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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마28:16-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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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38583 |
2005.5.22.
신앙의 다중성
‘오직 믿음’(sola fide)라는 마틴 루터의 주장은 기본적으로 옳지만 그것이 교회 현실에서는 오용되는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 우선 그의 주장이 옳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는 길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우리의 믿음에 있다는 뜻일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인간 자신의 노력으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그러나 이런 믿음에 대한 강조는 교회 안에서 자칫 믿음 일원론으로 빠져들 위험성도 있습니다. 성서공부나 교회생활의 모든 문제들이 무조건 믿기만 하면 해결된다는 주장이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이렇듯 우리의 모든 불안과 의심을 잠재우기 위한 수단으로 믿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건 기독교의 근본적인 가르침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불가지론자들처럼 모든 게 실증적으로 확실한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믿어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하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 신앙의 긴장이 있습니다. 무조건적인 믿음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회의론도 아닙니다. 이 말은 곧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필요한 것은 믿음이지만 그 믿음에 이르기 까지는 충분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두 가지, 즉 믿음과 사유, 혹은 믿음과 의심은 서로 밀고 당기면서 기독교 역사를 끌어왔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심은 부정하기 위한 게 아니라 확실성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어떤 공동체이든지 의심이 없으면 발전도 없듯이, 또한 진리는 곧 이런 의심의 해석학을 통해서 자기를 나타내듯이 기독교 역사도 이런 과정을 밟아왔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런 흔적이 나옵니다. 이제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면서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만나는 장면에서 우리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정신적인 상황을 읽을 수 있습니다. 열한 명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약속하신 대로 갈릴래아 지역에 있는 산으로 예수님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예수님에게 엎드려 절했습니다. “그러나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합니다.(17절). 이런 묘사가 곧 초기 기독교가 처한 상황입니다. 대다수의 제자들과 신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예배했지만 일부의 사람들은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의심은 어쩔 수 없는 현상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아무런 의심도 없이 믿을 수 있겠습니까? 처음부터 의심이 없었다고 한다면 그건 믿음이 아니라 광신입니다. 그것에 관해서 의심이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기독교는 그런 의심을 강제적으로 억압하지 않고 믿음의 단계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기독교의 가르침을 해명했습니다.
하늘과 땅의 권한
오늘 본문은 예수님에게 엎드린 사람들과 의심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증언합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18). 이 선언은 초기 기독교의 기본적인 신앙이면서, 동시에 곧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사람을 향한 변증이며 해명입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은 분입니다. 그 당시에 사람들은 하늘을 또 하나의 세계로 간주했기 때문에 마태가 ‘하늘과 땅’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말은 곧 예수님에게 우주를 통치할 권한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우주를 통치한다는 게 무슨 의미라고 생각합니까? 여기서 통치라는 것을 로마 황제의 권력에서 나오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 말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은 정치와 경제의 힘으로 작동된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에게 그것과 전혀 다른 예수님의 통치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곧 폭력을 통해서라도 자신들의 세력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조폭들에게 평화의 삶을 설명하기 힘든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기독교는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이 예수님의 우주론적 통치를 이해하고 믿었으며, 나아가서 그 사실을 설명해야하며, 그런 길을 걸어왔고, 지금도 걸어가고 있습니다.
다시 질문해봅시다. 오늘 본문을 비롯해서 성서 전체는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이 우주의 통치자라고 주장하는 겁니까? 이런 대답은 한 두 마디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도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통치는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해서 쑥대밭을 만들어 놓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작용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당장 분명한 대답을 제시할 수 없습니다. 물론 간단하게 말해서 우리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게 곧 예수님의 통치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이 세상이 평화적인 세상이 되는 것이 바로 그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사랑이야말로 예수님의 통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주장들이 부분적으로, 또는 어떤 범주 안에서는 옳지만 궁극적인 대답이 되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의 우주론적 통치는 오직 예수님만이, 또는 하나님만이 알 수 있는 비밀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예컨대 예수님의 십자가가 인간의 구원이라는 사실을 예상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점에서 예수님의 통치는 오직 그분의 배타적인 영역이라는 말이 옳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예수님의 우주론적 통치가 비밀이라면 우리가 이 땅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그런 통치가 일어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입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통치에 들어가는 것뿐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이 그분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발생하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그런 구원 사건이 우리에게 일어나도록 기다려야만 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마태는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을 ‘세례’ 베푸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세례는 곧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좀더 본질적으로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죽고, 그의 부활과 더불어 산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에게 행하는 종교의식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보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제자라고 한다면 당연히 그의 우주론적 통치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서 살아가야만 하니까 말입니다. 이는 곧 세례를 통해서 우리가 전혀 다른 삶의 차원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마태는 이 세례를 신학적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세례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19) 베풀어집니다. 이 구절이 아직 삼위일체론의 개념까지 발전되지는 않았지만 그 단초의 역할은 충분합니다.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삼위일체론은 무엇을 가리키는 걸까요? 삼위일체론은 기본적으로 유일신론의 극복입니다. 전지전능, 무소부재, 유일무이라는 하나님이라기보다는 철저하게 역사에 의존하고 영적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이 바로 기독교의 하나님 이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똑같이 역사적 인물이었던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이 될 수 있으며, 거꾸로 예수 그리스도는 야훼 하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이며, 또한 영도 마찬가지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은 이런 개념이 도대체 우리의 신앙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할 겁니다. 그러나 삼위일체론은 우리 기독교 신앙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이런 방식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오늘 본문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추상적이고 이상적이고 신인동성동형론적인, 더 나아가 자기가 투사된 절대자가 아니라 역사적인 인물인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 살아갑니다. 그의 구체적인 삶에 우리의 운명을 맡긴다는 뜻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와 이 세계에 운행하는 생명의 영을 하나님으로 믿습니다. 역사적 인물이었던 한 인간과 영을 절대자인 하나님으로 믿습니다. 이 말은 곧 역사와 영을 우리가 구원받아야 할 생명의 토대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 아직은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의심이 들 겁니다. 그런 의심을 풀어나가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가르쳐라’는 마태의 권고는 옳습니다. 그런 영적인 세계에 눈을 뜨도록 가르쳐야겠지요.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잠정적인 인식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인식의 한계를 돕기 위해서 예수님은 “내가 세상 끝날 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20)고 약속하셨습니다. *
신앙의 다중성
‘오직 믿음’(sola fide)라는 마틴 루터의 주장은 기본적으로 옳지만 그것이 교회 현실에서는 오용되는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 우선 그의 주장이 옳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는 길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우리의 믿음에 있다는 뜻일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인간 자신의 노력으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그러나 이런 믿음에 대한 강조는 교회 안에서 자칫 믿음 일원론으로 빠져들 위험성도 있습니다. 성서공부나 교회생활의 모든 문제들이 무조건 믿기만 하면 해결된다는 주장이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이렇듯 우리의 모든 불안과 의심을 잠재우기 위한 수단으로 믿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건 기독교의 근본적인 가르침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불가지론자들처럼 모든 게 실증적으로 확실한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믿어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하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 신앙의 긴장이 있습니다. 무조건적인 믿음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회의론도 아닙니다. 이 말은 곧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필요한 것은 믿음이지만 그 믿음에 이르기 까지는 충분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두 가지, 즉 믿음과 사유, 혹은 믿음과 의심은 서로 밀고 당기면서 기독교 역사를 끌어왔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심은 부정하기 위한 게 아니라 확실성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어떤 공동체이든지 의심이 없으면 발전도 없듯이, 또한 진리는 곧 이런 의심의 해석학을 통해서 자기를 나타내듯이 기독교 역사도 이런 과정을 밟아왔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런 흔적이 나옵니다. 이제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면서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만나는 장면에서 우리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정신적인 상황을 읽을 수 있습니다. 열한 명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약속하신 대로 갈릴래아 지역에 있는 산으로 예수님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예수님에게 엎드려 절했습니다. “그러나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합니다.(17절). 이런 묘사가 곧 초기 기독교가 처한 상황입니다. 대다수의 제자들과 신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예배했지만 일부의 사람들은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의심은 어쩔 수 없는 현상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아무런 의심도 없이 믿을 수 있겠습니까? 처음부터 의심이 없었다고 한다면 그건 믿음이 아니라 광신입니다. 그것에 관해서 의심이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기독교는 그런 의심을 강제적으로 억압하지 않고 믿음의 단계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기독교의 가르침을 해명했습니다.
하늘과 땅의 권한
오늘 본문은 예수님에게 엎드린 사람들과 의심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증언합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18). 이 선언은 초기 기독교의 기본적인 신앙이면서, 동시에 곧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사람을 향한 변증이며 해명입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은 분입니다. 그 당시에 사람들은 하늘을 또 하나의 세계로 간주했기 때문에 마태가 ‘하늘과 땅’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말은 곧 예수님에게 우주를 통치할 권한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우주를 통치한다는 게 무슨 의미라고 생각합니까? 여기서 통치라는 것을 로마 황제의 권력에서 나오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 말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은 정치와 경제의 힘으로 작동된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에게 그것과 전혀 다른 예수님의 통치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곧 폭력을 통해서라도 자신들의 세력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조폭들에게 평화의 삶을 설명하기 힘든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기독교는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이 예수님의 우주론적 통치를 이해하고 믿었으며, 나아가서 그 사실을 설명해야하며, 그런 길을 걸어왔고, 지금도 걸어가고 있습니다.
다시 질문해봅시다. 오늘 본문을 비롯해서 성서 전체는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이 우주의 통치자라고 주장하는 겁니까? 이런 대답은 한 두 마디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도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통치는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해서 쑥대밭을 만들어 놓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작용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당장 분명한 대답을 제시할 수 없습니다. 물론 간단하게 말해서 우리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게 곧 예수님의 통치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이 세상이 평화적인 세상이 되는 것이 바로 그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사랑이야말로 예수님의 통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주장들이 부분적으로, 또는 어떤 범주 안에서는 옳지만 궁극적인 대답이 되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의 우주론적 통치는 오직 예수님만이, 또는 하나님만이 알 수 있는 비밀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예컨대 예수님의 십자가가 인간의 구원이라는 사실을 예상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점에서 예수님의 통치는 오직 그분의 배타적인 영역이라는 말이 옳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예수님의 우주론적 통치가 비밀이라면 우리가 이 땅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그런 통치가 일어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입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통치에 들어가는 것뿐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이 그분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발생하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그런 구원 사건이 우리에게 일어나도록 기다려야만 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마태는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을 ‘세례’ 베푸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세례는 곧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좀더 본질적으로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죽고, 그의 부활과 더불어 산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에게 행하는 종교의식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보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제자라고 한다면 당연히 그의 우주론적 통치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서 살아가야만 하니까 말입니다. 이는 곧 세례를 통해서 우리가 전혀 다른 삶의 차원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마태는 이 세례를 신학적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세례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19) 베풀어집니다. 이 구절이 아직 삼위일체론의 개념까지 발전되지는 않았지만 그 단초의 역할은 충분합니다.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삼위일체론은 무엇을 가리키는 걸까요? 삼위일체론은 기본적으로 유일신론의 극복입니다. 전지전능, 무소부재, 유일무이라는 하나님이라기보다는 철저하게 역사에 의존하고 영적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이 바로 기독교의 하나님 이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똑같이 역사적 인물이었던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이 될 수 있으며, 거꾸로 예수 그리스도는 야훼 하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이며, 또한 영도 마찬가지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은 이런 개념이 도대체 우리의 신앙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할 겁니다. 그러나 삼위일체론은 우리 기독교 신앙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이런 방식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오늘 본문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추상적이고 이상적이고 신인동성동형론적인, 더 나아가 자기가 투사된 절대자가 아니라 역사적인 인물인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 살아갑니다. 그의 구체적인 삶에 우리의 운명을 맡긴다는 뜻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와 이 세계에 운행하는 생명의 영을 하나님으로 믿습니다. 역사적 인물이었던 한 인간과 영을 절대자인 하나님으로 믿습니다. 이 말은 곧 역사와 영을 우리가 구원받아야 할 생명의 토대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 아직은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의심이 들 겁니다. 그런 의심을 풀어나가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가르쳐라’는 마태의 권고는 옳습니다. 그런 영적인 세계에 눈을 뜨도록 가르쳐야겠지요.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잠정적인 인식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인식의 한계를 돕기 위해서 예수님은 “내가 세상 끝날 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20)고 약속하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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