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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축복하시는 4대 삶 (롬 15:14-21)
< 소외된 자와 함께 하신 주님 > 막달라 마리아의 회심과 관련된 여러 가지 전승이 있습니다. 그 전승을 가지고 픽션을 만든 작가들도 많습니다. 대략 이런 전승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가버나움에서 전도 중에 동구 밖에서 실족해 다리를 다치셨습니다. 외딴 그곳에서 급히 찾아간 곳이 바로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 영업을 하던 집이었습니다. 그녀는 문밖에 계신 분이 점잖은 분인 줄 알고 “이곳은 창녀집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말을 듣고 바로 “그게 무슨 상관이냐?” 하고 집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만약 그때 예수님이 “더러운 것!”이라고 피했다면 위대한 여종 막달라 마리아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날 밤, 예수님은 그녀와 대화를 나누며 그녀의 과거의 삶을 다 들어주고 마음의 상처를 보듬어주셨습니다. 일주일 후, 예수님은 전도하다 그곳을 다시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녀가 궁금했습니다. “지난 번 대화로 마리아가 변화되었을까? 아니면 여전히 그 일을 할까?” 그래서 다시 그녀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집은 완전히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이 “아직도 그 일을 하느냐?”라고 물을 수 없어 “요새 손님이 많으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녀가 대답합니다. “선생님! 저도 한 여자로서 두 사람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때 주님은 그녀의 믿음을 보았고 “나를 따르라!”고 해서 주님의 여 제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진정한 사랑이 무엇입니까? 창녀 앞에서 “이 더러운 것!”이라고 하지 않고, 창녀에게도 소중한 영혼이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에 의해 이상한 소문도 나고 오해도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죽어도 오해할래!”라고 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그 오해를 다 풀어주면서 살겠습니까? 그때는 억지로 오해를 풀려고 할 필요도 없이 계속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면 됩니다. 사랑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이해됩니다. 그러므로 누가 오해하는 것으로 인해 거룩한 삶의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오해가 있어도 사랑의 자리를 회피하지 않는 것이 바로 진짜 사랑입니다. 이제 환영받고, 매력적이고, 가진 사람만 찾지 말고 소외된 자와 기쁘게 함께 하셨던 주님처럼 소외된 자를 돕겠다는 비전을 가지고 사십시오. < 명예를 나눠주십시오 > 어렸을 때는 “인기 있고 잘생긴 친구를 사귀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도 중학교 3학년 때 전교에서 최고로 잘생긴 친구와 1년 동안 짝이 되어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그런 감정은 사라졌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신학교 친구 중에 에릭 쉬미트란 친구가 있었습니다. 키도 크고 아주 잘생겨서 당시 대부분의 여학생들이 최고로 좋아하던 친구였는데, 그때는 그 친구가 잘생겨서 좋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스스럼없는 친구가 될 수 있었습니다. 또 짐 롱이란 친구도 굉장히 잘생겼습니다. 그 친구는 영화배우 브래드 피트와 아주 닮았는데, 저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수시로 어디로 놀러가자고 저의 기숙사 앞에서 기다렸고, 제가 듣는 수업을 같이 들으려고 하고, 수시로 자기 교회와 집에 저를 초청했고, 자기 여동생을 저와 자꾸 연결시켜주려고 했습니다. 또한 그 친구 때문에 매우 수요일마다 미국교회 청년예배에 신학교의 바쁜 생활 중에도 참석했고, 미국 청년들의 파티문화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도 외모가 잘생겨서 좋았다는 감정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물론 멋있고, 잘생기고, 매력적인 사람과 친구하면 기분은 좋지만 엄밀히 말하면 친구가 잘생긴 것이 항상 좋지는 않습니다. 사람을 사귈 때 잘생기고 부자인 친구와 어울려서 무언가 덕을 보겠다고 생각하면 괜히 위축되고 진짜 복된 친구관계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때로는 연약하고, 불쌍하고, 없는 사람과도 친하기를 힘쓰면서 자신의 명예를 나눠주려고 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 마음을 기억해주실 것입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교회생활도 주려고 할 때 성공하고, 친구관계도 주려고 할 때 성공합니다. 특히 자신의 명예를 나눠줄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복음을 전하실 때 세리와 창기와 함께 하시면서 명예를 나눠주심으로 ‘세리와 죄인의 친구’란 비천한 별명까지 얻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도 그렇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말로만 친구가 되지 마십시오. 말로만 넘치는 정의감은 혼란과 불행의 씨앗이 됩니다. 공산주의의 기반이 된 칼 막스의 철학은 노동자에 대한 애정을 기초로 하지만 칼 막스의 전기를 기록한 폴 잔슨은 그의 삶이 자신의 철학과는 전혀 달랐다고 합니다. 실제로 칼 막스는 노동자를 무시하며 중산층 지식인과 어울리기를 좋아했고, 일생 노동자 친구가 한 사람도 없었으며 항상 가족이나 이웃과 많이 싸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말년에는 하녀 두 명을 데리고 살면서 누구보다 사치스럽게 살았다고 합니다. <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삶 > 요새도 말은 바르게 하지만 태도는 바르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도도 실천적인 사랑이 없으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고, 그런 믿음에는 하나님의 은혜도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삶을 축복하실까요? 1. 서로 은혜를 권하는 삶 본문 14절 말씀을 보면 로마 교회의 성도들이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서로 권하는 자’였다고 합니다. 로마 교인들이 무엇을 권했습니까? ‘은혜의 복음’을 권했습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이 내게 이런 은혜를 주셨어!” 하면서 서로 격려하고 칭찬하며 서로 용기를 북돋아주었습니다. 그처럼 은혜를 나누고 칭찬해주고 용기를 주는 사람이 결국 큰 인물이 됩니다. 어떤 성공한 목사님은 자신의 성공비결이 어머니의 칭찬이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다 칭찬하지 않아도 어머니만 자기를 칭찬해주었는데, 그분이 전도사 때 설교하면 언제나 어머니는 앞에 앉아 은혜 받고 눈물 흘리셨고, 간간이 “얘야! 오늘 설교에 참 은혜 받았다. 잘했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부족해도 용기를 가지고 꾸준히 목회를 했고, 마침내 고생 끝에 신도시 아파트 단지에 입주할 때 함께 들어와서 큰 교회를 이뤘습니다. 이제 용기를 주는 사람이 되십시오. 잘한다고 하고, 격려해 주고, 칭찬해 주면 그 칭찬 받는 사람도 축복 받지만 칭찬하는 사람은 더 축복 받습니다. 그런 위로와 칭찬이 어떤 재산이나 능력보다 큰 힘이 됩니다. 부족한 사람의 부족함을 고치는 가장 좋은 길은 칭찬입니다. 그처럼 서로 칭찬하며 서로 은혜를 권할 때 하나님도 그 관계 속에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2. 이방인을 위하는 삶 은혜가 무엇입니까? 본문 16절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이방인을 위해 주님의 일꾼이 된 것을 은혜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병이 낫고 성공하는 것도 은혜이지만 무엇보다 큰 은혜는 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를 많이 받으십시오. 지금 세계에서 못사는 나라들을 보면 대개 복음이 없는 것을 봅니다. 사실 복음은 영혼도 구원하지만 여러 다른 축복도 가져다줍니다. 그러므로 힘들게 사는 이웃에게 무엇보다 먼저 나눠주어야 할 것은 바로 복음입니다. 우리나라도 한때 아주 못사는 나라였는데 그때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복음의 씨를 뿌리며 얼마나 고생했습니까? 1960년대 전까지는 길거리에 다니는 외국인의 90% 이상이 선교사였습니다. 지금도 서울 마포의 양화진에는 230명의 미국 선교사를 비롯해 수많은 선교사들의 묻혀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나라를 자기 나라보다 더 사랑하고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렸습니다. 그런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나라가 지금 이만큼 산다고 믿습니다. 그 은혜를 갚는 마음으로 이제 자신만 위해 살지 말고 힘써 선교에 동참하십시오. 우리 대신 전방에 나가있는 선교사를 후방에서 기도와 물질로 힘써 도우면 영혼도 건강해지고, 삶의 지경도 넓혀지고, 하나님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선교를 외면하면 그 신앙은 기복주의가 되기 쉽습니다. 이제 복음을 믿기만 하지 말고 복음이 내포하는 삶을 실천하며 사십시오. 그렇게 이방인을 위해 마음을 여는 만큼 영혼이 건강해질 것입니다.3. 장애인을 위하는 삶 성도는 해외선교도 힘쓰면서 소외된 사람과 장애인들에게 많은 관심을 주어야 합니다. 장애인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은 가끔 자기 자녀를 키우면서 자신들의 영적 장애를 발견한다고 고백합니다. 장애인은 섬김의 중요성을 깨우치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낸 사랑의 편지입니다. 그러므로 장애인을 잘 섬김으로 그 사랑의 편지에 잘 답장해야 합니다. 로마 시대에 장애인은 부모에 의해 노예로 팔리거나, 투기장의 놀림감이 되었습니다. 심한 경우에 중증 장애아는 신의 저주를 받았다고 광장에서 목매달아 죽였고, 후천적으로 장애를 입은 아동도 법적인 문제없이 맘대로 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 시대에 주님은 사랑으로 장애인을 치료하시고, 장애인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장애인을 업신여기는 결코 주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이제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버리십시오. 사실 그 편견을 가지는 것이 더 큰 장애입니다. 외모보다 인격이 더 중요하고, 큰 집과 큰 차보다 믿음과 교양이 더 중요합니다. 요새 미인대회가 왜 비판을 받습니까? 미인의 기준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남태평양에 가면 뚱뚱해야 최고 미인이고, 아프리카 오지에서는 코를 뚫어야 미인입니다. 또한 교회에서는 섬기는 자가 최고 미인입니다. 미의 기준을 외모에 두지 마십시오. 장애인과 이방인에 대한 편견을 버리면 사람도 바로 보이고, 세상도 바로 보이고, 하나님도 바로 보입니다. 그처럼 모든 것이 바로 보일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복된 삶이 펼쳐집니다. 예수님은 약자와 함께 울고 웃기를 즐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약자의 눈물을 헤아릴 줄 알아야 주님이 그 마음이 찾아와주시고 선한 일에 쓸 수 있는 힘과 능력과 재원도 주실 것입니다.4. 새로운 터를 찾는 삶 본문 19절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아 예루살렘부터 일루리곤, 오늘날의 알바니아 지역까지 복음을 널리 전했습니다. 그리고 스페인까지 복음을 전하러 갈 희망을 가지고 지나는 길에 로마 교인들과 교제하면서 충전 받기를 원했습니다(23-24절). 정말 말리지 못하는 복음전파의 열정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은 사도 바울이 복음전파를 하면서 ‘남이 이뤄놓은 터’가 아닌 ‘새로운 터’를 찾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개척자적인 자세 때문에 더욱 영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왜 지금 우리 교회가 속한 기독교 선교연맹이 전 세계에 35000교회가 소속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까? 그 이유는 바로 우리 선교연맹에서 제일 중시하는 구절인 본문 20절 말씀 때문입니다. 그 말씀을 보십시오.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사도바울처럼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않으려는 길은 아주 힘든 길이지만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그 길이 최고로 복된 길이 됩니다. 1900년대 초에 저희 기독교 선교연맹에서는 동북아시아로 눈을 돌려 일본에 동양선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때 그곳에서 공부한 한국 유학생들이 한국에 돌아와서 저희 연맹의 4중 복음을 가지고 성결 운동을 펼쳤습니다. 그래서 생겨난 교단이 한국의 성결교단입니다. 그 소식을 듣고 당시 저희 연맹 리더들은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않겠다!”고 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하는 대신에 대만, 홍콩, 필리핀, 그리고 동남아 쪽으로 파송했습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거의 100년 동안 한국에 저희 기독교 선교 연맹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것입니다. 그 뒤 역사는 돌고 돌아서 한국인의 열정을 잘 활용하면 세계 선교에 큰 역할을 하겠다고 최근에 저희 연맹 본부에서 한국에 대해 점점 관심을 크게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한국에 돌아와 지금까지 18년 동안 기독교 선교연맹의 불모지에서 이제까지 지내온 것이 조금씩 인정받는 분위기입니다. 지난 세월은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힘든 세월이 있었기에 네트영어도 생겼고, 미션퍼블릭도 생겼고, 온라인 새벽기도도 생겼습니다. 그처럼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않으려는 길은 힘든 길이지만 그래도 그 길은 무엇보다 복된 길입니다. < 새로운 터를 찾으십시오 > 이제 축복 받기를 원하면 남의 터가 아닌 내가 멋지게 활동할 새로운 터를 찾으십시오. 교회뿐만 아니라 개인사업과 개인의 삶에서도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않겠다는 자세와 각오로 살고, 오히려 남의 터가 되어주겠다는 비전을 가지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많은 인물도 붙여주시고, 성령으로 정지작업도 미리 펼쳐주시고, 창조성과 지혜도 주실 것이며, 결국 최상의 축복을 주시고, 특히 후대를 위해 엄청난 축복을 예비하실 것입니다. 기도할 때도 남이 생각하지 못하는 새로운 터를 찾는데 기도를 집중하십시오. 반드시 예비된 터가 있을 것입니다. 그 터에서 최상의 행복을 노래하고, 최상의 열매를 거두며, 최상의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길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탄원기도만 드리지 말고 비전기도를 드리십시오. 그러면 그 비전을 이룰 수 있는 힘과 능력과 기회를 주실 것이고, 가졌던 비전과 똑같은 열매를 주시지 않으면 유사한 열매라도 주실 것입니다. 옛날에 신학교 강의를 할 때 신학교 도서관에 자주 갔습니다. 그때마다 가장 마음속에 탐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방대한 스펄전 설교 전집이었습니다. 그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 방대한 전집을 번역하고 싶습니다. 역사상 가장 설교를 잘했다는 스펄전 목사님의 설교를 번역해 출판하면 설교자들이 얼마나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때가 1990년대 중반인데, 그때 그 전집을 다 번역하고 출판까지 하려면 약 5억 정도 들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5억원을 주시면 제가 해보겠습니다.” 그런 비전을 가지고 계속 기도하는데 5억원은커녕 5십만 원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사실 뜻있는 사람이 아니면 돈도 안 되는 그 일에 누가 나서겠습니까? 1년이 지나도 주시지 않고 5년이 지나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그 비전에 대한 저의 기도도 시들해졌습니다. 그렇다고 그 기도가 헛된 기도였습니까? 아닙니다. 그때는 그런 꿈을 품었지만 지금은 저 스스로 성경 전권 파일을 만들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전체의 약 3분의 1인 29개 설교파일을 만들었습니다. 앞으로 14년 후인 63세쯤이 되면 성경 전체의 설교파일을 완성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는 완성된 설교파일을 거꾸로 영어로 번역해 세계에 소개할 것입니다. 얼마나 가슴 벅찬 비전입니까? 비록 스펄전 목사님의 설교전집을 번역해 많은 설교자들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비전은 이루지 못했지만 제가 직접 설교파일을 만들어 도움을 주겠다는 비전으로 구체화되었으니 훨씬 의미 있고 감동적인 비전으로 커진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지금까지 크게 부흥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이런 생각도 합니다. 만약 크게 부흥했다면 너무 바빠서, 혹은 부흥에 취해서 네트영어도 없었고, 미션퍼블릭도 없었고, 성경 전권 파일에 대한 비전도 없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천년 영향력의 비전을 위해서 잠시 부흥을 유보시킨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때가 되어 물질과 인맥으로도 비전을 뒷받침해야 하기에 교회도 키워주실 것을 믿습니다. 또한 온라인 새벽기도도 원대한 문서선교의 비전을 뒷받침할 기도부대가 필요했기에 시작하게 하신 줄 믿습니다. 대략 보면 온라인 새벽기도 성도의 100명 중의 1명 정도는 우리 교인들만큼 저희 문서선교와 선교사 후원사역을 열렬히 기도로 후원해주는 성도들입니다. 비록 몸은 떨어졌고, 거의 대부분 얼굴도 보지 못했지만 그분들의 기도의 열정만큼은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제 더욱 기도해주십시오. “하나님! 문서선교의 거룩한 비전의 후원자들을 붙여주소서!” 사람들은 사도 바울을 훌륭하게 생각합니다. 사실 그는 엄청난 인물입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수많은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더욱 엄청난 일은 신약 27권의 성경 중에 절반 가까운 13권을 썼습니다. 논란이 되는 히브리서를 사도 바울의 저작으로 보면 절반이 넘는 14권을 쓴 셈이 됩니다. 그는 ‘위대한 이방인 선교의 개척자’이기도 했지만 ‘위대한 기독교 문서선교의 개척자’이기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어떻게 그렇게 위대한 사역을 할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혼자의 능력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최고의 옷감으로 꼽혔던 ‘두아디라 산 자주’의 유럽 총판으로 상당한 재력을 갖추었던 루디아와 같은 거룩한 비전의 후원자들이 아무런 사심과 계산이 없이 그를 위해서 기도와 물질로 뒷받침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그런 영적인 거물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루디아와 신실한 후원자를 연결시켜 달라고 기도해주십시오. 더 나아가 나 자신이 그런 루디아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주십시오. 인생을 가장 알차게 사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비전을 따라 사는 길입니다. 거룩한 비전은 헛되지 않습니다. 그 비전이 그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다른 모양으로도 그 비전이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비전을 가지고 새로운 터를 찾으십시오. 이제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저에게 새로운 터와 블루 오션을 찾을 수 있는 기발하고 창조적인 비전과 지혜를 주셔서 물질적인 영역을 정복하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 멋지게 쓰게 하소서!” 이제 우리 교회는 어둔 새벽에 빛을 밝혀주고 미래의 빛을 선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앞으로 생겨날 수많은 기독교 선교연맹 교회의 터가 되고, 우리 후대들의 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런 축복을 약속해 놓으셨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이 예비하신 축복의 터를 찾고 그곳을 일구어 수많은 인물을 만들고 천년영향력의 비전을 아름답게 이뤄가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글 : 이한규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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