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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전1:1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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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동원 목사 |
참고 : | 지구촌교회 |
고린도전서 1장10절 말씀부터 17절 말씀까지 교독하겠습니다. 제가 한절 읽고 다음절 여러분이 읽고 함께 교독하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내 형제들아 글로애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니는 다름이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자라 하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주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 외에는 아무에게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아멘. 아 ,오늘 1장 10절로부터 시작해서 고린도전서4장 마지막절 까지는 고린도 교회가 직면하고 있었던 여러 가지 문제 가운데 첫 번째 문제 분쟁의 문제 분열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지난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 고린도전서는 많은 문제를 직면하고 있었던 고린도교회, 고린도교회를 둘러싸고 있었던 고린도라는 사회, 도시가 가지고 있었던 세속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문제들과 더불어 갈등하고 있었던 사회인데 이 고린도 교회가 이 문제를 넘어서서 성숙을 추구하는 바울의 편지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고린도전서 1장10절에서 보면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에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를 권하노니 이 고린도전서는 특별히 권면의 성격을 갖고있는 편지입니다. 문제를 넘어서서 성숙을 추구하도록 권면하는 그런 편지입니다. 그리고 지나간 시간에 이미 말쓰드린 것처럼 고린도교회는 그런 문제를 넘어서서 성숙한 자세로 문제를 극복하는 그런 모본을 보였던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 우리는 이 고린도 교회가 부딪혀 있었던 문제 가운데서 첫 번째 문제인 고린도교인들 안에 있었던 혹은 교회 안에 있었던 분쟁의 문제,분열의 문제 혹은 파벌의 문제에 대해서 같이 한번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 우리는 이 분열의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가 그 원인을 진단해 보고 그 진단에 따르는 처방을 바울이 어떻게 내리고있는가를 같이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이 고린도전서 1장부터 시작해서 4장까지 네가지의 중요한 원인을 바울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뭐냐면 1장에 10절 이하의 부분은 사람들에 대한 소속 교인들 가운데 나는 어떤 사람에게 속해있다, 나는 어떤 사람을 따른다 그런 사람들에 대한 소속감 사람들에 대한 소속이 바로 고린도교회안에 그런 불필요한 분파들을 안고있었던 원인이었던 것을 우리가 지적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우리가 1장 18절부터 사실은 시작됩니다만 주로 2장에 가서 바울은 지혜라는 문제를 다룹니다. 참된 지혜와 거짓된 지혜,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구별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왜 지혜의 문제가 나왔냐면 사람들이 누가 더 똑똑한가 누가 더 지혜로운가에 따라서 편이 갈라진 것이 바로 고린도교회의 분열의 원인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고린도라는 도시는 히랍의 유명한 도시가운데 하나입니다 아테네와 함께 히랍의 중심 2대 도시가운데 한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히랍이라는 이 나라는 우리가 잘 아는 데로 철학을 탄생시킨 나라입니다. 철학이라는 말은 영어로는 필라소피 라고 말합니다. 필라소피라는 말은 본래 히랍어에서 두 개의 단어가 결합된 말입니다. 필로스 라는 단어와 소피아라는 두 개의 단어가 결합된 일종의 합성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필로스 라는 말은 사랑이라는 뜻이죠, 친구들간의 사랑이나 우정적인 사랑을 말할 때 필리아, 필로스라는 단어를 씁니다. 그 다음에 소피아라는 것은 지혜라는 뜻입니다. 지혜 위스톰 지혜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필로소피아 필로소피라는 말은 지혜를 사랑한다, 지식을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아 그러나 이 지혜를 추구하는 철학자들 가운데도 많은 여러 가지 학파들이 혹은 분파들이 히랍의 역사 속에는 존재하고 있었고 신약성경이 씌여지던 바울이 활동하고 있던 그 당시에도 히랍에는 무려 그 철학의 계보 가운데 한50개의 학파들이 중요한 학파만 따져도 약50개의 학파들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스승을 중심으로 해서 유명을 스승을 어떤 사람은 소크라테스학파, 플라톤학파, 이렇게 해서 에피큐로스를 따라 다니는 에피큐리안학파, 스토아를 따라 다니는 스토익학파 이런 여러 가지 학파들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한 사실은 이러한 사회적 경향이 교회 안에도 그대로 들어와 있었다는 사실이에요. 그래서 그들이 신앙을 갖게 되었을 때 그 신앙에 있어 자기들이 좋아하는 그 어떤 지도자를 중심으로 해서 고린도교회 안에도 파벌이 형성되고 있었던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고린도교회는 파벌주의를 극복해야할 중대한 위기 앞에 서 있던 것입니다. 사실은 이 히랍사람 못지않게 파벌을 좋아하는 문화적 역사적 전통을 갖고있는 나라가 우리 한국이기도 합니다. 주로 이조시대 영향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사색당쟁 그래서 한국 이조시대 역사를 읽으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가 아니라 뭐 노론이 소론을 죽이고 남인이 북인을 죽이고 북인은 남인을 죽이고 뭐 이런 사색당쟁의 피흘리는 역사의 전통을 우리도 갖고있습니다. 파벌이 익숙해 지다보니까 파벌을 갖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생각 되어지던 사회 그것이 바로 고린도사회 였고 오늘날의 한국도 그런 영향에서 아직도 자유하지 못하다. 그래서 계속 끊임없이 계속되는 당들의 이합집산의 모습들, 당파싸움의 영향 아직 민주화된 현대 우리들의 사회 속에서도 우리가 그대로 보고있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경향들이 교회 안에도 얼마든지 들어와 있을 수 있다는 고린도교회 안에 있었던 파벌, 몇 개의 파벌을 고린도교회 안에서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자, 이러한 파벌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지혜를 따라서는 안된다. 사람의 지혜 이상의 지혜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지혜다. 이것은 특별히 2장에서 바울사도가 역설하고 있는 그런 내용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를 높이는 사람의 지혜를 높이기 시작한다면 끊임없는 파벌주의를 피할 수가 없다. 이것이 두 번째 진단이고요, 그 다음에 세 번째는 뭐냐면 첫째는 사람을 따라 사람들이 소속하기 때문에 이합집산이고, 둘째로 사람의 지혜를 높이기 때문에 파벌이 생겼고 세 번째는 3장에서 주로 바울이 강조하는 것인데, 사람들의 역할의 상이성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역할의 상이성, 특별히 지도자 되는 사람들의 각각 역할이 다르다. 은사에 따라서 하고있는 역할이 다르다. 롤이 다르다, 이 다르다는 것을 이해해야 되는데, 이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때 왜 저럴까, 저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하고, 비판하고, 거기서 파벌이 생기죠 사람들의 역할의 상이성에 대한 무지 이것이 바로 세 번째로 고린도교회 파벌을 낳은 한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네 번째는 4장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것들 사람들에 대한 판단의 차이점, 사람들에 대한 판단의 차이점, 나는 저 사람을 이렇게 판단한다. 저 사람은 나를 이렇게 판단한다. 판단, 이 판단이 파벌을 낳고 있었던 것을 볼 수 가 있습니다. 이 네 가지의 중요한 원인을 지적합니다. 고린도교회 분열이 왜 오고 있었는가?무엇 때문에 초래 되고 있었는가? 네가지 원인 첫째 뭐예요? 사람들에 대한소속,어떤 사람을 따라가서 소속하는 사람들에 의한 소속, 둘째는? 사람들의 지혜를 따라갔기 때문에, 사람들의 지혜를 높혔기 때문 세 번째는? 사람들의 역할의 상이성을 몰랐기 때문, 네 번째는? 사람들에 대한 판단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에 대한 판단,이것이 바로 고린도교회 파벌들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두 가지만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는 사람에 대한 소속감, 따라서 어떤 사람에게 소속함으로써 그룹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인간은 소속감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딘가 소속되 있어야만 거기서 안정감을 느낍니다. 누군가에게 소속 되어야 하고 어딘가 소속을 해야만 그 소속에서 오는 안정감을 우린 느낄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속할 수 있는 공동체를 찾고 내가 따라갈 수 있는 지도자를 찾습니다. 힘있는 사람을 찾고 지혜로운 사람을 찾고 편안한 사람을 찾고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을 찾습니다. 찾아서 거기에 우리는 소속을 합니다.이 소속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예요. 소속은 필요한 것이예요. 소속에 따라서 자연히 어떤 그룹핑을 생길수가 있어요 어떤 그룹이 만들어질 수 가있어요 자연스런 그룹, 전혀 나쁜 것이 아니예요 그것은 오히려 긍정적 이라고까지 할 수가 있어요. 우리교회가 지역에 따라서 마을목장을 나누기도 하고 지역뿐만 아니라 지역을 넘어서서 생각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이런 목장을 우리가 강조하고 있어요. 목장사역, 영어로 말하면 셀 사역인데 세포사역이죠. 셀, 셀 이라는 것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생존하기 위해서 살아있는 생물체로서 생존하는데 가장 중요한 생명의 기본단위가 바로 이 셀입니다. 이 세포입니다. 우리 몸 안에도 수억개의 세포들이 작은 셀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현미경으로 보면 수없이 많은 셀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 살아있는 세포들은 셀들은 계속해서 성장하고 또 분열합니다. 또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죠. 어느 정도 성장하게 되면 세포분열을 하죠.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네개가 되고 세포가 분열을 합니다. 거기까지는 잘못이 없어요. 자연스러운 그룹핑, 그룹을 형성하고 자연스럽게 그 그룹이 다시 나뉘어지고 이것은 생물체의 살아있는 현상이고 교회는 교회 안에 있는 작은 그룹들 건강한 그룹들의 교제와 성숙을 통해서 또 새로운 그룹들이 생겨남으로써 교회가 건강한 성숙과 성장을 추구할 수가 있는 것 입니다. 문제는 언제부터 생기냐면 부자연스럽게 성장할 때 그 성장이 부자연스러울 때 잘못된 목적으로 성장할 때 우리세포도 그것이 컨트롤 불가능하게 막 성장해서 자기의 영역이 아닌 다른 영역을 파괴하고 공격하기 시작하면 그건 더 이상 건강한 세포가 아닙니다. 그건 병든 세포입니다. 암세포가 됩니다. 그것이, 비나인드로 그래서 수술 하셔야 되고 잘라내야 되는 그러한 위험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는 이 자연스러운 세포가 아니라 이 병든 세포 암세포와 같은 병든 세포의 그룹들이 존재하기 시작합니다. 딱 뭉쳐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또한 다른 것들을 막 주변을 공격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공격적인 셀, 그러니까 서로 모여서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고,서로 권면하고 격려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좋은 교제 안에서 우리가 성숙을 도모한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그런데 하라는 교제는 안하고 모여 앉아서 자꾸만 다른 사람 비판하고 헐뜯고 부정적인 영향을 감염시키고, 다른 사람들을 파괴하고 찔르고 공격하고 그럼 이건 더 이상 건강한 셀이 아닙니다. 병든 세포, 암세포입니다 이것은 잘라내지 않으면 몸 전체를 공동체 전체를 위협할 수 있는 아주 암 적인 요소들이 될 수가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런 암적 위기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고린도교회 안에서 생겨나고 있는 모습 들을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 그래서 어떤 파벌들이 존재했습니까? 우리가 12절을 보시면 크게 한 4개의 그룹들이 이러한 건강하지 못한 불건강한 그룹들이 4개의 그룹으로 나뉘어져 있던 것을 지적합니다. 우리가 12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이는 다름아니라 너희가 다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자라 하는 것이니. 네 파가 생겼는데요 첫째는 무슨 파예요 바울파, 그런데 지금 바울이 이 편지를 쓰고 있어요. 바울도 승인하지 않은 이 바울파, 바울이 좋아한게 아니에요. 나를 따라 다닌다고 해서 좋아한 것이 아니라 바울파도 하나 있었어요. 아마도 어쩌면 이 바울파는 굉장히 확고한 리더십을 좋아하고 확신에 찬 바울의 비젼이라든지 리더십이라든지, 확신을 좋아했던 사람들이 바울을 추종하면서 그들끼리 모여진 하나의 그룹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아볼로에게 속해있는 그룹이 있었어요. 아볼로는 아마 우리가 사도행전에 보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성경에 능한 사람이라고 그랬어요, 성경에 능한 사람 그 아주 훌륭한 성경교사 탁월한 말씀을 잘 가르치는 그런 은사를 가지고 있었던 교사였습니다. 그러니까 아볼로가 가르치는 성경공부에 매료된 사람들이 또 하나의 그룹을 형성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 다음에 어떤 파가 있습니까? 게바파 베드로죠 베드로 베드로 이것은 아마도 게바의 열정 게바의 능력을 좋아했던 사람들, 밤낮 배우기만 하면 뭐하느냐 능력이 있어야지, 이런 사람들은 아마 게바파, 베드로의 능력과 열정을 사랑했던 사람들이 또 하나의 파벌을 형성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재미있는 파는 네번째 파인데 그건 무슨 파입니까?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만 따른다. 굉장히 바람직해 보여요, 그 다음에 문제는 그리스도만 따른다고 자기들끼리만 모였으니까, 이것도 또 하나의 파예요. 이것도 그리스도파예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좋지않은 영향을 주었을 때 그것도 별 수 없는 행동 하나에 파벌로 형성되었던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자, 이러한 파벌로 형성이 되고 그것이 분쟁에 영역 속에 이미 들어와있다, 그것이 분쟁을 일으키고 있다라는 소문을 글로에라는 사람을 통해서 바울이 에베소에서 보고를 받았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이런 분쟁의 현상에 대해서 바울은 이런 질문으로 해결을 시작합니다. 13절에 보면 세 가지의 중요한 질문을 던져요 바울이, 세가지의 아주 중요한 질문을 던져요. 그러나 이 세가지 질문은 모두가 다 한 가지 해답을 겨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분쟁에 대한 해답 처방은 결국 이거예요. 이게 뭐냐 이 세 가지 질문은 공통된 한 가지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를 생각 해 보면서 이 세 가지 질문을 같이 우리 다루어 봅시다. 첫째질문 자, 우리 13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네. 첫째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어져있느냐, 그러니까 예수님을 왜 찢으려고 하느냐 예수님이 나뉘어져 있더냐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해져 있다면 그리스도는 한 분이 아니더냐 그러면 그리스도나 한 분을 중심으로 너희들이 조화와 통일을 이루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더냐 이 말이예요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어졌느냐 우리가 그리스도는 한 몸이시다 그리스도는 절대로 두몸이 아니다.그런데 왜 그리스도의 몸을 찢고 깨뜨릴려고 하느냐 그리스도는 한 몸이시다 이 진리를 바울은 나중에 고린도전서 12장에 들어가면, 고린도전서 12장에 들어가면, 바울이 그 문제를 집중적으로 나중에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한 몸이시다, 한 몸 그리고 우리는 그 한 몸에 속한 지체들이다. 바울이 그 사실을 나중에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아주 중요하게 강조를 합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질문은 어떤 질문입니까? 13절에 나타난 두 번째 질문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더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지가에 못박혔느냐? 아니죠 그런데 왜 바울 따라 다니느냐 바울이 하는 소리에요, 바울이 그러니까 바울이 의식이 분명한 사람이예요. 나를 따라 다닌다고 무조건 좋아 하는 것이 아니예요 나를 따라와도 병적으로 따라오고 그것이 잘못된 결과를 가져온다면 그것을 엄중하게 꾸짖을줄 아는 그런 객관성을 바울은 가지고 있던 지도자였습니다. 훌륭한 지도자지요. 여기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이 너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혔느냐?누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까? 예수님. 예수님이 너희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아니냐 그러면 누구를 따라 가야되요? 예수님 따라 가야지 왜 바울을 따라가느냐 이 말이예요.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예수님, 피 흘리신 예수님, 자신의 생명을 버려주신 그 예수님 이 그리스도의 희생과 사랑을 기억한다면, 왜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지 못하느냐? 그 얘기죠. 자, 세 번째 질문 어떤 질문이예요 너희가 세례를 침례를 받을 때 누구의 이름으로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느냐 바울의 이름으로 우리가 세레를 받을 때 누구의 이름으로 받으셨습니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우릴 위해 죽으셨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에.. 세례, 침례 이 Baptizm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어디 있을까요? 세례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뭐예요? 예? 그리스도와의 연합이예요. 네 맞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이 새 공동체반 제대로 공부 하셨으면 제대로 대답을 할 수 가있습니다. 또 공부를 해도 워낙 잘 잊어버리시는 분은 또 잊어버렸을지 모르지만 정신차리고 공부하면 잊어버리지 않아요.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공부하면, 머리 나쁜 거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머리 나빠도 견고하게 새겨넣으면, 돌 일수록 견고하게 새겨넣으면 절대로 망각하지 않습니다. 로마서 한번 찾아 보세요 6장 로마서 6장에 보시면 로마서 6장 우리가 3절4절에 보시면 침례문제, 세례문제, 이Baptizm의 문제를 바울이 다루면서 제일 강조한 단어가 뭐냐면, 이게 바로 Baptizm의 세례의 침례의 근본사상입니다. 그건 연합이예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이 말이예요 합하여, 연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계속 강조되는 단어가 뭐예요? 연합했다, 합했다. 그리스도에게 내가 연합되는 사건이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자가 되었으며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자가 되었고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의식이 바로 Baptizm이라는 말이죠. 그것이 네, 우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Baptizm을 받았고 내가 그리스도에게 속한자라면 내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으니까 누굴 따라가는 것이 마땅해요?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이 마땅하지요. 그러니까 여기 바울은 세가지 질문을 했지만 해답은 몇 가지 라고 그랬어요? 한 가지다. 이 말이 이해가 되십니까 이제? 네, 바울이 세 가지 질문을 했지만 해답은 하나예요 그래 하나는 뭐냐면 그리스도의 주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주권을 참으로 인식한다면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주님이시다. 그리스도만이 주님이시다. 사람은 우리의 주인이 아니다. 내가 존경할만한 스승을 갖는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내 신앙생활 여정을 통해서 나에게 영향을 준 분 나에게 좋은 가르침을 준 분, 내가 그 분을 귀히 여기고 또 그 분을 사랑한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내가 따라 가야 될 것을 누굴 따라 가야되냐 예수님 따라 가는 거예요. 그는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한 것에 불과해요.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한 것에 불과합니다. 훌륭한 영적 지도자는 초점을 자기에게 맞추지 않는사람, 누구에게 맟추는 사람,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맟추는 사람이 훌륭한 지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영국의 어떤 목사님에게 그런 설교를 들은 일이 있어요. 아마 이분 교회는 뒤에 이렇게 스테인드 글라스가 돼 있고 거기에 예수님이 서있는 모습이 이렇게 조각돼 있었는데 아마 이렇게 목사님이 서시면 강대상에 딱 서면 그게 뒤에가 잘 안보였던 모양이예요. 그래서 한번은 목사님 설교를 하다가 옆으로 이렇게 자리를 비키게 되었는데 앞에 있는 꼬마가 그러더래요 순진한 꼬마가 "목사님이 없어지니까 예수님이 보이네" 그말을 듣고 이 목사님이 크게 깨달았다고 해요. " 아! 내가 예수님을 가릴수도 있구나!" 훌륭한 지도자는 초점을 예수님에게 맟추는 사람,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을 따라가십시오.
어떤 지도자가 우리에게 좋은 가르침을 주었어요.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 사람이 계속 사람들을 붙들고 있어요. 놔 주지않고 여러분이 어떤 영적인 갈망 때문에 특정한 모임에 가서 좋은 영향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을 계속 따라 간다면 이건 잘못된 신앙이에요. 좋은 영향을 받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가 정말 좋은 교사라면 내가 누구를 따라가도록 인도하는 사람 그리스도만을 바라 보고 따라 갈 수 있도록, 네, 그래서 정말 그리스도가 내 신앙의 초점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어떻게 우리는 사람에 대한 소속의 유혹을 넘어서서 그것이 파벌이 되지 않도록, 파벌이 되지않도록, 분쟁이 되지 않도록 예방할 수가 있을까? 아니 이미 우리 안에 시작되는 어떤 분쟁의 위기를 극복할 수가 있을까요? 그 대답은 간단해요. 누굴 바라보면 돼요?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이 주님이시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10절을 다시 한번 읽겠어요. 10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10절 다같이 시작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여기10절에 너희에게 권하노니 어떻게 권한다고 했어요? 형제들아 내가 누구 이름으로 권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저는 여기 바울이 의도적으로 주님이라는 단어를 강조 했다고 생각해요. 우리 주 우리의 주인,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권하노니 너희가 같은 마음을 가져라. 어떻게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나, 같은 마음을 합 합시다 그래서 되는 게 아니에요. 초점을 어디다 두는데? 예수님, 예수님 바라보고 예수님 쳐다보면 우린 그리스도 이름으로 다시 한번 연합될 줄로 믿습니다. 네 끊임없이 우리는 사람에 대한 영향 때문에 파벌을 만들 수 있는 위험성이 있어요. 저는 교파도 그런 의미에서 위험 하다고 생각해요.저는 언제나 교파 라는 것은 필요악 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파는 필요하긴 한데 필요악이에요. 그럼 왜 없애지 못하느냐 다. 없애거나 만들면 그게 또 하나의 파가 되요. 그러니까 이제는 더 만들려고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이미 많이 있어요. 그리고 교파 안에 소속 돼 있어도 교파를 넘어 설 줄 아는 그런 자유가 필요 하다고 저는 생각해요. 이런 유명한 얘기가 있습니다. 감리교 운동의 창설자인 웨슬리, 요한 웨슬리 선생이 기도 하다가 잠이 들었어요. 꿈을 꾸었어요. 그런데 천당 문에 자기가 들어가게 되었어요. 천국에 자기가 들어가는 꿈을 꾸게 되었는데 천국문을 지키고 있는 천사에게 들어가면서 궁금해서 이런 질문을 던졌데요. "이천국에는 나를 따라오는, 나를 따라 오고있는 메도디스트, 감리교도들이 얼마나 많이 들어와 있습니까? 그동안, 천국에 얼마나 많이 왔습니까?" 그러니까 천사가 잠깐 기다리라고, 뭘 한참 뒤져보더니 하는 소리가 " 웨슬리님! 참 죄송합니다. 천국에는 감리교인이 한분도 안 와 계시네요" 깜짝 놀래가지고 "아! 내가 이거 뭘 잘못 믿은 모양이다" 그러면 칼빈주의를 강조한 아마 칼비니스트들이 옳았던 모양이다 "그러면 천사님! 칼비니즘 주의자들 장로교인들은 몇 사람이나 와 있습니까?" 천사가 한참 있다가 대답하기를 "장로 교인들은 한 사람도 와 있지 않네요!" 더 놀래가지고 웨슬레가 "그러면 천사님 제가 틀렸군요, 종교개혁이 틀렸군요. 천국에는 다 카톨릭 교인들이 와 있습니까?" 천사가 "이상하네요, 카톨릭 교인들은 한 사람도 와 있지 않습니다." 더 놀래 가지고 "아! 그러면 뭐 웨슬리 이런거 안 따라 다니고 복음주의적 성서적 신앙을 강조하는 침례교인들이 다 와 있군요" 천사가 "죄송하지만 Baptist 도 침례교인도 한 사람도 와 있지 않네요" "그럼 누가 와 있단 말입니까? 도대체 천국은 텅 비어 있습니까?" 천사가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만이 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에게 속한 자들만이" 그렇죠 그리스도가 주인 되신 것을 믿으십니까? 네 그리스도가 주인이라면 우리의 모든 신안 고백의 영역에 삶의 영역에서 그분이 정말 주인이 되셔야 되요. 그래 우리는 사소한 인간적 차이를 극복할 수가 있는 것으로 믿습니다.
자, 고린도교회 분쟁, 파벌은 둘째로 사람의 지혜를 높이는 데서 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지혜, 이미 말씀 드린 대로 고린도는 철학을 나온 히랍의 도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 스승을 따라서 많은 파벌들이 이합집산이 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는 특별히 뭐 물론 이제 바울이 복음을 전한 후에 히랍 사람들이 예수를 많이 믿었겠죠. 이방 사람들이 그러나 상당히 그 당시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도 고린도에 많이 와 있었어요. 유대인들도, 그래서 고린도교회는 히랍인과 유대인,이방인과 유대인으로 형성 되어있던 교회입니다. 히랍 사람들은 자기들의 문화적 배경 때문에 자연히 신앙을 추구해도 자기들의 히랍적인 방식으로 신앙을 추구했을 것입니다. 히랍적인 방식이란 뭐냐면 토의하고 토론해서 무엇을 깨달아 아는 이성적인 추구, 그러나 유대인들은 좀 달라요 유대인들은 같은 신앙을 추구해도 유대인들은 어떤 증거를 구하고 체험을 구하는 체험 중심적인 그런 신앙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유대인들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우리가 성경을 보면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뭘 구합니까? 표적을 달라고 그래요 사인을 달라고 봐야 믿을 수 있다. 히랍 사람들은 뭐냐면 이해가 되야 믿을 수 있다 내가, 내가 이해를 해야만 믿을 수가 있다. 내가 이해한다 그러므로 나는 믿는다 이게 히랍 사람들의 신앙추구의 방식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믿겠습니다. 뭘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믿겠습니다. 자, 이러한 것을 중심으로 해서 여러 가지 신앙의 스타일에 따라서 여러 가지 파벌들이 생긴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추구에 대해서 바울은 어떤 대답을 하고있습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가 사람의 지혜를 따라 이루어지는 이합집산의 파벌주의를 극복 하려면 하나님의 지혜로 돌아와야 된다. 사람의 지혜가 아라 하나님의 지혜다. 바울의 강조점 이에요 하나님의 지혜.하나님의 지혜는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지혜는 십자가 입니다. 복음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분이 하나님의 지혜다. 우리 한 번 읽어 보시겠습니다. 18절 다 같이 읽겠습니다 18절 시작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의 도.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구원,우리의 생명이 되셨다.이게 아마 히랍 사람들의 그 마인드 생각으로 볼 때는 아주 미련한 얘기일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예수라 존재가 죽고 사는 것이 나에게 구원인가 아마 잘 깨달아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을 바울도 알았어요. 그래서 21절에 보면 뭐라고 말합니까? 21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하나님의 지혜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여기 전도를 뭐라고 그랬습니까? 미련한 것이다 그랬어요 미련한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하셨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이렇게 말하는 거 어떻게 생각면 굉장히 미련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방법으로 사람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 당시에 존재하던 신앙추구의 대표적인 두 개의 경향 양식에 대해서 바울은 이렇게 증거 합니다. 22절 다 같이 읽어요 시작,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 찾으나. 저는 지금도 신앙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방식은 크게 이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해요. 하나는 유대인식,히브리식,하나는 헬라식, 이 헬라식은 뭐냐면 자기 지혜 리즈닝, 이성적인 토론, 추구를 통해서 신앙을 발견하고자 하는것, 이성주의적인 접근방법, 또 하나는 뭐냐면 보여주십시오 그럼 나는 믿겠습니다, 느끼면 내가 믿겠습니다, 신비주의적 신앙추구를 하는 사람들, 우리 가운데도 보면 체질적으로 둘 중의 하나인 사람들이 많아요. 체질적으로 똑같지 않아요. 어떤 사람은 뭐냐면 화끈하게 뭐가 느껴져야 믿는거 같은 사람들이 있고, 어떤 사람은 잘 이해가 되야 그것을 통해서 신앙을 발견할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삶이 있습니다. 어느것이 옳을까요? 이성주의 일까요? 아니면 신비주의 일까요? 어느것이 옳을까요? 바울의 대답은 뭡니까?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그러나 우리는 뭐예요 다음절 23절 다 같이 읽습니다. 시작,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 에게는 꺼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네, 기독교는 이성주의 입니까? 아닙니다. 기독교는 이성에 근거해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종교가 아니에요. 기독교는 이성을 반대하지는 않아요. 기독교는 반이성주의는 아니지만 기독교는 인간의 이성으로 모든 것을 깨달아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인간의 좁은 이성으로서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기독교는 이성주의가 아니에요, 기독교는 신비주의도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 안에는 신비주의적, 체험의 풍성함이 있습니다.그 말이 기독교가 신비주의라는 말이 아니예요. 체험은 얼마든지 잘못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체험은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흔히 신비주의적 신앙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반 사회적이고 반 도덕적인 모습으로 나중에 이단으로 전락하는 모습을 많이 볼수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신비적 체험들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또 기독교 신앙 안에도 많은 신비주의적 요소들이 존재하지만 기독교는 신비주의는 아닙니다. 그러면 뭐냐 기독교는 이성주의도 아니고 기독교도 신비주의도 아니면 무얼까요? 우리는 복음주의예요, 복음주의. 그 말이 어렵습니까? 다시 말하면 기독교는 예수주의 입니다. 믿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예요. 23절,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에수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에게는 꺼리끼는 것이요,이방인들에게는 뭐에요 미련해 보이는 것이다. 24절에 놀라운 대답을 합니다. 24절, 24절 다 같이 말 합시다.시작, 오직 부르심을 입는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다. 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지혜다, 예수. 우리가 아무리 많은 지혜를 갖고 있다해도 그것이 우리를 구원에 도달시킬 수 없다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고 우리를 인생을 새롭게 할 수 없다면 그 지혜가 무슨 소용 있겠어요.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지혜다. 우리가 수 많은 기적을 말하고 능력을 말하지만 우리를 죄와 사망의 사슬에서 끊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는 이런 능력이 없다면 그 능력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요술에 불과하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지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기쁜 소식이다. 그리스도가 복음이다.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자랑할 것은 누구밖에 없습니까? 예수밖에 없어요.예수만 자랑, 다른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어요. 사람들이 뭐 똑똑하다, 뭐 똑똑하지 못하다, 50보 100보 차이에 불과해요. 하나님 보시기엔 우리는 다 무지한 인생에 불과해요. 능력이 있다, 없다,문벌이 있다, 없다. 다 사람들이 나누는 인간의 방식에 불과합니다. 자, 그래서 그 다음에 보시면 26절 이하에서, 인간의 자랑이 얼마나 허탄한 것인가? 지혜를 중심으로 한 사람들의 자랑인데 그 자랑이 다 허탄한 것인가를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셨다. 마지막 29절이하 30절에 보시면 결론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 밖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 29절 같이 읽겠습니다,시작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 우리의 어떤 지혜도 자랑할만한 것이 못된다. 우리의 자랑의 제목은 하나밖에 없어요. 누구만? 예수만, 예수만 자랑할 것 밖에는 없어요. 30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너희는 하나님께로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참 중요한 말씀 이예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지혜도 주세요. 예수는 우리에게 의로움도 주실 수 가 있어요.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의로움이예요. 예수가 나의 의로움이고 예수가 나의 지혜고, 예수가 나의 거룩함이고,예수가 나의 구속함이고, 그러므로 예수가 생명이고, 예수가 복음이다. 믿으십니까? 예수가 기쁜 소식이다. 마지막 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안에서 자랑하라. 주안에서 자랑하라. 30절 왜 나누어집니까? 허탄한 것에 대한 자랑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것에 대한 자랑이기 때문에 뭐 학벌자랑, 돈자랑, 뭐 지식자랑, 그건 하나님 보시기에는 다 아무것도 아니예요. 우리가 자랑할 제목은 누구 밖에 없습니까? 예수. 우리가 예수님만 자랑 한다면 우리가 나누어질 필요가 없어요. 왜 나누어집니까? 우리가? 네? 내가 살던 고향이 더 좋다고 고향 따라 나누어지고, 좁은 땅덩이에 어디 뭐 가봐야 그게 그거고 그 땅이 그 땅인데, 지식 따라 나누고, 문벌 따라 나누어지고, 그러나 예수 안에는 나누어짐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생명이고, 우리의 능력이고,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십니다. 또 그리스도가 복음이 되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깨어 주셨습니다, 피를 흘리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희생, 그 분의 사랑 때문에 구원 받은 자라면 무엇을 자랑 하겠습니까? 우리가 자랑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왜 나누어 지겠습니까? 예수님에 대한 초점이 멀어질 때 거기서 인간적인 요소들이 강조되고 거기서 나누어짐이 있는데 우리 사이에 나누어짐의 위기가 있다고 생각되면 어디로 돌아와야 합니까? 예수로 돌아와야 되요. 우리가 예수를 바라 보십시다.그 분이 나의 의, 나의 생명, 나의 구원, 우리 예수 안에서 다시 우리 같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형제와 자매일 따름입니다. 잘난 자도 없고, 못난 자도 없고, 잘생겨 봤자 그게 그거고, 네, 썩으면 다 흙이고, 따라서 합시다. 썩으면 흙이다, 쳐다보세요. 옆에 사람, "흙이시네요!" 한마디 해보세요. 뭐 잘 생겼다고 자랑해 봤자 다 그게 그거란 날이에요. 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자랑,우리의 영광의 원인이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만약 이 초점을 갖고 있다면 나누어질 필요가 없어요. 바울은 그것을 강조한 것이예요. 네, 사람들의 지혜를 따라 나누어질 필요가 전혀 없어요. 그리스도만이 내 지혜다.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 되신다. 우리는 바울이 전해준 이 복음의 강조를 붙들고 우리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있을 수는 있어요. 그러나 있을 수 있는 분쟁과 분열의 위기를 넘어서서 성숙한 주안의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세상 사람들이 지식 따라, 문벌 따라, 나누어지고 또, 갈등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믿은 사람들이 나누어진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시선이 예수에게서 멀어질 때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본다면 우리가 더 확실한 눈으로 주님을 바라 볼 수 있다면 주께서 나를 어떻게 사랑 하시고 그리고 내가 어떤 존재 인데 그 분이 나를 받아 주시고 사랑해 주셨는지 그 분의 진노와 그 분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던 나,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고, 안아주시고, 피흘려 죽으시고, 후원해주신, 그 사랑에 빚진 자 라면 우리는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리스도를 높이고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그리스도를 함께 전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우리 안에 있을 수 있는 그런 인간적인 분열과 분쟁의 위기들을 우리가 넘어 설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를 성숙하게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7 어린 아이들이 형제들이 자주 싸우다가 커 가면 조금씩, 조금씩, 성숙한 사람들은 그런 분열의 위기를 넘어섭니다, 중요한 것은 성숙입니다. 성숙은 십자가에 대한 묵상에서 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깊이 묵상할 수록 우리는 자랑 할 것 없는 자로 인정하고 주 앞에 겸손 하게 설 것 입니다. 하나님 오늘 우리가 우리 주면에 있는 형제들을 정말 주님의 심정으로 바라보고 사랑하고 안을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우리에게 큰 가슴을 주시고 또 주의 사랑의 심정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오늘도 귀한 말씀 주시고 말씀으로 우리를 권면하시는 주님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성령의 거룩하신 능력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우리를 싸매 주시고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의 의를 역사해 주시옵소서. 스승 따라, 문벌 따라, 헤어지고, 갈라져서, 이합집산을 하던 고린도사회의 세속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교회 안에서 그렇게 나뉘어졌던 고린도교회를 바라보시며 아파했던 바울 사도의 메시지를 우리가 읽으면서 우린 동일한 바울의 심정과 바울 안에 역사했던 성령의 심정을 느낍니다. 하나님 우리가 주님 안에서 시선이 멀어질 때 우리도 언제든지 형제와 자매사이에 나눔과 벽을 나누는 일들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이러한 사단의 유혹의 도구가 되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 주시옵소서. 주님이 나뉠 수 없는 한 몸 이라면 우리는 한 몸에 속한 지체인 것을 확인하게 도와 주시옵소서. 그리고 주 앞에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인 것을 깨닫고 겸손히 다만 한 분 그리스도를 높이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에 하나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이 하나됨의 뜨거움과 열정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 나가는 우리가 되도록 도와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지난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 고린도전서는 많은 문제를 직면하고 있었던 고린도교회, 고린도교회를 둘러싸고 있었던 고린도라는 사회, 도시가 가지고 있었던 세속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문제들과 더불어 갈등하고 있었던 사회인데 이 고린도 교회가 이 문제를 넘어서서 성숙을 추구하는 바울의 편지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고린도전서 1장10절에서 보면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에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를 권하노니 이 고린도전서는 특별히 권면의 성격을 갖고있는 편지입니다. 문제를 넘어서서 성숙을 추구하도록 권면하는 그런 편지입니다. 그리고 지나간 시간에 이미 말쓰드린 것처럼 고린도교회는 그런 문제를 넘어서서 성숙한 자세로 문제를 극복하는 그런 모본을 보였던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 우리는 이 고린도 교회가 부딪혀 있었던 문제 가운데서 첫 번째 문제인 고린도교인들 안에 있었던 혹은 교회 안에 있었던 분쟁의 문제,분열의 문제 혹은 파벌의 문제에 대해서 같이 한번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 우리는 이 분열의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가 그 원인을 진단해 보고 그 진단에 따르는 처방을 바울이 어떻게 내리고있는가를 같이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이 고린도전서 1장부터 시작해서 4장까지 네가지의 중요한 원인을 바울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뭐냐면 1장에 10절 이하의 부분은 사람들에 대한 소속 교인들 가운데 나는 어떤 사람에게 속해있다, 나는 어떤 사람을 따른다 그런 사람들에 대한 소속감 사람들에 대한 소속이 바로 고린도교회안에 그런 불필요한 분파들을 안고있었던 원인이었던 것을 우리가 지적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우리가 1장 18절부터 사실은 시작됩니다만 주로 2장에 가서 바울은 지혜라는 문제를 다룹니다. 참된 지혜와 거짓된 지혜,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구별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왜 지혜의 문제가 나왔냐면 사람들이 누가 더 똑똑한가 누가 더 지혜로운가에 따라서 편이 갈라진 것이 바로 고린도교회의 분열의 원인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고린도라는 도시는 히랍의 유명한 도시가운데 하나입니다 아테네와 함께 히랍의 중심 2대 도시가운데 한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히랍이라는 이 나라는 우리가 잘 아는 데로 철학을 탄생시킨 나라입니다. 철학이라는 말은 영어로는 필라소피 라고 말합니다. 필라소피라는 말은 본래 히랍어에서 두 개의 단어가 결합된 말입니다. 필로스 라는 단어와 소피아라는 두 개의 단어가 결합된 일종의 합성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필로스 라는 말은 사랑이라는 뜻이죠, 친구들간의 사랑이나 우정적인 사랑을 말할 때 필리아, 필로스라는 단어를 씁니다. 그 다음에 소피아라는 것은 지혜라는 뜻입니다. 지혜 위스톰 지혜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필로소피아 필로소피라는 말은 지혜를 사랑한다, 지식을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아 그러나 이 지혜를 추구하는 철학자들 가운데도 많은 여러 가지 학파들이 혹은 분파들이 히랍의 역사 속에는 존재하고 있었고 신약성경이 씌여지던 바울이 활동하고 있던 그 당시에도 히랍에는 무려 그 철학의 계보 가운데 한50개의 학파들이 중요한 학파만 따져도 약50개의 학파들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스승을 중심으로 해서 유명을 스승을 어떤 사람은 소크라테스학파, 플라톤학파, 이렇게 해서 에피큐로스를 따라 다니는 에피큐리안학파, 스토아를 따라 다니는 스토익학파 이런 여러 가지 학파들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한 사실은 이러한 사회적 경향이 교회 안에도 그대로 들어와 있었다는 사실이에요. 그래서 그들이 신앙을 갖게 되었을 때 그 신앙에 있어 자기들이 좋아하는 그 어떤 지도자를 중심으로 해서 고린도교회 안에도 파벌이 형성되고 있었던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고린도교회는 파벌주의를 극복해야할 중대한 위기 앞에 서 있던 것입니다. 사실은 이 히랍사람 못지않게 파벌을 좋아하는 문화적 역사적 전통을 갖고있는 나라가 우리 한국이기도 합니다. 주로 이조시대 영향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사색당쟁 그래서 한국 이조시대 역사를 읽으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가 아니라 뭐 노론이 소론을 죽이고 남인이 북인을 죽이고 북인은 남인을 죽이고 뭐 이런 사색당쟁의 피흘리는 역사의 전통을 우리도 갖고있습니다. 파벌이 익숙해 지다보니까 파벌을 갖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생각 되어지던 사회 그것이 바로 고린도사회 였고 오늘날의 한국도 그런 영향에서 아직도 자유하지 못하다. 그래서 계속 끊임없이 계속되는 당들의 이합집산의 모습들, 당파싸움의 영향 아직 민주화된 현대 우리들의 사회 속에서도 우리가 그대로 보고있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경향들이 교회 안에도 얼마든지 들어와 있을 수 있다는 고린도교회 안에 있었던 파벌, 몇 개의 파벌을 고린도교회 안에서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자, 이러한 파벌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지혜를 따라서는 안된다. 사람의 지혜 이상의 지혜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지혜다. 이것은 특별히 2장에서 바울사도가 역설하고 있는 그런 내용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를 높이는 사람의 지혜를 높이기 시작한다면 끊임없는 파벌주의를 피할 수가 없다. 이것이 두 번째 진단이고요, 그 다음에 세 번째는 뭐냐면 첫째는 사람을 따라 사람들이 소속하기 때문에 이합집산이고, 둘째로 사람의 지혜를 높이기 때문에 파벌이 생겼고 세 번째는 3장에서 주로 바울이 강조하는 것인데, 사람들의 역할의 상이성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역할의 상이성, 특별히 지도자 되는 사람들의 각각 역할이 다르다. 은사에 따라서 하고있는 역할이 다르다. 롤이 다르다, 이 다르다는 것을 이해해야 되는데, 이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때 왜 저럴까, 저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하고, 비판하고, 거기서 파벌이 생기죠 사람들의 역할의 상이성에 대한 무지 이것이 바로 세 번째로 고린도교회 파벌을 낳은 한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네 번째는 4장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것들 사람들에 대한 판단의 차이점, 사람들에 대한 판단의 차이점, 나는 저 사람을 이렇게 판단한다. 저 사람은 나를 이렇게 판단한다. 판단, 이 판단이 파벌을 낳고 있었던 것을 볼 수 가 있습니다. 이 네 가지의 중요한 원인을 지적합니다. 고린도교회 분열이 왜 오고 있었는가?무엇 때문에 초래 되고 있었는가? 네가지 원인 첫째 뭐예요? 사람들에 대한소속,어떤 사람을 따라가서 소속하는 사람들에 의한 소속, 둘째는? 사람들의 지혜를 따라갔기 때문에, 사람들의 지혜를 높혔기 때문 세 번째는? 사람들의 역할의 상이성을 몰랐기 때문, 네 번째는? 사람들에 대한 판단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에 대한 판단,이것이 바로 고린도교회 파벌들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두 가지만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는 사람에 대한 소속감, 따라서 어떤 사람에게 소속함으로써 그룹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인간은 소속감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딘가 소속되 있어야만 거기서 안정감을 느낍니다. 누군가에게 소속 되어야 하고 어딘가 소속을 해야만 그 소속에서 오는 안정감을 우린 느낄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속할 수 있는 공동체를 찾고 내가 따라갈 수 있는 지도자를 찾습니다. 힘있는 사람을 찾고 지혜로운 사람을 찾고 편안한 사람을 찾고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을 찾습니다. 찾아서 거기에 우리는 소속을 합니다.이 소속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예요. 소속은 필요한 것이예요. 소속에 따라서 자연히 어떤 그룹핑을 생길수가 있어요 어떤 그룹이 만들어질 수 가있어요 자연스런 그룹, 전혀 나쁜 것이 아니예요 그것은 오히려 긍정적 이라고까지 할 수가 있어요. 우리교회가 지역에 따라서 마을목장을 나누기도 하고 지역뿐만 아니라 지역을 넘어서서 생각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이런 목장을 우리가 강조하고 있어요. 목장사역, 영어로 말하면 셀 사역인데 세포사역이죠. 셀, 셀 이라는 것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생존하기 위해서 살아있는 생물체로서 생존하는데 가장 중요한 생명의 기본단위가 바로 이 셀입니다. 이 세포입니다. 우리 몸 안에도 수억개의 세포들이 작은 셀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현미경으로 보면 수없이 많은 셀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 살아있는 세포들은 셀들은 계속해서 성장하고 또 분열합니다. 또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죠. 어느 정도 성장하게 되면 세포분열을 하죠.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네개가 되고 세포가 분열을 합니다. 거기까지는 잘못이 없어요. 자연스러운 그룹핑, 그룹을 형성하고 자연스럽게 그 그룹이 다시 나뉘어지고 이것은 생물체의 살아있는 현상이고 교회는 교회 안에 있는 작은 그룹들 건강한 그룹들의 교제와 성숙을 통해서 또 새로운 그룹들이 생겨남으로써 교회가 건강한 성숙과 성장을 추구할 수가 있는 것 입니다. 문제는 언제부터 생기냐면 부자연스럽게 성장할 때 그 성장이 부자연스러울 때 잘못된 목적으로 성장할 때 우리세포도 그것이 컨트롤 불가능하게 막 성장해서 자기의 영역이 아닌 다른 영역을 파괴하고 공격하기 시작하면 그건 더 이상 건강한 세포가 아닙니다. 그건 병든 세포입니다. 암세포가 됩니다. 그것이, 비나인드로 그래서 수술 하셔야 되고 잘라내야 되는 그러한 위험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는 이 자연스러운 세포가 아니라 이 병든 세포 암세포와 같은 병든 세포의 그룹들이 존재하기 시작합니다. 딱 뭉쳐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또한 다른 것들을 막 주변을 공격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공격적인 셀, 그러니까 서로 모여서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고,서로 권면하고 격려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좋은 교제 안에서 우리가 성숙을 도모한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그런데 하라는 교제는 안하고 모여 앉아서 자꾸만 다른 사람 비판하고 헐뜯고 부정적인 영향을 감염시키고, 다른 사람들을 파괴하고 찔르고 공격하고 그럼 이건 더 이상 건강한 셀이 아닙니다. 병든 세포, 암세포입니다 이것은 잘라내지 않으면 몸 전체를 공동체 전체를 위협할 수 있는 아주 암 적인 요소들이 될 수가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런 암적 위기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고린도교회 안에서 생겨나고 있는 모습 들을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 그래서 어떤 파벌들이 존재했습니까? 우리가 12절을 보시면 크게 한 4개의 그룹들이 이러한 건강하지 못한 불건강한 그룹들이 4개의 그룹으로 나뉘어져 있던 것을 지적합니다. 우리가 12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이는 다름아니라 너희가 다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자라 하는 것이니. 네 파가 생겼는데요 첫째는 무슨 파예요 바울파, 그런데 지금 바울이 이 편지를 쓰고 있어요. 바울도 승인하지 않은 이 바울파, 바울이 좋아한게 아니에요. 나를 따라 다닌다고 해서 좋아한 것이 아니라 바울파도 하나 있었어요. 아마도 어쩌면 이 바울파는 굉장히 확고한 리더십을 좋아하고 확신에 찬 바울의 비젼이라든지 리더십이라든지, 확신을 좋아했던 사람들이 바울을 추종하면서 그들끼리 모여진 하나의 그룹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아볼로에게 속해있는 그룹이 있었어요. 아볼로는 아마 우리가 사도행전에 보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성경에 능한 사람이라고 그랬어요, 성경에 능한 사람 그 아주 훌륭한 성경교사 탁월한 말씀을 잘 가르치는 그런 은사를 가지고 있었던 교사였습니다. 그러니까 아볼로가 가르치는 성경공부에 매료된 사람들이 또 하나의 그룹을 형성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 다음에 어떤 파가 있습니까? 게바파 베드로죠 베드로 베드로 이것은 아마도 게바의 열정 게바의 능력을 좋아했던 사람들, 밤낮 배우기만 하면 뭐하느냐 능력이 있어야지, 이런 사람들은 아마 게바파, 베드로의 능력과 열정을 사랑했던 사람들이 또 하나의 파벌을 형성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재미있는 파는 네번째 파인데 그건 무슨 파입니까?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만 따른다. 굉장히 바람직해 보여요, 그 다음에 문제는 그리스도만 따른다고 자기들끼리만 모였으니까, 이것도 또 하나의 파예요. 이것도 그리스도파예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좋지않은 영향을 주었을 때 그것도 별 수 없는 행동 하나에 파벌로 형성되었던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자, 이러한 파벌로 형성이 되고 그것이 분쟁에 영역 속에 이미 들어와있다, 그것이 분쟁을 일으키고 있다라는 소문을 글로에라는 사람을 통해서 바울이 에베소에서 보고를 받았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이런 분쟁의 현상에 대해서 바울은 이런 질문으로 해결을 시작합니다. 13절에 보면 세 가지의 중요한 질문을 던져요 바울이, 세가지의 아주 중요한 질문을 던져요. 그러나 이 세가지 질문은 모두가 다 한 가지 해답을 겨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분쟁에 대한 해답 처방은 결국 이거예요. 이게 뭐냐 이 세 가지 질문은 공통된 한 가지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를 생각 해 보면서 이 세 가지 질문을 같이 우리 다루어 봅시다. 첫째질문 자, 우리 13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네. 첫째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어져있느냐, 그러니까 예수님을 왜 찢으려고 하느냐 예수님이 나뉘어져 있더냐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해져 있다면 그리스도는 한 분이 아니더냐 그러면 그리스도나 한 분을 중심으로 너희들이 조화와 통일을 이루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더냐 이 말이예요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어졌느냐 우리가 그리스도는 한 몸이시다 그리스도는 절대로 두몸이 아니다.그런데 왜 그리스도의 몸을 찢고 깨뜨릴려고 하느냐 그리스도는 한 몸이시다 이 진리를 바울은 나중에 고린도전서 12장에 들어가면, 고린도전서 12장에 들어가면, 바울이 그 문제를 집중적으로 나중에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한 몸이시다, 한 몸 그리고 우리는 그 한 몸에 속한 지체들이다. 바울이 그 사실을 나중에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아주 중요하게 강조를 합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질문은 어떤 질문입니까? 13절에 나타난 두 번째 질문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더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지가에 못박혔느냐? 아니죠 그런데 왜 바울 따라 다니느냐 바울이 하는 소리에요, 바울이 그러니까 바울이 의식이 분명한 사람이예요. 나를 따라 다닌다고 무조건 좋아 하는 것이 아니예요 나를 따라와도 병적으로 따라오고 그것이 잘못된 결과를 가져온다면 그것을 엄중하게 꾸짖을줄 아는 그런 객관성을 바울은 가지고 있던 지도자였습니다. 훌륭한 지도자지요. 여기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이 너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혔느냐?누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까? 예수님. 예수님이 너희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아니냐 그러면 누구를 따라 가야되요? 예수님 따라 가야지 왜 바울을 따라가느냐 이 말이예요.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예수님, 피 흘리신 예수님, 자신의 생명을 버려주신 그 예수님 이 그리스도의 희생과 사랑을 기억한다면, 왜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지 못하느냐? 그 얘기죠. 자, 세 번째 질문 어떤 질문이예요 너희가 세례를 침례를 받을 때 누구의 이름으로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느냐 바울의 이름으로 우리가 세레를 받을 때 누구의 이름으로 받으셨습니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우릴 위해 죽으셨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에.. 세례, 침례 이 Baptizm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어디 있을까요? 세례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뭐예요? 예? 그리스도와의 연합이예요. 네 맞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이 새 공동체반 제대로 공부 하셨으면 제대로 대답을 할 수 가있습니다. 또 공부를 해도 워낙 잘 잊어버리시는 분은 또 잊어버렸을지 모르지만 정신차리고 공부하면 잊어버리지 않아요.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공부하면, 머리 나쁜 거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머리 나빠도 견고하게 새겨넣으면, 돌 일수록 견고하게 새겨넣으면 절대로 망각하지 않습니다. 로마서 한번 찾아 보세요 6장 로마서 6장에 보시면 로마서 6장 우리가 3절4절에 보시면 침례문제, 세례문제, 이Baptizm의 문제를 바울이 다루면서 제일 강조한 단어가 뭐냐면, 이게 바로 Baptizm의 세례의 침례의 근본사상입니다. 그건 연합이예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이 말이예요 합하여, 연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계속 강조되는 단어가 뭐예요? 연합했다, 합했다. 그리스도에게 내가 연합되는 사건이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자가 되었으며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자가 되었고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의식이 바로 Baptizm이라는 말이죠. 그것이 네, 우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Baptizm을 받았고 내가 그리스도에게 속한자라면 내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으니까 누굴 따라가는 것이 마땅해요?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이 마땅하지요. 그러니까 여기 바울은 세가지 질문을 했지만 해답은 몇 가지 라고 그랬어요? 한 가지다. 이 말이 이해가 되십니까 이제? 네, 바울이 세 가지 질문을 했지만 해답은 하나예요 그래 하나는 뭐냐면 그리스도의 주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주권을 참으로 인식한다면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주님이시다. 그리스도만이 주님이시다. 사람은 우리의 주인이 아니다. 내가 존경할만한 스승을 갖는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내 신앙생활 여정을 통해서 나에게 영향을 준 분 나에게 좋은 가르침을 준 분, 내가 그 분을 귀히 여기고 또 그 분을 사랑한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내가 따라 가야 될 것을 누굴 따라 가야되냐 예수님 따라 가는 거예요. 그는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한 것에 불과해요.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한 것에 불과합니다. 훌륭한 영적 지도자는 초점을 자기에게 맞추지 않는사람, 누구에게 맟추는 사람,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맟추는 사람이 훌륭한 지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영국의 어떤 목사님에게 그런 설교를 들은 일이 있어요. 아마 이분 교회는 뒤에 이렇게 스테인드 글라스가 돼 있고 거기에 예수님이 서있는 모습이 이렇게 조각돼 있었는데 아마 이렇게 목사님이 서시면 강대상에 딱 서면 그게 뒤에가 잘 안보였던 모양이예요. 그래서 한번은 목사님 설교를 하다가 옆으로 이렇게 자리를 비키게 되었는데 앞에 있는 꼬마가 그러더래요 순진한 꼬마가 "목사님이 없어지니까 예수님이 보이네" 그말을 듣고 이 목사님이 크게 깨달았다고 해요. " 아! 내가 예수님을 가릴수도 있구나!" 훌륭한 지도자는 초점을 예수님에게 맟추는 사람,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을 따라가십시오.
어떤 지도자가 우리에게 좋은 가르침을 주었어요.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 사람이 계속 사람들을 붙들고 있어요. 놔 주지않고 여러분이 어떤 영적인 갈망 때문에 특정한 모임에 가서 좋은 영향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을 계속 따라 간다면 이건 잘못된 신앙이에요. 좋은 영향을 받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가 정말 좋은 교사라면 내가 누구를 따라가도록 인도하는 사람 그리스도만을 바라 보고 따라 갈 수 있도록, 네, 그래서 정말 그리스도가 내 신앙의 초점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어떻게 우리는 사람에 대한 소속의 유혹을 넘어서서 그것이 파벌이 되지 않도록, 파벌이 되지않도록, 분쟁이 되지 않도록 예방할 수가 있을까? 아니 이미 우리 안에 시작되는 어떤 분쟁의 위기를 극복할 수가 있을까요? 그 대답은 간단해요. 누굴 바라보면 돼요?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이 주님이시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10절을 다시 한번 읽겠어요. 10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10절 다같이 시작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여기10절에 너희에게 권하노니 어떻게 권한다고 했어요? 형제들아 내가 누구 이름으로 권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저는 여기 바울이 의도적으로 주님이라는 단어를 강조 했다고 생각해요. 우리 주 우리의 주인,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권하노니 너희가 같은 마음을 가져라. 어떻게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나, 같은 마음을 합 합시다 그래서 되는 게 아니에요. 초점을 어디다 두는데? 예수님, 예수님 바라보고 예수님 쳐다보면 우린 그리스도 이름으로 다시 한번 연합될 줄로 믿습니다. 네 끊임없이 우리는 사람에 대한 영향 때문에 파벌을 만들 수 있는 위험성이 있어요. 저는 교파도 그런 의미에서 위험 하다고 생각해요.저는 언제나 교파 라는 것은 필요악 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파는 필요하긴 한데 필요악이에요. 그럼 왜 없애지 못하느냐 다. 없애거나 만들면 그게 또 하나의 파가 되요. 그러니까 이제는 더 만들려고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이미 많이 있어요. 그리고 교파 안에 소속 돼 있어도 교파를 넘어 설 줄 아는 그런 자유가 필요 하다고 저는 생각해요. 이런 유명한 얘기가 있습니다. 감리교 운동의 창설자인 웨슬리, 요한 웨슬리 선생이 기도 하다가 잠이 들었어요. 꿈을 꾸었어요. 그런데 천당 문에 자기가 들어가게 되었어요. 천국에 자기가 들어가는 꿈을 꾸게 되었는데 천국문을 지키고 있는 천사에게 들어가면서 궁금해서 이런 질문을 던졌데요. "이천국에는 나를 따라오는, 나를 따라 오고있는 메도디스트, 감리교도들이 얼마나 많이 들어와 있습니까? 그동안, 천국에 얼마나 많이 왔습니까?" 그러니까 천사가 잠깐 기다리라고, 뭘 한참 뒤져보더니 하는 소리가 " 웨슬리님! 참 죄송합니다. 천국에는 감리교인이 한분도 안 와 계시네요" 깜짝 놀래가지고 "아! 내가 이거 뭘 잘못 믿은 모양이다" 그러면 칼빈주의를 강조한 아마 칼비니스트들이 옳았던 모양이다 "그러면 천사님! 칼비니즘 주의자들 장로교인들은 몇 사람이나 와 있습니까?" 천사가 한참 있다가 대답하기를 "장로 교인들은 한 사람도 와 있지 않네요!" 더 놀래가지고 웨슬레가 "그러면 천사님 제가 틀렸군요, 종교개혁이 틀렸군요. 천국에는 다 카톨릭 교인들이 와 있습니까?" 천사가 "이상하네요, 카톨릭 교인들은 한 사람도 와 있지 않습니다." 더 놀래 가지고 "아! 그러면 뭐 웨슬리 이런거 안 따라 다니고 복음주의적 성서적 신앙을 강조하는 침례교인들이 다 와 있군요" 천사가 "죄송하지만 Baptist 도 침례교인도 한 사람도 와 있지 않네요" "그럼 누가 와 있단 말입니까? 도대체 천국은 텅 비어 있습니까?" 천사가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만이 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에게 속한 자들만이" 그렇죠 그리스도가 주인 되신 것을 믿으십니까? 네 그리스도가 주인이라면 우리의 모든 신안 고백의 영역에 삶의 영역에서 그분이 정말 주인이 되셔야 되요. 그래 우리는 사소한 인간적 차이를 극복할 수가 있는 것으로 믿습니다.
자, 고린도교회 분쟁, 파벌은 둘째로 사람의 지혜를 높이는 데서 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지혜, 이미 말씀 드린 대로 고린도는 철학을 나온 히랍의 도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 스승을 따라서 많은 파벌들이 이합집산이 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는 특별히 뭐 물론 이제 바울이 복음을 전한 후에 히랍 사람들이 예수를 많이 믿었겠죠. 이방 사람들이 그러나 상당히 그 당시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도 고린도에 많이 와 있었어요. 유대인들도, 그래서 고린도교회는 히랍인과 유대인,이방인과 유대인으로 형성 되어있던 교회입니다. 히랍 사람들은 자기들의 문화적 배경 때문에 자연히 신앙을 추구해도 자기들의 히랍적인 방식으로 신앙을 추구했을 것입니다. 히랍적인 방식이란 뭐냐면 토의하고 토론해서 무엇을 깨달아 아는 이성적인 추구, 그러나 유대인들은 좀 달라요 유대인들은 같은 신앙을 추구해도 유대인들은 어떤 증거를 구하고 체험을 구하는 체험 중심적인 그런 신앙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유대인들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우리가 성경을 보면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뭘 구합니까? 표적을 달라고 그래요 사인을 달라고 봐야 믿을 수 있다. 히랍 사람들은 뭐냐면 이해가 되야 믿을 수 있다 내가, 내가 이해를 해야만 믿을 수가 있다. 내가 이해한다 그러므로 나는 믿는다 이게 히랍 사람들의 신앙추구의 방식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믿겠습니다. 뭘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믿겠습니다. 자, 이러한 것을 중심으로 해서 여러 가지 신앙의 스타일에 따라서 여러 가지 파벌들이 생긴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추구에 대해서 바울은 어떤 대답을 하고있습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가 사람의 지혜를 따라 이루어지는 이합집산의 파벌주의를 극복 하려면 하나님의 지혜로 돌아와야 된다. 사람의 지혜가 아라 하나님의 지혜다. 바울의 강조점 이에요 하나님의 지혜.하나님의 지혜는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지혜는 십자가 입니다. 복음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분이 하나님의 지혜다. 우리 한 번 읽어 보시겠습니다. 18절 다 같이 읽겠습니다 18절 시작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의 도.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구원,우리의 생명이 되셨다.이게 아마 히랍 사람들의 그 마인드 생각으로 볼 때는 아주 미련한 얘기일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예수라 존재가 죽고 사는 것이 나에게 구원인가 아마 잘 깨달아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을 바울도 알았어요. 그래서 21절에 보면 뭐라고 말합니까? 21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하나님의 지혜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여기 전도를 뭐라고 그랬습니까? 미련한 것이다 그랬어요 미련한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하셨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이렇게 말하는 거 어떻게 생각면 굉장히 미련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방법으로 사람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 당시에 존재하던 신앙추구의 대표적인 두 개의 경향 양식에 대해서 바울은 이렇게 증거 합니다. 22절 다 같이 읽어요 시작,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 찾으나. 저는 지금도 신앙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방식은 크게 이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해요. 하나는 유대인식,히브리식,하나는 헬라식, 이 헬라식은 뭐냐면 자기 지혜 리즈닝, 이성적인 토론, 추구를 통해서 신앙을 발견하고자 하는것, 이성주의적인 접근방법, 또 하나는 뭐냐면 보여주십시오 그럼 나는 믿겠습니다, 느끼면 내가 믿겠습니다, 신비주의적 신앙추구를 하는 사람들, 우리 가운데도 보면 체질적으로 둘 중의 하나인 사람들이 많아요. 체질적으로 똑같지 않아요. 어떤 사람은 뭐냐면 화끈하게 뭐가 느껴져야 믿는거 같은 사람들이 있고, 어떤 사람은 잘 이해가 되야 그것을 통해서 신앙을 발견할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삶이 있습니다. 어느것이 옳을까요? 이성주의 일까요? 아니면 신비주의 일까요? 어느것이 옳을까요? 바울의 대답은 뭡니까?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그러나 우리는 뭐예요 다음절 23절 다 같이 읽습니다. 시작,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 에게는 꺼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네, 기독교는 이성주의 입니까? 아닙니다. 기독교는 이성에 근거해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종교가 아니에요. 기독교는 이성을 반대하지는 않아요. 기독교는 반이성주의는 아니지만 기독교는 인간의 이성으로 모든 것을 깨달아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인간의 좁은 이성으로서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기독교는 이성주의가 아니에요, 기독교는 신비주의도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 안에는 신비주의적, 체험의 풍성함이 있습니다.그 말이 기독교가 신비주의라는 말이 아니예요. 체험은 얼마든지 잘못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체험은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흔히 신비주의적 신앙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반 사회적이고 반 도덕적인 모습으로 나중에 이단으로 전락하는 모습을 많이 볼수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신비적 체험들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또 기독교 신앙 안에도 많은 신비주의적 요소들이 존재하지만 기독교는 신비주의는 아닙니다. 그러면 뭐냐 기독교는 이성주의도 아니고 기독교도 신비주의도 아니면 무얼까요? 우리는 복음주의예요, 복음주의. 그 말이 어렵습니까? 다시 말하면 기독교는 예수주의 입니다. 믿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예요. 23절,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에수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에게는 꺼리끼는 것이요,이방인들에게는 뭐에요 미련해 보이는 것이다. 24절에 놀라운 대답을 합니다. 24절, 24절 다 같이 말 합시다.시작, 오직 부르심을 입는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다. 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지혜다, 예수. 우리가 아무리 많은 지혜를 갖고 있다해도 그것이 우리를 구원에 도달시킬 수 없다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고 우리를 인생을 새롭게 할 수 없다면 그 지혜가 무슨 소용 있겠어요.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지혜다. 우리가 수 많은 기적을 말하고 능력을 말하지만 우리를 죄와 사망의 사슬에서 끊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는 이런 능력이 없다면 그 능력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요술에 불과하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지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기쁜 소식이다. 그리스도가 복음이다.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자랑할 것은 누구밖에 없습니까? 예수밖에 없어요.예수만 자랑, 다른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어요. 사람들이 뭐 똑똑하다, 뭐 똑똑하지 못하다, 50보 100보 차이에 불과해요. 하나님 보시기엔 우리는 다 무지한 인생에 불과해요. 능력이 있다, 없다,문벌이 있다, 없다. 다 사람들이 나누는 인간의 방식에 불과합니다. 자, 그래서 그 다음에 보시면 26절 이하에서, 인간의 자랑이 얼마나 허탄한 것인가? 지혜를 중심으로 한 사람들의 자랑인데 그 자랑이 다 허탄한 것인가를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셨다. 마지막 29절이하 30절에 보시면 결론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 밖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 29절 같이 읽겠습니다,시작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 우리의 어떤 지혜도 자랑할만한 것이 못된다. 우리의 자랑의 제목은 하나밖에 없어요. 누구만? 예수만, 예수만 자랑할 것 밖에는 없어요. 30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너희는 하나님께로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참 중요한 말씀 이예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지혜도 주세요. 예수는 우리에게 의로움도 주실 수 가 있어요.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의로움이예요. 예수가 나의 의로움이고 예수가 나의 지혜고, 예수가 나의 거룩함이고,예수가 나의 구속함이고, 그러므로 예수가 생명이고, 예수가 복음이다. 믿으십니까? 예수가 기쁜 소식이다. 마지막 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안에서 자랑하라. 주안에서 자랑하라. 30절 왜 나누어집니까? 허탄한 것에 대한 자랑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것에 대한 자랑이기 때문에 뭐 학벌자랑, 돈자랑, 뭐 지식자랑, 그건 하나님 보시기에는 다 아무것도 아니예요. 우리가 자랑할 제목은 누구 밖에 없습니까? 예수. 우리가 예수님만 자랑 한다면 우리가 나누어질 필요가 없어요. 왜 나누어집니까? 우리가? 네? 내가 살던 고향이 더 좋다고 고향 따라 나누어지고, 좁은 땅덩이에 어디 뭐 가봐야 그게 그거고 그 땅이 그 땅인데, 지식 따라 나누고, 문벌 따라 나누어지고, 그러나 예수 안에는 나누어짐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생명이고, 우리의 능력이고,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십니다. 또 그리스도가 복음이 되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깨어 주셨습니다, 피를 흘리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희생, 그 분의 사랑 때문에 구원 받은 자라면 무엇을 자랑 하겠습니까? 우리가 자랑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왜 나누어 지겠습니까? 예수님에 대한 초점이 멀어질 때 거기서 인간적인 요소들이 강조되고 거기서 나누어짐이 있는데 우리 사이에 나누어짐의 위기가 있다고 생각되면 어디로 돌아와야 합니까? 예수로 돌아와야 되요. 우리가 예수를 바라 보십시다.그 분이 나의 의, 나의 생명, 나의 구원, 우리 예수 안에서 다시 우리 같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형제와 자매일 따름입니다. 잘난 자도 없고, 못난 자도 없고, 잘생겨 봤자 그게 그거고, 네, 썩으면 다 흙이고, 따라서 합시다. 썩으면 흙이다, 쳐다보세요. 옆에 사람, "흙이시네요!" 한마디 해보세요. 뭐 잘 생겼다고 자랑해 봤자 다 그게 그거란 날이에요. 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자랑,우리의 영광의 원인이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만약 이 초점을 갖고 있다면 나누어질 필요가 없어요. 바울은 그것을 강조한 것이예요. 네, 사람들의 지혜를 따라 나누어질 필요가 전혀 없어요. 그리스도만이 내 지혜다.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 되신다. 우리는 바울이 전해준 이 복음의 강조를 붙들고 우리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있을 수는 있어요. 그러나 있을 수 있는 분쟁과 분열의 위기를 넘어서서 성숙한 주안의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세상 사람들이 지식 따라, 문벌 따라, 나누어지고 또, 갈등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믿은 사람들이 나누어진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시선이 예수에게서 멀어질 때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본다면 우리가 더 확실한 눈으로 주님을 바라 볼 수 있다면 주께서 나를 어떻게 사랑 하시고 그리고 내가 어떤 존재 인데 그 분이 나를 받아 주시고 사랑해 주셨는지 그 분의 진노와 그 분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던 나,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고, 안아주시고, 피흘려 죽으시고, 후원해주신, 그 사랑에 빚진 자 라면 우리는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리스도를 높이고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그리스도를 함께 전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우리 안에 있을 수 있는 그런 인간적인 분열과 분쟁의 위기들을 우리가 넘어 설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를 성숙하게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7 어린 아이들이 형제들이 자주 싸우다가 커 가면 조금씩, 조금씩, 성숙한 사람들은 그런 분열의 위기를 넘어섭니다, 중요한 것은 성숙입니다. 성숙은 십자가에 대한 묵상에서 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깊이 묵상할 수록 우리는 자랑 할 것 없는 자로 인정하고 주 앞에 겸손 하게 설 것 입니다. 하나님 오늘 우리가 우리 주면에 있는 형제들을 정말 주님의 심정으로 바라보고 사랑하고 안을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우리에게 큰 가슴을 주시고 또 주의 사랑의 심정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오늘도 귀한 말씀 주시고 말씀으로 우리를 권면하시는 주님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성령의 거룩하신 능력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우리를 싸매 주시고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의 의를 역사해 주시옵소서. 스승 따라, 문벌 따라, 헤어지고, 갈라져서, 이합집산을 하던 고린도사회의 세속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교회 안에서 그렇게 나뉘어졌던 고린도교회를 바라보시며 아파했던 바울 사도의 메시지를 우리가 읽으면서 우린 동일한 바울의 심정과 바울 안에 역사했던 성령의 심정을 느낍니다. 하나님 우리가 주님 안에서 시선이 멀어질 때 우리도 언제든지 형제와 자매사이에 나눔과 벽을 나누는 일들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이러한 사단의 유혹의 도구가 되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 주시옵소서. 주님이 나뉠 수 없는 한 몸 이라면 우리는 한 몸에 속한 지체인 것을 확인하게 도와 주시옵소서. 그리고 주 앞에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인 것을 깨닫고 겸손히 다만 한 분 그리스도를 높이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에 하나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이 하나됨의 뜨거움과 열정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 나가는 우리가 되도록 도와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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