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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33:1-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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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38596 |
2006.6.26
야곱과 에사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족장들만이 아니라 한 시대를 풍미한 여러 사사, 예언자, 왕들 중에서 야곱만큼 드라마틱하게 인생을 산 사람도 없습니다. 창세기 25장부터 50장에 이르는 야곱의 인생을 연극 식으로 표현한다면 크게 4막으로 구성됩니다. 1막은 쌍둥이로 태어나 부모의 슬하에서 생활한 가나안의 삶이며, 2막은 삼촌 라반에게 가서 일가를 이룬 하란에서 삶이고, 3막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서 살게 삶이며, 마지막 4막은 요셉 덕분으로 이집트로 이주해서 살게 된 여생입니다. 물론 그의 파란만장의 삶을 이렇게 단순화하기는 힘들지만 우리가 한 인물의 삶을 특징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막과 막 사이에는 어떤 특징들이 있습니다. 1막에는 형 에사오와 아버지 이삭을 속인 일이, 2막에서는 삼춘 라반을 속인 일이, 3막에서는 흉년이 일어나서 야곱은 어쩔 수 없이 다음 단계의 삶으로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야곱 이야기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신앙의 동기로 작용하게 된 이유는 그 위기가 오히려 기회로 변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부모의 슬하에서 삼촌 라반에게 쫓겨 갈 때 야곱은 중간 기착지점인 벧엘에서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목인 얍복강 나루터에서 천사와 씨름하는 일이 있었습니다(창 32:23-32).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런 경험이 있은 직후에 사건입니다.
지금 야곱은 형 에사오가 부하 4백 명을 거느리고 자기를 맞으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오금이 절여 걷기도 힘들 정도였습니다. 에사오를 직접 대면하기 전에 자기 식구들을 다른 위치에 배치했습니다. 원래 그는 네 명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두 명은 삼촌 라반의 딸들이고, 나머지 두 명은 그 딸들의 몸종들이었습니다. 두 여종과 그녀들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을 제일 앞에 세우고, 언니인 레아와 그녀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을 두 번째에 세우고, 라헬과 그녀에게서 태어난 요셉을 가장 뒤에서 따라오게 했습니다. 네 명의 아내 중에서 가장 사랑한 라헬과 열한명의 아들 중에서 가장 사랑한 요셉을 자기보다 뒤에 세운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당시는 아직 막내인 베냐민이 태어나기 전이라서 아들이 열한 명뿐입니다.) 그 이유는 형 에사오가 자기 식구들에게 행패를 부리는 경우를 대비한 것이겠지요.
야곱이 형 에사오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속사연이 있습니다. 벌써 20년 전 일이지만 야곱은 아버지 이삭이 장남인 에사오에게 내려주어야 할 장자의 축복을 가로챈 일이 있습니다. 그러자 에사오는 야곱을 죽여 버리겠다면서 칼을 들고 다녔습니다. 지금도 유산 분쟁으로 인해서 자녀들 간에 법정 싸움이나, 심지어는 칼부림이 일어나는 것과 비슷한 일이 그들에게서 벌어진 것입니다. 야곱이 원래 이런 야망이 많은 인물이기는 했지만 야곱을 편애한 어머니 리브가의 욕망도 이런 불행의 한 원인이었습니다. 이제 20년이 지난 일이지만 야곱은 그때에 자신의 마음에 각인된 형의 모습으로 인해서 형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은 어렸을 때 어떤 경험을 하는가에 따라서 그의 정서와 세계관이 결정되는 것 같습니다. 경쟁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가정에서 자랐다면 그는 평생 다른 사람을 그런 경쟁의 대상으로만 여길 것입니다. 엘리트주의에 사로잡힌 가정에서 자란 아이라고 한다면 그는 죽을 때까지 그런 엘리트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한 인격체에 도덕성이 있는지 없는지에 상관없이 자신의 의식이 자동적으로 그렇게 작동된다는 말씀입니다. 어릴 때 습득된 잘못된 세계관과 가치관을 극복하려면 젊었을 때 끊임없는 자기성찰을 시도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우리는 자기 성찰이 아니라 오히려 한번 주어진 그런 가치관을 강화하는 것으로만 인생을 집중하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기독교 신앙도 어렸을 때, 또는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가 가장 중요한 것 같습니다. 사람은 떡잎부터 알아볼 수 있다는 말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해후장면
앞서 많은 선물을 보내는 등, 형 에사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만약의 사태를 위한 안전장치도 마련한 다음에 야곱은 형 에서와 만났습니다. 성서기자는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리고 야곱은 앞장서서 걸어 가다가 일곱 번 땅에 엎드려 절하면서 형에게고 나갔다.”(3절). 야곱은 지금 이집트의 파라오를 알현할 때나 있을 법한 최고의 경의를 갖추고 에사오 앞에 섰습니다. 이 순간에 야곱의 마음에는 온갖 상념이 교차했겠지요. 일차적으로는 두려움이 그의 머리에서 발끝까지 채웠을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비굴하게 보일 정도로 자기를 낮추고 있는 자신에 대한 연민도 작용했겠지요. 거기에다가 ‘여차’ 하면 36계 줄행랑을 쳐야 하니까 형 에사오의 눈치를 살펴야만 했습니다.
자신이 받아야 할 장자의 축복을 가로챈 동생 야곱을 20년 만에 만난 에사오의 행동에 대해서 성서기자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에사오는 마주 뛰어와서 야곱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울음을 터뜨렸다.”(4절). 이 모습은 남북이산가족의 상봉 장면 같습니다. 그 어떤 이해타산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혈육의 만남은 바로 이와 같습니다. 감정의 심연에서 우러나오는 감격과 기쁨이 울음을 터뜨리게 했습니다. 쌍둥이 형제인 에사오와 야곱의 만남에서 우리는 두 사람의 대조되는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 야곱의 태도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정중하지만 여전히 형식적인 반면에, 에사오의 태도는 원초적인 가족의 정을 물씬 풍겼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에사오와 야곱에 관해서 생각할 때 이스라엘의 역사가 야곱의 후손에게 전승되었다는 점에서 야곱을 꽤 괜찮은 반면에 에사오는 형편없는 사람으로 여길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러한 성서기자들의 평가는 일단 옳다고 하더라도 이 두 사람의 품성만으로 본다면 야곱보다는 에사오가 훨씬 윗길입니다. 에사오는 20년 전의 일을 아예 기억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런 그의 태도가 장자의 명분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솔함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간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인간미라는 사실만은 인정해야 합니다.
일단 야곱과 에사오의 해후장면은 극적인 모습이 연출되었습니다. 그 뒤로 형제의 대화가 좀 지루하게 보일 정도로 자세하게 이어집니다. 야곱의 일행을 보고 에사오는 누구인지 묻습니다. 야곱은 자기의 아내들과 자식들을 일일이 소개하면서, 그들을 형에게 인사드리게 합니다. 에사오는 야곱 일행보다 앞서 만난 가축 떼에 관해서도 묻습니다. 형에게 드리는 선물이라고 하자 에사오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야곱아! 내 살림도 넉넉하다. 네 것은 네가 가져라.”(9절). 흡사 우리의 옛 이야기 ‘의좋은 형제’처럼 그 많은 재물을 서로 가지라고 옥신각신 합니다.
가축 떼 이야기가 일단락된 다음에 에사오는 동생을 자기의 영지로 데리고 갈 생각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야곱은 그것을 극구 사양합니다. 야곱이 아직도 형을 믿지 못한 것일까요? 그러자 에사오는 자기 부하 몇 명을 남겨 두고 동생을 돕게 하겠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것마저 사양합니다. 성서기자는 이 극적인 만남을 이렇게 종결합니다. “그 날 에사오는 길을 떠나 세일로 돌아갔고, 야곱은 수꼿으로 가 그곳에 집을 짓고 가축 떼가 쉴 우리도 여러 개 세웠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수꼿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16,17절).
20년 만에 만난 형제의 상봉 치고는 뒤끝이 별로 개운치 못합니다. 잔치도 베풀고 함께 어울리면서 회포를 풀어야 했는데, 그들은 다시 만나겠다는 기약도 없이 그렇게 헤어졌습니다. 야곱을 향한 에사오의 태도가 진실한 것이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 성서기자는 평가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호의에 대해서 정중하게 거절하는 야곱에게 에사오가 서운한 마음을 품었는지 아닌지 성서기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대단한 일이 얼어날 것처럼 독자들의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가 너무나 싱겁게 끝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평화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야곱과 에사오의 해후가 싱겁게 끝나 버린 이유는 일단 야곱과 에사오의 태도가 전혀 달랐다는 데에 있습니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야곱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최대한의 예의를 보였을 뿐이지만 에사오는 형제의 정을 보였습니다. 이렇게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 사이의 만남은 결국 시들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남한과 북한의 통일에 대한 의지도 이와 비슷할지 모릅니다. 북한 주민들은 세뇌당한 탓인지 모르지만 절절한 형제애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남한은 상대적으로 형식적인 입장을 취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하든지 서로 관계를 피할 수 있는 핑계를 찾기 마련입니다.
또한 야곱과 에사오가 큰 기대를 안고 만났다가 시들하게 헤어졌다는 사실은 인간의 역사에서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20년이라는 시간을 극복하는 것에는 당연히 흥분과 감격이 따르지만 그것은 곧 우리에게 일상의 현실로 다가옵니다. 헤어져 있을 때 경험하지 못했던 골치 아픈 일들이 생깁니다. 그런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훨씬 큰 상처를 안고 다시 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바에야 냉정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야곱처럼 형을 만나지 않은 것처럼 처음부터 정리하는 게 지혜로울지도 모릅니다. 남북분단 55년, 육이오 발발 50년이 지납니다. 우리의 통일은 ‘옵션’이 아니라 ‘당위’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점에서는 통일이 남과 북 양쪽에 예상하지 못한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에 좀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15년 전에 통일을 이룬 독일의 예를 보더라도 통일이라는 게 단지 감격과 기쁨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매우 현실적인 문제들을 만들어내는 게 틀림없습니다.
저는 위에서 야곱과 에사오의 해후가 예상 외로 밋밋하게 끝난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하나는 야곱과 에사오의 입장이 크게 달랐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20년만의 해후가 주는 기쁨보다는 현실적인 문제가 훨씬 중요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은 사회과학이나 심리학 차원에서 분석될만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머물지 말고 신학적인 차원에서 그 이유를 질문해야 합니다. 성서기자는 왜 이런 식으로 야곱과 에사오의 만남을 정리하는 걸까요? 성서는 인생이라는 게 대개 그렇고 그렇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치려는 걸까요? 성서기자는 무슨 의도에서 별 일이 아니었다는 듯이 이 이야기를 종결짓고 있을까요?
우리는 형 에사오를 만나기 위해서 야곱이 어떻게 준비했는가 하는 문제를 염두에 두고 이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창 32장에 야곱이 형 에사오를 만나기 위해서 준비한 과정이 소상하게 진술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여기서 다시 반복해서 말씀드릴 필요는 없습니다. 핵심은 형 에사오에게 보내는 선물이 매우 많다는 것과 종들을 통해서 형에게 전달한 메시지가 매우 정중하다는 것입니다. 북한에 양식과 비료를 지원하는 걸 보고 ‘퍼주기’라고 못마땅해 하는 남한 사람들이 적지 않는데, 야곱은 그야말로 퍼주기 식으로 많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야곱이 준비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들이 준비되었다는 뜻입니다. 그가 그렇게 준비한 이유는 형 에사오에게 죽을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야곱이 원래 남을 잘 속였고, 그래서 의심이 많은 인물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상황은 분명히 평화보다는 전쟁의 가능성이 훨씬 높았기 때문에 야곱이 그렇게 준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습니까? 그런 준비와 아무 상관없이 에사오는 야곱과 전쟁을 일으킬 생각이 없었다는 게 드러났습니다. 이는 곧 야곱과 형 에사오와의 평화는 하나님의 은총이었다는 뜻입니다. 평화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평화를 지향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평화를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도 없는 걸까요? 여기에 바로 기독교 신앙의 긴장이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평화가 하나님의 은총이지만 우리가 평화지향적인 삶을 치열하게 추구해야 한다는 사실 사이에서 우리는 역사 앞에서 책임적인 존재들입니다. 형 에사오와 평화를 이룬 야곱은 곧 이어서 아들들의 난폭한 행동으로 인해 또 다시 현지인들과 전쟁을 벌입니다. 인간이 끊임없이 일으키는 전쟁의 과정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선물로 주시려고 합니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평화를 향해서 살아갑니다. 가정 안에서, 남과 북에서, 세계의 분쟁 가운데서 ‘평화를 위해서’ 싸우면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마 5:9)고 말씀하셨습니다. 육이오 55주년을 맞아 한국의 교회는 남북의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나요?
야곱과 에사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족장들만이 아니라 한 시대를 풍미한 여러 사사, 예언자, 왕들 중에서 야곱만큼 드라마틱하게 인생을 산 사람도 없습니다. 창세기 25장부터 50장에 이르는 야곱의 인생을 연극 식으로 표현한다면 크게 4막으로 구성됩니다. 1막은 쌍둥이로 태어나 부모의 슬하에서 생활한 가나안의 삶이며, 2막은 삼촌 라반에게 가서 일가를 이룬 하란에서 삶이고, 3막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서 살게 삶이며, 마지막 4막은 요셉 덕분으로 이집트로 이주해서 살게 된 여생입니다. 물론 그의 파란만장의 삶을 이렇게 단순화하기는 힘들지만 우리가 한 인물의 삶을 특징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막과 막 사이에는 어떤 특징들이 있습니다. 1막에는 형 에사오와 아버지 이삭을 속인 일이, 2막에서는 삼춘 라반을 속인 일이, 3막에서는 흉년이 일어나서 야곱은 어쩔 수 없이 다음 단계의 삶으로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야곱 이야기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신앙의 동기로 작용하게 된 이유는 그 위기가 오히려 기회로 변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부모의 슬하에서 삼촌 라반에게 쫓겨 갈 때 야곱은 중간 기착지점인 벧엘에서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목인 얍복강 나루터에서 천사와 씨름하는 일이 있었습니다(창 32:23-32).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런 경험이 있은 직후에 사건입니다.
지금 야곱은 형 에사오가 부하 4백 명을 거느리고 자기를 맞으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오금이 절여 걷기도 힘들 정도였습니다. 에사오를 직접 대면하기 전에 자기 식구들을 다른 위치에 배치했습니다. 원래 그는 네 명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두 명은 삼촌 라반의 딸들이고, 나머지 두 명은 그 딸들의 몸종들이었습니다. 두 여종과 그녀들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을 제일 앞에 세우고, 언니인 레아와 그녀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을 두 번째에 세우고, 라헬과 그녀에게서 태어난 요셉을 가장 뒤에서 따라오게 했습니다. 네 명의 아내 중에서 가장 사랑한 라헬과 열한명의 아들 중에서 가장 사랑한 요셉을 자기보다 뒤에 세운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당시는 아직 막내인 베냐민이 태어나기 전이라서 아들이 열한 명뿐입니다.) 그 이유는 형 에사오가 자기 식구들에게 행패를 부리는 경우를 대비한 것이겠지요.
야곱이 형 에사오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속사연이 있습니다. 벌써 20년 전 일이지만 야곱은 아버지 이삭이 장남인 에사오에게 내려주어야 할 장자의 축복을 가로챈 일이 있습니다. 그러자 에사오는 야곱을 죽여 버리겠다면서 칼을 들고 다녔습니다. 지금도 유산 분쟁으로 인해서 자녀들 간에 법정 싸움이나, 심지어는 칼부림이 일어나는 것과 비슷한 일이 그들에게서 벌어진 것입니다. 야곱이 원래 이런 야망이 많은 인물이기는 했지만 야곱을 편애한 어머니 리브가의 욕망도 이런 불행의 한 원인이었습니다. 이제 20년이 지난 일이지만 야곱은 그때에 자신의 마음에 각인된 형의 모습으로 인해서 형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은 어렸을 때 어떤 경험을 하는가에 따라서 그의 정서와 세계관이 결정되는 것 같습니다. 경쟁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가정에서 자랐다면 그는 평생 다른 사람을 그런 경쟁의 대상으로만 여길 것입니다. 엘리트주의에 사로잡힌 가정에서 자란 아이라고 한다면 그는 죽을 때까지 그런 엘리트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한 인격체에 도덕성이 있는지 없는지에 상관없이 자신의 의식이 자동적으로 그렇게 작동된다는 말씀입니다. 어릴 때 습득된 잘못된 세계관과 가치관을 극복하려면 젊었을 때 끊임없는 자기성찰을 시도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우리는 자기 성찰이 아니라 오히려 한번 주어진 그런 가치관을 강화하는 것으로만 인생을 집중하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기독교 신앙도 어렸을 때, 또는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가 가장 중요한 것 같습니다. 사람은 떡잎부터 알아볼 수 있다는 말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해후장면
앞서 많은 선물을 보내는 등, 형 에사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만약의 사태를 위한 안전장치도 마련한 다음에 야곱은 형 에서와 만났습니다. 성서기자는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리고 야곱은 앞장서서 걸어 가다가 일곱 번 땅에 엎드려 절하면서 형에게고 나갔다.”(3절). 야곱은 지금 이집트의 파라오를 알현할 때나 있을 법한 최고의 경의를 갖추고 에사오 앞에 섰습니다. 이 순간에 야곱의 마음에는 온갖 상념이 교차했겠지요. 일차적으로는 두려움이 그의 머리에서 발끝까지 채웠을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비굴하게 보일 정도로 자기를 낮추고 있는 자신에 대한 연민도 작용했겠지요. 거기에다가 ‘여차’ 하면 36계 줄행랑을 쳐야 하니까 형 에사오의 눈치를 살펴야만 했습니다.
자신이 받아야 할 장자의 축복을 가로챈 동생 야곱을 20년 만에 만난 에사오의 행동에 대해서 성서기자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에사오는 마주 뛰어와서 야곱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울음을 터뜨렸다.”(4절). 이 모습은 남북이산가족의 상봉 장면 같습니다. 그 어떤 이해타산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혈육의 만남은 바로 이와 같습니다. 감정의 심연에서 우러나오는 감격과 기쁨이 울음을 터뜨리게 했습니다. 쌍둥이 형제인 에사오와 야곱의 만남에서 우리는 두 사람의 대조되는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 야곱의 태도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정중하지만 여전히 형식적인 반면에, 에사오의 태도는 원초적인 가족의 정을 물씬 풍겼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에사오와 야곱에 관해서 생각할 때 이스라엘의 역사가 야곱의 후손에게 전승되었다는 점에서 야곱을 꽤 괜찮은 반면에 에사오는 형편없는 사람으로 여길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러한 성서기자들의 평가는 일단 옳다고 하더라도 이 두 사람의 품성만으로 본다면 야곱보다는 에사오가 훨씬 윗길입니다. 에사오는 20년 전의 일을 아예 기억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런 그의 태도가 장자의 명분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솔함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간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인간미라는 사실만은 인정해야 합니다.
일단 야곱과 에사오의 해후장면은 극적인 모습이 연출되었습니다. 그 뒤로 형제의 대화가 좀 지루하게 보일 정도로 자세하게 이어집니다. 야곱의 일행을 보고 에사오는 누구인지 묻습니다. 야곱은 자기의 아내들과 자식들을 일일이 소개하면서, 그들을 형에게 인사드리게 합니다. 에사오는 야곱 일행보다 앞서 만난 가축 떼에 관해서도 묻습니다. 형에게 드리는 선물이라고 하자 에사오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야곱아! 내 살림도 넉넉하다. 네 것은 네가 가져라.”(9절). 흡사 우리의 옛 이야기 ‘의좋은 형제’처럼 그 많은 재물을 서로 가지라고 옥신각신 합니다.
가축 떼 이야기가 일단락된 다음에 에사오는 동생을 자기의 영지로 데리고 갈 생각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야곱은 그것을 극구 사양합니다. 야곱이 아직도 형을 믿지 못한 것일까요? 그러자 에사오는 자기 부하 몇 명을 남겨 두고 동생을 돕게 하겠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것마저 사양합니다. 성서기자는 이 극적인 만남을 이렇게 종결합니다. “그 날 에사오는 길을 떠나 세일로 돌아갔고, 야곱은 수꼿으로 가 그곳에 집을 짓고 가축 떼가 쉴 우리도 여러 개 세웠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수꼿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16,17절).
20년 만에 만난 형제의 상봉 치고는 뒤끝이 별로 개운치 못합니다. 잔치도 베풀고 함께 어울리면서 회포를 풀어야 했는데, 그들은 다시 만나겠다는 기약도 없이 그렇게 헤어졌습니다. 야곱을 향한 에사오의 태도가 진실한 것이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 성서기자는 평가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호의에 대해서 정중하게 거절하는 야곱에게 에사오가 서운한 마음을 품었는지 아닌지 성서기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대단한 일이 얼어날 것처럼 독자들의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가 너무나 싱겁게 끝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평화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야곱과 에사오의 해후가 싱겁게 끝나 버린 이유는 일단 야곱과 에사오의 태도가 전혀 달랐다는 데에 있습니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야곱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최대한의 예의를 보였을 뿐이지만 에사오는 형제의 정을 보였습니다. 이렇게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 사이의 만남은 결국 시들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남한과 북한의 통일에 대한 의지도 이와 비슷할지 모릅니다. 북한 주민들은 세뇌당한 탓인지 모르지만 절절한 형제애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남한은 상대적으로 형식적인 입장을 취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하든지 서로 관계를 피할 수 있는 핑계를 찾기 마련입니다.
또한 야곱과 에사오가 큰 기대를 안고 만났다가 시들하게 헤어졌다는 사실은 인간의 역사에서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20년이라는 시간을 극복하는 것에는 당연히 흥분과 감격이 따르지만 그것은 곧 우리에게 일상의 현실로 다가옵니다. 헤어져 있을 때 경험하지 못했던 골치 아픈 일들이 생깁니다. 그런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훨씬 큰 상처를 안고 다시 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바에야 냉정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야곱처럼 형을 만나지 않은 것처럼 처음부터 정리하는 게 지혜로울지도 모릅니다. 남북분단 55년, 육이오 발발 50년이 지납니다. 우리의 통일은 ‘옵션’이 아니라 ‘당위’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점에서는 통일이 남과 북 양쪽에 예상하지 못한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에 좀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15년 전에 통일을 이룬 독일의 예를 보더라도 통일이라는 게 단지 감격과 기쁨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매우 현실적인 문제들을 만들어내는 게 틀림없습니다.
저는 위에서 야곱과 에사오의 해후가 예상 외로 밋밋하게 끝난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하나는 야곱과 에사오의 입장이 크게 달랐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20년만의 해후가 주는 기쁨보다는 현실적인 문제가 훨씬 중요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은 사회과학이나 심리학 차원에서 분석될만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머물지 말고 신학적인 차원에서 그 이유를 질문해야 합니다. 성서기자는 왜 이런 식으로 야곱과 에사오의 만남을 정리하는 걸까요? 성서는 인생이라는 게 대개 그렇고 그렇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치려는 걸까요? 성서기자는 무슨 의도에서 별 일이 아니었다는 듯이 이 이야기를 종결짓고 있을까요?
우리는 형 에사오를 만나기 위해서 야곱이 어떻게 준비했는가 하는 문제를 염두에 두고 이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창 32장에 야곱이 형 에사오를 만나기 위해서 준비한 과정이 소상하게 진술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여기서 다시 반복해서 말씀드릴 필요는 없습니다. 핵심은 형 에사오에게 보내는 선물이 매우 많다는 것과 종들을 통해서 형에게 전달한 메시지가 매우 정중하다는 것입니다. 북한에 양식과 비료를 지원하는 걸 보고 ‘퍼주기’라고 못마땅해 하는 남한 사람들이 적지 않는데, 야곱은 그야말로 퍼주기 식으로 많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야곱이 준비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들이 준비되었다는 뜻입니다. 그가 그렇게 준비한 이유는 형 에사오에게 죽을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야곱이 원래 남을 잘 속였고, 그래서 의심이 많은 인물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상황은 분명히 평화보다는 전쟁의 가능성이 훨씬 높았기 때문에 야곱이 그렇게 준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습니까? 그런 준비와 아무 상관없이 에사오는 야곱과 전쟁을 일으킬 생각이 없었다는 게 드러났습니다. 이는 곧 야곱과 형 에사오와의 평화는 하나님의 은총이었다는 뜻입니다. 평화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평화를 지향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평화를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도 없는 걸까요? 여기에 바로 기독교 신앙의 긴장이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평화가 하나님의 은총이지만 우리가 평화지향적인 삶을 치열하게 추구해야 한다는 사실 사이에서 우리는 역사 앞에서 책임적인 존재들입니다. 형 에사오와 평화를 이룬 야곱은 곧 이어서 아들들의 난폭한 행동으로 인해 또 다시 현지인들과 전쟁을 벌입니다. 인간이 끊임없이 일으키는 전쟁의 과정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선물로 주시려고 합니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평화를 향해서 살아갑니다. 가정 안에서, 남과 북에서, 세계의 분쟁 가운데서 ‘평화를 위해서’ 싸우면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마 5:9)고 말씀하셨습니다. 육이오 55주년을 맞아 한국의 교회는 남북의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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