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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룻2:14-23레19: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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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
한청년이 결혼을 허락받기 위해 애인집에 저녁초대를 받았습니다. 평소에 속이 좋지 않아 가스가 많이 차 청년은 걱정이 되었습니다. 조심스럽게 인사를 하고 식사를 하는데 청년은 그만 방귀를 뀌고 말았습니다. 청년은 어쩔줄을 몰랐습니다. 그러자 약혼자의 아버지는 청년의 옆에 앉아있던 개를 보며 “해피야, 저리 가”라고 말했습니다. 청년은 참 마음이 너그럽고 자신의 실수를 모르는척 배려하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또 방귀를 뀌고 말았습니다. 이번에도 애인의 아버지는 “해피야, 저리 가라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청년은 아버지의 자신을 배려해 주시는 아버지의 마음이 눈물나도록 고마웠습니다. 속이 거북한 청년은 헛기침을 하며 어쩔줄을 몰랐습니다. 청년은 조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조금 후 또한번 큰 소리를 방귀를 뀌고 말았습니다. 약혼자의 아버지는 이번에는 더욱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야. 해피야 저리가라. 거기 있다가는 똥 뒤집어 쓰겠다.”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누가 웃자고 지어낸 이야기일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 사회는 너무나 상대방을 배려하지 못하는 일들을 보고 있습니다. 배려해주는 척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챙깁니다. 국민, 국익, 소비자 운운하지만 속마음은 다릅니다. 곳곳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는 분들을 봅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의약분업을 보면서 그래도 많이 배우신 분들이 조금만 상대방을 배려하며 타협하지 하며 아쉬운 생각을 해 보기도 합니다. 전철안에서도 버스 안에서도 상대방은 어떻게 생각하든 핸드폰을 들고 큰 소리로 전화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차 안에서 상대는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방방 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하철의 '쩍벌남' '쩍벌녀' 비스듬히 두 자리를 걸쳐 앉은 사람들, 신문을 넓게 펼쳐 들고 있는 사람, 좁은 자리 비집고 들어가는 아줌마, 남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는 신문에 보니까 출근길에 차가 밀려 골목길로 빠지는 택시를 보고 뒤따라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참 가니 차 세워 둘 곳이 아닌 통로에 외제 고급승용차 한 대가 딱 버티고 서 있더라는 것입니다. 계속 골목길로 밀려들어온 십 여대의 차가 다시 오던 길로 빠져나가려다 그만 뒤엉키고 말았답니다. 한 10분이 지나서야 승용차 주인이 나타났는데 말 한마디 없이 자리를 뜨려는 참이었답니다. 이때 바로 뒷 차에 탓던 사람이 큰소릴 '뻑'하고 질렀답니다 "야아! 너는 출근길에 이 많은 차들을 막아놓고도 미안하단 말 한마디도 없어?" 그러자 그 고급승용차 주인인 "야아! 차나 좀 좋은 걸 끌고 다니면서 큰소릴쳐 임마!"라고 가더라는 것입니다. 서로 조금만 남을 배려하면 더욱 행복하게 살 수 있을 텐데 우리 사회는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점점 시들해 가는 것같습니다. 산업사회, 도시 사회에서 생존 경쟁이 치열해 지고 땅은 좁은데 사람은 많고 남을 이기지 않으면 자신이 살 수 없는 세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같습니다. 일등 자리는 하나 밖에 없는데 모두가 일등을 하라고 어릴 때부터 교육을 받고 자랐는데 가면 갈수록 살벌한 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래도 농경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풍부했던 것 같습니다. 옛날 시골에 살 때는 그래도 사람들이 배려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모내기를 하다 세참을 먹으면 지나가는 사람들을 같이 불러 먹고, 늦가을이 되어 감을 딸 때도 일부는 짐승들이 먹으라고 남겨 놓고 하는 것들을 보았습니다. 곶감을 거리에 널어놓고 지나가는 나그네들이 한 두개 집어먹는다고 야단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수박 서리나 닭서리를 도둑으로 몰지 않고 미풍 양속, 낭만으로 생각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자그마한 일이지만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풍요롭게 하고 살맛나게 하는 것들입니다. 101가지 이야기가 인기였습니다. 101가지 이야기가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읽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곳에는 남을 배려해 주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 책에 나오는 간디의 신발 한짝 이야기는 얼마나 우리 마음을 풍요롭게 합니까?
막 출발하려는 기차에 간디가 급히 올라탔습니다. 그 순간 그의 신발 한 짝 이 벗겨져 플 랫폼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기차가 이미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간디는 그 신발을 주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간디는 얼른 나머지 신발 한 짝을 벗어 그 옆에 떨어뜨렸습니다. 동행하던 사람들이 놀라 묻자 간디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어떤 가난한 사람이 신발 한 짝을 주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런 쓸모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신발 한 켤레를 제대로 갖게 되지 않았습니까"
하나 더 소개하자면 10대에 아버지와 함께 서커스 구경을 갔다가 구경하지 못하고 돌아온 이야기입니다.
10대 시절 아버지와 함께 서커스를 구경하러 갔습니다. 마침 그들 가족 앞에는 8명의 자녀를 거느린 부부가 줄을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이었고 처음 서커스 구경을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윽고 차례가 되어 매표소에 입장료를 물어보던 남자는 순간 절망적인 얼굴로 바뀌면서 입술을 가늘게 떨었습니다. 가족 모두가 보기에는 돈이 모자랐습니다. 이때아버지는 말없이 20달러 지폐를 바닥에 떨어뜨렸습니다. 그런 다음 그것을 다시 주워들고 남자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습니다. "여보. 당신 호주머니에서 이것이 떨어졌소" 남자는 무슨 영문인지 금방 알아차렸습니다. 그리고 20달러 지폐를 꼭 움켜잡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고맙소. 이건 나와 내 가족에게 정말로 큰 선물이 될 것이오" 남자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습니다. 그의 가족은 그날 저녁 서커스 구경을 못했지만 마음은 결코 허전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읽고 들어도 감동적이지 않습니까? 이런 세상이 살맛나는 세상 행복한 세상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세상에서 우리가 이렇게 서로 배려해 주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아담과 하와를 창조해 좋고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왜 아담 홀로 살게 놓아두지 않고 하와를 만들었다고 합니까? 돕는 배필로 만들지 않았습니까? 서로 돕고 배려해주고 살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 아닙니까? 그런데 돕기는커녕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서로 잘못을 전가하는 꼴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그대로 놓아두면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더욱이 그 이기심이 집단화 될 때는 무섭게 상대 집단을 파괴해 버립니다. 마치 히틀러가 유대인을 학살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군국주의 자들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약한 나라를 신민화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경제 강국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제도와 국제 기구를 만들어 자신들의 영구히 자신들의 이권을 보장받는 것과 같은 것 입니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 보드시 특정 집단이 이익을 위해 뭉치면 집단 이기주의의 무서운 힘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핵폐기물 처리장, 산업쓰레기 처리시설, 장애인 시설, 장례 시설이 우리 동네에 서면 안된다고 반대하는 님비(NIMBY,Not in My Backyard;내 뒷마당에는 안된다) 현상은 분명히 집단 이기주의의 한 표현입니다. 특정학교 인맥, 특정지역 주의 등 모두 집단 이기주의의 한 표현입니다. 문제는 힘있는 자들의 집단 이기주의입니다. 힘있는 자들이 뭉쳐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한다면 사회는 온전해 질 수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별로 나쁘지 않지만 집단이 되면 목소리도 주장도 강경해집니다. 그러므로 공동선과 사회정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제도, 정책, 구조로 집단적 이기심을 억제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의사에게 의술은 인술이니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하면 일부의 사람들은 할 수 있겠지만 대부분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그럴 때 의료 보험이라는 사회 제도를 통하여 가난한 사람이 제도적으로 보장받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래서 가만히 놓아두면 강자들이 약자을 잡아먹고 사회는 정의가 실현되지 않고 강자들의 세상이 되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약자를 보호하는 제도를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안식년, 희년, 십일조 등은 바로 그런 제도입니다. 그 중 세부적인 제도 하나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추수할 때 이삭을 남겨 놓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은 추수철이 되어도 거둘 곡식이 없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도 최소한의 삶을 살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해 주는 것입니다. 즉 추수할 때 이삭을 남겨 놓도록 배려한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나오미의 가정은 가난한 가정이었습니다. 흉년이 들어 남편과 두 아들이 함께 모압 나라로 이민을 갔습니다. 그런데 그만 그곳에서 남편이 죽고 아들 둘을 장가를 보내었는데 아들 둘도 죽고 며느리 룻과 함께 자신의 나라 유다로 다시 왔습니다. 먹을 것도 없고 의지할 사람도 없습니다. 이 때 며느리 룻이 시어머니를 잘 섬깁니다. 보리와 밀을 타작할 즈음 그 이삭을 주으러 밭에 나갔습니다. 그 때 보아스라는 사람이 이삭을 주을 수 있도록 배려해 줍니다.
14절을 읽어 보시겠습니다. 배고픈 롯에게 먹을 것을 줍니다.
15,16절 읽어 보시겠습니다. 곡식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합니다. 일부러 이삭을 뽑아서 줍게 만듭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배려입니까? 이러한 배려가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있어야 합니다.
1. 남을 배려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배려해도 좋고 배려 안해도 좋고가 아닙니다. 양비론이 아닙니다. 선택이 아닙니다. 꼭 배려해야 하는 것입니다. 살인을 하지 말아야하고 도둑질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배려 역시 꼭 해야하는 계명입니다. 배려하면 여유있는 자가 남에게 베푸는 것 정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저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 새벽이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 옵니다. 어떤 분은 올라오자 마자 다른 사람을 위해 1층을 눌러 놓습니다. 심방을 갑니다. 어떤 구역장들은 들어가자 마자 신발을 나가기 좋게 가지런히 정리해 놓습니다. 아이들이 무더운 여름날 학교에서 옵니다. 어떤 어머니는 냉장고에 물을 시원하게 해 놓았다가 아이가 오자 마자 줍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배려입니다. 아버지 자녀에게 용돈을 주면서 새로운 지폐로 바꾸어 준비했다가 줍니다. 어떤 자매가 추운 어느날 기독교회관빌딩12층에 올라가기 위해서 엘리베이터에 탔는데 문이 닫히려 하는 순간 막 현관 문이 열리며 노신사 한 분이같이 가자고 손짓을 하며 급히 뛰어 오더라는 것입니다. 얼른 `열림' 스위치를 눌러 닫히려는 문을 열고 기다렸다가 그분이 타시자, 문을 닫고 올라가기 시작 하였습니다. 그분은 연신 고맙다며 온화한 감사의 눈길을 보내십니다. 12층에서 내려 문득 뒤돌아보니 엘리베이터가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잠시 기다려준 자신을 배려해 먼저 내리도록 몇 층인지 모르지만 더 올라오셨던 것입니다.
식당에서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닦도록 작은 물그릇을 갖다 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어떤 분이 그 나라를 방문하여 식사 초대를 받았더랍니다. 이런 관습을 잘 몰랐던지라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손씻을 물을 음료로 알고 마셔 버린 겁니다. 모두가 당황했습니다. 그러자 그를 초청한 높은 사람이 물그릇을 슬며시 들더니 조금 마시더랍니다. 그걸 본 나머지 사람들도 그렇게 따라서 했습니다. 이것 모두 남을 배려해 주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그 어떤 것보다 고상한 예절이요, 아름다운 격식이요, 수준 높은 문화일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안해도 누가 시비할 사람없습니다. 룻이 이삭을 줍습니다. 보아스가 그에게 이삭을 줍도록 배려해 주지 않아도 누가 시비할 사람없습니다. 그 때는 사사 시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 아주 타락한 시대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남을 배려하는 것도 하나님의 명령인 것을 깨닫고 의도적으로 의식적으로 배려하는 훈련을 하여야 하고 배려하는 인격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레위기 19:9-10을 찾아 보십시오.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배려하도록 이삭을 남겨 놓으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 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특별한 배려입니다. 옛날 우리 나라에도 이런 풍습이 있었습니다. 어릴 때 보면 감나무에서 감을 딸 때 얼마는 남겨 놓았습니다. 까치들이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입니다. 농사를 짖고 곡식을 거둘 때는 남은 이삭을 다시 거두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이삭 줍기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추수하고 이삭을 남겨 놓는 정도가 아닙니다. 밭 모퉁이는 원천적으로 거두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실행된 곳은 성경 어디에도 있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처음 나오고 있습니다. 보아스는 이러한 하나님의 율법대로 행했을 뿐 아니라 룻을 선대하여 다른 밭으로는 가지말 것과 식사 때에는 물과 음식을, 그리고 밭에서는 많은 이삭을 줍도록 배려하였습니다.
더 적극적으로 곡식 베는 자들로 하여금 가끔 곡식단에서 일부러 조금씩 뽑아내도록 하여 이삭을 거두게 하였습니다(17). 룻이 하루동안에 한 에바 즉 약 23리터(12되)나 되는 많은 이삭을 줍게 되었으니 보아스의 배려가 얼마나 컸는가를 짐작할 수 있게 됩니다.
보아스가 배려하는 대상이 누구입니까?
그는 이방여인입니다. 그것도 그들이 생각하기에 원수처럼 보이는 모압 여인입니다. 그런데도 보아스는 그녀를 배려해 줍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함께 더불어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이삭을 남겨 놓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현장에서 실현되어야 합니다.
우리 사회는 배운자가 더 이기적이고 갖은 자가 더 표독하다고 말들을 합니다. 서울대 이순형 교수가 중고대학생을 대상으로 표본을 설정 의식을 조사했답니다. 그분의 결론은 우리나라 청소년들은 대체로 개인주의적이며 특히 어머니의 학력이나 가정의 경제적 수준이 높을 수록 이런 성향은 강해진다는 것입니다. 한국교육개발원이 지난해 전국 30대 이상 성인 남녀 3천3백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고학력일수록 학연.지연 더 따진다는 것입니다. 학력이 높을수록 지연. 학연. 혈연 등 연고(緣故)를 더 중시하고 남녀평등의식도 낮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을 남을 배려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고 배려하지 않는 것은 죄라는 생각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상대는 배려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작년에 한 은행지점장의 한강에 투신 자살하는 사건이 신문에 보도되었습니다. 서른 여섯 살 서울 모 외국계은행의 엘리트 지점장이었습니다. 입사 10년만에 국내 최연소 지점장이 되었습니다. 끊임없이 성장을 요구하는 실적주의와, 이에 따른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한 체 비극적인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의 마지막 유언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나는 은행을 위해 일한 결과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사랑하는 당신, 그리고 <><>야 <><>야, 미안하다. 미안하다. 아빠는 최선을 다했다. 바보 같은 아빠의 삶을 살지 마라. 서로 배려하는 마음으로 살길 바란다."
실적과 능력만 요구하는 냉혹한 조직과 사회에서 그래도 우리는 서로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서로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남을 배려할 때 어떻게 배려해야 합니까?
2. 어떻게 배려합니까?
1)보아스가 룻을 어떻게 배려하였습니까?
(1)룻이 배불이 먹고 남을 정도로 배려합니다(14).
(2)곡식 단 사이에 줍게 하고 책망하지 못하게 합니다(15).
(3)조금씩 뽑아 버려서 줍게 하였습니다(16).
(4)시모를 잘 섬기도록 배려합니다(18,19).
(5)나오미에게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합니다(20-22).
(6)오랜 기간 동안 이삭을 거둘 수 있도록 배려합니다(23).
2)우리는 어떻게 배려할 수 있겠습니까?
(1)배려할 때는 내 입장이 아니라 상대의 입장을 생각하여 배려해야 합니다.
보아스는 자신의 입장보다는 룻과 그 가정의 입장에서 배려해 준 것입니다. 자존심 상하지 않도록 조금씩 뽑아 버려서 줍게 하였습니다(16). 보아스는 재물이 많을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 존경을 받으며, 그 지방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정치적 출세를 위해 배려한 것아닙니다. 순순하게 룻과 그 가정의 입장에서 배려한 것입니다.
캄캄한 밤중입니다. 급한 볼일로 외출하려는 시각장애인 한 사람에게 친구가 초롱불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아니 누굴 놀리니? 앞 못보는 장님인 줄 알면서." 하고 화를 냈습니다. 친구는 말했습니다. "그게 아닐세. 이 초롱불은 자네를 위한 부딪히기 쉬운 다른 사람을 배려함일세." 이런 것이 바로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는 배려입니다. 가난한 사람 옷 한 벌 사주고 두고 두고 어려울 때 내가 옷사주었다고 자랑하는 것은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는 배려가 아닙니다.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배려입니다.
어떤 부인이 길에서 신음하는 청년을 만났답니다. 부인은 다가가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청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답니다.“불량배에게 폭행당 한 후 지갑까지 빼앗겼어요”부인은 청년에게 3만원을 건네주며 위로했답니다.“이 돈으로 우선 가까운 병원에 가보세요” 청년은 몇번이나 머리숙여 감사를 표했습니다.“전화번호를 알려주세요. 반드시 이 돈을 갚겠습니다” 부인은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답니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습니다. 속이 상한 부인은 남편에게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이런 것은 상대를 생각하여 한 배려가 아닙니다. 남편이 보다 보다 못해 방법을 썼씁니다. 어느날 아내는 화장대에서 낯익은 편지와 함께 만원짜리 신권 세장을 발견했습니다. “여보,당신의 착한 마음이 행여 상처를 받을까 걱정이오. 청년 대신 내가 갚는 것이오” 부인은 남편의 따뜻한 배려에 진한 행복을 느꼈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남편과 아내, 자식과 친구, 목회자와 성도님들의 눈물방울과 웃음의 횟수를 세고 계십니다. 배려해 놓고 억울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상대를 위한 일이다면 다 잃어 버리십시오. 우리 주님 다 아십니다. 소자 하나님에게 냉수 한 그릇 대접한 것도 그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주님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배려할 때는 형식적이 배려가 아니라 삶을 위한 배려가 되게 하여야 합니다. 지속적인 배려여야 합니다.
오래 동안 이삭을 거두어 실제 삶에 보탬이 되게 하였습니다(23). 룻이 배불리 먹고 남을 정도로 배려했습니다(14). 시모를 잘 섬기도록 배려했습니다(18,19). 그녀에게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배려했습니다.
스위스 취리히의 슈타인츠거리에 한 노인이 나타났습니다. 노인은 길바닥에서 무언가를 주워 주머니에 넣고 있었습니다. 경찰이 노인의 태도를 유심히 살핀 후 물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줍고 있습니까, 습득물은 경찰서에 신고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계시겠지요" 노인은 경찰관에게 잔잔한 미소를 보내며 대답했습니다. "별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그냥 가시지요" 경찰은 노인의 주머니를 강제로 뒤졌습니다. 그런데 주머니에 들어있는 것은 온통 유리조각이었습니다. 노인은 경찰에게 말했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이 유리조각을 밟아 다치면 안되지 않습니까" 경찰은 노인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노인은 누구신가요" 그러자 노인이 대답했다."저는 조그마한 고아원을 운영하는 사람입니다"
이 노인이 바로 그 유명한 페스탈로치였습니다. 그는 일평생을 어려운 사람을 위해 삶을 내어 주었습니다. 사랑은 작은 배려에서 시작되지만 열매는 긴 배려를 통하여 열리는 것입니다.
(3)배려할 때는 상대에게 소망을 주는 배려가 되어야 합니다(20-22).
나오미는 이 배려를 통하여 후손에 대한 소망을 갔게 됩니다. 이제 죽겠다는 생각이 아닙니다. 이제 대가 끊겼다는 생각이 아닙니다. 결국 룻이 메시야의 족보에 오르게 되고 메시야를 탄생시키는데 쓰임받는 가정이 되지 않습니까? 그의 배려를 통해 위대한 역사의 한 부분을 담당하는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상대를 좌절하게 하는 배려가 되어서는 않됩니다. 상대에게 비전과 희망과 소망을 주는 배려여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어려운 사람 10000원짜리 티 하나 사주면서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30만원 짜리 티라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통사고로 전신이 마비된 브룩 엘리슨양(22)이 하버드대를 우등 졸업했다는 기사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녀는 사지마비 학생으로서는 처음으로 정규과정을 마치고 평균 A학점이라는 뛰어난 성적으로 심리학 및 생물학 학사학위를 받게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10년 전인 중학교 1학년 때.등교 첫날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교통 사고로 36시간 동안 혼수상태에 빠져고 다행이 목숨을 건졌지만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어 1분에 13차례씩 기도를 통해 허파로 공기를 밀어넣는 인공호흡기 장치를 해야 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결코 삶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입천장에 부착한 키패드를 혀로 눌러 휠체어를 작동시켜가며 강의실을 찾아다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녀가 그렇게 하기 까지는 주위의 배려가 있었습니다.
엘리슨의 곁에는 언제나 어머니 진 마리(48)가 있었습니다.장애인을 위한 특수교육교사로 처음 출근하던 날 엘리슨이 교통사고를 당해 그날이 교사로서 처음이자 마지막 날이 되고 만 마리는 사고 직후 24시간 엘리슨의 곁을 지키며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습니다.엘리슨이 하버드대에 진학하면서부터는 남편과 어린 자녀들을 뉴욕에 남겨두고 자신은 기숙사에서 엘리슨과 한방에서 생활하며 엘리슨의 학업을 도왔습니다.딸의 팔다리 역할을 해주었습니다.학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엘리슨이 입학하자 하버드대는 엘리슨의 방을 자동문과 비상벨,엘리베이터 등을 갖춘 특별 병실로 개조했주었습니다.의료비와 생활비를 보조하기 위해 장학금도 제공했습니다.엘리슨이 휠체어가 접근할 수 없는 강의실에서 수업이 진행되는 오페라 역사 강좌를 신청했을 때는 휠체어가 드나들 수 있도록 강의실을 변경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누구가 주변의 배려만 있다면 소망적인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우리의 손발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웃음과 우리의 따뜻한 말과 우리의 복음적인 생각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소망을 주어야 합니다.
3. 왜 이렇게 배려합니까?(11,12)
하나님 때문입니다. 11,12절을 읽어 보십시오. 보아스의 신앙이 나와 있습니다. 레위기 19:9-10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곡식을 남겨 두라고 말씀하시면서 마지막에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단순히 마음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상대를 생각해 보니 불쌍해서가 아닙니다. 이 말씀을 주시는 분은 우리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의 땅 애굽에서 인도하시고 땅을 공짜로 분배케 해주시고 참 자유인으로 살수 있도록 축복해 주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만큼 살게 된 것도 우리가 이렇게 행복하게 예배드릴 수 있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닙니까? 과거를 생각해 보면 얼마나 어려웠던 시절이 많이 있었습니까? 그러나 우리 민족이 이정도로 살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인 줄 믿습니다.
독일 하이델 베르그 대학 박사 학위를 받은 선교사가 소아마비 자매와 결혼한 이야기를 읽어 보았습니다. 어는 집사님은 고3 학생과 중 3학생이 낳은 아이를 입양하는 일도 있습니다. 그것도 정상적인 아이가 아니라 장님입니다.
왜 이들이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자신들을 살려 주었는데 그 은혜에 보답하는 방법이 바로 그 방법이기 때문에 주의 사람들의 비난과 자신들의 고통을 감수하면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들의 차이가 아니겠습니까? 요즈음 일부 대형 교회 목사님들의 담임 목사 세습으로 언론에서 조금 비꼬는 것 같습니다. 인터넷 방송에 들어가 보니 네티즌들의 비난이 대단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일부 대형 교회 목사님들은 자식을 죽게하지는 못할망정 고난의 강은 건너게 해야 하지요. 누가 내 자식 편하게 사는 것 싫어할 사람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우리의 구원자이신 것을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로마 제국의 그 무서운 박해 가운데서도 물고기 그림 '잎뒤스'로 신앙을 표현한 사람들처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주'(에에수스 크리스토스, 데우 휘오스, 소텔, )라고 선언하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우리의 초점이 예수님께 맞추어져야 합니다.
의약 분업으로 마찰이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방향이 잘못된 것입니다. 의약 분업으로 의사와 약사들이 서로 자신들의 이익에 맞는 방향으로 법을 만들어 달라고 합니다. 의사가 약사가 이 땅에 존재하여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환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환자가 없다면 존재할 필요가 무엇입니까? 그러면 초점은 어디에 맞추어져야 하겠습니까? 서로 환자의 이익, 환자를 배려하는 마음에 맞추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분쟁 해결의 열쇠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에 행복하게 되는 것도 바로 그와같은 원리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생각했을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예수님이라면 무슨 말씀을 했을까?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믿는 다고 하는 사람들도 너무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목사님이 설교를 합니다. 조금 크게 하면 발악을 한다고 합니다. 조금 작게 하면 졸고 있다고 합니다. 기도를 합니다. 조금 큰 소리로 기도하면 떠는다고 합니다. 조금 작은 소리로 하면 은혜가 없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하는 것은 모두가 싫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어느 도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이민을 간다고 합니다. 경상도, 전라도면 무조건 싫은 것입니다. 결혼을 하는데도 경상도 사람이면 전라도 사람이면 무조건 싫은 것입니다. 이것은 배려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신앙인의 삶이 아닙니다. 단지 자신이 신이 되고 신앙이란 단지 포장지에 불과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나라 사람의 의식을 가리켜 ‘나먼저이즘’이라고 꼬집는 사람이 있습니다.
상대방의 국산 휴대폰은 과시용, 자신의 외제 휴대폰은 사무용입니다. 상대방이 룸살롱 가면 퇴폐성이고, 내가 룸살롱 가면 접대성입니다. 상대방이 해외여행 가면 과소비이고, 자신이 해외여행 가면 여가선용입니다. 다른 사람이 골프 치면 내기 골프이고, 내가 골프 치면 체력단련입니다. 이웃집 아들의 미국유학은 도피성이고, 내 아들 미국유학은 국위선양입니다. 상대방 딸아이 높은 코는 세워서이고, 내 딸아이 높은 코는 나 닮아서입니다. 상대가 분당 살면 촌동네이고, 내가 분당에 살면 천당 신도시입니다. 상대가 그랜저 타면 촌놈 출세한 것이고, 내가 그랜저 타면 품위 유지입니다. 다른 사람이 일 안하면 복지부동이고, 내가 일 안하면 유유자적입니다. 타인의 아들이 귀고리하면 꼴불견이고, 내 아들이 귀고리하면 n세대입니다. 타인이 외도하면 스캔들, 내가 하면 로맨스입니다. 다른 사람이 돈을 주면 뇌물공여이고, 내가 주면 성의표시입니다. 다른 사람이 과속하면 난폭운전이고, 내가 과속하면 시간절약입니다. 이런 생각이 판을 치는 세상이다면 그 사회가 행복한 사회가 될 수 있겠습니까?
한 사람이 죽어서 천국에 도착했습니다. 그 사람은 베드로에게 지옥의 모습을 한번 보여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를 데리고 지옥으로 갔습니다. 마침 그때가 점심 시간이었는데 끝이 보이지 않는 긴 식탁에 진수성찬이 가득 차려져 있었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뼈만 앙상한 모습이었답니다. 지옥사람들의 손에는 모두 1미터가 넘는 긴 젓가락이 들려 있었답니다. 그들은 그것으로 음식을 집어 자신의 입에 넣으려고 아우성이었답니다. 그러나 긴 젓가락에 매달린 음식은 자신들의 입에 들어가지 않았답니다. 지옥은 굶주림에 지친 사람들로 아비규환을 연출하고 있었습니다.
천국에 와보니 그곳에서도 똑같은 식탁에 음식이 차려져 있었답니다. 천국사람들의 손에도 1미터가 넘는 긴 젓가락이 들려 있었답니다. 그러나 천국사람들은 질서정연하게 음식을 먹고 있었습니다. 천국사람들은 긴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어 상대방에게 먼저 먹여주고 있었답니다. 지옥은 '남'보다 '나'를 먼저 생각하는 곳이라면 천국은 '나'보다 '남'을 먼저 배
려하는 곳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이삭을 남기는 마음을 가지고 삽시다. 그러면 우리의 가정도, 우리의 교회도, 우리의 직장도, 우리의 사회도 참으로 천국같은 행복한 곳 살맛나는 곳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보아스처럼 이일에 주인공이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 레위기 19:9-10절을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이삭을 남기는 마음/룻기 2:14-23(레위기 19:9-10)/김필곤목사
어는 신문에 보니까 출근길에 차가 밀려 골목길로 빠지는 택시를 보고 뒤따라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참 가니 차 세워 둘 곳이 아닌 통로에 외제 고급승용차 한 대가 딱 버티고 서 있더라는 것입니다. 계속 골목길로 밀려들어온 십 여대의 차가 다시 오던 길로 빠져나가려다 그만 뒤엉키고 말았답니다. 한 10분이 지나서야 승용차 주인이 나타났는데 말 한마디 없이 자리를 뜨려는 참이었답니다. 이때 바로 뒷 차에 탓던 사람이 큰소릴 '뻑'하고 질렀답니다 "야아! 너는 출근길에 이 많은 차들을 막아놓고도 미안하단 말 한마디도 없어?" 그러자 그 고급승용차 주인인 "야아! 차나 좀 좋은 걸 끌고 다니면서 큰소릴쳐 임마!"라고 가더라는 것입니다. 서로 조금만 남을 배려하면 더욱 행복하게 살 수 있을 텐데 우리 사회는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점점 시들해 가는 것같습니다. 산업사회, 도시 사회에서 생존 경쟁이 치열해 지고 땅은 좁은데 사람은 많고 남을 이기지 않으면 자신이 살 수 없는 세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같습니다. 일등 자리는 하나 밖에 없는데 모두가 일등을 하라고 어릴 때부터 교육을 받고 자랐는데 가면 갈수록 살벌한 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래도 농경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풍부했던 것 같습니다. 옛날 시골에 살 때는 그래도 사람들이 배려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모내기를 하다 세참을 먹으면 지나가는 사람들을 같이 불러 먹고, 늦가을이 되어 감을 딸 때도 일부는 짐승들이 먹으라고 남겨 놓고 하는 것들을 보았습니다. 곶감을 거리에 널어놓고 지나가는 나그네들이 한 두개 집어먹는다고 야단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수박 서리나 닭서리를 도둑으로 몰지 않고 미풍 양속, 낭만으로 생각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자그마한 일이지만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풍요롭게 하고 살맛나게 하는 것들입니다. 101가지 이야기가 인기였습니다. 101가지 이야기가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읽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곳에는 남을 배려해 주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 책에 나오는 간디의 신발 한짝 이야기는 얼마나 우리 마음을 풍요롭게 합니까?
막 출발하려는 기차에 간디가 급히 올라탔습니다. 그 순간 그의 신발 한 짝 이 벗겨져 플 랫폼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기차가 이미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간디는 그 신발을 주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간디는 얼른 나머지 신발 한 짝을 벗어 그 옆에 떨어뜨렸습니다. 동행하던 사람들이 놀라 묻자 간디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어떤 가난한 사람이 신발 한 짝을 주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런 쓸모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신발 한 켤레를 제대로 갖게 되지 않았습니까"
하나 더 소개하자면 10대에 아버지와 함께 서커스 구경을 갔다가 구경하지 못하고 돌아온 이야기입니다.
10대 시절 아버지와 함께 서커스를 구경하러 갔습니다. 마침 그들 가족 앞에는 8명의 자녀를 거느린 부부가 줄을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이었고 처음 서커스 구경을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윽고 차례가 되어 매표소에 입장료를 물어보던 남자는 순간 절망적인 얼굴로 바뀌면서 입술을 가늘게 떨었습니다. 가족 모두가 보기에는 돈이 모자랐습니다. 이때아버지는 말없이 20달러 지폐를 바닥에 떨어뜨렸습니다. 그런 다음 그것을 다시 주워들고 남자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습니다. "여보. 당신 호주머니에서 이것이 떨어졌소" 남자는 무슨 영문인지 금방 알아차렸습니다. 그리고 20달러 지폐를 꼭 움켜잡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고맙소. 이건 나와 내 가족에게 정말로 큰 선물이 될 것이오" 남자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습니다. 그의 가족은 그날 저녁 서커스 구경을 못했지만 마음은 결코 허전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읽고 들어도 감동적이지 않습니까? 이런 세상이 살맛나는 세상 행복한 세상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세상에서 우리가 이렇게 서로 배려해 주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아담과 하와를 창조해 좋고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왜 아담 홀로 살게 놓아두지 않고 하와를 만들었다고 합니까? 돕는 배필로 만들지 않았습니까? 서로 돕고 배려해주고 살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 아닙니까? 그런데 돕기는커녕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서로 잘못을 전가하는 꼴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그대로 놓아두면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더욱이 그 이기심이 집단화 될 때는 무섭게 상대 집단을 파괴해 버립니다. 마치 히틀러가 유대인을 학살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군국주의 자들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약한 나라를 신민화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경제 강국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제도와 국제 기구를 만들어 자신들의 영구히 자신들의 이권을 보장받는 것과 같은 것 입니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 보드시 특정 집단이 이익을 위해 뭉치면 집단 이기주의의 무서운 힘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핵폐기물 처리장, 산업쓰레기 처리시설, 장애인 시설, 장례 시설이 우리 동네에 서면 안된다고 반대하는 님비(NIMBY,Not in My Backyard;내 뒷마당에는 안된다) 현상은 분명히 집단 이기주의의 한 표현입니다. 특정학교 인맥, 특정지역 주의 등 모두 집단 이기주의의 한 표현입니다. 문제는 힘있는 자들의 집단 이기주의입니다. 힘있는 자들이 뭉쳐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한다면 사회는 온전해 질 수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별로 나쁘지 않지만 집단이 되면 목소리도 주장도 강경해집니다. 그러므로 공동선과 사회정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제도, 정책, 구조로 집단적 이기심을 억제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의사에게 의술은 인술이니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하면 일부의 사람들은 할 수 있겠지만 대부분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그럴 때 의료 보험이라는 사회 제도를 통하여 가난한 사람이 제도적으로 보장받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래서 가만히 놓아두면 강자들이 약자을 잡아먹고 사회는 정의가 실현되지 않고 강자들의 세상이 되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약자를 보호하는 제도를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안식년, 희년, 십일조 등은 바로 그런 제도입니다. 그 중 세부적인 제도 하나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추수할 때 이삭을 남겨 놓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은 추수철이 되어도 거둘 곡식이 없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도 최소한의 삶을 살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해 주는 것입니다. 즉 추수할 때 이삭을 남겨 놓도록 배려한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나오미의 가정은 가난한 가정이었습니다. 흉년이 들어 남편과 두 아들이 함께 모압 나라로 이민을 갔습니다. 그런데 그만 그곳에서 남편이 죽고 아들 둘을 장가를 보내었는데 아들 둘도 죽고 며느리 룻과 함께 자신의 나라 유다로 다시 왔습니다. 먹을 것도 없고 의지할 사람도 없습니다. 이 때 며느리 룻이 시어머니를 잘 섬깁니다. 보리와 밀을 타작할 즈음 그 이삭을 주으러 밭에 나갔습니다. 그 때 보아스라는 사람이 이삭을 주을 수 있도록 배려해 줍니다.
14절을 읽어 보시겠습니다. 배고픈 롯에게 먹을 것을 줍니다.
15,16절 읽어 보시겠습니다. 곡식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합니다. 일부러 이삭을 뽑아서 줍게 만듭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배려입니까? 이러한 배려가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있어야 합니다.
1. 남을 배려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배려해도 좋고 배려 안해도 좋고가 아닙니다. 양비론이 아닙니다. 선택이 아닙니다. 꼭 배려해야 하는 것입니다. 살인을 하지 말아야하고 도둑질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배려 역시 꼭 해야하는 계명입니다. 배려하면 여유있는 자가 남에게 베푸는 것 정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저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 새벽이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 옵니다. 어떤 분은 올라오자 마자 다른 사람을 위해 1층을 눌러 놓습니다. 심방을 갑니다. 어떤 구역장들은 들어가자 마자 신발을 나가기 좋게 가지런히 정리해 놓습니다. 아이들이 무더운 여름날 학교에서 옵니다. 어떤 어머니는 냉장고에 물을 시원하게 해 놓았다가 아이가 오자 마자 줍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배려입니다. 아버지 자녀에게 용돈을 주면서 새로운 지폐로 바꾸어 준비했다가 줍니다. 어떤 자매가 추운 어느날 기독교회관빌딩12층에 올라가기 위해서 엘리베이터에 탔는데 문이 닫히려 하는 순간 막 현관 문이 열리며 노신사 한 분이같이 가자고 손짓을 하며 급히 뛰어 오더라는 것입니다. 얼른 `열림' 스위치를 눌러 닫히려는 문을 열고 기다렸다가 그분이 타시자, 문을 닫고 올라가기 시작 하였습니다. 그분은 연신 고맙다며 온화한 감사의 눈길을 보내십니다. 12층에서 내려 문득 뒤돌아보니 엘리베이터가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잠시 기다려준 자신을 배려해 먼저 내리도록 몇 층인지 모르지만 더 올라오셨던 것입니다.
식당에서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닦도록 작은 물그릇을 갖다 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어떤 분이 그 나라를 방문하여 식사 초대를 받았더랍니다. 이런 관습을 잘 몰랐던지라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손씻을 물을 음료로 알고 마셔 버린 겁니다. 모두가 당황했습니다. 그러자 그를 초청한 높은 사람이 물그릇을 슬며시 들더니 조금 마시더랍니다. 그걸 본 나머지 사람들도 그렇게 따라서 했습니다. 이것 모두 남을 배려해 주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그 어떤 것보다 고상한 예절이요, 아름다운 격식이요, 수준 높은 문화일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안해도 누가 시비할 사람없습니다. 룻이 이삭을 줍습니다. 보아스가 그에게 이삭을 줍도록 배려해 주지 않아도 누가 시비할 사람없습니다. 그 때는 사사 시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 아주 타락한 시대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남을 배려하는 것도 하나님의 명령인 것을 깨닫고 의도적으로 의식적으로 배려하는 훈련을 하여야 하고 배려하는 인격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레위기 19:9-10을 찾아 보십시오.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배려하도록 이삭을 남겨 놓으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 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특별한 배려입니다. 옛날 우리 나라에도 이런 풍습이 있었습니다. 어릴 때 보면 감나무에서 감을 딸 때 얼마는 남겨 놓았습니다. 까치들이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입니다. 농사를 짖고 곡식을 거둘 때는 남은 이삭을 다시 거두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이삭 줍기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추수하고 이삭을 남겨 놓는 정도가 아닙니다. 밭 모퉁이는 원천적으로 거두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실행된 곳은 성경 어디에도 있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처음 나오고 있습니다. 보아스는 이러한 하나님의 율법대로 행했을 뿐 아니라 룻을 선대하여 다른 밭으로는 가지말 것과 식사 때에는 물과 음식을, 그리고 밭에서는 많은 이삭을 줍도록 배려하였습니다.
더 적극적으로 곡식 베는 자들로 하여금 가끔 곡식단에서 일부러 조금씩 뽑아내도록 하여 이삭을 거두게 하였습니다(17). 룻이 하루동안에 한 에바 즉 약 23리터(12되)나 되는 많은 이삭을 줍게 되었으니 보아스의 배려가 얼마나 컸는가를 짐작할 수 있게 됩니다.
보아스가 배려하는 대상이 누구입니까?
그는 이방여인입니다. 그것도 그들이 생각하기에 원수처럼 보이는 모압 여인입니다. 그런데도 보아스는 그녀를 배려해 줍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함께 더불어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이삭을 남겨 놓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현장에서 실현되어야 합니다.
우리 사회는 배운자가 더 이기적이고 갖은 자가 더 표독하다고 말들을 합니다. 서울대 이순형 교수가 중고대학생을 대상으로 표본을 설정 의식을 조사했답니다. 그분의 결론은 우리나라 청소년들은 대체로 개인주의적이며 특히 어머니의 학력이나 가정의 경제적 수준이 높을 수록 이런 성향은 강해진다는 것입니다. 한국교육개발원이 지난해 전국 30대 이상 성인 남녀 3천3백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고학력일수록 학연.지연 더 따진다는 것입니다. 학력이 높을수록 지연. 학연. 혈연 등 연고(緣故)를 더 중시하고 남녀평등의식도 낮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을 남을 배려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고 배려하지 않는 것은 죄라는 생각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상대는 배려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작년에 한 은행지점장의 한강에 투신 자살하는 사건이 신문에 보도되었습니다. 서른 여섯 살 서울 모 외국계은행의 엘리트 지점장이었습니다. 입사 10년만에 국내 최연소 지점장이 되었습니다. 끊임없이 성장을 요구하는 실적주의와, 이에 따른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한 체 비극적인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의 마지막 유언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나는 은행을 위해 일한 결과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사랑하는 당신, 그리고 <><>야 <><>야, 미안하다. 미안하다. 아빠는 최선을 다했다. 바보 같은 아빠의 삶을 살지 마라. 서로 배려하는 마음으로 살길 바란다."
실적과 능력만 요구하는 냉혹한 조직과 사회에서 그래도 우리는 서로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서로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남을 배려할 때 어떻게 배려해야 합니까?
2. 어떻게 배려합니까?
1)보아스가 룻을 어떻게 배려하였습니까?
(1)룻이 배불이 먹고 남을 정도로 배려합니다(14).
(2)곡식 단 사이에 줍게 하고 책망하지 못하게 합니다(15).
(3)조금씩 뽑아 버려서 줍게 하였습니다(16).
(4)시모를 잘 섬기도록 배려합니다(18,19).
(5)나오미에게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합니다(20-22).
(6)오랜 기간 동안 이삭을 거둘 수 있도록 배려합니다(23).
2)우리는 어떻게 배려할 수 있겠습니까?
(1)배려할 때는 내 입장이 아니라 상대의 입장을 생각하여 배려해야 합니다.
보아스는 자신의 입장보다는 룻과 그 가정의 입장에서 배려해 준 것입니다. 자존심 상하지 않도록 조금씩 뽑아 버려서 줍게 하였습니다(16). 보아스는 재물이 많을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 존경을 받으며, 그 지방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정치적 출세를 위해 배려한 것아닙니다. 순순하게 룻과 그 가정의 입장에서 배려한 것입니다.
캄캄한 밤중입니다. 급한 볼일로 외출하려는 시각장애인 한 사람에게 친구가 초롱불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아니 누굴 놀리니? 앞 못보는 장님인 줄 알면서." 하고 화를 냈습니다. 친구는 말했습니다. "그게 아닐세. 이 초롱불은 자네를 위한 부딪히기 쉬운 다른 사람을 배려함일세." 이런 것이 바로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는 배려입니다. 가난한 사람 옷 한 벌 사주고 두고 두고 어려울 때 내가 옷사주었다고 자랑하는 것은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는 배려가 아닙니다.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배려입니다.
어떤 부인이 길에서 신음하는 청년을 만났답니다. 부인은 다가가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청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답니다.“불량배에게 폭행당 한 후 지갑까지 빼앗겼어요”부인은 청년에게 3만원을 건네주며 위로했답니다.“이 돈으로 우선 가까운 병원에 가보세요” 청년은 몇번이나 머리숙여 감사를 표했습니다.“전화번호를 알려주세요. 반드시 이 돈을 갚겠습니다” 부인은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답니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습니다. 속이 상한 부인은 남편에게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이런 것은 상대를 생각하여 한 배려가 아닙니다. 남편이 보다 보다 못해 방법을 썼씁니다. 어느날 아내는 화장대에서 낯익은 편지와 함께 만원짜리 신권 세장을 발견했습니다. “여보,당신의 착한 마음이 행여 상처를 받을까 걱정이오. 청년 대신 내가 갚는 것이오” 부인은 남편의 따뜻한 배려에 진한 행복을 느꼈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남편과 아내, 자식과 친구, 목회자와 성도님들의 눈물방울과 웃음의 횟수를 세고 계십니다. 배려해 놓고 억울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상대를 위한 일이다면 다 잃어 버리십시오. 우리 주님 다 아십니다. 소자 하나님에게 냉수 한 그릇 대접한 것도 그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주님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배려할 때는 형식적이 배려가 아니라 삶을 위한 배려가 되게 하여야 합니다. 지속적인 배려여야 합니다.
오래 동안 이삭을 거두어 실제 삶에 보탬이 되게 하였습니다(23). 룻이 배불리 먹고 남을 정도로 배려했습니다(14). 시모를 잘 섬기도록 배려했습니다(18,19). 그녀에게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배려했습니다.
스위스 취리히의 슈타인츠거리에 한 노인이 나타났습니다. 노인은 길바닥에서 무언가를 주워 주머니에 넣고 있었습니다. 경찰이 노인의 태도를 유심히 살핀 후 물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줍고 있습니까, 습득물은 경찰서에 신고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계시겠지요" 노인은 경찰관에게 잔잔한 미소를 보내며 대답했습니다. "별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그냥 가시지요" 경찰은 노인의 주머니를 강제로 뒤졌습니다. 그런데 주머니에 들어있는 것은 온통 유리조각이었습니다. 노인은 경찰에게 말했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이 유리조각을 밟아 다치면 안되지 않습니까" 경찰은 노인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노인은 누구신가요" 그러자 노인이 대답했다."저는 조그마한 고아원을 운영하는 사람입니다"
이 노인이 바로 그 유명한 페스탈로치였습니다. 그는 일평생을 어려운 사람을 위해 삶을 내어 주었습니다. 사랑은 작은 배려에서 시작되지만 열매는 긴 배려를 통하여 열리는 것입니다.
(3)배려할 때는 상대에게 소망을 주는 배려가 되어야 합니다(20-22).
나오미는 이 배려를 통하여 후손에 대한 소망을 갔게 됩니다. 이제 죽겠다는 생각이 아닙니다. 이제 대가 끊겼다는 생각이 아닙니다. 결국 룻이 메시야의 족보에 오르게 되고 메시야를 탄생시키는데 쓰임받는 가정이 되지 않습니까? 그의 배려를 통해 위대한 역사의 한 부분을 담당하는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상대를 좌절하게 하는 배려가 되어서는 않됩니다. 상대에게 비전과 희망과 소망을 주는 배려여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어려운 사람 10000원짜리 티 하나 사주면서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30만원 짜리 티라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통사고로 전신이 마비된 브룩 엘리슨양(22)이 하버드대를 우등 졸업했다는 기사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녀는 사지마비 학생으로서는 처음으로 정규과정을 마치고 평균 A학점이라는 뛰어난 성적으로 심리학 및 생물학 학사학위를 받게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10년 전인 중학교 1학년 때.등교 첫날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교통 사고로 36시간 동안 혼수상태에 빠져고 다행이 목숨을 건졌지만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어 1분에 13차례씩 기도를 통해 허파로 공기를 밀어넣는 인공호흡기 장치를 해야 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결코 삶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입천장에 부착한 키패드를 혀로 눌러 휠체어를 작동시켜가며 강의실을 찾아다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녀가 그렇게 하기 까지는 주위의 배려가 있었습니다.
엘리슨의 곁에는 언제나 어머니 진 마리(48)가 있었습니다.장애인을 위한 특수교육교사로 처음 출근하던 날 엘리슨이 교통사고를 당해 그날이 교사로서 처음이자 마지막 날이 되고 만 마리는 사고 직후 24시간 엘리슨의 곁을 지키며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습니다.엘리슨이 하버드대에 진학하면서부터는 남편과 어린 자녀들을 뉴욕에 남겨두고 자신은 기숙사에서 엘리슨과 한방에서 생활하며 엘리슨의 학업을 도왔습니다.딸의 팔다리 역할을 해주었습니다.학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엘리슨이 입학하자 하버드대는 엘리슨의 방을 자동문과 비상벨,엘리베이터 등을 갖춘 특별 병실로 개조했주었습니다.의료비와 생활비를 보조하기 위해 장학금도 제공했습니다.엘리슨이 휠체어가 접근할 수 없는 강의실에서 수업이 진행되는 오페라 역사 강좌를 신청했을 때는 휠체어가 드나들 수 있도록 강의실을 변경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누구가 주변의 배려만 있다면 소망적인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우리의 손발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웃음과 우리의 따뜻한 말과 우리의 복음적인 생각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소망을 주어야 합니다.
3. 왜 이렇게 배려합니까?(11,12)
하나님 때문입니다. 11,12절을 읽어 보십시오. 보아스의 신앙이 나와 있습니다. 레위기 19:9-10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곡식을 남겨 두라고 말씀하시면서 마지막에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단순히 마음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상대를 생각해 보니 불쌍해서가 아닙니다. 이 말씀을 주시는 분은 우리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의 땅 애굽에서 인도하시고 땅을 공짜로 분배케 해주시고 참 자유인으로 살수 있도록 축복해 주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만큼 살게 된 것도 우리가 이렇게 행복하게 예배드릴 수 있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닙니까? 과거를 생각해 보면 얼마나 어려웠던 시절이 많이 있었습니까? 그러나 우리 민족이 이정도로 살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인 줄 믿습니다.
독일 하이델 베르그 대학 박사 학위를 받은 선교사가 소아마비 자매와 결혼한 이야기를 읽어 보았습니다. 어는 집사님은 고3 학생과 중 3학생이 낳은 아이를 입양하는 일도 있습니다. 그것도 정상적인 아이가 아니라 장님입니다.
왜 이들이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자신들을 살려 주었는데 그 은혜에 보답하는 방법이 바로 그 방법이기 때문에 주의 사람들의 비난과 자신들의 고통을 감수하면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들의 차이가 아니겠습니까? 요즈음 일부 대형 교회 목사님들의 담임 목사 세습으로 언론에서 조금 비꼬는 것 같습니다. 인터넷 방송에 들어가 보니 네티즌들의 비난이 대단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일부 대형 교회 목사님들은 자식을 죽게하지는 못할망정 고난의 강은 건너게 해야 하지요. 누가 내 자식 편하게 사는 것 싫어할 사람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우리의 구원자이신 것을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로마 제국의 그 무서운 박해 가운데서도 물고기 그림 '잎뒤스'로 신앙을 표현한 사람들처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주'(에에수스 크리스토스, 데우 휘오스, 소텔, )라고 선언하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우리의 초점이 예수님께 맞추어져야 합니다.
의약 분업으로 마찰이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방향이 잘못된 것입니다. 의약 분업으로 의사와 약사들이 서로 자신들의 이익에 맞는 방향으로 법을 만들어 달라고 합니다. 의사가 약사가 이 땅에 존재하여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환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환자가 없다면 존재할 필요가 무엇입니까? 그러면 초점은 어디에 맞추어져야 하겠습니까? 서로 환자의 이익, 환자를 배려하는 마음에 맞추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분쟁 해결의 열쇠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에 행복하게 되는 것도 바로 그와같은 원리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생각했을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예수님이라면 무슨 말씀을 했을까?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믿는 다고 하는 사람들도 너무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목사님이 설교를 합니다. 조금 크게 하면 발악을 한다고 합니다. 조금 작게 하면 졸고 있다고 합니다. 기도를 합니다. 조금 큰 소리로 기도하면 떠는다고 합니다. 조금 작은 소리로 하면 은혜가 없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하는 것은 모두가 싫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어느 도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이민을 간다고 합니다. 경상도, 전라도면 무조건 싫은 것입니다. 결혼을 하는데도 경상도 사람이면 전라도 사람이면 무조건 싫은 것입니다. 이것은 배려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신앙인의 삶이 아닙니다. 단지 자신이 신이 되고 신앙이란 단지 포장지에 불과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나라 사람의 의식을 가리켜 ‘나먼저이즘’이라고 꼬집는 사람이 있습니다.
상대방의 국산 휴대폰은 과시용, 자신의 외제 휴대폰은 사무용입니다. 상대방이 룸살롱 가면 퇴폐성이고, 내가 룸살롱 가면 접대성입니다. 상대방이 해외여행 가면 과소비이고, 자신이 해외여행 가면 여가선용입니다. 다른 사람이 골프 치면 내기 골프이고, 내가 골프 치면 체력단련입니다. 이웃집 아들의 미국유학은 도피성이고, 내 아들 미국유학은 국위선양입니다. 상대방 딸아이 높은 코는 세워서이고, 내 딸아이 높은 코는 나 닮아서입니다. 상대가 분당 살면 촌동네이고, 내가 분당에 살면 천당 신도시입니다. 상대가 그랜저 타면 촌놈 출세한 것이고, 내가 그랜저 타면 품위 유지입니다. 다른 사람이 일 안하면 복지부동이고, 내가 일 안하면 유유자적입니다. 타인의 아들이 귀고리하면 꼴불견이고, 내 아들이 귀고리하면 n세대입니다. 타인이 외도하면 스캔들, 내가 하면 로맨스입니다. 다른 사람이 돈을 주면 뇌물공여이고, 내가 주면 성의표시입니다. 다른 사람이 과속하면 난폭운전이고, 내가 과속하면 시간절약입니다. 이런 생각이 판을 치는 세상이다면 그 사회가 행복한 사회가 될 수 있겠습니까?
한 사람이 죽어서 천국에 도착했습니다. 그 사람은 베드로에게 지옥의 모습을 한번 보여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를 데리고 지옥으로 갔습니다. 마침 그때가 점심 시간이었는데 끝이 보이지 않는 긴 식탁에 진수성찬이 가득 차려져 있었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뼈만 앙상한 모습이었답니다. 지옥사람들의 손에는 모두 1미터가 넘는 긴 젓가락이 들려 있었답니다. 그들은 그것으로 음식을 집어 자신의 입에 넣으려고 아우성이었답니다. 그러나 긴 젓가락에 매달린 음식은 자신들의 입에 들어가지 않았답니다. 지옥은 굶주림에 지친 사람들로 아비규환을 연출하고 있었습니다.
천국에 와보니 그곳에서도 똑같은 식탁에 음식이 차려져 있었답니다. 천국사람들의 손에도 1미터가 넘는 긴 젓가락이 들려 있었답니다. 그러나 천국사람들은 질서정연하게 음식을 먹고 있었습니다. 천국사람들은 긴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어 상대방에게 먼저 먹여주고 있었답니다. 지옥은 '남'보다 '나'를 먼저 생각하는 곳이라면 천국은 '나'보다 '남'을 먼저 배
려하는 곳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이삭을 남기는 마음을 가지고 삽시다. 그러면 우리의 가정도, 우리의 교회도, 우리의 직장도, 우리의 사회도 참으로 천국같은 행복한 곳 살맛나는 곳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보아스처럼 이일에 주인공이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 레위기 19:9-10절을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이삭을 남기는 마음/룻기 2:14-23(레위기 19:9-10)/김필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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