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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3: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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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38609 |
2005. 8.29.
미디안 사제의 사위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모세는 미디안 사제인 이드로의 양떼를 치는 목자가 되었다.”(3:1).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인 모세가 어떤 연유로 미디안 사제의 사위가 되었을까요? 모세는 원래 이스라엘 부모에게서 출생했지만 이집트의 이스라엘 말살 정책 때문에 우여곡절 끝에 이집트 공주의 아들로 자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유모가 바로 친어머니였기 때문에 자신의 뿌리를 알게 되었고, 살인 사건에 연루되어 결국 이집트 왕자로서의 지위를 포기하고 마흔 살의 나이에 망명의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망명지가 이집트와 가나안 사이의 광야인 ‘미디안’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이곳에 정착하게 된 사연이 재미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야곱이 삼촌 라반이 살고 있는 하란에 가서 라반의 딸들을 만나던 장면과(창 29장) 비슷합니다. 야곱과 모세는 똑같이 우물가에서 처녀들을 만났습니다. 라반의 딸들도 양떼에게 물을 먹이려고 우물가에 왔으며, 이드로의 딸들도 그랬습니다. 약간 성격이 다르긴 하지만 양쪽의 처녀들에게 똑같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이드로의 딸들만 보면 이렇습니다. 그녀들은 다른 목동들이 방해하는 바람에 양떼에게 물을 먹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 순간에 모세가 등장해서 다른 목동들에게 혼찌검을 내주고 이드로의 딸들이 몰고 온 양떼에게 물을 먹였습니다. 이런 무용담을 전해들은 이드로는 모세를 자기 식객으로 들인 후, 큰딸 십뽀라를 주어서 모세를 사위로 삼았습니다. 소설 같은 이야기이지요? 미국의 서부 영화에서 나올만한 스토리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못된 남자 목동들에게 시달리던 처녀들이 갑자기 나타난 신사의 도움으로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고, 큰 언니가 그 신사의 아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모세는 어쩌자고 미디안 사제의 사위가 되었을까요?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성서 기자는 무슨 생각을 했기에 모세가 미디안 사제의 사위가 되었다고 설명하는 걸까요?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읽는다면 이런 구절은 별 의미가 없을 겁니다. 그리고 성서기자도 깊은 의미를 담지 않고 이런 사실을 보도했는지도 모르죠. 그러나 역사에서는 이렇게 사소하게 보이는 것들이 훨씬 본질적인 의미를 담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성서가 결국 역사 해석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읽는 우리는 이런 보도를 통해서 성서 전체의 깊이로 들어갈 수 있으며, 사려 깊은 독자라면 그런 영적 통찰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모세가 미디안 사제인 이드로의 사위가 되었다는 이런 상황은 요즘 식으로 말한다면 목사 아들이 대처승의 사위가 되었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민족 지도자라 할 모세가 미디안 사제의 사위였다는 사실이 명시적으로 언급된 걸 보면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타종교와의 문제가 그렇게 심각한 갈등 관계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즘 이스라엘은 옛날에 비해서 훨씬 근본주의적으로 변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에서는 ‘가지지구’ 정착촌 철거작업이 한창이라고 합니다. 1967년 6일 전쟁 당시에 이집트로부터 점령한 가자지구에 유대인 정착촌이 건설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이스라엘 정부에서는 그곳을 포기하고 팔레스타인 원주민들에게 넘겨주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일단 팔레스타인과의 화해 제스처처럼 보이긴 하지만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유지할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가자지구에서는 철수하지만 대신 예루살렘의 유대인 거주지역과 팔레스타인 거주 지역 사이에 형무소 담보다 더 높은 담을 쌓고 있는 중입니다. 인류의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좀 더 평화공존의 삶으로 나가야 할 텐데, 어찌된 영문인지 인류는 그 반대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만 이런 문제가 있는 건 아닙니다. 거의 모든 세계 구석구석에 이런 갈등이 때로는 표면화하고, 때로는 내면화해 있습니다.
호렙산에서
모세는 이제 미디안에서 사제의 사위로서 양떼를 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집트를 떠날 때 모세의 나이는 사십 세(행 7:23)였으며, 다시 바로 앞에 나타났을 때가 팔십 세(출 7:7)였으니까, 그는 40년 동안 양떼를 쳤다는 말이 됩니다. 성서는 모세의 40년에 관해서 별로 큰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성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모세는 미디안 사제인 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치는 목자가 되었다. 그가 양떼를 이끌고 광야를 지나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갔더니.”(3:1). 아주 간결하지요? 자기 인생의 삼분의 일이 망각되었다는 게 모세로서는 억울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성서의 글쓰기는 늘 이런 식입니다. 성서는 사람의 드라마가 아니라 하나님의 드라마에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모세의 ‘잃어버린 40년’에 무슨 일이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무작정 양떼를 친 걸까요? 앞에서 언급한 야곱도 하란으로 망명해서 삼촌의 양떼를 쳤지만 ‘재테크’에 뛰어난 탓인지 20년 만에 상당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그러나 본문만 놓고 볼 때 모세 40년은 그저 허송세월에 불과합니다. 과연 그는 40년 동안 무얼 하다가 지금 호렙이라는 산으로 왔습니까?
호렙 산은 일명 시내 산이라고도 불립니다. 호렙은 모세가 하나님을 경험한 산으로 불려지고, 시내는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받은 산으로 불립니다. 전자는 일종의 ‘소명’이, 후자는 ‘율법’이 중심이지만, 양자 모두 하나님 경험이라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지금 우리는 지리학적으로 이 산의 구체적인 장소를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전설처럼 전해진 이야기의 중심 무대로서만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이 호렙 산은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종교적인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장소입니다. 이 산은 엑서더스의 단초이며, 이스라엘 성문법의 토대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 호렙 산을 어떻게 알고 찾아왔을까요? 성서는 모세가 양떼를 이끌고 광야를 지나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갔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양떼에게 먹일 풀과 물이 광야에 없어서 점점 더 멀리 가다가 우연하게 호렙 산에 이르게 된 것일까요? 우리는 성서 본문만 갖고는 그 당시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상세하게 따라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들은 아마 하나님이 모세를 그렇게 끌어들였다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모든 게 하나님의 각본에 의해서 진행된 것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역사의 실체와 의미를 전혀 모르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성서 텍스트의 심층으로 조심스럽게 한발 한발 깊이 들어가도록 노력해야합니다.
호렙 산에서 모세는 이상한 현상을 보았습니다. “떨기에서 불꽃이 이는데도 떨기가 타지 않는 것”(2절)이었습니다. 성서기자는 그 현상을 가리켜서 “야훼의 천사가 떨기 가운데서 이는 불꽃으로 그에게 나타났다.”(2절)고 설명합니다. 이 현상을 본 모세가 불꽃이 이는 떨기에 가까이 다가가자 야훼께서 떨기 가운데서 “모세야, 모세야.”하고 부르셨다고 합니다.(4절). 2절에서는 야훼의 천사가 나타났다고 하더니, 4절에서는 야훼가 직접 말씀하셨다고 진술되어 있습니다. 천사와 야훼는 같다는 말인가요, 아니면 천사는 불꽃이고, 야훼는 말씀이라는 뜻인가요? 신학적인 내용을 한 마디만 언급한다면 이렇습니다. 이 이야기에는 J기자와 E기자의 진술이 섞여 있습니다. 약간씩 차이가 나는 전승들이 훗날 어느 편집자에 의해서 하나의 이야기로 재구성되는 과정에서 천사와 하나님이 동시에 등장하는 이야기로 그려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지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세가 불꽃이 이는 떨기나무를 보았다는 사실과 바로 그 자리에서 야훼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불꽃 현상은 ‘엘모의 불’이라고 하는 자연현상입니다. 지금도 그런 현상은 종종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어떻게 해서 이 떨기 불꽃 현상을 보게 되었을까요? 우연하게 경험한 것이라고 말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지만, 내가 보기에는 여기에는 그럴만한 타당한 근거가 있습니다. 저는 성서가 비록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그 내면에는 늘 합리성을 깔고 있다고 봅니다. 앞에서 저는 모세가 미디안의 사제 이드로의 사위라는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지난 40년 동안 모세는 이드로와 함께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당연히 미디안 종교 의식에도 참가하고, 그 종교의 가르침을 많이 받지 않았을까요? 미디안 종교는 이스라엘 신앙과 다르기 때문에 모세가 사사건건 장인과 종교적인 다툼을 벌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분명히 이드로에게서 하느님의 거룩한 산 호렙에 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을 겁니다. 모든 종교는 거룩한 것에 근거를 두기 마련입니다. 약간 옆으로 나가는 말이지만, 예수 믿는 며느리들이 시집에서 드리는 제사 때문에 갈등하는 것에 대해 나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제사에서도 사실 배울 건 많거든요.
모세는 이집트에 산 40년 동안 이집트 문명과 종교를 배웠고, 부분적으로는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에 관한 의식이 깊어졌고, 미디안에서 산 40년 동안 미디안 문명과 종교에 관해서 매우 깊이 배웠을 겁니다. 그것의 결과가 곧 호렙 산의 발견입니다.
거룩 경험과 역사참여
도대체 호렙 산에서 일어난 일이 무엇일까요? 모세는 장인 이드로의 도움으로 호렙 산의 떨기 불꽃 앞까지 왔습니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아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5절).
성서기자는 무슨 이유로 그곳을 ‘거룩한 땅’이라고 말할까요? 불꽃이 일지만 떨기는 타지 않는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기 때문에 거룩하다는 것일까요?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는 자연현상인 ‘엘모의 불’을 거룩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일정한 장소만이 아니라 ‘땅’ 전체가 거룩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땅이 거룩하다는 사실은 모든 시인과 화가들에 의해서도 노래되고, 그려집니다. 이미 창세기 기자도 하나님이 창조한 이 땅이 “보기에 좋았다.”(창 1:10)고 했습니다. 여러분 쉽게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몸이 땅의 질료로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그것으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땅은 거룩하지 않을까요?
모세는 이미 미디안 사제인 이드로를 통해서 이런 가르침을 많이 받았을 겁니다. 땅이 거룩하다는 사실을 영적으로 깊이 깨닫는 것이야말로 하나님 경험의 핵심입니다. 루돌프 오토는 <das Heilige>라는 책에서 종교의 핵심이 곧 거룩에 대한 경험, 즉 거룩한 두려움인 ‘누미노제’라고 언급했습니다. 옳은 설명입니다. 모세도 신을 벗어야만 했고, “하느님 뵙기가 무서워 얼굴을 가렸다.”(6절)고 했습니다. 만약 다른 종교에도 이런 거룩한 경험이 있다면 우리는 그들과 대화해야 합니다. 비록 어떤 절대자를 부르는 호칭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거룩한 경험이 있다면 결국 야훼 하나님과 연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경우에 미디안 종교가 야훼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통로가 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이드로의 미디안 종교와 모세의 야훼 하나님 신앙에 결정적인 차이가 이제 나타납니다. 이드로는 자기 사위에게 ‘엘모의 불’이 일어나는 호렙 산을 지시하는 데 머물렀지만, 모세는 바로 그 대목에서 한걸음 더 나갑니다. 그게 무얼까요? 모세는 야훼로부터 이런 말씀을 듣습니다. “나는 내 백성이 이집트에서 고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억압을 받으며 괴로워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너는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건져 내어라.”(7-10절).
모세의 거룩 경험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역사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집트에서 소수민족으로 학대당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깨우침으로 발전합니다. 이것은 곧 역사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신앙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신이 역사와 결합되었다는 것 말입니다. 특히 고통당하는 인간의 역사에 하나님이 개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 개입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계속 이어지며, 결정적으로 예수에게서 완성됩니다. 거룩한 하나님이 우리와 똑같이 이 땅에서 태어난 한 인간과 하나 되신 사건이 곧 예수이십니다.
모세의 하나님 경험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모세와 같은 거룩한 경험은 우리에게도 역시 유효합니다. 느닷없이 호렙 산 사건이 벌어진 게 아니라 40년 미디안 광야의 삶이 그 밑바탕이었습니다. 우리의 한 평생의 삶도 그런 과정입니다. 우리는 그런 경험을 향해서 나가고 있을까요? 거룩한 땅, 생명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고 있나요? 그런 경험이 구체적인 역사 참여로 실체화하고 있을까요?
미디안 사제의 사위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모세는 미디안 사제인 이드로의 양떼를 치는 목자가 되었다.”(3:1).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인 모세가 어떤 연유로 미디안 사제의 사위가 되었을까요? 모세는 원래 이스라엘 부모에게서 출생했지만 이집트의 이스라엘 말살 정책 때문에 우여곡절 끝에 이집트 공주의 아들로 자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유모가 바로 친어머니였기 때문에 자신의 뿌리를 알게 되었고, 살인 사건에 연루되어 결국 이집트 왕자로서의 지위를 포기하고 마흔 살의 나이에 망명의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망명지가 이집트와 가나안 사이의 광야인 ‘미디안’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이곳에 정착하게 된 사연이 재미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야곱이 삼촌 라반이 살고 있는 하란에 가서 라반의 딸들을 만나던 장면과(창 29장) 비슷합니다. 야곱과 모세는 똑같이 우물가에서 처녀들을 만났습니다. 라반의 딸들도 양떼에게 물을 먹이려고 우물가에 왔으며, 이드로의 딸들도 그랬습니다. 약간 성격이 다르긴 하지만 양쪽의 처녀들에게 똑같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이드로의 딸들만 보면 이렇습니다. 그녀들은 다른 목동들이 방해하는 바람에 양떼에게 물을 먹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 순간에 모세가 등장해서 다른 목동들에게 혼찌검을 내주고 이드로의 딸들이 몰고 온 양떼에게 물을 먹였습니다. 이런 무용담을 전해들은 이드로는 모세를 자기 식객으로 들인 후, 큰딸 십뽀라를 주어서 모세를 사위로 삼았습니다. 소설 같은 이야기이지요? 미국의 서부 영화에서 나올만한 스토리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못된 남자 목동들에게 시달리던 처녀들이 갑자기 나타난 신사의 도움으로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고, 큰 언니가 그 신사의 아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모세는 어쩌자고 미디안 사제의 사위가 되었을까요?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성서 기자는 무슨 생각을 했기에 모세가 미디안 사제의 사위가 되었다고 설명하는 걸까요?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읽는다면 이런 구절은 별 의미가 없을 겁니다. 그리고 성서기자도 깊은 의미를 담지 않고 이런 사실을 보도했는지도 모르죠. 그러나 역사에서는 이렇게 사소하게 보이는 것들이 훨씬 본질적인 의미를 담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성서가 결국 역사 해석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읽는 우리는 이런 보도를 통해서 성서 전체의 깊이로 들어갈 수 있으며, 사려 깊은 독자라면 그런 영적 통찰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모세가 미디안 사제인 이드로의 사위가 되었다는 이런 상황은 요즘 식으로 말한다면 목사 아들이 대처승의 사위가 되었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민족 지도자라 할 모세가 미디안 사제의 사위였다는 사실이 명시적으로 언급된 걸 보면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타종교와의 문제가 그렇게 심각한 갈등 관계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즘 이스라엘은 옛날에 비해서 훨씬 근본주의적으로 변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에서는 ‘가지지구’ 정착촌 철거작업이 한창이라고 합니다. 1967년 6일 전쟁 당시에 이집트로부터 점령한 가자지구에 유대인 정착촌이 건설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이스라엘 정부에서는 그곳을 포기하고 팔레스타인 원주민들에게 넘겨주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일단 팔레스타인과의 화해 제스처처럼 보이긴 하지만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유지할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가자지구에서는 철수하지만 대신 예루살렘의 유대인 거주지역과 팔레스타인 거주 지역 사이에 형무소 담보다 더 높은 담을 쌓고 있는 중입니다. 인류의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좀 더 평화공존의 삶으로 나가야 할 텐데, 어찌된 영문인지 인류는 그 반대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만 이런 문제가 있는 건 아닙니다. 거의 모든 세계 구석구석에 이런 갈등이 때로는 표면화하고, 때로는 내면화해 있습니다.
호렙산에서
모세는 이제 미디안에서 사제의 사위로서 양떼를 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집트를 떠날 때 모세의 나이는 사십 세(행 7:23)였으며, 다시 바로 앞에 나타났을 때가 팔십 세(출 7:7)였으니까, 그는 40년 동안 양떼를 쳤다는 말이 됩니다. 성서는 모세의 40년에 관해서 별로 큰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성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모세는 미디안 사제인 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치는 목자가 되었다. 그가 양떼를 이끌고 광야를 지나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갔더니.”(3:1). 아주 간결하지요? 자기 인생의 삼분의 일이 망각되었다는 게 모세로서는 억울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성서의 글쓰기는 늘 이런 식입니다. 성서는 사람의 드라마가 아니라 하나님의 드라마에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모세의 ‘잃어버린 40년’에 무슨 일이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무작정 양떼를 친 걸까요? 앞에서 언급한 야곱도 하란으로 망명해서 삼촌의 양떼를 쳤지만 ‘재테크’에 뛰어난 탓인지 20년 만에 상당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그러나 본문만 놓고 볼 때 모세 40년은 그저 허송세월에 불과합니다. 과연 그는 40년 동안 무얼 하다가 지금 호렙이라는 산으로 왔습니까?
호렙 산은 일명 시내 산이라고도 불립니다. 호렙은 모세가 하나님을 경험한 산으로 불려지고, 시내는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받은 산으로 불립니다. 전자는 일종의 ‘소명’이, 후자는 ‘율법’이 중심이지만, 양자 모두 하나님 경험이라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지금 우리는 지리학적으로 이 산의 구체적인 장소를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전설처럼 전해진 이야기의 중심 무대로서만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이 호렙 산은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종교적인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장소입니다. 이 산은 엑서더스의 단초이며, 이스라엘 성문법의 토대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 호렙 산을 어떻게 알고 찾아왔을까요? 성서는 모세가 양떼를 이끌고 광야를 지나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갔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양떼에게 먹일 풀과 물이 광야에 없어서 점점 더 멀리 가다가 우연하게 호렙 산에 이르게 된 것일까요? 우리는 성서 본문만 갖고는 그 당시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상세하게 따라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들은 아마 하나님이 모세를 그렇게 끌어들였다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모든 게 하나님의 각본에 의해서 진행된 것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역사의 실체와 의미를 전혀 모르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성서 텍스트의 심층으로 조심스럽게 한발 한발 깊이 들어가도록 노력해야합니다.
호렙 산에서 모세는 이상한 현상을 보았습니다. “떨기에서 불꽃이 이는데도 떨기가 타지 않는 것”(2절)이었습니다. 성서기자는 그 현상을 가리켜서 “야훼의 천사가 떨기 가운데서 이는 불꽃으로 그에게 나타났다.”(2절)고 설명합니다. 이 현상을 본 모세가 불꽃이 이는 떨기에 가까이 다가가자 야훼께서 떨기 가운데서 “모세야, 모세야.”하고 부르셨다고 합니다.(4절). 2절에서는 야훼의 천사가 나타났다고 하더니, 4절에서는 야훼가 직접 말씀하셨다고 진술되어 있습니다. 천사와 야훼는 같다는 말인가요, 아니면 천사는 불꽃이고, 야훼는 말씀이라는 뜻인가요? 신학적인 내용을 한 마디만 언급한다면 이렇습니다. 이 이야기에는 J기자와 E기자의 진술이 섞여 있습니다. 약간씩 차이가 나는 전승들이 훗날 어느 편집자에 의해서 하나의 이야기로 재구성되는 과정에서 천사와 하나님이 동시에 등장하는 이야기로 그려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지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세가 불꽃이 이는 떨기나무를 보았다는 사실과 바로 그 자리에서 야훼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불꽃 현상은 ‘엘모의 불’이라고 하는 자연현상입니다. 지금도 그런 현상은 종종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어떻게 해서 이 떨기 불꽃 현상을 보게 되었을까요? 우연하게 경험한 것이라고 말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지만, 내가 보기에는 여기에는 그럴만한 타당한 근거가 있습니다. 저는 성서가 비록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그 내면에는 늘 합리성을 깔고 있다고 봅니다. 앞에서 저는 모세가 미디안의 사제 이드로의 사위라는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지난 40년 동안 모세는 이드로와 함께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당연히 미디안 종교 의식에도 참가하고, 그 종교의 가르침을 많이 받지 않았을까요? 미디안 종교는 이스라엘 신앙과 다르기 때문에 모세가 사사건건 장인과 종교적인 다툼을 벌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분명히 이드로에게서 하느님의 거룩한 산 호렙에 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을 겁니다. 모든 종교는 거룩한 것에 근거를 두기 마련입니다. 약간 옆으로 나가는 말이지만, 예수 믿는 며느리들이 시집에서 드리는 제사 때문에 갈등하는 것에 대해 나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제사에서도 사실 배울 건 많거든요.
모세는 이집트에 산 40년 동안 이집트 문명과 종교를 배웠고, 부분적으로는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에 관한 의식이 깊어졌고, 미디안에서 산 40년 동안 미디안 문명과 종교에 관해서 매우 깊이 배웠을 겁니다. 그것의 결과가 곧 호렙 산의 발견입니다.
거룩 경험과 역사참여
도대체 호렙 산에서 일어난 일이 무엇일까요? 모세는 장인 이드로의 도움으로 호렙 산의 떨기 불꽃 앞까지 왔습니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아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5절).
성서기자는 무슨 이유로 그곳을 ‘거룩한 땅’이라고 말할까요? 불꽃이 일지만 떨기는 타지 않는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기 때문에 거룩하다는 것일까요?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는 자연현상인 ‘엘모의 불’을 거룩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일정한 장소만이 아니라 ‘땅’ 전체가 거룩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땅이 거룩하다는 사실은 모든 시인과 화가들에 의해서도 노래되고, 그려집니다. 이미 창세기 기자도 하나님이 창조한 이 땅이 “보기에 좋았다.”(창 1:10)고 했습니다. 여러분 쉽게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몸이 땅의 질료로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그것으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땅은 거룩하지 않을까요?
모세는 이미 미디안 사제인 이드로를 통해서 이런 가르침을 많이 받았을 겁니다. 땅이 거룩하다는 사실을 영적으로 깊이 깨닫는 것이야말로 하나님 경험의 핵심입니다. 루돌프 오토는 <das Heilige>라는 책에서 종교의 핵심이 곧 거룩에 대한 경험, 즉 거룩한 두려움인 ‘누미노제’라고 언급했습니다. 옳은 설명입니다. 모세도 신을 벗어야만 했고, “하느님 뵙기가 무서워 얼굴을 가렸다.”(6절)고 했습니다. 만약 다른 종교에도 이런 거룩한 경험이 있다면 우리는 그들과 대화해야 합니다. 비록 어떤 절대자를 부르는 호칭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거룩한 경험이 있다면 결국 야훼 하나님과 연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경우에 미디안 종교가 야훼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통로가 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이드로의 미디안 종교와 모세의 야훼 하나님 신앙에 결정적인 차이가 이제 나타납니다. 이드로는 자기 사위에게 ‘엘모의 불’이 일어나는 호렙 산을 지시하는 데 머물렀지만, 모세는 바로 그 대목에서 한걸음 더 나갑니다. 그게 무얼까요? 모세는 야훼로부터 이런 말씀을 듣습니다. “나는 내 백성이 이집트에서 고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억압을 받으며 괴로워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너는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건져 내어라.”(7-10절).
모세의 거룩 경험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역사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집트에서 소수민족으로 학대당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깨우침으로 발전합니다. 이것은 곧 역사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신앙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신이 역사와 결합되었다는 것 말입니다. 특히 고통당하는 인간의 역사에 하나님이 개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 개입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계속 이어지며, 결정적으로 예수에게서 완성됩니다. 거룩한 하나님이 우리와 똑같이 이 땅에서 태어난 한 인간과 하나 되신 사건이 곧 예수이십니다.
모세의 하나님 경험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모세와 같은 거룩한 경험은 우리에게도 역시 유효합니다. 느닷없이 호렙 산 사건이 벌어진 게 아니라 40년 미디안 광야의 삶이 그 밑바탕이었습니다. 우리의 한 평생의 삶도 그런 과정입니다. 우리는 그런 경험을 향해서 나가고 있을까요? 거룩한 땅, 생명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고 있나요? 그런 경험이 구체적인 역사 참여로 실체화하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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