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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84) 치우치지 않는 삶과 신앙 (행 15:22-29)
< 진정한 회의자의 자세 > 제 1차 예루살렘 교회회의는 약간의 단서를 달긴 했지만 바울과 바나바의 주장을 수용해서 이방인 신자들에게 할례를 강요하지 않는 것으로 결론 났습니다. 그러자 신속하게 그 후속조치를 취합니다. 그래서 그 결론을 전하는 사람으로서 유다와 실라를 선택하고 그들 편에 이방인 형제들에게 전하는 편지를 보냅니다(22-23절). 대략 이런 내용의 편지입니다. 첫째, 어떤 사람들이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고 유대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미혹하는 얘기를 전하는데 그 사람들은 우리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그렇게 주장하고 다닌다는 것입니다(24절). 둘째, 주님을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않는 바나바와 바울을 공식적인 선교사로 인정하기로 일치 가결했다는 것입니다(25-26절). 셋째, 바나바와 바울이 전하는 입장인 공인된 입장임을 보증하기 위해 유다와 실라를 특사로 보낸다는 것입니다(27절). 넷째, 율법에 매일 필요는 없지만 우상의 제물, 피, 목매어 죽인 것, 음행은 멀리하라는 것입니다(28절). 이 편지는 그들이 내린 결정을 확실하고 단호하게 인장을 찍는 편지였습니다. 결론을 내리기 전까지 그들은 엄청나게 토론을 했지만 결론을 내린 후에는 더 이상 이의를 달지 않고 “일치 가결했다.”고 선포합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모습입니까? 결론 내리기 전까지는 치열한 토론을 할 수 있지만 결론을 내린 후에는 더 이상 딴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이 진정한 회의자의 자세입니다. 왜 교리나 신경이 필요합니까? 한번 결정된 것에 대해서 딴 소리를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사람이 만든 교리가 완벽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교리는 필요합니다. 만약 반듯한 교리가 없다면 인간의 역사가 끝날 때까지 통일된 의견이 나올 수 없습니다. “내가 이런 체험을 했는데...”라고 하면서 딴소리를 해대면 성경은 끊임없이 업데이트 되어야 하고, 그렇게 한 사람의 체험으로 성경이 업데이트 되기 시작하면 성경은 더 이상 성경이 될 수 없습니다. < 치우치지 않는 삶과 신앙 > 변함없는 성경과 함께 확고한 신경도 필요합니다. 또한 교리와 신학도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뜨거운 신앙을 내세우면서 교리를 마치 뜨거운 신앙을 막고 성령을 제한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배타하지만 교리는 성령을 제한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 아니라 뜨거운 것과 자기 체험을 내세워서 자꾸만 말씀 밖으로 나가려는 것을 제한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무리 뜨거운 신앙을 자랑해도 바른 교리를 세우지 못하면 그 뜨거움은 얼마 못 가서 사라집니다. 뜨거운 뒤를 따라오는 냉철한 교리가 성령의 역사를 영속적으로 만듭니다. 옛날에 신학교에 강의 나갈 때 뜨거운 신앙을 자랑하지만 신학공부를 등한시하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도 정복하려고 하는 판에 왜 교리부분은 정복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들 중에 위대한 신학자도 몇 사람은 나와야 합니다. 신앙은 자랑하면서 왜 신학은 경시합니까? 신학 영역을 빼앗기고 신앙만 자랑하는 사람을 보통 사람들은 우러러 보아주지 않습니다. 결국 ‘신학이 없는 신앙’은 ‘신학이 있는 신앙’으로부터 철저히 무시당하게 됩니다.” 성령 충만을 아는 사람이 받았다면 “아! 그런가 보다!”라고 했겠지만 갈릴리 출신의 제자들이 받으니까 “저들이 새 술이 취했다.”고 합니다. 세상이 그런 법입니다. 물론 그런 아픔과 상처가 없도록 신학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신학은 필요합니다. 아무리 좋은 신앙도 신학이란 틀이 없으면 그 수명은 한 세대를 못 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신학도 주신 것입니다. 교회는 위대한 능력자도 배출해야 하지만 위대한 신학자도 배출해야 합니다. 초월성과 내재성이 겸비된 치우치지 않는 삶과 신앙이 앞으로는 축복을 선도하고 뒤로는 위대한 족적을 남깁니다.ⓒ 글 : 이한규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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