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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 전통 앞에서

신명기 정용섭 목사............... 조회 수 1731 추천 수 0 2009.12.01 23:3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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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신18:15-22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38664 
emoticon2006. 1.29.        

모세의 연설
신명기의 성격은 여러 면에서 아주 독특합니다. 우선 신명기(申命記)라는 이름은 ‘말하다 신’, ‘목숨 명’,  ‘기록하다 기’가 집합된 단어입니다. 아마 모세가 말한 생명의 말씀을 기록한 책이라는 뜻이겠지요. 그러나 원래 신명기는 사본에 따라서 이름이 약간 씩 다릅니다. 어떤 때는 그냥 단순하게 ‘모세의 다섯 번째 책’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또는 Deuteronomium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듀토로노미움은 신 17:18절에 나와있는 ‘두루마리’에 해당되는 히브리어가 시나이 산에서 수여받은 율법과 병존하는 ‘제 2의 율법’이라는 의미로 오해되어서 나오게 된 이름입니다. 어쨌든지 전반적인 상황을 미루어 볼 때 신명기서는 역사적으로 예언과 율법의 성격이 강한 책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건 분명합니다.
형식적으로만 본다면 신명기는 모세의 연설 모음집입니다. 신명기서 앞부분에는 이 말씀의 성격에 대한 짧은 설명이 자리하고 있고, 마지막 부분에는 모세가 이 연설을 끝내고 죽었다는 짤막한 보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여든 살의 모세가 출애굽의 긴 여정을 끝내고 이제 일백이십 살의 나이에 이르러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40년의 광야생활을 끝내는 바로 그 순간에 과거를 회상할 뿐만 아니라 미래에 펼쳐진 가나안 시대를 준비하게 하는 연설인 셈입니다. 일단 신명기서의 앞부분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요르단 강 건너편 바란, 도벨, 라반, 하세룻, 디자합 사이의 숩이 마주 보이는 아라바라는 광야에서 모든 이스라엘 사람에게 한 말이다. 모세가 야훼께 분부 받은 것을 그대로 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한 것은 에집트에서 나온 지 사십 년째 되던 해 십 일월 일일의 일이었다. 그가 헤스본에 사는 아모리 왕 시혼을 치고, 아스다롯과 에드레이에 사는 바산 왕 옥을 쳐 꺾은 다음이었다. 모세는 요르단 강 건너편 모압 땅에서 비로소 이 법의 뜻을 풀어들려 주었다.”(1:1,3-5절).
본문에 등장하는 호렙 산은 모세가 하나님을 직접 만난 산으로서 시내 산과 동일합니다. 모세는 광야생활 40년 동안 크게 두 번의 설교를 했습니다. 한번은 광야생활이 시작하는 시나이 산 아래였으며, 다른 한번은 오늘 본문이 가리키는 대로 광야생활이 끝나는 아바라 광야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설교가 바로 모세에 의해서 선포된 셈입니다.
그렇지만 이 신명기서가 모두 직접적으로 모세에 의해서 선포된 말씀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이 말씀 자체만 놓고 본다 하더라도 모세의 죽음과 그의 활동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34장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최소한 이 부분은 다른 사람에 의해서 기록되었다는 증거입니다. 또한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신명기서의 독자들은 모세보다 훨씬 후대인 왕조시대의 이스라엘 민중들이었다고 합니다. 요시아 왕의 개혁운동과 신명기서를 연결시키기도 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이런 신학적인 문제를 더 이상 언급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렇게 정리하지요. 신명기서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요구되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오래 전에 죽은 모세의 입을 통해서 새롭게 구성된 것이라고 말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감안한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서를 모세와 연결시켰다는 건 당연해 보입니다.

예언자의 기능
신명기는 이스라엘의 역사철학이 기본적으로 ‘신명기사관’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이스라엘 전체 역사에서 기준이 되는 말씀입니다. 창세기부터 시작하는 모세 오경의 총괄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를 다룬 전기 예언서의 단초가 바로 신명기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이 문서는 이스라엘 신앙의 핵심입니다.
오늘 본문은 곧 예언자 집단이 이스라엘 역사에 등장하게 된 신학적 동기를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에는 기름을 부어 세우는 지도자 그룹이 셋 있습니다. 왕, 제사장, 예언자입니다. 왕은 정치적인 지도자이고, 제사장은 종교적 제의를 통해서 수행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예언자는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지도자입니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왕과 예언자는 서로 경쟁관계에 있었습니다. 왕은 이 세상을 정치공학적인 차원에서만 관리해나가는 사람인 반면에 예언자는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한 예언으로 해석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왕은 가능한대로 현실유지를 원한다면 예언자는 변화를 모색했습니다. 성서는 기본적으로 예언자의 입장에서 역사를 해석했습니다. 예언자의 예언에 귀를 기울여서 하나님의 뜻을 따른 왕들은 좋은 왕들로 인정받고, 아무리 정치력이 뛰어난 왕이라고 하더라도 예언자의 예언을 무시하는 왕들은 결국 나쁜 왕으로 낙인찍혔습니다. 큰 틀에서 볼 때 성서는 모두 예언자들의 활동을 직간접으로 전한 문서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역사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집단은 결국 예언자들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이런 예언자들이 이스라엘 역사에 등장하게 된 동기가 바로 모세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15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는 나와 같은 예언자를 동족 가운데서 일으키시어 세워 주실 것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모세가 스스로 ‘나와 같은 예언자’라고 언급했을 가능성은 그렇게 높지 않습니다. 모세는 영적인 카리스마가 가장 뛰어난 사람이긴 했지만 예언자에게 필요한 언변은 별로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예언자가 반드시 말을 잘해야만 한다는 법은 없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는 말의 능력과 예언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어쨌든지 신명기서 편집자는 지금 모세가 이런 말을 했는가, 아닌가 하는 역사적 사실을 검증하려는 게 아니라 예언자의 뿌리가 모세의 호렙 산 사건에 닿아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려는 것입니다. 그 사건의 내막은 모세가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아 이스라엘 민중들에게 선포한 일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았던 호렙(시내) 산은 그 당시에 아마 활화산이었던 것 같습니다. 십계명이 선포되는 그 순간에 그 산이 천둥과 번개로 가득했다고 합니다. “온 백성은 천둥과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에 자욱한 연기를 멀리서 바라보고 두려워 떨었다.”(출 20: 18)고 합니다. 그들은 모세에게 이렇게 요구했습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말해 주시오. 잘 듣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죽을 것입니다.”(출 20:19). 민중들의 이 요청이 바로 오늘 분문 신 18:16절에서 이렇게 다시 확인되고 있습니다. “나의 하느님 야훼의 소리를 다시는 직접 듣지 않게 해 주십시오. 이 무서운 불을 다시는 보지 않게 해 주십시오. 내가 죽을까 두렵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야훼 하나님은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야훼의 목소리를 듣는 것조차 두려워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야훼 하나님을 보는 자는 죽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야훼 하나님에게 모습을 보여 달라고 하자 옆으로 지나가는 소리는 들을 수 있겠지만 직접 볼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출 33:20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그러나 나의 얼굴만은 보지 못한다. 나를 보고 나서 사는 사람이 없다.” 아무도 하나님을 직접 본 사람이 없다거나, 그를 본 사람은 죽는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인간은 살아있는 한 절대적인 세계를 인식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물속에 사는 물고기가 물 밖으로 나오면 죽는 것처럼 지금 이런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이 세계 안과 밖을 총괄하는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는 길은 죽는 것밖에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죽음은 우리에게 공포일 수도 있지만 하나님과 직면하는 통로라는 점에서 유일한 구원의 길이기도 합니다. 어쨌든지 이 세상에 갇혀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것 너머의 존재를 경험해야 한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런 사실을 구약성서 기자들은 약간 우화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연설을 계속합니다. 야훼 하나님의 소리를 직접 듣기가 두렵다는 이스라엘 민중들의 요청을 하나님이 받아들였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당신의 말을 대신 전해줄 사람들을 세우시겠다고 했습니다. “나는 네 동족 가운데서 너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키리라.”(18절). 이 말씀이 곧 이스라엘 역사에서 예언자 집단이 출현하게 된 근본적인 동기입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에게서 ‘지시받은 것을 그대로’ 일러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그가 내 이름으로 하는 말을 전할 때 듣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친히 그에게 추궁할 것이다.”(19절). 결국 이 말은 하나님은 예언자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통해서만 말씀하신다는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람의 말이 곧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통로인 셈입니다.

거짓 예언자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오늘 본문 21절이 그 문제를 직접 거론하고 있다는 걸 보면 이미 이스라엘 역사에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들이 경쟁관계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엘리야, 이사야, 예레미야가 모두 거짓 예언자들과 경쟁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거짓 예언자들이 민중들의 호응을 받을 때가 적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게 참 이상하지요. 엘리야, 이사야, 예레미야 같은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은 사람들이라는 게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그들을 반대한 예언자들이 그에 못지않은, 경우에 따라서 훨씬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는 게 말입니다.
왜 그럴 수밖에 없을까요?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리와 비진리가 그렇게 칼로 두부를 자르듯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인격도 그렇잖아요. 이 사람이 완전히 거짓말만 하거나 아니면 완전히 옳은 것만 말하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걸 우리는 인격의 이중성이라고 말합니다. 옳고 그름의 인식론적 능력은 뛰어난 사람이 심리적으로는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행동하기도 합니다. 사회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매우 진보적으로 대처하는 사람이 집에 들어가서는 여전히 가부장적인 횡포를 부리기도 합니다. 신자들을 끔찍하게 사랑하는 목사가 자기 가족에게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구약의 예언과 가장 가까운 행위인 오늘의 설교도 역시 그렇습니다. 저 목사가 과연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고 있는지, 엄밀하게 말해서 저 목사가 하나님에게서 지시받을 것을 전하고 있는지 아닌지 식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건 인격의 이중성이라는 차원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고정된 규범이 아니라 삶의 심층과 함께 늘 새롭게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의 깊이에 따라서, 우리 ‘삶의 자리’에 따라서 새롭게 열리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의 목사들은 공부와 자기성찰에 게으르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상황과 별로 다를 게 없었던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요?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어떻게 구분했을까요? 오늘 본문은 그것에 대해서 별로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아주 간단히 두 가지 기준만 제시합니다. 하나는 거짓 예언자들은 죽을 것이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들의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거짓 예언자가 죽은 일들이 있긴 하지만 이런 일들이 기계적으로 정확하게 일어나는 건 아닙니다. 아마 모르긴 해도 거짓 예언자들 중에서도 무병장수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을 겁니다. 거짓 예언자가 죽는다는 것은 어떤 실증적인 사실을 말하는 게 아니라 일종의 경고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진리라고 한다면 그것을 거스른 사람을 그냥 놔둘 수는 없는 거죠.
두 번째의 분별 기준이 현실적인 것입니다. 거짓 예언은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당연히 야훼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 멋대로 말한 것이니 그런 예언자는 두려워할 것 없다.”(22절). 거짓 예언자들은 하나님과 역사를 심층적으로 성찰하는 게 아니라 청중들의 요구에 부합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잠시 동안 인기를 얻을 수는 있을지 몰라도 시간과 함께 결국 그것의 거짓이 들통 나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실을 역사에서 자주 발견합니다.
역사에서 참과 거짓이 판명된다는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곧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한 인간이 살아온 삶의 완전한 실패로 간주되었던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 이제 부활 사건을 통해서 전혀 새로운 빛을 받았습니다. 예수 사건이 곧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결정적인 통로입니다. 오늘 기독교인들은 그것이 진리라는 사실을 실제적인 말과 삶으로 변증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모든 기독교인들은 예언자들입니다. 과연 우리는 이런 예언 전통 앞에서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을까요? 우리는 거짓 예언자는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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