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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롬9: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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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38604 |
2005. 7.31.
이방인의 사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입니다. 사도행전 13장46절에서 우리는 이러한 사실의 역사적 배경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전도하자 이방인들은 받아들였지만 유대인들은 심하게 반대했습니다. 이들 앞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당신들에게 전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당신들은 그것을 거부하고 그 영원한 생명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판단하고 있으니 우리는 당신들을 떠나서 이방인들에게로 갑니다.” 갈라디아서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진술되어 있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할례받은 사람들을 위한 사도직을 베드로에게 주신 것같이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직을 나에게 주셨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입니다.”(갈 2:8).
여기서 이방인의 사도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단순하게 생각해서,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다는 의미일까요? 이런 생각이 근본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지만 초기 기독교의 상황을 충분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신학적 체계와 교회 조직이 상당하게 발전한 기독교를 보고 있으니까 초기 기독교도 여전히 이러했으리라고 여길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 당시의 상황은 매우 달랐습니다. 이게 바로 역사의 신비이기도 합니다. 흡사 어머니 뱃속에서 처음 나온 유아가 앞으로 어떤 인물이 될지 전혀 예상할 수 없듯이 기독교 공동체의 초기 상태도 그와 같았다는 말입니다. 예수의 사도들을 중심으로 한 팔레스틴 기독교 공동체와 바울을 중심으로 한 헬라파 기독교 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점에서 공동의 기반이 있기는 했습니다만 유대인들과 맺는 관계에서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팔레스틴 공동체는 자신들이 유대교 공동체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반면에 헬라파 공동체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팔레스틴 공동체가 기독교의 주류로 남아있게 되었다면 오늘의 기독교 모습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이에 반해 스데반으로 대표되는 소위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일곱 집사들과 그들의 뒤를 잇는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혀 다르게 이해했습니다. 일부러 유대교를 배척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신앙의 패러다임이 유대교와 근본적으로 달랐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들은 유대교와 전혀 다른, 그들로부터 자유로운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지금 기독교는 유대교로부터 시작되긴 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과 그들의 종교적 특색 안에 머물지 않고, 보편적 종교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기독교가 여러 가능성 가운데서 유대교와 전혀 다른 새로운 종교로 발전하게 되는 그 길목에 이방인의 사도라 불리는 바울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조국 이스라엘
초기 기독교 당시에 바울이 처했던 자리를 실감 있게 설명하기 위해서 좀 극단적인 예를 들겠습니다. 1910년에 이루어진 한일합방의 주역인 이완용에 대해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 사도 바울에 대해서 유대인들이 느끼는 감정이 비슷할지 모릅니다. 사도행전의 후반부 내용을 따라가다 보면 유대인들 중의 일부가 바울을 암살하기 위해서 서원을 바치기까지 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곧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바울은 매국노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의 신학적 입장이 극단적이었기 때문에 사도들에게서도 일종의 ‘왕따’를 당할 정도였습니다. 바울은 생전에 초기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별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비참하게 최후를 마쳤다는 게 기독교 초기 역사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유대인들에게서 극도의 미움을 받았고, 사도들에게서도 경원의 대상이 되었던 이 바울의 처지가 얼마나 곤란했을는지는 불을 보듯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는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에게는 큰 슬픔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끊임없이 번민하고 있습니다.”(2절). 자신의 조국 이스라엘로 인한 슬픔이며, 그들과의 갈등으로 인한 번민입니다. 그는 결코 자신이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사실을 부인한 적이 없습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의 동족은 이스라엘 사람들이라고 당당하게 고백합니다. 급기야 그는 이렇게 비장하게 언급합니다. “나는 혈육을 같이하는 내 동족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조금도 한이 없겠습니다.”(3절). 바울이 오죽했으면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아무런 한이 없다고 표현했겠습니까? 그는 오늘 분문 바로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신들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능력의 천신들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롬 8:38,39). 모든 존재의 근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입니다. 그가 이렇게 생각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갈 각오를 할 정도로 그는 조국 이스라엘을 가슴 깊이 새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기독교인은 이 두 세계의 경계에서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종족도 없고, 민족도 없고, 정치 이데올로기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기독교인에게는 나라가 있고 정치적 이념도 있습니다. 한 인간의 삶은 나라라는 조건에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한민족으로 태어났다는 건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주어진 조건입니다. 아무리 글로벌 스피릿에 철저하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두 발을 땅에 딛고 사는 한 우리는 결코 이런 조건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말, 우리의 맛, 우리의 옷, 우리의 가락과 우리의 사유 방식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계를 경험하게 만드는 유일하고 숙명적인 조건입니다.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말은 단순히 우리가 살고 있는 땅에서 생산된 것을 먹는 게 좋다는 물리적인 의미만이 아닙니다. 조상 대대로 삼천리 반도 안에서 살아온 우리의 모든 삶은 이런 조건을 통해서만 이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는 철학적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한민족이 우리말을 할 줄 모르면 그는 결코 한민족일 수 없으며, 따라서 그는 세계를 온전하게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영어 조기 교육을 반대합니다. 일단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는 우리말을 철저하게 공부해야만 합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는 하이데거의 경구를 빌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말을 통해서 세계를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는 결국 이 세상을 참되게 이해하는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종교적 기득권
바울도 역시 자신의 정체성을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 찾고 있었습니다. 코로 숨쉬고, 밥을 먹고 배설하면서 생명을 이어가야 할 인간이라고 한다면 아무도 여기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의 하나님 경험, 궁극적으로 그의 예수 그리스도 경험도 역시 이러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의 역사를, 혹은 이스라엘의 종교적 기득권을 그는 4절에서 여섯 가지로 열거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 자녀가 되는 특권. 2) 하나님을 모시는 영광. 3) 하나님과 맺은 계약. 4) 율법, 5) 예배. 6) 하나님의 약속.
우리는 지금 바울이 제시하고 있는 이런 종교적 특권이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인지 완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이 여섯 가지가 나름으로 특별한 의미가 있긴 하겠지만 그 모든 것을 여기서 해명하는 것도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가 핵심적으로 말하려는 게 무엇인지만 짚는 것만으로도 오늘 우리에게는 충분할 것 같습니다. 이 여섯 가지 요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이러한 종교적 기득권을 소유한 민족이었다는 의미입니다.
기득권이라는 말 자체는 좀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고 있긴 하지만 그런 선입관을 버리고 본다면 그게 그렇게 나쁜 뜻만은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과 야곱 같은 족장들의 하나님 경험, 모세와 엘리야 같은 민족 지도자와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건 참으로 귀한 것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수많은 거룩한 문서들이 있었고, 서기관과 제사장과 경건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것은 모두 역사입니다. 이런 역사를 통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하나님과 깊은 관계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종교에서도 역사는 매우 중요합니다. 기독교에도 역시 이런 역사가 있습니다.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 공동체는 많은 전통을 지키거나 갱신하거나 심화했습니다. 그 안에는 예배가 있고, 신학이 있고, 교회 체제가 있으며, 더 핵심적으로는 성서가 있습니다. 이런 역사와 전통을 통해서 현재 살고 있는 많은 기독교인들만이 아니라 우리의 후손들도 하나님의 뜻에 좀 더 가까이 이르게 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역사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면 현재 교회가 성장해야 한다는 논리에 함몰되지 않고 미래까지 내다보는 그런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륜
바울은 이스라엘의 종교적 우월성을 이렇게 종결짓습니다. “그리스도도 인성으로 말하면 그들에게서 나셨습니다.”(5절). 만약 이스라엘의 역사가 없었다면 예수 그리스도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종교적 전통이 없었다면 나사렛 예수라는 분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이해했으며, 어떻게 인간 구원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었겠습니까?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예수의 족보를 열거한 이유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가능하게 했다는 신학적 고백입니다. 마가복음은 아직 그런 신학적 해석이 이루어지기 전에 완성된 복음서이기 때문에 예수의 족보를 다루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은 그런 족보를 훨씬 뛰어넘어 예수 사건을 이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으로까지 소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여기서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시게 되었는데,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단절되고 맙니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스라엘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을 가능하게 했지만, 그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무력화했다니, 이게 무슨 뜻인가요?
이 대목이 바로 바울로 하여금 슬픔과 번민에 빠지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소유하고 있던 이스라엘에게 결정적인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바울은 그 문제를 9장 30절 이하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믿음으로 얻으려 하지 않고 공로로 얻으려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미 4장에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역사도 역시 믿음을 지향한다는 점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런 믿음의 전통을 놓치고 자신들의 인간적인 업적을 통해서 하나님에게 이르려고 했습니다. 율법이라는 점에서는 바울도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열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이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이를 수 있는 전혀 새로운 길을 발견했습니다. 10장4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심으로 율법은 끝이 났고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전혀 없는 구원의 길이 시작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게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걸림돌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수능 만점을 받은 사람이나 50점 받은 사람이나 아무런 상관없이 서울 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다거나, 또는 추첨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말입니다. 밤잠 안자고 공부한 학생들은 억울해서 못 견딜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역시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는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이 세상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경험하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대다수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 딜레마에서 바울은 이런 논리를 제시합니다. 이스라엘의 불신은 이방인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11:11 이하). 그러나 결국 “온 이스라엘도 구원받게 될”(11:26) 것입니다. 이런 역사발전을 바울은 하나님의 심오한 경륜이라고 고백합니다(11:33).
오늘 하나님은 한민족의 구원을 어떻게 전개하실까요? 이 민족의 통일을 어떻게 실행하실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이 보편적 진리가 우리 한민족에게는 어떻게 적용되는 걸까요? 우리에게 하나님의 심오한 경륜이 어떻게 나타날까요? 우리의 기도 제목입니다.
이방인의 사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입니다. 사도행전 13장46절에서 우리는 이러한 사실의 역사적 배경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전도하자 이방인들은 받아들였지만 유대인들은 심하게 반대했습니다. 이들 앞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당신들에게 전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당신들은 그것을 거부하고 그 영원한 생명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판단하고 있으니 우리는 당신들을 떠나서 이방인들에게로 갑니다.” 갈라디아서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진술되어 있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할례받은 사람들을 위한 사도직을 베드로에게 주신 것같이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직을 나에게 주셨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입니다.”(갈 2:8).
여기서 이방인의 사도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단순하게 생각해서,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다는 의미일까요? 이런 생각이 근본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지만 초기 기독교의 상황을 충분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신학적 체계와 교회 조직이 상당하게 발전한 기독교를 보고 있으니까 초기 기독교도 여전히 이러했으리라고 여길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 당시의 상황은 매우 달랐습니다. 이게 바로 역사의 신비이기도 합니다. 흡사 어머니 뱃속에서 처음 나온 유아가 앞으로 어떤 인물이 될지 전혀 예상할 수 없듯이 기독교 공동체의 초기 상태도 그와 같았다는 말입니다. 예수의 사도들을 중심으로 한 팔레스틴 기독교 공동체와 바울을 중심으로 한 헬라파 기독교 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점에서 공동의 기반이 있기는 했습니다만 유대인들과 맺는 관계에서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팔레스틴 공동체는 자신들이 유대교 공동체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반면에 헬라파 공동체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팔레스틴 공동체가 기독교의 주류로 남아있게 되었다면 오늘의 기독교 모습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이에 반해 스데반으로 대표되는 소위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일곱 집사들과 그들의 뒤를 잇는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혀 다르게 이해했습니다. 일부러 유대교를 배척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신앙의 패러다임이 유대교와 근본적으로 달랐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들은 유대교와 전혀 다른, 그들로부터 자유로운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지금 기독교는 유대교로부터 시작되긴 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과 그들의 종교적 특색 안에 머물지 않고, 보편적 종교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기독교가 여러 가능성 가운데서 유대교와 전혀 다른 새로운 종교로 발전하게 되는 그 길목에 이방인의 사도라 불리는 바울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조국 이스라엘
초기 기독교 당시에 바울이 처했던 자리를 실감 있게 설명하기 위해서 좀 극단적인 예를 들겠습니다. 1910년에 이루어진 한일합방의 주역인 이완용에 대해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 사도 바울에 대해서 유대인들이 느끼는 감정이 비슷할지 모릅니다. 사도행전의 후반부 내용을 따라가다 보면 유대인들 중의 일부가 바울을 암살하기 위해서 서원을 바치기까지 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곧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바울은 매국노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의 신학적 입장이 극단적이었기 때문에 사도들에게서도 일종의 ‘왕따’를 당할 정도였습니다. 바울은 생전에 초기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별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비참하게 최후를 마쳤다는 게 기독교 초기 역사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유대인들에게서 극도의 미움을 받았고, 사도들에게서도 경원의 대상이 되었던 이 바울의 처지가 얼마나 곤란했을는지는 불을 보듯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는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에게는 큰 슬픔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끊임없이 번민하고 있습니다.”(2절). 자신의 조국 이스라엘로 인한 슬픔이며, 그들과의 갈등으로 인한 번민입니다. 그는 결코 자신이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사실을 부인한 적이 없습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의 동족은 이스라엘 사람들이라고 당당하게 고백합니다. 급기야 그는 이렇게 비장하게 언급합니다. “나는 혈육을 같이하는 내 동족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조금도 한이 없겠습니다.”(3절). 바울이 오죽했으면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아무런 한이 없다고 표현했겠습니까? 그는 오늘 분문 바로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신들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능력의 천신들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롬 8:38,39). 모든 존재의 근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입니다. 그가 이렇게 생각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갈 각오를 할 정도로 그는 조국 이스라엘을 가슴 깊이 새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기독교인은 이 두 세계의 경계에서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종족도 없고, 민족도 없고, 정치 이데올로기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기독교인에게는 나라가 있고 정치적 이념도 있습니다. 한 인간의 삶은 나라라는 조건에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한민족으로 태어났다는 건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주어진 조건입니다. 아무리 글로벌 스피릿에 철저하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두 발을 땅에 딛고 사는 한 우리는 결코 이런 조건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말, 우리의 맛, 우리의 옷, 우리의 가락과 우리의 사유 방식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계를 경험하게 만드는 유일하고 숙명적인 조건입니다.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말은 단순히 우리가 살고 있는 땅에서 생산된 것을 먹는 게 좋다는 물리적인 의미만이 아닙니다. 조상 대대로 삼천리 반도 안에서 살아온 우리의 모든 삶은 이런 조건을 통해서만 이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는 철학적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한민족이 우리말을 할 줄 모르면 그는 결코 한민족일 수 없으며, 따라서 그는 세계를 온전하게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영어 조기 교육을 반대합니다. 일단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는 우리말을 철저하게 공부해야만 합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는 하이데거의 경구를 빌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말을 통해서 세계를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는 결국 이 세상을 참되게 이해하는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종교적 기득권
바울도 역시 자신의 정체성을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 찾고 있었습니다. 코로 숨쉬고, 밥을 먹고 배설하면서 생명을 이어가야 할 인간이라고 한다면 아무도 여기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의 하나님 경험, 궁극적으로 그의 예수 그리스도 경험도 역시 이러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의 역사를, 혹은 이스라엘의 종교적 기득권을 그는 4절에서 여섯 가지로 열거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 자녀가 되는 특권. 2) 하나님을 모시는 영광. 3) 하나님과 맺은 계약. 4) 율법, 5) 예배. 6) 하나님의 약속.
우리는 지금 바울이 제시하고 있는 이런 종교적 특권이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인지 완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이 여섯 가지가 나름으로 특별한 의미가 있긴 하겠지만 그 모든 것을 여기서 해명하는 것도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가 핵심적으로 말하려는 게 무엇인지만 짚는 것만으로도 오늘 우리에게는 충분할 것 같습니다. 이 여섯 가지 요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이러한 종교적 기득권을 소유한 민족이었다는 의미입니다.
기득권이라는 말 자체는 좀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고 있긴 하지만 그런 선입관을 버리고 본다면 그게 그렇게 나쁜 뜻만은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과 야곱 같은 족장들의 하나님 경험, 모세와 엘리야 같은 민족 지도자와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건 참으로 귀한 것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수많은 거룩한 문서들이 있었고, 서기관과 제사장과 경건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것은 모두 역사입니다. 이런 역사를 통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하나님과 깊은 관계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종교에서도 역사는 매우 중요합니다. 기독교에도 역시 이런 역사가 있습니다.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 공동체는 많은 전통을 지키거나 갱신하거나 심화했습니다. 그 안에는 예배가 있고, 신학이 있고, 교회 체제가 있으며, 더 핵심적으로는 성서가 있습니다. 이런 역사와 전통을 통해서 현재 살고 있는 많은 기독교인들만이 아니라 우리의 후손들도 하나님의 뜻에 좀 더 가까이 이르게 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역사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면 현재 교회가 성장해야 한다는 논리에 함몰되지 않고 미래까지 내다보는 그런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륜
바울은 이스라엘의 종교적 우월성을 이렇게 종결짓습니다. “그리스도도 인성으로 말하면 그들에게서 나셨습니다.”(5절). 만약 이스라엘의 역사가 없었다면 예수 그리스도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종교적 전통이 없었다면 나사렛 예수라는 분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이해했으며, 어떻게 인간 구원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었겠습니까?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예수의 족보를 열거한 이유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가능하게 했다는 신학적 고백입니다. 마가복음은 아직 그런 신학적 해석이 이루어지기 전에 완성된 복음서이기 때문에 예수의 족보를 다루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은 그런 족보를 훨씬 뛰어넘어 예수 사건을 이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으로까지 소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여기서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시게 되었는데,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단절되고 맙니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스라엘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을 가능하게 했지만, 그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무력화했다니, 이게 무슨 뜻인가요?
이 대목이 바로 바울로 하여금 슬픔과 번민에 빠지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소유하고 있던 이스라엘에게 결정적인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바울은 그 문제를 9장 30절 이하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믿음으로 얻으려 하지 않고 공로로 얻으려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미 4장에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역사도 역시 믿음을 지향한다는 점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런 믿음의 전통을 놓치고 자신들의 인간적인 업적을 통해서 하나님에게 이르려고 했습니다. 율법이라는 점에서는 바울도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열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이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이를 수 있는 전혀 새로운 길을 발견했습니다. 10장4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심으로 율법은 끝이 났고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전혀 없는 구원의 길이 시작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게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걸림돌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수능 만점을 받은 사람이나 50점 받은 사람이나 아무런 상관없이 서울 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다거나, 또는 추첨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말입니다. 밤잠 안자고 공부한 학생들은 억울해서 못 견딜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역시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는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이 세상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경험하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대다수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 딜레마에서 바울은 이런 논리를 제시합니다. 이스라엘의 불신은 이방인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11:11 이하). 그러나 결국 “온 이스라엘도 구원받게 될”(11:26) 것입니다. 이런 역사발전을 바울은 하나님의 심오한 경륜이라고 고백합니다(11:33).
오늘 하나님은 한민족의 구원을 어떻게 전개하실까요? 이 민족의 통일을 어떻게 실행하실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이 보편적 진리가 우리 한민족에게는 어떻게 적용되는 걸까요? 우리에게 하나님의 심오한 경륜이 어떻게 나타날까요? 우리의 기도 제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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