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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갈5: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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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재 교수 |
참고 : | 새길교회 2009.10.25 |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세 가지 표어의 해독과 그 치유
[갈라디아서 5: 1~7]
김경재 교수 (한신대 명예교수)
종교개혁의 근본정신과 세가지 표어의 빛과 그림자
1. 올해로 세계 약 7억 개신교 신도들은 종교개혁 492주년을 맞게 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이후, 로마 가톨릭교회는 근본적으로 새롭게 갱신되었다. 그 기적 같은 공의회 이후 반세기 세월이 흐르는 동안, 신구교라는 표현이 첨부터 잘못된 것이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한국개신교는 중세 기독교보다 더 보수적으로 경직되어가고, 한국 가톨릭교회는 진보적 개혁정신이 더 왕성한 형국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정신을 표현했던 세 가지 표어(모토)가 지닌 해독을 반성하고, 치유의 길을 복음의 빛 안에서 다시 찾고자 하는 것이 오늘 말씀증언의 지향점이다.
2. 좀 더 구체적으로 시대정황을 말하자면 이렇다. 한국 개신교계에서 발행하는 교계신문, 텔레비전, 학술지등을 살펴보면, 솔직하게 말해서 매우 시대착오적이며 구태의연한 주제와 담론으로 가득차고 있다고 말 할 수밖에 없다. 어두운 면만을 들춰내는 것 같아 민망하지만, 한두 가지 예를 들자면, 2013년 부산에서 개최예정인 세계교회협의회(wcc) 모임은 7년마다 한 번씩 모이는 세계적 축제의 뜻 깊은 개신교 공의회인 셈이다. 그런데, 온갖 험담으로 이 모임을 헐뜯는 보수교단 개신교지도자들이 활개를 치는 곳이 한국 기독교계이다. 설혹 성경관이나 신학 경향성이 좀 다르더라도, 축하해줄만한 맘의 여유마저 다 잃어버린 오늘 개신교의 모습이 남 보기에 부끄럽고 슬플 뿐이다. 장로교는 이미 수십 개 교단으로 분열될 만큼 되었고, 장로교 다음으로 교세가 큰 감리교단은 총감독선거를 둘러싸고 세상 법정투쟁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복음주의’라는 기치를 내건 한국 개신교의 위세는 왕성한데, 한국일반사회인들의 개신교에 대한 신뢰도는 해마다 낮아져 가며, 따뜻한 눈길을 감지하기 힘들게 되었다.
3. 왜 이렇게 되었을까? 종교개혁자들의 개신교 신앙에 무엇인가 잘못된 점이 있어서 인가? 본래는 참신하고 생명적이고 복음적이던 개신교 신앙 및 신학원리가, 시대를 지나면서 창조적으로 변화하지 못하고 정체되어 화석처럼 경직화된 탓일까? 종교개혁의 근본정신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하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 되시게 하라!”(Let God be God !)였다. 교황, 주교회의, 경건한 수도회, 정통교리, 거룩하고 장엄한 미사의례, 스콜라 신학체계 등등 매우 고상하고 훌륭한 것들이, 모두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에 오르겠다고 시도하는 온갖 우상 만들기를 중단 하라는 것이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이었다. 왜냐하면, 그리하여야 하나님은 하나님답게 은혜로우신 주님이 되시고, 인간은 인간답게 자유로운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는 사도 바울의 권고를 붙잡은 것이다.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 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 할 지니라”(요4:21,23-24)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위에 서려는 것이 종교개혁의 신앙의 자리인 것이다.
5.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1500년간 고색찬연한 가람들과 석조건물 벽에 온갖 이끼가 자라고 매연이 달라붙어 화강암과 대리석이 검게 썩어가듯이, 기독교라는 건축물이 잡초와 이끼와 산화물로 원형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다 허물어진 불교조각물 처럼, 중국 돈황 막고굴의 빛바랜 불상과 탱화처럼, 예루살렘 옛 성전의 허물어지고 남은 ‘통곡의 벽’처럼, ‘갈릴리 생명의 복음’이 그렇게 변질되어 있었다. 함석헌 옹의 말처럼, 살아있는 종교라면 봄이 올 때마다 새순을 내는 생기왕성한 나무처럼 항상 싱싱해야 할 것이다. 종교는 위풍당당한 궁궐 같은 건축물이 되려고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종교나 국가나 언제든지 역사 속에서 보면 토건건축사업에 열을 올리는 것이 문제이다. 겉으로 보면 국력이나 교세가 왕성한듯하지만, 안으로 보면 생명력은 고갈되고 자기과시적 공적비 만들기에 다름 아니다.
6.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주 하나님 되게 하고, 사람은 은혜의 햇빛아래 건강하게 자유로운 사람으로 제자리 찾게 하려고 일어난 것이 종교개혁이었다. 그리고, 기존건축물이 너무나 단단하고 거대하여 해체하기가 쉽지 않으므로, 요즘 건축술로 말하자면 건물 리모델링할 때 필요한 도구와 기술처럼, 종교개혁의 세 가지 모토 ‘오직 성경만, 오직 은총만, 오직 믿음만’이라는 표어는 개혁의 방편인 셈이다. 그렇다. 그것은 방편적 도구일 뿐, 그것이 하나님도 아니고 그리스도도 아니었다. 복음을 분명하게 드러내놓기 위한 신학적 담론의 방편적 표어일 뿐이다. 3S 곧, 오직 믿음만(sola fide), 오직 은총만(sola gratia), 오직 성경만(sola scriptura)이 바로 그것이다.
7. 오늘의 한국 개신교가 특히 이렇게 병들게 된 이유가, 특별히 한국 사람이 나빠서가 아니라, 종교개혁원리에 무슨 문제가 있어서가 아닌가 성찰 할 단계에 이르렀다고 서두에 말했다. 오늘 새길교회 말씀강단에 선 설교자가 감히 진단하기엔 이 3S 원리에 문제가 있다고 말 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 종교개혁의 표어로 당연시하는 <오직 ...만>이라는 라틴어 형용사(solus, sola, solum)가 오용되고 남용되어 독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개신교 정신에서 본다면 <오직 ...만>이라는 형용사는 절대자 하나님에게나 붙일 수 있는 것이지, 다른 교리나 신학적 도그마 일지라도 함부로 붙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붙이면 절대화되고 신앙이 경직화되고 마침내 우상화되기 때문이다.
8. 라틴어 사전을 찾아보면, solus(혹은 sola, solum)라는 형용사에는 세 가지 중요한 뜻이 담겨 있다. 첫째는, <오직 하나뿐인, 유일한, 오직 그것뿐인>이라는 의미가 있다. 둘째는, <외로운, 고립된, 소외된> 이라는 뜻이 있다. 셋째는, <황량한, 적막한, 인적이 드문>이라는 뜻이 있다. 믿음, 은총, 성경 앞에 <sola>를 붙임으로 인해서, <오직 그것만>이라는 배타적 의미를 갖게 되었고, 외롭고 고립된 기독교가 되었고, 황량하고 적막한 개신교 영성세계가 남게 되었다.
세가지 종교개혁 표어의 문제와 해독
9. 종교개혁당시 개혁운동의 모토로서 <오직 믿음만, sola fide>을 강조하게 된 삶의 자리를 생각해 봐야 한다. <오직 믿음만>이라고 말할 때, 본래의미는 무슨 기독교의 근본주의 신학이 말하는 5가지 근본 교리를 믿거나, 교권체계의 권위를 믿거나, 심지어 예수의 십자가 대속을 믿는다는 의미로 쓴 표어가 아니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롬1:17)는 종교개혁의 불꽃 성구는 구약 하박국 4:4절에서 온 것으로서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에서 인용한 것이다. 믿음이란 사람이 사람을 혹은 하나님을 미쁘신 분이라고, 신실한 분이라고, 약속을 꼭 지키시는 분이라고 의심 않고 신뢰하는 것을 뜻한다. 아브라함을 어둔 밤하늘아래 홀로세우시고, 네 씨가 저 밤하늘 별처럼 되리라고 약속하실 때, 상식으로서는 납득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전능하시고 신실하신 약속을 아브라함은 믿었다. 그 신뢰하는 믿는 마음을 보시고 하나님이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었다(창15:6)고 했던 것이다.
10. 본래 믿음은 지적 동의이거나, 교리 수용이 아닌 것이다. 인격적 신뢰와 인격적 사랑의 관계어휘인 것이다. 자식이 부모의 맘을 믿는 것처럼, 평생 한두 명 있을까 말까 하는 친구관계에서 서로의 신뢰 같은 것이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아버지나 친구가 아니라 눈에 안보이며, “없음으로 계신이”(유영모)를 믿어야 하는 신앙세계에서 그 믿음은 쉽고도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사도들의 경험은 믿음사건은 사람의 주체적 고백이고 신뢰의 결단이면서도 동시에 성령을 통하여 믿음에 이르는 것이다. 갈 5:5절에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라고 했다. 그리스도인의 믿는 행위가 또 하나의 공로행동이 아닌 것이다. 폴 틸리히는 그래서 개신교의 칭의신앙을 오해하지 않으려면 ‘Justification by faith in grace'라고 표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1. <오직 믿음으로만>이라는 표어가 오용되고 남용됨으로 말미암아, 본훼퍼가 한탄한 것처럼, 개신교는 그리스도 제자직의 실천과 행동이 동반되지 않는 ‘싸구려 은총신앙인’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오늘 본문 갈 5:6절을 보면 할례나 무할례냐가 아무 소용이 없고 “사랑으로서 역사하는 믿음뿐이다”고 했고, 갈5:5절을 한글 새번역 성경으로 읽으면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라고 번역되었는데, 표준영어성경은 그 구절을 “For through the Spirit, by faith, we wait for the hope of righteousness"라고 더 분명하게 번역하였다.
12. <오지 은총만, sola gratia>이라는 표어의 진정한 뜻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잘 보이려고 온갖 자기꾸밈과 칭찬받는 일들을 하려는 가당치 않는 노고를 중지하라는 것이다. 중세기 가톨릭교회가 얼마나 교인들에게 인과응보적 공로신앙을 강조함으로서 교인들을 경건으로 치장한 피곤함을 가져다주었던가? 예수께서 가르치시고 열어주신 복음 곧 “ 영원자는 티끝 같은 너희들일지라도, 너희들의 자비하신 아버지가 되시니 그리 불러라”고 가르치신 그 가르침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현대 한국교회는 탕자비유에 나타나는 두 아들 중 둘째아들 모습이 아니라 첫째 아들 모습처럼 되어버렸다. 가업을 지키고 부모를 모시고사는 고생을 하지만, 맘속엔 기쁨, 희열, 감사, 연민의 맘은 살아진지 오래다. 거지되어 돌아온 동생에 대한 멸시와 분노심만이 아니라, 아버지의 환대 또한 몹시 불만이었다. 한국교회는 회당 앞자리에 서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저 세상 지저분환 죄인들이나 세리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눅18:11)라고 기도하는 유대교 바리새인처럼 된 모습이다.
13. 자본주의 사회 자체가 일중독에 걸린 것처럼, 자본주의 사회 형성 및 그 발달과정과 괘도를 같이해온 개신교의 영성은 <오직 은총만>의 표어가 무색하리만큼 전도에, 선교에, 교회건축에, 대형교회에로의 양적 확장에, 지방자치제 성시화에, 전 지구문명의 복음화에 항상 바쁘다. 신도의 감성적 마음은 복음성가의 뜨거운 열정으로 가득 찰는지 모르지만, 영혼 깊은 곳은 영적 외로움과 황량함이 시시 때때로 찾아온다. 그런 느낌이 찾아오면 마귀사탄의 유혹으로 알고 더욱 종교일에 충성하고 열심낸다. 아예 예배 순서 속에 고요한 묵상순서를 넣지 않는다. 영혼을 고요함과 홀로 있음, 시간 속에 놔두는 것은 위험하고 견디기 어렵다고 잘못 생각하기 때문이다.
14. 마지막으로, 개신교의 가장 강력한 표어인 <오직 성경만>이라는 모토를 생각해봐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본래, 그 표어는 16세기 당시 로마 가돌릭교회가 성경의 권위를 제쳐두고, 교황의 칙령이이나 주교회의의 결의문이나 교리를 성경보다 더 중요시 여기며, 각종 번잡한 신학교리를 맹종하라고 강요하는데 대한 비판이다. 믿는자의 구원을 위해서는 신구약 성경 한권으로서 필요충분하다는 신념이었고, 신구약성경이 다른 모든 교회칙령이나 주교회의 결정문보다 우선적으로 중요함을 역설한 것이다. <오직 성경만>의 모토는 성경책을 절대시하는 <성경축자무오설>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러한 본래정신은 어디로 가버리고, 개신교는 <오지 성경만>을 절대교리로 우상화하고 절대시함으로서 스스로 책종교가 되어버렸다. 하나님도, 진리도, 과학도, 지성도 모두 성경문자 새장 속에 가두어 버렸다. 성경말씀에 대한 뜨거운 사랑은 백번 강조해도 좋은 것이지만, <오직 성경만>이라는 강조어법을 신성불가침한 <성경절대무오설> 도그마로 둔갑시킬 때, 백가지 기독교의 해독이 거기서부터 유래한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치유받는 길
15. 이 모든 종교개혁 3대 표어의 해독을 치유하는 길은 무엇인가? 갈리리 복음의 단순성에로 돌아가야 한다. 찬송가 가사 대로 “빈손 들고 앞에가 십자가를 붙드네, 의가 없는 자라도 도와주심 바라고, 생명 샘에 나아가니 나를 씻어주소서”라고 심령이 가난하고 겸손한 신앙자리에로 되돌아가는 길 뿐이다. 교권주의 종교독으로 말미암아 사람의 심령이 거의 죽음의 단계에 도달한 한국 개신교를 살리는 수술은 <오직 성서만, 오직 믿음만, 오직 은총만> 이라는 종교개혁의 세 가지 모토를 ‘사랑의 고백언어’로서 재해석 해내고, 두꺼운 조개껍질같이 굳어진 한국 개신교 신학과 신앙패러다임을 교리적 동굴에서 해방시켜내야 한다. 그 치유처방은 오직 한 가지 오늘 본문 결론의 말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 Faith working through love)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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