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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눈

로마서 정용섭 목사............... 조회 수 2116 추천 수 0 2009.11.18 14: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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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롬8:18-25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38606 
emoticon2005.8.15
피조물의 세계


사람이 어렸을 때는 아무 생각 없이 살지만 나이가 들면서 자기 자신과 자기 주변 세계를 조금씩 깊이 있게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예컨대 부모가 절대적이거나 당연한 존재가 아니라 자기와 구별된 한 인격체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부모만이 아니라 그 이외의 모든 세계가 그 이전에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사춘기 청소년들은 정신적으로 불안하게 됩니다. 이런 불안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나이가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이전에 몸담았던 작고 익숙한 세계에 안주하게 됩니다. 이런 게 극단적으로 나타나면 ‘마마보이’가 되겠지요.

저는 어떤 점에서 기독교 신앙에서도 역시 어머니 치마폭을 떠나지 못하는 ‘마마보이’가 있다고 봅니다. 단지 예수 믿고 구원받는다는 명제에만 매달림으로써 기독교 신앙의 심층으로 들어가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교회생활에서 무조건 값싼 위로만 받으려고 합니다. 이들에 의해서 생산되는 열광적 신앙은 자신의 몸을 불사르거나, 산을 옮길만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아무런 내용이 없습니다. 어머니 품을 향한 마마보이의 열정에 아무런 삶의 내용이, 더 나가서 아무런 사랑의 내용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짐짓 열광주의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지성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해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말은 곧 바울이 어떤 신앙적 명제를 무조건 믿어야 할 것처럼 광신적으로 강요한 게 아니라 인간이 인식하기 어려운 보편적인 세계, 즉 우주론적 차원으로 밀고 나갔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얼마나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인지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추어 보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18절). 바울이 여기서 제시하고 있는 ‘영광’이라는 게 무엇일까요? 이미 17절에서 바울은 이 단어를 언급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있으니 영광도 그와 함께 받을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아직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이 무엇인지, 어떤 상태인지 알지 못합니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왕처럼 대접받는 세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아무나 왕처럼 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산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 영광은 아닙니다.

7월 하순 경에 저는 집사람과 함께 모처럼 서울에 다녀왔습니다. 제 형제들과 함께 식사도 하고 ‘서울구경’도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양재동에 있는 고급 호텔에서 반값으로 하룻밤 자고, 아침에 택시를 타고 한강 유람선 선착장까지 갔습니다. 그 도중에 운전사가 우리를 완전히 촌사람으로 알았는지 그 부근의 지리를 설명하더군요. 그 중의 하나가 ‘타워 팰리스’였습니다. 넓은 평수는 2,30억 원을 호가한다고 하더군요. 자신도 직접 그 안으로 들어가 보지 못하고 말만 들었다고 하면서, 그 아파트는 그야말로 모든 게 완벽하게 갖추어진 왕궁 같다고 합니다. 대구에도 좋은 아파트가 건축되고 있습니다. 아마 앞으로는 이런 경향이 늘어나겠지요.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그렇게 쾌적한 곳에서, 흡사 왕처럼 살고 싶은 욕망이, 아주 자연스러운 욕망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욕망은 거주만이 아니라 건강과 수명에도 그대로 나타날 것입니다. 서울대학교 황 아무개 교수가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해서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그것의 생명윤리적 차원은 접어두고, 인간은 끊임없이 완벽한 건강과 장수를 꿈꾼다는 점에서 이 유전공학은 계속해서 발전해갈 것 같습니다. 불치병 치료라는 휴머니즘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결국은 미용 쪽으로 이용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아마 앞으로는 80살이 되어도 20살 젊은이의 피부를 유지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숨이 넘어갈 때까지 그런 젊은이의 건강을 유지할 수도 있겠지요.

그게 바로 우리에게 나타날 “독사”(영광)일까요? 현재 인간이 그런 미래를 꿈꾸고 있겠지만 우리는 그것을 결코 영광의 삶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 문제는 신앙적인 차원을 떠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유전공학을 통해서 젊음과 수명을 무한정으로 확대하는 것이 곧 인류 구원이라고 믿는 과학자는 없을 겁니다. 우리가 지구에서 경험하는 이런 것과 다른 생명을 모르니까 그것이 바로 구원인 것처럼 주장하는 것뿐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바울에게 귀를 기울여봅시다.

오늘과 같은 문명의 발전을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바울은 이 세계, 곧 이 피조물의 운명을 정확하게 뚫어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를 포함한 모든 것들은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런 고통은 곧 앞서 17절에서 언급된 ‘그리스도의 고난’이기도 합니다. 그 고난은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이 세계, 이 역사, 여기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인간에게 숙명으로 주어진 삶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은 ‘비관주의냐?’하고 질문할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부분적으로는 그런 게 있긴 하지만 지금 바울은 현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뿐이지 낙관주의냐, 비관주의냐를 언급하는 게 아닙니다.

이 문제는 아무래도 조금 더 설명해야겠습니다. 우리가 고통을 겪는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그것이 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결되는지 말입니다. 십자가는 종교 권력과 정치권력이 만들어낸 역사의 질곡입니다. 이 세계는 아무리 풍요롭게 바뀐다고 하더라도 역시 십자가를 생산해낼 것입니다. 앞서 지적한 유전공학으로 건강과 장수가 보장된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것을 확보하기 위한 끊임없이 투쟁할 것입니다. 이런 투쟁의 결과는 반드시 십자가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좀 더 근원적인 데 놓여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상황을 가리켜 ‘피조물이 제 구실을 못하게 된 것’이라고(20절) 진술합니다. 표준새번역은 피조물이 ‘허무’에 굴복했다고 번역했고, 이 허무를 마틴 루터는 ‘Vergänglichkeit’라고 번역했습니다. 무상하다는 뜻입니다. 모든 게 지나가는 이 세계와 역사가 곧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의 핵심입니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투쟁하면서 우리는 계속해서 십자가를 생산해내는 악순환 속에서 살아갑니다.

영광스러운 자유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들이 이런 숙명 안에서 살아가지만, 바울은 여기서 벗어나는 때가 온다고 설명합니다. “곧 피조물에게도 멸망의 사슬에서 풀려나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할 날이 올 것입니다.”(21절). 바울은 결코 비관주의자가 아닙니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들이 허무, 사멸, 무상이라는 숙명 안에 놓여 있긴 하지만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할 날이 온다는 사실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왜 영광스러운 자유라고 말합니까? 모든 인간들도 여기서 자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정치, 경제, 종교의 자유는 인간이 지켜온 가장 고귀한 가치입니다. 미국의 관문에 ‘자유의 여신상’이 있습니다. 미국 건국 100주년 기념으로 프랑스 조각가가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이 과연 인류의 자유를 지켜내고 있을까요?  미국과 크게 한판 붙은 ‘알 카에다’가 자유를 신장시켰습니까? 아무도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저는 이 시간에 국제간의 분쟁에서 양비론을 제기하는 게 아닙니다. 인간이 아무리 고귀한 가치인 자유를 추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상대적인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 자유를 ‘영광’과 연결시키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 말은 곧 ‘자유’가 하나님의 세계에서나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왜 자유가 지금과는 다른 세계, 하나님의 영광이 그대로 드러나는 세계에서나 가능할까요? 가장 초보적인 대답으로, 우리가 확보한 자유는 늘 그것으로 인해서 손상당하는 자유의 영역이 파생된다는 사실입니다. 돈을 많이 벌면 자유로울 것 같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는 다른 부분에서 자유를 잃어버립니다. 철학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지금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게 그 대답입니다. 지금 우리가 물속에서 살아가는 물고기라고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물 밖의 세계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헤엄을 잘 친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참된 자유를 얻었다고 할 수는 없는 게 아닐까요?

희망과 기다림

그래서 바울은 19절에서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고 했으며, 23절에서 “우리의 몸이 해방될 날을 고대하고 있다.”고 했고, 25절(b)에서 “참고 기다릴 따름이다.”라고, 여러 번에 걸쳐서 ‘기다림’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물속만이 아니라 물 밖의 세계까지 포함한 참된 세계를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기다린다는 말은 아직 궁극적인 구원이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누구든지 이 말을 우리가 죽어서 천당에 간다거나, 아니면 우주의 종말이 올 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뜻으로 새겨들을 겁니다.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그렇게 막연하거나 추상적인 차원에서만 이해될 수 없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기다림’은 단지 로또 복권이 당첨되기를 기다리는 것과는 다릅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나는 야훼님 믿고 또 믿어, 나의 희망 그 말씀에 있사오니, 새벽을 기다리는 파수꾼보다 내 영혼이 주님을 더 기다리옵니다. 새벽을 기다리는 파수꾼처럼 이스라엘이 야훼를 기다리옵니다.”(시 130:5-7). 이 새벽은 올 수도 있고, 오지 않을 수도 있는 게 아니라 분명하게 옵니다. 다만 문제는 시간입니다.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들의 비유에서도 신랑이 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처럼 파수꾼에게는 아직 새벽이 오지 않았지만 이미 온 것이며, 처녀들에게도 신랑이 아직 오지 않았지만 이미 온 것입니다. 한편으로 ‘아직’ 아니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미’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게 말장난처럼 들리십니까? 어떻게 현재와 미래가 다르면서도 일치한다는 말입니까?
바울은 이렇게 진술합니다. “우리는 이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기에 참고 기다릴 따름입니다.”(24,25절). 여기서 현재와 미래를 엮어주는 키워드는 ‘희망’입니다.

과연 바울이 말하는 ‘희망’이 무엇일까요? “꿈은 이루어진다.”는 자기 확신일까요? 정치적 유토피아를 기다린다는 말일까요? 바울은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는 건 희망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는 게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보이지 않는 것이라니, 무슨 말일까요? 물질적인 것은 보이는 것이고, 정신적인 것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인가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몸을 낮추고, 정신을 높이는 정신주의가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는 보이지 않는 것은 아직 우리에게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은 ‘미래의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어릴 때 노인의 때는 아직 현실이 아니며, 따라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보이는 것’, 즉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 우리에게 오직 않은 그런 미래의 생명을 기다리며 삽니다. 그 생명이 곧 예수의 부활입니다. 이런 미래의 생명을 기다리는 것이야말로 기독교의 희망입니다.

이런 바울의 진술을 오해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의 반응을 보일 것 같습니다. 하나는 “지금 당장 먹고 살기도 힘겨운데 무슨 미래의 생명을 기다리는가?” 하는 반응이며, 다른 하나는 “그렇다, 이 세상은 허무하니까 관심을 끄고 천당만 바라보자.” 하는 반응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런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삶을 절대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폐기하지도 않습니다. 이 세상의 삶으로부터 저 세상을 향한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는 게 곧 기독교 신앙, 즉 영성입니다.
이런 희망의 끈을 확실하게 붙들고 있는 사람들은 고난, 허무의 이 세상을 ‘참아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난의 현실 안에서 살지만 이미 미래의 영광을 희망 안에서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에게 이런 영적 시각이 있을까요?

금년은 해방과 분단 60주년입니다. 이런 현실만 놓고 본다면 비관적인 생각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민족의 앞날에 진정한 해방이, 남북통일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희망의 눈을 놓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시련의 순간들을 넉넉히 견딜 수 있을 겁니다.

한 민족의 현재와 미래, 그리고 한국 교회의 현재와 미래, 우리 개인의 현재와 미래를 통시적으로 꿰뚫어볼 수 있는 희망의 눈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신앙의 연조가 깊어지면서 이런 희망의 눈이 맑아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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