광야에서 고기를 잘못 먹고 떼죽음 당한 사건이 이렇게 그들에게 전승된 것 같습니다. 함께 출애굽 하고 광야를 거쳐 온 이웃이 떼죽음 당한 그 참혹한 사건을 그들은 ‘키브롯하따아와’라는 장소와 함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34).
72명의 장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과 그들의 떼죽음 사건 사이에 오늘 본문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하소연을 들은 야훼 하나님이 문제를 해결해주겠다는 말씀과 함께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장로 70명을 ‘만남의 장막’으로 집결시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16절). 오늘 본문은 그 명령대로 장로들이 모였을 때 일어난 사건입니다. 장로 70명이 장막 주의에 둘러섰습니다. 야훼께서 구름 속으로 내려 오셔서 모세와 말씀하시고 모세에게 내리셨던 영을 그들에게도 나누어주셨다고 합니다(25절). 영이 임하자 그들은 입신(황홀경)에 빠졌고, 그런 현상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번역되었지만 원래는 그 반대의 의미로 보아야 합니다.
본문에는 70명 이외의 두 사람에 관한 언급이 있습니다. 장로 명단에는 올라있지만 ‘성막’으로 가지 않았던 두 명, 엘닷과 메닷에게도 영이 내렸습니다. 이를 본 여호수아는 모세에게 이런 일을 금지해야 한다는 의견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렇게 타일렀습니다. “너는 지금 나를 생각하여 질투하고 있느냐? 차라리 야훼께서 당신의 영을 이 백성에게 주시어 모두 예언자가 되었으면 좋겠다.”(29). 이 두 장로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지금 우리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70명과 구별된다는 사실, 그리고 성막으로 오라는 모세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모세를 반대한 일단의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여호수아가 이들의 황홀경 체험을 말리려고 했겠지요.
하나님의 영이 이들에게 내렸다는 이 이야기는 신약시대의 오순절 성령강림사건(행 2장)과 비슷합니다. 만약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게 임했던 성령과 이 광야시절에 유대인 장로 72명에게 임했던 성령이 바로 야훼 하나님의 영이라고 한다면 성령의 활동은 오순절부터 시작되었다는 말은 그 근거가 없습니다. 또한 이 장로들에게 임한 영은 이미 모세에게 임했던 영이라는 점에서 영이 임재는 훨씬 이전의 사건입니다. 더 근원적으로 야훼 하나님이 인간을 흙으로 지으시고 자신의 숨(루아흐)를 불어넣으셨을 때의 그 숨이 바로 그분의 영이라고 한다면 창조 사건 때부터 이미 영이 활동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영은 곧 하나님의 존재론이며 활동의 능력인 셈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이 임한 72명의 장로들에게 나타난 현상은 좀 특이합니다. 물론 사도행전의 성령임재에서도 바람소리와 불꽃, 그리고 방언이라는 특이한 자연현상이 일어났지만 오늘 본문의 사건에서도 역시 그와 비슷한 현상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일견 타당합니다. 술 취한 사람들이 자기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처럼 영에 취한 사람도 역시 자기를 완전히 초월하는 상태에 빠질 수 있습니다. 무당들의 신들림 현상도 이것과 비슷합니다. 그들은 어떤 힘이 사로잡혀서 자기의 육체적 능력을 뛰어넘는 행동을 저지릅니다. 밤새워 춤을 추며 굿판을 벌인다거나 작두 위를 걷습니다. 이런 자기 초월 경험은 종교만이 아니라 예술행위에서도 벌어집니다. 열광적인 콘서트 장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그곳에 있는 몇 시간동안 자기를 완전히 초월하는 엑스타시의 경험을 합니다. 이런 현상이 극단으로 치닫게 되면 자해하거나 심지어는 집단적으로 자살하는 경우도 벌어집니다. 특히 엑스타시를 근본으로 하는 사이비 소종파에서 이런 일은 종종 벌어집니다.
과연 성서는 이런 엑스타시와 영의 임재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 걸까요? 영의 경험이라는 게 경우에 따라서 서로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가 성서에서 일목요연한 해명을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성서에서도 자기를 초월하는 엑스타시의 경험이 인정되기도 하지만 그런 현상은 거의 주목받지 못합니다. 방언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 필요한 하나의 현상에 불과하지 핵심적인 현상은 결코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영을 받은 72명이 엑스타시를 경험했지만 그들보다 먼저 영을 받은 모세는 전혀 그런 경험을 하지 않았습니다. 모세에게 임한 영은 모세로 하여금 율법을 받아 적게 했습니다. 결국 성서가 말하는 영의 임재는 ‘말씀’에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영에 속한 사람
여호수아는 72명의 엑스타시 현상을 왜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을까요? 그 이유를 우리는 모세의 대답에서 찾아야 합니다. “너는 지금 나를 생각하여 질투하고 있느냐?”(29). 여호수아는 모세의 권위가 손상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오직 모세만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으로 남아 있어야 영적인 권위가 선다고 생각했겠지요. 아마 광야생활 중에 모세의 권위에 도전한 사람들이 제법 많았을 겁니다. 심지어는 오늘 본문에 이어 나오는 12장에서 모세의 누이인 미리암과 형 아론이 모세를 비판하면서 야훼께서 모세에게만 말씀하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말씀하신다고 주장했습니다. 모세의 권위를 지키는 것이 곧 이스라엘을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한 여호수아가 72명의 장로들에게서 벌어지는 그런 영적 현상을 금지시키려고 한 것은 당연합니다.
마틴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서는 독문학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작업이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독일 사람들이 이제 성서를 자기의 모국어로 읽게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 이전에 성서는 라틴어 번역본 밖에 없었기 때문에 평신도들은 읽을 수 없었고 단지 사제들의 해명을 통해서만 접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장단점이 다 있습니다. 성서가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특수집단에게 독점된다는 사실도 문제이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됨으로써 성서가 오해될 수 있다는 사실도 문제이긴 합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 계통의 사이비 이단에 많은 이유는 바로 성서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서 출발합니다. 그런 장단점이 모두 있지만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면 독점보다는 오해의 가능성이 덜 위험합니다. 그 이유는 독점되면 영이 활동할여지가 폐쇄되지만 오해는 교정될 여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차라리 야훼께서 당신의 영을 이 백성에게 주시어 모두 예언자가 되었으면 좋겠다.”(29). 여호수아는 모세의 권위가 훼손되는 것만 염려했지만 모세는 그런 방식이라고 하더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인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여호수아와 모세의 생각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여호수아가 단순히 모세의 권위 문제에만 집착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자칫 영이 왜곡될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었을지 모릅니다. 이 대목에서만 본다면 모세의 영 경험과 72명의 영 경험은 분명히 다릅니다. 모세는 늘 말씀 중심으로 영적인 경험을 했지만 72명은 엑스타시에 머물렀습니다. 이런 방식의 영 경험은 어떤 점에서 매우 유치하고 부분적인 영 경험이지만 매우 열광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서는 훨씬 강력한 힘으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세는 비록 그런 위험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을 받는 편이 훨씬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오늘 본문의 사건이 불거지게 된 사연에 놓여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시내산 사건 이후에 다시 광야생활을 시작한 이스라엘은 고기를 먹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일상의 불편을 견디지 못해서 공동체를 허무는 이런 사람들의 문제는 영을 통하지 않으면 해결될 수 없습니다. 삶의 조건은 아무리 향상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불평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야훼 하나님이 고기를 마련해 주시고 즉시 그들에게 징벌을 내린 이유도 그들이 고기를 먹는다고 이런 불편으로 가득한 삶의 태도가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영의 경험만 우리의 내면을 근본적으로 치료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영의 경험, 또는 영이 내렸다는 게 무슨 의미입니까? 영은 우리로 하여금 표면적인 삶에 머물지 않고 그 내면을 인식하게 합니다. 즉 우리의 삶이 단지 이 세상에서 표면적으로 잘 먹고 잘사는 것에 놓여 있는 게 아니라, 기쁨과 자유와 평화에 있다는 사실은 영적인 눈이 아니면 결코 볼 수 없습니다. 음악이나 미술, 또는 시를 공부할 때도 역시 겉으로 나타나는 소리, 그림, 언어 안에 놓여 있는 근원적인 세계를 경험하려면 영감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오래 교회에 다녀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해 있다는 사실을 또렷하게 인식하는 경험이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내면의 세계는 영적인 인식론으로만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자기의 권위가 손상당하는 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영에 속한 사람’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야만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영적으로 소통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떼죽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보기에 따라서 매우 자연스러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또는 우리의 이해를 벗어나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에 관한 이야기니까 자연스러운 것 같지만 그 현상에 얽혀있는 사연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특히 72명의 장로들이 영에 심취해서 황홀경에 빠진 사건을 놓고 여호수아가 그런 행동을 금지시켜야 한다고 모세에게 조언한다거나, 그 조언을 들은 모세가 보인 냉소적 반응은 분명히 여기에 복잡한 사연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그 사연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요?
출애굽의 이스라엘이 40년을 보낸 광야생활은 시내산 사건이 하나의 분기점을 이룹니다. 이들은 이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비롯한 여러 율법을 완성시켰습니다. 이는 곧 그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가나안 이방민족들에게 밀리지 않을 만큼의 정신세계의 토대를 확보했다는 뜻입니다. 그 시내산에서 있었던 사건이 출 19장부터 레위기 전체, 그리고 민 10:10에 진술되어 있습니다. 이제 명실상부한 법전 공동체로서의 위상을 갖춘 이스라엘은 다시 지루한 제2의 광야생활을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이런 분기점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11장 1절은 오늘 본문의 배경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지적합니다. “백성들이 괴로워하며 불평하는 소리가 야훼의 귀에 다다랐다. 그 소리를 들으시고 야훼께서는 몹시 회가 나시어 불을 떨어뜨려 진지의 변두리를 살라 버리셨다.” 우리는 출애굽의 이스라엘이 광야생활 40년 내도록 불평을 입에 달고 살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물과 먹을거리에 궁핍을 느끼면 즉시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던 과거를 기억한다면 늘 감사하고 찬양해야 할 그들이 먹을 게 좀 없다고 불평하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건 매우 당연한 행동입니다. 이집트의 노예생활을 벗어났다는 사실이나 미래에 약속으로 주어진 가나안의 삶보다는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그들에게 현안이었습니다. 민중신학자들은 역사의 주체가 민중이라고 합니다만 그 말은 부분적으로만 옳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손에 이끌림을 받을 때 정의와 평화를 위한 주체가 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 거꾸로 먹고 마실 것 때문에 정의와 평화를 팔아버립니다. 개인이나 민중이나 하나님의 손에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는 한 발등에 떨어진 불에 모든 정신을 팔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의 불평을 듣고 모세는 하나님께 하소연했습니다. “이 많은 백성을 저 혼자서는 도저히 책임질 수 없습니다. 너무나 무거운 짐입니다. 진정 이렇게 하셔야겠다면 차라리 저를 죽여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과히 밉지 않으시거든 이런 꼴을 더 이상 보지 않게 해 주십시오.”(민 11:14,15). 모세의 부담감이 그만큼 컸기 때문인지, 아니면 야훼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그만큼 분명했기 때문이지 모세는 좀 어린애 같은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렇게 계속 불평을 듣게 하려면 자기를 죽이든지, 아니면 좀 어떻게 해결해 달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직접 이렇게 하소연했다기보다는 성서기자가 그런 식으로 모세의 마음을 해석한 것이겠지요.
모세의 기도를 들으신 야훼 하나님이 해결해주셨습니다. 고기를 먹고 싶다고 아우성치는 백성들에게 구역질이 날 정도로(11:20) 고기를 먹게 해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31절 이후에 보면 야훼 하나님이 바람을 일으켜 메추라기를 몰아다 그들에게 배불리 먹게 해주셨습니다. 고기를 먹이겠다는 약속은 그대로 지켜졌지만 그날 야훼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임해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합니다. 아마 광야에서 고기를 잘못 먹고 떼죽음 당한 사건이 이렇게 그들에게 전승된 것 같습니다. 함께 출애굽 하고 광야를 거쳐 온 이웃이 떼죽음 당한 그 참혹한 사건을 그들은 ‘키브롯하따아와’라는 장소와 함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34).
72명의 장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과 그들의 떼죽음 사건 사이에 오늘 본문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하소연을 들은 야훼 하나님이 문제를 해결해주겠다는 말씀과 함께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장로 70명을 ‘만남의 장막’으로 집결시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16절). 오늘 본문은 그 명령대로 장로들이 모였을 때 일어난 사건입니다. 장로 70명이 장막 주의에 둘러섰습니다. 야훼께서 구름 속으로 내려 오셔서 모세와 말씀하시고 모세에게 내리셨던 영을 그들에게도 나누어주셨다고 합니다(25절). 영이 임하자 그들은 입신(황홀경)에 빠졌고, 그런 현상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번역되었지만 원래는 그 반대의 의미로 보아야 합니다.
본문에는 70명 이외의 두 사람에 관한 언급이 있습니다. 장로 명단에는 올라있지만 ‘성막’으로 가지 않았던 두 명, 엘닷과 메닷에게도 영이 내렸습니다. 이를 본 여호수아는 모세에게 이런 일을 금지해야 한다는 의견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렇게 타일렀습니다. “너는 지금 나를 생각하여 질투하고 있느냐? 차라리 야훼께서 당신의 영을 이 백성에게 주시어 모두 예언자가 되었으면 좋겠다.”(29). 이 두 장로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지금 우리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70명과 구별된다는 사실, 그리고 성막으로 오라는 모세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모세를 반대한 일단의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여호수아가 이들의 황홀경 체험을 말리려고 했겠지요.
하나님의 영이 이들에게 내렸다는 이 이야기는 신약시대의 오순절 성령강림사건(행 2장)과 비슷합니다. 만약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게 임했던 성령과 이 광야시절에 유대인 장로 72명에게 임했던 성령이 바로 야훼 하나님의 영이라고 한다면 성령의 활동은 오순절부터 시작되었다는 말은 그 근거가 없습니다. 또한 이 장로들에게 임한 영은 이미 모세에게 임했던 영이라는 점에서 영이 임재는 훨씬 이전의 사건입니다. 더 근원적으로 야훼 하나님이 인간을 흙으로 지으시고 자신의 숨(루아흐)를 불어넣으셨을 때의 그 숨이 바로 그분의 영이라고 한다면 창조 사건 때부터 이미 영이 활동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영은 곧 하나님의 존재론이며 활동의 능력인 셈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이 임한 72명의 장로들에게 나타난 현상은 좀 특이합니다. 물론 사도행전의 성령임재에서도 바람소리와 불꽃, 그리고 방언이라는 특이한 자연현상이 일어났지만 오늘 본문의 사건에서도 역시 그와 비슷한 현상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일견 타당합니다. 술 취한 사람들이 자기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처럼 영에 취한 사람도 역시 자기를 완전히 초월하는 상태에 빠질 수 있습니다. 무당들의 신들림 현상도 이것과 비슷합니다. 그들은 어떤 힘이 사로잡혀서 자기의 육체적 능력을 뛰어넘는 행동을 저지릅니다. 밤새워 춤을 추며 굿판을 벌인다거나 작두 위를 걷습니다. 이런 자기 초월 경험은 종교만이 아니라 예술행위에서도 벌어집니다. 열광적인 콘서트 장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그곳에 있는 몇 시간동안 자기를 완전히 초월하는 엑스타시의 경험을 합니다. 이런 현상이 극단으로 치닫게 되면 자해하거나 심지어는 집단적으로 자살하는 경우도 벌어집니다. 특히 엑스타시를 근본으로 하는 사이비 소종파에서 이런 일은 종종 벌어집니다.
과연 성서는 이런 엑스타시와 영의 임재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 걸까요? 영의 경험이라는 게 경우에 따라서 서로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가 성서에서 일목요연한 해명을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성서에서도 자기를 초월하는 엑스타시의 경험이 인정되기도 하지만 그런 현상은 거의 주목받지 못합니다. 방언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 필요한 하나의 현상에 불과하지 핵심적인 현상은 결코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영을 받은 72명이 엑스타시를 경험했지만 그들보다 먼저 영을 받은 모세는 전혀 그런 경험을 하지 않았습니다. 모세에게 임한 영은 모세로 하여금 율법을 받아 적게 했습니다. 결국 성서가 말하는 영의 임재는 ‘말씀’에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영에 속한 사람
여호수아는 72명의 엑스타시 현상을 왜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을까요? 그 이유를 우리는 모세의 대답에서 찾아야 합니다. “너는 지금 나를 생각하여 질투하고 있느냐?”(29). 여호수아는 모세의 권위가 손상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오직 모세만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으로 남아 있어야 영적인 권위가 선다고 생각했겠지요. 아마 광야생활 중에 모세의 권위에 도전한 사람들이 제법 많았을 겁니다. 심지어는 오늘 본문에 이어 나오는 12장에서 모세의 누이인 미리암과 형 아론이 모세를 비판하면서 야훼께서 모세에게만 말씀하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말씀하신다고 주장했습니다. 모세의 권위를 지키는 것이 곧 이스라엘을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한 여호수아가 72명의 장로들에게서 벌어지는 그런 영적 현상을 금지시키려고 한 것은 당연합니다.
마틴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서는 독문학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작업이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독일 사람들이 이제 성서를 자기의 모국어로 읽게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 이전에 성서는 라틴어 번역본 밖에 없었기 때문에 평신도들은 읽을 수 없었고 단지 사제들의 해명을 통해서만 접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장단점이 다 있습니다. 성서가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특수집단에게 독점된다는 사실도 문제이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됨으로써 성서가 오해될 수 있다는 사실도 문제이긴 합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 계통의 사이비 이단에 많은 이유는 바로 성서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서 출발합니다. 그런 장단점이 모두 있지만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면 독점보다는 오해의 가능성이 덜 위험합니다. 그 이유는 독점되면 영이 활동할여지가 폐쇄되지만 오해는 교정될 여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차라리 야훼께서 당신의 영을 이 백성에게 주시어 모두 예언자가 되었으면 좋겠다.”(29). 여호수아는 모세의 권위가 훼손되는 것만 염려했지만 모세는 그런 방식이라고 하더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인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여호수아와 모세의 생각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여호수아가 단순히 모세의 권위 문제에만 집착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자칫 영이 왜곡될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었을지 모릅니다. 이 대목에서만 본다면 모세의 영 경험과 72명의 영 경험은 분명히 다릅니다. 모세는 늘 말씀 중심으로 영적인 경험을 했지만 72명은 엑스타시에 머물렀습니다. 이런 방식의 영 경험은 어떤 점에서 매우 유치하고 부분적인 영 경험이지만 매우 열광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서는 훨씬 강력한 힘으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세는 비록 그런 위험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을 받는 편이 훨씬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오늘 본문의 사건이 불거지게 된 사연에 놓여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시내산 사건 이후에 다시 광야생활을 시작한 이스라엘은 고기를 먹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일상의 불편을 견디지 못해서 공동체를 허무는 이런 사람들의 문제는 영을 통하지 않으면 해결될 수 없습니다. 삶의 조건은 아무리 향상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불평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야훼 하나님이 고기를 마련해 주시고 즉시 그들에게 징벌을 내린 이유도 그들이 고기를 먹는다고 이런 불편으로 가득한 삶의 태도가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영의 경험만 우리의 내면을 근본적으로 치료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영의 경험, 또는 영이 내렸다는 게 무슨 의미입니까? 영은 우리로 하여금 표면적인 삶에 머물지 않고 그 내면을 인식하게 합니다. 즉 우리의 삶이 단지 이 세상에서 표면적으로 잘 먹고 잘사는 것에 놓여 있는 게 아니라, 기쁨과 자유와 평화에 있다는 사실은 영적인 눈이 아니면 결코 볼 수 없습니다. 음악이나 미술, 또는 시를 공부할 때도 역시 겉으로 나타나는 소리, 그림, 언어 안에 놓여 있는 근원적인 세계를 경험하려면 영감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오래 교회에 다녀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해 있다는 사실을 또렷하게 인식하는 경험이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내면의 세계는 영적인 인식론으로만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자기의 권위가 손상당하는 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영에 속한 사람’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야만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영적으로 소통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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