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고전14:26-40 |
---|---|
설교자 : | 이정원 목사 |
참고 : | 참좋은교회 http://charmjoun.net |
2002.7.26 설교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을 만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풍성하게 힘입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삶이 변화되고 인생이 달라지며 우리의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이러한 예배를 드리려면 예배하는 성도들이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도록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잘 드리기 위해서 끊임없이 애써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잘 다듬어진 순서에 따라 예배를 드립니다. 저녁 예배는 낮 예배와 약간 다릅니다. 낮 예배는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순서를 다 살려서 드리고, 저녁 예배는 덜 중요하기 때문에 좀 다르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든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기 위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정말 하나님을 향하여 온전히 드려지고, 하나님께서 예배를 통해 우리 자신을 받아주시기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낮 예배와 저녁 예배 중 어느 예배에서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며 은혜를 받습니까? 모든 예배에서 마음 다하여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며, 하나님을 만나 뵙고 하늘로서 내리시는 신령한 은혜를 충만하게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고린도 교회의 예배
고린도 교회에서는 예배를 어떻게 드렸을까요? 26절을 보면 대강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예배는 지금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그 형식이 좀 달랐습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26절) 여기서 '모일 때'란 말은 예배를 드리려고 모일 때를 가리킵니다. 당시의 예배는 지금처럼 어떤 형식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예배가 진행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각 성도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자기가 받은 은사를 기초로 그 예배에 참여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예배를 드릴 때 찬송시, 가르치는 말씀, 계시, 방언, 방언 통역 등이 있었습니다.
앞에서 우리는 고린도 교회에 은사가 풍성했으나 그 은사로 인하여 문제도 많았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따라서 이렇게 각자가 받은 은사를 따라 예배에 참여할 때 특히 심각한 문제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은사를 과시하며 자랑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시기하는 경향이 많았는데, 이러한 문제점들이 예배에도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의 예배는 무질서하고 어지럽고 혼란스러웠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질서니 절제니 하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를 방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서로 방언을 말하며, 서로 자기에게 성령께서 임했다고 하면서 예언을 하고, 서로 나름대로의 받은 은사를 과시하면서 떠들어댔던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예배가 어떠했겠습니까? 매우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렇게 맘껏 예배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생각했으며 매우 만족스러워했습니다.
요즘도 이와 비슷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뜨겁게 찬양하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찬양과 기도가 사람의 감정을 극도로 자극하여 무아지경에까지 빠져드는 것은 올바른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신령과 진리로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행위로는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가 이루질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고린도 교회의 예배를 바로잡기 위해서 매우 중요한 두 가지 지침을 주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드려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방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에 대하여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방언을 가장 중요한 은사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방언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았습니다. 이렇게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에서 각자가 받은 방언으로 요란하게 기도를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예배를 가장 요란하고 혼란스럽게 만든 사람들이 바로 방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서는 방언이 심하게 남용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가장 먼저 방언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방언은 어떻게 사용해야 합니까?
예배시간에 방언하는 사람의 숫자는 두 명이나 많아야 세 명을 넘지 말아야 합니다(27절). 이 두 세 사람도 동시에 방언을 사용해서는 안되고 순서대로 해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방언을 할 때는 모든 성도들이 알아듣도록 통역을 해야 했습니다. 만일 통역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없으면 교회에서 예배시간에는 방언을 사용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통역하는 사람이 없으면 자기 집에서나, 또는 혼자서 하나님께 기도할 때만 방언을 사용해야 했습니다(26절). 예배는 모든 성도들이 참여하는 것인 만큼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사용되어야 하고, 교회 전체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예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에 대하여
고린도 교회의 예배에서 남용된 두 번째 은사는 예언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은사를 가장 훌륭한 은사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은사도 남용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예언의 은사를 사용하는 데 있어서 따라야 할 몇 가지 지침을 말했습니다.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 말하고 다른 사람들은 분별해야 했습니다(29절).
만일 예배시간에 예언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다같이 예언을 한다면 그 예언은 남을 가르칠 수 없고 도리어 혼란스럽게 할 뿐입니다. 그렇게 되면 훌륭한 은사인 예언도 아무 가치가 없게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두 세 사람이 순서를 따라 예언을 해야 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예언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하나님의 계시가 다른 사람에게 임하면 먼저 하던 사람은 중단하고 계시 받은 사람이 예언을 하게 해야 했습니다(30절). 이렇게 될 때 예언은 자신에게도 유익하고 교회에 덕을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언을 할 때 다른 사람들은 그 예언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분별해야 했습니다. 예언은 교회 앞에서 말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올바른 것인지 분별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했습니다. 예언을 분별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가? 둘째 그 예언이 성경과 조화를 이루는가? 셋째 그 예언이 교회에 덕을 세우는가? 그리고 사랑으로 말해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예언은 잘못된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사도 바울은 교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배우고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해서 다 예언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31절). 또 다른 편지에서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라"고 말했습니다(골3:16상). 성도들은 하나님 말씀으로 그 믿음이 성숙되어야 하며, 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는 생활을 하면서 서로 가르치며 권면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은 제대로 하지도 못하면서 괜히 남에게 참견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반드시 말씀 안에서 늘 기도하는 성도라야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시는 것을 형제들에게 권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이렇게 할 수 있는 성도들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여자들에 대하여
본문에는 여자들에 대해서 교회에서는 잠잠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34-35절). 이 구절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성경은 왜 여자들을 차별하느냐고 따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문제는 이 말씀이 여자들의 사역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여자들의 사역의 문제를 다루려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배에서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있으며, 그것도 특히 예배시간에 은사를 사용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단순히 여자들이 교회에서 일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시 고린도 교회에서 문제되었던 여자들의 태도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여자들은 남자들에 비하여 억압을 받고 자유를 제한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여자들은 사회에서보다 교회에서 훨씬 존중을 받았고 자유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교회에서 적극적으로 봉사하며 활동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사회에서 억눌려 있던 여자들이 교회에서 자유를 누리며 적극적으로 봉사하게 된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부작용도 있었습니다. 여자들은 교회에서 말이 많았고, 특히 은사를 사용하는 데 있어서도 그러했습니다. 교회에는 여자 성도들이 더 많고, 은사도 여자 성도들이 더 많이 받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만큼 기도도 많이 하고 믿음에 열심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문제는 은사 받은 여자 성도들이 주로 교회에서 예배시간에 많이 떠들어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가 무질서하고 혼란스럽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러한 여자들을 책망하면서 자중하고 절제할 것을 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여자들을 차별하는 말씀이 아니라 예배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에 대한 책망이며 교훈입니다.
오늘도 교회에는 여자 성도들이 남자 성도들보다 많습니다. 특히 새벽기도회와 심야기도회에는 여자 성도들이 압도적으로 많이 참석합니다. 남자 성도들도 더욱 분발해야 합니다. 여자 성도들의 열심은 정말 칭찬 받을 만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시끄럽고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도 주로 여자 성도들입니다. 그러므로 여자 성도들은 교회에서 좀 더 자중하고 절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여자 성도들은 그 열심과 봉사와 은사들을 가지고 교회를 더욱 은혜롭고 덕스럽게 섬길 수 있을 것입니다.
절제하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예배시간에 방언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를 함부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교훈했으며, 여자들이 예배시간에 좀 더 자중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질서대로 하라, 절제하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방언과 예언의 은사를 받으면 절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절제하지 않고 맘껏 사용하는 것이 성령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덕이 되지 못합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절제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배가 무질서하고 혼란스럽게 되었습니다. 본문은 은사들은 분명히 절제할 수 있으며, 또 절제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방언에 대해서 교훈한 27-28절을 봅시다.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되는 대로 방언을 말해서는 안되고 두 세 사람만 말하되 차례대로 말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통역하는 사람이 없으면 교회에서는 방언을 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방언의 은사는 얼마든지 절제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언의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29-30을 봅시다. 예언하는 사람들도 되는 대로 해서는 안되고 두 세 사람이 차례대로 해야 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예언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에게 계시가 임했다면 먼저 예언하던 사람은 잠잠하고 계시를 받은 사람이 예언을 해야 했습니다. 예언의 은사도 얼마든지 절제할 수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우리가 성령님께 사로잡히게 되면 정신이 온전할까요 아니면 제정신이 아니게 될까요? 성령충만하게 되면 정신이 혼미하지 않고 온전하게 됩니다. 그러나 악한 영에게 사로잡히게 되면 사람이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됩니다. 미친 사람이 되거나 이성을 잃게 됩니다. 그들은 이성으로 자신을 제어할 수가 없습니다. 귀신들린 사람들과 무당들이 대표적인 경우일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지배를 받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그 은사를 절제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잘못된 것입니까?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화평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필요에 따라, 특히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해 절제해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절제해야 할 사람들은 여자 성도들입니다. 일반적으로 여자 성도들은 남자 성도들에 비하여 더 열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자 성도들의 결정적인 단점은 절제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여자 성도들은 절제하지 못하여 예배를 매우 어지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여자 성도들에게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한 것은 절제하라는 말입니다. 여자 성도들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절제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이 매우 영적이라고 생각하면서 자기들 마음대로 행동했으며, 하나님 말씀이 자기들에게만 임한 것처럼 교만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 멋대로 은사를 사용하여 예배를 망쳐놓고도 자기들이 하나님 뜻대로 행동하고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교만을 책망하고 있습니다(36절). 그리고 가장 영적인 태도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스스로 선지자, 또는 신령한 자라고 생각하는 고린도 교회의 교만한 자들에게 도전합니다(37절). 사도 바울은 지금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선지자 또는 신령한 자라면 사도 바울의 이 말이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말씀인지를 알아보라는 것입니다. 만일 이것을 알지 못한다면 그들이 어떻게 신령한 자들이 될 수 있겠습니까(38절)? 그들은 거짓된 자들이 틀림없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진정으로 신령한 자들이어서 사도 바울의 편지가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말씀인 것을 알 수 있다면 그들은 마땅히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정말 신령한 사람은 어떤 황홀경에 빠지거나 놀라운 능력을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요일4:6)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당신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믿습니까? 당신은 이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십니까? 때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자기 맘대로 행동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을 받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열심히 봉사하고 큰 일을 한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교회에도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본인도 매우 불행한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신앙과 생활에 있어서 절대적인 유일한 법칙입니다. 모든 일에, 특히 모든 예배와 봉사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은사 받은 사람들에게 절제할 것을 명령했다고 해서 은사를 금지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예언하기를 사모하고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했습니다(39절). 은사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절제하면서 열심히 은사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섬기도록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나쳐서는 안됩니다. 함부로, 자기 맘대로 해서는 안됩니다. 다시 한 번 은사를 사용하는 중요한 원리를 기억합시다. 사랑을 따라 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에 덕을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하며 질서대로 해야 합니다. *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을 만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풍성하게 힘입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삶이 변화되고 인생이 달라지며 우리의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이러한 예배를 드리려면 예배하는 성도들이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도록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잘 드리기 위해서 끊임없이 애써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잘 다듬어진 순서에 따라 예배를 드립니다. 저녁 예배는 낮 예배와 약간 다릅니다. 낮 예배는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순서를 다 살려서 드리고, 저녁 예배는 덜 중요하기 때문에 좀 다르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든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기 위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정말 하나님을 향하여 온전히 드려지고, 하나님께서 예배를 통해 우리 자신을 받아주시기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낮 예배와 저녁 예배 중 어느 예배에서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며 은혜를 받습니까? 모든 예배에서 마음 다하여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며, 하나님을 만나 뵙고 하늘로서 내리시는 신령한 은혜를 충만하게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고린도 교회의 예배
고린도 교회에서는 예배를 어떻게 드렸을까요? 26절을 보면 대강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예배는 지금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그 형식이 좀 달랐습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26절) 여기서 '모일 때'란 말은 예배를 드리려고 모일 때를 가리킵니다. 당시의 예배는 지금처럼 어떤 형식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예배가 진행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각 성도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자기가 받은 은사를 기초로 그 예배에 참여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예배를 드릴 때 찬송시, 가르치는 말씀, 계시, 방언, 방언 통역 등이 있었습니다.
앞에서 우리는 고린도 교회에 은사가 풍성했으나 그 은사로 인하여 문제도 많았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따라서 이렇게 각자가 받은 은사를 따라 예배에 참여할 때 특히 심각한 문제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은사를 과시하며 자랑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시기하는 경향이 많았는데, 이러한 문제점들이 예배에도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의 예배는 무질서하고 어지럽고 혼란스러웠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질서니 절제니 하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를 방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서로 방언을 말하며, 서로 자기에게 성령께서 임했다고 하면서 예언을 하고, 서로 나름대로의 받은 은사를 과시하면서 떠들어댔던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예배가 어떠했겠습니까? 매우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렇게 맘껏 예배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생각했으며 매우 만족스러워했습니다.
요즘도 이와 비슷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뜨겁게 찬양하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찬양과 기도가 사람의 감정을 극도로 자극하여 무아지경에까지 빠져드는 것은 올바른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신령과 진리로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행위로는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가 이루질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고린도 교회의 예배를 바로잡기 위해서 매우 중요한 두 가지 지침을 주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드려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방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에 대하여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방언을 가장 중요한 은사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방언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았습니다. 이렇게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에서 각자가 받은 방언으로 요란하게 기도를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예배를 가장 요란하고 혼란스럽게 만든 사람들이 바로 방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서는 방언이 심하게 남용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가장 먼저 방언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방언은 어떻게 사용해야 합니까?
예배시간에 방언하는 사람의 숫자는 두 명이나 많아야 세 명을 넘지 말아야 합니다(27절). 이 두 세 사람도 동시에 방언을 사용해서는 안되고 순서대로 해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방언을 할 때는 모든 성도들이 알아듣도록 통역을 해야 했습니다. 만일 통역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없으면 교회에서 예배시간에는 방언을 사용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통역하는 사람이 없으면 자기 집에서나, 또는 혼자서 하나님께 기도할 때만 방언을 사용해야 했습니다(26절). 예배는 모든 성도들이 참여하는 것인 만큼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사용되어야 하고, 교회 전체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예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에 대하여
고린도 교회의 예배에서 남용된 두 번째 은사는 예언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은사를 가장 훌륭한 은사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은사도 남용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예언의 은사를 사용하는 데 있어서 따라야 할 몇 가지 지침을 말했습니다.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 말하고 다른 사람들은 분별해야 했습니다(29절).
만일 예배시간에 예언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다같이 예언을 한다면 그 예언은 남을 가르칠 수 없고 도리어 혼란스럽게 할 뿐입니다. 그렇게 되면 훌륭한 은사인 예언도 아무 가치가 없게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두 세 사람이 순서를 따라 예언을 해야 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예언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하나님의 계시가 다른 사람에게 임하면 먼저 하던 사람은 중단하고 계시 받은 사람이 예언을 하게 해야 했습니다(30절). 이렇게 될 때 예언은 자신에게도 유익하고 교회에 덕을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언을 할 때 다른 사람들은 그 예언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분별해야 했습니다. 예언은 교회 앞에서 말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올바른 것인지 분별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했습니다. 예언을 분별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가? 둘째 그 예언이 성경과 조화를 이루는가? 셋째 그 예언이 교회에 덕을 세우는가? 그리고 사랑으로 말해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예언은 잘못된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사도 바울은 교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배우고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해서 다 예언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31절). 또 다른 편지에서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라"고 말했습니다(골3:16상). 성도들은 하나님 말씀으로 그 믿음이 성숙되어야 하며, 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는 생활을 하면서 서로 가르치며 권면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은 제대로 하지도 못하면서 괜히 남에게 참견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반드시 말씀 안에서 늘 기도하는 성도라야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시는 것을 형제들에게 권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이렇게 할 수 있는 성도들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여자들에 대하여
본문에는 여자들에 대해서 교회에서는 잠잠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34-35절). 이 구절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성경은 왜 여자들을 차별하느냐고 따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문제는 이 말씀이 여자들의 사역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여자들의 사역의 문제를 다루려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배에서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있으며, 그것도 특히 예배시간에 은사를 사용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단순히 여자들이 교회에서 일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시 고린도 교회에서 문제되었던 여자들의 태도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여자들은 남자들에 비하여 억압을 받고 자유를 제한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여자들은 사회에서보다 교회에서 훨씬 존중을 받았고 자유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교회에서 적극적으로 봉사하며 활동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사회에서 억눌려 있던 여자들이 교회에서 자유를 누리며 적극적으로 봉사하게 된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부작용도 있었습니다. 여자들은 교회에서 말이 많았고, 특히 은사를 사용하는 데 있어서도 그러했습니다. 교회에는 여자 성도들이 더 많고, 은사도 여자 성도들이 더 많이 받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만큼 기도도 많이 하고 믿음에 열심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문제는 은사 받은 여자 성도들이 주로 교회에서 예배시간에 많이 떠들어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가 무질서하고 혼란스럽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러한 여자들을 책망하면서 자중하고 절제할 것을 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여자들을 차별하는 말씀이 아니라 예배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에 대한 책망이며 교훈입니다.
오늘도 교회에는 여자 성도들이 남자 성도들보다 많습니다. 특히 새벽기도회와 심야기도회에는 여자 성도들이 압도적으로 많이 참석합니다. 남자 성도들도 더욱 분발해야 합니다. 여자 성도들의 열심은 정말 칭찬 받을 만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시끄럽고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도 주로 여자 성도들입니다. 그러므로 여자 성도들은 교회에서 좀 더 자중하고 절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여자 성도들은 그 열심과 봉사와 은사들을 가지고 교회를 더욱 은혜롭고 덕스럽게 섬길 수 있을 것입니다.
절제하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예배시간에 방언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를 함부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교훈했으며, 여자들이 예배시간에 좀 더 자중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질서대로 하라, 절제하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방언과 예언의 은사를 받으면 절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절제하지 않고 맘껏 사용하는 것이 성령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덕이 되지 못합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절제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배가 무질서하고 혼란스럽게 되었습니다. 본문은 은사들은 분명히 절제할 수 있으며, 또 절제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방언에 대해서 교훈한 27-28절을 봅시다.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되는 대로 방언을 말해서는 안되고 두 세 사람만 말하되 차례대로 말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통역하는 사람이 없으면 교회에서는 방언을 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방언의 은사는 얼마든지 절제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언의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29-30을 봅시다. 예언하는 사람들도 되는 대로 해서는 안되고 두 세 사람이 차례대로 해야 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예언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에게 계시가 임했다면 먼저 예언하던 사람은 잠잠하고 계시를 받은 사람이 예언을 해야 했습니다. 예언의 은사도 얼마든지 절제할 수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우리가 성령님께 사로잡히게 되면 정신이 온전할까요 아니면 제정신이 아니게 될까요? 성령충만하게 되면 정신이 혼미하지 않고 온전하게 됩니다. 그러나 악한 영에게 사로잡히게 되면 사람이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됩니다. 미친 사람이 되거나 이성을 잃게 됩니다. 그들은 이성으로 자신을 제어할 수가 없습니다. 귀신들린 사람들과 무당들이 대표적인 경우일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지배를 받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그 은사를 절제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잘못된 것입니까?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화평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필요에 따라, 특히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해 절제해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절제해야 할 사람들은 여자 성도들입니다. 일반적으로 여자 성도들은 남자 성도들에 비하여 더 열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자 성도들의 결정적인 단점은 절제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여자 성도들은 절제하지 못하여 예배를 매우 어지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여자 성도들에게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한 것은 절제하라는 말입니다. 여자 성도들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절제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이 매우 영적이라고 생각하면서 자기들 마음대로 행동했으며, 하나님 말씀이 자기들에게만 임한 것처럼 교만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 멋대로 은사를 사용하여 예배를 망쳐놓고도 자기들이 하나님 뜻대로 행동하고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교만을 책망하고 있습니다(36절). 그리고 가장 영적인 태도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스스로 선지자, 또는 신령한 자라고 생각하는 고린도 교회의 교만한 자들에게 도전합니다(37절). 사도 바울은 지금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선지자 또는 신령한 자라면 사도 바울의 이 말이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말씀인지를 알아보라는 것입니다. 만일 이것을 알지 못한다면 그들이 어떻게 신령한 자들이 될 수 있겠습니까(38절)? 그들은 거짓된 자들이 틀림없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진정으로 신령한 자들이어서 사도 바울의 편지가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말씀인 것을 알 수 있다면 그들은 마땅히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정말 신령한 사람은 어떤 황홀경에 빠지거나 놀라운 능력을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요일4:6)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당신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믿습니까? 당신은 이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십니까? 때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자기 맘대로 행동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을 받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열심히 봉사하고 큰 일을 한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교회에도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본인도 매우 불행한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신앙과 생활에 있어서 절대적인 유일한 법칙입니다. 모든 일에, 특히 모든 예배와 봉사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은사 받은 사람들에게 절제할 것을 명령했다고 해서 은사를 금지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예언하기를 사모하고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했습니다(39절). 은사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절제하면서 열심히 은사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섬기도록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나쳐서는 안됩니다. 함부로, 자기 맘대로 해서는 안됩니다. 다시 한 번 은사를 사용하는 중요한 원리를 기억합시다. 사랑을 따라 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에 덕을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하며 질서대로 해야 합니다. *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