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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46-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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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동원 목사 |
참고 : | 지구촌교회 |
우리가 기독교의 메세지를 가리켜서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기쁜 소식 Good news라고 말합니다.
예수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 탄생하셨을 때 천사는 아기예수 탄생의 기쁜 소식을 전하면서 이것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가난의 땅 유대 베들레헴 마구간의 구유에서 아직 결혼하지 않은 어린 소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탄생한 이 사건은 당시의 관념, 오늘날의 관념으로 생각해 보아도 이것은 스캔달에 불과한 사건이였습니다. 그런데 2000년 전 지구촌의 한 작은 이 마을에서 발생한 스캔달이 어떻게 인류를 위한 복음의 사건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놀라웁게도 그 대답을 바로 유명한 마리아의 찬가에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 볼 때 사람들이 자기의 행복이나 자기의 구원을 위해서 추구해온 대표적인 세가지가 있었다면 하나는 지혜, 지혜를 통한 이성을 통한 행복의 추구,.또 하나는 권력을 통한 추구, 또 하나는 물질을 추구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찬가에서는 이 세가지가 철저하게 부인되고 부정되고 있는 것 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혜가 아니고 권력이 아니고 물질이 행복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복음일 수가 있습니까? 그 대답은 차라리 단순한데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만약 지혜 있는 사람들만 행복하고 구원 받을 수 있었다면 이 땅에 살고 있는 수많은 지혜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또 만약 권력 있는 사람들만이 권력을 쟁취한 사람들만이 행복하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힘없이 살아가는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또 물질을 획득하거나 소유한 사람들만이 참으로 행복할 수가 있고 구원을 얻을 수가 있다면 가진 것이 없이 살아야 하는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의 운명은 도대체 어떻게 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아기예수로 오신 바로 그 분, 또 33년의 짧은 시간을 살다가 십자가에서 힘없이 죽어가신 그 분은 어쩌면 그러기에 무지한 그 수많은 이 땅에 살고있는 사람들에게도 힘이 없이 무력하게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그리고 가난한 사람에게도 복음일 수 있다는 역설, 여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가 있다고 성경은 선포하고 있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이 아기예수의 사건이 정말 여러분의 복음이 되고 나의 복음이 되고 우리의 복음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반드시 동의해야 할 세 가지가 있다고 마리아의 찬가는 우리에게 메세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정말 이 복음이 나의 복음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동의해야 할 세 가지의 사실, 그것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그것은 지혜의 추구가 인간을 구원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지혜라는 낱말 대신에 이성 이라는 낱말을 삽입시켜도 무방합니다. 인간의 이성적인 추구, 지혜를 통한 추구, 더 많은 지식을 소유하므로 행복하거나 구원을 얻을려는 이 모든 노력은 하나님 앞에서 가능하지 않다라고 성경은 선언합니다. 이것이 마리아의 찬가에서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다 함께 오늘 본문에 나타난 51절의 말씀을 다시 한번 같이 읽겠습니다. 51절 다같이 읽습니다. 시작,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여기 마음의 생각이라는 단어가 나오죠? 사람들이 마음의 생각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쟁취하고 소유할려는 그 끈질긴 행복의 노력 구원의 노력을 하나님은 무의로 돌리셨다라고 오늘 마리아는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나 기독교는 결코 반 지식주의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지식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성경은 하나님이 지식의 근원이고 지혜의 근원 이라고 선포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잠언 같은 책은 그 책 한 권 전체가 지혜의 중요성, 혹은 지식의 중요성을 예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이 전파되는 곳에는 언제나 인간의 이성이 눈을 뜨고 지식이 개발되는 역사가 이루어져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인간적 지식의 추구만으로 사람은 행복하거나 결코 구원될 수는 없다라고 가르칩니다. 이 사실을 여러분은 동의 하십니까? 인간적인 지식만의 추구 하나님을 떠난 지혜의 추구 혹은 이성의 추구만으로 결코 인간이 행복하거나 구원될 수 없다는 사실, 마리아의 찬가는 바로 여기에 중요한 한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교도소에서 일하고있는 교도관이였는데 이 사람은 인간의 모든 범죄가 무지에서부터 온다고 확신한 사람이였습니다. 벌써 오래 전 얘기입니다만 우리나라에 아직도 글을 깨우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때 그는 교도소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상대로 열심히 문맹 퇴치 운동을 했고 글을 가르치는 일에 헌신해 왔습니다. 한 수인이 교도소에 들어와서 비로소 글을 깨우치게 되었고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가 출소하면서 이 교도관을 찾아와서 참 감사하다고 제가 글을 깨우치고 새사람이 되어서 나간다고, 열심히 살라고 격려하면서 그들은 헤어졌습니다. 얼마후에 아~이 교도소를 나갔든 사람이 다시 들어왔어요. 똑같은 교도소에 왔어요. 교도관이 이번에는 왜 들어 왔나? 살펴보았더니 제목이 문서위조 죄 였다고 합니다.
요즘 우리가 살고있는 이 시대를 가리켜서 우리는 소위 지식 경영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이 지식, 지식만으로 결코 이 지식이 이 현대의 사회 속에 그리고 앞으로 미래의 사회 속에 결코 그것만으로 복음이 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대의 지식의 상징은 아무래도 인터넷일 것입니다. 인터넷으로 상징되는 현대의 지식의 전파,그것은 벌써부터 만만치 않는 피해를 우리가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최근에는 자살 사이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쉽게 생명을 버리는 모험을 계속하고있는 슬픈 사실을 봅니다. 인터넷에 뜨고 있는 수많은 포르노 사이트라든지 혹은 한 공동체를 반대하고 음해하기위한 수많은 앤티 사이트들, 그리고 익명성을 이용한 책임 없는 공동체 비판들이 얼마나 오늘 우리 사회에 크다란 새로운 악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인가를 우리는 뚜렷이 목격하고 있습니다. 지식의 오욕 내지는 지식의 악용의 현장들을 이미 우리는 눈을 떠서 보고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처음이 아니라 본래 인류 역사의 맨 처음부터 그러했든 것입니다. 사탄이 처음사람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을 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보여주었을 때 성경은 아담이 그것이 지혜스럽게 할 만큼 탐스러움이였다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때부터 하나님을 떠난 지식은 이미 악이였든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 전서 1장21절 이하의 말씀에서 이렇게 천명했습니다.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사람의 이성이 아무리 발달해도 사람들의 지식의 추구가 아무리 놀랍게 현저히 발달해도 사람은 자기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 라고 성경은 단언합니다.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을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오히려 사람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셨다고요.
이 지식 사회에서 ‘예수 믿으십시요 그러면 삶이 달라질 것입니다’. 이 단순한 복음의 접근은 얼마나 무지해 보입니까? 그러나 오히려 이 단순한 복음의 접근을 통해서 사람들이 새로워지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의 역설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그래서 같은 고리도 전서 1장18절에서 바울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사람들에게는 미련해 보이는 것이지만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이 십자가의 도가 바로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파워라고 바울사도는 증언했습니다. 바울이 편지를 쓰고있든 고린도 라는 도시는 그 당시 아테네와 함께 아직도 지식의 현란한 프라이드를 자랑하고 있든 지성의 도시였습니다. 바울은 이 지성의 도시 고린도에 살면서 지식 최고주의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런 경고를 던지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고린도전서 8장 1절에 보시면 지식은 교만하게 할 뿐이라고, 하나님을 떠난 지식 그리고 하나님에 의해서 가이드 되지 못하는 지식 그리고 성령에 의해서 인도되지 못하는 지식은 인생을 교만하게 할뿐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마리아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이렇게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사람들을 오히려 흩어놓으신다고 말했습니다. 마리아의 선택에 나타난 하나님의 신비를 생각해 보십시요.지식이 행복의 길이라면 지식이 구원의 길이라면 저 나사렛 땅이나 베들레헴 땅이 아닌 예루살렘에 가면 공부를 많이 한 소위 랍비들이,허다한 랍비들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산해드린 이라는 종교회의 안에는 당당하게 공부를 한 수많은 학자들이 존재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저 희랍의 아테네나 고린도에서 공부하고 있었든 아니 로마에서 키케로(Cicero) 를 위시한 수많은 지성인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기위한 구세주를 보내고자 하실 때 이런 모든 지식있는 사람들을 선택하지 않은 하나님의 신비, 나사렛 땅에 살고있었든 무명의 한 여인, 소녀 마리아를 선택한 하나님의 신비를 바라보십시요. 이것은 지혜의 추구가 지식의 추구가 인간을 구원할 수가 없다는 명백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지식이 대답이 아니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마리아를 통해서 아기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건은 비로소 복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혜의 추구가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는 첫번째 사실입니다.
이 아기예수의 탄생이 나의 복음 우리의 복음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동의해야 할 두 번째 사실이 있습니다. 그 둘째는 권력의 추구가 또한 인간을 구원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로 권력의 추구가 인간을 구원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저 유명한 철학자 니체는 인간의 생존의 의지, 나로 하여금 여기에 살게 하는 그리고 몸부림치면서 살게 하는, 인간의 생존을 붙들고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하나의 의지가 있다면 그것이 권력에 대한 의지라고 말했습니다. Will to power, 이 권력에 대한 의지는 정치가들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이권력으로 말미암은 갈등은 삶의 현장 어디에나 있습니다. 가정 안에서 부부의 갈등 그리고 고부사이의 갈등 시어머니와 며누리의 갈등, 누가 보스냐 이 말이죠. 곳간 열쇠를 누가 쥐느냐? 그것도 권력의 갈등이에요. 권력에 대한 의지, 이 권력의 갈등의 모습은 가정에도 있고 직장에도 있습니다. 심지어 이것은 교회 안에서도 존재할 수가 있습니다. 아직도 소란스러운 이 세상의 모든 삶의 현장 도처에서 우리는 바로 이 권력의 갈등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시지프스의 신화에 보면 한 사람이 권력의 정상을 향해서 끊임없이 돌을 굴려 올립니다.돌은 정상에 닿지 못하고 계속 내려 옵니다. 그러나 이 도달 할 수 없는 정상을 향해서 계속해서 돌을 굴러 올리고 있는 이 시지프스의 이 처량한 모습은 바로 권력을 포기하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왜 사람들이 그것이 해결이 아니라는 어렴풋한 어떤 느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권력에 집착하고 있을까요?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권력이 행복을 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또 이 권력으로 못할 일이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것만 가지면 어떤 일이고 할 수가 있다는 그런 착각때문 이죠. 그러나 분명히 기억하십시다. 권력으로 결코 못할 두 가지가 있다는 사실을,
첫째 권력으로 우리는 행복을 살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권력으로 우리는 구원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을 가리켜서 하나님 앞에 비천한 자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를 선택하신 하나님의 신비를 찬양하면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다시 한번 52절의 본문의 말씀을 읽어 보십시다.같이 우리 52절의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다같이 시작,.“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이 비천한 자라고 했을 때 마리아는 자기를 생각하고 있었을 것 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48절에 보시면 마리아가 자신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이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으며’ 하나님 어째서 나를 선택하셨나요?
만약 권력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권력자가 이 세상에 소망이라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하나님은 마리아를 통해서 올 것이 아니라 가이사의 황실을 통해서 오셨을 것입니다. 그 당시 로마의 가이사는, 시저는 강력한 세계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그러나 하나님은 로마의 황실을 주목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나사렛 땅에 살고 있었든 비천한 계집종이라고 고백하고 있었든 한 어린 소녀, 이 소녀를 통해서 하나님이 구원자를 보내시기로 작정한 하나님의 놀라운 작정의 신비, 이 선택의 신비를 어떻게 우리는 설명할 수가 있을까요? 이런 배경에서 다시 말씀을 읽어보십시요. 권세 있는 자들을 오히려 그 위에서 내려치시고 비천한 자들을 높이시는 하나님, 그리고 나를 쓰시는 하나님, 나같이 비천한 소녀를 쓰셔서 하나님의 구원 섭리의 경륜을 이루기 위해서 역사하고 있는 놀라우신 주님을 지금 마리아는 찬양하고 있는 것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아직도 권력이 크다란 일을 해낼 수 있다는 착각을 버리지 못합니다.심지어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죠.
제가 이따금씩 교인들에게 이런 부탁을 받습니다. 종종 자주 받는 부탁중의 하나가 이런 것 입니다. ‘목사님 이분 아무개 있죠? 목사님 좀 관심을 좀 가져주세요. 이 분이 한번 제대로 믿으면 아주 큰 일을 할 사람이니까 목사님 잘 봐주세요’ 어떤 사람일까요? 이런 사람은 셋 중에 하나에요. 어떤 사람? 첫째로 좀 많이 배운 사람이라든지, 이 사람이 가진 지식의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 이라는 생각, 또 하나는 어떤 생각입니까? 어떤 종류의 사람일까요? 권력이 좀 있는 사람, 사회적인 위치가 있는 사람, 그럼 이 권력을 가지고 복음 전파에 대단한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또 하나는 어떤 종류의 사람일까요? 돈이 좀 있는 분, 그래서 그것 가지고 굉장히 크다란 일을 할 것이라고, 그래서 목사님 좀 관심을 가져주세요. 엑스트라(extra) 관심을 가져주세요. 그래서 저가 철이 없을 때 관심을 그런 분들에게 많이 가졌든 적이 있습니다. 하하~ 그리고 시간을 써 보았어요 그런데 한번도 성공한적이 없습니다. 그분들은 아직도 큰 일을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이 권력만이 혹은 돈만이 혹은 이 물질만이 어떤 복음의 전파나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도 가장 중요한 요건이라는 생각을 은근히 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뭐 그런 생각할 수도 있죠.
저는 요즘 그 KBS엔가 어디에서 굉장히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강의를 하고 계시는 분을 보면서 아! 저분이 예수를 잘 믿으면 얼마나 큰 영향력을 행사할까? 뭐 돌인지 도올인지 말이에요. 어쩌다가 예수를 잘못 믿어 가지고 나와 가지고 저렇게 기독교를 왜곡하고있는 얘기를 함부로 던지고 있을까? 그분이 제대로 잘 믿었으면 오히려 얼마나 복음 전파에 크다란 도움이 될까? 생각할 수가 있잖아요? 그런 생각 할 수가 있어요. 그러나 그가 아무리 비판해도 기독교의 복음에 영향력은 결코 축소되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은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를 선택해서 놀라우신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돌을 가지고도 도올이 아닌 돌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위대한 역사를 해 내실 수가 있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역설이고 복음의 신비에요. 우리가 그 선교역사를 이렇게 읽어보면은요 복음이 전파될 때 한 사회에 들어갈 때 대부분 사회의 낮은 계층에서 서민 계층에서 복음이 시작이 됩니다. 물론 전혀 그 예외로서 좀 권력을 가지고 있고, 또 물질도 가지고 있고 또 지성도 높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쓰임을 받는 경우가 없었든 것은 아니에요 참 귀한 분들이죠. 그러나 그것은 예외입니다. 보편적으로는 그렇지 않아요. 복음이 전해질 때 항상 서민계층에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 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래서 한 사회를 바꾸고 문화를 바꿔요.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성경은 그 이유를 이렇게 천명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 1장27절의 이하에서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세상에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그리고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패하시는 하나님,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권력이 해결이 아니다 권력이 행복이 아니다 권력이 구원의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비로소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강포에 쌓인 아기의 모습으로 이땅에 찾아오신 크리스마스의 사건, 예수그리스도의 사건은 비로소 복음일수 있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하나님이 무력해 보이는 한 아기, 힘없어 보이는 한 아기, 마리아라는 소녀를 통해서 나사렛 땅에서 자라나게 하신 힘없는 무력해보이는 이 아기의 사건, 그러나 이것이 인류의 구원이 되게 하셨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휴머요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마리아는 지금 이 찬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이 찬양을 들어보십시요.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다고’ 그렇습니다. 권력의 추구 그것이 구원의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들에게 비로소 아기 예수의 사건은 복음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또한 우리는 물질의 추구가 인간을 구원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동의해야 합니다. 물질의 추구가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도 없고 구원 할 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현대의 영웅은 부자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러분,돈보다도 강력한 크다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얼마나 열심히 돈을 추구하느냐, 돈을 추구하고 돈을 따라 다니다가 돈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돈이 결코 할 수 없는 것, 두 가지, 돈이 결코 할 수 없는 것 기억 하세요. 이 세가지 다 마찬가지 입니다마는 결코 돈이 할 수 없는 것, 돈으로 행복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돈으로 구원 받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돈으로 우리가 좋은 침대는 살 수가 있지만 돈으로 달콤한 잠을 살 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돈으로 우리는 비싼 헬스Equipment를, 건강기구를 살 수가 있지만 돈이 우리의 건강을 보장하지도 않습니다. 돈으로 근사한 책들을 사서 아름다운 데코레이션을 할 수가 있을지 모르지만 돈이 우리에게 지식을 제공하는 것도 아닙니다. 돈으로 사람은 살 수가 있지만 사랑은 살 수가 없습니다. 돈으로 출세는 살 수가 있지만 돈으로 행복을 살 수는 없습니다. 돈으로 고가의 금 십자가를 살 수가 있을지 모르지만 돈으로 구원을 살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때때로 자주 물질은 그리고 물질에 대한 탐심은 구원 받는 길에 크다란 장애요소로 우리를 방해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나타난,복음서에 나타난 어떤 청년 부자 관원의 이야기를 기억하시죠? 만일 이 사람이 물질을 잘 관리 할 줄 아는 현명한 사람이였드라면 네가 물질을 가지고 나를 섬기면서 따라오라고 말씀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에게 있어서는 물질은 주인이였습니다. 물질이 신이였습니다. 그 물질 때문에 결코 그 마음속에 하나님이 들어갈 여백이 없었음을 알았든 우리 주님은 그래서 이 부자 청년에게 어떤 도전을 하십니다. ‘네 가진 것을 팔 수가 있느냐? 팔고 나를 쫓으라!’ 성경은 이 사람이 예수님에게서 등을 돌리고 슬픈 모습으로 떠나갔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에게 있어서 탐심은 주인이 였습니다.탐심이 그에게 있어서는 우상이였든 것입니다.
그래서 53절에서 마리아는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찬양 합니다. 자,본문에 나타난 53절의 마리아의 찬양 부분을 한번 더 읽겠습니다. 53절 다같이,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주리는 자가 오히려 좋은 것으로 체험을 받을 수가 있지만 가진 자가 가진 것 때문에 하나님을 소유할 수 없는 그 비극, 때로 그래서 이 부자는 빈손으로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갖지 못했습니다. 행복을 갖지 못했고 구원을 가질 수가 없었든 것입니다. 그는 빈손으로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요. 성경은 물질 그 자체를 악으로 정죄하지는 않습니다. 돈이 악이라고 말한 적은 없어요 오히려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악이라고 말할 뿐이지 돈 그 자체가 악이라고 말하지는 않아요. 언제 돈이 악이 될 수 있습니까? 내가 돈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돈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할 때 그때부터 돈은 우상입니다. 돈이 나의 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탐심을 물리치라고,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탐심이 있는 곳에 예수님은 그 마음속에 계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해마다 이 크리스마스가 되면 한 몇 가지 제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생각나는 이야기들이 있어요.그 중에 하나, 제가 좋아하는 이야기 입니다. 여러분 아마 들어셨을거에요. 이것이 때때로 말하는 사람에 의해서 좀 변화되어서 소개 되기도 합니다. 아마 제가 드린 얘기가 그의 오리지날에 가깝다고 생각을 해요.녜,이것은 본래 맨 처음 실화인데, 시작된 것이 카나다에 온테리오에 크리스챤 엘레멘트리 스쿨에서 이 사건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오는 어느날 이 학교에서는 성탄, 소위 크리스마스 피젼 플레이라는 연극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연극 그 스타들을 그 배우들을 모집을 하는데 한 학생이 너무 너무 연극을 하고 싶었어요. 랄프라는 학생이였습니다. 4학년 학생이였는데 정서 장애를 갖고 있었든 학생이였어요. 이 학생이 너무 너무 연극에 나가고싶어 하는 거예요. 그런데 말도 더듬고 생각도 민첩하지 못한 어떻게 그가 연극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크리스챤 Teacher는,선생님은 어떻게 해서든지 랄프에게 용기를 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배역을 하나 맡겼습니다. 아무래도 액션을 많이 하거나 말을 많이 하는 배역은 맡을 수가 없겠죠? 그래서 아주 가장 말이 적은 배역 하나를 찾아냈습니다. 그것이 여관주인 이였습니다. 사관주인,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를 밴 마리아를 데리고 요셉이 여관의 문을 두들겼을 때 이 사관주인이 하는 말, 한마디 말만 하면 돼요. ‘방 없어요’ 방 없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랄프라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열심히 연극 연습을 시켰습니다. 한마디 말이니까 정성스럽게 또박 또박 발음하는 연습을 했습니다. ‘방 없어요’ 그 말만 하면 되는 거예요.
자, 그것을 세 번 하기로 합의가 되었습니다. 한번에 물러간 것이 아니라 ‘큰일 났는데요 이 사람이 아기를 낳을 것 같아요. 어떻게 좀 봐 주세요’ 그러면 한번 더 ‘방 없어요’ 세 번 하면 되는 거예요. 자, 드디어 연극이 시작 되었습니다. 자, 연극을 지도했든 모든 분들은 숨을 죽이고 랄프가 어떻게 역할을 감당하는 것인가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요셉이 마리아를 데리고 여관 앞에 도착했습니다. 여관 문을 두드립니다. 주인이 나왔습니다. 랄프가 나와서 또박 또박 연습한데로 말을 했습니다. ‘방 없어요’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는 가지않고 한번 더 매달렸습니다. ‘큰일 났어요 이 사람이 곧 아기를 낳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저에게 방 을 줄 수가 없나요?’ ‘방 없어요’ 한번만 더 하면 돼요. ‘어떻게, 사정하겠습니다 이 추운데 어디로 가란 말입니까? 곧 아기가 나올 것 같은데요’ 이 이야기를 듣자 갑자기 랄프는 눈물이 글썽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큰 소리로 말하기를 ‘그러면요 제 방 오세요’ 하하~ 제 방으로 오세요.
연극의 약속을 깼어요.그러나 그것은 숙연한 감동이였습니다. ‘제 방으로 오세요’.
누가 그리스도를 받아드릴 수가 있을까요? 이런 단순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오실 수가 있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것이 크리스마스의 사건인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인간의 지혜가 대답이 아니라고 믿으십니까? 인간의 지혜의 추구, 이성의 추구가 행복의 길이 아니고 구원의 길은 될 수가 없다고 분명히 믿으시나요? 두 사람만 믿으시나요?하하~ 권력이 대답이 아니라고 믿으시나요? 권력이 행복이 아니고 그리고 권력이 우리에게 구원을 보장하지 못한다고 분명히 그렇게 믿으시나요? 물질의 추구가 결코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없고 그것이 우리의 구원의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그들에게 있어서,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어린 소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서 아기 예수로 이땅에 오시게 하셨다는 사실, 이 성육신의 사건은 복음일 수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33년 후 이 아기는 우리의 허물과 죄를 담당하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받아야 할 그 진노와 저주를 대신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보배로운 피를 떨구셨으며 장사한지 사흘만에 부활하시사 우리의 생명의 주가 되셨다는 이 사건이 복음일 수가 있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나,그러나 말이죠 아직도 우리 가운데 인간의 지혜에 희망을 걸고 있는 분이 있다면, 또 인간의 권력의 추구에 내 인생의 행복이 있다고 믿고있는 사람이 있다면,그리고 우리가 추구하는 물질에만 진정한 행복이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기독교는 여러분에게 복음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 내가 추구하고있는 내 지성, 그 지식,나는 이제 이 지혜의 한계를 알았으며 지식의 남용의 무서운 악도 알았으며 또 우리가 추구하고있는 사람들의 권력의 추구가 얼마나 허무하다는 것을 알았으며 사람들이 그토록 매달리는 그 물질, 그 물질이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다는 물질의 허상을 아셨다면 이제 2000년 전 이땅에 아기예수의 모습으로 탄생하신 아기 예수의 구유앞으로 나오십시요.
그리고 33년 후 그가 우리의 허물과 죄를 담당하고 하나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옵니까? 우리대신 하나님 아버지 앞에 버림을 받으시며 저주와 진노를 받으시면서 붉은 피를, 보혈을 떨구어 계시든 골고다의 언덕 갈보리의 십자가 앞으로 나오십시요. 그리고 그분 앞에 엎드려 이렇게 고백해 보십시요. 주 예수여 당신이 그리스도이시며 당신이 구주이시며 당신이 소망이시며 당신이 행복이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만 참된 구원이 있을 것입니다.그리고 그들만이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를 알 것입니다 이 행복을 이 구원을 아는 모든 분들에게 성탄의 기쁨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기도 하십시다
그러나 여러분 가운데 우리가운데 아직도 참 행복을 알지 못하고 구원을 알지 못한 체 이 성탄절을 맞이하고 계시는 분이 있나요? 교회는 왔다 갔다 하지만 예수님이 내 구세주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아니하고 확신 되지 아니하는 그런 분들이 있나요? 이 조용한 시간 성탄을 하루 앞둔 이날 크리스마스의 전날, 내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받아드릴 수 있다면 이 성탄은 얼마나 좋은 성탄일까요? 목사님 저는 예수가 누구인가를 확실히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 좋은 계절,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내 마음속에 맞아드리고 싶어요.예수님 내 방에 오세요.내 마음의 방에 오세요.나는 당신이 필요해요.
오늘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드리고 싶은 분이 있다면 조용히 머리 숙여 기도하는 이 시간에 이렇게 기도해 보십시요. 제 기도가 여러분의 마음속에 고백과 같다면 따라서 이렇게 기도해 보십시요.
주 예수여 내 마음속에 오십시요. 나의 구주와 주님이 되어 주십시요. 저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요.저를 구원해 주십시요. 오직 당신만을 나의 구원의 주님으로 맞아드립니다.
이 기도는 되풀이 할 필요가 없는 내 일생의 가장 주요한 기도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미 그리스도를 맞아드린 여러분, 그러나 그리스도를 내 마음속에 모시고도 아직도 내가 주인노릇하고 그래서 내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주시는, 그리스도가 나를 주장해 주시는 그 삶의 진정한 의미와 보람을 누리지 못하고 갈등하고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다시 여러분의 짐을 주님 앞에 내려 놓으시죠. 그리고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분의 통치 앞에 순종하십시요.
예수는 그리스도, 참으로 그렇게 고백 할 수 있다면 이세상에 우리를 둘러 싼 삶의 환경이 좀 열악해도 찬바람이 불어도 너무 그렇게 위축될 필요는 없잖아요 우리는 마리아처럼 찬양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나 같은 사람을 선택해서 큰일을 행하신다. 오 하나님 제가 그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의뢰하면서 이 어려운 시대를 찬양하며 살아 갈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요.
우리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신 말씀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따라 예수께서 나의 주님 되신 놀라운 사실을 선포하고 인정합니다. 주님 높여드립니다. 찬양합니다. 우리에게서 찬양과 감사를 받으시고 우리의 삶 가운데 당신의 놀라운 은혜로 임재 하셔서 우리를 붙잡아 인도해 주시옵소서
지존하신 주님 이름 앞에 모두 무릎 꿇고 경배해
거룩하신 주님 보좌 앞에 엎으려 절하세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주
우리 다 일어나서 찬양하십시다.
예수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 탄생하셨을 때 천사는 아기예수 탄생의 기쁜 소식을 전하면서 이것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가난의 땅 유대 베들레헴 마구간의 구유에서 아직 결혼하지 않은 어린 소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탄생한 이 사건은 당시의 관념, 오늘날의 관념으로 생각해 보아도 이것은 스캔달에 불과한 사건이였습니다. 그런데 2000년 전 지구촌의 한 작은 이 마을에서 발생한 스캔달이 어떻게 인류를 위한 복음의 사건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놀라웁게도 그 대답을 바로 유명한 마리아의 찬가에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 볼 때 사람들이 자기의 행복이나 자기의 구원을 위해서 추구해온 대표적인 세가지가 있었다면 하나는 지혜, 지혜를 통한 이성을 통한 행복의 추구,.또 하나는 권력을 통한 추구, 또 하나는 물질을 추구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찬가에서는 이 세가지가 철저하게 부인되고 부정되고 있는 것 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혜가 아니고 권력이 아니고 물질이 행복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복음일 수가 있습니까? 그 대답은 차라리 단순한데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만약 지혜 있는 사람들만 행복하고 구원 받을 수 있었다면 이 땅에 살고 있는 수많은 지혜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또 만약 권력 있는 사람들만이 권력을 쟁취한 사람들만이 행복하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힘없이 살아가는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또 물질을 획득하거나 소유한 사람들만이 참으로 행복할 수가 있고 구원을 얻을 수가 있다면 가진 것이 없이 살아야 하는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의 운명은 도대체 어떻게 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아기예수로 오신 바로 그 분, 또 33년의 짧은 시간을 살다가 십자가에서 힘없이 죽어가신 그 분은 어쩌면 그러기에 무지한 그 수많은 이 땅에 살고있는 사람들에게도 힘이 없이 무력하게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그리고 가난한 사람에게도 복음일 수 있다는 역설, 여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가 있다고 성경은 선포하고 있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이 아기예수의 사건이 정말 여러분의 복음이 되고 나의 복음이 되고 우리의 복음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반드시 동의해야 할 세 가지가 있다고 마리아의 찬가는 우리에게 메세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정말 이 복음이 나의 복음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동의해야 할 세 가지의 사실, 그것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그것은 지혜의 추구가 인간을 구원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지혜라는 낱말 대신에 이성 이라는 낱말을 삽입시켜도 무방합니다. 인간의 이성적인 추구, 지혜를 통한 추구, 더 많은 지식을 소유하므로 행복하거나 구원을 얻을려는 이 모든 노력은 하나님 앞에서 가능하지 않다라고 성경은 선언합니다. 이것이 마리아의 찬가에서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다 함께 오늘 본문에 나타난 51절의 말씀을 다시 한번 같이 읽겠습니다. 51절 다같이 읽습니다. 시작,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여기 마음의 생각이라는 단어가 나오죠? 사람들이 마음의 생각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쟁취하고 소유할려는 그 끈질긴 행복의 노력 구원의 노력을 하나님은 무의로 돌리셨다라고 오늘 마리아는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나 기독교는 결코 반 지식주의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지식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성경은 하나님이 지식의 근원이고 지혜의 근원 이라고 선포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잠언 같은 책은 그 책 한 권 전체가 지혜의 중요성, 혹은 지식의 중요성을 예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이 전파되는 곳에는 언제나 인간의 이성이 눈을 뜨고 지식이 개발되는 역사가 이루어져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인간적 지식의 추구만으로 사람은 행복하거나 결코 구원될 수는 없다라고 가르칩니다. 이 사실을 여러분은 동의 하십니까? 인간적인 지식만의 추구 하나님을 떠난 지혜의 추구 혹은 이성의 추구만으로 결코 인간이 행복하거나 구원될 수 없다는 사실, 마리아의 찬가는 바로 여기에 중요한 한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교도소에서 일하고있는 교도관이였는데 이 사람은 인간의 모든 범죄가 무지에서부터 온다고 확신한 사람이였습니다. 벌써 오래 전 얘기입니다만 우리나라에 아직도 글을 깨우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때 그는 교도소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상대로 열심히 문맹 퇴치 운동을 했고 글을 가르치는 일에 헌신해 왔습니다. 한 수인이 교도소에 들어와서 비로소 글을 깨우치게 되었고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가 출소하면서 이 교도관을 찾아와서 참 감사하다고 제가 글을 깨우치고 새사람이 되어서 나간다고, 열심히 살라고 격려하면서 그들은 헤어졌습니다. 얼마후에 아~이 교도소를 나갔든 사람이 다시 들어왔어요. 똑같은 교도소에 왔어요. 교도관이 이번에는 왜 들어 왔나? 살펴보았더니 제목이 문서위조 죄 였다고 합니다.
요즘 우리가 살고있는 이 시대를 가리켜서 우리는 소위 지식 경영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이 지식, 지식만으로 결코 이 지식이 이 현대의 사회 속에 그리고 앞으로 미래의 사회 속에 결코 그것만으로 복음이 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대의 지식의 상징은 아무래도 인터넷일 것입니다. 인터넷으로 상징되는 현대의 지식의 전파,그것은 벌써부터 만만치 않는 피해를 우리가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최근에는 자살 사이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쉽게 생명을 버리는 모험을 계속하고있는 슬픈 사실을 봅니다. 인터넷에 뜨고 있는 수많은 포르노 사이트라든지 혹은 한 공동체를 반대하고 음해하기위한 수많은 앤티 사이트들, 그리고 익명성을 이용한 책임 없는 공동체 비판들이 얼마나 오늘 우리 사회에 크다란 새로운 악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인가를 우리는 뚜렷이 목격하고 있습니다. 지식의 오욕 내지는 지식의 악용의 현장들을 이미 우리는 눈을 떠서 보고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처음이 아니라 본래 인류 역사의 맨 처음부터 그러했든 것입니다. 사탄이 처음사람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을 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보여주었을 때 성경은 아담이 그것이 지혜스럽게 할 만큼 탐스러움이였다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때부터 하나님을 떠난 지식은 이미 악이였든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 전서 1장21절 이하의 말씀에서 이렇게 천명했습니다.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사람의 이성이 아무리 발달해도 사람들의 지식의 추구가 아무리 놀랍게 현저히 발달해도 사람은 자기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 라고 성경은 단언합니다.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을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오히려 사람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셨다고요.
이 지식 사회에서 ‘예수 믿으십시요 그러면 삶이 달라질 것입니다’. 이 단순한 복음의 접근은 얼마나 무지해 보입니까? 그러나 오히려 이 단순한 복음의 접근을 통해서 사람들이 새로워지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의 역설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그래서 같은 고리도 전서 1장18절에서 바울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사람들에게는 미련해 보이는 것이지만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이 십자가의 도가 바로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파워라고 바울사도는 증언했습니다. 바울이 편지를 쓰고있든 고린도 라는 도시는 그 당시 아테네와 함께 아직도 지식의 현란한 프라이드를 자랑하고 있든 지성의 도시였습니다. 바울은 이 지성의 도시 고린도에 살면서 지식 최고주의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런 경고를 던지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고린도전서 8장 1절에 보시면 지식은 교만하게 할 뿐이라고, 하나님을 떠난 지식 그리고 하나님에 의해서 가이드 되지 못하는 지식 그리고 성령에 의해서 인도되지 못하는 지식은 인생을 교만하게 할뿐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마리아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이렇게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사람들을 오히려 흩어놓으신다고 말했습니다. 마리아의 선택에 나타난 하나님의 신비를 생각해 보십시요.지식이 행복의 길이라면 지식이 구원의 길이라면 저 나사렛 땅이나 베들레헴 땅이 아닌 예루살렘에 가면 공부를 많이 한 소위 랍비들이,허다한 랍비들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산해드린 이라는 종교회의 안에는 당당하게 공부를 한 수많은 학자들이 존재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저 희랍의 아테네나 고린도에서 공부하고 있었든 아니 로마에서 키케로(Cicero) 를 위시한 수많은 지성인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기위한 구세주를 보내고자 하실 때 이런 모든 지식있는 사람들을 선택하지 않은 하나님의 신비, 나사렛 땅에 살고있었든 무명의 한 여인, 소녀 마리아를 선택한 하나님의 신비를 바라보십시요. 이것은 지혜의 추구가 지식의 추구가 인간을 구원할 수가 없다는 명백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지식이 대답이 아니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마리아를 통해서 아기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건은 비로소 복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혜의 추구가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는 첫번째 사실입니다.
이 아기예수의 탄생이 나의 복음 우리의 복음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동의해야 할 두 번째 사실이 있습니다. 그 둘째는 권력의 추구가 또한 인간을 구원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로 권력의 추구가 인간을 구원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저 유명한 철학자 니체는 인간의 생존의 의지, 나로 하여금 여기에 살게 하는 그리고 몸부림치면서 살게 하는, 인간의 생존을 붙들고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하나의 의지가 있다면 그것이 권력에 대한 의지라고 말했습니다. Will to power, 이 권력에 대한 의지는 정치가들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이권력으로 말미암은 갈등은 삶의 현장 어디에나 있습니다. 가정 안에서 부부의 갈등 그리고 고부사이의 갈등 시어머니와 며누리의 갈등, 누가 보스냐 이 말이죠. 곳간 열쇠를 누가 쥐느냐? 그것도 권력의 갈등이에요. 권력에 대한 의지, 이 권력의 갈등의 모습은 가정에도 있고 직장에도 있습니다. 심지어 이것은 교회 안에서도 존재할 수가 있습니다. 아직도 소란스러운 이 세상의 모든 삶의 현장 도처에서 우리는 바로 이 권력의 갈등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시지프스의 신화에 보면 한 사람이 권력의 정상을 향해서 끊임없이 돌을 굴려 올립니다.돌은 정상에 닿지 못하고 계속 내려 옵니다. 그러나 이 도달 할 수 없는 정상을 향해서 계속해서 돌을 굴러 올리고 있는 이 시지프스의 이 처량한 모습은 바로 권력을 포기하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왜 사람들이 그것이 해결이 아니라는 어렴풋한 어떤 느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권력에 집착하고 있을까요?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권력이 행복을 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또 이 권력으로 못할 일이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것만 가지면 어떤 일이고 할 수가 있다는 그런 착각때문 이죠. 그러나 분명히 기억하십시다. 권력으로 결코 못할 두 가지가 있다는 사실을,
첫째 권력으로 우리는 행복을 살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권력으로 우리는 구원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을 가리켜서 하나님 앞에 비천한 자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를 선택하신 하나님의 신비를 찬양하면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다시 한번 52절의 본문의 말씀을 읽어 보십시다.같이 우리 52절의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다같이 시작,.“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이 비천한 자라고 했을 때 마리아는 자기를 생각하고 있었을 것 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48절에 보시면 마리아가 자신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이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으며’ 하나님 어째서 나를 선택하셨나요?
만약 권력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권력자가 이 세상에 소망이라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하나님은 마리아를 통해서 올 것이 아니라 가이사의 황실을 통해서 오셨을 것입니다. 그 당시 로마의 가이사는, 시저는 강력한 세계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그러나 하나님은 로마의 황실을 주목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나사렛 땅에 살고 있었든 비천한 계집종이라고 고백하고 있었든 한 어린 소녀, 이 소녀를 통해서 하나님이 구원자를 보내시기로 작정한 하나님의 놀라운 작정의 신비, 이 선택의 신비를 어떻게 우리는 설명할 수가 있을까요? 이런 배경에서 다시 말씀을 읽어보십시요. 권세 있는 자들을 오히려 그 위에서 내려치시고 비천한 자들을 높이시는 하나님, 그리고 나를 쓰시는 하나님, 나같이 비천한 소녀를 쓰셔서 하나님의 구원 섭리의 경륜을 이루기 위해서 역사하고 있는 놀라우신 주님을 지금 마리아는 찬양하고 있는 것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아직도 권력이 크다란 일을 해낼 수 있다는 착각을 버리지 못합니다.심지어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죠.
제가 이따금씩 교인들에게 이런 부탁을 받습니다. 종종 자주 받는 부탁중의 하나가 이런 것 입니다. ‘목사님 이분 아무개 있죠? 목사님 좀 관심을 좀 가져주세요. 이 분이 한번 제대로 믿으면 아주 큰 일을 할 사람이니까 목사님 잘 봐주세요’ 어떤 사람일까요? 이런 사람은 셋 중에 하나에요. 어떤 사람? 첫째로 좀 많이 배운 사람이라든지, 이 사람이 가진 지식의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 이라는 생각, 또 하나는 어떤 생각입니까? 어떤 종류의 사람일까요? 권력이 좀 있는 사람, 사회적인 위치가 있는 사람, 그럼 이 권력을 가지고 복음 전파에 대단한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또 하나는 어떤 종류의 사람일까요? 돈이 좀 있는 분, 그래서 그것 가지고 굉장히 크다란 일을 할 것이라고, 그래서 목사님 좀 관심을 가져주세요. 엑스트라(extra) 관심을 가져주세요. 그래서 저가 철이 없을 때 관심을 그런 분들에게 많이 가졌든 적이 있습니다. 하하~ 그리고 시간을 써 보았어요 그런데 한번도 성공한적이 없습니다. 그분들은 아직도 큰 일을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이 권력만이 혹은 돈만이 혹은 이 물질만이 어떤 복음의 전파나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도 가장 중요한 요건이라는 생각을 은근히 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뭐 그런 생각할 수도 있죠.
저는 요즘 그 KBS엔가 어디에서 굉장히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강의를 하고 계시는 분을 보면서 아! 저분이 예수를 잘 믿으면 얼마나 큰 영향력을 행사할까? 뭐 돌인지 도올인지 말이에요. 어쩌다가 예수를 잘못 믿어 가지고 나와 가지고 저렇게 기독교를 왜곡하고있는 얘기를 함부로 던지고 있을까? 그분이 제대로 잘 믿었으면 오히려 얼마나 복음 전파에 크다란 도움이 될까? 생각할 수가 있잖아요? 그런 생각 할 수가 있어요. 그러나 그가 아무리 비판해도 기독교의 복음에 영향력은 결코 축소되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은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를 선택해서 놀라우신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돌을 가지고도 도올이 아닌 돌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위대한 역사를 해 내실 수가 있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역설이고 복음의 신비에요. 우리가 그 선교역사를 이렇게 읽어보면은요 복음이 전파될 때 한 사회에 들어갈 때 대부분 사회의 낮은 계층에서 서민 계층에서 복음이 시작이 됩니다. 물론 전혀 그 예외로서 좀 권력을 가지고 있고, 또 물질도 가지고 있고 또 지성도 높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쓰임을 받는 경우가 없었든 것은 아니에요 참 귀한 분들이죠. 그러나 그것은 예외입니다. 보편적으로는 그렇지 않아요. 복음이 전해질 때 항상 서민계층에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 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래서 한 사회를 바꾸고 문화를 바꿔요.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성경은 그 이유를 이렇게 천명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 1장27절의 이하에서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세상에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그리고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패하시는 하나님,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권력이 해결이 아니다 권력이 행복이 아니다 권력이 구원의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비로소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강포에 쌓인 아기의 모습으로 이땅에 찾아오신 크리스마스의 사건, 예수그리스도의 사건은 비로소 복음일수 있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하나님이 무력해 보이는 한 아기, 힘없어 보이는 한 아기, 마리아라는 소녀를 통해서 나사렛 땅에서 자라나게 하신 힘없는 무력해보이는 이 아기의 사건, 그러나 이것이 인류의 구원이 되게 하셨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휴머요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마리아는 지금 이 찬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이 찬양을 들어보십시요.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다고’ 그렇습니다. 권력의 추구 그것이 구원의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들에게 비로소 아기 예수의 사건은 복음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또한 우리는 물질의 추구가 인간을 구원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동의해야 합니다. 물질의 추구가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도 없고 구원 할 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현대의 영웅은 부자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러분,돈보다도 강력한 크다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얼마나 열심히 돈을 추구하느냐, 돈을 추구하고 돈을 따라 다니다가 돈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돈이 결코 할 수 없는 것, 두 가지, 돈이 결코 할 수 없는 것 기억 하세요. 이 세가지 다 마찬가지 입니다마는 결코 돈이 할 수 없는 것, 돈으로 행복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돈으로 구원 받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돈으로 우리가 좋은 침대는 살 수가 있지만 돈으로 달콤한 잠을 살 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돈으로 우리는 비싼 헬스Equipment를, 건강기구를 살 수가 있지만 돈이 우리의 건강을 보장하지도 않습니다. 돈으로 근사한 책들을 사서 아름다운 데코레이션을 할 수가 있을지 모르지만 돈이 우리에게 지식을 제공하는 것도 아닙니다. 돈으로 사람은 살 수가 있지만 사랑은 살 수가 없습니다. 돈으로 출세는 살 수가 있지만 돈으로 행복을 살 수는 없습니다. 돈으로 고가의 금 십자가를 살 수가 있을지 모르지만 돈으로 구원을 살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때때로 자주 물질은 그리고 물질에 대한 탐심은 구원 받는 길에 크다란 장애요소로 우리를 방해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나타난,복음서에 나타난 어떤 청년 부자 관원의 이야기를 기억하시죠? 만일 이 사람이 물질을 잘 관리 할 줄 아는 현명한 사람이였드라면 네가 물질을 가지고 나를 섬기면서 따라오라고 말씀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에게 있어서는 물질은 주인이였습니다. 물질이 신이였습니다. 그 물질 때문에 결코 그 마음속에 하나님이 들어갈 여백이 없었음을 알았든 우리 주님은 그래서 이 부자 청년에게 어떤 도전을 하십니다. ‘네 가진 것을 팔 수가 있느냐? 팔고 나를 쫓으라!’ 성경은 이 사람이 예수님에게서 등을 돌리고 슬픈 모습으로 떠나갔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에게 있어서 탐심은 주인이 였습니다.탐심이 그에게 있어서는 우상이였든 것입니다.
그래서 53절에서 마리아는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찬양 합니다. 자,본문에 나타난 53절의 마리아의 찬양 부분을 한번 더 읽겠습니다. 53절 다같이,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주리는 자가 오히려 좋은 것으로 체험을 받을 수가 있지만 가진 자가 가진 것 때문에 하나님을 소유할 수 없는 그 비극, 때로 그래서 이 부자는 빈손으로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갖지 못했습니다. 행복을 갖지 못했고 구원을 가질 수가 없었든 것입니다. 그는 빈손으로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요. 성경은 물질 그 자체를 악으로 정죄하지는 않습니다. 돈이 악이라고 말한 적은 없어요 오히려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악이라고 말할 뿐이지 돈 그 자체가 악이라고 말하지는 않아요. 언제 돈이 악이 될 수 있습니까? 내가 돈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돈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할 때 그때부터 돈은 우상입니다. 돈이 나의 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탐심을 물리치라고,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탐심이 있는 곳에 예수님은 그 마음속에 계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해마다 이 크리스마스가 되면 한 몇 가지 제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생각나는 이야기들이 있어요.그 중에 하나, 제가 좋아하는 이야기 입니다. 여러분 아마 들어셨을거에요. 이것이 때때로 말하는 사람에 의해서 좀 변화되어서 소개 되기도 합니다. 아마 제가 드린 얘기가 그의 오리지날에 가깝다고 생각을 해요.녜,이것은 본래 맨 처음 실화인데, 시작된 것이 카나다에 온테리오에 크리스챤 엘레멘트리 스쿨에서 이 사건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오는 어느날 이 학교에서는 성탄, 소위 크리스마스 피젼 플레이라는 연극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연극 그 스타들을 그 배우들을 모집을 하는데 한 학생이 너무 너무 연극을 하고 싶었어요. 랄프라는 학생이였습니다. 4학년 학생이였는데 정서 장애를 갖고 있었든 학생이였어요. 이 학생이 너무 너무 연극에 나가고싶어 하는 거예요. 그런데 말도 더듬고 생각도 민첩하지 못한 어떻게 그가 연극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크리스챤 Teacher는,선생님은 어떻게 해서든지 랄프에게 용기를 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배역을 하나 맡겼습니다. 아무래도 액션을 많이 하거나 말을 많이 하는 배역은 맡을 수가 없겠죠? 그래서 아주 가장 말이 적은 배역 하나를 찾아냈습니다. 그것이 여관주인 이였습니다. 사관주인,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를 밴 마리아를 데리고 요셉이 여관의 문을 두들겼을 때 이 사관주인이 하는 말, 한마디 말만 하면 돼요. ‘방 없어요’ 방 없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랄프라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열심히 연극 연습을 시켰습니다. 한마디 말이니까 정성스럽게 또박 또박 발음하는 연습을 했습니다. ‘방 없어요’ 그 말만 하면 되는 거예요.
자, 그것을 세 번 하기로 합의가 되었습니다. 한번에 물러간 것이 아니라 ‘큰일 났는데요 이 사람이 아기를 낳을 것 같아요. 어떻게 좀 봐 주세요’ 그러면 한번 더 ‘방 없어요’ 세 번 하면 되는 거예요. 자, 드디어 연극이 시작 되었습니다. 자, 연극을 지도했든 모든 분들은 숨을 죽이고 랄프가 어떻게 역할을 감당하는 것인가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요셉이 마리아를 데리고 여관 앞에 도착했습니다. 여관 문을 두드립니다. 주인이 나왔습니다. 랄프가 나와서 또박 또박 연습한데로 말을 했습니다. ‘방 없어요’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는 가지않고 한번 더 매달렸습니다. ‘큰일 났어요 이 사람이 곧 아기를 낳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저에게 방 을 줄 수가 없나요?’ ‘방 없어요’ 한번만 더 하면 돼요. ‘어떻게, 사정하겠습니다 이 추운데 어디로 가란 말입니까? 곧 아기가 나올 것 같은데요’ 이 이야기를 듣자 갑자기 랄프는 눈물이 글썽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큰 소리로 말하기를 ‘그러면요 제 방 오세요’ 하하~ 제 방으로 오세요.
연극의 약속을 깼어요.그러나 그것은 숙연한 감동이였습니다. ‘제 방으로 오세요’.
누가 그리스도를 받아드릴 수가 있을까요? 이런 단순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오실 수가 있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것이 크리스마스의 사건인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인간의 지혜가 대답이 아니라고 믿으십니까? 인간의 지혜의 추구, 이성의 추구가 행복의 길이 아니고 구원의 길은 될 수가 없다고 분명히 믿으시나요? 두 사람만 믿으시나요?하하~ 권력이 대답이 아니라고 믿으시나요? 권력이 행복이 아니고 그리고 권력이 우리에게 구원을 보장하지 못한다고 분명히 그렇게 믿으시나요? 물질의 추구가 결코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없고 그것이 우리의 구원의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그들에게 있어서,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어린 소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서 아기 예수로 이땅에 오시게 하셨다는 사실, 이 성육신의 사건은 복음일 수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33년 후 이 아기는 우리의 허물과 죄를 담당하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받아야 할 그 진노와 저주를 대신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보배로운 피를 떨구셨으며 장사한지 사흘만에 부활하시사 우리의 생명의 주가 되셨다는 이 사건이 복음일 수가 있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나,그러나 말이죠 아직도 우리 가운데 인간의 지혜에 희망을 걸고 있는 분이 있다면, 또 인간의 권력의 추구에 내 인생의 행복이 있다고 믿고있는 사람이 있다면,그리고 우리가 추구하는 물질에만 진정한 행복이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기독교는 여러분에게 복음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 내가 추구하고있는 내 지성, 그 지식,나는 이제 이 지혜의 한계를 알았으며 지식의 남용의 무서운 악도 알았으며 또 우리가 추구하고있는 사람들의 권력의 추구가 얼마나 허무하다는 것을 알았으며 사람들이 그토록 매달리는 그 물질, 그 물질이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다는 물질의 허상을 아셨다면 이제 2000년 전 이땅에 아기예수의 모습으로 탄생하신 아기 예수의 구유앞으로 나오십시요.
그리고 33년 후 그가 우리의 허물과 죄를 담당하고 하나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옵니까? 우리대신 하나님 아버지 앞에 버림을 받으시며 저주와 진노를 받으시면서 붉은 피를, 보혈을 떨구어 계시든 골고다의 언덕 갈보리의 십자가 앞으로 나오십시요. 그리고 그분 앞에 엎드려 이렇게 고백해 보십시요. 주 예수여 당신이 그리스도이시며 당신이 구주이시며 당신이 소망이시며 당신이 행복이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만 참된 구원이 있을 것입니다.그리고 그들만이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를 알 것입니다 이 행복을 이 구원을 아는 모든 분들에게 성탄의 기쁨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기도 하십시다
그러나 여러분 가운데 우리가운데 아직도 참 행복을 알지 못하고 구원을 알지 못한 체 이 성탄절을 맞이하고 계시는 분이 있나요? 교회는 왔다 갔다 하지만 예수님이 내 구세주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아니하고 확신 되지 아니하는 그런 분들이 있나요? 이 조용한 시간 성탄을 하루 앞둔 이날 크리스마스의 전날, 내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받아드릴 수 있다면 이 성탄은 얼마나 좋은 성탄일까요? 목사님 저는 예수가 누구인가를 확실히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 좋은 계절,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내 마음속에 맞아드리고 싶어요.예수님 내 방에 오세요.내 마음의 방에 오세요.나는 당신이 필요해요.
오늘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드리고 싶은 분이 있다면 조용히 머리 숙여 기도하는 이 시간에 이렇게 기도해 보십시요. 제 기도가 여러분의 마음속에 고백과 같다면 따라서 이렇게 기도해 보십시요.
주 예수여 내 마음속에 오십시요. 나의 구주와 주님이 되어 주십시요. 저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요.저를 구원해 주십시요. 오직 당신만을 나의 구원의 주님으로 맞아드립니다.
이 기도는 되풀이 할 필요가 없는 내 일생의 가장 주요한 기도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미 그리스도를 맞아드린 여러분, 그러나 그리스도를 내 마음속에 모시고도 아직도 내가 주인노릇하고 그래서 내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주시는, 그리스도가 나를 주장해 주시는 그 삶의 진정한 의미와 보람을 누리지 못하고 갈등하고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다시 여러분의 짐을 주님 앞에 내려 놓으시죠. 그리고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분의 통치 앞에 순종하십시요.
예수는 그리스도, 참으로 그렇게 고백 할 수 있다면 이세상에 우리를 둘러 싼 삶의 환경이 좀 열악해도 찬바람이 불어도 너무 그렇게 위축될 필요는 없잖아요 우리는 마리아처럼 찬양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나 같은 사람을 선택해서 큰일을 행하신다. 오 하나님 제가 그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의뢰하면서 이 어려운 시대를 찬양하며 살아 갈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요.
우리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신 말씀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따라 예수께서 나의 주님 되신 놀라운 사실을 선포하고 인정합니다. 주님 높여드립니다. 찬양합니다. 우리에게서 찬양과 감사를 받으시고 우리의 삶 가운데 당신의 놀라운 은혜로 임재 하셔서 우리를 붙잡아 인도해 주시옵소서
지존하신 주님 이름 앞에 모두 무릎 꿇고 경배해
거룩하신 주님 보좌 앞에 엎으려 절하세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주
우리 다 일어나서 찬양하십시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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