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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전12:12~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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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추응식 형제 |
참고 : | 새길교회 2009.10.18 주일 설교 |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수직적 차별, 수평적 구별
[고린도전서 12 : 12~27]
추응식 형제
지금 우리 사회는 후진국, 중진국, 선진국 유형의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유형은 스포츠 경기를 관전하는 모습에서 잘 구별됩니다. 가령 우리나라와 독일이 축구경기를 한다고 했을 때, 후진국 유형의 사람들은 ‘에이 안 돼, 독일은 세계 최고 수준인데, 우리가 이길 수 있나. 볼 필요도 없어!’ 하면서 비관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그리고 중진국형은 ‘그래도 공은 둥그니까 어디로 굴러갈지 아나, 해 봐야 알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선진국형은 승패와 관계없이 즐깁니다. 2002년 월드컵 때, 유모차의 아이까지 붉은 옷을 입히고 광장으로 응원가는 젊은 부부가 여기에 속합니다. 이러한 세 가지 유형이 동시대에 공존하고 있는 것은 우리나라가 후진국에서 선진국 문턱까지 아주 짧은 기간에 급성장을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급성장의 배경에는 역시 치열한 경쟁구도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제 경쟁력이라든가 차별화라는 말은 일반 시장에만 국한되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구석구석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가히 우리사회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경쟁이 없는 곳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현 정부는 완화책, 보완책보다는 더 경쟁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소수의 승자와 다수의 패배자가 생산되고 있습니다. 관용과 사랑, 용서 같은 본질적 문제보다는 쟁취, 성취 같은 결과만을 중시하는 사회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시장경제를 채택하고 있는 한, 이러한 경쟁은 불가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물질적 혜택도 일정정도 이의 결과라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내가 누리는 행복의 상당부분에도 나도 모르는 다른 사람의 불행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제는 개인의 윤리, 도덕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 혹은 제도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도도 사람이 만들고, 사람의 의해 변화되어 간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우리가 어디를 바라보는가, 어느 방향으로 걸음을 내딛는가 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곳과 걸음을 내 딛어야 할 곳을 몰라 방황할 때, 교회는 길을 가르쳐주고 깨닫게 해줍니다. 그것은 교회의 주인이 그리스도 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길 되시고 길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그 진리는 우리들의 민주적 다수결 합의 같은 것이 아닙니다. 마치 초등학교 한반 학생 모두가 하루 종일 산수문제에 대해 토론하고 합의했다하더라도 선생님의 1분이 더 정확한 것처럼, 하나님은 섬광처럼 진리의 길을 제시해 주십니다. 몇 백만 몇 천만 명이 몇 백 년을 걸어온 길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은 순간에 돌아가라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태초부터 준비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그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은총도 함께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일찍이 바울선생님은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잠자지 말고, 깨어 있으면서, 정신을 차립시다.’(데살로니카 전서 5장 6절) 라고 데살로니카 교회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놓치지 않도록 당부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길을 밝히겠다고 예수 사후 많은 교회들이 세워졌습니다. 그 교회의 등불은 2000년이 지나도록 꺼지지 않고 전등되어 오늘 우리도 이렇게 새길교회라는 이름으로 예배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등불이 전달되어 오는 과정에서 여러 갈래의 길이 생겼습니다. 카톨릭, 개신교는 물론 루터교, 장로교, 성공회, 정교회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갈래 길이 생겼습니다. 아이들이 이 많은 갈래 길을 본다면 하나님이 참 많다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분열된 교회들은 또 타 종교에 대해서는 유일신을 말하며 배타합니다. 때로는 이 갈라진 교회들끼리 배타하기도 합니다. 저마다 자기 교회가 하나님께 가는 지름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성서에서 읽은 것과 같이 교회의 구성원이 몸의 지체인 것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교회들 또한 하나님의 지체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교회 역시 사람이 모인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교파들이 각자 지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거대한 세상교회 즉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가는 것이 에큐메니컬 운동의 한 측면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성서 25장에서 27절에서는 ‘그래서 몸에 분열이 생기지 않게 하시고, 지체들이 서로 같이 걱정하게 하셨습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가 같이 고통을 당합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요,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지체입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교회, 한 교회가 지체로서 어떤 교회는 눈의 역할, 어떤 교회는 귀의 역할을 하면서 서로의 부족한 점을 보듬어 가며 살아가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오늘 하나님의 지체로서의 사람과 또 지체로서의 교회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오늘 성서에서 말하는 몸의 각 지체들은 우리사회의 모습과는 달리 서로 경쟁을 하지 않습니다. 경쟁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경쟁을 할 만한 공통 요소가 없기 때문입니다. 눈과 코가 뭘 가지고 경쟁을 하겠습니까? 17장에서도 ‘온몸이 다 눈이라면, 어떻게 듣겠습니까? 또 온몸이 다 귀라면, 냄새는 어떻게 맡겠습니까?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눈은 냄새를 맡을 수 없고, 코는 볼 수가 없습니다. 서로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각 지체는 사실 강점과 약점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 역시 비교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특성이 있을 뿐입니다. 그 특성은 하나님이 주신 고유성입니다. 그 고유성으로 지체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 고유성 때문에 호랑이나 개미의 생명도 귀천을 따질 수 없습니다. 등가(等價)입니다.
창녀와 세리, 제사장도 신분 이전에 이미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고유성 때문에 동등한 인권을 갖습니다. 대통령도 농부의 쌀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고, 농부도 지렁이의 땅 일굼으로 도움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 지체들은 수평적 연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지체들이 서로 경쟁을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지체로서의 고유성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코가 들으려 하고, 귀가 냄새를 맡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자신이 주체가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주체는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몸 된 주체는 오직 하나님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피조물도 지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생명은 그 어떤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 우리는 치열한 경쟁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경쟁적 삶은 하나님 나라의 방식이 아니기 때문에 불안정한 것입니다. 불안정한 삶에 지친 우리들은 안정을 찾고자 교회를 찾습니다. 교회들 역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그대를 쉬게 하리라’라는 마태복음 11장 28절의 말씀을 교회 안팎에 걸어 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경쟁을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자동차가 달리는 길들이 흔들리는 것과 같습니다. 또 자기가 흔들거리면서 흔들리고 있는 것을 어떻게 잘 볼 수 있겠습니까?
이제는 많은 교회들이 더 큰 교회건축, 더 많은 신도 유치를 교회의 지상목표로 내세워도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침 대신 규모의 경제학이 더 가까워졌습니다. 목사님을 청빙할 때도 학벌은 물론, 외모까지 따지는 곳도 있다고 합니다. 가히 시장의 모습과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많은 교회들이 경쟁 우위를 위한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차별화입니다. 차별화는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의 구별된 고유성을 망각하는 것입니다. 차별화가 목표가 되면 경쟁은 필연적인 수단이 됩니다. 경쟁은 서열을 만들고 그것은 수직적 관계를 만듭니다.
이 세상의 지체들과 수직 관계에 있는 것은 오직 몸 되신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체들 간 수직적 관계가 형성되는 그 순간, 창조질서는 무너집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평화가 깨뜨려집니다. 그래서 한완상 형제님은 자주 ‘우아하게 지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경쟁을 해도 수평적 관계가 그대로 유지되는 묘수인 것 같습니다.
귀는 귀의 역할이 있고, 눈은 눈의 역할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이러한 지체들이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가도록 노력하셨습니다. 세상 청소를 하러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청소법은 더러운 것을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자리로 보내는 것입니다. 방안에서 천대받던 먼지는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 꽃밭으로 보내어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역할을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애초부터 더러운 것이란 우리들의 오염된 시각일 뿐입니다. 창녀도 세리도 왕도 제 자리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질서를 잡는 것입니다. 질서의 핵심은 수직적 차별화를 수평적 구별로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소유적 관계를 존재적 관계로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해방이고 자유의 확장이었습니다. 특히 이런 점에서 저는 ‘예수교는 참으로 위대한 실천적 종교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주체는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수직 관계 또한 오직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만든 수직관계는 모두 부서져야 합니다. 그것은 우상입니다. 곤두선 권력으로 위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곤두선 사랑이란 없습니다.
수직으로 내리는 비가 부서져 수평으로 흐릅니다. 그 부서진 비를 우리는 물이라 부릅니다. 그 물을 우리는 먹습니다. 수직의 비가 부서져 물이 되듯이 수직으로 곤두선 것들은 모두 부서져야 합니다. 부서지지 않고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호두알을 깨지도 않고 호두 먹으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엄마라는 말이 사랑이 아니라 젖을 주고 만져주는 그 부드러운 행위가 사랑입니다.
예수님도 부서지셨습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부서졌습니다. 더욱 사랑하시기 위해 부서졌습니다. 차별화되어야 하실 분이 스스로 그 수직을 버리셨습니다. 죽임을 당하심으로써 완전히 부서지셨습니다. 지체가 주체를 무너뜨리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사람들은 부서지신 예수님 속에서 더 뚜렷이 예수님의 참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모습은 부서져 일그러진 모습이 아니라 더 평온하고 온전한 모습이었습니다. 그 놀라운 모습 속에서 사람들은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세상사는 원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것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후 이 사건은 교회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우상화 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뜻과는 전혀 관계없는 치세움의 포장을 더해왔기 때문입니다. 어느 듯 그 포장은 호두 껍데기처럼 단단해졌습니다. 그 포장에 가려 우리는 예수님 당시의 그 감동적인 모습을 더 이상 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수직으로 곤두세워진 예수님의 모습을 멀리서만 바라 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교회가 가르쳐 왔던 예수님도 예수님이 보여주시고자 했던 모습이 아니라 교회가 그리고 싶은 예수의 모습이었습니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는 오랫동안 포개어져온 그 단단한 포장을 벗겨내는 일인 것 같습니다. 물론 피 뭍은 옷 조각을 찾는 고고학적 탐구는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을 부수고 부수면서 끝내는 죽음으로 자신의 전부를 부수어서, 마침내 지체들의 자리로 내려와 사랑을 전해주려 했던 그 참모습을 최대히 가까이 다가가 느껴보고자 하는 열망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지난번 한완상 형제님은 내가 가이드 할 테니 아예 마음속까지 한번 들어가 보자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지금도 차별화를 꾀하는 교회는 호두알 껍데기 같은 단단한 명분을 만듭니다. 곤두선 말을 만들어냅니다. 그것은 차별을 크게 내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흐르는 물이 다시 빗줄기가 되어 오르려는 것과 같습니다. 특별한 것을 찾고 내세우려고 합니다. 그래서 길가다 보면 많은 교회에 무언가 크게 알리려고 하는 현수막이 걸려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정말 귀중한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다하는 결혼이 당사자에게는 특별하고, 누구나 먹는 밥이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물 위를 걷는 것만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땅 위를 걷을 수 있는 것이 오히려 큰 은총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뭐 물 위를 걸을 일이 자주 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려면 예수님 말씀처럼 쉬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함께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쉬운 말을 하려 애쓰고, 위에 서고자 하는 사람은 특별한 말을 찾습니다. 마찬가지로(그러므로) 사랑 하고자 다가가는 사람은 동질성을 찾고, 차별화를 원하는 사람은 그와의 이질성을 내세웁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최근 두 분의 말씀 증거가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근래의 청년부(형님)와 강경희 자매님의 말씀증거입니다. 이 분들은 새길교회가 다른 교회와 다른 점보다는 동질성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새길교회가 성숙해지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새길교회가 말하는 ‘넓은 신학, 깊은 신앙’도 서로 같은 무게가 아니라 ‘넓은 신학’은 ‘깊은 신앙’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면 지체 교회들과의 공감 폭이 더 넓어질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와 관련되는 그림을 하나 보겠습니다. 이 그림은 좌측 부분이 더 어두워 보이지만 사실은 같은 것입니다. 가운데 서로 대립되는 면을 중심으로 비교하니까 그렇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멀리 보면 이렇게 같은 면이 보입니다. 이 그림은 임동건 형제님께서 저에게 가르쳐 주신 것인데 형제님은 이 그림을 보여주시면서 사람들이 토론을 할 때도 바로 앞 대립되는 부분만 보니까 토론이 격해지고 제자리를 맴돌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사실 이 그림처럼 종교도 교파도 눈앞의 외형만 보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더 멀리, 더 깊이 있는 곳을 보면 유사한 점도 많이 있을 것 같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사람들은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 같이 느끼고, 슬픈 영화를 보면 종교, 종파를 넘어 같이 눈물을 흘립니다. 이렇게 세상 속에서 하나로 잘 지나다가 오히려 평화와 사랑을 말하는 종교 속으로 들어가면 전혀 이질적인 사람이 되어 나누어집니다.
갑자기 여호와의 증인이 되고, 조계종 신도가 되고, 장로교 통합 교인이 되고, 평신도교 교인이 됩니다. 저는 이 세상 종교의 깊은 교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느 누구도 그 무엇도 창조주의 피조물이며, 세상도, 창조질서도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을 제외한 그 어떤 피조물도 종파를 가지고 있는 것은 없습니다. 교회의 새가 찬송가를 부르지 않고, 절간의 새가 찬불가를 부르지 않습니다. 새의 노래함은 창조질서의 산물이며, 그것은 배타가 있을 수 없는 유일신 창조주의 창조물입니다. 저는 오늘 그 유일신 창조주를 저의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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