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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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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행7:54-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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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
시대마다 부자들이 있습니다. 1923년 어느날, 미국의 시카고에 있는 에드워드 비치호텔에서 그 당시 미국의 최고 부자라고 일컬어지던 일곱 사람이 모였답니다. 당시 이 일곱 사람의 재산을 합치면 미국 전체의 국고를 능가할 것이라고 신문들은 보도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신문 기자가 시카고에서 그들이 모였던 1923년의 그 날로 시작해서 꼭 25년이 지난 후에 부를 자랑하던 그 사람들의 생애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추적해서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모였던 첫번째 사람 강철회사 사장인 찰스 슈언은 25년 후 한푼 없는 거지가 되어 죽었다고 합니다. 두번째 사람 밀 농사로 거부가 되었던 알써 카튼 역시 사업이 파산되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쓸쓸하고 고독한 가운데 아무도 그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채 죽어 갔답니다. 세번째 사람 뉴욕 은행의 총재였던 리차드 위트니는 자기를 둘러싼 여러 가지 상황이 잘못되어 감옥에서 고독하게 여생을 보내고 있었답니다. 네번째 사람 미국의 재무장관까지 지냈던 엘버트 홀은 감옥에서 막 보석으로 풀려 나와 집에서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고, 다섯번째 사람 웰스프리트의 회장이었던 J.C.리버모아는 자살로 인생의 막을 내렸답니다. 여섯번째 사람 국제은행의 총재였던 리온 프레이져 역시 자살로 자기의 삶을 마쳤답니다. 일곱번째 사람 부동산업계의 거부였던 이반 크루컬은 자살 미수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답니다. 이들은 한 때 성공한 인생, 승리한 인생을 산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누가 이들의 인생을 보고 최후 승리한 인생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승리한 인생같지만 마지막은 결국 실패한 인생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과정도 중요하지만 마지막까지 승리하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스데반 집사님의 최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 성경에 기록된 최후의 기록으로 예수님처럼 승리의 마감을 하시는 분은 이분 밖에 없을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최후 승리한 인생이었습니다. 어떤 인생이기에 최후 승리한 인생입니까?
1. 마지막까지 성령 충만하여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사람이 최후 승리하는 사람입니다.
스데반이 설교를 합니다. 그 때 그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렸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를 갈았습니다. 그리고 57절에 보니 귀를 막고 달려듭니다. 돌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어떻게 그들에게 대합니까? 60절 보십시오. 자신도 돌을 들었습니까? 무력으로 대합니까? 욕을 하며 증오합니까?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드립니다. 악을 선으로 대합니다. 이것이 최후에 승리하는 사람의 삶의 모습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하였습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향하여 저들은 저들의 죄를 알지 못합니다.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드렸습니다. 예수님이 힘이 없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천군 천사를 통하여 그들을 다 쓰러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인류를 구원하시는 방법이고 최후 승리하는 길이기 때문에 끝까지 악을 선으로 대했습니다. 성경의 최후 승리하는 인물들을 보십시오. 요셉을 보십시오. 형들이 그를 시기하였습니다.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노예로 팔아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을 어떻게 대하였습니까? 창 50:21절을 보십시오. 형들을 용서합니다. 용서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의 조카들까지 책임지고 길러주겠다고 합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사울이 죽이려고 합니다. 여러차례 죽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이지 않습니다. 악을 선으로 대합니다. 결국 누가 이겼습니까? 다윗이 이겼습니다. 악을 악으로 대하면 순간적으로 이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최후까지 이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자기 백성을 애굽사람이 괴롭힙니다. 결국 애굽사람을 처 죽였습니다. 그것으로 어떻게 되었습니까? 40년 동안 미디안으로 도망가야 했습니다. 잠깐 이긴 것 같지만 그것이 이긴 것이 아닙니다.
악인을 진멸하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요셉도 그런 고백을 하지 않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원수 갚는 일, 억울함을 풀어주는 일, 보응하는 일은 하나님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내 힘으로 갚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그것은 결국 실패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그 원수의 머리 곧 그 죄과에 항상 행하는 자의 정수리는 하나님이 쳐서 깨치시리로다 (시 68:21)"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그렇게 악을 선으로 이길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오늘 본문에서 성령 충만을 발견합니다. 스데반이 죽음의 현장에서도 성령 충만하였다는 것입니다. 원수들의 돌을 맞으면서까지 성령 충만을 잃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55절을 보십시오. 스데반은 집사 직분을 받을 때부터 성령 충만하였습니다. 아니 예수님을 믿을 때부터 성령충만하였습니다(행6:5, 행2:4) 그리고 인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성령 충만하였습니다.
우리가 선으로 악을 이길려면 내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이 나를 지배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처럼 선으로 악을 이겨 진정한 승리, 최후의 승리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롬 12:21)" 우리가 최후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이겠습니까? 어떤 핍박이 다가온다하여도 선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끝까지 용서하고 끝까지 성령 충만한 삶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2. 마지막까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이 최후 승리하는 사람입니다.
인생의 승리는 삶의 길이에 있지 않습니다. 인생의 승리는 삶의 양에 있지 않습니다.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무엇에 집착하여 어떤 일을 하였느냐가 중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에게 얼마나 유익한 일을 했느냐? 더 나아가 하나님께 얼마나 유익한 일을 했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이순신 장군을 평가할 때 몇 살까지 살았느냐로 평가합니까? 우리가 노벨을 평가할 때 얼마나 부자로 살았느냐로 평가합니까? 우리가 에디슨을 평가할 때 칼빈을 평가할 때 얼마나 건강하게 살았느냐로 평가합니까? 그들이 무슨일을 했느냐로 평가합니다. 그 일이 인류에게 어떤 유익을 주었느냐로 평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오늘 나오는 스데반의 최후는 실패한 최후이겠습니까? 승리한 최후이겠습니까? 돌에 맞아 죽었다고 그 누가 실패한 최후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산헤드린 공회는 승리했고 스데반은 실패한 것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에서 보십시오. 55절에 보십시오.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서 그의 죽음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는 것으로 성경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얼마나 환영하기에 서 계신다고 표현하고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인정하는 최후라는 말입니다. 더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스데반은 최초의 순교자였습니다. 스데반 사건으로 인하여 이제 복음이 본격적으로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증거되기 시작합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최후를 맞이한 그의 죽음은 복음 전파의 한알의 밀알이 되었습니다. 8:1에 "사도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11:19에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을 바울이 지켜 보았습니다(58). 그리고 사울이 변화되는 계기(행9:15; 행22:20)가 되었습니다. 그는 그의 장렬한 죽음에 감동이 되었을 것입니다. 세상 살면서 그는 그 충격을 잃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고결하게 죽는 방법도 있구나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나중에 변화되어 세계 선교를 감당하였습니다.
스데반이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한 일이 무엇입니까?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설교하다 돌 맞아 죽은 것입니다. 이 일이 얼마나 고귀한 일입니까?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만큼 우리의 일 중 고귀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행7:1-50절까지는 그의 긴 설교를 통하여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개관하며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 설교를 하시다가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설교하시다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것만큼 승리한 최후가 어디있겠습니까? 마지막까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시다가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마지막 무엇하다 돌아가시기를 원하십니까? 병들어 원망하다 돌아가시겠습니까? 그저 지루하게 낭비하다가 돌아가시겠습니까?
마지막까지 주님이 주신 사명 감당하다가 돌아가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차피 그 방법과 그 시기는 모르지만 한 번 가게 되어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기도하다가, 설교하다가, 봉사하다가, 전도하다가, 나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다가 돌아가시는 것 얼마나 고귀한 일이겠습니까?
3. 마지막까지 소망을 가지고 죽음 이후에 승리자가 최후 승리하는 사람입니다.
이 땅에서의 승리가 최후의 승리는 아닙니다. 스데반은 어떻게 보면 비참한 패배를 한 인생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장수하지 못했습니다. 권력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거리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환영하는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죽음이었습니다. 영광스런 죽음이었습니다. 인생의 진정한 평가는 죽음 이후에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평가도 그렇지만 영원한 하늘 나라의 평가가 중요합니다. 죽음 이후 영원한 천국에서 면류관을 받고 잘했다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눅가복음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를 보십시오. 부자는 살았을 때 승리자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성공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의 장례식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을 것입니다. 호화롭게 장례식이 진행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거지로 실패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의 장례식을 초라했을 것이고 어쩌면 거적으로 내다 버렸을 것입니다. 그의 인생은 실패한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죽은 후 부자는 고통 가운데 신음합니다. 타는 불꽃 가운데 목말라 고통 받습니다.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 속에 있습니다. 최후 승리자는 부자입니까? 나사로입니까?
영원한 하늘 나라에서 최후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스데반은 이 땅의 삶을 전부라 생각하며 살지 않았습니다.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영원한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살았습니다. 돌을 맞으면서까지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땅을 보며 허망해 하지도 않았고 삶을 후회하며 아쉬워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59절에 주님께 영혼을 부탁합니다. 죽음을 보면 그의 삶이 진정 승리한 인생인지 실패한 인생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한 번 살다 죽게 되어 있습니다. 가을이 지나면 겨울이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날까지 소망을 가지고 사는 인생이야 말로 진정 승리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수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인생의 3대 문제를 던지고 그것을 알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첫째가 "인생아 너는 어디서 왔느냐?"는 것입니다. 둘째가 "인생아 너는 무엇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셋째가 "인생아 너는 어디로 가느냐?" 것이었습니다.
그가 은퇴할 무렵, 늙고 육체가 쇠하여 병으로 고생을 많이 하였답니다. 자기와 함께 지내던 친구들도, 강의실에 자주 찾아오던 학생들도 다 떨어져 나가고 외로움에 빠져 있게 되었을 때, 하루는 베를린 대학 구내에 있는 어떤 공원에서 산책을 하다가 공원 벤취에 앉아 깊은 사색에 잠겨있었다고 합니다. 저녁 무렵이 되니 공원을 지키고 있던 공원지기가 쇼펜하우어를 찾아와 말했답니다. "여보 당신 어디서 온 사람이요? 당신 무엇하는 사람이요?" 그래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으니까 그는 "당신 어디로 가야 할 사람이요?"하고 물었답니다. 그 말에 비로소 정신이 든 쇼펜하우어는 머리를 흔들면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내가 그것을 알았다면 내 말년에 이토록 시름하지 않았을 것이요. 지금까지 인생이 무엇인지 또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라는 문제를 가지고 평생을 살아왔지만 아직도 그 답을 찾지 못했소. 그러나 단 한 가지 아는 것이 있다면 인생은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이오."
그는 평생을 거쳐 인생을 탐구하였지만 인생이 죽음으로 끝난다는 사실만 알았지 그 후의 삶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 땅에서는 영광을 받았을지 몰라도 영원 천국에서는 실패자가 된 것입니다. 영원한 천국이 없는 사람들은 마지막이 비참합니다.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1883년 3월 14일 칼 마르크스가 사망하던 날, 그의 하녀가 다가와서 "저에게 당신의 마지막 말을 남기시면, 제가 기록해 두겠습니다"라고 말하자 마르크스는 "시끄러워, 나가 !" 라고 소리치며 죽어갔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은 "나는 불행했다. 프랑스, 군대, 조세핀 ...." 이라며 초라하게 숨졌고 장개석은 "영웅이란 용감하게 실패하는 자이다. 그러나 희망은 ... " 라며 대륙수복의 한을 남기며 죽었다고 합니다. 그렇게도 자유를 부르짖던 싸르트르도 1980년 3월 파리의 부르세 병원에서 죽음의 불안과 공포 때문에 자신의 병명도 묻지 않고 한달 동안 발악을 하며 찾아온 사람들에게 소리를 지르다가 죽어 갔다고 합니다. 사람의 수만큼 죽음에 대한 자세는 다양할 것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안죽어"하며 평생 죽지 않을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죽음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전혀 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왜 죽어”하며 죽음에 대하여 억울해 하면서 거역하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죽음이 임박할 때 죽음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자신의 생명을 조금이라도 연장해 보려고 애걸 복걸하는 사람도 있고 죽음의 충격으로 절망하며 모든 것이 끝났다고 절망하며 죽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두가 죽음 이후에 대한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최후의 승리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죽음은 그들에 비하면 얼마나 소망적입니까? 죽음 이후에 대한 소망을 가진다면 죽음에 임하는 태도는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의 또다른 시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죽음에서도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88세로 죽음에 임했을 때 "모든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다"라고 말하며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유명한 19세기의 미국 부흥사 D.L 무디는 임종을 당하여 슬퍼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내일 아침에 무디가 죽었다는 소식이 신문에 나거든 정말 내가 죽은 줄로 생각지 마시오. 나는 죽은 것이 아니라 좀 더 높은 곳으로 옮겨가는 것 뿐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죽은 이의 묘비에 다음과 같은 비문을 새겼습니다. "이 사람은 죽은 것이 아니라 이제야말로 새로운 생명에 들어간 것이다." 죤 칼빈은 임종시에 "주님! 당신께서 저를 묻어 주시는군요 이것이 당신의 섭리로 된 것이기에 저는 더 할 수 없이 만족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과학자 톰슨은 임종시에 제자들이 묻기를 "선생님께서 발견하신 것 중 최대의 발견은 무엇이었습니까?" 라고 하자 "나의 생애에서 가장 큰 발견은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한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김활란 박사님께서 세상을 떠나실 때 모두 슬퍼서 장송곡을 준비하려 했는데 이 김 박사님은 장송곡 대신에 승리의 행진곡을 불러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성경은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21:4)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영원한 삶의 출발로 믿고 살았던 사도 바울은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고전 15:55-58)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이 마지막 인생을 마칠 때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 우편에 서서 맞이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늘 나라에 갈 때도 우리 주님께서 이렇게 맞이해 주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죽음의 형태가 문제가 아닙니다. 죽음의 시기가 문제가 아닙니다. 죽음의 장소가 문제가 아닙니다.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 복이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최후 승리하는 자들입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계 14:13)"
어떤 자들이 최후 승리자입니까?
산헤드린 공회 사람들은 스데반을 무참히 죽였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패배자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는 숨질 때 되도록 믿음을 지켰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숨질 때 되도록 사랑하였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숨질 때 되도록 모든 소망을 하늘에 두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죽음의 순간까지 용서를 잃지 않았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죽음의 순간까지 설교하며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았습니다.
과연 어떤 자가 최후의 승리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1. 마지막까지 성령 충만하여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사람이 최후 승리하는 사람입니다.
2. 마지막까지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이 최후 승리하는 사람입니다.
3. 마지막까지 소망을 가지고 죽음을 이기고 죽음 이후에 승리하는 사람이 최후 승리하는 사람입니다.
죽음의 순간까지 성령 충만하여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죽음의 순간까지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죽음의 순간까지 소망을 가지고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지 말고 죽음 이후에 영원한 천국에서 칭찬과 상급을 받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최후 승리하는 사람/행7:54-60/김필곤 목사
1. 마지막까지 성령 충만하여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사람이 최후 승리하는 사람입니다.
스데반이 설교를 합니다. 그 때 그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렸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를 갈았습니다. 그리고 57절에 보니 귀를 막고 달려듭니다. 돌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어떻게 그들에게 대합니까? 60절 보십시오. 자신도 돌을 들었습니까? 무력으로 대합니까? 욕을 하며 증오합니까?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드립니다. 악을 선으로 대합니다. 이것이 최후에 승리하는 사람의 삶의 모습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하였습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향하여 저들은 저들의 죄를 알지 못합니다.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드렸습니다. 예수님이 힘이 없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천군 천사를 통하여 그들을 다 쓰러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인류를 구원하시는 방법이고 최후 승리하는 길이기 때문에 끝까지 악을 선으로 대했습니다. 성경의 최후 승리하는 인물들을 보십시오. 요셉을 보십시오. 형들이 그를 시기하였습니다.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노예로 팔아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을 어떻게 대하였습니까? 창 50:21절을 보십시오. 형들을 용서합니다. 용서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의 조카들까지 책임지고 길러주겠다고 합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사울이 죽이려고 합니다. 여러차례 죽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이지 않습니다. 악을 선으로 대합니다. 결국 누가 이겼습니까? 다윗이 이겼습니다. 악을 악으로 대하면 순간적으로 이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최후까지 이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자기 백성을 애굽사람이 괴롭힙니다. 결국 애굽사람을 처 죽였습니다. 그것으로 어떻게 되었습니까? 40년 동안 미디안으로 도망가야 했습니다. 잠깐 이긴 것 같지만 그것이 이긴 것이 아닙니다.
악인을 진멸하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요셉도 그런 고백을 하지 않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원수 갚는 일, 억울함을 풀어주는 일, 보응하는 일은 하나님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내 힘으로 갚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그것은 결국 실패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그 원수의 머리 곧 그 죄과에 항상 행하는 자의 정수리는 하나님이 쳐서 깨치시리로다 (시 68:21)"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그렇게 악을 선으로 이길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오늘 본문에서 성령 충만을 발견합니다. 스데반이 죽음의 현장에서도 성령 충만하였다는 것입니다. 원수들의 돌을 맞으면서까지 성령 충만을 잃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55절을 보십시오. 스데반은 집사 직분을 받을 때부터 성령 충만하였습니다. 아니 예수님을 믿을 때부터 성령충만하였습니다(행6:5, 행2:4) 그리고 인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성령 충만하였습니다.
우리가 선으로 악을 이길려면 내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이 나를 지배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처럼 선으로 악을 이겨 진정한 승리, 최후의 승리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롬 12:21)" 우리가 최후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이겠습니까? 어떤 핍박이 다가온다하여도 선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끝까지 용서하고 끝까지 성령 충만한 삶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2. 마지막까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이 최후 승리하는 사람입니다.
인생의 승리는 삶의 길이에 있지 않습니다. 인생의 승리는 삶의 양에 있지 않습니다.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무엇에 집착하여 어떤 일을 하였느냐가 중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에게 얼마나 유익한 일을 했느냐? 더 나아가 하나님께 얼마나 유익한 일을 했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이순신 장군을 평가할 때 몇 살까지 살았느냐로 평가합니까? 우리가 노벨을 평가할 때 얼마나 부자로 살았느냐로 평가합니까? 우리가 에디슨을 평가할 때 칼빈을 평가할 때 얼마나 건강하게 살았느냐로 평가합니까? 그들이 무슨일을 했느냐로 평가합니다. 그 일이 인류에게 어떤 유익을 주었느냐로 평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오늘 나오는 스데반의 최후는 실패한 최후이겠습니까? 승리한 최후이겠습니까? 돌에 맞아 죽었다고 그 누가 실패한 최후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산헤드린 공회는 승리했고 스데반은 실패한 것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에서 보십시오. 55절에 보십시오.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서 그의 죽음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는 것으로 성경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얼마나 환영하기에 서 계신다고 표현하고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인정하는 최후라는 말입니다. 더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스데반은 최초의 순교자였습니다. 스데반 사건으로 인하여 이제 복음이 본격적으로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증거되기 시작합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최후를 맞이한 그의 죽음은 복음 전파의 한알의 밀알이 되었습니다. 8:1에 "사도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11:19에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을 바울이 지켜 보았습니다(58). 그리고 사울이 변화되는 계기(행9:15; 행22:20)가 되었습니다. 그는 그의 장렬한 죽음에 감동이 되었을 것입니다. 세상 살면서 그는 그 충격을 잃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고결하게 죽는 방법도 있구나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나중에 변화되어 세계 선교를 감당하였습니다.
스데반이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한 일이 무엇입니까?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설교하다 돌 맞아 죽은 것입니다. 이 일이 얼마나 고귀한 일입니까?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만큼 우리의 일 중 고귀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행7:1-50절까지는 그의 긴 설교를 통하여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개관하며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 설교를 하시다가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설교하시다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것만큼 승리한 최후가 어디있겠습니까? 마지막까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시다가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마지막 무엇하다 돌아가시기를 원하십니까? 병들어 원망하다 돌아가시겠습니까? 그저 지루하게 낭비하다가 돌아가시겠습니까?
마지막까지 주님이 주신 사명 감당하다가 돌아가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차피 그 방법과 그 시기는 모르지만 한 번 가게 되어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기도하다가, 설교하다가, 봉사하다가, 전도하다가, 나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다가 돌아가시는 것 얼마나 고귀한 일이겠습니까?
3. 마지막까지 소망을 가지고 죽음 이후에 승리자가 최후 승리하는 사람입니다.
이 땅에서의 승리가 최후의 승리는 아닙니다. 스데반은 어떻게 보면 비참한 패배를 한 인생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장수하지 못했습니다. 권력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거리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환영하는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죽음이었습니다. 영광스런 죽음이었습니다. 인생의 진정한 평가는 죽음 이후에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평가도 그렇지만 영원한 하늘 나라의 평가가 중요합니다. 죽음 이후 영원한 천국에서 면류관을 받고 잘했다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눅가복음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를 보십시오. 부자는 살았을 때 승리자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성공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의 장례식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을 것입니다. 호화롭게 장례식이 진행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거지로 실패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의 장례식을 초라했을 것이고 어쩌면 거적으로 내다 버렸을 것입니다. 그의 인생은 실패한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죽은 후 부자는 고통 가운데 신음합니다. 타는 불꽃 가운데 목말라 고통 받습니다.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 속에 있습니다. 최후 승리자는 부자입니까? 나사로입니까?
영원한 하늘 나라에서 최후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스데반은 이 땅의 삶을 전부라 생각하며 살지 않았습니다.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영원한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살았습니다. 돌을 맞으면서까지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땅을 보며 허망해 하지도 않았고 삶을 후회하며 아쉬워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59절에 주님께 영혼을 부탁합니다. 죽음을 보면 그의 삶이 진정 승리한 인생인지 실패한 인생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한 번 살다 죽게 되어 있습니다. 가을이 지나면 겨울이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날까지 소망을 가지고 사는 인생이야 말로 진정 승리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수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인생의 3대 문제를 던지고 그것을 알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첫째가 "인생아 너는 어디서 왔느냐?"는 것입니다. 둘째가 "인생아 너는 무엇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셋째가 "인생아 너는 어디로 가느냐?" 것이었습니다.
그가 은퇴할 무렵, 늙고 육체가 쇠하여 병으로 고생을 많이 하였답니다. 자기와 함께 지내던 친구들도, 강의실에 자주 찾아오던 학생들도 다 떨어져 나가고 외로움에 빠져 있게 되었을 때, 하루는 베를린 대학 구내에 있는 어떤 공원에서 산책을 하다가 공원 벤취에 앉아 깊은 사색에 잠겨있었다고 합니다. 저녁 무렵이 되니 공원을 지키고 있던 공원지기가 쇼펜하우어를 찾아와 말했답니다. "여보 당신 어디서 온 사람이요? 당신 무엇하는 사람이요?" 그래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으니까 그는 "당신 어디로 가야 할 사람이요?"하고 물었답니다. 그 말에 비로소 정신이 든 쇼펜하우어는 머리를 흔들면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내가 그것을 알았다면 내 말년에 이토록 시름하지 않았을 것이요. 지금까지 인생이 무엇인지 또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라는 문제를 가지고 평생을 살아왔지만 아직도 그 답을 찾지 못했소. 그러나 단 한 가지 아는 것이 있다면 인생은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이오."
그는 평생을 거쳐 인생을 탐구하였지만 인생이 죽음으로 끝난다는 사실만 알았지 그 후의 삶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 땅에서는 영광을 받았을지 몰라도 영원 천국에서는 실패자가 된 것입니다. 영원한 천국이 없는 사람들은 마지막이 비참합니다.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1883년 3월 14일 칼 마르크스가 사망하던 날, 그의 하녀가 다가와서 "저에게 당신의 마지막 말을 남기시면, 제가 기록해 두겠습니다"라고 말하자 마르크스는 "시끄러워, 나가 !" 라고 소리치며 죽어갔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은 "나는 불행했다. 프랑스, 군대, 조세핀 ...." 이라며 초라하게 숨졌고 장개석은 "영웅이란 용감하게 실패하는 자이다. 그러나 희망은 ... " 라며 대륙수복의 한을 남기며 죽었다고 합니다. 그렇게도 자유를 부르짖던 싸르트르도 1980년 3월 파리의 부르세 병원에서 죽음의 불안과 공포 때문에 자신의 병명도 묻지 않고 한달 동안 발악을 하며 찾아온 사람들에게 소리를 지르다가 죽어 갔다고 합니다. 사람의 수만큼 죽음에 대한 자세는 다양할 것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안죽어"하며 평생 죽지 않을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죽음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전혀 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왜 죽어”하며 죽음에 대하여 억울해 하면서 거역하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죽음이 임박할 때 죽음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자신의 생명을 조금이라도 연장해 보려고 애걸 복걸하는 사람도 있고 죽음의 충격으로 절망하며 모든 것이 끝났다고 절망하며 죽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두가 죽음 이후에 대한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최후의 승리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죽음은 그들에 비하면 얼마나 소망적입니까? 죽음 이후에 대한 소망을 가진다면 죽음에 임하는 태도는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의 또다른 시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죽음에서도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88세로 죽음에 임했을 때 "모든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다"라고 말하며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유명한 19세기의 미국 부흥사 D.L 무디는 임종을 당하여 슬퍼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내일 아침에 무디가 죽었다는 소식이 신문에 나거든 정말 내가 죽은 줄로 생각지 마시오. 나는 죽은 것이 아니라 좀 더 높은 곳으로 옮겨가는 것 뿐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죽은 이의 묘비에 다음과 같은 비문을 새겼습니다. "이 사람은 죽은 것이 아니라 이제야말로 새로운 생명에 들어간 것이다." 죤 칼빈은 임종시에 "주님! 당신께서 저를 묻어 주시는군요 이것이 당신의 섭리로 된 것이기에 저는 더 할 수 없이 만족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과학자 톰슨은 임종시에 제자들이 묻기를 "선생님께서 발견하신 것 중 최대의 발견은 무엇이었습니까?" 라고 하자 "나의 생애에서 가장 큰 발견은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한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김활란 박사님께서 세상을 떠나실 때 모두 슬퍼서 장송곡을 준비하려 했는데 이 김 박사님은 장송곡 대신에 승리의 행진곡을 불러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성경은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21:4)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영원한 삶의 출발로 믿고 살았던 사도 바울은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고전 15:55-58)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이 마지막 인생을 마칠 때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 우편에 서서 맞이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늘 나라에 갈 때도 우리 주님께서 이렇게 맞이해 주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죽음의 형태가 문제가 아닙니다. 죽음의 시기가 문제가 아닙니다. 죽음의 장소가 문제가 아닙니다.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 복이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최후 승리하는 자들입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계 14:13)"
어떤 자들이 최후 승리자입니까?
산헤드린 공회 사람들은 스데반을 무참히 죽였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패배자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는 숨질 때 되도록 믿음을 지켰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숨질 때 되도록 사랑하였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숨질 때 되도록 모든 소망을 하늘에 두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죽음의 순간까지 용서를 잃지 않았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죽음의 순간까지 설교하며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았습니다.
과연 어떤 자가 최후의 승리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1. 마지막까지 성령 충만하여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사람이 최후 승리하는 사람입니다.
2. 마지막까지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이 최후 승리하는 사람입니다.
3. 마지막까지 소망을 가지고 죽음을 이기고 죽음 이후에 승리하는 사람이 최후 승리하는 사람입니다.
죽음의 순간까지 성령 충만하여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죽음의 순간까지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죽음의 순간까지 소망을 가지고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지 말고 죽음 이후에 영원한 천국에서 칭찬과 상급을 받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최후 승리하는 사람/행7:54-60/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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