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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삶과 신앙

전도서 정용섭 목사............... 조회 수 2520 추천 수 0 2009.12.01 23:3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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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전3:1-13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38655 
emoticon2006. 1.1.        

정한 때
전도서 기자는 오늘 본문 2-8절에서 인간 삶의 온갖 신비로운 현상들을 열네 쌍으로 구성된 대립형식의 노랫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몇 대목만 살펴봅시다.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다.”(2a).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는 나서 죽습니다. 어떻게 보면 태어난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은 같은 사건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인류 전체를 보면 지금 이 시간에도 태어나기도 하고 죽기도 합니다. 한 개체의 태어남과 죽음 사이의 시간이 거의 한 순간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것은 동시적인 사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심을 때가 있으면 뽑을 때가 있다.”(2b). 배추 씨앗을 땅에 심은 다음에 3개월 쯤 후에 배추를 뽑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뿌리는 일과 거두는 일들이 반복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랑할 때가 있으면 미워할 때가 있다.”(8a). 우리가 그 누군가를 사랑할 때가 있지만 어느 사이에 그것이 미움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에는 수많은 사랑과 미움의 열정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싸움이 일어날 때가 있으면 평화를 누릴 때가 있다.”(8b). 인류역사에는 어느 한 순간도 진정한 평화가 지배한 적은 없습니다. 어떤 왕들도 진정한 평화를 실현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의 세계는 이상합니다. 서로 반대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것만이 아니라 미워하기도 하고, 평화를 구가하는 것만이 아니라 전쟁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인간의 삶만이 아니라 자연 세계도 역시 그렇습니다. 비가 오기도 하지만 맑게 개이기도 합니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더울 때가 있지만 반대로 얼어 죽을 정도로 추울 때도 있습니다. 인간과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현상, 그런 힘들이 각축을 벌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전도서 기자는 이런 현상의 기저에는 “때”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1절 말씀을 보십시오. “무엇이나 다 정한 때가 있다. 하늘 아래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나 다 때가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보통 그런 말을 합니다. 때가 됐다든지, 아직 때가 아니야, 하는 식으로 말합니다. 하늘 아래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때가 있다는 건 옳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보이는 테니스를 배우는 것조차 때가 있습니다. 배우는 사람은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야 라켓과 공의 일치를 몸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재주나 흥미만으로 이런 일들이 이루어지는 건 아닙니다.
여기서 “때”를 생각한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곧 어떤 현상의 내면을 의식한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의 일들은 겉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 내면에서 작용하는 어떤 힘들에 의해서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그 내면의 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김치를 예로 들어봅시다. 김치는 처음에 담근 것이나 며칠 지난 것이나 겉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전문가들의 눈에는 미세한 차이가 보이긴 하겠지만 큰 틀에서만 본다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먹기에 좋을 정도로 익는 일은 그 안에서 벌어집니다. 박테리아가 배추를 부식시킵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그것은 우리의 입맛을 당기는 김치가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 개인의 삶에도 이런 힘들이 작용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자기를 이끌어가는 힘들이 작용한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은 책읽기를 매우 좋아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수학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뛰어난 작가가 되기도 하고, 과학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들이 처음 세상에 태어났을 때는 어떤 사람이 될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내면의 힘이 그의 삶에 적당하게 작용하게 되면 김치가 맛 들듯이 그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힘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라 내면에 숨어 있어서 사람들이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냥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려니, 또는 사람이 노력해서 이룬 것이려니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훨씬 심층적인 힘들이 거기에 작용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런 심층적 힘들은 공동체 안에서도 일어납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함께 모이게 되었을까요? 간단히 10년 전으로만 거슬러 올라가보세요. 그때 여러분이 살아가던 그 상황과 오늘 우리가 함께 예배드리는 이런 상황을 연결시킬 수 있을까요? 거의 불가능합니다. 앞으로 10년 후에 우리는 어떤 사람들과 함께 이런 공동체를 꾸려가게 될는지 상상할 수 있을까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눈에 박테리아의 활동이 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이런 삶의 밑바닥에서 움직이는 힘들이 우리의 인식을 뛰어넘는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때
우리가 포착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는 이런 생명의 힘이 성령이며, 곧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시간을 끌어가시는 분이 곧 하나님이십니다. 전도서 기자는 이렇게 진술합니다. “하느님께서 어떻게 일을 시작하여 어떻게 일을 끝내실지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11b). 삶이 신비로운 이유는 바로 그것의 중심이신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계산해낼 수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자연현상도 그렇고 우리의 일상도 역시 신비롭습니다. 우리가 계산할 수 없는 그런 때가 우리를 끌어가고 있습니다. 이 끌어가는 힘이 곧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전도서 기자는 이런 신비가 막연하다거나 단순히 자연 원리라는 사실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때와 뜻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입니다. 그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이 제 때에 알맞게 맞아 들어가도록 만드셨더라.”(11a). 우리가 파악할 수 없는 일들이 이 세상에서 많이 벌어지지만 결국 하나님은 인간들의 삶에 필요한 것들을 적합하게 제공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성서의 주장을 받아들이기 힘들 겁니다. 이 세상은 별로 바람직하게 돌아가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자연재해가 일어나서 많은 사람들이 죽고, 착한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하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악한 사람들이 잘삽니다. 이 세상은 정의롭다기보다는 자본과 권력이 지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일들을 생각하면 하나님이 정의로운 분일까, 하는 의심이 듭니다. 하나님이 사랑이라면 부동산 투기로 떼돈을 번 사람이 잘난 척하고, 한 끼니 때우기 힘들 정도로 가난한 사람들이 고생하는 걸 그냥 둘 수 있을까요? 우리는 아직 이런 현상의 근원적인 원인을 잘 모릅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이 당장 이 세상에 완전한 정의와 평화를 이루어주었으면 합니다. 여러분, 아직 세상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모든 불안, 의심, 의혹, 절망의 실체를 알기에는 우리의 생각이 너무 짧습니다. 산모가 아기를 출산하기 위해서 몸을 쪼개는 고통을 경험해야 하듯이, 우리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과 불의를 견뎌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오늘 전도서 기자가 말하고 있듯이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맞게 만드셨으며, 그렇게 이끌어 가신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그것의 증거를 대라고 말하지는 마십시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무조건 믿으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여기에 바로 기독교 신앙의 긴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과 그렇지 못한 이 세상 사이의 괴리에서 긴장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산고를 말씀드렸지만, 여기서 다시 한 번 더 비슷한 비유를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열 살짜리 딸아이가 심한 감기에 걸렸습니다. 이 아이는 아버지에게 불평했습니다. 왜 내가 이렇게 고생해야 하느냐고 말입니다. 아버지가 이 딸아이를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요? 감기에 걸린 것은 네가 평소에 건강관리를 잘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거나, 또는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는 간혹 이런 감기에 걸리는 것도 좋다는 말로 설득이 될까요?
영적인 면에서 우리는 열 살짜리 여자아이처럼 철부지입니다. 당장 아프다는 사실 때문에 불평을 늘어놓기만 합니다. 전도서 기자는 철든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걸 알맞게 만드셨다고 가르칩니다. 앞에서 14가지 서로 상반되는 삶의 현상을 열거했다는 건 그가 이 세상의 삶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잘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도 그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때는 아름답다고 가르칩니다. 이런 게 곧 신앙이 아닐까요? 아픈 현실 속에서도 그것 너머의 기쁨을 보는 것 말입니다. 외로움 가운데서도 그것 너머의 평화를 찾는 것 말입니다.
이게 실제로 가능할까요? 이런 태도는 자기를 속이는 것일까요? 단지 종교적인 속임수일까요? 간혹 종교가 속임수로 작용할 때가 있긴 합니다. 그러나 전도서 기자는 지금 그게 아니라 이 세상을 향한 큰 긍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고 유지하고 있는 이 세상을 근본적으로 긍정하는 것입니다. 이런 긍정에서 실제적인 삶의 능력이, 폴 틸리히의 용어를 빌린다면 “존재의 용기”(courage to be)가 시작됩니다. 이런 존재의 용기와 능력으로 이 세상을 대하는 게 곧 기독교 신앙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바로 그 존재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행복한 삶
모순처럼 보이는 세상 속에서도 존재의 용기를 잃어버리지 않고 산다는 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전도서 기자가 제시하는 답은 그렇게 고상하지 않습니다. 뭔가 그럴듯한 대답을 기대했던 분들은 실망하기 안성맞춤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결국 좋은 것은 살아있는 동안 잘 살며 즐기는 것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사람은 모름지기 수고한 보람으로 먹고 마시며 즐겁게 지낼 일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선물이다.”(12,13절). 즐겁게 살라고 하는군요. 목숨이 붙어 있는 동안에 먹고 마시며 행복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먹고 마신다는 말은 단순히 음식을 먹고 물을 마시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생명활동을 가리킵니다. 자고 일어나고, 숨쉬고, 결혼하고, 먹고, 마시고, 배설하고 등등,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활동을 충실히 하면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삶을 금욕주의와 일치시키는 일은 잘못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 땅에서의 삶을 근본적으로 긍정할 뿐이지 그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물론 자기 십자가를 지라거나 근신하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모두 어떤 특별한 상황을 배경으로 주는 말씀들이지 일반적인 것들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 당시 바리새인들에게 어떤 핀잔을 받았는지 생각하면 복음의 성격이 무엇인지 드러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향해서 “왜 당신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흥청망청 사는가?” 하고 따졌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 수행으로 의로움을 성취하려고 시도했지만, 예수는 인간의 삶, 그 생명 자체를 인정하셨습니다. 이미 우리의 삶에 가득 들어 있는 하나님의 은총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라는 게 예수의 복음이었습니다.
오늘 기독교인들의 삶은 어떻습니까? 생명의 힘이 흘러넘칩니까? 아니면 생명을 죽이고 있습니까?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명망이 높은 한국교회의 목사들은 대개 동성애자들을 죄인 취급합니다. 이런 성윤리 문제는 시대와 환경에 따라서 평가가 다르기 때문에 아무도 절대적인 기준으로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여기서 제기하는 문제는 동성애자들의 생명을 살리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금욕주의가 절대적인 기준인 것처럼 가르친다는 것은, 그래서 결국 자기와 다른 성적 취향을 가진 사람들을 적대시하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을 기본적으로 부정하는 태도입니다. 물론 이런 반론이 가능합니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부도덕한 것까지 용납할 수는 없지 않느냐, 하고 말입니다. 이런 주장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사람들을 모범생으로 만드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주신 삶의 즐거움과 행복을 잃지 않는 사람이 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마지막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도대체 즐겁게 산다는 게 무엇일까요? 우리는 어떻게 먹고 마시며 즐겁게 살 수 있을까요? 전도서 기자가 하나님의 뜻과 때를 말하면서 즐거운 삶을 언급하는 이유를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먹고 싶은 대로 마음껏 먹고, 마시고 싶은 대로 마음껏 마시면 행복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일상에서 행복을 경험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는 여러분이 잘 알기 때문에 제가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이렇게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져야만 우리는 먹고 마시며 즐겁게 지낼 수 있습니다. 이는 흡사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식사 자리가 행복한 것과 같습니다. 더 나아가 이런 삶의 토대가 잡힌 사람은 다른 사람의 삶을 파괴하는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이미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2006년 한 해 동안 이런 행복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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