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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전14:1-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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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원 목사 |
참고 : | 참좋은교회 http://charmjoun.net |
2002.7.13 설교
12장에서 우리는 은사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은사는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그리스도의 몸을 섬기도록 부여된 직임이며,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는 선물입니다. 은사는 다양하며, 많은 성도들이 이렇게 다양한 은사를 가지고 교회를 섬길 때 교회는 더욱 아름답고 풍성해집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각자 자기에게 주어진 은사를 귀하게 여기며, 그 은사를 자기를 위해 사용할 것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내가 받은 은사가 귀한 만큼 다른 사람들이 받은 은사도 귀한 줄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12장 8-11절에서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 예언, 영 분별, 방언과 통역의 은사들을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28-30절에서는 사도, 선지자, 교사, 능력, 병 고치는 은사, 방언, 통역의 은사를 말했습니다. 이 중에서 능력 행함, 병 고치는 은사, 방언, 통역의 4가지 은사가 중복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언급한 은사는 13개입니다. 그러나 이 은사들의 목록은 모든 은사를 다 말한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는 다른 은사들도 더 언급되어 있으며, 성경에 언급되어 있지 않은 은사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 은사들에 대해서 거의 다 설명을 했고, 예언과 방언과 통역에 대해서는 뒤로 미루었습니다. 이제 예언과 방언, 그리고 통역의 은사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사랑을 따라 구하라.
고린도 교회는 은사가 풍성했으나, 그 은사를 과시하며 시기하며 다투고 있었습니다. 은사 때문에 오히려 문제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하면서 13장에서 사랑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아무리 큰 은사를 받았다 할지라도, 아무리 위대한 일을 행한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 없이 서로 과시하며 다투는 은사는 아무 유익이 없고 소음에 불과합니다. 어떤 은사든지 사랑 없이는 소용이 없습니다. 모든 은사들은 일시적이고 불완전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영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14장에서 방언과 예언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다시 "사랑을 따라 구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는 신령한 것이며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은사를 받았다고 해서 다 믿음이 좋거나 성숙한 것은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들은 은사가 풍성했으나 믿음이 성숙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문제가 많았던 것입니다. 우리 중에도 방언의 은사를 받은 성도들이 꽤 있습니다. 그러나 방언 받았다고 해서 다른 사람보다 믿음이 더 좋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다 보니 은사를 사용할 때 부작용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은사 받은 사람들은 사랑을 더욱 추구해야 합니다. 특히 자기가 받은 은사를 사용할 때 사랑으로 사용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문제가 생기고,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방언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방언을 가장 큰 은사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방언에 가장 관심이 많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은사들을 다루면서 방언에 대해서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왜 방언에 그렇게 관심이 많았을까요? 그것은 교회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엘리트가 되고 싶어서였습니다. 방언을 하는 성도들은 영적 우월감에 빠져서 방언하지 않는 성도들을 멸시했습니다.
그러면 방언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방언에 대한 대표적인 두 가지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방언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때 사도들은 성령의 충만을 받아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는 오순절이었기 때문에 외국에 흩어져 살고 있던 사람들이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와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는 적어도 14개 지방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방언을 말하자 그들은 각자 자기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사도들의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굉장한 사건이었습니다. 성령께서 언어를 통일시키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은 성령께서 언어를 통일시켜 각자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다 자기들의 말로 알아듣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었습니다. 오늘의 방언은 고린도 교회의 방언입니다.
방언은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로써 이 은사를 받은 사람은 한 번도 해보거나 듣지 못한 말을 하게 됩니다. 2절에서 사도 바울은 방언은 사람에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 하는 것이라고 했으며,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4절에서는 방언하는 사람은 자신의 덕을 세우는 것이라고 했으며, 14절에서는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영이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방언의 유익
방언의 은사를 받으면 전혀 새로운 체험을 하게 됩니다. 방언은 영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14절). 그러므로 방언을 하게 되면 신비로운 영적 세계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방언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명하는 하나의 증거가 됩니다. 따라서 방언을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역사하셨다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체험적인 확신을 갖게 된다는 것이 방언이 주는 유익 중의 하나입니다.
방언의 또 하나의 유익은 깊은 기도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방언 받기 전에는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30분을 넘지 못하던 사람이 방언을 받으면 밤새도록 기도할 수도 있게 됩니다. 자아와 주위 환경을 초월하여 하나님과 깊은 교제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언 받은 성도들은 특별히 기도 많이 해야 그 은사를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됩니다.
방언에 대한 잘못된 태도
방언하면 교만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그랬습니다. 사실 은사 중에 가장 흔한 은사가 방언입니다. 그리고 은사는 믿음이 특별히 좋거나 어떤 자격이 있어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주권적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받았다고 해서 교만해질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언하는 사람들 중에는 방언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오래 했으면서 어떻게 방언도 못하느냐고 무시합니다. 심지어는 목사가 방언 못하는 것을 보고 한심하다고 멸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태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방언하고 나서는 성경도 잘 보지 않습니다. 방언하면서 하나님과 영으로 직접 교통하기 때문에 성경을 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설교도 시시하게 생각합니다. 자기는 하나님과 직접 통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교만합니까? 방언하는 사람들은 이런 잘못된 태도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통역
방언은 우리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이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해서는 통역이 필요합니다(5절). 이렇게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가 있습니다. 현재 통역의 은사는 방언에 비하여 상당히 드물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다수의 성도들이 통역의 은사 받은 사람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통역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어떤 방언이든지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방언은 남들이 알아들을 수 없고, 심지어는 방언하는 자신도 무슨 말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방언은 그 사람 자신에게 영적인 유익이 될 뿐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교회에는 덕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방언이 통역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는지를 알 수 있게 되어 교회에 덕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방언하는 사람들에게 통역하는 사람이 없으면 교회에서는 방언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28절).
올바른 방언의 사용
방언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분명하게 체험하게 함으로써 확신을 갖게 해줍니다. 뿐만 아니라 깊은 기도를 할 수 있게 합니다. 이런 면에서 방언은 자신에게 유익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유익이 없습니다. 만일 교회에서 함부로 방언을 하게 되면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혼자 기도할 때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방언으로 깊이, 그리고 오랜 시간 기도한다면 자신의 영적인 삶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혹시라도 방언한다고 해서 방언하지 못하는 성도들을 무시하거나 교만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또 한 가지 주의할 것은 방언이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도 헬라의 신비종교에 방언과 같은 현상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이방 종교에서 이와 비슷한 현상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방언을 한다고 해서 무조건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방언하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는 사람인가, 그 방언이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인가, 교회와 성도들에게 덕을 세우는가 하는 것들을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예언
보통 사람들은 예언이란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언은 본래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언하는 사람들을 선지자라고 불렀습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직접 부르셔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기도 했는데, 그것이 구약의 선지서들입니다. 신약 초대교회에도 선지자들이 있었으나 구약의 선지자들과는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막 시작된 어린 교회를 보호하시기 위해서 비상적인 직분들을 주셨는데, 사도와 선지자와 전도자들이었습니다. 신약의 선지자들은 교회를 위해서 앞으로 닥쳐올 중대한 일들이나 어려운 일들을 미리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처럼 직접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성경을 기록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면 초대교회 이후 오늘의 교회에서 예언의 은사는 무엇입니까? 여기에 대해서는 각기 다른 두 가지 주장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계시가 완성되어 성경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이후에는 사실상 예언의 은사가 필요치 않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완성된 계시인 성경에 대한 설교가 바로 예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언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새로운 진리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계시의 진리를 자세히 설명하고 적용하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예언은 설교라는 것입니다. 이 주장은 많은 타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예언이란 본래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설교는 예언과 같은 맥락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에 예언의 은사가 있었으며, 사도들이나 선지자들 외에 이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예언이란 하나님께서 교회의 어떤 지체를 성령으로 감동하사 교회에게 주시는 메시지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구약의 선지들이나 신약의 사도들처럼 어떤 계시를 받는 것은 아닐 것이며, 신약의 선지자들처럼 미래에 일어날 어떤 일을 예언하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단지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 하는 것을 깨닫고 전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언의 은사란 바로 이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주장도 상당히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 가지 주장을 종합해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예언이란 성경을 자세히 풀어 가르침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이며, 깊은 기도와 묵상 가운데 깨달은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언의 은사를 행할 수 있는 사람
예언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히 설명하여 전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을 교회에 전하는 것이라면 어떤 사람들이 예언의 은사를 받아 행할 수 있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길을 가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든지, 어느 날 밤에 꿈을 꾸었다는 식의 예언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성경을 주야로 묵상하며 그 말씀대로 살기를 힘쓰는 사람, 그리고 그 말씀을 가르치는 데 남다른 은사가 있는 사람, 뿐만 아니라 말씀을 붙들고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예언의 은사를 행하는 사람은 철저하게 성경과 교회의 권위 아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탈선하거나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많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언은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3절). 그러므로 예언한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모욕이나 상처를 준다든지, 믿음을 흔들리게 하는 것은 단호하게 거부해야 합니다. 이런 잘못된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예언은 반드시 일대일로가 아니라 공동체 앞에서 행해져야 합니다. 예언은 교회에 덕을 세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언과 관련해서 주의해야 할 것들
예언 잘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서 그런 곳을 찾아다니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안 믿는 사람들이 점쟁이를 찾아다니는 것과 흡사합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교회의 지도를 받지 않는 사람들이며 탈선한 경우가 많습니다. 아무리 장래 일이 걱정된다고 해도 그런 사람들을 찾아다녀서는 안됩니다. 올바른 성도는 아무데나 가서 머리를 들이대고 안수기도 받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며 믿음으로 기도하고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주십니다.
가장 중요하고 안전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인도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러한 생활을 하는 성도라면 얼마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다. 그래도 부족하다면 믿음 좋은 성도들과 함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이 좋습니다. 가장 안전한 길은 목회자에게 상담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 어디 신령한 사람이 있다고 찾아다니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고 잘못된 일입니다.
방언과 예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판단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이 교회와 성도들의 덕을 세우는가, 그리고 그것이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효과적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은사와 관련해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덕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덕을 세우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은사를 가지고 교회와 성도들에게 덕을 세우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12장에서 우리는 은사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은사는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그리스도의 몸을 섬기도록 부여된 직임이며,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는 선물입니다. 은사는 다양하며, 많은 성도들이 이렇게 다양한 은사를 가지고 교회를 섬길 때 교회는 더욱 아름답고 풍성해집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각자 자기에게 주어진 은사를 귀하게 여기며, 그 은사를 자기를 위해 사용할 것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내가 받은 은사가 귀한 만큼 다른 사람들이 받은 은사도 귀한 줄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12장 8-11절에서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 예언, 영 분별, 방언과 통역의 은사들을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28-30절에서는 사도, 선지자, 교사, 능력, 병 고치는 은사, 방언, 통역의 은사를 말했습니다. 이 중에서 능력 행함, 병 고치는 은사, 방언, 통역의 4가지 은사가 중복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언급한 은사는 13개입니다. 그러나 이 은사들의 목록은 모든 은사를 다 말한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는 다른 은사들도 더 언급되어 있으며, 성경에 언급되어 있지 않은 은사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 은사들에 대해서 거의 다 설명을 했고, 예언과 방언과 통역에 대해서는 뒤로 미루었습니다. 이제 예언과 방언, 그리고 통역의 은사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사랑을 따라 구하라.
고린도 교회는 은사가 풍성했으나, 그 은사를 과시하며 시기하며 다투고 있었습니다. 은사 때문에 오히려 문제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하면서 13장에서 사랑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아무리 큰 은사를 받았다 할지라도, 아무리 위대한 일을 행한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 없이 서로 과시하며 다투는 은사는 아무 유익이 없고 소음에 불과합니다. 어떤 은사든지 사랑 없이는 소용이 없습니다. 모든 은사들은 일시적이고 불완전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영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14장에서 방언과 예언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다시 "사랑을 따라 구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는 신령한 것이며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은사를 받았다고 해서 다 믿음이 좋거나 성숙한 것은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들은 은사가 풍성했으나 믿음이 성숙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문제가 많았던 것입니다. 우리 중에도 방언의 은사를 받은 성도들이 꽤 있습니다. 그러나 방언 받았다고 해서 다른 사람보다 믿음이 더 좋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다 보니 은사를 사용할 때 부작용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은사 받은 사람들은 사랑을 더욱 추구해야 합니다. 특히 자기가 받은 은사를 사용할 때 사랑으로 사용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문제가 생기고,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방언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방언을 가장 큰 은사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방언에 가장 관심이 많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은사들을 다루면서 방언에 대해서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왜 방언에 그렇게 관심이 많았을까요? 그것은 교회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엘리트가 되고 싶어서였습니다. 방언을 하는 성도들은 영적 우월감에 빠져서 방언하지 않는 성도들을 멸시했습니다.
그러면 방언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방언에 대한 대표적인 두 가지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방언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때 사도들은 성령의 충만을 받아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는 오순절이었기 때문에 외국에 흩어져 살고 있던 사람들이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와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는 적어도 14개 지방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방언을 말하자 그들은 각자 자기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사도들의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굉장한 사건이었습니다. 성령께서 언어를 통일시키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은 성령께서 언어를 통일시켜 각자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다 자기들의 말로 알아듣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었습니다. 오늘의 방언은 고린도 교회의 방언입니다.
방언은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로써 이 은사를 받은 사람은 한 번도 해보거나 듣지 못한 말을 하게 됩니다. 2절에서 사도 바울은 방언은 사람에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 하는 것이라고 했으며,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4절에서는 방언하는 사람은 자신의 덕을 세우는 것이라고 했으며, 14절에서는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영이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방언의 유익
방언의 은사를 받으면 전혀 새로운 체험을 하게 됩니다. 방언은 영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14절). 그러므로 방언을 하게 되면 신비로운 영적 세계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방언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명하는 하나의 증거가 됩니다. 따라서 방언을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역사하셨다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체험적인 확신을 갖게 된다는 것이 방언이 주는 유익 중의 하나입니다.
방언의 또 하나의 유익은 깊은 기도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방언 받기 전에는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30분을 넘지 못하던 사람이 방언을 받으면 밤새도록 기도할 수도 있게 됩니다. 자아와 주위 환경을 초월하여 하나님과 깊은 교제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언 받은 성도들은 특별히 기도 많이 해야 그 은사를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됩니다.
방언에 대한 잘못된 태도
방언하면 교만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그랬습니다. 사실 은사 중에 가장 흔한 은사가 방언입니다. 그리고 은사는 믿음이 특별히 좋거나 어떤 자격이 있어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주권적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받았다고 해서 교만해질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언하는 사람들 중에는 방언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오래 했으면서 어떻게 방언도 못하느냐고 무시합니다. 심지어는 목사가 방언 못하는 것을 보고 한심하다고 멸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태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방언하고 나서는 성경도 잘 보지 않습니다. 방언하면서 하나님과 영으로 직접 교통하기 때문에 성경을 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설교도 시시하게 생각합니다. 자기는 하나님과 직접 통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교만합니까? 방언하는 사람들은 이런 잘못된 태도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통역
방언은 우리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이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해서는 통역이 필요합니다(5절). 이렇게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가 있습니다. 현재 통역의 은사는 방언에 비하여 상당히 드물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다수의 성도들이 통역의 은사 받은 사람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통역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어떤 방언이든지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방언은 남들이 알아들을 수 없고, 심지어는 방언하는 자신도 무슨 말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방언은 그 사람 자신에게 영적인 유익이 될 뿐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교회에는 덕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방언이 통역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는지를 알 수 있게 되어 교회에 덕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방언하는 사람들에게 통역하는 사람이 없으면 교회에서는 방언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28절).
올바른 방언의 사용
방언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분명하게 체험하게 함으로써 확신을 갖게 해줍니다. 뿐만 아니라 깊은 기도를 할 수 있게 합니다. 이런 면에서 방언은 자신에게 유익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유익이 없습니다. 만일 교회에서 함부로 방언을 하게 되면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혼자 기도할 때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방언으로 깊이, 그리고 오랜 시간 기도한다면 자신의 영적인 삶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혹시라도 방언한다고 해서 방언하지 못하는 성도들을 무시하거나 교만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또 한 가지 주의할 것은 방언이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도 헬라의 신비종교에 방언과 같은 현상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이방 종교에서 이와 비슷한 현상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방언을 한다고 해서 무조건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방언하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는 사람인가, 그 방언이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인가, 교회와 성도들에게 덕을 세우는가 하는 것들을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예언
보통 사람들은 예언이란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언은 본래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언하는 사람들을 선지자라고 불렀습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직접 부르셔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기도 했는데, 그것이 구약의 선지서들입니다. 신약 초대교회에도 선지자들이 있었으나 구약의 선지자들과는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막 시작된 어린 교회를 보호하시기 위해서 비상적인 직분들을 주셨는데, 사도와 선지자와 전도자들이었습니다. 신약의 선지자들은 교회를 위해서 앞으로 닥쳐올 중대한 일들이나 어려운 일들을 미리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처럼 직접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성경을 기록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면 초대교회 이후 오늘의 교회에서 예언의 은사는 무엇입니까? 여기에 대해서는 각기 다른 두 가지 주장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계시가 완성되어 성경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이후에는 사실상 예언의 은사가 필요치 않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완성된 계시인 성경에 대한 설교가 바로 예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언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새로운 진리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계시의 진리를 자세히 설명하고 적용하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예언은 설교라는 것입니다. 이 주장은 많은 타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예언이란 본래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설교는 예언과 같은 맥락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에 예언의 은사가 있었으며, 사도들이나 선지자들 외에 이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예언이란 하나님께서 교회의 어떤 지체를 성령으로 감동하사 교회에게 주시는 메시지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구약의 선지들이나 신약의 사도들처럼 어떤 계시를 받는 것은 아닐 것이며, 신약의 선지자들처럼 미래에 일어날 어떤 일을 예언하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단지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 하는 것을 깨닫고 전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언의 은사란 바로 이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주장도 상당히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 가지 주장을 종합해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예언이란 성경을 자세히 풀어 가르침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이며, 깊은 기도와 묵상 가운데 깨달은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언의 은사를 행할 수 있는 사람
예언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히 설명하여 전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을 교회에 전하는 것이라면 어떤 사람들이 예언의 은사를 받아 행할 수 있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길을 가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든지, 어느 날 밤에 꿈을 꾸었다는 식의 예언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성경을 주야로 묵상하며 그 말씀대로 살기를 힘쓰는 사람, 그리고 그 말씀을 가르치는 데 남다른 은사가 있는 사람, 뿐만 아니라 말씀을 붙들고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예언의 은사를 행하는 사람은 철저하게 성경과 교회의 권위 아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탈선하거나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많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언은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3절). 그러므로 예언한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모욕이나 상처를 준다든지, 믿음을 흔들리게 하는 것은 단호하게 거부해야 합니다. 이런 잘못된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예언은 반드시 일대일로가 아니라 공동체 앞에서 행해져야 합니다. 예언은 교회에 덕을 세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언과 관련해서 주의해야 할 것들
예언 잘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서 그런 곳을 찾아다니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안 믿는 사람들이 점쟁이를 찾아다니는 것과 흡사합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교회의 지도를 받지 않는 사람들이며 탈선한 경우가 많습니다. 아무리 장래 일이 걱정된다고 해도 그런 사람들을 찾아다녀서는 안됩니다. 올바른 성도는 아무데나 가서 머리를 들이대고 안수기도 받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며 믿음으로 기도하고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주십니다.
가장 중요하고 안전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인도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러한 생활을 하는 성도라면 얼마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다. 그래도 부족하다면 믿음 좋은 성도들과 함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이 좋습니다. 가장 안전한 길은 목회자에게 상담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 어디 신령한 사람이 있다고 찾아다니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고 잘못된 일입니다.
방언과 예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판단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이 교회와 성도들의 덕을 세우는가, 그리고 그것이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효과적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은사와 관련해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덕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덕을 세우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은사를 가지고 교회와 성도들에게 덕을 세우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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